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예술·스포츠·취미/무 용/한국의 무용/한국무용의 연혁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한국무용의 연혁〔개설〕[편집]

韓國舞踊-沿革〔槪說〕

아득한 옛날 우리 조상들은 밤이 깊으면 새벽이 오고, 동녘하늘에 붉은 해가 떠올라 하루가 시작되며, 해가 진 뒤에는 달이 뜨고 떠오르는 달은 날마다 그 모양이 변하며,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며 가뭄이 드는가 하면 홍수가 지는 등 자연현상을 모두 전지전능한 신의 섭리 내지는 귀신의 노여움으로 풀이하였었다. 이러한 생각은 하늘과 땅 산천초목 등 모든 자연물을 두려워하여 받들게 만들었고, 나아가서는 민속신앙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한국의 원초적(原初的) 무용은 이와 같은 것을 배경으로 하여 원시적 종교와 깊은 관련을 맺으면서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며, 현재 전해지고 있는 여러 가지 문헌들은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3세기경의 한반도의 여러 부족의 생활상태를 기록한 <삼국지 위지 동이전(三國志魏志東夷傳)>과 그 밖의 중국 사적(史籍)의 단편적인 기록들에 의하면, 어느 부족사회나 1년에 1·2차의 제천대회(祭天大會)를 열고, 제천(祭天)과 아울러 부족의식(部族意識)을 연마하며 가무백희를 연행(演行)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때에 원시적인 무용의 형태가 이미 배태(胚胎)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부여(夫餘)의 '영고(迎鼓)', 고구려의 '동맹(東盟)', 예(濊)의 '무천(舞天)', 마한(馬韓)의 '춘추제(春秋祭)', 가락(駕洛)의 '계욕' 등을 그 대표적인 고대 제의(祭儀)로 들 수 있으며, 고구려의 '동맹(東盟)'을 예로 들어 보면 "나라 동쪽에 큰 수혈(隧穴)이 있어, 10월에 국중대회(國中大會)를 열고, 수신(隧神)을 제사지내며, 목수(木隧)를 신좌(神座)에 모신다"는 기록이 있다 .수신은 주몽(朱蒙)의 어머니로 민족적인 신앙의 대상이며, 목수는 나무로 만든 곡신(穀神)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거족적인 제례였던 의식에는 전 부족이 모여 연일 가무(歌舞)를 즐겼다고 한다. 그러나 위의 여러 제례행사에 참가한 온 부족들이 노래 부르며 즐기던 춤들은 완전한 춤의 격식과 형태를 갖춘 것은 물론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온 부족이 모여 엄숙한 의식을 끝내고 축제로 들어가, 풍부한 수확과 부족의 번영을 기뻐하며 술잔을 들 때 본능적으로 어깨춤이 나오고 장단이 쳐졌을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이때의 본능적인 율동은 어떤 격식이나 형태가 정해지지 않은 즉흥적인 것이었을 것이나 세월이 지남에 따라 차차 틀이 잡혀가기 시작했을 것이며, 이것이 더욱 발전하여 원시무용의 한 형태가 이루어졌으리란 것도 쉽게 추측된다.

이렇게 형성된 원시무용은 축제 때의 여흥적(餘興的) 성격의 것에서 차차 의식(儀式)의 한 절차로서 발전·형식화되고, 그 의식의 성격에 따라 각기 다른 형태로 발전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우리무용에 끼친 중국무용의 영향은 자못 큰 바 있는데, 이 점은 무용 뿐 아니라 여러 가지 문물 제도에 있어 중국의 영향이 컸던 것과 궤(軌)를 같이한다.

고구려에서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조선조에 이르는 동안에 이와 같이 형성된 무용 중 고구려의 지서가무(芝栖歌舞)·호선무(胡旋舞), 백제의 기악무(伎樂舞), 신라의 검무(劒舞·黃昌舞)·처용무(處容舞), 고려의 헌선도(獻仙桃)·수연장(壽延長)·오양선(五羊仙)·포구락(抛毬樂)·연화대(蓮花臺)·6화대(六花隊)·향발무·아박무(牙拍舞)·학무(鶴舞), 조선조 태조 때의 몽금척(夢金尺)·수보록·성택(聖澤)·곡파(曲破), 세종 때의 봉래의(鳳來儀), 숙종 때의 첨수무(尖袖舞), 순조 때의 가인전목단(佳人剪牧丹)·보상무(寶相舞)·춘앵전·헌천화·4선무(四仙舞)·제수창(帝壽昌)·연화무(蓮花舞), 고종 때의 항장무(項莊舞)·사자무(獅子舞)·선유락(仙遊樂) 등은 주로 정재(呈才)라 불리는 궁정무용(宮廷舞踊)을 중심으로 한 것이다. 이들 궁정무는 예법(禮法)이 지나치게 강조되고, 반주음악의 화려함 때문에 춤의 가락이 단조롭고, 개성적인 창의를 찾아보기 어렵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삼한시대(三韓時代) 이래의 농악무(農樂舞)를 비롯하여, 검무(劒舞)·승무(僧舞)·한량무(閑良舞)·장고무(杖鼓舞)·남무(男舞)·강강수월래, 가면무(假面舞)인 산대놀이춤·봉산탈춤·오광대탈춤·사자춤 등으로 대표되는 민속무용은 춤가락이 활달자재하고 기교가 중시되었으며 템포가 빠르다.

이상 말한 것들이 구한말(舊韓末)까지의 소위 '근대무용'에 상대되는 의미로서의 '고전무용'에 속하는 무용이며, 한국의 신무용은 경술국치(庚戌國恥) 이래 3·1운동 직후까지의 공백기를 거쳐, 1926년에 있는 일본인 이시이(石井漠)의 서울공연에 의해 개막된다.

한국무용에 국한된 것은 아니지만 우리 무용이 발생된 동기와 원인을 살펴보면, 첫째 자연발생적으로 생겨진 것, 둘째 전설·설화 속에서 취재된 것, 셋째 외국에서 흘러 들어온 것, 넷째 인위적으로 창작된 것 등을 꼽을 수 있고, 이를 다시 형태별로 나누면, 정재(呈才)라 불리던 궁중무(宮中舞)와 의식무(儀式舞), 민속무(民俗舞)와 가면무(假面舞), 신작무용(新作舞踊) 등으로 나눌 수 있다.

<金 千 興>

상고시대의 무용[편집]

上古時代-舞踊

한국무용도 다른 부족국가의 무용과 마찬가지로 상고시대의 종교의식에서 기원되어 발달해 왔다. 시가(詩歌)와 음악과 무용은 우리의 선조들이 하늘을 받들던 정치 및 종교와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고대에 있어서는 음악과 시가와 무용이 구별되지 않고 종합예술(綜合藝術)로서 성립하였다. 즉 음악과 시가와 무용은 이른바 삼위일체(三位一體)가 되어, 음악이 있으면 시가가 있고, 시가가 있으면 반드시 무용이 수반되어 이것을 악(樂)이라 규정했던 것이다.

우륵과 가무악[편집]

于勒-歌舞樂 가야(伽倻)가 쇠망하자 신라에 귀화한 우륵(于勒)은 진흥왕(眞興王)의 수우(殊遇)를 받고, 진흥왕이 맡긴 계고(階古)·법지(法知)·만덕(萬德) 등 세 제자에게, 그 자질을 좇아 계고에게는 가야금을, 법지에게는 노래를, 만덕에게는 춤을 각각 가르쳤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우륵이 가야금만의 명장(名匠)이 아니요 노래와 춤도 겸한 스승이었음을 알 수 있고, 이로써 보면 우륵이 작곡한 12곡도 악장(樂章)과 무용이 결부되었음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고대로부터 전하여 오는 어느 악곡(樂曲)도 예외없이 무용이 따랐던 것이나, 후세에 오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아, 가사(歌詞)를 잃고 무용도 제외된 것이 허다하였음을 알게 된다.

북방 부족국가의 무용[편집]

北方部族國家-舞踊

우리나라 북방의 부족국가였던 부여(扶餘)의 영고(迎鼓)와 예(濊)의 무천(舞天)은 고대사회의 종교적 의식의 한 예로서 보통은 음력 10월에 거행되었다. 이것은 물론 모든 부족국가에 있어 공통되듯이 천신(天神)을 위하는 숭고한 의식인 바, 이때 민중들은 천신에게 제물(祭物)을 드리고서 여러 날을 두고 가무(歌舞)를 끊이지 아니했다. 이런 제천의식(祭天儀式)에서 행하는 무용이란 말할 나위도 없이 가장 원시적 형태의 기원과 감사, 아울러 자기승화(自己昇華)의 군무(群舞)였다.

남방 부족국가의 무용[편집]

南方部族國家-舞踊

남방(南方)의 또 다른 부족국가인 마한(馬韓)에서는 백성들은 연 2회, 즉 음력으로 5월과 10월의 농사를 다 끝냈을 때 모두 모여서 노래하고 춤추며, 특히 10월에 추수를 끝마치고는 신에게 추수감사(秋收感謝)의 제전을 행하였다. 즉, 마한에서는 5월에 모심기가 끝나면 귀신에게 제사를 하는 바, 이때는 무리를 지어 노래하고 춤추고 술마시며 밤낮을 쉬지 않는다. 또 이때 추는 춤의 절주(節奏)는 탁무(鐸舞)에서와 같고, 10월에 농사를 마치어도 또한 이와 같이 한다. 수십명이 일단을 이루어 지휘자를 선두로 발랄한 타악(打樂)반주에 맞추어 손을 올렸다 내렸다 하며 땅을 울리고, 솟았다 내렸다 하면서 춤을 추는 아주 즐겁고도 건강한 모습이 상상되고도 남는 것이다.

이것은 마한에만 국한되지 않고, 진한(辰韓)·변한(弁韓)같은 인접 부족국가에서도 거의 비슷한 형식의 풍년에의 기원과 추수감사의 의식 및 거기 따르는 무용이 존재하였으리라는 것을 우리는 쉽게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사제(司祭)하는 자는 일종의 무격(巫覡)이던 것도 동일했을 것이다. 이는 동시에 신가(神歌)를 짓는 시인(詩人)이요, 작곡과 연주를 겸한 음악가요, 뛰어난 무용가이기도 하였다.

삼국시대의 무용[편집]

三國時代-舞踊

삼국시대에는 무용예술이 상고시대보다 더욱 진보·발달하였으며, 무용의 모든 영감(靈感)은 신화(神話)에서 유래하였다.

고구려의 무용[편집]

高句麗-舞踊

고구려에 있어서의 무용은 지서무(芝栖舞), 호선무(胡旋舞) 및 고구려무(高句麗舞)와 같이 당조(唐朝)에 궁정에서 널리 갈채를 받았다는 것이 역사적인 사실로 되어있다. 특히 고구려무(고려무)는 이백(李白)에 의해서, 호선무는 당나라 시인 백낙천(白樂天)에 의해서 불후의 작품이라고 평가받았다.

고구려무는 무인들이 병창(竝唱)하며 가악(家樂)을 부르는 가운데 무동(舞童) 6인이 3대(三隊)로 나누어서 상대하는데, 넓은 소매를 시원스럽게 올려 뿌리는 양상은 가히 짐작이 가는 것이다. 호선무는 한 무녀가 구상(球上)에 올라서서 종횡으로 춤을 추는데 몸을 풍운(風雲)과 같이 비상하여 그 율동이 비할 데 없이 날쌤을 알 수 있다. 또 호선무에 대해서는 통전(通典)을 보면, 네명의 무자(舞者)가 머리 뒤에 퇴곡을 짓고 강포(絳布)로써 이마를 동이고 금당으로써 꾸미는 바, 2인은 황색치마와 속저고리에 적황(赤黃)색 바지요, 2인은 적황색의 군유 같은 빛깔의 바지와 긴 소매에다 조피(鳥皮)의 신발을 신고 쌍쌍이 짝지어 추는 것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백제의 무용[편집]

百濟-舞踊

백제의 무용은 대단히 진보를 보았으며 미마지(味摩之)라는 이 나라의 무용가가 중국 오(吳)나라에 건너가서 기악(伎樂)을 배워와, 우리나라에 가면무용극 산대도감(山臺都監)놀이를 창시하였을 뿐 아니라 이를 일본에 소개하여 불교극(佛敎劇) 기악무(伎樂舞)를 전파케 하였다 한다.

이 가면무용극은 조선조 말엽까지 융성하였고, 오늘날에도 민속예술의 부흥 기운에 편승하여 그 명맥을 이어 오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 기악의 내용 속에는 진신무(振腎舞)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마라(魔羅:梵語 mara로 佛道의 장애가 되는 악마·귀신, 또는 陰莖의 의미)를 치고 차는 모습으로 춤춘다는 양상에서 구나희의 축귀무(逐鬼舞)로도 간주된다. 이러한 백제 기악의 진신무가 변이(變異)되어 향토적이면서도 서민적인 호색(好色)과 노골적인 것으로 나타나고, 직접적이었든 아니었든 간에 기악의 표현양식이 산대도감극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준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당시 넓은 자주빛 바지저고리를 입은 2인이 가죽구두를 신고 빛나는 장보관(章甫冠)을 쓰고 추는 백제무는 매우 이색적이었다고 <구당서(舊唐書)>에서 말하고 있다.

신라의 무용[편집]

新羅-舞踊

신라(新羅)의 무용 가운데서 오늘날보다 세련된 형식으로 추어졌던 것은 가면무인 처용무(處容舞)라고 이를 것이다. 신라의 무용제도는 무재(無才, 舞尺)·가척(歌尺)·금척(琴尺)·가척 등으로 분립되어 있어, 무자(舞者)가 독특한 지위를 차지함을 알 수 있다. 전설상의 인물인 처용의 설화(說話)의 사실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이 처용무는 고려와 조선조를 통하여 섣달 그믐날의 구나(驅儺)에 행해졌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무용의 가치를 어느 정도 짐작할 만하다.

이 밖에도 신라에는 많은 가면무용이 행해졌는데, 그 중에도 특출한 것은 최치원(崔致遠)의 이른바 <향악잡영(鄕樂雜詠)> 5수에 보이는 서역(西域) 전래의 5기(五伎)가 될 것이다. 황금빛깔의 가면을 쓰고 추는 '대면(大面)' 남(藍)빛 가면을 쓰고 추는 '속독(束毒)', 사자가면을 쓰고서 추는 '산예', 금칠한 공을 놀리는 '금환(金丸)', 어깨는 움츠리며 우스꽝스럽게 추는 '월전(月顚)' 등이 이때에 성행하였던 가면희인 것이다.

이 중에 대면무(大面舞)를 살펴보면 황금칠을 한 가면을 쓰고, 손에는 구슬채찍을 들고 귀신을 몰아내며, 빠른 걸음인듯 달려나가는 우아한 춤으로, 장쾌하고 우아한 건무(健舞)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경주 감산사(甘山寺) 사지(寺址)에서 발견된 석탑 기단(石塔基壇)에 보이는 12지신상(十二支神像)들의 조각된 모습에서 당시의 춤의 모습을 보면, 현재 전승되고 있는 경상도 5광대(五廣大) 가면극의 덧보기 춤사위와 유사함을 곧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우아한 정재(呈才)로 변하였지만, 단검(短劒)을 번뜩이는 무무(武舞)·검무(劒舞) 또는 황창랑무(黃昌郎舞)도 원래는 가면무였던 것이나, 어느때부터 가면을 버렸는지 알 수 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고려시대의 무용[편집]

高麗時代-舞踊

고려조의 무용은 초기 삼국시대의 무용이 그대로 전승되었고, 뒤에 송대(宋代)의 무악(舞樂), 즉 왕모대가무(王母隊歌舞)·포구락(抛毬樂) 등 화려한 송조(宋朝)의 궁정무용, 그리고 일무(佾舞)라고 하는 종교무용의 수입으로 더욱 번성하게 되었다.

문종(文宗) 27년(1078) 2월 연등회(燃燈會)에 교방(敎坊)의 여제자인 진경(眞卿) 등이 답사행가무(踏沙行歌舞)를 전한 것이라든지, 이 해 11월 팔관회(八關會)에서 역시 교방의 여제자 7초영(楚英) 등이 포구락 등이며 구장기별기(九張機別伎)를 아뢴 사실과 동왕 30년(1081) 2월 연등회에서 다시 초영 등이 왕모대가무를 보였는데, 일대(一隊)는 55인으로 혹은 '군왕만세', 혹은 '천하태평' 등의 글자를 춤으로 만들어 장관을 이루었다 한다.

앞서 말한 일무의 '일(佾)'은 춤의 행렬을 뜻하는 것으로, 행수(行數)와 인수(人數)의 종횡이 서로 같아야만 비로소 '일'이라 일컬었다. 일무의 전거(典據)는 <논어(論語)>의 '팔일편(八佾篇)'이 그 시초가 되는 것으로, 중국 고대 아악(雅樂)에 있어 가장 대표적인 무악을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일무는 주제(主祭)에 따라 엄격한 무제(舞制)로 되어 있되, 또한 문무(文舞)와 무무(武舞)로 나누며, 이것은 오늘날 문묘(文廟)의 석전(釋奠)에 고식(古式)대로 엄수되고 있다.

조선시대의 무용[편집]

朝鮮時代-舞踊

고려를 계승한 조선시대는 무용이 한층 융성함을 보였다. 조선왕조는 건국 당초부터 예악(禮樂)으로써 국정(國政)의 요체(要諦)를 삼았다. 세종대왕(世宗大王)은 무악의 정리와 신작(新作)에도 힘을 기울였고, 세조(世朝) 또한 전대의 소작(所作)인 종묘의 무악 정대업(定大業)·보태평(保太平)의 개산(改刪)에 성공하였다. 더욱이 성종(成宗) 24년(1492)에 만들어진 <악학궤범(樂學軌範)>에는 당악정재(唐樂呈才)·향악정재(鄕樂呈才)의 홀기(笏記)를 전재(全載)했을 뿐 아니라 무복(舞服)과 의물(儀物)까지를 소상하게 도설(圖說)하여, 조선조 초기의 궁중무용의 모습을 요연(瞭然)하게 한 것이다.

태조(太祖)의 공덕을 찬미한 몽금척무(夢金尺舞)·수보록무, 태종의 공덕을 칭송한 근천정무(覲天庭舞)·수명명무(受明命舞) 등 일련의 작품은 개국창업의 좋은 조짐과 새로운 왕조의 위용(偉容)을 자랑하기 위한 기념비적 의의 이외에 예술적인 가치는 의심되는 것들이기도 하였지만, 조선조 후기에는 그 양상을 크게 달리하였다.

조선조 순조(純祖) 때 효명세자(孝明世子:翼宗)는 부왕 및 왕후를 위하여 많은 정재를 예제(睿製)하였는데, 그 중에도 특출한 것은 춘앵전이다. 익종은 춘앵전 이외에도 가인전목단(佳人剪牧丹)·보상무(寶相舞)·망선문(望仙門) 등 20여 편의 가작을 남기고 있다. 실로 한국이 낳은 희귀한 안무가(按舞家)이며, 현존하는 약 50종의 궁중무용 중에서 거의 반수에 달하는 작품이 그의 예제가 아니면 개작한 작품인 것이다.

개화기 이후의 한국무용[편집]

開化期以後-韓國舞踊

상고시대부터 부족단위의 부락제(部落祭)나 그 밖의 행사에 연행되었던 자생적(自生的)인 놀이가 종교를 앞세운 외세(外勢)가 상층사회로 침식되면서부터 하층계급의 전유물(專有物)로 낙착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러한 놀이 자체도 외래적(外來的) 영향을 받아 복합적으로 수용되어 갔던 과정을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종교적인 성격과 오락적인 성격이 복합된 민중희나 무용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1929년 이래 서구에서 수입된 현대적 무용을 제외하고 우리나라의 무용은 이를 편의상 궁중무용(宮中舞踊)과 민속무용(民俗舞踊)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넓은 뜻에서 궁중무용 또는 고전무용(古典舞踊)이란 고대의 아악(雅樂)에서 유래한 일무(佾舞:儀式舞)와, 중국에서 전래한 이른바 당악정재(唐樂呈才),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제정한 향악정재(鄕樂呈才)를 포함한 것이다. 이에 비해 민속무용은 궁중무용이 아닌 것(사실 궁중무용까지도 민속 무용에 포함시킬 수 있다)을 모두 포괄할 수 있다.

한국무용의 현황과 전망[편집]

韓國舞踊-現況-展望

상고시대부터 유구히 전해오던 우리 무용은 개화 이후의 외세 유입과 일정 36년을 거치는 동안 수난과 고초를 겪는 가운데 위축·쇠잔을 면치 못하였으나 8·15광복과 함께 빈사상태에서 벗어나 회생의 기쁨을 맞게 되었고, 광복 30여 년이 지난 현재에는 많은 무용인이 양성되고, 전통무용의 보전·전승이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신작 무용 발표회가 활발히 열리는 등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였다. 물론 한국무용계의 오늘의 상황이 반드시 만족할 만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앞으로의 발전 도약을 점치게 하는 다음 몇 가지 일들은 한국무용계의 앞날을 더욱 밝게 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첫째, 정부에서 문화재보호법에 의해 주요 전통무용의 보전·전수사업을 활발히 지원하고 있는 일이다. 둘째, 전통무용에 대한 일반사회의 인식이 점차 높아져 가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무용이 대중과 호흡을 같이하고, 대중생활에 깊이 뿌리박을 수 있는 무용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셋째 우리 전통무용에서 소재를 찾는 창작무용 활동이 활발하며, 신작무용의 방향 설정에 있어 전통무용에 기반을 두려는 기풍이 싹트고 있다는 점이다. 넷째, 각 대학 무용과의 학도를 비롯한 젊은 학생들이 한국무용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중요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한국무용[편집]

重要無形文化財-指定-韓國舞踊

궁중무용으로는 신라시대에 발생한 처용무(處容舞:무형문화재 39호), 고려시대에 연원을 둔 학무(鶴舞:무형문화재 40호), 궁중계통의 무용으로서 지방에 흩어져 있는 경남 진주의 검무(劒舞:무형문화재 12호), 통영(현 충무시)의 승전무(勝戰舞:무형문화재 27호), 의식무(儀式舞)로서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무형문화재 1호) 속에 들어 있는 종묘일무(宗廟佾舞), 사찰음악인 범패(梵唄:무형문화재 50호) 속에 들어 있는 나비춤·바라춤·법고(法鼓)·타주(打柱) 등이다.

이상 문화재로 지정된 것 이외에도 50여종의 궁중무용이 기록에 남아 있고, 민속무용도 각지에 산재해 있으며, 문화재로 지정받은 놀이나 가면극 등에서도 우리만이 간직하고 있는 형태와 춤사위 등의 특징적인 성분을 발견할 수 있으나 궁중무와 탈춤을 제외하고는 거의 기원(起源)이나 기능의 전모가 분명치 않고 변형되어 있음은 참으로 유감스런 일이라 하겠다.

<金 千 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