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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예술·스포츠·취미/무 용/세계의 무용/현대의 발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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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발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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現代-ballet

현대의 발레는 20세기의 초두에 개막했다. 그 주류(主流)는 모던 발레이다. 더구나 출발점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고전 발레의 왕국 러시아에서였다.

러시아 발레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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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 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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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let革新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의 시초에 걸쳐 서구(西歐)의 발레계(界)가 극도로 부진했음에 비해 러시아만이 화려하게 고전발레의 왕국을 이룩한 것은 프티파나 체케티 등에 의해 우수한 무용수(舞踊手)들이 배출되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것이 절정에 이르자 그 반동으로서 오랜 전통과 형식에 불만이나 반발을 느끼는 젊은 발레인의 층이 대두하기 시작한 때문이기도 하다.

그 주요한 인물로는 디아길레프와 포킨이 있다. 그리고 이들의 원동력이 된 사람이 무용의 혁신자 이사도라 덩컨이다. 덩컨은 모던댄스의 항목에서 상술하거나와 이 모던 댄스의 창시자 덩컨이 발레의 왕국 러시아를 처음으로 방문한 것은 1905년이었다. 덩컨의 혁신적인 주장을 듣고 그 무용을 직접 본 러시아의 소장(小壯) 무용가들은 그녀에게서 깊은 감명과 격렬한 충동을 받았다. 그것은 그들의 고전 발레에 대한 의문을 일거에 해결하고 탈피(脫皮)로의 방향으로 강력한 암시를 주었던 것이다.

그 가운데의 한 사람인 포킨은 그때까지 이미 발레의 전통적인 법칙에 대한 저항을 나타내는 몇몇 작품을 시도하여 발레의 메카인 마린스키 극장에서 혁신의 기운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한 그는 덩컨의 사상과 실험에 "자기가 추구했던 무용표현의 방향과 무용에서의 단순함·자연스러움을 거기서 발견했다"고 하여 크게 기대하는 바가 있었다. 동시에 발레의 위대한 보호자인 디아길레프도 역시 발레의 혁신에 더욱 자신을 가졌던 것이다.

디아길레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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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ge Diaghilev(1872-1929)

그 자신은 무용가가 아니라 예술을 사랑하는 러시아의 귀족이었다. 1899년에 <예술세계(Mir Iskusstva)>라는 예술 평론지를 창간하여 자신도 주필이 되어 평론활동을 했으며, 이어 마린스키 극장의 프로듀서가 되기를 원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겨우 그 극장의 연감 편집에 종사하는 등의 불우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한 그가 일약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친 것은 1906년에 파리에서 러시아 미술전을 연 뒤부터였다. 그 이듬해에는 파리의 오페라 극장에서 러시아 음악의 연주회를 개최하고 무소르크스키의 음악과 샬리아핀의 노래를 소개하였으며 또한 1908년에는 무소르그스키의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를 공연했다.

이리하여 러시아 예술의 서구 소재에 자신을 얻은 그는 다음으로 발레를 계획했다. 이 발레야말로 근대 발레 사상에 찬란한 공적을 남긴 발레 뤼스(Diaghilev Ballet Russe:러시아 발레단)이다.

러시아 발레단의 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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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sia ballet團-結成

디아길레프가 러시아 발레의 파리 진출에 더욱 힘을 기울일 수 있었던 것은 그 무렵 마린스키 극장에서 불세출의 무용가라고 했던 안나 파블로바(Anna Pavlova, 1882-1931)가 상대역인 아돌프 볼름(Adolph Bolm-1951)과 북구 공연에서 대성공을 거둔 것이 그 동기가 되었다. 동시에 파리의 흥행사 아스트 뤼크를 통해 러시아의 명무용수를 파리에 소개하기 위해 10만프랑을 보증했음이 직접적인 원인이다.

그래서 디아길레프는 본국인 러시아에서 몽상조차 할 수 없었던 새로운 발레 예술을 기도했다. 이때문에 그는 무용수뿐만 아니라 음악이나 미술 등에 모든 재능을 동원했다. 그가 페테르스부르크와 모스크바에서 계약한 무용수만 해도 남녀 합쳐서 55명이나 되었다. 그 가운데에는 안나 파블로바를 비롯하여 타마라 카르사비나(Tamara Karsavina, 1885-) 등 제1급의 무희에 포킨(Michel Fokine, 1880-1942), 니진스키(Vaslav Nijinsky 1890-1950), 볼름(1884-1951), 모르드킨(Mikhail Mordkin, 1881-1944) 등의 탁월한 남성 무용수가 포함되고 민간의 것으로는 공전(空前)의 대발레단을 조직했던 것이다.

또한 이 장거에 첼레푸닌, 보로딘, 차이코프스키, 코르사코프 등의 일류 음악가가 작곡으로 협력하고 브느아, 바크스트, 레디히 등의 뛰어난 미술가들도 참여했다.

이리하여 디아길레프가 이끄는 발레 뤼스는 러시아 예술계에 총력을 기울여 1909년 5월 19일부터 6월에 걸쳐 파리의 샤틀레 극장에서 제1회 창립공연을 가졌으며 그 고도의 청신한 발레예술로 파리 사람을 놀라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근대 발레의 여명이기도 했다.

러시아 발레단의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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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sia ballet團-意義

그러나 디아길레프는 발레만으로는 불안하여 그 제1회 공연에는 <라 실피드> <클레오파트라> <향연> <파비용 다르미드> <프린스 이고르> 등 다섯 발레 외에 글린카의 오페라 <루슬란과 류드미라>의 제1막과 단축시킨 림스키=코르사코프의 <푸스코프의 딸>도 상연했다. 그런데 이 다섯 발레 작품은 <향연>을 제외한 4작품이 모두 포킨의 안무였다. 포킨은 그것으로 일약 안무사로서의 명성을 서구에 떨쳤다.

특히 <프린스 이고르>의 타타르인의 춤은 볼름을 중심으로 하는 남성 무용수의 처절할 정도의 다이내믹한 군무(郡舞)로서 파리인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장 콕토는 "한 청년을 파멸시킬 정도의 경이와 감격"이라고 고백했으며 마르셀 프레보는 "오랜 실위(失位) 뒤에 무용은 다시금 파리에 군림할 것이다"라고 말했을 정도이다.

이 디아길레프의 발레 뤼스(Diaghilev Ballet Russe)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그것으로써 모던 발레가 출발했다는 것과 이 단체가 디아길레프 개인에 의해 유지·경영되었다는 점이라 하겠다. 그때까지의 발레는 모두 국가라든가 왕실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러한 전통이 깨어진 것이다. 더구나 모든 예술의 선구적인 역할을 다하고, 발레뿐만 아니라 근대예술의 개화에 앞장섰으므로 발레 뤼스가 활약했던 1909년부터 29년까지의 20년을 '디아길레프 시대'라고 불렀다.

그는 또한 종합예술로서의 발레 지위를 높이고 스트라빈스키, 라벨, 프로코피예프, 플랑크, 오리크 등의 일류 음악가나 앞서 말한 브느아나 바크스트 외에 피카소, 마티스, 드랭, 로랑생, 브라크, 위트릴로, 루오, 키리코 등 일류 미술가도 동원하여 발레에 참여하도록 했으며 그들의 창의가 넘쳐 흐르는 예술로 모던 발레의 개화를 장식했다.

발레 뤼스의 초기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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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let Russe-初期作品

발레 뤼스의 초기 작품은 대강 3기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제1기는 1909년의 창립부터 <봄의 제전>이 상연된 1913년까지를 꼽는다. 이 기간은 모든 점에서 극히 러시아적이라는 것이 특징이다.

샤틀레 극장(Chatelet劇場)에서의 제1회 공연을 성공리에 마친 발레 뤼스는 이듬해인 1910년에 파리 오페라 극장에 진출했다. 그때 발표된 것이 스트라빈스키(1882-1971)의 <불새>이다. 이것은 그가 발레 뤼스를 위해 작곡한 발레 음악의 제1작인 동시에 이것이야말로 디아길레프가 이상(理想)으로 삼았던 창작 발레의 최초의 작품이기도 했다. 주연자는 카르사비나와 볼름이다. 바크스트의 구상으로 코르사코프의 <셰에라자드>를 포킨이 상연한 것도 이 시즌이었다.

포킨은 이어 1911년에도 발레 뤼스를 위해 스트라빈스키의 작곡으로 된 <페트루시카>와 로맨틱한 <장미의 정(精)>을 발표하여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특히 러시아의 민화(民話)에서 취재하여, 사육제 밤의 인형연극에 나오는 무희와 어릿광대와 무어인(人)의 인형이 엮는 삼각관계의 연애를 그린 <페트루시카>는 참신한 음악과 니진스키, 카르사비나, 오를로프의 트리오로 이루어진 완벽한 연기로서, 획기적인 명작이 되었다.

니진스키는 발레의 명수로서 제1회 공연의 <파비용 다르미드>에서 그 묘기를 보였으며 제2회의 <셰에라자드>에서는 금(金)노예를 추어 절찬을 받았고 동시에 상연된 <사육제(謝肉祭)>의 어릿광대 역에서도 잊을 수 없는 인상을 남겼을 뿐 아니라 <장미의 정(精)>에서는 그 신기(神技)로 관객을 매혹시켰다. 그리고 1912년의 시즌부터는 안무사로도 데뷔, 그 모더니즘은 모던 발레의 방향에 새로운 노선을 개척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의 제1작은 드뷔시의 음악을 무용화한 <목신(牧神)의 오후>였다. 니진스키는 이 작품에서 나체가 되고 맨발로 추어, 도약(跳躍)의 명수로 이름을 떨쳤던 그가 이 작품에서는 옆을 향한 평행적(平行的)인 움직임으로 일관하는, 발레사상에 일찍이 없었던 신기축(神機軸)을 세웠다.

또한 1913년에는 새로운 문을 연 샹젤리제 극장에서 공연이 열려 퇴단(退團)한 포킨의 뒤를 이어 니진스키가 새 작품 두 개를 안무했다. 그 가운데의 하나가 바로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이다.

러시아 선사시대의 원시적이며 야만스런 인간성의 표현이 문제가 되어, 그 상연에 즈음해서는 관객으로부터 격심한 야유와 반대시위를 받았을 정도이다. 또 하나는 드뷔시의 작품에 바크스트가 미술을 담당한 <유희>로서, 스포츠가 발레에 채택된 최초의 작품이다.

발레 뤼스의 제2기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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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let Russe-第二期作品그것을 마지막으로 니진스키도 역시 발레 뤼스에서 물러났다. 그 대신 디아길레프는 포킨을 다시 불러들이고 또한 모스크바의 볼쇼이 발레학교에서 새로 레오니드 마신(Leonoide Massine, 1896-1979)을 맞아 진영을 재편성했다. 그리고 이 마신이 바로 발레 뤼스 제2기의 화려한 기수가 되었다.

그러나 1914년의 시즌은 모두 포킨의 작품으로 개막되었다. 그 가운데에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특별히 작곡한 <요제프 이야기>나 오페라 발레 형식에 의한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금계(金鷄)> 등이 있으며 <요제프 이야기>에서는 마신이 무용수로서 데뷔하고 <금계>에서는 새로운 형식과 곤차로바의 기발한 무대장치로 관객을 놀라게 했다.

그런데 그 해 여름에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발레 뤼스는 공연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이 무렵 디아길레프의 어려운 처지를 구한 것이 곧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가극장으로부터의 권유였다. 그는 이때의 미국공연으로 소생했던 것이다.

그 공연이 있은 뒤인 1917년에 마신은 <기분좋은 여자들>과 <팔라드>의 두 작품을 발표했다. 모두가 서구적 색채를 지닌 작품으로서, 특히 <팔라드>는 장 콕토의 대본에 에릭 사티의 음악, 그리고 의상과 장치는 피카소가 담당하여 불협화음의 울림과 함께 그 기발함으로 관객을 아연실색케 한 작품이었다.

마신은 또한 1917년에 리아도프의 작곡, 라리오노프의 장치로 <러시아 이야기>, 1918년에는 포레, 라벨, 샤브리에의 합동 작곡으로 <아란제스의 화원>, 1919년에는 로시니가 작곡한 <기묘한 가게>, 다시 그 해에 팔랴의 작곡에 피카소가 장치를 맡은 <삼각모자>와 차이코프스키의 <말(馬)과 왕자>, 1920년에는 스트라빈스키의 오페라 발레 <퓔시넬라>와 <꾀꼬리의 노래>를 발표한 뒤 한동안 퇴단(退團)했다.

발레 뤼스의 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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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let Russe-解散

발레 뤼스는 예술면에서 화려한 공적을 수립했으나 그 경영은 순조롭지 못했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어려운 고비에 선 디아길레프는 1921년의 제3기 초년도(初年度)에 런던의 알함브라 극장에서 차이코프스키의 <잠자는 숲속의 미녀>를 호화로운 스펙터클로서 장기공연했으나 흥행의 실패로 중도에서 공연을 중지한 일도 있었다. 그래도 불굴의 디아길레프는 마신의 후임으로 니진스키의 누이동생 브로니슬라바 니진스카(Bronislava Nijinska, 1891-1972)를 기용해 1922년에는 스트라빈스키의 <여우>를 발표했으며 1923년에는 제2의 니진스카로 불렸던 세르지 리파르(Serge Lifar, 1905-?)를 입단시켰다.

그리고 그 해의 신작으로서 스트라빈스키가 작곡한 <결혼>을 니진스카의 안무로 발표했다.

이 제3기의 주요한 작품을 열거하면 1924년에 플랑크 작곡의 <암사슴>, 오리크 작곡의 <성가신 자>, 미요 작곡의 <푸른 기차> 등을 모두 니진스카의 안무로 상연, 특히 <푸른 기차>는 콕토의 대본과 신인 무용수 안톤 돌린(Anton Dolin, 1904-?)으로 주목을 끌었다.

1925년에는 마신의 복귀와 신인 발란친(George Balanchine, 1904-?)의 등용으로 다시금 화제가 되었으며, 마신의 <선원(船員)>과 <제필과 프로라>, 발란친이 <바라보> <파스토랄>을 발표, <선원>으로 리파르가 각광을 받았다.

다음해인 1926년에는 발란친이 <네프튠의 승리>와 그의 새로운 안무로 된 <꾀꼬리>, 그리고 니진스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상연하고 후자에서는 알렉산드라 다닐로바(Alexandra Dan­ilova, 1904-?)가 처음으로 중요한 파트를 맡아 추었다. 이듬해인 1927년에는 발란친이 안무한 구성파 발레 <암코양이>와 마신의 메카닉 발레 <강철의 걸음걸이>를 발표, 또한 1928년에는 나바코프 작곡의 <오오드>를 마신이, 스트라빈스키 작곡의 <아폴로>를 발란친이 안무하여 상연했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해를 맞이하였다.

즉, 1929년에 발란친이 프로코피에프 작곡의 <탕아(蕩兒)>와 리에티 작곡의 <무도회>, 그리고 리파르의 처녀작 <여우>의 새 안무를 발표했으며 이것을 마지막으로 주재자인 디아길레프는 당뇨병이 악화되어 8월 19일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디아길레프 없이는 발레 뤼스가 존재하지 못한다. 이리하여 20년동안에 걸친 발레의 찬란한 역사는 끝나고 발레 뤼스는 해산했던 것이다.

발레 뤼스의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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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let Russe-影響

발레 뤼스의 첫째 공적은 모던 발레의 확립이었다. 그 탄생을 계기로 하여 발레계의 양상은 일변하고 세상은 모던 발레의 시대가 되었다. 그리고 제2의 공적은 발레를 종합예술로서 그 지위를 높였다는 점에 있다. 제3은 뛰어난 안무사나 무용수를 배출시켰으며 발레의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큰 공적은 발레를 세계적으로 보급시키고 세계 각국에서 발레 예술의 융성을 가져오는 원동력으로서의 큰 역할을 다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디아길레프의 발레 뤼스 자체가 1909년에 파리에서 창립된 이후 파리를 중심으로 프랑스에서는 몬테카를로에서도 공연을 하고 런던, 로마, 베를린, 빈, 부다페스트, 마드리드 등에서도 공연을 가졌으며, 또한 멀리 미국이나 남미까지 나아가 발레 예술의 정화(精華)를 보이고 그것이 세계 각지에 발레 발흥의 기운을 급격하게 높이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또한 발레 뤼스의 출신자나 그 해산에 따르는 안무사 및 무용수가 각지에 분산, 정착하여 발레의 지도를 하고 그 개발에 큰 공헌을 했다는 점도 간과할 수는 없다.

몬테카를로 발레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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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let Russe de Monte Carlo

디아길레프의 죽음으로 해산한 발레 뤼스의 뒤를 이은 것은 드 바질 대령(Col. Wassily de Basil)에 의해서 1932년에 조직된 발레 뤼스 드 몬테카를로(몬테카를로 러시아 발레단)이다. 드 바질 대령은 발레의 단순한 애호자에 불과했으나 디아길레프의 생존중에 모나코 왕국이 그에게 경제적 원조를 준 관계도 있고 해서 몬테카를로의 오페라 극장 지배인 르네 블룸의 협력으로 결성되었다.

이 몬테카를로 발레 뤼스는 안무사에 마신이나 발란친, 무용수에 다닐로바나 그 밖의 많은 발레 뤼스 출신자를 규합하여 조직되었으며 그 후계자로서 런던이나 미국에도 원정, 한때는 큰 인기를 획득하기도 했다.

교향곡 발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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交響曲 Ballet

특히 마신이 시도한 교향곡 발레(심포닉 발레)는 발레에 새로운 장르를 수립하여 그 보급화에 크게 기여했다.

교향곡 발레라는 것은 연주회용의 교향곡을 발레화한 것으로, 예컨대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제5번에 의한 <전조(前兆)>(1933)가 그것이다. 이는 마신의 교향곡 발레의 제1작으로, 그는 이것을 인간의 운명과 투쟁으로서 묘사했다.

이어 그는 브람스의 교향곡 제4번에 의한 <코레아르티움>(1933)과 스토리를 완전히 배제한 추상적 발레로서 베를리오즈의 동명(同名) 교향곡에 의한 <환상 교향곡>(1936)을 발표했다.

몬테카를로 발레단의 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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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te Carlo Ballet團-分裂그러나 이 몬테카를로 발레 뤼스는 1936년에 둘로 갈라지고 말았다. 하나는 드 바질 대령이 이끄는 드 바질 대령의 발레 뤼스(Les Ballets Russes de Col. W.de Basil)라고 개칭했으며, 또 하나는 블룸에 의해 결성된 몬테카를로 발레단(Ballet de Monte Carlo)으로, 전자는 마신, 후자는 포킨이 안무를 담당했으나 이 두 발레단은 그 후 개칭을 거듭하여 판별하기 어려운 상태가 되고, 후자는 마침내 1938년에 이르러 해산하고 말았다.

그리고 드 바질 대령의 발레단도 그 후 차차 약체화되면서도 존속, 바질 대령이 죽은 후는 그 뒤를 이어받은 몬테카를로 발레단이 현재까지 그 이름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최초의 몬테카를로 발레 뤼스나 그 후 분열된 두 발레단이나 모두 구미 각지를 순회공연하여 발레의 보급에 공헌했으며 뛰어난 무용수를 배출시킨 공적은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발레 수에드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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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let Suedois

이보다 앞서 디아길레프의 발레 뤼스가 활약했던 후기에 그것과 대항해서 더욱 참신한 발레를 상연하여 파리에서 화제가 된 것에는 발레 수에드와(스웨덴 발레)가 있다.

발레 수에드와는 스웨덴의 무용수 장 보를랑(Jean Borlin, 1893-1930)이 이 나라의 실업가인 롤프 드 마레(Rolf de Mare, 1886-?)의 후원을 얻어 결성하고 1920년의 10월 25일에 파리의 샹제리제 극장에서 창립공연을 한 발레단이다.

보를랑은 포킨의 제자로 제1무용수 겸 안무사가 되어 소수의 덴마크인 남성 무용수를 제외한 거의를 스웨덴인으로 결성했다. 그리고 창립공연에는 보를랑의 안무로 드뷔시의 <유희>나 아르베니스의 음악으로 <이베리아> 등을 상연했으나 그 활동은 겨우 4년 반쯤밖에 되지 않았고 1924년의 12월 4일에 상연한 사티 작곡의 <휴연(休演)>을 마지막으로 끝내 해산하고 말았다.

그동안에 발레 수에드와는 광인(狂人)의 운동을 무용화한 <정신병원>(1920)이라든가 클로델의 작품을 미요가 작곡한 4단 무대를 응용한 <인간과 그 욕망>(1921), 두 확성기에 의한 목소리와 말을 반주로 하는 장 콕토의 <에펠탑의 신랑신부>(1921), 미래파식장치(未來派式裝置)로 스포츠를 전개하는 오네거 작곡의 <스케이트 링>(1922), 아프리카 흑인의 무용을 채택한 미요 작곡의 <세계창조>(1923) 등을 상연하여 발레계에 신풍을 일으켰다.

이 발레 수에드와는 단기간의 활동으로 끝났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가뿐만 아니라 작가·미술가 등 당시의 프랑스를 대표하는 모든 신예 예술가를 동원하여 극히 대담하고 또한 참신한 발레를 실험, 그 후의 모던 발레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군소 발레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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群小 ballet團

디아길레프의 발레 뤼스가 성공하자 그것에 자극을 받아 군소 발레단이 속출했다. 또한 발레 뤼스가 해산하자 거기에 소속했던 무용수들이 각지에 분산하여 발레단의 속출을 초래하는 요인이 되었다. 그 두세 가지를 소개한다면 우선 발레 로맨틱은 1917년의 러시아 혁명으로 국외에 망명한 구제실(舊帝室) 직계의 무용단이다. 마린스키 극장의 발레 마스터였던 보리스 로마노프(1891-1957)가 스미르노바(1888-1935)와 함께 1921년에 결성한 것으로서 전통적인 러시아 발레의 전통에 입각하여 약 5년 동안 유럽에서 활약했다.

스와레 드 파리는 1924년에 프랑스의 무대 미술가 보우먼 백작에 의해서 파리의 몽마르트에서 창립공연을 가진 단체이다. 부자의 취미같은 것으로 오래 계속되지는 못했으나 마신을 안무사로, 프랑스의 신예 예술가를 동원하여 그들의 수완을 충분히 발휘케 했다는 점에서 이색적이었다.

이와 같은 개인적인 발레단으로서는 포킨의 문하생으로 디아길레프의 발레단에도 주연한 일이 있는 이다 루빈시타인의 발레단이 있다. 그녀는 페테르부르크 태생의 부호로 그 재력(財力)으로 파리에서 일류의 안무사나 작곡가, 무대 미술가, 대본작가들을 잇따라 동원, 작품을 위촉하여 발표했으며 그 몇 가지는 걸작으로 널리 알려졌고, 1928년에 정식으로 이다 루빈시타인 발레단을 조직했다.

그 상연작품 가운데에는 오네거 작곡의 <아무르와 푸시쉐의 결혼>(1924), 스트라빈스키 작곡의 <요정의 키스>(1924), 림스키 코르사코프 작곡의 <백조공주>(1924), 라벨 작곡의 <보렐로> 등이 있다.

쿠르트 요스 발레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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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o β Ballet

그러나 이색적인 발레단은 쿠르트 요스(1901-1979)의 발레단이다. 요스는 그 출신부터가 다른 발레단의 주재자와는 달랐다. 그는 독일인으로 1920년 이후에 라반의 문하생이 되었으며 또한 빈에서는 달크로즈의 지도를 받은 철두철미한 모던 댄서였다.

그러한 그가 발레단을 조직한 것은 1932년이었으며 그 해에 발레 수에드와의 창립자 롤프 드 마레가 창설한 파리의 국제무용 문고의 안무 경기대회에 참가, 자작의 발레 <초록빛 테이블>이 제1위로 우수상을 받았다. 이후 발레의 기법뿐만 아니라 독일 신무용의 표현법을 교묘하게 채택한 독특한 작품으로 일약 발레계의 각광을 받아 유럽 각지를 순회공연했다.

이처럼 시대는 발레의 과도기로서 크고 작은 온갖 발레단이 각국에서 활약했던 군웅 할거의 시대이기도 했다.

영국의 발레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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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國-ballet界

디아길레프의 발레 뤼스가 미친 영향과 그 전후에 있었던 발레단의 속출, 나아가서는 러시아 혁명 등의 원인으로 발레는 급속하게 세계 각지로 번져 나갔다. 영국이 본격적으로 자국의 발레를 갖게 된 것은 1930년 무렵부터이다.

그 기반이 된 것은 발레학교가 잇따라 설립된 것에 기인한다.

우선 페테르부르크 무용학교의 출신으로 디아길레프의 발레단에도 참가했던 아스타페바(1876-1934)가 런던에서 개교했다. 그 문하에서는 영국의 발레계를 대표하는 돌린이나 마르코바(Alicia Markova, 1910-?), 마곳 폰테인(Marogot Fonteyn, 1919-1991) 등이 배출되었다. 이어 체케티와 레거트(1869-1937) 등 두 사람의 세계적인 발레 학교가 개교했으나 참된 의미에서의 영국 발레가 탄생한 것은 1930년에 카마르고 협회(Camargo Society)가 창립된 이후부터라고 하겠다.

카마르고 협회 자체는 발레단이 아니나 발레창조를 위한 국민운동을 펴, 새들러즈 웰즈 발레단(Sadler's Wells Ballet)과 람버트 발레단(Rambert Ballet)의 조력을 얻어 자기 나라 무용수를 동원, <포모나> <정면(正面)> <조브> <리오그란데> 등은 아시턴(1902-?)의 안무로 상연했다.

새들러즈 웰즈 발레단은 같은 이름의 극장을 본거지로 하여 1931년에 조직된 발레단으로서, 당시는 아직 빅 웰즈 발레단(VicWells Ballet)이라 부르고 있었다. 그것을 제2차 세계대전 때 개칭하여 현재도 로열 발레단(Royal ballet)이라 하고 코벤트 가든 극장을 본거로 하여 세계적인 발레단으로서 명성을 떨치고 있다. 이 발레단의 주재자는 니네트 드 발르와(Ninette de Valois, 1898-?) 여사이다.

람버트 발레단은 폴란드 태생의 여성 무용가 마리 람버트(Marie Rambert, 1889-?)가 1931년에 창설했다. 그녀는 처음에 발르와와 마찬가지로 런던에서 발레 학교를 열어, 그 후 발레 클럽을 창립하여 무용수를 양성하고 발레단을 결성한 뒤로는 로열 발레단에 대항하는 활약을 계속하고 있다.

미국의 발레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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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國-ballet界

미국도 발레로는 신흥국이라 하겠다. 더구나 처음은 발레의 식민지적인 시장에 지나지 않았으나 제2차 세계대전 후는 세계 유수의 발레국으로 발전했다. 그 기반이 된 것은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가극장(歌劇場)이 1909년 부속 발레학교를 개설한 것이 계기가 된다. 그리고 1918년에는 볼름의 지도로 <금계(金鷄)>를 그리고 이듬해에는 <페트루시카>를 미국인의 무용가에 의해 상연함으로써 발레의 여명을 맞았다. 그러나 미국의 발레가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조르주 밸런친(Grorge Balanchine, 1904-1983)이 미국으로 온 뒤부터이다. 그는 미국의 무용 평론가 커스틴(Lincoln Kirstein, 1907-?)의 초빙을 받아 1933년에 도미하고, 협력하여 이듬해 아메리칸 발레 컴퍼니(American Ballet Company)와 아메리카 발레학교(The School of American Ballet)를 설립, 무용수를 양성함과 동시에 시대의 첨단을 가는 혁신적인 발레운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아메리칸 발레 컴퍼니는 이 나라의 발레 발전에 크게 공헌했으나 1941년에 해산하고, 남미 공연에 참가했던 발레 캐러번(Ballet Caravan;커스틴이 1936년에 설립)이라 개명하여 미국 발레의 초기에 활약햇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미국에서 가장 주목되고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친 것은 발레 시어터(Ballet Theatre)와 뉴욕 시티 발레단(New York City Ballet)이다.

발레 시어터는 1940년에 뉴욕 센터 극장(Center Theatre)에서 데뷔했다. 안나 파블로바의 상대역이며 디아길레프의 발레단에서 발레 마스터를 했던 모드킨이 주재하는 모드킨 발레단의 후신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으로, 세계적인 일류의 안무사, 무용수, 미국의 최우수 무용수를 모아 유럽에도 진출하고 1957년 이후는 정식으로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American Ballet Theatre)로 불리고 있다.

뉴욕 시티 발레단(New York City Ballet)은 뉴욕시의 후원을 얻어 1949년에 정식으로 결성되었다. 이는 커스틴이나 밸런친에 의해 조직된 발레협회에서 발전한 것으로, 밸런친을 수석 안무사로 추대, 미국의 모든 재능을 동원하여 유럽에도 진출했다.

미국은 이 두 발레단을 주주(主株)로 삼아 전국의 주요 도시에는 거의 발레단이 있으며 그 밖의 발레단까지 합치면 막대한 수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의 발레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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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ce-Ballet界

프랑스에서는 1661년에 왕립무용학교가 창립된 이후로 오페라 극장을 중심으로 찬란한 전통을 과시하는 발레의 나라이다. 그러나 19세기 말엽부터 1930년경까지는 디아길레프 발레단의 활약 등으로 쇠퇴의 극에 달했다고 하겠다.

그런데 발레 뤼스의 해체 이후 마지막 스타의 하나였던 리파르(Serge Lifar, 1905-1986)가 그 오페라 극장의 <프로메테>(1929)의 안무사로 초빙되고 그 성공으로 그가 1930년에 오페라 극장의 메트르 드 발레 겸 제1 무용수가 되어 생기를 되찾았다.

리파르는 타악기에 의한 발레 <이카르>나 그 밖의 많은 신작을 상연하여 기염을 토했으나 1944년에 독일군에 협력했다는 협의로 한때 오페라 극장에서 추방되고 전후(戰後)에 다시 복귀했다.

그동안 오페라 극장에서는 임시로 밸런친을 초빙하여 <아폴로> <세레나데> <요정의 키스> <수정궁(水晶宮)> 등 4개 작품을 안무토록 했으며 1947년에 리파르가 복귀한 뒤부터는 오페라 극장의 예술적인 독재자로서 민완을 떨쳐 발레의 면목을 일신시켰던 것이다.

이 오페라 극장의 발레를 제1발레단이라고 한다면 오페라 코믹 극장의 그것은 제2발레단이라는 위치에 있다고 하겠다.

오페라 극장에서는 지금도 부속으로 발레학교가 있어서 그 졸업생은 그 두 극장에 배속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오페라 극장이나 오페라 코믹 극장의 젊은 무용수들은 답답한 전통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새로운 천지를 구했다. 그 젊은 재능과 의욕이 결집되어 1945년에 조직된 것이 발레 데 샹젤리제(Les Ballets des Chemps­Elysees)이다. 21세기의 젊은 롤랑 프티(Roland Petit, 1924- )와 디아길레프의 비서였던 시인(詩人) 코크노(1903-?)가 결성한 것으로 청신하고 참신한 작품을 제공하여 파리의 발레계에 신풍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1947년 말에 프티가 탈퇴하여 이듬해 자기의 발레단인 발레 드 파리(Les Balletsde Paris)를 결성하자 전자는 1951년에 해산했다.

새로 태어난 발레 드 파리는 프티의 애처 지지 장메르(Jean­maire, 1924- )와 5월 21일에 파리의 마리니 극장에서 창립공연을 가졌던 것이다. 상연한 <밤의 숙녀들>에는 특히 영국의 마곳 폰테인이 주연하여 화제가 되었다. 그 밖에 대담한 베드 신으로 화제가 되었던 <카르멘>(1949)이나 <이리>(1953) 등, 이 발레단도 프티의 재기가 넘치는 모던 발레의 전개로써 해외에도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러시아의 발레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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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sia-ballet界

제정시대의 러시아가 혁명으로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이 되자 발레의 양상도 일변했다. 처음에 염려된 것은 제정시대에 고도로 발전한 발레의 운명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초대 교육인민위원이 된 루나차르스키의 노력으로 구제되었다. 그 대신 극장은 민중에게 개방되고 병사나 농민이나 노동자가 새로운 관객이 되었다.

종래의 페테르부르크는 레닌그라드로 개칭됨과 동시에 마린스키 극장은 키로프 오페라 발레 극장으로 이름을 바꿨으며 모스크바의 볼쇼이 극장은 그대로 남아 이 2개의 발레단을 중심으로 연방의 각 수도나 주요도시에 제각기 국영 발레단을 갖게 되어 그 수는 40여 개라고 한다.

또한 무용수의 양성은 키로프와 볼쇼이의 두 발레극장 부속의 발레학교가 중심이 되어 뛰어난 무용수를 다수 배출하여 소련 발레의 확립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소련 발레 자체는 혁명 초기에 공산주의 선전이나 소련 사회의 현상(現狀)을 반영하는 작품이 많았다.

1930년대에 이르자 창작활동은 활발해져 신작이 잇따라 발표되고 초기에 보였던 혁명 선전색이 차차 약간이나마 희박해지는 듯했다. 그동안의 주요한 작품을 열거하면 대강 다음과 같다.

<파리의 불길>(1932년, 아사피에프 작곡, 바이노넨 안무, 키로프 극장 상연), <바흐치사라이의 샘>(1934년, 아사피에프 작곡, 자하로프 안무, 키로프 극장 상연), <빨간 돛>(1924년, 빌로프스키 작곡, 라브로프스키 안무, 볼쇼이 극장 상연), <신데렐라>(1940년, 프로코피예프 작곡, 자하로프 안무, 키로프 극장 상연), <돌꽃>(1954년, 프로코피에프 작곡, 라브로프스키 안무, 볼쇼이 극장 상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