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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예술·스포츠·취미/영화/영화의 기초지식/세계영화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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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영화의 역사〔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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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界映畵-歷史〔槪說〕

지금 영화의 역사를 돌아보면 그것은 발명 이래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불과 한 세기(世紀)를 조금 넘었을 뿐이다.

회화(繪畵)·건축(建築)·조각(彫刻)·연극(演劇)·무용(舞踊)·문학(文學) 등과 같은 자매예술(姉妹藝術)이 몇 천년, 몇 만년의 창고(蒼古)한 역사를 가진 것과 비교해 보면 영화의 역사는 이제 막 시작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런 이유로 해서 영화를 '제7의 예술'이라고도 하고 '영상예술(映像藝術)의 파이어니어'라고도 한다. 하기는 인간이 영상(映像)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오랜 옛날의 일로, 일찍이 희랍의 철학자인 플라톤은 <폴리테이아> 속에서 저 유명한 동굴의 비유(比喩)를 말하고 있다. 어두운 동굴 속에서 불빛에 비친 사물의 그림자를 봄으로써 사물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하기는 눈을 통하여 본다는 인간의 신체구조(身體構造) 자체를 암상자(暗箱子)의 원리에 비교한 생각은 오랫동안 있어 왔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탈리아의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착안했었고, 16세기의 이탈리아의 조각가인 G.B.델라 포르타는 '암상자의 원리'를 처음으로 설명해 냈다.

이러한 생각은 다시 환등(幻燈)의 개념으로 나타나 17세기 이후에는 세계 각처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영화가 발명되기 위해서 필요했던 사진기(寫眞機)와 필름은 좀더 시간이 필요했다. 간단히 말하면 1757년에 I.B.베커리는 감광막(感光膜)에 대한 광선의 작용을 발견했다. 이때의 감광막은 은(銀)의 염화물이었다. 이후에도 여러 사람의 노력이 있었지만 특히 1802년에 런던의 왕립학회(王立學會)에 제출한 각서에서 웨지우드가 사진술(寫眞術)의 기술과 정의(定義)를 확정지었고, 이어서 죠셉 니세포르 니엡스는 1822년에 아스팔트 감광층(感光層)에 영상을 고정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후로 피사체(被寫體)를 태양에 노출시키는 긴 시간의 과정이 필요없게 되는 렌즈가 나타나게 되었고, 감광체로서 젤라틴이 사용되었다. 1884년에 와서 조지 이스트먼이 젤라틴지(紙)의 박리 필름(剝離 film)을 사용했고, 1887년에는 셀룰로이드 필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영화가 발명되기 위해서 필요했던 세 가지 요소(要素) 즉, 환등기의 개념, 사진기의 발명, 고감도(高感度) 필름 등이 갖추어지기까지에는 이런 장기간에 걸친 준비가 필요했다. 1895년 프랑스의 루이 뤼미에르와 오귀스트 뤼미에르 형제의 손으로 오늘날의 영화 탄생이 이루어졌다. 시네마토그래프(Cinematographe)라고 불린 이 발명은 이 해 3월 22일 렌가(街)에 있는 국민공업장려회에서 <뤼미에르 공장의 점심시간>이라는 제목의 필름을 시사(試寫)했고 정부로부터 특허를 얻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영화의 발명은 비단 프랑스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미국의 발명왕(發明王)인 토머스 에디슨은 1889년 10월 6일에 키네토스코프(kinetoscope)를 발명했다. 같은 미국인 프랜시스 젠킨스가 1894년에 바이타스코프(Vitascope)와 판타스코프(Phantascope)를 발명하였고, 영국에서는 1896년에 로버트 W.폴에 의해서 디어트로그래프(Theartographe)가, 1895년 독일에서 막스 스클라다노프스키가 비오스코프(Bioskop)를 발명했다. 같은 독일사람인 오스카 메스커의 비오폰(Bio­phon)도 덧붙여야 할 것이다.

결국 이렇게 보면 현대예술의 총아인 영화는 19세기의 한밤중에서 20세기의 첫새벽에 걸치는 사이 근대의 과학속에서 잉태하여 태어났다. 동시에 프랑스·미국·영국·독일 등 각국에서 거의 동시에 태어난 영화는 그 후 불과 4-5년 안에 전세계의 각지로 퍼지게 되어 영화는 20세기의 예술로서 눈부신 각광을 받기에 이르렀다.

활동사진의 세계적 정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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活動寫眞-世界的定著

초기의 영화가 활동사진(活動寫眞:moving picture)이라 불리고, 과학적 완구(科學的玩具)라고 불리면서 전세계에 퍼지게 된 것은 그만큼 영화에 대한 호기심이 강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앞에서 말한 여러 발명국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아시아 지역에 영화가 건너온 것만도 일본이 1896년이고, 한국에서 처음으로 공개되기는 1903년, 만주에서는 1901년 등이었으니 그 전파의 속도를 알 수가 있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영화에 대한 전세계의 호기심은 재빨리 각국에 수많은 촬영소와 극장을 속출하게 했다. 미국에는 장차 할리우드라고 불리는 영화의 메카가 건설되어 가고 있었으며, 프랑스에는 파테나 고몽이 창설되었고, 독일에는 비오그래프를 효시로 우파 등이 창설을 보았고, 영국에서도 파카를 필두로 수많은 제작회사(製作會社)가 만들어졌다. 한마디로 말하면 영화는 발명과 함께 전세계에 엄청난 관객을 얻게 되었고, 여기에 발맞추어 세계 각국에는 우후죽순처럼 수많은 영화제작회사와 배급회사가 출현해 활동사진의 정착기(定著期)를 이루게 된 것이다.

그런데 활동사진은 단순한 과학적인 완구로서의 지위에 머물러 있지 않게 되었다. 초기의 활동사진이라면 대개 단척물(短尺物)의 짤막한 필름이었다. 500피트에서 1,000피트 또는 그것과 대동소이한 것들이다. 조르주 멜리에스의 대표적 작품인 <월세계 여행>이나 <잔 다르크>, 미국에선 에드윈 S.포터가 만든 <대열차강도> 같은 것도 고작해서 15분에서 20분 내외의 필름이었다. 한때 미국에서 '체이스 픽처'라든가 '헤일의 전망차(展望車)'라고 불리었던 것이 유행한 것도 모두 활동사진의 초기였던 1910년 내외까지의 일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구경거리에 들떠 있는 동안에 활동사진에는 새로운 생명이 움트고 있었다. 그것이 곧 영화의 예술화(藝術化)운동이었다. 어느 면에서는 영화가 본래의 예술성을 드러내게 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영화의 예술성 확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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映畵-藝術性確立

이런 움직임은 세계 각국에서 제각기 다른 모양으로 일어나게 되었는데 프랑스에서는 이른바 '필름 다르(film d'art)'운동으로 나타났다. 1909년에 만들어진 <기즈공(公)의 암살사건>을 필두로 해서 여러 편의 영화가 만들어졌다. 필름 다르 운동에는 당대의 프랑스의 유명한 예술가들이 참가했다. 아나톨 프랑스나 빅토르 위고, 에드몽 로스탕 등의 작품을 스크린에 옮겼으며, 사라 베르나르·마담 레잔느·막스 디어리 등 무대인이 출연했고, 레지나 파테, 트레하노바 라벨=오텔로 같은 무용가들이 발레영화를 만들어 보기도 했다.

대체로 로마네스크식의 멜로드라마를 만들기는 했지만 이 필름 다르 운동은 영화에 풍부한 스토리를 도입했고, 본격적인 연기자(演技者)를 출연하게 하는 등 공로도 많았으나 한편으론 영화를 무대의 종속물처럼 만들었다는 비판도 듣게 되었다.

미국에는 또다른 커다란 업적이 영화예술 위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D.W.그리피스는 작품 <국민의 창생(創生)>(1915)과 <인톨러런스>(1916)를 만들어 미국 영화사상뿐만 아니라 세계 영화사상에 불멸의 이름을 남겼다. 장척(長尺)의 필름은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상한 습관을 깨뜨린 이 작품은 여러 가지 면에서 새로운 기원을 세웠다. 미국의 남북 전쟁을 배경으로 한 <국민의 창생>은 영화사상 처음 보는 박진감(迫進感)이 넘치는 스펙터클한 것이었으며 <인톨러런스>는 파르타자르 왕조(王朝)의 바빌론, 그리스도의 생애, 산 바르톨로메 학살(虐殺), 현대의 계급적인 갈등 등 네 개의 에피소드를 엮은 20시간이 넘는 대작으로 만들었다. 한편 그리피스의 영화 속에서는 지금까지의 구경거리의 활동사진에서는 볼 수 없는 영화기법(映畵技法)이 생생하게 발견되었다. 클로즈 업이라든가 몽타주 수법 같은 것이 풍부하게 사용되면서 영화표현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나타냈다.

이와는 또 다른 면에서 찰리 채플린은 영화예술에 불멸의 공헌을 했다. 사일런트(無聲)영화 시대의 희극(喜劇)을 대표하는 채플린은 <거리의 등불> <황금광(黃金狂)> <독재자(獨裁者)> 등 수많은 명작을 만들었으며 스스로 감독과 주연을 겸했다. 그의 희극에는 가난한 서민들에 대한 깊은 연민(憐憫)과 애정(愛情)이 깔려 있고 폭력(暴力)·불의(不義)에 대한 분노가 깔려 있었으며 인간의 편에서 기계문명(機械文明)과 비뚤어진 사회제도에 대한 가차없는 고발이 숨어 있었다. 노인으로부터 어린이에 이르기까지 누구나가 채플린의 희극에서 영화예술의 진수(眞髓)를 맛볼 수 있었던 것이다. 이후 채플린은 메리 빅포드, D.페어뱅크스 등과 함께 미국 영화의 진원지(震源地)인 할리우드를 만드는 데 절대적인 공을 세웠다.

영화가 예술성을 높이는 데에는 이러한 노력들과 함께 구 소련에서 일어났던 몽타주 이론(montage理論)의 확립과 또다른 하나의 큰 운동으로서 아방가르드(avant­garde) 영화를 들지 않을 수 없다.

몽타주 이론이란 영화예술의 특수성이 영화의 편집(編集)에 있다고 보는 입장으로서 구 소련의 일군(一群)의 영화인들에 의해서 주장되었다. <전함(戰艦)포툠킨>을 만든 S.M.에이젠슈타인, <어머니>를 만든 푸도프킨을 비롯해서 도브젠코, 티모세코 등이 여기에 들어간다. 특히 에이젠슈테인은 몽타주란 단순한 필름에 절단(切斷)과 연결(連結)의 작업으로서의 편집(editing)이 아니라 메트릭 몽타주, 리드믹 몽타주, 토널 몽타주, 오버톤 몽타주, 지적(知的) 몽타주 등을 요약해 영화 속에 몽타주적인 변증법적(辯證法的) 이론을 내세웠다. 그는 동양의 문자가 갖춘 상형성(象形性)에서 몽타주의 원리를 찾기도 했다. 아무튼 몽타주 이론은 그리피스에서 영향을 받아 이들에게 와서 독특한 영화 이론을 이루었으며 무성영화시대의 대표적인 미학(美學)을 이루기도 했다.

한편 유럽에서 일어났던 아방가르드(前衛映畵)운동은 이들과는 또다른 면에서 영화의 본질을 찾아낸 것이다. 아방가르드 영화운동은 중점적으로 말하면 영상적 표현(映像的表現)의 본질을 찾아낸 전위적인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가 너무나도 많은 대중의 열광 때문에 전세계의 영화계는 영화의 상업성(商業性)에 눈이 멀어버린 감이 있었다. 그러나 영화에는 영화만이 표현할 수 있는 영화 본류의 미학(美學)이 있을 것이다. 이들은 순수영화(純粹映畵)·절대영화(絶對映畵)·인상주의(印象主義)·입체주의(立體主義)·초현실주의(超現實主義) 등을 내걸면서 영상(映像)이 인간의 내부세계(內部世界), 즉 의식(意識)의 세계를 그려내는 실험적인 작업에 몰두했다. 시각(視覺)을 통해서 볼 수 있는 모든 영상의 가능성(可能性)은 다 실험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아방가르드 영화운동은 1913년 이탈리아의 한 다락방에서 리치오니 카뉴도, 다눈치오, 상드랄, 아폴리네르, 피카소, 페르낭 레제, 라벨, 스트라빈스키 등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1916년에 '미래파 영화선언(未來派映畵宣言)'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운동은 20년대에 들어서서 프랑스와 독일에서 작품 발표로 결실을 보게 되었다. 루이 델뤼크, 제르메느 뒤락, 장 에프스탕, 르네 클레르, 한스 리히터, 비킹 에겔링, 아벨 강스 등이 속출하여 유럽 아방가르드 영화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이 자리에 자세히 다 언급할 수는 없으나 이 아방가르드 영화운동에는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유럽 예술운동의 과도기였다는 점과 함께 문학·음악·미술·연극 부문의 전위예술가들이 참가했으며 이들의 노력으로 영화예술은 영혼과 포에지(詩)와 아름다움을 찾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영화는 20년대에서 30년대로 넘어가면서 전세계를 휩쓰는 대중적인 매체(媒體)로서 또 한편으로는 영상예술로서의 확고한 지위를 쌓아 올렸다. 그러나 여기에서 영화의 예술성(藝術性)과 기업성(企業性)이라는 양면(兩面)의 칼날은 위대한 시네마의 기능(技能)이면서 동시에 스스로를 해(害)하는 모순도 지녔다.

한편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1926년에 영화는 사일런트 시대의 무성(無聲)에서 토키 시대의 발성(發聲)영화 시대로 넘어가 시청각(視聽覺)의 종합매체로 발전하기도 했다.

전후 현대영화의 조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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戰後現代映畵-潮流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르고 난 뒤의 영화예술은 가장 커다란 시련 앞에 놓이게 되었다. 그것은 1940년대에 이미 출연을 예고했던 텔레비전이 실용단계에 이르러 전세계에 퍼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전후의 세계의 영화는 전쟁이라는 폐허 속에서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이탈리아에 있어서의 네오 리얼리즘(新寫實主義)이 로베르토 로셀리니나 비토리오 데 시카 등을 앞세우고 화려하게 등장했다. 로셀리니의 <무방비도시(無防備都市)>, 데 시카의 <자전차 도적> 등은 네오 리얼리즘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다큐멘터리적인 사실성을 기조로 한 이 경향은 뒤에 가서 페데리코 펠리니의 상징성(象徵性)의 표현,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현대적인 추상(抽象), 그리고 베르톨루치의 새로운 사회적 감각(社會的感覺)과 조르주 파졸리니의 대담무쌍한 상징의 세계로 변모해 왔다.

프랑스 영화에서도 줄리앙 뒤비비에, 크리스찬 자크, 크롤드 오탕 라라, 르네 클레르를 비롯한 거장의 시대가 가고 '누벨 바그(새물결)'라 불리는 전후의 세대가 등장했다. 로마네스크의 세계에서 탈출하여 일상적(日常的)인 사실성에서 인간의 진실을 찾으려는 이들 1960년대의 영화미학은 시네마 베리테(cinema ve­rite)라고도 불리었다. 로베르 브레송, 클로드 샤브롤, 장 뤼크 고다르, 루이 말 등 여기에 집결한 사람은 많다. 알랭 레네 같은 사람도 뉘앙스는 약간 다르지만 전후 프랑스 영화를 대표한다.

로베르 브레송은 <저항(抵抗)>에서, 클로드 샤브롤은 <종형제(從兄弟)>에서, 알랭 레네는 <히로시마, 나의 사랑> 등과 같은 걸작을 내놓고 있다.

미국영화도 전후에 들어와 할리우드가 기울어지기 시작하면서 '시네 도큐망 소시얼'이라고 불리는 TV출신의 신인들이 괄목할 만한 활약을 시작했다.

특히 미국에서 유럽 아방가르드에 이어 그 전위적 정신이 언더그라운드 영화, 엑스퍼리멘탈 영화에 계승되었고, 그 중에서도 극영화로 표출된 '뉴 아메리칸 시네마'라 불리는 경향으로 나타난 것은 특기할 만하다. 그것은 뉴 아메리칸 시네마가 60년대에서 70년대로 넘어오면서 세계의 영화예술의 첨단을 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와 현대인의 삶과 본능(本能), 그리고 모순(矛盾)을 이들만큼 정직하고 대담하게 그리는 영화작가들은 없을 것이다. 근래의 작품으로는 아더 펜의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마이크 니콜스의 <졸업>, 랄프 넬슨의 <솔저 블루>, W.프리드킨의 <프렌치 커넥션> 등등이 이러한 주목을 끄는 작품들이다.

이 밖에 영국에서는 한때 '프리 시네마' 운동이 일어나 활력을 보이는가 했으나 리처드 크레이톤이나 토니 리처드슨 등이 몇 개의 작품을 냈고, 카렐 라이스와 존 실레딩거 등이 활약하고 있다.

여기에서 지적해야 하는 것은 이러한 각국의 영화조류(映畵潮流)나 경향(傾向)을 따라서 본 것 이외에 세계적인 거장(巨匠)들이 활약한 점이다. 엘리아 카잔(미국), 잉그마르 베리만(스웨덴), 캐롤 리드(영국), 르네 클레망(프랑스), 구로자와 아키라(일본), 알프레드 히치콕(미국) 등 결코 적지 않다. 여기에서는 간략하게 세계영화의 역사를 살펴보는 관계상 더 깊이 파고 들어갈 여유가 없다.

끝으로 이러한 전후의 세계영화를 개관할 때 역시 50년대에 들어서면서 전세계에 본격화한 TV시대에 마주선 영화는 고된 시련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이 시련에 대항해서 영화는 컬러(色彩)와 대형화면(隊形畵面)을 수없이 만들었다. 52년에 만든 시네마스코프 <성의(聖衣)>를 비롯해 <비스타비전 토드-AO>(58년), 70밀리 화면의 스크린(<남태평양>, 1961), 이 밖에 입체영화도 시도했다. 그러나 일단 시련의 바람을 안은 영화는 앞에서 본 전후 각국의 전위적 움직임과 함께 격심한 진통을 겪고 있다. 즉 영화의 예술로서의 확고한 기반을 다시 구축해야 할 계제에 놓인 것이다. 안이한 기업성에 입각한 영화산업은 변혁을 치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은 지금 380도 화면(畵面)의 영화, 확대 영화(擴大映畵, expanded cinema), 멀티 화면(畵面), 환경 영화(環境映畵, environment cinema) 등을 등장시키고 있다. 이러한 매체의 발달은 영화의 위력을 보다더 넓고 깊게 인간의 문화에 근원적(根源的)인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세계영화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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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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映畵-誕生

1895년 12월 28일, 파리의 그랑 카페에서 시네마토그래프가 공개되었다. 이것을 영화의 탄생으로 보는 것이 오늘날 통설로 되어 있다. 물론 이전에도 비슷한 장치가 고안되어 있었다. 즉, 1894년에는 미국에서 토머스 에디슨이 키네토스코프를 발견했다. 원래 이것은 한 번에 한 사람씩밖에 볼 수 없도록 된, 들여다 보는 식의 기계였는데, 이것을 스크린에 비추어 여러 사람이 동시에 볼 수 있도록 만들려는 연구가 여기저기서 행해졌다. 미국에서는 아매트와 젠킨스가 판타스코프란 이름으로 공개하고, 독일에선 막스 스클라다노프스키가 비오스코프를, 영국에서는 윌리엄 폴이 애니마토그래프를 공개했다. 그리고 1896년에는 에디슨도 바이타스코프를 발표했고, 이탈리아와 러시아에서도 그와 같은 것이 소개되었다. 그 중에는 색깔을 나타내거나 소리를 내는 것도 있었지만, 스크린에 비춰진 영상(映像)이 움직이도록 만든 것은 모두 공통적이었다. 더구나 이 장치들이 서로 아무런 관계 없이 개별적으로 각자의 나라에서 고안되고 공개되었다는 것이 다른 발명과 다른 점일 것이다. 말하자면 영화의 발명은 사진에 의한 화상(畵像)의 기록이나 분해사진(分解寫眞)에 의한 움직임의 재현이며, 셀룰로이드 필름에 의한 장시간의 투영(投影) 등 필요한 원리와 재료가 이 무렵에 이미 고안되어 있어서, 이것들을 짜맞추기만 하면 될 단계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따라서 영화는 개인의 발명이라기보다 시대의 발명이라는 것이 옳은 말이다. 그럼에도 뤼미에르 형제의 시네마토그래프로 영화를 대표케 하는 것은 이것이 가장 기술적으로 잘 되어 있었고, 흥행적으로도 대성공을 거두어 세계적으로 소문이 났었기 때문이다.

멜리에스의 몽환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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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lies-夢幻劇

뤼미에르는 속성 카메라맨을 양성하여 세계각국에 파견, 진기(珍奇)한 사진을 촬영해 왔으며 그 필름을 시네마토그래프의 기계와 함께 팔았다. 그는 영화를 이처럼 사실을 기록하는 것으로 생각했었다.

프랑스의 멜리에스(Georges Melies)는 첫 공개된 시네마토그래프에 감동한 한 사람이었는데, 특허권을 사려고 협의했으나 뤼미에르에게 거절당하고는, 하는 수 없이 영국의 기계를 사서 제작에 착수했다. 그의 작품은 뤼미에르의 것과는 달라, 트릭 영화가 대부분이었다. 촬영을 중단하고 인물이나 무대의 모양 바꿈을 하는 빠른 변화를 비롯하여 많은 트릭을 시도했다. 원래 마술사이며 자동인형의 고안자이고 연출가이기도 했던 멜리에스는 전용 스튜디오를 만들어서 여러 가지 환상적인 이야기를 꾸며 냈다. 그 중에서도 <월세계 여행>(1902)은 대표적인 대작이다. 줄 베르느와 H.G.웰즈의 소설에서 힌트를 얻은 이 영화는 다분히 공상적인 장면을 전개했다. 한 과학자가 로켓을 고안한다-탐험대가 그것을 타고 성대한 환송을 받으면서 공중으로 발사된다-로켓이 달에 착륙한다-탐험대가 달에 내려선다-별의 관찰, 탐험대의 동굴 탐험 등으로 엮어진 이런 식의 영화는 수많은 장면들로 이루어져 있다. 말하자면 무대극 장면을 짧은 여러 토막으로 나눈 것 같은 것으로, 전체의 이야기도 공상적이고, 개개의 장면들도 자못 환상적이다. 멜리에스는 이러한 비현실적인 제재(製材)를 즐겨 다루었으며, 이것을 솜씨 있는 장치나 트릭으로 나타냈던 것이다. 즉 뤼미에르는 현실을 기록하는 것이 영화라고 생각한 데 반하여, 멜리에스는 도리어 꿈을 그리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 두 가지는 모두가 영화의 표현력을 살리는 방법으로서, 얼핏 보기에 정반대로 보이는 이 두 개의 방향을 향하여 영화의 표현은 오늘날까지 발전해 왔다고 말할 수 있다.그러나 그 멜리에스마저도 영화를 무대란 생각으로 촬영하고 있었다. 비록 장면을 짧게 세분(細分)했다 하더라도 하나의 장면을 같은 위치에서 단숨에 촬영하는 것인데, 마치 객석에서 무대를 바라보고 있는 듯한 촬영법이다. 흔히 1장면에 1커트란 말이 있는데, 초기의 영화는 이러한 촬영법에 한정되어 있었다. 영화 보급은 의외로 빨라서, 20세기에 접어 들자 세계 각국에서 영화를 상연하고 또한 제작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무대극과 같은 촬영방법은 어디서나 공통적이었다. 물론 영화의 내용도 상당히 무대적이었다.

1910년경까지의 영화는 많아야 1-2롤짜리가 대다수였다. 무대극과 다른 것은 30분 미만의 짤막한 영화라는 점이며, 그 범위 안에서 무대극이나 유명한 실화를 영화화하고 있었다. 그래도 대중의 관심은 대단히 높아서 순식간에 영화관이 급속히 늘었다. 이 시대의 특색은 희한한 구경거리로 등장한 영화가 흥행이라는 형식으로 성공을 거둠으로써 제작계(製作界)가 이에 자극을 받고, 차차 기업의 형태를 갖추어 나갔을 것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내용은 빈약했지만 어쨌든 일반의 호기심을 끌었다.

그리피스, 데이비드 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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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vid Wark Griffith(1875-1948)

초기의 영화에서는 장면마다 카메라를 고정시킨 채 촬영하고 있었다. 1장면에 1커트이므로 단조로운 점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움직이는 사진이란 매력이 근저를 이루었고, 오래지 않아 프랑스의 '필름 다르'라 불리던 일파(一派)처럼 무대극을 그대로 촬영한 스타일의 영화로 유명해진 것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연극의 통조림>적인 영화에 활기를 불어넣듯이, 발랄한 표현 방법을 써서 영화에 풍부한 매력을 더한 감독이 있었다. 미국에서 '영화의 아버지'라 불리던 데이비드 워크 그리피스이다. 그는 하나의 장면 가운데에 등장인물의 표정만을 클로즈업 시킨 커트를 삽입했다. 또 각종 크기와 배치로 한 장면을 조립했다. 그리고 추적하는 장면 같은 곳에서 둘 이상의 장면에서 일어난 일을 번갈아 묘사하는 커트백(cut back) 수법도 생각해 냈다. 말하자면, 1장면에 1커트라는 그때까지의 정석(定石)을 크게 깨뜨리고, 인간의 감정이나 심리를 세밀하게 묘사하거나 긴장감을 높임으로써 당시의 영화가 지니지 못했던 참신한 표현력을 펼쳐 보였다. 물론 그에 앞서 클로즈업을 시도한 영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적절한 사용과 여러 가지 수법을 고안·구사하여 작품 전체의 통일까지 꾀한다는 종합된 성과를 올린 최초의 사람은 그리피스였다. 게다가 그는 겨우 3-4롤짜리가 보통 영화였던 1910년대에 <국민의 창생(創生)> (12롤)을 비롯해 <인톨러런스> <지는 꽃>과 같은 길고도 뛰어난 대작을 발표했다. 그 대작은 또 테마에 있어서 정의·용기·관용·애정과 같은 웅대한 것으로 일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당시 유행한 연속활극·희극·단편과는 질을 달리하고 있었고, 그에 따라 히트작품이 되기도 했다. 그 무렵 미국 영화는 에디슨의 특허를 둘러싼 트러블과 로케에 적합한 풍토 등 몇 가지의 이유로 제작 본거지는 서쪽으로 이동, 할리우드가 영화회사의 집결지가 되었으며, 이 그리피스의 작품들은 할리우드 영화의 대(大)스타 시스템과 대작주의(大作主義)를 빚어내는 기초가 되었던 점으로 중요하다. 그리고 또 그의 영화는 멀리 떨어진 유럽 영화에도 영향을 끼쳐, 예술적으로는 몽타주가 영화 표현의 생명이라는 사고방식을 이론상으로나 실천면에서 넓히는 출발점이 되었다.

무성영화의 황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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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聲映畵-黃金期

사일런트 영화의 중기(中期)라는 1910년대-1920년대 초에 걸쳐서는 세계 각국의 영화가 각자의 입장에서 영화 표현의 수법을 모색·연구하여 제재나 표현양식에서 크게 발전한 시기였다. 이탈리아에서는 사극(史劇)영화가 가장 번성하여, <폼페이 최후의 날> <쿼바디스> <카비리아> (모두 1913) 등에서 스펙터클이라는 영화 분야를 확립하고, 북유럽에서는 스웨덴의 <생련사련(生戀死戀)> <영혼 불멸> 등과 같은 신비주의적 드라마에 의한 수작(秀作)을 낳았으며, 독일에서는 <이기주의자>(1919) 등으로 대표되는 표현주의 영화가 주목을 끌었고, 프랑스는 아벨 강스의 <철로(鐵路)의 백장미>(1923)와 같이 영상적(映像的)인 아름다움을 구사한 작품이 나왔다. 그러나 유럽이나 미국에서도 이러한 영화 예술이 본격적으로 탐구되어 뛰어난 개성을 가진 작가가 계속 등장하며, 화려한 영화예술의 개화(開花)를 보게 되는 것은 사일런트 후기이다.

프랑스는 이 시기에 수많은 명작을 발표했다. 루이 델뤼크, 제르메느 뒬라크, 장 르누아르, 장 에프스탕, 자크 페데, 르네 클레르 같은 작가들 모두 빛나는 작품을 남겼다. 그 중에서도 카알 드레이에르의 <심판받는 잔>(1927)은 클로즈업의 연속으로써 드라마틱하게 인간 심리의 미묘한 변화를 포착했고, 클레르는 <이탈리아제 맥고 모자>(1927)로 지적인 우화(寓話)영화를 시도했으며, 페데는 <눈사태>(1925)와 <님의 모습>(1926)으로 비극적인 인간세계를 풍부한 정서로 그렸고, 에프스탕은 <아서 가(家)의 후예>(1928)로 신비한 분위기를 훌륭하게 빚어냈다. 독일에서는 G.W.팝스트의 <마음의 신비(神秘)> <판도라의 상자>(1929)와 프리츠 랭의 <니벨룽겐 이야기>(1924) <메트로 폴리스>(1927), 헤리크 갈렌의 <프라하의 대학생>(1926), F.W.무르나우의 <최후의 사람>(1925), 요에 마이의 <귀향(歸鄕)>(1928) 등에서 주로 사극이나 사회극을 취재하여 역작을 내놓았다. 미국에선 그리피스의 뒤를 이어 세실 B.데밀이 <어리석은 자(者)의 낙원> <십계(十戒)> <왕중왕(王中王)> 등 대작주의(大作主義)로 나아갔으나, 유럽에서 건너온 에리히 폰 슈트로하임과 에른스트 루비치가 날카로운 표현법을 들여와 할리우드 영화에 감각적인 풍요함을 가져왔다. 그 중에서도 슈트로하임의 <어리석은 아내>(1922) <그리이드>(1924)의 진지한 주구와, 루비치의 <결혼철학> <금단(禁斷)의 낙원>(1924) <명랑한 파리장>(1926)의 경묘한 풍속 묘사는 뛰어났었다.

이 시대의 미국 영화에서 또 한 사람의 주목할 만한 작가는 찰리 채플린이다. 영국 무대에서 미국으로 건너가 처음에는 희극 단편의 주연자였으나, 실크 햇과 퉁탕거리는 헐렁한 구두를 신은 독특한 차림으로 성공을 거두어 한 사람의 배우에서 감독으로까지 진출했고, <개의 생활> <키드> <황금광시대(黃金狂時代)> 등의 희극 속에서도 비애(悲哀)의 감정을 나타내어, 빼어난 인생 작가로서 세계의 주목을 모으면서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사일런트 말기의 미국영화는 기업과 작품의 양면에서 할리우드 영화의 확립을 성취했다고 볼 수 있다. 제1차 대전으로 유럽의 영화계가 지친 틈을 타서 단숨에 시장을 넓혀 나갔으며, 이에 따라 상업주의가 번성해져서 스타 시스템을 내세워 오락영화로 기울어 갔다. 루돌프 발렌티노, 더글러스 페어뱅크스, 릴리언 기시, 글로리아 스완슨 등 많은 스타들을 낳았고, <포장마차> <철마(鐵馬)> 같은 서부극에서 독자적인 장르를 만들었다. 그러나 할리우드는 미국뿐 아니라 유럽 각지에서부터도 배우·감독을 널리 모아들여 국제적인 영화도시를 이루고 있었다. 앞서 언급한 슈트로하임, 루비치를 비롯하여, 조지프 폰 스턴버그, 모리츠 스틸러, 로타르 멘데스, 윌리엄 디털레, 프리드리히 무르나우 등 감독만도 유럽에서 모은 인재는 많고 다채롭다.

그 무렵 유럽영화가 더욱 개성이 두드러지게 강화된 것은 앞서 말한대로이다. 미국 영화가 세계의 예술가를 모으고도 그들의 개성을 살리지 못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프랑스의 감각적인 작품들, 이탈리아의 스펙터클 취미, 독일의 사회파 등과 같은 특성 중에서 각 작가들에 의하여 더욱 분화(分化)된 스타일을 보였다. 이들과 함께 주목을 끈 것은 러시아영화이다. 1917년의 혁명 이래 영화는 국영이 되어, 체제가 갖추어지기까지는 많은 시일이 필요했으며, 1925년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의 <스트라이크>에 의해 비로소 러시아영화는 개화기를 맞이했다. 이듬해의 <전함(戰艦) 포툠킨>, 푸도프킨의 <어머니>, 그리고 1927년에는 에이젠슈테인의 <10월(拾月)>, 푸도프킨의 <성 페테르부르크의 최후> 등이 대표하는 것처럼 이 두 작가는 혁명과 대중을 제재로 하여 이 나라의 역사적인 의의를 테마로 빼어난 작품을 만들었다. 그들의 성과는 자기 나라의 역사에서 주제를 택했고, 외국 영화에서 표현 기법(技法)을 본받아 이것을 발전시켰다. 몽타주가 영화의 창조적인 표현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이 영화들로 실험하면서, 이론적으로도 추구하여 이른바 러시아 몽타주론(論)을 이루었다.

전위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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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衛映畵

사일런트 말기의 또 하나의 큰 특징은 영화가 몽타주 표현에 의해 어디까지 그 재래식 영화의 테두리를 타파할 수 있는가를 시험하는 것 같은 자유롭고 용감한 실험적 작품이 생겨, 전위영화라 불리는 하나의 장르를 형성한 점이다. 물론 영화의 표현에 여러 가지 실험을 시도하는 것은 일찍부터 실시되었으나, 그것이 질과 양이 함께 크게 발전하여 화려한 시기를 이룬것은 사일런트 말기의 수년 간에 불과하다.

주로 유럽, 특히 프랑스·독일에서 왕성했으며, 나라나 작가에 따라서 시험의 실체는 상당히 달랐다. 독일의 발터루트만(<대도회교향악>) 등이 기계적인 몽타주에 의해 화면(畵面)의 의미를 거부하고 시각(視覺)음악적인 표현을 노린 데 반하여, 프랑스의 많은 작가가 주로 조형(造形)감각에서 사상적인 것을 표현하려고 시도한 것과 같은 차이를 볼 수 있다. 당연히 스토리에 구애받지 않는 영화가 대부분을 차지했다. 프랑스에서도 처음에는 도형(圖形)이나 추상적인 영상에 의한 작품이 시도되었지만, 뒤에는 의미를 가진 구상적(具象的)인 영상을 통하여 날카롭고 깊은 의도를 내포시키는 작품이 주류를 차지했다. 그 중에도 루이스 부뉴엘의 <안달루시아의 개> <황금시대>, 제르메느 뒬라크의 <조개껍데기와 수도사>, 장 비고의 <품행영점>, 장 콕토의 <시인의 피>, 만 레이의 <인산인해> 등은 그 대표적인 작품으로 논의를 일으켰다. 그러나 전위영화는 너무나 예술지상주의적이거나 관념적·형식주의적으로 치우쳤기 때문에 대중으로부터 떠나, 토키 시대의 도래로 인하여 그 유행에 종지부를 찍었다.

토키 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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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lkie 前期

1927년에 뉴욕에서 공개됐던 <재즈 싱어>는 토키의 제1작으로서 공전(空前)의 히트를 기록했다. 레코드를 동시에 돌리는 그때까지의 불완전한 방식과는 달리, 필름에 녹음된 소리는 화면과 완전히 일치하게 된 후부터 급속히 보급되어, 수년 동안에 영화는 세계적으로 본격적인 토키 시대에 들어갔다.

그것은 영화에 있어서 단순한 기술혁명에 그치지 않고, 예술적으로나 기업적으로 새로운 체제를 필요로 했다. 마이크로폰은 카메라의 자유를 구속했으며, 몽타주 방법도 화면만의 사일런트 영화가 일단 확립된 데다 수정을 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작은 저절로 대규모화하여 영화 산업은 더욱더 대자본을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보다더 큰 변화는 음악이나 자연음은 물론 대사를 자유로이 말할 수 있게 됨으로써 영화내용이 갑자기 연극과 문학의 요소를 더했다는 점이다. 프랑스에서는 르네 클레르(<파리의 지붕밑> <자유를 우리에게> <최후의 억만장자>), 자크 페데(<외인부대> <미모자 관(館)> <여자만의 도시>), 장 르누아르(<최하층 사회> <커다란 환영(幻影)>), 줄리앙 뒤비비에(<하얀 처녀지(處女地)> <우리들의 친구들> <무도회의 수첩>) 등 우수한 감독의 활약에 의해 또 다시 예술의 난숙기(煖塾期)를 맞이했다. 이 무렵 독일에서는 <싸구려 오페라> <회의(會議)는 춤춘다> <제복을 입은 처녀> 등으로 <미완성교향악> <황온의 빈>을 만들어 낸 오스트리아와 함께 충실한 제작활동을 보였고, 영국에서는 히치콕 등의 극영화와 <유망어선(流網漁船)> <야간우편열차> <아란> 등 다큐멘터리 영화부문에 빛나는 발전을 기록했다.

한편, 미국에서는 스턴버그가 <모로코>를 발표했고, 마일스턴은 <서부전선 이상 없다>를, 루비치는 <러비 퍼레이드>를 만들어서 토키의 화려한 상업주의적 스타트를 장식했다. 연애영화·전쟁영화·뮤지컬은 서부극과 함께 그로부터 당분간 할리우드 영화의 주요 장르가 되었다. 게다가 사회악을 파헤친 <굶주린 아메리카> <암흑가의 탄흔(彈痕)> 등과 풍속희극 <어느날 밤에 생긴 일> 등이 1930년대 할리우드 영화를 특징지었다. 또 컬러 영화의 실용화와 함께 디즈니의 만화영화가 널리 대중의 지지를 얻은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그러나 1939년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할리우드 대작주의의 승리를 보다 웅변적으로 이야기해 준다.

그 무렵 유럽에서는 나치즘의 대두로 유태인 작가는 독일에서 쫓겨났고, 이탈리아도 파시즘에 의해 예술은 국가주의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 접어들자 자유로운 영화제작은 더욱더 곤란하게 되고, 많은 작가들이 국외로 떠나가 영화는 거의 휴식상태에 빠졌다. 오직 미국만은 여전히 활발한 제작을 계속했으나, 존 포드의 서부극(<역마차>), 윌리엄 와일러의 비극(<공작부인> <흑란(黑蘭)의 여자>), 프랭크 케플러의 사회극(<오페라하트> <스미스 워싱턴에 가다>) 등과 같은 개성적인 작가의 장르는 점차 상실되었다.

제2차 대전은 많은 나라들에게 영화계의 쇠퇴를 가져다 주었으나, 전후에는 그것을 떨치고 일어서듯 새롭고 힘찬 약동이 시작되었다. 이탈리아는 로베르토 로셀리니(<무방비 도시>), 비토리오 데 시카(<구두닦기> <자전차 도적>)를 비롯하여 많은 작가들이 생생한 현실을 직시(直視)하고 특히 네오 리얼리즘이라 불린 신선한 사실주의를 전개했으며, 영국은 데이비드 린(<밀회>), 캐롤 리드(<제3의 사나이>) 등 역작(力作)감독들이 활약했고, 프랑스에서는 장 콕토(<미녀와 야수>), 장 들라노아(<악마가 밤에 온다)>. 르네 클레망(<철로의 싸움>) 등 개성적인 작가가 르누아르·뒤비비에 등과 함께 전통적인 인간탐구의 드라마를 재연시켰다. 할리우드 영화의 대작주의도 시네라마, 70mm영화 등 대형 기술의 채용에 따라 새로운 기획을 구상했다. 또 유럽에서는 앞서 열거한 나라들 외에 폴란드, 스웨덴 등에서도 유망한 작품을 낳아, 각기 국민성을 반영한 독자적인 작풍을 나타내게 되었다. 근래의 영화는 세계 각국간에 완성 작품은 물론, 제작 단계에서도 국제적인 교류가 빈번해졌으며, 이에 따라 영화는 더욱더 문화적인 역할을 더해가고 있는 것과 더불어 국제교류가 도리어 영화에 반영되는 등 각국의 개성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음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