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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영화의 전망
[편집]스탈린주의로부터 해빙기의 러시아영화
[편집]Stalin主義-解氷期-Russia映畵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으나 러시아에 있어서 참으로 전후(戰後)의 시대가 열리게 된것은 1953년의 스탈린의 죽음으로부터라 하겠다. 스탈린의 다년간에 걸친 정치적 지도를 전면적으로 잘못이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말하기 좋은 것이라 할는지 모르나 전쟁 중에 혹은 전쟁 후에 있어서의 스탈린주의가 러시아 전체를 어둡게 하였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에렌부르그의 소설 <해빙(解氷)>이 1954년에 발표되었을 때 즉각적으로 그것이 러시아의 밝은 새시대, 사상·문화·예술의 자유화시대를 의미하는 상징적인 말로 유행어가 된 것은 역사적인 필연성을 지니고 있다 하겠다.
영화에 대해서 말하자면 전후 4년째가 되는 1949년에 있어서도 아직까지 철저한 스탈린 개인숭배의 전쟁영화 <베를린 함락>이 제작되고 있을 정도였다. 한편에선 입으로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말하면서도 실지로 영화를 만들 때는 리얼리즘으로부터 벗어나 정치적인 공식주의의 길을 걷고 있었다.
영화에 있어서 '해빙'의 제1작품은 그레고리 츄프라이 감독의 <여자 저격병(女子狙擊兵) 밀류트카>(原名 <41명째> 1956)이었는데, 이것은 혁명의 내전(內戰)에 종군하고 있는 여자병사(女子兵士)의 마음 속에서 일어났던 프롤레타리아 계급에의 헌신과 개인적인 여성으로서의 애정과 모순을 테마로 한 것이다. 이 테마 자체가 이미 경직된 정치주의(政治主義)로부터 인간존중에의 전환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다음해의 미하일 카르투조프의 <전쟁과 정>(原名 <두루미는 날고 있다> 1958)로써 더욱 확실해졌으며, 또다시 츄프라이의 <맹세의 휴가>(原名 <병사의 밸러드> 1958), <맑게 갠 하늘>(1961) 등으로 이어 나갔다.
러시아영화 거장들의 활약
[편집]Russia映畵-巨匠-活躍러시아에 있어서의 자유화는 60년대에 들어와서 더욱 발전하여 거장 클라스등 베테랑 감독들도 싱싱한 창조력을 발휘하려는 마음가짐을 가져 미하일 롬 감독은 <1년의 9일>(1962), 세르게이 유트케비치는 <폴란드의 레닌>(1965), 그레고리 코진체프는 <햄릿>(1964), 그리고 세르게이 게라 시모프는 <저널리스트>(1967) 등 주목할 만한 영화를 만들어 당당한 관록을 과시했다.
러시아영화의 신인 배출
[편집]Russia映畵-新人輩出
러시아영화의 밝은 내일을 비추고 있는 것은 최근 수년 동안의 신인들의 배출이라 하겠다. 그들은 모두가 에이젠슈테인 이래의 러시아영화의 전통을 바탕으로 하면서 서구(西歐)의 네오 리얼리즘과 누벨 바그의 수법을 배워서 새로운 러시아의 영화예술을 키우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들의 특징은 혁명 50주년을 맞이하여 '10월'을 오래된 옛이야기 정도로 밖에는 알지 못하는 현대 러시아의 젊은 세대를 직접적으로 묘사하려는 것이다. 그들 스스로가 모두 30대 전후의 청년들인 것이다. 우선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우리들의 마을은 전쟁터였다>, 原名 <이반의 소년시절> 1962), 말렌 후체프(<나는 스무살> 1965), 미하일 보긴(<두 사람> 1965, <조샤> 1967), 안드레이 미하르코프 콘챠로프스키(<최초의 교사> 1965) 등을 손꼽을 수 있다.
작품 감상
[편집]이반 그로즈느이
[편집]Ivan Grozny
감독 세르게이 M. 에이젠슈테인. 주연 니콜라이 첼카소프. 흑백·일부 색채·스탠더드. 1944-46년 제작.
<내용> 16세기 중엽 러시아는 많은 제후(諸侯)들의 영토로 분할되어 있었으며 이러한 혼란을 틈타서 외적은 끊임없이 침입하여 민중은 괴로움을 당하고 있었다. 모스크바 대공국(大公國)의 주인이 된 이반 바실리에비치(첼카소프)는 러시아 민족의 통일국가를 수립하려는 염원에서 우선 스스로가 황제가 되어 이반 4세(이반 그로즈느이)가 되었는데, 그의 궁전에는 새로운 황제를 반대하고 그를 폐위하려는 귀족들의 음모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이반은 농민들과 손을 잡고 그들의 음모를 하나 하나 제거해서 마침내는 러시아 사상 최초의 황제로서 명실공히 그의 지위를 확고하게 하는 데 성공했다.
<감상> 1941년부터 준비에 착수하고 5년 간에 걸쳐서 에이젠슈테인이 심혈을 경주해서 만든 거대한 역사영화다. 처음에는 3부작(三部作)으로서 구상된 것이었으나 그 역사적인 관점에 대해서 스탈린으로부터 심한 비판이 있었고 계속해서 작자(作者) 에이젠슈테인의 갑작스러운 죽음(1948년)으로 인해 2부작으로 끝난 불행한 영화다. 더욱이 제2부작이 공개를 허용받은 것은 겨우 1958년, 어언 작자가 죽은지 10년이 넘은 뒤였다. 이 영화는 에이젠슈테인의 독자적인 몽타주의 수법을 발휘한 것이며 스타일을 무시한 영화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평가는 크게 나누어지고 있기는 하나 <전함(戰艦) 포툠킨>과 함께 그의 대표작품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겠다.
시베리아 이야기
[편집]Skazaniyeo zemlye Sibirskoi
감독 이반 프일리예프. 주연 블라디미르 드루지니코프, 바리나 라두이니나. 색채·스탠더드. 1947년 제작.
<내용> 젊은 피아니스트인 안드레이(드루지니코프)는 전상(戰傷)을 입고 모스크바로 돌아왔으나 손을 부상당해 이제 전과 같은 연주를 할 수 없게 된다. 그는 음악원의 교수나 학우(學友), 그리고 애인인 나타샤(라두이니나)에게도 이별을 고하지 않고 고향인 시베리아로 돌아간다. 낮엔 대건설공사(大建設工事)의 제도공(製圖工)으로 일하고, 밤이 되면 클럽에 모이는 노동자들에게 아코디언을 들려 주면서 옛날의 시베리아 노래를 불러 주던 안드레이는 이와 같은 새로운 생활 속에 참다운 예술이 있음을 발견한다. 시베리아의 대지(大地)와 민중과의 사이에서 느껴지는 악상(樂想)을 바탕삼아 작곡한 안드레이의 교향곡 오라토리오 <시베리아 이야기>가 모스크바에서 처음으로 연주되었을 때 그 자리에는 나타샤의 기쁨에 찬 모습이 보인다.
<감상> 대중을 위한 음악과 예술가의 자기민족을 위한 음악, 그리고 이 양자를 대비적(對比的)으로 그리면서, 혁명 후 이미 30년을 거치는 동안에 러시아에서도 생기기 시작한 예술가의 속물적인 귀족주의를 공격하기 위한 영화이다.
전쟁과 정조
[편집]戰爭-貞操
Letyet Zhuravi 감독 미하일 카르투조프. 주연 타치아나 사모일로바, 알렉세이 바타로프. 흑백·와이드. 1957년 제작.
<내용> 보리스(바타로프)와 베로니카(사모일로바)는 모스크바에서 살고 있는 젊은 애인들로서 행복한 장래를 꿈꾸면서 일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행복은 돌연한 나찌 독일군의 침입으로 밑바닥부터 붕괴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조국의 위기를 알게 된 보리스는 베로니카에게도 알리지 않고 출정을 지원, 마지막 작별의 날에도 둘이는 서로를 찾아 다니다가 결국 길이 엇갈리게 되어 그것이 영원한 이별이 되고 만다. 전쟁은 전선의 병사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후방의 생활도 괴로운 시련의 세월이긴 하였으나, 마침내 평화가 온다. 그때 베로니카는 역에 나가서 보리스가 없는 귀환병의 대열을 맞이하면서 언제까지나 서 있는다.
<감상> 1903년에 출생한 베테랑인 카르투조프 감독은 유명한 카메라맨인 세르게이 우르세프스키의 도움을 받아, 이 영화에서 멋지고 유동적인 영상미(映像美)를 창조했다. 또한 이제까지 러시아의 전쟁영화가 애국적인 병사의 영웅주의를 찬미하는 것을 목표로 삼은 데 반하여, 이 작품은 전쟁이 개개의 시민에게 미치는 슬픔과 불행을 숨김없이 정확하게 묘사했다는 점에서 매우 새로운 영화라 하겠다. 영화에 있어서의 '해빙'의 대표작으로서 1958년 칸 영화제에서 러시아영화로서는 처음으로 그랑프리를 획득했다.
맹세의 휴가
[편집]盟誓-休暇
Ballada o soldatye 감독 그레고리 츄프라이. 주연 블라디미르 이바쇼프, 쟌나 플로호렌코. 흑백·와이드. 1959년 제작.
<내용> 알료샤(이바쇼프)는 마음이 착한 소년병(少年兵)인데 어느날 전투에서 독일군의 전차 2대를 불태워 일약 영웅이 되고 그 공훈으로 은상(恩賞)과 함께 6일 간의 휴가를 얻는다. 그는 그 동안에 고향으로 돌아가 파괴된 집을 수리하고 싶었다. 1분 1초가 그에게는 귀중하게 생각되었지만 처음보는 병사로부터 부탁을 받고는 친절하게 그 일을 해 주었고 군용화물열차에서 알게 된 소녀 슈라(플로호렌코)에게도 무엇이나 일을 돌보아 주었다. 집에 도착했을 때에는 거의 시간이 없어서 집을 수리할 수도 없게 되었으며, 늙은 어머니와 이별의 포옹을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전선으로 돌아간 알료샤의 소식은 끊어지고, 어머니는 언제까지나 아들이 가버린 길 저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감상> 순수한 휴머니즘과 릴리시즘에 넘쳐 있으며 더욱이 전쟁체험을 리얼하게 재현하는데 성공한 명작(名作)이다. 더구나 알료샤와 슈라의 청순한 첫사랑의 묘사는 드물게 보는 아름다움이라 하겠다. 영화대학 출신으로서 첫 작품에 임하는 주연들의 배역도 성공할 수 있었던 커다란 요소였으며, 츄프라이는 이 영화를 감독함으로써 확고한 지위를 구축하게 되었다.
폴란드의 레닌
[편집]Lenin v Polshe
감독 세르게이 유트케비치. 주연 막심 슈툴라우프. 흑백·시네마스코프. 1965년 제작.
<내용> 1914년 가을.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레닌(슈툴라우프)은 폴란드에 있는 폴로니노의 산장에 머물고 있었는데, 관헌은 이 혁명가를 군사 스파이라는 명목으로 체포하고 독방에 감금한다.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레닌의 회상의 형태로 전개된다. 폴로니노에서의 생활과 여러 부류의 사람들과 만나던 회상, 산장을 찾아온 사람들과 전쟁과 평화, 정치와 예술, 사랑과 자연에 대한 토론 등 이 영화에는 보편적인 뜻의 드라마는 없다. 주인공 레닌의 내적인 모놀로그에 의해서 인간 레닌의 심오한 곳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래서 이야기는 레닌이 폴란드로부터 추방되어 스위스로 출발하는 것으로 끝난다.
<감상> 유트케비치는 1904년생으로 러시아영화의 장로(長老)라고도 할 수 있는 베테랑인데 이 영화에서는 그의 새로운 실험적인 수법으로 젊은이들을 능가하는 싱싱함을 보여준다. 더욱이 그 수법이 조금도 눈에 띄지 않게 표현과 내용이 아주 합치되고 있다. 명배우 슈툴라우프의 연기도 좋아서 참으로 친밀하고 사랑할 수 있는 인간 레닌을 스크린에서 살리고 있다. 러시아에는 레닌영화가 많으나 그 중에서도 최고의 걸작이라고 하겠다.
전쟁과 평화
[편집]戰爭-平和
Voina i Mir 감독 세르게이 본다르추크. 주연 세르게이 본다르추크, 바체슬라프 치호노프, 류드밀라 사벨리예바. 색채·70밀리. 1966-67년 제작.
<내용> 1805년 나폴레옹이 전유럽을 석권하고 제정 러시아의 국경에 집결하고 있을 무렵, 페테르스부르그(레닌그라드)의 사교계에 이상가(理想家) 피엘 베주호프(본다르추크)와 행동적인 안드레이 보르콘스키 공작(치호노프)이라고 하는 젊은 친구가 있었다. 그들은 로스토프 백작(伯爵)의 둘째딸 나타샤(사벨리예바)와 만난다. 적극적인 안드레이는 그녀에게 청혼을 하고 약혼까지 하게 되는데 그녀가 진실하게 사랑하는 것은 피엘이다. 이 이야기는 1812년 나폴레옹의 침입, 그리고 패전까지의 러시아에 있어서의 전쟁과 평화의 세월이 눈부시게 변전(變轉)하는 것을 배경으로 하여 이들 젊은 세 사람들의 애환 그리고 방황과 각성을 묘사한 웅대한 서사시(敍事詩)로서, 안드레이의 죽음과 피엘과 나타샤의 결혼으로 끝난다. 6시간에 달하는 대장편이다.
<감상> 말할 것도 없이 톨스토이의 대하소설을 영화화한 것인데, 거액의 제작비를 들인 공전(空前)의 대 스펙터클이면서도 원작자(原作者)의 사상이나 문체에까지 가능한 한 밀착시키려고 노력하였으며 특히 전반(前半)에 있어서는 성공하고 있다. 후반(後半)은 다소 표면적으로 흐른 느낌이 있다. <전쟁과 평화> 영화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겠다.
현대 동구영화의 전망
[편집]폴란드파
[편집]Poland派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동구영화의 부흥이라기보다 차라리 탄생의 선두에 선 것은 폴란드였다. 특히 바이다, 카발레로비치 등 두 감독(監督)의 작품(作品)이 나란히 출현했을 때는 세계적으로 경이적인 존재가 되었으며, 이렇게 하여 소위 '폴란드파'가 불과 수년 동안이긴 하였으나 전성기를 맞이했다.
전전(戰前)의 폴란드에는 영화가 없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돌연한 대두는 정부의 영화중시정책과 이에 따라서 창립된 우지(바르샤바의 서남쪽 약 120킬로미터)의 영화학교의 교육성과라 하겠다. 바이다를 필두로 하는 이 나라의 젊은 영화작가는 모두 우지의 영화학교 출신이다.
그 이전에도 알렉산드르 포르드 감독의 <국경의 도시>(1946), 반다 야쿠보프스카 감독의 <아우슈비츠의 여죄수>(原名 <최후의 계단>, 1948) 등 볼 만한 작품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뭐니뭐니 해도 1956년 예지 카발레로비치가 <그림자>를, 그리고 안제이 바이다가 <지하수도(地下水道)>를 세상에 내놓은 때부터 폴란드영화의 평가가 확립된 것이라 하겠다. 계속해서 바이다의 <재(灰)와 다이아몬드>(1958), 카발레로비치의 <수녀 요안나>(1960) 등의 걸작이 폴란드 국내는 물론 외국에서도 일제히 찬사를 불러 일으켜, '폴란드파'는 전후 영화 가운데 이탈리아의 네오 리얼리즘에 필적한 만큼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그 중에서도 특히 젊은 세대에 속하는 로만 폴란스키(<물 속의 나이프> 1962), 예지 스콜리모프스키, 다디우시 콘비츠키 등의 준재가 탄생하였으나, 전체적으로 폴란드영화는 안제이 뭉크의 <파사제르카>(1963)의 히트를 최후로 급격하게 활력을 잃게 되었으며, 오늘에 이르러서는 침체상태에 있다. 이러한 원인을 한마디로 말하면 주제의 상실이며, 전쟁 중의 조국의 비극, 파시즘과의 영웅적인 투쟁, 해방과 혁명을 위한 맹렬한 국민적인 주제를 대충 다루었기 때문에, 현대의 일상생활에 눈을 돌렸을 때 거기에는 일종의 평화로운 허무감밖에는 발견할 수 없었던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폴란드 영화가 새로운 주제를 발견하고 눈부신 부흥을 보일 때까지 우리들은 잠시동안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겠다.
체코슬로바키아·헝가 리의 영화
[편집]Czechoslovakia·Hungary-映畵 폴란드를 대신해서 새로이 등장한 것은 체코슬로바키아와 헝가리의 영화라 하겠다. 체코슬로바키아는 그전부터 이리 트른카의 인형영화(人形映畵)와 카렐 제만의 동화영화(動畵映畵) 등 특수한 영역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독자성을 과시하고 있었으나, 원래가 서구적인 색채를 농후하게 지니고 있는 그들의 국민성 때문에 동구사회주의 나라로는 특이하게 자유화의 도화선에 불을 붙이는 것 같은 영화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얀 니예메츠 감독의 <밤의 다이아몬드>(1964), 얀 카달, 엘마 크로슈 공동감독의 <큰거리의 상점>(1965), 미로슈 포르만 감독의 <금발처녀의 사랑>(1965) 등 모두가 국제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헝가리 영화의 번성은 극히 최근의 일에 속한다. 1848년의 혁명에 있어서 최후까지 오스트리아에 저항했던 농민들의 영웅주의를 그린 미크로슈 얀쵸 감독의 <희망없는 사람들>(1965), 그리고 그로부터 100년 후의 헝가리 의거(1956)를 체험한 세대의 비통한 좌절을 옮겨 그린 이슈트방 사보의 <아버지>(1966) 등이 대표작으로서 평가되고 있다.
작품 감상(폴란드)
[편집]재와 다이아몬드
[편집]Papiol i diment
감독 안제이 바이다. 주연 즈비그니예프 치브루스키, 에바 쿠지제지제프스카. 흑백·시네마스코프. 1958년 제작.
<내용>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5년 폴란드는 나치스의 포악(暴惡)한 점령으로부터 해방되려고 하였으나, 런던에 망명 중인 옛 폴란드정부와 러시아로 도망간 폴란드 공산당이 서로 해방 후에 있어서의 정권장악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치열한 대립의 양상을 보였다. 점령 중에 계속 지하활동을 벌여왔던 청년 마체크(치브루스키)는 망명정부로부터 이 마을의 공산당 지도자를 암살하라는 비밀지령을 받는다. 그는 그날 밤 술집에서 크리스티나와 만나 호텔의 어느 방에서 사랑을 맺는다. 이리하여 그는 삶에 대한 욕망을 갖기 시작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조직은 그를 방치하지 않으며 암살을 수행시킨다. 그런 그도 역시 병사들에게 쫓기는 몸이 되고 결국 죽게 된다.
<감상> 정치에 말려들었다고 하기보다는 스스로가 자진해서 정치에 참가하였으나 도중에 이상을 잃고 단순한 테러리스트가 되었고, 행복을 발견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자기가 만든 함정에 걸려서 자멸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불행한 주인공 마체크에 의해 바이다는 폴란드민족의 통절한 전쟁경험을 상징화하려고 했다. 폴란드파의 최고 걸작이라는 이름에 손색없는 충격적인 작품이라 하겠다.
수녀 요안나
[편집]修女- Matka Joanna od Aniolow
감독 예지 카발레로비치. 주연 루치나 빈니카, 에치스바프 보이트. 흑백·와이드. 1960년 제작.
<내용> 17세기 폴란드왕국의 동북부에 한촌(寒村)이 있었다. 그 한촌의 수녀원(修女院)에 사제(司祭) 스링(보이트)이 부임한다. 수녀원의 동정녀(童貞女)들이 악마에 들려 무질서한 난행(亂行)에 몰두하고 있기 때문에 그 악마를 내쫓기 위하여 대사교구(大司敎區)로부터 파견된 감독이다. 스링은 우선 원장으로 있는 요안나(빈니카)를 만나보고 그녀가 모든 악의 근원임을 알게 되어 그녀의 영혼을 구하고자 나날을 보내게 된다. 그러는 동안에 악마가 요안나를 떠나서 스링의 육체 속으로 들어왔음을 느낀다. 그는 번민을 해결하지 못한 채 이교(異敎)인 유태교의 사제를 만나서 이 사실을 전부 고백한다. 그는 자기의 몸 속에 있는 악마의 존재에 대하여 지금까지 느끼지 못한 법열(法悅)을 느끼고, 그것을 영구히 자기에게 머물러 있게 하기 위하여 도끼를 휘둘러서 죄도 없는 이웃 사람을 죽이고, 요안나를 구하려는 자기의 역할을 마침내 다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감상> 감독 카발레로비치는 <그림자> <야간열차> 등으로 알려져 있으나 <수녀 요안나>는 그의 뛰어난 연출에 의하여 최고의 걸작이 되었다. 역사적인 배경과 종교적인 테마의 특수성 때문에 이해하기 곤란한 점도 있으나, 인간 내부에 있어서 영혼과 육체의 대립이라고 하는 그리스도교적인 주제를 묘사하면서, 신(神)에 대한 인간의 반역을 불가피한 것으로 긍정하고 거기에서 숙명적인 비극을 발견하고 있다.
물 속의 나이프
[편집]Noz w Wodzie
감독 로만 폴란스키. 주연 요란타 우메츠카, 레온 니엠치크, 지크문트 마라노비치. 흑백·시네마스코프. 1962년 제작.
<내용> 중년남자 안제이(니엠치크)와 그의 젊은 아내 크리스티네(우메츠카)는 휴일(休日)을 호수에서 요트놀이로 보내기로 하였는데, 그곳에 젊은 학생(마라노비치)이 우연히 끼어들어 어느 사이엔가 크리스티네를 둘러싸고서 두 남자의 마음 속에 사랑과 질투의 맹렬한 불길이 타오른다. 좁은 요트 속에서 그것은 숨가쁜 드라마로까지 발전되고 안제이는 학생을 물 속으로 던져 버린다. 사건을 경찰에 알리려고 뛰어간 안제이가 없는 사이에 그때까지 몸을 숨기고 있던 학생이 요트로 되돌아와서 크리스티네와 사랑을 속삭인 후에 사라진다. 다시 돌아온 안제이는 아내의 입으로부터 부정(不貞)의 고백을 받으나 그것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믿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감상> 폴란스키는 사회주의국가 중에서 가장 서구적이라고 일컬어지는 폴란드에서도 서구적인 작가로 알려져 있는데, 이러한 평가는 이 영화를 보더라도 수긍이 간다. 여기서는 폴란드의 지난날의 국민적·역사적 비극은 이미 그림자도 없어지고, 오늘날의 평화로운 소시민적(小市民的)인 개인생활 속의 조그마한 소용돌이만이 응시되고 있다. 이것은 확실히 새로운 경향이긴 하나 또한 폴란드영화의 주제의 상실과 왜소화(矮小化)를 가리키는 것이다. 폴란스키가 이 영화를 제작한 후에 프랑스와 영국에서 제작활동을 전개하면서 고국에 돌아가지 않은 것도 이유가 있다고 보겠다.
파사제르카
[편집]Pasazerka
감독 안제이 뭉크. 주연 안나 체피엘레프스카, 알렉산드라 슈론스카. 흑백·시네마스코프. 1963년 제작.
<내용> 영국의 어느 항구를 떠나려고 하는 호화스러운 여객선(旅客船) 위에서 리자(슈론스카)는 자기와 비슷한 연령의 한 여자선객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그것은 독일여자인 리자가 지난날 아우슈비츠의 수용소에서 여자 간수를 지내던 어두운 과거와 연결된다. 몇 십만명의 유태인과 폴란드 사람을 죽인 나치스의 잔학행위 속에서 작은 공범자였던 리자는 이 여자선객을 보고 수용소에서 알게 된 유태인 여자 마르다(체피엘레프스카)의 모습을 보았다고 느낀 것이다.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지옥(地獄)과 같은 수용소의 악몽같은 나날이 리자의 추상(追想)과 고백의 형식으로 스크린에 나타난다. 그러나 이러한 고백 속에서도 리자는 자기를 분식(粉飾)하고 자기를 변명하고 있어 마침내 진실을 말할 수 없게 된다. 리자가 영구히 자기의 죄로부터 자유가 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감상> 자동차 사고로 급사한 안제이 뭉크 감독이 미완성으로 남겨 놓은 영화를 그의 친구들이 뭉크의 플랜에 의해서 편집한 영화인데, 작품으로서는 오히려 거칠고 박력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전쟁 중의 수용소를 그린 영화는 많으나, 이 작품은 그 직접적인 피해자인 폴란드 사람이 그야말로 기록적인 수법으로 묘사했다는 점과, 또한 이러한 잔학을 나치스의 범죄라기보다는 인간성의 보다 깊은 곳에서 살피려 했다는 점 등에서 뭉크의 특색이 나타나고 있다.
작품 감상(체코슬로바키아)
[편집]밤의 다이아몬드
[편집]Demanty noci
감독 얀 니예메츠. 주연 라디슬라프 얀스키, 안토니 쿰베라. 흑백·시네마스코프. 1964년 제작.
<내용> 나치스의 수용소로 보내는 호송열차에서 두 소년이 뛰어 내려 밤의 밀림으로 탈주를 기도한다. 천둥과 빗속을 소년들은 필사적으로 도주한다. 날이 밝은 뒤에 농가에 도착한 두 소년은 혼자서 집을 지키고 있는 주부(主婦)로부터 한 조각의 빵을 얻어 먹는다. 그런데 그녀가 나중에 탈주자를 경찰에 밀고하지는 않을까 하여 안전상 그녀를 죽여버릴까 하지만 두 사람은 결국 죽이지 못한다. 그녀가 결국 밀고했는지 두 사람은 농민자경단(農民自警團)의 추격에 쫓겨서 미친 사람과 같이 이리저리 도망다닌다. 체포가 된다면 두 사람은 군중들에게 괴로운 죽임을 당하거나 또는 경찰에 끌려가 사형을 받는 도리밖에 없다. 잔인한 추적자와 절망적인 도망자와의 대치상태로 영화는 끝난다.
<감상> 얀 니예메츠는 체코슬로바키아 영화계에서 가장 젊은 시대의 준재(俊才)로서 주목을 끌고 있다. <밤의 다이아몬드>는 그의 장편 처녀작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으나, 수법적인 면에서 본다면 프랑스의 누벨바그의 영향을 받으면서 지금까지 체코슬로바키아 영화의 약점인 양식적(樣式的)인 실험주의의 폐단을 완전히 탈피한 잔혹한 그대로의 리얼리즘을 지향하고 있다. 카메라를 자유분망하게 구사한 심리적인 영상(映像)의 기법(技法)이 그의 특징이라 하겠다.
작품 감상(헝가리)
[편집]아버지
[편집]Apa
감독 이슈트방 사보. 주연 안드라스 바린트, 미크로슈 가볼. 흑백·시네마스코프. 1966년 제작.<내용> 아버지(가볼)는 의사였으나 전쟁이 끝나는 날 과로로 죽었다. 그때는 아직 철도 들지 않았던 자식 다코(바린트)는 어머니의 손으로 양육되는데, 그는 언젠가부터 죽은 아버지를 신성한 우상으로 받들고서 레지스탕스의 가장 용감한 투사로서 나치의 점령군과 싸웠던 영웅이었다고 사람들에게 말하였으며, 자기도 그렇게 믿게 되고 만다. 청년이 되어 대학에 들어갔을 때인 1956년에 '헝가리 의거'가 일어나고, 그는 다른 학생들과 함께 이 와중에 뛰어든다. 의거가 끝나고 다시 일상생활로 되돌아왔을 때 자식은 자기 스스로 아버지에 대해서 사실은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치게 된다. 그래서 그는 옛부터 아버지를 알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서 생각해 낼 수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물어보고 다닌 결과, 그의 풍채가 당당치 않은 평범한 한 사람의 시민에 불과했다는 현실적인 모습에 환멸을 느낀다. 그래서 자식은 비로소 아버지의 환영으로부터 자유스러운 몸이 되어 자기 자신의 생활을 가지게 된다.
<감상> 1938년생인 사보 감독은 이 영화로써 자기들의 세대, 즉 헝가리의 해방과 환멸과 자유회복의 시대를 그대로 그렸다. 종전(終戰)과 헝가리 의거라는 두 개의 역사적 사건은 그대로 이 영화에 테마로 직결되고 있다.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의 신성화(神聖化), 그리고 그의 우상파괴― 이 <아버지>는 동구에 있어서의 스탈린주의의 지배와 그 몰락을 상징화한 것이라 보아야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