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인명사전/세 계 인 명/ㅈ
자공
[편집]子貢(기원전 520년경-기원전 456년경)중국 춘추 시대 위나라의 유학자. 공자가 아끼는 제자로서 언어에 뛰어났다. 정치적 수완이 뛰어나 노나라·위나라의 재상을 지냈다. 공자를 경제적으로 많이 도와주었다.
자로
[편집]子路(기원전 542-기원전 481)
중국 춘추 시대 노나라의 유학자. 성격은 거칠었으나 꾸밈없고 소박한 인품으로 부모에게 효도하여 공자의 사랑을 받았다. 공자가 죽은 후 위나라에서 벼슬을 하다가 괴외의 난 때 전사하였다.
자멘호프
[편집]Zamenhof, Lazarus L.(1859-1917) 폴란드의 언어학자·안과 의사. 여러 민족이 모여 사는 비야위스토크 시에서 유대 인으로 출생하였는데, 서로 말이 달라서 생활하기에 불편하여 세계 공통어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1887년 국제 보조어인 '에스페란토'를 만들었다. 에스페란토는 쉬운 단어와 간단한 문법을 특징으로 하여 세계 여러 나라에 널리 퍼졌다.
자사
[편집]子思(기원전 492년경-기원전 432년경)중국 전국 시대 노나라의 유학자. 공자의 손자이며 증자의 제자, 맹자의 스승이다. 공자의 학문을 전하고 성실함을 천지와 자연의 법칙이라 주장하고 '천인 합일'의 철학을 확립하였다. 저서로는 <중용>이 있다.
자코메티
[편집]Giacometti, Alberto(1901-1966)스위스의 조각가. 주네브 미술 학교에서 공부한 후, 파리로 가서 조각가 부르델의 아틀리에에 들어갔다. 후에 쉬르레알리슴 운동에 참가하여 <보이지 않는 사물> <4시의 궁전> 등의 작품 외에 오브제를 제작하였다. 그 후 철사와 같이 가늘고 긴 조상(彫像)을 많이 제작하여 독자적인 양식을 이루었다.
작스
[편집]Sachs, Julius von(1832-1897)
독일의 식물학자. 브레슬라우에서 출생하였으며, 프라하 대학에서 공부하였다. 1867년 프라이부르크 대학의 식물학 교수가 되어 식물 생리학을 연구하였다. 수중 배양법을 고안하였으며, 엽록체 중의 동화 전분의 검출·생장 속도계의 고안 등 식물학계에 끼친 공적이 크다. 저서로 <식물 생리학> <식물학> 등이 있다.
잔 다르크
[편집]Jeanne d'Arc(1412-1431)
프랑스의 애국 소녀. 영국과의 백년 전쟁 말기에 프랑스를 구하였다. 잔 다르크는 샹파뉴와 로렌 사이에 있는 조그마한 마을의 농가에서 태어나, 발루아 왕조에 충성하는 환경 속에서 신앙이 두터운 소녀로 자랐다. 13세 때 '프랑스를 구하라'는 신의 계시를 받고 전쟁에 뛰어들었다. 어린 소녀의 출현으로 용기를 얻은 프랑스 병사들은 1429년 마침내 영국군을 쳐부수고 오를레앙 시를 해방시켰다. 이어 랭스로 진격하여 산드니 수도원에서 전통에 따른 의식으로 샤를 7세의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그러나 1430년 파리 공격에 실패하여 잔 다르크는 영국군에게 체포되었다. 영국군은 그의 소행을 악마의 짓으로 자백받을 목적으로 루앙에서 종교 재판을 열었다. 잔 다르크는 이단자라는 죄명으로 화형에 처해졌다. 그 후 샤를 7세의 왕권이 회복되자, 신앙의 정통성을 입증하는 명예 회복 재판이 행하여졌으며 순국의 영웅으로 숭상되었다.
잘츠만
[편집]Salzmann, Christian G.(1744-1811) 독일의 교육자. 처음에는 목사였으나, 1781년 데사우에 있는 학교에서 종교를 가르쳤다. 1784년 고타 후작의 후원으로 슈네펜탈에 학교를 세우고, 적은 수의 학생을 가정적이고 따뜻한 분위기 속에서 가르쳤다. 그는 교육의 목표를 '생각·인내·행동'으로 삼았으며 체육 발전에 관심을 기울여 공동 생활을 위한 훈련을 많이 시켰다.
장거정
[편집]張居正(1525-1582)
중국 명나라의 정치가. 1572년 신종 때 재상이 되어 몽고와의 화평에 성공하였다. 또한 전국적인 호구 조사 및 검지를 실시하여 지주를 누르고, 농민 부담의 균형을 꾀하였다. 명나라 제일의 정치가로 손꼽히며 저서로 <서경직해> <제감도설> 등이 있다.
장 건
[편집]張騫(?-기원전 114)
중국 전한 시대의 외교가. 한 무제는 파미르 고원 서쪽에 있는 대월지국과 동맹을 맺으려고 장 건을 사신으로 보냈다. 그러나 장 건 일행은 가는 도중에 흉노에게 붙잡혀 10년간이나 억류되었다가 겨우 탈출하여 대월지국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대월지국은 한 무제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돌아오는 길에 또 흉노에게 잡혀 나라를 나선 지 13년 만에 한나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후 중앙 아시아의 여행길에 나서, 오손이라는 나라와 동맹을 맺어 동서에서 흉노를 쳤기 때문에 흉노는 더욱 쇠약해졌다. 그의 뒤를 이어 여행하는 사람이 많아져 서역과 한의 교통이 잦아졌고, 그리스·이란 등의 문화와 서역의 말·석류·호도·포도·악기 등이 중국에 전해졌다.
장 량
[편집]張良(?-기원전 168)
중국 한나라의 건국 공신. 소 하·한 신과 함께 한나라 건국의 3걸로 불린다. 진 시황제를 박랑사에서 죽이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숨어서 병법을 배웠다. 그 후 유 방이 군사를 일으키자 1백여 명의 종을 데리고 따랐다. 그는 전략적인 지혜를 잘 써서 유 방이 한나라를 세우고 천하를 통일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 후 벼슬이 유후에까지 올랐다.
장 비
[편집]張飛(166-221)
중국 촉나라의 장군. 허베이 성 사람으로 유 비·관 우와 함께 도원에서 의형제를 맺었다. 그는 유 비를 평생동안 섬기면서 많은 전쟁터에서 누구도 따를 수 없는 힘과 용기로 용맹을 떨쳤다. 그는 뛰어난 호걸이긴 하였지만, 성미가 너무 급하고 술을 좋아하였다. 221년 관 우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오나라로 쳐들어가는 길에 부하의 손에 의해 암살되었다.
장쉐량
[편집]張學良(1898-?)
중국의 정치가·군인. 장쭤린의 큰아들이다. 아버지가 죽은 후 장제스의 국민 정부에 들어가 동북 변방군 사령관 등을 지내면서 화북 지방을 손에 넣었다. 1936년 시안에서 중국 공산당을 포위하여 싸우다가 이듬해 시안 사건을 일으켜 제2차 국공합작의 계기를 만들었다. 제2차 대전 후 타이완에 연금되었다가 1977년 풀려나왔다.
장자
[편집]莊子(기원전 365-기원전 290)
중국 전국 시대 송나라의 사상가. 만물 일원론을 주창하였다. 어느 날 장자는 자기가 나비가 되어 훨훨 자유로이 날아다니는 꿈을 꾸었다. 그러나 잠을 깨니 내가 꿈을 꾸고 나비가 된 것인지, 아니면 나비가 꿈을 꾸고 지금의 내가 되어 있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장자는 이처럼 상식적인 사고 방식에 의문을 품고 유학자들이 말하는 도덕적 가르침 따위는 하잘 것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노자의 생각을 이어받아 자연으로 돌아갈 것과 무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였다. 현존하는 <장자> 33편 중, 내편 7편이 장자의 저술이며 나머지는 문하생들이 지은 것이라 한다.
장제스
[편집]蔣介石(1887-1975)
중화 민국의 총통. 1906년 보정 군관 학교를 졸업하였으며 이듬해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1923년 소련을 시찰하고 귀국하였으며, 그 후 황포 군관 학교 교장을 거쳐 국민 혁명군 총사령관·난징 국민당 정부 주석·군사위원회 위원장 등을 지냈다. 1936년 시안 사건 이후 제2차 국공합작을 결의하여 일본의 중국 침략에 대항하였다. 이듬해 정부를 중경으로 옮긴 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 구 주석과 합의하여 중국군 군관 학교에 한국인 반을 특설하여 한국 광복군 사관 양성에 협조하였다. 1943년 주석이 되었으며, 1948년 헌정하에서 초대 총통에 취임하였다. 이듬해 총통에서 사임하고 국민당 최고 정치 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이 해 대륙 본토를 빼앗기고 타이완으로 정부를 옮겼으며, 1950년 다시 총통이 되고 국민당 총재로 있었다. 저서로 <시안 반월기> 등이 있다.
장즈둥
[편집]張之洞(1837-1909)
중국 청나라 말기의 정치가. 보수적인 대외 강경론자로 독일식 군대를 편성하고, 경한 철도를 부설하였다. 그는 유교적인 전통을 살리면서 근대화 정책을 취하였으며, 평향 탄광·한양 제철소·방직 공장·생사 공장 등을 창설하였다. 저서로 <권학편> <장문양공전집> 등이 있다.
장징궈
[편집]張經國(1906-1988)
중화민국의 군인·정치가. 장제스의 큰아들이며 모스크바 대학에서 공부하여 한때 공산당에 들어갔으나 잘못을 뉘우치고 1949년 국민당 타이완 당 부주임이 되었으며 국방부의 중요한 자리에 앉게 되었다. 1958년 중화민국 정무 위원이 된 후 반공 전선에 앞장섰으며, 1969년 행정원 부원장이 되었다. 이후 장제스가 병으로 나라 일을 돌볼 수 없게 되자 대신 처리하였고, 1975년 장제스가 죽자 사실상 실권을 쥐었다.
장쭤린
[편집]張作霖(1883-1928)
중국의 군인·정치가. 1917년 돤치루이를 도와서 공화국 회복에 힘썼으며, 1927년 국민군을 베이핑 밖으로 축출하고 대원수가 되었다. 그 해 장제스의 북벌군과 싸워 허난에서 대패하여 펑톈으로 가던 중, 일본군의 음모로 인한 열차 폭발로 죽었다.
저수량
[편집](596-658)
중국 당나라의 서예가. 저장 성 사람으로 당 태종의 서예를 지도하였다. 또한 당 태종이 왕희지의 글씨를 모으고 있었으므로 그 수집 사업의 관리를 맡았다. 그는 글씨에 뛰어나 구양 순·우세남과 함께 당 서도의 일인자가 되었다. 그 후 벼슬이 상서 시랑에까지 이르렀으나, 황제의 잘못을 상소하다가 황제의 노여움을 사 쫓겨났다. 그는 해서·행서·초서를 잘 썼는데, 특히 해서에 뛰어났다.
저우언라이
[편집]周恩來(1898-1976)
중공의 정치가. 일찍이 일본·프랑스 등에 유학하였으며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924년 귀국 후, 중국 공산당과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과의 사이에 나서서 외교적으로 활약하였다. 그 후 중국 총리 겸 외교 부장으로 제네바와 반둥 회의에서 중국 대표로 활약하였다. 1972년 중국과 미국과의 국교를 여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하였으며, 중국 당 부주석·인민 정치 협상 회의 주석으로 활약하였다.
정성공
[편집]鄭成功(1624-1662)
중국 명나라 말기의 장군. 정지룡의 아들로 1644년 명나라가 멸망하자, 아버지와 함께 당왕을 도와 명의 부흥 운동을 일으켰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청에 항복하자, 아버지와 헤어진 후 영명왕을 도와 아모이 섬 등을 근거지로 하여 청나라와 계속 싸웠다. 1661년, 네덜란드인이 차지하고 있던 타이완 섬을 빼앗아 근거지로 삼았다. 이때부터 타이완 섬은 중국 영토가 되었다.
정여창
[편집]丁汝昌(?-1895)
중국 청나라 말기의 해군 제독. 안후이 성 사람으로 영국·프랑스·독일 등에 유학하였으며 청나라 해군의 근대화에 힘썼다. 1882년 임오군란 때 흥선 대원군을 체포하였으며, 1888년 청나라 해군을 조직하여 제독이 되었다. 청일 전쟁 때 북양 함대를 지휘하여, 패하자 자살하였다.
정 이
[편집](1033-1107)
중국 북송의 유학자. 뤄양 사람으로 형인 정 호와 함께 당시 새로운 유학을 세우는 데에 힘썼다. 이천백을 봉한 까닭에 '이천 선생'이라 불렀다. 처음에는 이기(理氣)의 철학을 제창하였으며, 유교 도덕에 철학적 가치를 부여하였다. 그의 학문은 형의 학설과 함께 '2정의 학'이라고 불리었으며, 후에 주자에 영향을 주어 성리학을 완성하게 하였다. 저서로 <역전> <어록> 등이 있다.
정 호
[편집]程顥(1032-1085)
중국 북송의 유학자. 주돈이의 문인이며 아우 정 이와 함께 2정자(二程子)로 불리었다. 우주의 본성과 사람의 성이 본래 동일한 것이라고 하였다. 저서로 <식인편> <정성서> <어록> 등이 있다.
정 화
[편집]鄭和
중국 명나라의 장군. 운남 성 사람으로 영락제 때에 환관의 태감이 되었으며, 7차례에 걸쳐 남해를 원정하였다. 1회에서 3회까지의 원정에서 인도의 캘커타에까지 이르렀고, 그 후의 원정에서는 이란의 호르무즈·아프리카·아라비아에까지 뻗쳤다. 이 원정으로 국력뿐 아니라, 무력에서도 많은 이익을 가져왔다.
제갈 량
[편집]諸葛亮(181-234)
삼국시대 촉한의 정치가. 제갈 공명이라고도 한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작은아버지와 함께 형주에서 자랐다. 당시 한나라는 황건적의 침입으로 국력이 쇠약해져 나라가 멸망 직전에 놓여 있었다. 207년 위나라의 조 조에게 쫓기어 형주로 와 있던 유 비의 삼고초려(유 비가 제갈 량을 세 번이나 찾아간 일)에 못 이겨 그의 신하가 되었다. 그리하여 오나라와 연합하여 조 조의 위군을 적벽에서 격파하여 조 조의 천하 통일의 꿈을 꺾었다. 제갈 량은 유 비가 죽자, 그의 어린 아들인 어린 황제를 도와 오나라와 수호하였으며, 남쪽을 정벌하여 세력을 길렀다. 225년 원난까지 평정하였으며, 227년 이후에는 출사표(출병할 때에 그 뜻을 적어서 임금께 올리는 글)를 바치고 북벌에 나섰다. 그러나 사마 의가 이끄는 위군과의 오장원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제너
[편집]Jenner, Edward(1749-1823)
영국의 의사·종두법의 발견자. 목사의 아들로 출생한 그는 15세 때 한 농가의 부인에게서 한 번 우두에 걸린 사람은 다시 천연두에 걸리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종두에 관한 연구를 진행할 때에 이것에서 착상을 얻어 사람에게 우두를 놓으면 천연두를 예방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1796년 우두에 걸린 사람에게서 채취한 병균을 아들에게 접종하여 성공하였다. 이 결과는 1798년 왕립 협회에 보고되었는데, 그의 진가가 인정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제너는 이 실험을 계속하여 마침내 프랑스에서 받아들이게 되어 전 세계로 퍼졌다.
제논
[편집]Zenon ho Elea(기원전 490-기원전 430) 그리스의 철학자. 엘레아 학파의 한 사람으로 '운동 불가능론'을 주장하여 스승 파르메니데스의 일자설(一者說:존재자는 하나이다)을 변호하였다. 그가 주장한 논법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변증법으로 불리었다.
제논
[편집]Zenon ho Kypros(기원전 335-기원전 263) 그리스의 철학자. 스토아 학파의 시조. 키프로스 섬에서 출생한 그는 30세에 아테네로 가서 공회당에서 철학을 가르쳤다. 그는 절제와 인내를 강조하였으며 '자연과 일치된 삶'을 목표로 삼았다. 그는 플라톤의 국가론에 반대하였으며 철학의 목적을 자유로운 부동심의 확립에 있다고 하였다.
제리코
[편집]Gericault, Theodore(1791-1824)프랑스의 화가. 고전주의에서 해방된 낭만파의 선구자이다. 그는 루벤스에게서 영향을 받았으며, 1816년 이탈리아에 유학하였다. 프랑스로 돌아온 후 <메듀즈호의 뗏목>을 발표하여, 대담한 구도와 명암의 강한 구성 등으로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그는 낭만주의 운동의 선구자로서 들라크루아에게 영향을 주었다. 작품으로 <에프솜의 경마> <미친 사람> 등이 있다.
제만
[편집]Zeeman, Pieter(1865-1943)
네덜란드의 물리학자. 라이덴 대학을 졸업하였으며, 1900년 암스테르담 대학 교수가 되었다. 힘이 센 자장 안에 있는 발광체에서 나오는 스펙트럼이 여러 개로 갈라져서 '편광 현상'을 일으키는 것을 발견하고, 1898년 '제만 효과'라는 이름으로 발표하였다. 1902년 로렌츠와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제번스
[편집]Jevons, William S.(1835-1882)영국의 경제학자. 영국 한계 효용학파의 창시자의 한 사람이다. 영국 공리주의에 의거한 평균적 시민의 쾌락·고통의 계산에서 효용 이론을 전개하고, 재화의 교환 가치는 그 최종 효용도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한계 효용 균등의 법칙을 수학적으로 증명하였다. 또한 물가지수의 연구에서 경기 변동은 태양 흑점과 같이 10년 반의 주기를 갖는다고 주장하였다. 저서로 <경제학 원론> <과학 원론> <통화와 재정의 연구> 등이 있다.
제임스
[편집]James, Henry(1843-1916)
영국의 소설가. 미국 뉴욕에서 출생하였으나 1915년 영국으로 귀화하였다. 근대 사실주의 문학의 지도자이며, 이상한 환경·처지와 그러한 관련 밑에 놓인 일반인의 심리를 다루는 데 뛰어났다. 대표작으로 <데이지 밀러> <어느 부인의 초상> <미국인> <미래의 마돈나> 등이 있다.
제임스 1세
[편집]James Ⅰ(1566-1625)
영국 스튜어트 왕조의 창시자(재위 1603-1625). 스코틀랜드의 국왕이었으나 1603년 엘리자베스 여왕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 왕도 겸하여 스튜어트 왕조를 창시하였다. 국왕의 권리는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으로서 국민은 이를 거역할 수 없다는 '왕권 신수설'을 주장하여, 의회와 자주 다투었다. 또한 영국 국교주의를 강화하여 의회와 청교도간에 심한 대립을 일으키고, 대상인에게 독점권을 주어 시민 계급의 반항을 불러일으켰다.
제임스 2세
[편집]James Ⅱ(1633-1701)
영국 스튜어트 왕조의 왕(재위 1685-1688). 찰스 1세의 둘째 아들로 청교도 혁명 중에 프랑스로 망명했다가, 1660년 왕정이 복고되자 돌아왔다. 형 찰스 2세가 죽자 제임스 2세가 되어 전제 정치와 구교 신앙의 회복에 힘썼다. 이 때문에 의회파의 대립이 심해져, 1688년 명예 혁명을 맞아 프랑스로 망명하였다. 그 후 루이 14세의 원조를 받아 아일랜드에 상륙하였으나 참패하고, 프랑스에서 죽었다.
제퍼슨
[편집]Jefferson, Thomas(1743-1826)미국의 제3대 대통령. 버지니아에서 출생하였으며 변호사를 개업했다가, 1769년 지방 의회에 들어가 버지니아 식민지 의회의 의원이 되었다. 그 후 패트릭 헨리와 만나게 되고 그의 혁명적인 정열에 감동하여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유와 독립을 찾을 것을 굳게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독립 선언문'의 초안을 작성하였다. 1779년 주지사를 거쳐 1785년 주 프랑스 전권 대사로 나가 무역 개선에 공을 세우고 귀국하여 1790년 국무 장관이 되었다. 1797년 부통령에 당선되고, 1801년에는 미국 제3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개성을 존중하고 정치적인 자유를 부르짖는 그의 민주주의적인 정치는 '제퍼슨적 민주주의'라 불리어진다. 1809년 대통령직에서 물러나 버지니아 대학을 설립하여 총장이 되는 등 교육계와 학계에 많은 업적을 세웠다.
조로아스터
[편집]Zoroaster(기원전 660-기원전 583)
고대 페르시아 종교 조로아스터교의 시조. 메디아 서북쪽에서 출생하였으며 30세에 신의 계시를 받았다. 그는 이 세상은 선의 신인 아후라마즈다와 악의 신 아리만이 싸우는 싸움터라 하였고, 결국에는 선의 신이 이겨 광명의 세계가 오게 되니 사람은 그 세상이 오는 일에 힘써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불을 신성시 하였으므로 '배화교'라고도 한다. 지금은 인도나 이란에 약간의 신자가 있을 뿐이다.
조맹부
[편집](1254-1322)
중국 원나라의 서예가·화가·유학자. 조자앙이라고도 하며 저장 성 사람이다. 1286년 세조가 인재를 널리 구하였을 때 등용되어 한림학사에 올랐다. 서도는 남북조 시대에 왕희지를, 그림은 당나라와 북송 시대를 지지하였다. 그는 '조맹부체'라는 독특한 글씨체를 만들었으며, 그림으로 <중강 첩장도> <사마도권> <작화 추색도> 등이 있으며, 저서로 <상서주> <송설재집> 등이 있다.
조 비
[편집]曹丕(186-226)
중국 삼국 시대 위나라의 초대 황제. 조 조의 맏아들로, 220년 후한의 헌제를 폐하고 뤄양에 도읍하여 나라 이름을 위라 하였다. 오나라를 쳤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삼국이 정립한 가운데서 죽었다.
조이스
[편집]Joyce, James(1882-1941)
아일랜드의 작가. 더블린에서 출생하였으며 예수회 학교인 로열 학교를 졸업하였다. 1904년 유럽에 건너가 한때 파리 의과 대학에서 공부한 후 각국을 유랑하였다. 귀국하여 <에고이스트>지에 자전적 장편 소설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연재하여 주목을 받았다. 1922년 복잡 미묘한 내적 심리의 흐름을 그린 그의 대작 <율리시스>를 발표하여 소설의 신분야를 개척하고 유럽 문단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플로베르의 영향을 받았으며, 내적 독백에 중점을 두는 '의식의 흐름' 수법을 도입하여, 제1차 세계대전 후 유럽의 혼돈을 잘 나타내었다. 작품으로 시집 <실내악>, 희곡 <추방자> 등이 있다.
조 조
[편집]曹操(154년경-220)
중국 후한 말의 정치가. 한나라가 점점 쇠약해져 가던 무렵, 황건적의 난을 토벌하여 공을 세웠다. 그는 원소와 함께 도적과 흉노를 토벌하면서 세력을 확장하여, 동탁이 죽은 후 정권을 장악하였다. 196년 헌제를 모시고 수도를 허도로 옮겨 16년간 화북을 통일하였다. 208년 형주를 토벌하였으나, 손 권·유 비 연합군과의 적벽 싸움에서 대패하였다. 216년 위왕에 즉위하여 화북을 지배하며 치산치수에 주력하는 등 건안(建安) 문학의 융성을 이루게 하였다.
조지 1세
[편집]George Ⅰ(1660-1727)
영국 하노버 왕조의 시조(재위 1714-1727). 독일의 하노버 가에서 출생하였으나 어머니가 영국 왕실에서 태어났으므로 앤 여왕의 뒤를 이어 영국 왕으로 추대되었다. 영어를 잘 못하여 하노버에 체류하는 일이 많았고 정치는 내각과 의회에 위임하였기 때문에 여기에서 입헌 군주제가 발전하였다.
조지 2세
[편집]George Ⅱ(1683-1760)
영국의 왕(재위 1727-1760). 조지 1세의 아들로 나라를 다스리는 동안, 월폴이 정치를 지도하다가 후에는 대 피트에게 정권을 맡겨 '군주는 있으나, 통치하지 않는다'라는 입헌 왕정이 점점 확립되어 갔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때에는 몸소 군대를 이끌고 프랑스 군을 격파하였다.
조지 5세
[편집]George Ⅴ(1865-1936)
영국의 왕(재위 1910-1936). 에드워드 7세의 아들로 1892년 왕위 계승권을 얻고 1910년 즉위하였다. 본래는 해군 출신으로 재위중 해외 식민지를 방문하였으며, 위엄 있는 인품으로 국민들의 존경을 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 중 하노버 가를 윈저 가로 고쳤으며, 근대 사상 훌륭한 입헌 군주로 전해지고 있다.
조지 6세
[편집]George Ⅵ(1895-1952)
영국의 왕(재위 1936-1952). 조지 5세의 둘째 아들이며, 엘리자베스 2세의 아버지이다. 1936년 형 에드워드 8세가 '심프슨 부인 사건' 때문에 왕위에서 물러나자 즉위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국민의 사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 여러 곳을 돌아보며 입헌 군주로서의 직무에 충실하였다.
조토
[편집]Giotto, di Bondone(1266-1337)이탈리아의 화가·건축가.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의 선구자로서 비잔틴 양식에서 벗어나 피렌체 파를 형성하였다. 투시법에 의한 공간의 묘사에 성공하였으며, 생기 있는 묘사로 종교 예술의 신경지를 개척하였다. 단테와 친하여 단테의 초상화도 그렸다. 작품으로 <성 프란체스코 전> <천사> <이집트에로의 탈출> 등이 있다.
존슨
[편집]Johnson, Samuel(1709-1784) 영국의 시인·평론가.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하였으나 가난하여 다 마치지는 못하였다. 1755년 영국에서는 처음으로 <영어 사전>을 만들어 영문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 후 풍자시 <런던> <덧없는 소망>과 영국 시인 52명의 전기와 작품론을 정리한 <영국 시인전> 10권을 발표하였다.
존슨
[편집]Johnson, Andrew(1808-1875) 미국의 제17대 대통령. 집이 가난하여 양복점 직공으로 일하면서 혼자 공부하였다. 그 후 노예를 가진 농장 주인들에게 반대하는 기술자·노동자·농민 등의 지도자가 되었다. 처음에는 테네시 주에서 선출된 민주당원이었으며, 1865년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듬해 링컨 대통령이 암살되자 그를 이어 대통령이 되었다. 1867년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사들였다.
존슨
[편집]Johnson, Lyndon B.(1908-1973)미국의 제36대 대통령. 텍사스에서 하원 의원이 되었으며, 1948년에는 상원 의원이 되었다. 1960년 부통령에 당선되어, 1963년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하자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되었다. 1964년 다시 당선되었으며, 1968년 두 번 이상 출마하지 않겠다는 발표를 하고 부통령이던 험프리를 밀었으나 공화당의 닉슨에게 지고 말았다. 그는 '위대한 사회' 건설을 주장했으나, 월남 전쟁에서는 사태의 심각화를 초래하였다.
존 왕
[편집]John(1167-1216)
영국의 왕(재위 1199-1216). 헨리 2세의 아들로 프랑스 필리프 2세와 전쟁을 벌여 북프랑스의 땅을 잃었고, 또 로마 교황 이노센트 3세와 싸워 파문을 당하였다. 한편, 난폭한 정치를 하여 귀족·성직자의 반발을 사서 1215년 대헌장(마그나카르타)에 서명하고 이를 반포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 대헌장을 없애기 위해 외국의 용병을 끌어들여 귀족들과 전쟁을 벌이던 중 죽었다. 존 왕이 서명한 대헌장은 영국 헌법의 기초가 되었다.
졸라
[편집]Zola, Emile(1840-1902)
프랑스의 소설가. 처음에는 법률학에 뜻을 두었으나, 집안이 가난하여 공부를 그만두고 출판사에 입사한 후 소설을 썼다. 1867년 처녀작 <테레즈 라캥>으로 자연주의 작가로 인정을 받았으며, 이때부터 클로드 베르나르의 실험 의학을 문학에 적용하였다. 이러한 방법을 작품에다 적용한 것이 <루공 마카르 총서> 전 20권이다. 이 속에는 <나나> <목로주점> <대지> 등의 걸작이 들어 있다. 1894년 <3도시 총서> <4복음서> 등을 발표하였고, 1898년 <나는 탄핵한다>라는 논문으로 드레퓌스 사건을 공격하고 금고형을 받았다. 저서로 <자연주의 소설가> <실험 소설론> 등이 있다.
졸리오 퀴리
[편집]Joliot-Curie, Frederic(1900-1958)
프랑스의 원자 물리학자. 퀴리 부인의 라듐 연구소에 들어가 방사성 현상을 연구하고, 1928년 퀴리 부인의 큰딸 이렌 퀴리와 결혼하였다. 부인과 같이 인공 방사능을 발견하여 1935년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1946년 프랑스 원자력 위원회 위원장을 지내며 원자력의 평화적인 이용에 힘썼다.
좀바르트
[편집]Sombart, Werner(1863-1941)독일의 경제학자·사회학자. 1904년부터 베버와 함께 <사회 과학 및 사회 정책>을 편집하였다. 그는 경제 이론과 역사의 종합을 꾀하여 마르크스의 영향 아래 '경제 체제'의 개념을 확립하였다. 저서로 <사회주의 및 자본주의> <근대 자본주의> 등이 있다.
주돈이
[편집](1017-1073)
중국 북송의 유학자. 후난 성 사람으로 과거 시험에 급제하여 관리가 되었으며 오로지 학문 연구에만 몰두하였다. 그는 한학을 배척하고 철학적인 사색으로서 인성(人性)과 우주와의 관계 등 만물의 이법을 밝히려는 성리학(송학)을 창시하였다. 그의 학문은 정 호·정 이 형제가 이어받았다. 저서로 <태극도설> <통서> 등이 있다.
주문모
[편집]周文謨(1752-1801)
중국 청나라의 가톨릭 신부. 20세부터 베이징 신학교에 들어가 서양 신부들로부터 가톨릭교에 대한 교리를 들었다. 1794년 베이징 주교 구베아의 명령을 받고 압록강을 건너 서울로 들어와 주민들에게 교리를 가르쳤다. 그 후 6년 간 충청도·전라도 지방을 돌아다니며 교리를 가르쳐서 신도가 1만명으로 늘어났다. 1801년 순조 때의 신해박해 때 의금부에 자수하여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주세걸
[편집]朱世傑
중국 원나라의 수학자. 4원술을 만들어 중국에서 제일가는 수학자로 불린다. 곳곳을 돌아다니며 수학자로서 이름을 떨치고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저서로 천원술(1원 방정식을 푸는 법)을 소개한 <산학계몽>과 천원·지원·인원·물원의 네 개를 미지수로 하는 4원 연립 방정식의 해법인 4원술을 나타내는 <사원옥감>이 있다.
주앙 1세
[편집]Joao Ⅰ(1357-1433)
포르투갈의 제10대 왕(재위 1385-1433). 아비스 왕조의 시조이다. 제9대 왕인 돈 페르난드가 죽자, 그의 아내 도나 레오노르 테레스가 앙데이로 백작과 더불어 왕권을 잡았다. 이에 주앙은 앙데이로와 싸워 승리하였는데, 이때 침입한 카스티야 왕국의 대군을 쳐부수고 포르투갈의 독립을 지켰다. 1385년 국민의회의 선거로 왕위에 올랐다. 해외 사업을 추진하였으며 왕자 엔리케에게 명하여 아프리카 탐험을 도모하였다.
주앙 2세
[편집]Joao Ⅱ(1455-1495)
포르투갈의 제13대 왕(재위 1481-1495). 포르투갈의 최전성기를 이룩한 왕으로 '완전왕'이라 불리어진다. 알폰소 5세의 아들로, 즉위 전에는 아버지가 프랑스에 가 있는 동안 나라일을 처리하였다. 1481년 즉위하여 귀족의 반란을 누르고 절대주의의 바탕을 굳게 하였고 아프리카 탐험 사업을 촉진하였다. 1494년 에스파냐와 토르데실라스 조약을 맺어 식민지 분할선을 정하여 서로 충돌하는 일이 없게 하였다.
주왕
[편집]紂王
중국 은나라의 마지막 황제. 그는 달기라고 부르는 여자에게 빠져 그녀의 말이라면 어떠한 일이라도 들어 주었다. 또한 세금과 형벌을 무겁게 하여 백성들을 괴롭혔다. 제후들은 주왕이 너무 포악하고 잔인하였기 때문에 주나라의 무왕을 도와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그를 죽였다고 한다.
주원장
[편집]朱元章(1328-1398)
중국 명나라의 초대 황제(재위 1368-1398). 홍무제라고도 한다. 가난한 농가의 아들로 태어나 처음에는 곽자흥의 부하가 되었으나 자립하여 세력을 길렀다. 25세 때 원 제국에 대한 반란군에 참가하고 마침내 오나라 왕이 되어 양쯔강 일대를 지배하였다. 1368년 금릉에서 황제의 자리에 올라 나라 이름을 명이라 고쳤다. 그 후 원나라 군대를 몽고로 내쫓는 한편, 남서쪽도 정복하여 중국을 통일하였다.
주 유
[편집]周楡(175-210)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의 장군. 안후이 성 사람으로 오나라의 손 권을 도와 오나라 건국의 기초를 튼튼히 하였다. 208년 해군 대장이 되어 유 비와 함께, 조 조가 거느린 백만 대군을 적벽에서 맞아 싸워 이겼다. 그 후 촉한의 유 비를 공격하려고 계획하던 중 병으로 죽었다.
주자
[편집]朱子(1130-1200)
중국 남송의 유학자. 주희라고도 한다. 안후이 성 사람으로 19세에 진사가 된 후 여러 관직을 지내면서 맹자·공자 등의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주돈이·정 호·정 이 등의 사상을 이어받았다. 그는 유학을 집대성하였으며 '오경'의 진의를 밝히고 '주자학'을 완성시켰다. 저서로 <주역 본의> <논어 집주> <사서 집주> <자치 통감 강목> <소학> <이정 전서> 등이 있다.
주전충
[편집]朱全忠(852-912)
중국 양나라의 초대 황제(재위 907-912). 장쑤 성 사람으로 처음 이름은 주 온이었다. 황소의 난이 일어났을 때, 처음에는 황소의 편이 되었다가 후에 당나라의 장군이 되어 황소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이에 당 황제로부터 '전충'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그는 변주 절도사가 되어 관리 수백명과 소제를 죽였으며, 애제를 황제의 자리에서 쫓아낸 후 907년 양(후량)나라를 세웠다. 당시 중국 각 지방의 세력가들이 다투어 나라를 세웠는데, 이리하여 중국은 5대 10국의 분열 시대를 맞이하였다.
주쯔칭
[편집]朱自淸(1898-1948)
중국의 시인·수필가. 베이징 대학을 졸업하였으며 5·4운동을 전후하여 구어시를 썼다. 장시 <훼멸>을 발표하여 초기 시단에 큰 영향을 미쳤다. 후에는 산문으로 전환하여 고전 문학 연구·계몽에 힘썼다. 저서로 <표준과 척도> <주자청 문집> 등이 있다.
주페
[편집]Suppe, Franze von(1819-1895)
오스트리아의 작곡가·지휘자. 1860년부터 전성기를 맞아 지휘자·작곡가로서 크게 활약하였다. 이탈리아의 단순하고 명랑한 선율과 빈의 우아한 분위기를 잘 섞은 그의 오페레타는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대표 작품으로 <경기병> <시인과 농부> <보카치오> <아름다운 갈라테아> 등이 있다.
주희
[편집]줄
[편집]Joule, James P.(1818-1889)
영국의 물리학자. 맨체스터에서 양조업자의 아들로 출생하였으며 돌턴의 지도로 과학을 연구하였다. 1840년 전동기를 조사하여 전류에서 발생하는 열에 대해 연구한 끝에 전류의 열 작용에 관한 '줄의 법칙'을 발견하였다. 이어 열의 일당량을 실험 연구한 끝에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확립하였다. 그 후 톰슨과 함께 기체를 높은 압력에서 낮은 압력으로 옮기면, 압력의 차에 비례하는 온도 변화가 생긴다는 '줄-톰슨의 효과'를 발표하였다. 에너지와 일의 단위인 '줄'은 그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쥐스킨트
[편집]suskind, Patrick(1949- )
독일의 현대작가. 1949년 독일 암바흐 출생. 뮌헨 대학과 엑상 프로방스에서 역사학을 공부하였다. 34세 때 발표한 <콘트라베이스>는 콘트라베이스 연주자인 한 예술가의 고뇌를 그린 남성 모노드라마로서,
'희곡이자 문학 작품으로서 우리시대 최고의 작품'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이러한 관심 속에서 그는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은 장편소설 <향수>(1985)를 발표했다. 1991년 평생을 사랑과 죽음 앞에서 도망치는 별난 인물을 그린 <좀머씨 이야기>를 발표하여 독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증국번
[편집]曾國藩(1811-1872)
중국 청나라 말기의 정치가·학자. 후난 성 사람으로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였으며, 군사·과학·통신의 근대화 운동인 양무운동에 앞장섰다. 그리하여 '동치중흥'이라 불리는 옛 질서의 회복에 기여하였다. 그의 밑에서 이홍장 등의 큰 인물이 배출되었으며, 그는 학자로서도 뛰어나 고문·송학·주자학을 연구하여 당시의 제일가는 인물이 되었다. 저서로 <증문정공 전집> 174권이 있다.
증자
[편집]曾子(기원전 506-기원전 436)
중국 춘추 시대 노나라의 사상가. 본래 이름은 증삼이다. 공자의 제자로 계속 노력한 끝에 대성하여 효도를 역설하였다. 그는 공자의 사상을 근본으로 하여 그 뜻을 펴서 저술하고 이를 공자의 손자 자사에게 전하였다. 저서로 <증자> <효경>이 있다.
지그몬디
[편집]Zsigmondy, Richard(1865-1929)오스트리아의 화학자. 빈에서 출생하여 빈 대학·뮌헨 대학에서 공부하였다. 1903년 콜로이드 입자를 검사하기 위해 한외 현미경을 발명하였으며, 금 콜로이드를 비롯하여 각종 콜로이드 용액의 제법 및 그 성질을 연구하여 콜로이드 화학에 공헌하여 1925년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저서로 <콜로이드 화학>이 있다.
지그반
[편집]Siegbahn, Karl M.(1886-1978)스웨덴의 물리학자. 웁살라 대학 교수와 왕립 과학 아카데미 총재를 지냈다. 그는 '지그반 형 진공 분광기'를 만들었으며, 50Å 짧은 파장까지도 사진으로 찍을 수 있는 데에 성공하여 자외선 연구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또한 X선 분광학에 관한 연구와 그 응용에 관해서 뛰어난 업적을 쌓고 X선의 M계열을 발견하였다. 이에 대한 공적으로 1924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지나
[편집]Jinnah, Mohammad Ali(1876-1948)파키스탄의 초대 대통령. 영국에 유학하여 법률을 배우고 돌아와 봄베이 고등 법원의 변호사가 되었다. 1910년 인도 제국의 참사회 의원으로서, 힌두 교도와 이슬람 교도가 손을 잡고 인도를 독립시킬 것을 주장하였으나 힌두 교도의 방해로 실패하였다. 1929년 인도 이슬람 교도 연맹의 총재로서 런던 회의에 참석하여 영국의 분할 통치 정책을 지지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인도가 독립할 때, 파키스탄을 이슬람 교도의 나라로 분리시킬 것을 주장하여 성공시켰다. 1947년 파키스탄의 초대 대통령이 되어 헌법 초안을 작성하는 등 큰 활약을 하였다.
지드
[편집]Gide, Andre(1869-1951)
프랑스의 소설가·비평가. 법학 교수의 아들로 파리에서 출생하였다. 규칙적인 학교 교육을 싫어하여 중퇴하고, 19세부터 창작을 시작하여 1891년 처녀작인 <앙드레 왈테르의 수기>를 발표하였다. 아프리카 여행에서 돌아와 <팔뤼드> <지상의 양식> <배덕자> 등을 발표하였으며, 그가 유일한 소설이라 부른 <사전꾼들>도 상징파의 궤도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주요 작품은 1909년에 발표한 <좁은 문> <이자벨> <교황청의 지하도> 등이 있으며, 제1차 세계대전 후에는 <전원 교향악> <보리 한 알이 죽지 않으면> 등이 있다. 1927년 발표한 <콩고 기행>은 비평가로서의 그를 높이 인정할 수 있는 작품이며, 소련을 여행한 후 쓴 <소련 기행>은 좌익 언론계의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그는 일찍이 쇼펜하워·데카르트·니체 등의 철학서와 문학서를 읽고 구교와 신교의 영향을 받았다. 1947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작품으로 <프레텍스트> <엥시당스> <지드의 일기> <상상적 면담기> <도스토예프스키론> 등이 있다.
지멘스
[편집]Siemens, Werner von(1816-1892)독일의 물리학자·공업가. 1841년 금과 은의 전기 도금법을 발명하였으며, 열대 나무의 진을 말린 물질인 구타페르카의 절연성을 발견하여 그것으로 거죽을 싼 전선을 만들었다. 이 전선을 응용하여 베를린과 프랑크푸르트 사이에 독일 최초의 전선을 설치하였다. 1847년 동생과 함께 지멘스 할스케 회사를 창립하여 전신·전동 기계 등을 발명 제작하였다. 그는 베를린에 처음으로 전기 철도를 만드는 등 독일의 공업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지볼트
[편집]Siebold, Karl T.(1804-1885)
독일의 동물학자. 에를랑겐 대학 교수를 거쳐 뮌헨 대학 교수를 지냈다. 그는 많은 연구를 하였는데, 특히 원생 동물의 통일·해파리의 발생·기생충의 생활사·곤충류의 연구로 유명하다. 또한 암컷과 수컷의 교배 없이 행하여지는 단성 생식을 밝혀 내었다. 저서로 <무척추 동물의 비교 해부학> 등이 있다.
지스카르 데스탱
[편집]Giscard d'Estaing, Valery(1926- )
프랑스의 정치가. 프랑스 국립 행정 학교와 파리 공과대학 졸업. 1954년 재정 감사관을 거쳐 1956년 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그 해 유엔 총회에 프랑스 대표로 참석하고 1959년 재무 담당 국방상, 1962년 재무상을 지내고 1974 퐁피두 대통령이 죽자 총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뽑혔다. 1981년 대통령 재선거 때 낙선하고, 지방 의회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지아 울 하크
[편집]Mohammad Ziaulhag(1924- )
파키스탄의 정치가. 제2차 세계대전 중 버마·말레이시아 전선에 참가하였고, 1955년 퀘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1959년과 1963년 미군 참모 과정을 마친 뒤, 1964년 육군 사관학교 교관이 되었다. 1969년 준장에 진급하여 기갑여단 단장에 임명되었다. 1972년 소장, 1975년 중장을 거쳐 이듬해 대장에 진급하였으며, 기갑사단장·군단장·육군 참모장 등을 역임하였다. 1977년 쿠데타를 지휘하여 부토 정권을 뒤엎고 계엄 사령관을 맡았다. 이듬해 대통령에 취임하여 국방상·육군 참모총장·계엄 사령관 등을 겸직하고 있다.
지오토
[편집]진 수
[편집]陳壽(233-297)
중국 서진의 역사가. 일찍이 학문을 좋아하여 삼국시대 촉나라에서 벼슬을 하였다. 촉이 망하자 진나라의 장화에게 인정을 받아 관리에 임명되었다. 그는 <삼국지> 65권, <위지> 30권, <촉지> 15권, <오지> 20권을 썼으며, 위나라가 한나라를 이어받은 정통 왕조인 것을 인정하여 후에 문제가 생기게 하였다. 그의 정확한 자료의 선택이나 간결한 문장은 높이 평가 받고 있다.
진시황제
[편집]진유숭
[편집](1625-1682)
중국의 문인. 왕사정·송 완 등과 함께 '강좌의 3봉황'이라 불리었다. 50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라 명나라의 역사를 맡아 썼다. 그는 10세에 문장을 지어 낸 천재로, 웅장하고 화려한 시풍의 시를 썼는데 만년에는 우울한 시풍으로 변하였다. 아름다운 수염으로 '진염'이라고도 불린다.
질리
[편집]Gigli, Beniamino(1890-1957)
이탈리아의 테너 가수. 카루소에 버금가는 테너 가수로 불리어진다. 1914년 파르마의 콩쿠르에서 우승하고, 토스카니니의 초청을 받아 스칼라 극장에 출연하였다. 1920년 메트로폴리탄 가극장에서 노래를 불렀으며 특히 푸치니·베르디의 곡을 잘 불렀다. 아름다운 음성으로 여러 오페라에 출연하여 명성을 얻었다.
질송
[편집]Gilson, Etienne(1884-1978)
프랑스의 철학자·신학자. 현대의 중세 철학사가의 제일인자이다. 릴 대학·소르본 대학·콜리주 드 프랑스 등의 교수를 지냈다. 1929년 이후 런던 대학 중세 연구소 소장이 되어 중세 사상의 근원을 탐구함과 동시에, 그 사상이 근대 철학에 끼친 영향을 적극적으로 평가하여 중세 암흑사관을 정정하였다. 신학자로서는 신토마스주의를 대표한다. 저서로 <중세 철학의 정신> <토마스주의> <중세 철학사> 등이 있다.
질허
[편집]Silcher, Philipp F.(1789-1860)
독일의 작곡가. 1817년부터 죽을 때까지 튀빙겐 대학의 지휘자로 있었으며, 1852년 철학 박사의 칭호를 받았다. 독일 및 여러 나라의 민요와 종교 음악 등의 수집·정리·작곡 등에 공헌하였다.
짐벌리스트
[편집]Zimbalist, Efrem(1889-?)러시아 출생의 미국 바이올린 연주가·작곡가. 12세에 페테르스부르크 음악 학원에 들어가 아워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1907년 베를린에서 공연하여 바이올린 연주가로서 인정을 받았다. 1911년 미국으로 건너가 1941년부터 커티스 음악원장으로 활약하였다. 작품으로 가극 1편과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의 <슬라브 무곡> 등이 있다.
쭤쭝탕
[편집]左宗棠(1812-1885)
중국 청나라 말기의 정치가. 후난성 사람으로 1852년 이후 증국번의 상군을 지휘하여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였다. 1866년 중국 최초의 관영 조선소를 만들어 양무 운동의 선구자가 되었다. 1876년 흠차 대신으로서 신장의 위그르 족의 난을 진압하고, 1884년 청·프 전쟁 당시에는 평화적인 외교 활동을 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