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인명사전/세 계 인 명/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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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아가시[편집]

Agassiz, Jean Louis R.(1807-1873) 미국의 지질학자·고생물학자. 스위스에서 출생하였으며 어려서부터 동물학에 큰 관심을 가졌다. 취리히에서 의학·자연 과학을 배우고 뉘샤텔의 아카데미 교수가 되었다. 이어 물고기의 종류와 화석을 연구하다가 생물사·지질학 등을 연구하기 위해 1846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 후 미국에 귀화하여 하버드 대학 교수로 근무하였다. 그는 '빙하 시대설'을 세운 학자이며, 미국 교육학계에 끼친 공로가 크다. 저서로 <어류 화석 연구> 5권과 <비교 동물학 박물관>이 있다.

아그논[편집]

Agnon, Shmuel Y.(1888-1970)이스라엘의 소설가. 1907년 팔레스타인에서 <버림받은 아내들>을 발표하여 소설가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그의 소설은 헤브라이어로 모순덩어리의 세계를 날카롭게 표현했는데, 번역하기가 힘든 점이 있으나, 이미 많은 외국어로 번역되어 세계 여러 나라에서 읽히고 있다. 특히 유대 사람의 생활을 주제로 한 깊은 예술의 정신을 표현하여, 1966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대표작으로 <신랑을 구함> <두려움의 날> <바다 한복판에서> 등이 있다.

아그리파[편집]

Agrippa, Marcus V(기원전 62-기원후 12)

로마의 장군. 천한 가문에서 출생하였으나 옥타비아누스의 신임을 받아 기원전 31년 악티움 싸움에 나가 안토니우스의 군사에게 크게 이겼다. 그는 일찍이 아우구스투스와 접촉하여, 카이사르의 사후 그의 정계 진출에 큰 도움을 주었다. 후에 아우구스투스의 딸과 결혼하였으며, 2번이나 통령의 자리에 올랐다. 특히 로마 시를 아름답게 꾸미는 데 힘을 기울였으며, 로마 제국을 널리 측량하고 지리 서적을 발간하였다.

아기날도[편집]

Aguinaldo, Emilio(1869-1964)필리핀의 독립운동가. 필리핀 건국의 영웅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1897년 필리핀을 지배해 온 에스파냐에 맞서 독립 운동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홍콩에 망명하였다. 이듬해 미국과 에스파냐간에 전쟁이 일어나자, 미국의 원조를 받아 다시 독립 전쟁을 지휘하였다. 1899년 필리핀 혁명 정부를 조직하여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미국이 필리핀을 지배하게 되자 체포되었다. 그 후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다시 독립 운동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아낙사고라스[편집]

Anaxagoras(기원전 500년경-기원전 428)

그리스 소아시아 클라조메나이의 철학자. 페리클레스의 스승이다. 기원전 494년 아테네에 가서 철학·수학·천문학 등을 배워 이오니아 파 자연 철학을 재건하였다. 그는 \"세계는 성질이 다른 무수한 종자(스페르마타)의 혼합이며, 그의 결합과 분리의 원동력은 이성(누스)에 있다\"고 주장하여 불경죄로 몰려 아테네에서 추방되었다. 저서로 <페리푸세우스>가 있다.

아난다[편집]

Ananda

인도 카필라의 승려. 석가모니 10대 제자 중의 한 사람으로 아난타라고도 불리어진다. 석가모니는 특정한 시자(侍者)를 두지 않았는데 대중들의 천거에 의하여 아난다가 시자를 맡게 되었으며, 그 후 20년간 석가모니를 모셨다. 석가모니의 임종을 지켜보았으며, 석가모니가 죽은 후 가섭의 지휘하에 제1차 결집 회의(부처의 가르침을 모아 책으로 펴기 위한 모임)에서 큰 활약을 하였다.

아담 샬[편집]

Adam Schall(1591-1666)

독일의 예수회 선교사. 중국 이름은 탕약망이다. 1622년 중국으로 건너와 서광계 등의 추천을 받아 명나라에서 벼슬을 받았다. 그는 천문·역학 등에 뛰어났기 때문에 역서의 개정, 대포 제조 등을 지도하였다. 청나라 때에는 베이징 천문대장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나, 1664년 중국 학자들의 모함으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한편 그는 1644년 병자호란 때 볼모로 잡혀와 있던 소현 세자와 사귀면서 천문 지식과 천주교 교리를 전달해 주기도 하였다.

아데나워[편집]

Adenauer, Konrad(1876-1967)서독의 정치가. 쾰른에서 출생하였으며, 1917년 쾰른 시장이 되었다. 1933년 히틀러에게 쫓겨날 때까지 계속 시장직에 머물면서 가톨릭 중앙당의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다시 쾰른 시장이 되었으며, 1946년 크리스트 교 민주당이 창설되자 총재가 되었다. 1949년 독일 연방 공화국이 성립되자 초대 수상이 되었으며, 1954년 NATO(북대서양 조약 기구)에 가입하였다. 그는 먼저 대사를 교환한 후 외교 관계를 다시 열고 의안을 해결하는 이른바 '아데나워 방식'이란 특수한 외교 방법을 채택한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EEC(유럽 경제 공동체)를 창설하여 그 실현에 노력하였다.

아라공[편집]

Aragon, Louis(1897-1982)

프랑스의 시인·작가. 파리에서 태어났다. 제1차 세계 대전 후에는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 운동을 하였고, 1930년에는 국제 혁명 작가 대회에 참석하였다가 초현실주의와 갈라졌다. 1934년 시집 <우랄 만세>와 연작 <현실세계>의 첫권을 냈고, 반파시즘 운동에 참가하다가 제2차 세계대전에도 참전, 남프랑스의 레지스탕스 문화 운동을 지도하였다. 또 전국 지식인 동맹 서기장으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평론집 <스탕달의 빛> <소비에트 문학론> 등이 있다.

아라비 파샤[편집]

Arabi Pasha(1839-1911)이집트의 독립 운동가. 농민의 아들로 출생하였으며, 군인으로서 오스만 투르크 지배하에 있을 당시 반터키 운동에 참가하였다. 또한 경제적으로 오스만 투르크를 원조하던 영국과 프랑스의 간섭도 받고 있었는데, 그는 이러한 외국의 지배에 반대하는 반란군의 중심 인물이었다. 1882년 군사 대신이 되어 영국의 군사 간섭을 반대하는 데 앞장 섰다. 이 해 몇몇의 급진파가 알렉산드리아에서 그곳에 머물고 있던 외국인에게 손해를 입히자 영국이 군대를 보내어 싸우게 되었는데, 이 싸움에서 패하고 아라비 파샤는 포로가 되었다.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후에 죄가 풀려 이집트로 돌아왔다. '이집트 독립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아라파트[편집]

Arafat, Yasser(1929- )

팔레스티나 민족 해방 운동의 지도자. 1948년 카이로 대학을 졸업하고 1961년 알파타를 조직하였다. 1965년 이스라엘에 대한 게릴라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1968년 팔레스티나 해방 전선인 PLO 의장이 되었다. 그는 온건파 게릴라의 지도자로서 1974년 유엔 총회에서 연설을 하여 세계의 눈길을 끌었다. 1991년 걸프 전쟁에 참전하였고, 1996년 자치 정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94년 노벨 평화상, 1996년 올로프팔메 상을 수상하였다.

아레니우스[편집]

Arrhenius, Svante(1859-1927)스웨덴의 화학자·물리학자. 1903년 용액의 반응 속도와 온도와의 관계에 관한 '아레니우스의 공식'을 발표하여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이 밖에도 전기 전도·용액의 점도·반응 속도를 연구하였고 '물리 화학'이라는 새로운 길을 열었다. 저서로 <과학적 우주관의 변천>이 있다.

아르키메데스[편집]

Archimedes(기원전 287-기원전 212)

그리스의 물리학자·수학자·천문학자. 시칠리아 섬의 시라쿠사에서 출생하였으며 알렉산드리아에서 공부하고 귀국하였다. 시라쿠사의 왕 헤론으로부터 후한 대접을 받고 수학·물리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는 헤론 왕의 왕관이 순금인지 아닌지를 조사하는 방법을 공동 목욕탕에서 생각해 냈다고 한다. 이리하여 물속의 물체는 그 물체가 밀어내는 물의 무게만큼 가벼워진다는 '아르키메데스의 원리'가 생겨났다. 또한 \"나에게 움직이지 않는 발판을 준다면 지구를 움직이겠다\"고 한 말도 유명하다. 원주율을 수학적으로 연구한 것도 그가 처음이었다. 그 때까지 원주율은 3이라 하던 것을, 원의 내외에 접하는 정96변형을 만들어 원주율을 구하고 2271과 27 사이라고 하였다. 또한 원의 넓이가 반지름의 제곱에 원주율을 곱한 것이라는 것도 발견하였다. 기원전 218년 제2차 포에니 전쟁으로 시라쿠사가 함락되었을 때, 반사경을 만들고 있다가 로마군에게 살해되었다. 에우클레이데스·아폴로니오스와 함께 당시의 3대 수학자로 불리어졌다. 저서로 <평면의 균형과 중심에 대하여> <원의 측정> <회전 포물선> 등이 있다.

아르프[편집]

Arp, Hans(1887-1966)

프랑스의 화가·조각가. 스트라스부르에서 출생하였으며, 바이마르의 아카데미에서 공부하였다. 그 후 취리히에서 다다이즘 운동을 일으켜 주동적으로 활동하였으며, 그림 제작·출판 활동에도 노력하였다. 1930년 이후에는 파리에서 활약하였으며, 극단적으로 단순한 형태, 경쾌한 선에 의해 아름다움을 추구하였다. 논문으로 <나의 도정> , 시집으로 <공기 의자> <꿈과 계획> 등이 있으며 조각으로 <구름의 양치기> 등이 있다.

아리스타르코스[편집]

Aristarchos(기원전 310년경-기원전 230년경)

그리스의 천문학자.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일했으며, 세계에서 제일 먼저 '지동설'을 믿은 사람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기하학을 응용하여 태양이나 달의 크기를 처음으로 계산하였다. 그는 이집트에서 지구의 둥근 크기를 관측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편집]

Aristoteles(기원전 384-기원전 322)

그리스의 철학자. 고대와 중세를 통하여 최고의 철학자이며 모든 학문의 아버지로 받들어진다. 그의 아버지는 마케도니아 왕의 시의(侍醫)였으며 어려서부터 자연 과학에 관심이 컸다. 19세 무렵 아테네에 가서 플라톤의 학교(아카데미)에 입학하여 20년간 학문을 닦았다. 그 후 마케도니아의 왕자였던 알렉산더 대왕의 가정 교사가 되었으며, 왕이 페르시아 원정 길에 오르자, 리케이온에 학교를 세우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는 녹음이 우거진 소요로를 거닐면서 강의하여 '소요 학파'라는 이름을 얻었다. 기원전 323년 알렉산더 대왕이 죽자, 아테네 시민들로부터 신을 모독한다는 이유로 고소당해, 신변에 위험을 느껴 고향인 칼키스로 가서 이듬해 죽었다. 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도움으로 리케이온 학교에 도서관을 만들어 많은 자료를 수집하였으며 세계 최초의 동물원도 만들었다. 신학자들은 그의 책이 자기들의 생각과 일치하였으므로 학문의 기초로 삼았다. 이 밖에도 아리스토텔레스는 논리학의 기초를 세웠으며, 법률과 도덕도 연구하였다. 그는 스승 플라톤이 관념론적 이상주의임에 대하여 경험론적 현실주의자로 지적되고 있으며, 예술에 관해서도 플라톤과 다른 의견을 내세우고 있다. 예술을 일종의 '모방'으로 보는 점은 플라톤과 같으나, 플라톤이 '모방의 모방'으로 생각하여 이데아의 참된 인식을 흐려 놓는 것으로 인정한 데 비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신을 카타르시스(정화)시키는 것으로 보았다. 저서로 <논리학> <시학> <수사학> <철학> <자연 과학> 등이 있다.

아리스토파네스[편집]

Aristophanes(기원전 448년경-기원전 380년경)

그리스의 시인 ·희극 작가. 아테네 근방의 부유한 가정에서 출생하였으며 페리클레스 시대에 성장하였다. 그는 젊어서부터 극작을 시작했고 실제로 연극 경험을 쌓았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30년 간 그는 평화론을 지켰으며, 기원전 427년에 처음으로 연극 경연에 참가하였다. 그는 극단적인 보수주의자로 새로운 사상가들을 혐오하였다. 그는 사람들을 웃기는 재능을 타고나 모순과 잘못을 웃음으로 풍자하였다. 평생 동안 44편의 희극을 지었는데 11편이 현존한다. 작품으로 <기사> <구름> <벌> <평화> 등이 있다.

아메리고 베스푸치[편집]

→ 베스푸치

아멘호테프 3세[편집]

Amenhotep Ⅲ(?-기원전 1377)

이집트 신왕국 제18왕조의 왕(재위 기원전 1413-기원전 1377). 이집트가 가장 번성했던 시대의 왕으로 시리아·팔레스타인 등을 지배하였다. 당시는 히타이트·바빌로니아에서 여러 가지 산물이 수도 테베로 흘러들어 왔다. 이로써 국위를 널리 떨치고 아들 대에 이르러 고대 이집트 역사상 뛰어난 '아마르나 시대'를 맞게 하였다. 테베에 있는 '멤논의 거상'은 그의 상이다.

아문센[편집]

Amundsen, Roald(1872-1928)노르웨이 탐험가. 오슬로에서 선장의 아들로 출생하였으며, 어려서부터 바다를 동경하였다. 1897년 탐험대의 일원으로 선발되어 남극 탐험대의 일등 항해사가 되었다. 남극 대륙을 돌아 노르웨이로 돌아온 그는 북극 탐험대를 조직하였다. 1903년 북극 탐험 길에 올라 갖은 고생 끝에 자석상의 북극의 위치를 확인한 후, 1905년 서북 항로를 개척하고 돌아왔다. 1910년 남극 탐험길에 올라 이듬해 남극점에 도달하였다. 1926년 노빌레 등과 함께 항공선 노르게 호를 타고 북극해 탐험을 시도하여, 북극상을 통과하고 알래스카에 무사히 착륙하였다. 이 탐험으로 서유럽과 아시아·북아메리카 대륙을 북극해와 연결함으로써 세계의 거리를 좁아지게 하였다. 1928년 노빌레가 인솔하는 항공선이 북극해에서 조난당하자, 수상 비행기로 수색에 나섰으나 그 자신도 행방 불명되고, 비행기 부품이 발견됨으로써 사망한 것이 확인되었다. 저서로 <남극> <극지 비행> <최초의 극해 횡단 비행> 등이 있다.

아바스 1세[편집]

Abbas Ⅰ(1557년경-1629)페르시아의 왕(재위 1586-1629). 오스만 투르크와 그 동맹자인 타타르인의 연합군과 싸워 바그다드를 공격하였다. 영국과 함께 포르투갈로부터 오름즈 성을 빼앗고, 외국인을 우대하여 유럽 여러 나라와의 친선을 꾀하였다. 나라 안 정치 개혁과 상업 장려에 힘써 이슬람 교국의 부흥에 전력하였다.

아베베[편집]

Abebe, Bikila(1932-1973)

에티오피아의 마라톤 선수. 1960년 로마에서 열린 제17회 올림픽에 출전하여, 전 코스를 맨발로 2시간 15분 16초 2라는 기록으로 달려 세계 신기록을 수립하였다. 그리하여 '맨발의 기관차'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1964년 도쿄 올림픽에서도 2시간 12분 11초 2라는 기록으로 우승하여 세계 최초의 마라톤 2회 우승자가 되었다.

아베 프레보[편집]

→ 프레보

아벨[편집]

Abel, Niels H.(1802-1829)

노르웨이의 수학자. 1823년 크리스티아니아 대학을 졸업하고, 1825년 베를린에 유학하였다. 1827년 귀국하여 타원 함수론·적분 방정식과 5차 방정식의 대수적 불능 문제를 연구하였다. 그는 대수 함수론의 기본 정리인 '아벨의 정리'를 발표하였다. 저서로 <타원 함수의 변형에 관한 일반 문제의 해>가 있다.

아보가드로[편집]

Avogadro, Amedeo(1776-1856)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처음에는 법률을 공부하여 법학 박사가 되었다. 1800년부터 수학·물리학을 공부하여, 이듬해 분자는 원자가 모인 것이며 산소·수소 등은 2개의 원자로 된 분자가 날아다니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또한 같은 온도, 같은 기압에서 같은 부피 속에 들어 있는 분자의 수효는 어떤 기체든지 같다고 하는 '아보가드로의 가설'을 내세웠다. 이리하여 그 후 분자의 구조와 화합물을 만드는 방법을 생각해 내게 되었다.

아브라함[편집]

Abraham(기원전 18세기)

이스라엘의 시조. 아브라함은 '많은 사람의 아버지'라는 뜻이다. 그의 생애는 <구약 성서> 창세기에 나와 있으며, 신앙이 두터운 사람의 본보기로 알려져 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신앙심을 시험하기 위해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였다. 이에 아브라함이 아들을 바치려 하자 하나님이 그의 신앙심을 보고 이삭을 살려 주었다.

아서 왕[편집]

Arthur(6세기경)

영국의 전설적인 왕. 로마인과 브리튼인의 혼혈로, 로마에서 전술을 배우고 브리튼의 여러 왕을 거느려 색슨 족의 침공을 맡은 근위군의 지휘관이라고 여겨진다.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하였으나, 카믈란 싸움에서 죽었다.

아소카 왕[편집]

Asoka(?-기원전 232년경)인도 마가다 왕국 마우리아 왕조의 제3대 왕(재위 기원전 268-기원전 232). 아육왕이라고도 하며 찬드라굽타의 손자이다. 데칸 고원 남부를 제외한 전 인도의 통일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전쟁의 비참함을 깊이 느껴 불교를 융성하게 하고 불교에 기초를 둔 정치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곳곳에 절을 세우고 불교를 정리하였으며, 실론·타이·버마에까지 불교를 전파하기에 노력하였다. 총애하는 왕비를 잃고 고독과 번민 속에서 죽었으며, 아라한의 자리에 올랐다.

아우구스투스[편집]

→ 옥타비아누스

아우구스티누스[편집]

Augustinus, Aurelius(354-430)

로마 종교가·교부 신학자. 경건한 기독교 신자인 어머니와 이교도인 아버지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한 때는 여러 가지 믿음 사이에서 방황하였으며, 페르시아의 종교인 마니교에 들어가 악에 대한 문제를 연구하기도 하였다. 32세 때 어머니의 감화로 크리스트교에 귀의하여 성직자로서 포교·저술 등에 전념하여 크리스트 교회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76세로 히포에서 죽었으며, 그 후에 교부(敎父)로 받들어졌고, 초기 교회 최대의 성자로 성 아우구스티누스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의 사상은 스콜라 철학의 실재론에 반영되었고, 프란시스코파에 직결되어 기독교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저서로 <고백록>이 있다.

아우랑제브[편집]

Aurangzeb(1618-1707)

인도 무굴 제국의 제6대 왕(재위 1659-1707). 악바르의 증손이며 샤자한의 아들이다. 학식이 풍부하여 아라비아어·페르시아어 등에 능통하였으며, 이슬람 신학에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형제와의 왕위 다툼으로 아버지 샤자한을 감옥에 가두고 즉위하였다. 그는 독실한 이슬람교의 신자로 '살아 있는 성자'라고 불리어졌다. 그러나 국민들에게 엄격한 종교 생활을 강요하였으며, 마라타 족을 평정하지 못하고 죽어 무굴 왕국이 쇠퇴하게 되었다.

아이스킬로스[편집]

Aischylos(기원전 525-기원전 456)

그리스 3대 비극 작가의 한 사람. 아테네 근교의 엘레우시스에서 출생하였으며, 마라톤·살라미스·트라키아의 3대 전쟁에 종군하였다. 기원전 500년에 처음으로 연극 경연에 참가하였으며, 기원전 484년에 처음으로 우승하였다. 그는 죽을 때까지 총 90편 가운데 13회를 연극 경연에서 우승하였다. 또한 비극 배우의 수를 1명에서 2명으로 늘렸으며, 장식 회화와 도구를 무대장치로 사용하였다. 또한 가면·가발·신 등을 창안하였고, 비극의 3부작 제도를 완성하였다. 70여 편의 작품 중에서 7편이 남아 있다. 대표작으로 <애원하는 사람들> <페르시아인> <묶인 프로메테우스> <아가멤논> 등이 있다.

아이젠하워[편집]

Eisenhower, Dwight D.(1890-1969)

미국의 제34대 대통령. 택사스 주 데니슨에서 출생하였으며, 1915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1928년 육군 대학교를 졸업하고, 1933년 맥아더 군사 고문의 보좌관으로서 필리핀 방위 강화에 참가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유럽 연합군 최고 사령관으로서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지휘하여 성공시켜 승리를 거두었다. 1948년 퇴역한 후 컬럼비아 대학 총장을 거쳐, 1952년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에 지명되어 당선되었다. 그는 한국 전쟁의 종결·자유 경제의 복귀·건전한 재정 등의 정책을 시행하였다. 1953년 UN 총회에서 국제 원자력 관리 기구를 제창하였으며, 1956년 다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61년 민주당의 케네디에게 대통령직을 물려주었다.

아인슈타인[편집]

Einstein, Albert(1879-1955)미국의 이론 물리학자. 독일의 우름에서 출생하였으며 취리히 공대를 졸업하였다. 그 후 스위스의 시민권이 없어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여 어려운 생활을 하였다. 1902년 취리히의 시민권을 얻어 특허국 기사로 5년간 근무하였으며, 1905년 광양자 이론·특수 상대성 이론·브라운 운동의 이론을 발표하여 취리히 대학으로부터 학위를 받았다. 특히 특수 상대성 이론에서 얻은 물질·에너지의 원리는 원자력 개발의 기초가 되었다. 1907년 고체 비열의 이론을 발표하였으며, 만유 인력론을 전개하였다. 1916년 수학자 그로스만의 협력을 얻어 일반 상대성 이론을 완성하였다. 1919년 강한 중력장 속에서는 빛은 구부러진다는 '아인슈타인 효과'를 예언했는데, 이것이 영국의 일식 관측대에 의하여 확인됨으로써 그는 유명해졌다. 1921년 '광전 효과의 연구'로써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으며, 1929년 '통일장의 이론'을 제창하였으나 아직도 확증되지 않고 있다. 1933년 나치스 정권 수립으로 유대계 학자라는 이유로 추방되어 미국 뉴저지 주 프린스턴 고등 연구소에서 연구에 전념하였다.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원자 폭탄 제조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을 빠르게 하였다. 1945년 연구소에서 은퇴한 후 연구에 전념하다가 프린스턴 병원에서 죽었다.

아퀴나스[편집]

Aquinas, Thomas(1225년경-1274) 이탈리아의 스콜라 철학자·신학자. 18세에 도미니크 파 수도원에 들어가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였다. 그 후 파리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1257년 교수 자격을 받아 파리·나폴리 대학에서 강의하였다. 이 무렵 <신학 대전>을 완성하였으며, 1274년 <신학 대전> 제3권을 집필하던 중, 제2차 공회의에 참석차 리옹으로 가다가 병으로 죽었다. 그는 크리스트교 교리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종합하여 스콜라 철학을 대성한 중세 기독교 최대의 신학자이다. 그의 근본 사상은 이성과 신앙, 철학과 신학은 엄밀히 구별되지만, 이것들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닌 신으로부터 오는 것으로 필연적인 조화라고 생각하였다. 또한 자연이 은총에 의해 버림을 받지 않고 완성되는 것처럼 자연적 이성은 신앙의 전단계로 신앙에 봉사하는 것이라 하였다. 저서로 <이교도에 대한 신앙의 변호> 등이 있다.

아크라이트[편집]

Arkwright, Sir Richard(1732-1792)

영국의 방적 기계 발명가. 처음에는 이발사였으나 기계에 흥미를 갖게 되어 기계 제조업으로 전향하였다. 1767년 하그리브스가 발명한 다축 방적기를 널리 사용하고 있었으나, 좋은 실이 생산되지 못할 뿐더러 반복 조작에 주기적으로 대체할 수 없는 결점이 있었다. 그래서 능률이 좋고 품질이 좋은 실을 만드는 방적 기계가 발명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는 유선 하그리브스의 방적기를 개량하고, 와트의 증기 기관을 연결하는 등 우수한 방적 기계를 만들어서 특허를 얻었다. 이 기계의 발명으로 직업을 잃은 사람들이 기계를 부수는 일까지 있었고, 남의 발명을 멋대로 사용했다 하여 특허가 취소되기도 하였다. 1786년 조지 3세로부터 나이트 작위를 수여받았다.

아키노[편집]

Aquino, Benigno(1932-1983) 필리핀의 정치가. 루손 섬 콘셉시온 시에서 출생하였으며, 1950년 마닐라 <타임스>지의 기자로 6·25전쟁 때 종군하였다. 필리핀 국립 대학에서 법률학을 전공한 후 막사이사이 대통령의 특별 보좌관, 가르시아 대통령의 보좌관을 거쳐 1958년 타르락 부지사가 되었다. 1971년 자유당의 대통령 후보 물망에 올랐으나, 이듬해 마르코스의 계엄령 선포로 구속되었다. 1980년 미국에 망명했다가 1983년 암살의 위험을 무릅쓰고 귀국하다가 마닐라 국제 공항에서 암살되었다. 1986년 그의 부인인 코라손 여사가 민중의 지지를 받아 마르코스를 몰아내고 대통령이 되었다.

아키노[편집]

→ 코라손 아키노

아타나시오스[편집]

Athanasios(293년경-373)알렉산드리아의 주교·성인. 크리스트의 신성과 삼위 일체를 인정하지 않는 이단 아리우스 파와 투쟁하여 신앙의 순수성을 지켰다. 325년 크리스트 교회 최초의 종교 회의인 니케아 종교 회의에서 그의 주장을 인정받아 '정통 신앙의 아버지'로 불린다. 저서로 <부활전 서한>이 있다.

아틸라[편집]

Attila(406년경-453)

훈 족의 왕(재위 433년경-453). 훈 족을 합치고 왕위에 오른 후 영토를 넓혀 중앙 유럽을 지배하였다. 이어 가리아에 쳐들어가 오를레앙을 포위하기도 하였다. 또한 비잔틴 황제에게 항복을 받는 등 흑해로부터 라인강에 이르는 영토를 다스렸다. 계속하여 북이탈리아를 침입하고 로마에까지 갔으나, 교황 레오 1세의 간청으로 물러나 고국으로 가던 중 죽었다.

아펜젤러[편집]

Appenzeller, Henry G.(1858-1902)미국 감리교 목사·교육자. 펜실베이니아 주에서 출생하였으며 프랭클린 마셜 대학과 두론 신학교를 졸업하였다. 1884년 감리교 선교 위원회로부터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어 이듬해 한국에 왔다. 그는 신학문에 뜻을 둔 청년을 모아 교육 사업을 시작하였는데 고종 황제가 '배재학당'이라고 이름지어 주었다. 한국에 성서 번역부가 생기자 언더우드·게일 등과 함께 성서의 국역에 참여하였다. 교육 방식을 암기보다는 판단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고치는 데 공헌하였다.

아폴로니오스[편집]

Apollonios(기원전 3세기경)그리스의 수학자. 소아시아의 페르게에서 출생하였으며 알렉산드리아에서 공부하였다. 유클리드·아르키메데스와 함께 그리스의 3대 수학자로 불린다. 원뿔 곡선의 성질과 응용은 대부분이 그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저서로 <원뿔 곡선론>이 있다.

악바르[편집]

Akbar(1542-1605)

인도 무굴 제국의 제3대 왕. 본래 무굴 제국 티무르의 5세손 바베르가 델리를 수도로 하여 세웠는데, 제2대 푸마픈 때에 쇠퇴하였다. 악바르는 그 뒤를 이어 즉위하였는데, 재상 아브로 파츠르의 도움을 받아서 나라를 일으키는 데 힘썼다. 그는 인도 북부를 평정하여 수도를 아그라로 옮기고, 이슬람과 힌두 교도의 융합을 꾀하며 재정·군비를 정비하고 영토도 인도 북부를 거의 다 차지하였다. '악바르 대제'라 불린다.

악비[편집]

岳飛(1103-1141)

중국 남송의 장군. 허난 성에서 농민의 아들로 출생하였으며, 병졸로 시작하여 장군이 되었다. 그가 거느린 군대를 '악가군'이라 불렀다. 그는 북쪽의 금나라와 싸워 승리하였으나, 전쟁을 반대하는 재상 진회에게 살해되었다. 중국의 영웅으로 존경을 받고 있으며 악왕으로 추대되었다. 저서로 <악무목집>이 있다.

안네 프랑크[편집]

Anne Frank(1929-1945)<안네 일기>의 저자. 유대인 은행가의 둘째 딸로 프랑크푸르트에서 출생하였다. 나치스의 압박을 받아 가족과 함께 네덜란드로 피하였으나, 독일이 네덜란드에 진격하자 숨어 있는 집에서 일기를 썼다. 1945년 강제 수용소로 끌려가 가스실에서 죽었다. <안네의 일기>는 유대인들이 학대받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묘사하여 전쟁 후에 세계에 널리 읽혀지고 큰 감동을 주었다.

안녹산[편집]

安祿山(705-757)

중국 당나라의 장군. 돌궐족 출신으로 현종과 양귀비에게 총애를 받고 평로·범양·하동의 절도사를 겸하였다. 755년 범양(지금의 베이징)에서 난을 일으키고 뤄양에 들어가 대연 황제라 칭했다. 이것이 '안사의 난'의 시초로 창안까지 점령했지만, 둘째 아들 경서의 손에 죽었다. 이 난은 사사명이 이어받았는데, 9년 후에야 겨우 평정되었다. 이 난으로 당나라는 힘이 점점 약해져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

안데르센[편집]

Andersen, Hans C.(1805-1875)덴마크의 소설가·동화 작가. 코펜하겐 근교의 퓐 섬에서 출생하였으며, 구두장이인 아버지는 어린 그에게 옛날 이야기와 <아라비안 나이트>를 자주 들려 주었다. 12세 때에 아버지를 여의었고 대학을 졸업한 후 프랑스에서 이탈리아로 여행하였다. 이때 소설 <즉흥 시인>을 발표하여 작가로서 인정을 받았다. 이어서 동화집 <아이들을 위한 이야기>를 썼으며 이후 130편이나 되는 동화를 지었다. 62세 때 그는 고향 오덴세의 명예 시민으로 받들어졌으며, 1875년에 죽었는데 국왕도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다고 한다. 대표작으로 <성냥팔이 소녀> <빨간 구두> <미운 오리 새끼> <인어 아가씨> <엄지공주> <주석 병정> 등이 있다.

안드로포프[편집]

Yuriy Viadimirovich Andropov(1914-1984)

구 소련의 정치가. 페트로자보드스크 주립 대학 및 공산당 간부 학교를 졸업하였고, 1939년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953-1975년 헝가리 주재 대사관의 참사관과 대사를 지냈다. 1957-1962년 당중앙위 연락부장을 거쳐 공산당 중앙위원, 중앙위 서기를 역임하였다. 1967년부터 국가보안위원회(KGB) 의장을 거쳐 정치국원이 되었고, 1976년 상급대장을 지냈다. 1982년 당 중앙 위원회 서기로 선출되었으며, 같은 해 11월 브레주네프가 사망하자 그 후임으로 공산당 서기장이 되었다. 1983년 6월 최고회의 간부회의 의장(국가 원수)으로 선출되었으나, 이듬해 병으로 사망하였다.

안셀무스[편집]

Anselmus(1033-1109)

이탈리아 태생의 영국의 크리스트교 신학자, 캔터베리의 대주교. 스콜라 철학의 창시자이다. 롬바르디아 자치 지역의 아오스타 출생. 그의 일생은 신학자였던 베크 대수도원 시대와, 정치·종교 간의 대립이 심한 환경에서도 교회의 자유와 권리를 위해서 헌신한 캔터베리 시대로 나누어진다. 그는초기에 '이해하기 위하여 나는 믿는다'는 입장에서 <모놀로기움(모놀로그)>, 신의 존재 증명으로 유명한 <프로슬로기움> <진리론> 등을 쓰고, 후에는 속죄론으로 유명한 <쿠르 데우스 호모(왜 신은 사람이 되었는가)> 등을 썼다.

안젤리코[편집]

Angelico, Fra G.(1387-1455)이탈리아의 화가. 신앙심이 두터워서 '프라 안젤리코(천사와 같은 사람)'라 불리었다. 도미니크 수도원의 성직자로 들어가 성직자 화가인 로렌초 모나코 밑에서 그림 공부를 하였으며 후에 그곳의 원장이 되었다. 프레스코화에 뛰어났으며 피렌체 파의 대표적인`화가이다. 작품으로 <수태 고지> <성모의 대관> <최후의 심판> 등이 있다.

안진경[편집]

顔眞卿(709-784년경)

중국 당나라의 서예가·충신. 현종 때 평원 태수로 있을 무렵, 안녹산의 난이 일어나자 의용병을 모집하여 반란군을 토벌하였다. 그러나 그를 시기하는 자의 모함을 받아 살해되었다. 글씨에도 뛰어나 구양 순·우세남·저수량 등과 함께 당나라 서예의 4대가로 불리어진다. 저서로 <안로공집>이 있으며, 글씨로 <다보탑비> <안씨가 묘비> <화엄첩> <수서첩> 등이 있다.

안토니누스 피우스[편집]

Antoninus Pius(86-161) 로마의 황제(재위 138-161).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5현제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일찍이 집정관·원로원 의원·아시아 총독 등을 지내며 공을 많이 세워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신임을 얻어 그의 양아들이 되었다. 그 후 즉위하여 좋은 정치를 베풀어 로마 제정에서 가장 태평한 정치를 하였다.

안토니우스[편집]

Antonius, Marcus A.(기원전 82-기원전 30)

로마의 장군·정치가. 카이사르의 부하로서 명성을 떨쳤으며 카이사르가 브루투스에게 살해되자, 옥타비아누스 등과 함께 복수를 하였다. 후에 옥타비아누스·레피두스와 함께 제2차 공화정 삼두 정치를 하였는데, 그는 로마의 동쪽을 다스렸다. 그러나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에게 매혹되어 정치를 소홀히 하였다. 기원전 31년 그리스의 악티움 해전에서 로마의 서쪽을 다스리던 옥타비아누스에게 패하여 이집트로 달아나 이듬해 자살하였다.

안톤 슈나크[편집]

→ 슈나크

안 회[편집]

顔回(기원전 521-기원전 490)

중국 공자의 제자. 노나라 사람으로 자는 자연이다. 학덕이 높고 재질이 뛰어나 공자의 가장 촉망받는 제자였다. 빈곤하고 불우하였으나 개의치 않고 성내거나 잘못한 일이 없으므로, 공자 다음가는 성인으로 받들어졌다.

알랭[편집]

Alain(1868-1951)

프랑스의 문학가·사상가. 노르망디에서 출생하였으며, 엄격한 종교 교육을 받았으나 신을 믿지 않았다. 그는 \"잘 판단하는 것이 잘 행동하는 것이다\"라고 하여 이성을 높이 평가하였다. 저서로 <스탕달론> <행복론> 등이 있다.

알레익산드레[편집]

Aleixandre, Vicente(1898-?) 에스파냐의 시인. 세비야에서 출생하였으며 마드리드 대학에서 법률과 경영학을 공부하였다. 27세에 <영역>을 발표하여 시인으로서 인정을 받았으며, 이어 <입술 같은 칼> <대지의 정열> 등을 발표하여 독자들로부터 크게 환영을 받았다. 1977년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알렉산더 대왕[편집]

Alexandros, The Great(기원전 356-기원전 323)

마케도니아의 왕(재위 기원전 336-기원전 323). 필리포스 2세의 아들로 로마인으로부터 대왕의 칭호를 받았다. 기원전 336년 아버지가 암살되자 20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페르시아를 정벌하고 알렉산더 제국을 건설하였다. 그는 13세 때부터 3년간 아리스토텔레스의 지도를 받아 그리스 문화가 몸에 배어 있었다. 동방 정벌 중에도 스승인 아리스토텔레스가 교정한 <일리아드>를 항상 베개 밑에 간직하였다고 한다. 왕위에 오른 지 얼마 안 되어 그가 죽었다는 소문이 나돌자 그리스 전체가 소란해져 반란의 기미가 엿보였다. 그는 급히 테베를 쳐서 그리스 전토를 장악한 후, 부왕이 남긴 최강의 육군과 뛰어난 지휘관을 이끌고 페르시아 원정 준비를 하였다. 기원전 334년, 마케도니아 군과 헬라스 연맹 연합군이 소아시아로 원정길을 떠났다. 그 해 그라니코스 호반에서 가진 첫번째 싸움에서 페르시아 각주 지사의 연합군을 쳐부수어 기원전 336년 이래 페르시아 지배에 있던 헬라스의 여러 도시를 해방하고 이듬해 소아시아를 평정하였다. 두번째의 싸움은 시리아의 이수스에서 벌어졌는데, 페르시아의 정예 부대를 맞아 격파하였다. 이어 티루스와 가자를 공격하였으며 이집트로 진군하여 나일 강 하류에 알렉산드리아 시를 세웠다. 기원전 331년 페르시아로 진격하여 주요 도시를 차례로 함락시킨 후, 헬라스 연맹의 전쟁 목적이 끝났음을 선언하고 지원자만을 데리고 이란 고원 평정에 나섰다. 이란 고원을 평정하는 데는 3년이란 세월이 걸렸으며, 기원전 323년 바빌론 아라비아 원정을 준비하던 중 열병으로 죽었다. 그는 정복지의 여러 곳에 알렉산드리아란 이름을 붙인 도시를 건설하였는데, 이는 헬레니즘 문화 형성에 큰 역할을 하였다. 그는 대제국의 왕이면서도 호사를 멀리하고 절도의 덕을 간직한 인물이었다.

알렉산드르 1세[편집]

Aleksandr Ⅰ(1777-1825)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황제(재위 1801-1825). 젊었을 때 서유럽의 자유로운 사고 방식을 배워, 즉위하자 새 정치를 실행하고자 힘썼다. 처음에는 나폴레옹 편이 되어 영국을 괴롭히기도 하였지만, 후에는 나폴레옹에게 반대하여 그의 러시아 원정을 실패하게 하였다. 1815년 유럽 여러 나라의 군주들을 끌어들여 신성 동맹을 만들고 점점 민족·자유주의를 억눌렀다. 1818년 폴란드의 대부분을 러시아 영토로 하였다.

알렉산드르 2세[편집]

Aleksandr Ⅱ(1818-1881)러시아의 황제(재위 1855-1881). 크림 전쟁을 끝맺고, 1861년에 '농노 해방령'을 선언하는 등 개혁을 단행하였다. 1864년 폴란드 독립 혁명을 진압하였으며, 1877년 터키와의 전쟁에서 패배하였다. 사회적 불안이 조성되는 가운데 암살당하였다.

알렉산드르 3세[편집]

Aleksandr Ⅲ(1845-1894)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황제(재위 1881-1894). 알렉산드르 2세의 둘째 아들로 유대 인을 압박하는 등 강력한 억압 정치를 하였다. 그는 독일의 비스마르크와 사이가 나빠, 1894년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으며, 프랑스의 자본을 끌어들여 시베리아 철도를 놓기 시작하였다.

알렌[편집]

Allen, Herace N.(1858-1932)

미국의 조선 주재 외교관·선교사. 한국 이름으로 안 연이며 미국 웨슬리안 대학 신학과와 마이애미 의과 대학을 졸업하였다. 동양 전도를 지망하여 1883년 미국 장로 교회 의사로 상하이에 갔다가, 이듬해 서울의 미국 공사관 의사로 들어왔다. 갑신정변 때 부상당한 민영익을 치료한 것이 계기가 되어 왕실의 의사와 고종의 정치 고문이 되었다. 1885년 고종은 최초의 서양 병원인 광혜원을 세우고 그로 하여금 서양 의술을 가르치게 하였다. 1887년 주미 전권 공사 박정양의 수행원으로 미국에 건너가 청나라의 간섭을 규명하고 독립국 사신의 체면을 유지하게 하는 등 공로가 컸다. 1890년 미국 공사관 서기관을 거쳐 총영사·대리 공사 등을 지냈다. 1892년 이래 <코리안 레포지토리>를 간행하고, 1897년 전차·전등 등에 관한 설치권을 미국에 넘겨 주었다. 1900년 영국 왕립 아시아 협회 조선 지부를 결성하여 회보를 발행하는 등 문화 발전에 공로가 있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미국으로 다시 건너가 의사 생활을 하면서 남은 생애를 보냈다.

알베르티[편집]

Alberti, Leon B.(1404-1472)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건축가. 교황 에우게니우스 4세 밑에서 고대 건축을 연구하였으며, 1450년 <건축론> 10권을 저술하여 건축가로서의 경험과 미학적인 원리를 세웠다. 그의 이론은 옛 고전의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것을 출발점으로 하였는데, 그의 설계는 후에 바로크 건축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의 설계에 의해 지어진 건축물로는 밀라노의 산프란체스코 성당과 피렌체의 산타마리아 노베를라 성당 등이 있다. 저서로 <조각론> <회화론> 등이 있다.

알비노니[편집]

Albinoni, Tommaso(1671-1750)바로크 시대 후기의 대표적인 이탈리아 작곡가. 베네치아 태생으로 50여 곡의 오페라를 작곡하였으며, 기악 작곡가로도 유명하다. 그의 소나타와 협주곡은 최근에 높이 재평가되고 있다. J.S. 바흐는 그의 작품을 칭찬하고 그 테마에 기초를 둔 3곡의 푸가를 작곡한 바 있다. 그는 이 밖에도 주요 작품으로 심포니아·협주곡·실내악곡 등을 다수 남겼다.

암스트롱[편집]

Armstrong, Neil A.(1930- )미국의 우주 비행사. 최초로 달 착륙에 성공한 우주선 아폴로 11호의 선장. 대학에서 항공 기관학을 전공한 후 해군 항공대의 비행사가 되었다. 1950년 6·25전쟁 때 제트 조종사로서 한국전에 참전하기도 하였다. 1962년 우주 비행사 시험에 합격하였으며, 1966년 인공 위성 제미니 8호의 선장이 되어 지구 주위를 도는 궤도 위에서 표적 로켓과 결합하는 데 처음으로 성공하였다. 이어 아폴로 11호의 선장이 되어 1969년 7월 16일, 올드린과 콜린즈 비행사와 함께 플로리다 주의 케네디 우주 기지를 출발하였다. 5일 후에 달 주위를 도는 궤도 위에서 모선에 남은 콜린즈와 헤어져서, 올드린과 함께 달 착륙선으로 '고요한 바다'에 착륙하였다. 모래와 암석을 모으고 지진계 등을 설치해 놓은 다음 무사히 지구로 돌아왔다. 이로써 인류 최초로 달을 밟은 지구인이 되었다.

압두르 라흐만[편집]

'Abdu'r-Rahman(731-788) 에스파냐 코르도바 이슬람 왕국(후 옴미아드 왕조)의 시조(재위 756-788). 시리아 다마스쿠스에 자리잡고 있던 옴미아드 왕조가 750년에 아바스 왕조에서 멸망한 후, 에스파냐으로 들어가 756년 코르도바에 수도를 정하고, 옴미아드 왕조를 다시 일으켜 에스파냐에 이슬람 왕조를 열었다. 그는 훌륭하고 공평한 정치를 하였을 뿐 아니라 카롤루스 대제의 침입을 막아냈다.

앙리 3세[편집]

Henri Ⅲ(1551-1589)

프랑스 발루아 왕조의 마지막 왕(재위 1574-1589). 위그노 전쟁에 참가하였으며, 1573년 폴란드 왕으로 뽑혔다. 이듬해 형 샤를마뉴 9세가 죽자 귀국하여 왕위에 올랐다. 위그노 전쟁 때 처음에는 구교파와 손을 잡았으나, 후에 위그노(신교) 파의 지도자 앙리 드 나바르와 동맹을 맺고 구교에 맞섰다. 1589년 파리가 포위되자 수도사 클레망에게 암살되었으며, 이로써 발루아 왕조는 끝났다.

앙리 4세[편집]

Henri Ⅳ(1553-1610)

프랑스 부르봉 왕조를 세운 왕(재위 1589-1610). 프로테스탄트 교도로서 왕위에 올랐으나 정치적인 목적으로 가톨릭교로 바꾸어 가톨릭 교도의 지지를 받았다. 그 후 프로테스탄트 교도에 대해서는 1598년 '낭트 칙령'을 반포하여 신앙의 자유를 승인하고 화해하였다. 위그노 전쟁 후 절대 왕정의 바탕을 확립시키고 재정 개혁·산업 장려·무역 확충 등의 업적을 남겨 앙리 대왕으로 불리었다. 그러나 1610년 가톨릭 교도에 의해 암살되었다.

앙페르[편집]

Ampere, Andre M.(1775-1836)프랑스의 물리학자. 전기·자기의 연구에 몰두하여 근대 전기학의 기초를 세웠다. 자석에 얼굴을 향하여 발에서 머리로 전류를 통하면 자석의 N극, 즉 북극은 그 사람의 왼손 쪽으로 움직인다는 '앙페르의 법칙'을 발견하였다. 전류의 세기를 나타내는 단위인 '암페어'는 그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애덤스[편집]

Adams, John(1735-1826) 미국의 제2대 대통령. 매사추세츠에서 출생하였으며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였다. 영국의 인지세법에 반대하여 식민지 독립 운동에 참가하였으며, 대륙 회의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1776년 '독립 선언서'의 기초 위원으로 참가하였으며, 그 후 워싱턴 정부의 부통령으로 일하다 1797년 대통령에 선출되어, 미국 건국 초기의 정치·경제 안정에 힘썼다. 대외적으로는 중립을 지켰다.

애덤스[편집]

Adams, John Q.(1767-1848) 미국의 제6대 대통령. 제2대 대통령인 애덤스의 아들이다.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후 네덜란드·러시아 등의 공사를 거쳐 1803년 상원 의원이 되었다. 1809년 다시 러시아 공사가 되었으며 1817년 먼로 대통령 밑에서 국무 장관이 되었다. 1823년 '먼로 선언문'을 작성하였으며, 1825년 대통령에 선출되어 공업 육성과 국내 개발에 힘썼다.

애덤스[편집]

Adams, Walter S.(1876-1956)미국의 천문학자. 시리아의 안티오크에서 선교사의 아들로 출생하였으며, 8세 때 미국으로 이주하여 다트머드 대학에서 천문학을 배웠다. 1901년부터 4년간 야키스 천문대에서 근무하였으며, 그 후 스승인 헤일과 함께 천체의 스펙트럼 연구에 전념하였다. 1923년 스승의 뒤를 이어 제2대 천문대장이 되었다. 그의 업적으로는 백색 왜성(빛을 내는 양과 크기가 작은 별)을 검증한 것과 거성(빛을 내는 양과 크기가 매우 큰 별)의 스펙트럼을 분류한 일 등이다.

애덤 스미스[편집]

→ 스미스

애치슨[편집]

Acheson, Dean G.(1893-1971)미국의 정치가. 예일 대학을 거쳐 하버드 대학 법과 대학을 졸업하고, 1919년 변호사를 개업하였다. 그 후 1933년 재무 차관, 1941년 국무 차관보, 1945년 국무 차관을 거치면서 제2차 세계 대전 전후의 중요한 외교를 수행하였다. 1949년 국무 장관이 되어 대소 강경 정책을 취하였다. 이듬해 태평양에서의 미국 방위선을 알류샨 열도-일본-오키나와-필리핀으로 연결하는 소위 '애치슨 라인'을 발표하였다. 이 결과 우리나라와 자유중국이 미국의 방위에서 제외되었다. 1953년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애틀리[편집]

Attlee, Clement R.(1883-1967)영국의 정치가.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하고 변호사 생활을 하다가, 제1차 세계대전에 참가하여 소령이 되었다. 1922년 노동당 의원이 되고, 1924년 노동당 내각에서 육군 차관에 취임하였다. 1935년 핸더슨의 뒤를 이어 노동당 당수가 되었으며, 1940년 처칠 전시 내각 때 부수상이 되었다. 1945년 총선거에 승리하여 노동당 단독 내각을 조직해서 수상이 되고, 전쟁 후의 뒷처리를 담당하였다. 1951년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애플턴[편집]

Appleton, Edward Victor(1892-1965) 영국의 물리학자.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한 후 런던 대학·케임브리지 대학의 교수를 지내고 에든버러 대학 학장을 지냈다. 1926년 케넬리 헤비사이드 층보다 높은 곳에 전리층이 있음을 확인하고 이를 '애플턴 층'이라 하였다. 이 연구로 레이더 발달에 이바지하였으며, 1927년 왕립 과학 협회 회원이 되었다. 전파·전리층을 연구한 공로로 1947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앤 여왕[편집]

Anne, Stuart(1665-1714)

영국 스튜어트 왕조의 마지막 왕(재위 1702-1714). 제임스 2세의 딸로 1702년에 즉위하였다. 여왕의 재위 기간에 정당 정치가 발달하여 토리 당과 휘그 당이 형성되었으며, 에스파냐 계승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1707년 스코틀랜드를 병합하여 대브리튼 왕국이 되었다. 당시 스위프트·디포 등의 문인이 배출되었으며, 즉위식 때 “나의 모든 정성을 오로지 영국을 위해 바치겠노라”고 하여 국민의 갈채를 받았다.

앨런[편집]

Allen, Horace Newton(1858-1932)미국의 외교관·선교사. 우리나라 이름은 안련(安連). 오하이오 출생. 웨슬리언 대학 신학과, 마이애미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장로교회 의사로 중국 상하이에 갔다가 1884년 서울의 미국 공사관 의사로 우리나라에 왔다. 갑신정변 때 다친 민영익을 고친 것이 계기가 되어 왕실의 의사와 고종의 정치 고문이 되었다. 1887년 참찬관에 임명되어 주미 전권 공사 박정양의 고문으로 미국에 가서 독립국으로서의 우리나라 처지를 국무성에 밝혔다. 주한 미국 공사관 서기관이 되어 외교 활동을 했고, 1902년부터 <한국 위보>를 간행했다. 1904년 고종으로부터 훈 1등과 태극 대수장을 받았고,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뒤 본국으로 돌아갔다.

앵그르[편집]

Ingres, Jean A.(1780-1867)

프랑스의 고전주의 화가. 18년간 로마에서 옛 그림을 연구하였으며, 특히 라파엘로에 심취하였다. 그 후 귀국하여 고전파의 대가로서 환영을 받았으며 르누아르·드가에게 영향을 끼쳤다. 대표작으로 <리뷔에르 부인의 초상> <목욕하는 여자> <터키 목욕탕> 등이 있다.

앵베르[편집]

Imbert, Laurent J.(1797-1839)프랑스 외방 전교회 신부. 1920년 중국 마카오에 도착하여 월남 등지에서 전도하였다. 1830년 쓰촨 지구 부주교를 거쳐, 1837년 브루기엘의 후임으로 제2대 조선 교구 부주교로 임명되어 우리 나라에 왔다. 가톨릭 전도와 교세 확장에 힘쓰던 중 1839년 기해박해 때 수원에서 체포되어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그는 당시 신도의 전기 편찬을 계획하였는데, 그 전기인 <기해일기>가 1858년 파리에서 간행되었다.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한국 순교자 103위의 한 사람으로 시성되었다.

야스퍼스[편집]

Jaspers, Karl(1883-1969)

독일의 철학자. 처음에는 정신병리학을 연구하였으나 철학으로 옮겼다. 그의 철학은 니체와 키에르케고르의 경향을 따른 실존주의 철학으로서, 현대 문명에 의해 소외된 인간 본래의 모습을 되찾으려고 한 데에 특징이 있다. 하이데거와 함께 현대 실존 철학의 쌍벽으로 일컬어진다. 저서로 <철학> <이성과 실존> 등이 있다.

야율 대석(엘뤼다시)[편집]

耶律大石(1087-1143)중앙 아시아 카라키타이의 초대 황제(재위 1132-1143). 요나라 태조의 8대손. 요나라 멸망 후 구르 칸이라 칭하며 서요를 세웠다.

야율아보기[편집]

耶律阿保機(872-920)

중국 요나라의 시조(재위 916-926). 중국 동북부에서 활약하다가 당나라가 쇠약해진 틈을 타서 거란의 여러 부족을 규합하여, 916년 황제라 칭하였다. 요하 상류인 임황에 도읍하여 국호를 대요라 하였다. 922년 고려에 사신을 보냈으며 926년 발해를 멸망시켰다. 그는 주위의 나라들에게 조공을 바치도록 하였으며 거란 문자를 사용하게 하는 한편, 한의 문화를 도입하였다.

양 견[편집]

楊堅(541-604)

수나라 초대 황제인 문제. 일명 수 문제라고도 한다. 581년 양위를 받아 수나라 황제가 되고 연호를 개황이라 하였다. 북쪽의 돌궐에 압력을 가하는 한편, 587년에 양나라를, 589년에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남북을 통일하여 3세기에 걸친 중국 분열을 마무리지었다. 부병제·균전제·화폐 제도 등을 실시하여 대제국 건설의 기초를 만들었다.

양귀비[편집]

楊貴妃(719-756)

중국 당나라 현종의 비. 여도사였으나 745년 입궁하였다. 후세에까지 이름을 떨친 미인으로 현종의 극진한 사랑을 받아 일족이 영화를 누렸다. 안녹산의 난 때 목매어 자살하였다.

양제[편집]

煬帝(569-618)

중국 수나라 제2대 황제(재위 604-618). 수 문제의 아들로 604년 아버지를 죽이고 황제가 되었다. 중국을 통일하기 위해 율령제를 확립하고 양쯔강과 황하를 잇는 대운하를 만들어 남북을 연결하였다. 또한 자주 원정군을 보내어 인도차이나·타이완까지 정복하였으며, 대운하를 따라 40개나 되는 이궁을 짓는 등 백성들을 혹사하였다. 세 차례에 걸친 고구려 정벌에 실패하는 등 나라가 혼란해지자 618년 부하에게 살해되었다. 이로써 수나라는 망하고 당나라가 들어섰다.

언더우드[편집]

Underwood, Horace G.(1859-1916)

미국의 선교사. 우리나라 이름은 원두우이며 런던에서 출생하였다. 1872년 미국에 이주하여 뉴욕 대학·뉴부른스윅 신학교를 졸업하였다. 1884년 조선 최초의 장로교 선교사로 선정되어 이듬해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와 함께 인천에 왔다. 1887년 우리나라 최초의 교회인 서울 '새문안 교회'를 세웠으며 한국어 문법책을 영어로 집필하였다. 그 후 성서 번역 위원회 초대 위원장·대한 기독교서회 회장·한국 기독교 교육회 회장 등으로 일하는 한편, 연희전문학교를 창설하였다. 또한 교회 연합 운동을 지도하는 등 우리 나라 종교·문화·언어·정치·사회 등 여러 분야에 많은 공적을 남겼다.

에드워드 1세[편집]

Edward Ⅰ(1239-1307)영국의 왕(재위 1272-1307). 즉위하여 아버지 헨리 3세 때부터 있어 온 외국인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한 정책을 썼다. 법과 제도를 정비하고 토지 등 부동산의 양도 및 상속에 관한 중요한 법률을 만들어 '영국의 유스티니아누스'라 불리었다. 1295년 성직자와 귀족, 각주에서 2명의 기사 및 도시의 대표를 모아 '모범 의회'를 열어 영국 의회의 기초를 쌓았다.

에드워드 3세[편집]

Edward Ⅲ(1312-1377)영국의 왕(재위 1327-1377). 에드워드 2세의 맏아들이며, 어려서 즉위하여 어머니 이사벨라가 섭정하였다. 1330년, 프랑스의 카페 왕조가 단절되자 프랑스 왕위 계승을 주장하여 백년 전쟁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승리하였으나, 샤를 5세에 의해 프랑스 영내의 자기 영유지를 많이 빼앗겼다. 재위 기간 동안 전쟁 비용을 많이 써 왔기 때문에 국가 재정에 대한 의회의 힘이 강해지게 되었다.

에드워드 6세[편집]

Edward Ⅵ(1537-1553)영국 튜더 왕조 제3대 왕(재위 1547-1553). 헨리 8세의 외아들로 어머니는 제인 시모어이다. 메리 1세와 엘리자베스 1세가 이복 누이이다. 9세에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삼촌인 에드워드 시모어가 나라 일을 처리하였다. 아버지가 이룩한 종교개혁으로 성립된 영국 국교회의 일반 기도서가 제정되었다. 또한 예배식과 교리도 많이 바뀌었다. 16세의 나이로 병들어 죽었으며, 마크 트웨인의 소설 <왕자와 거지>는 그를 모델로 하였다.

에드워드 7세[편집]

Edward Ⅶ(1841-1910)영국 하노버 왕조 마지막 왕(재위 1901-1910). 빅토리아 여왕의 맏아들로 60세에 즉위하였다. 재위 기간 동안에는 독일과의 관계가 악화된 상태였으며, '모로코 사건' 이후, 영·러 협상을 맺어 독일 포위 체제를 이루었다. 국내에서는 자유당·보수당이 대립하여 곤란한 문제에 부딪히고 있었다.

에드워드 8세[편집]

Edward Ⅷ(1894-1972)영국의 왕(재위 1936). 윈저 공으로 알려져 있으며, 즉위하여 이혼 경력이 있는 심프슨 부인과 결혼하려 하였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반대하자 왕위를 동생 조지 6세에게 물려주고 결혼하여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에디슨[편집]

Edison, Thomas Alva(1847-1931)미국의 발명가. 오하이오 주에서 출생하였으며 학교 교육을 받은 것은 3개월 뿐이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열성적인 교육에 의해 점차 재능을 발휘하게 되었다. 12세 때 철도의 신문팔이 일을 하는 한편, 화학 실험을 시작하였다. 후에 인쇄기를 사서 열차에 싣고 다니며 신문을 발행하였다. 15세 때 역장의 아들 목숨을 구해 준 것이 인연이 되어 전신 기사가 되었다. 1876년 멜론파크에 연구소를 세워 연구를 계속하였다. 그의 발명은 굉장히 많아서 특허의 수효만도 1,300여 개나 된다. 1874년 자동 발신기, 1877년 축음기, 1879년 전화 송신기, 1880년 신식 발전기와 전등 부속품, 1881년 전차의 실험, 1882년 발전소 건설, 1888년 영화, 1895년 광물을 가려내는 법, 1900년 시멘트 공업의 개량, 1909년 엔진 형 축전지 등이 있다. '에디슨 효과'의 발견은 3극 진공관 발명의 기초가 되어 라디오 발명의 길을 열어 준 과학상의 중요한 발견이다. 에디슨은 위대한 인격자인 동시에 노력가였다. “천재라는 것은 98%의 땀과 2%의 영감이다”라고 한 그의 말은 천재 발명가의 노력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에라스무스[편집]

Erasmus, Desiderius(1466-1536) 네덜란드의 학자·사상가. 어려서 수도원에서 배운 후 1486년 이후 아우구스티노 교단의 학교에서 고전을 연구하여 명성을 얻었다. 1498년 영국에 건너가 토머스 모어 등과 사귀었으며 옥스퍼드 대학에서 그리스어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1506년 이탈리아에서 학자들과 사귄 후 다시 영국으로 건너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우신 예찬>을 써서 비상한 반응을 얻었다. 그는 \"가장 행복한 사람은 학문이나 예술에서 떠나 자연만을 주인으로 모시게 된 사람이다\"라고 하면서 권위주의에 빠진 기독교를 비판하고 직업적인 성직자를 비난하였다. 1517년 종교개혁이 일어나자 그 운동에 호의적이기는 했으나, 광신을 싫어하여 루터와 대립하여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1536년 스위스 바젤에서 죽었다. 저서로 <자유 의사론> <기독교 군주 교육> <대화집> 등이 있다.

에라토스테네스[편집]

Eratosthenes(기원전 275년경-기원전 194년경)

그리스의 천문학자·지리학자. 아테네에서 공부하였으며, 기원전 235년경 프톨레마이오스 3세의 초청으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장이 되었다. 그는 대지가 둥글다는 것을 알고 지구의 크기를 재는 것을 생각해 내어, 지구의 둘레는 약 4만 5,000㎢ 라는 해답을 내었다. 실제로는 약 4만㎢이므로 그 정확함은 놀랄 만하다.

에른스트[편집]

Ernst, Max(1891-1976)

독일의 화가. 쾰른에서 출생하였으며 초현실주의(쉬르레알리슴)의 지도적인 인물이다. 처음에는 표현파에 속하였으나, 1919년 아르프와 함께 다다이즘을 결성하였다. 1924년 쉬르레알리슴 선언에 참가하였으며, 1949년에 파리로 이주하였다. 작품으로 <봄> <자연의 역사> 등이 있다.

에릭 프롬[편집]

→ 프롬

에베르트[편집]

Ebert, Friedrich(1871-1925)독일의 초대 대통령. 사회 민주당에 들어가서 1913년 당수가 되었다. 1919년 혁명 세력을 무너뜨리고 대통령이 되어 베르사유 평화 조약에 조인하였다. 독일 공화국이 세워지자 초대 대통령이 되었는데, 그의 정책은 민주주의와 국가적 단결을 기초로 하였다. 저서로 <전쟁과 목적> 등이 있다.

에우리피데스[편집]

Euripides(기원전 484-기원전 406)

그리스의 극작가. 그리스 3대 비극 시인의 한 사람. 아테네에서 출생하였으며 마케도니아에서 죽었다. 아낙사고라스에게서 배우고 프로타고라스·소크라테스와 사귀어 영향을 주었다. 그의 작품 92편 중 19편이 남아 있으며, 대표작으로 <이온>을 들 수 있다. 합리적인 예지·자유주의적·인도주의적 사상을 내포하고 있는 그의 극은 근세 유럽의 비극 문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에케르트[편집]

Eckert, Franz von(1852-1916)독일의 지휘자. 드레스덴의 음악 학교를 졸업한 후 독일 해군 군악 대장으로 활약하였다. 1879년 일본의 해군 군악 교사로 초청받아 서양 음악을 전하는 데 공이 컸다. 1901년 우리나라에 초청되어 처음으로 서양식 악대를 조직하였으며, 서양 음악을 소개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에코[편집]

Eko, Umberto(1932- )

이탈리아의 현대작가·기초학자·철학자·역사학자. 그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에서 퍼스널 컴퓨터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걸쳐 지식을 쌓은 박식한 사람이다. 본격 추리소설 <장미의 이름>으로 전세계 지식인들의 찬사를 받았으며, 기호학자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 <푸코의 추>는 독자들의 찬사와 교황청의 비난을 한몸에 받으며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그 밖의 작품으로 <폭탄과 장군>(1988), <세 우주 비행사>(1988) 등 동화가 있다. 이론서로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미학의 문제> <열린 작품> <기호학 이론> 등 10여 권이 있다.

에펠[편집]

Eiffel, Alexandre G.(1832-1923)프랑스의 건축가. 에펠탑을 만든 사람이다. 파리 고등 공예 학교를 졸업한 후, 다리 놓는 기술을 익혀 가론강의 다리를 만들었다. 1889년 파리 만국 전람회를 위하여 완전 철골조의 탑을 세웠는데, 이것이 에펠탑이다. 그 밖에도 파나마 운하의 수문 공사,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 설계에도 관여하였다.

에피쿠로스[편집]

Epicouros(기원전342-기원전271)그리스의 철학자. 소아시아의 사모스 섬에서 출생하였으며 데모크리토스·플라톤에게서 철학을 배웠다. 기원전 306년 아테네에 정원을 구입하여 '에피쿠로스 학원'을 열고 교육에 힘썼다. 자연학에 있어서는 원자론적 유물론을, 윤리학에 있어서는 쾌락주의를 주장하여 쾌락주의 철학의 시조가 되었다. 그의 쾌락은 방탕자의 환락이 아니라, 고통과 혼란으로부터 해방되는 일종의 평정(아타락시아)을 말한다. 그의 이러한 사상은 널리 퍼져서 종교처럼 되고 큰 영향을 끼쳤다.

에픽테토스[편집]

Epictetos(55년경-135년경)그리스의 철학자. 스토아 학파의 대표적인 철학자이다. 소아시아에서 노예로 출생하였으며 고문을 받아 절름발이가 되었다. 그는 이때 스토아 철학을 배웠으며 노예에서 해방되자 젊은이들에게 철학을 가르쳤다. 그의 사상은 의지의 철학으로서 실천적인 면을 강조하고 있으며, 자유로울 수 있는 최대의 것으로는 신을 생각하였다. 그는 아무런 저서도 쓰지 않았으나 제자인 아리아노스가 그의 강의를 간추려 쓴 <어록> <제요>가 있다.

엔리케[편집]

Henrique, N.(1394-1460)

포르투갈의 왕자. 아프리카 항로의 개척자이다. 1415년 북아프리카의 회교도를 공격하여 공을 세웠으며, 1418년 이후 아프리카 서해안에 많은 탐험선을 보내어 항로를 개척하기에 힘썼다. 그는 세인트빈센트 곶에 천문대와 항해 연구소를 세웠으며, 탐험 항해가들을 파견하여 마두라·보하도르 곶·베르데 곶 등에 닿게 하였다. 1446년에는 북위 약 15°에 있는 갬비아 하구에 도달하였다. 이와 같은 그의 노력은 인도 항로를 발견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하였다.

엘리어트[편집]

Eliot, Thomas S.(1888-1965)영국의 시인·비평가. 미국에서 출생하였으며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였다. 그 후 영국과 프랑스의 대학에서 연구 활동을 하였다. 1917년 시집 <프루프록 및 그 밖의 관찰>, 1922년 <황무지>라는 시를 발표하여 젊은 시인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의 초기의 시는 영국 형이상학 시와 프랑스 상징주의 시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현대 문명의 퇴폐성을 그리고 있다. 1927년 영국으로 귀화하였으며, 1948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평론집으로 <시와 시인에 대하여> 등과 <황무지> <재의 수요일> <네 개의 사중주> 등이 있다.

엘리자베스 1세[편집]

Elizabeth Ⅰ(1533-1603)영국 튜더 왕조의 마지막 왕(재위 1558-1603). 헨리 8세와 앤 볼린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25세로 즉위하여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의 구혼을 물리치고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당시는 세력이 강하던 에스파냐과 산업·외교 등으로 경쟁하였으며 에스파냐의 영토인 네덜란드의 독립을 도왔다. 또한 에스파냐를 배경에 둔 가톨릭 교도를 누르고, 그들이 지지하던 메리 스튜어트를 사형에 처하여 신교주의에 의한 교회 제도를 확립하였다. 1588년 에스파냐의 무적 함대를 쳐부수어 대서양에서 가장 강한 해군이 되었다. 1600년에는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여 동양 진출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여왕 시대에는 영국의 르네상스로 불리는 국민 문학의 황금 시대로서 셰익스피어·베이컨·스펜서 등의 문인이 많이 배출되었다. 1590년 이후에는 퇴색하여 하원의 공격을 받기도 하였지만, 엘리자베스 여왕은 영국 영광의 상징이 되고 있다.

엘리자베스 2세[편집]

Elizabeth Ⅱ(1926- )현재 영국의 여왕(재위 1952-현재). 조지 6세의 맏딸로 1947년 에든버러 공과 결혼하였다.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음'의 전통을 지키면서 정치에 관여하지 않으나, 해외 여행 등으로 국제 친선에 이바지하고 있다. 1954년 대관식을 거행하였으며, 찰스·앤드루·에드워드의 3왕자와 앤 왕녀가 있다.

엠페도클레스[편집]

Empedocles(기원전 493년경-기원전 433)

그리스의 철학자. 시칠리아 섬에서 출생하였으며 정치·의술·예언 등 다방면에 재능을 가졌다. 세상의 모든 만물은 바람·불·물·흙 등 4개의 원소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이것들이 사랑과 미움의 두 힘에 의해 분리되고 결합하는 것으로 만물의 생성·소멸이라고 하였다. 저서로 <자연에 대하여> <정결> 등이 있다.

엥겔[편집]

Engel, Ernst(1821-1896)

독일의 통계학자. 드레스덴에서 출생하였으며 처음에는 채은 야금학을 공부하였다. 1846년 브뤼셀에서 통계학자 퀘틀레를 만나고 통계학 연구를 결심하였다. 1850년 작센 왕국 통계 국장, 1860년 프로이센 왕국 통계 국장 등을 지냈다. 1875년 벨기에의 근로자 가계를 조사한 결과, 소득이 적은 가정일수록 음식비가 차지하는 비율이 크다는 '엥겔 법칙'을 발견하였다. 가계비 중에서 음식비가 차지하는 비율을 '엥겔 계수'라 하는데, 문화적인 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최저의 비율은 55%라 한다. 저서로 <인구 통계의 방법> <벨기에 노동자 가족의 생활비> 등이 있다.

엥겔스[편집]

Engels, Friedrich(1820-1895)독일의 사회주의 철학자·경제학자. 방직 공장주의 아들로 출생하였으며, 고등 중학을 중퇴한 후, 브레멘에서 상업 실무 수업 중 <청년 독일>에 접근하였다. 1841년 군무에 종사하는 한편, 베를린 대학에서 청강을 하며 헤겔리안 좌파가 되었다. 마르크스와 더불어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저술과 정치 혁명 운동을 하였다. 1946년 제1인터내셔널 창립 후, 총무부장으로 근무하며 계속 국제 노동운동을 지도했고, 마르크스 사후, <자본론> 제2권 이후의 출판으로, 과학적 사회주의에 대한 이론적 기초를 확립하여 제2인터내셔널 지도 등에 힘썼다. 저서로 <경제학 비판 대강> <가족·사유 재산 및 국가의 기원> 등이 있다.

엥크루마[편집]

Kwam Nkrumah(1909-1972)가나의 정치가. 1935년 미국의 링컨 대학·펜실베이니아 대학을 졸업하였고, 1945년 영국 런던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였다. 이어 영국에서의 서(西)아프리카 민족 운동을 지도하고, 1947년 통일 골드코스트 회의 서기장으로 추대되어 귀국하였다. 1949년 인민당을 조직하여 반영(反英) 운동중 투옥되었다가, 1951년 총선거 때 옥중 출마하여 당선과 함께 석방되어, 1957년 골드코스트(황금해안)가 가나로 독립되자 초대 가나 수상이 되었고, 1966년 베이징을 방문하던 중 본국에서의 군사 쿠데타로 실각하였다.

영락제[편집]

永樂帝(1360-1424)

중국 명나라의 제3대 황제(재위 1403-1424). 태조의 넷째 아들로, 1398년에 태조의 손자 건문제가 즉위하자 이듬해 난을 일으켰다. 1402년 남경을 함락시키고 즉위하였다. 태조의 뒤를 이어 국세를 떨쳤으며 그 후 안남을 정복하고, 친히 몽고를 정벌하였다. 문화 사업에도 관심을 쏟아 <영락 대전> <사서 대전> <오경 대전> <성리 대전> 등을 편찬하였다.

예수 그리스도[편집]

Jesus Christ(기원전 4년경-기원후 30)

크리스트교의 창시자. 유대 왕 헤롯 시대에 목수 요셉의 약혼녀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되어 북팔레스티나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 나사렛에서 살다가 30세 때 요단강에서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40일간 광야에서 기도한 후 하늘 나라의 내림과 유대 민족의 회개, 사해 동포주의, 정의·사랑의 생활에 의한 하느님의 은총을 절규하고 많은 이적을 행하였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모두 저희 것이니라', '남이 너의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을 내밀어라'는 등의 말 가운데 예수의 가르침이 잘 나타나 있다. 유대인들 가운데는 예수야말로 하느님이 약속한 구세주라고 믿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바리새 교인들과 충돌하여 유다의 배반으로 붙잡혀,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 매달려 처형되었다. 3일 만에 부활하여 40일간 제자들과 있다가 승천하였다 한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야말로 구세주라고 믿고 그 가르침을 전도하였다.

예이츠[편집]

Yeats, William B.(1865-1939)아일랜드의 시인·극작가. 화가의 집안에서 출생한 그는 화가를 지망하여 미술 공부를 시작하였다. 뒤늦게 시를 쓰기 시작하여, 1889년 처녀 시집 <마신의 방황>을 발표하여 와일드 등 유명한 시인들에게 절찬을 받았다. 그의 초기 작품은 낭만적이었으나 후기에는 점차 상징적인 방향으로 기울어졌다. 아일랜드 자유국이 세워지자 원로원 의원으로 정계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으며, 국민 극장 창설에 앞장섰다. 1923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대표작으로 시집 <갈대 사이로 부는 바람>과 희곡집 <심원의 나라> 등이 있다.

예카테리나 2세[편집]

Ekaterina Ⅱ(1729-1796)러시아의 여황제(재위 1762-1796). 독일의 귀족 가문에서 출생하였으며 소피아라고 불리었다. 1745년 표트르 3세와 결혼하여 이름을 러시아식으로 예카테리나라고 고쳤다. 1761년 남편이 즉위하였으나 결혼 생활이 원만하지 못하여 이듬해 남편을 죽이고 즉위하였다. 처음에는 볼테르·달랑베르·디드로 등의 계몽주의 사상가와 사귀면서 정치·사회를 바르게 고치려는 계몽 전제 군주였으나, 귀족들이 이에 반대하자 농노제를 강화하고 자유주의 사상을 억눌렀다. 또한 투르크와 싸워 흑해의 북쪽 해안의 땅을 빼앗고, 프로이센·오스트리아와 함께 폴란드를 분할하여 유럽의 강국으로서 한몫 끼었다.

오고타이[편집]

Ogotai(1186-1241)

몽고 제국의 제2대 황제(재위 1229-1241). 칭기즈 칸의 셋째 아들로 일찍부터 아버지를 도와 부족 전쟁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영토를 나누어 받아 오고타이 한국을 열었다. 1229년 칭기즈 칸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어 개혁과 제도의 정비에 힘썼다. 또한 정복 사업을 펴 페르시아와 남러시아를 정복하고 고려를 쳐 다루가치를 설치하는 등 영토를 넓혔다. 특히 중국 원정에는 직접 참가하여, 1234년 금나라를 멸망시키고 화북 지방을 차지하였다. 카라코람에 새 도읍을 건설하는 등 몽고 제국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오기[편집]

吳起(기원전 440년경-기원전 381년경)중국 전국 시대의 장군·군사 전략가. 위나라 사람이나 후에 초나라의 재상이 되어 남월·진·주나라를 무찌르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는 군사 전략의 대가로서 그가 쓴 <오자>는 손자가 지은 병법책인 <손자>와 함께 유명하다.

오네게르[편집]

Honegger, Arthur(1892-1955)프랑스의 작곡가. '프랑스 6인조'의 한 사람으로서 현대 음악을 작곡하였다. 취리히 및 파리 음악원에서 공부하고 댕디에게서 배웠다. 대위법과 불협화음을 사용하여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특히 기계미를 음의 세계에 표현한 <태평양 231형>은 유명하다. 1947년 미국으로 건너가 바크셔 음악 센터의 작곡 교수가 되었다. 작품으로 <럭비> <화형장의 잔 다르크> 등이 있다.

오닐[편집]

O'Neill, Eugene G.(1888-1953)미국의 극작가. 뉴욕에서 출생하였으며 대학을 중퇴하고 극작에 전념하였다. 1916년 최초의 작품 <카디프를 향하여 동쪽으로>를 발표하였으며, 1920년 그의 출세작 <지평선 저 멀리>를 상연하였다. 그 후 사실극으로부터 표현주의적 상징적 희곡으로 옮겨지고 잠재 의식의 연극화를 기도하였다. 제3회 퓰리처상을 수상하였으며, 1936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주요 작품으로 <느릅나무 그늘의 욕망> <황제 존스> <안나 크리스티> 등이 있다.

오대징[편집]

(1835-1902)

청나라의 외교관·장군. 1884년 갑신정변 후 이홍장의 지휘 아래 청군 500명을 이끌고 우리나라에 들어와, 조선과 일본간의 한성 조약 회담을 방해하였다. 이듬해 인천과 의주 사이에 전선을 가설하자고 제의하여 후에 '한성 전선 조약'을 체결하게 하였다. 1894년 청·일 전쟁 때 일본군과 싸웠으나 패하였다. 저서로 <고옥도고>가 있다.

오도아케르[편집]

Odoacer(433년경-493)

게르만 족 출신의 용병 대장. 476년 서로마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르스를 폐하고 왕위에 올랐다. 동로마 제국을 받들어 스스로 파트리키우스라는 칭호를 썼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의 제논과 사이가 나빠, 그 명령에 의해 동고트의 테오도리크가 자주 침입해 왔다. 마침내 라벤나가 함락되면서 오도아케르는 테오도리크에 의해 살해되었다.

오도현[편집]

吳道玄

중국 당나라 현종 때의 화가. 지방의 하층 관리였으나 현종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궁교 박사가 되었다. 인물·산수·초목 등을 그리는 데 있어서 당대 제일이었고, 제자들을 데리고 수도원의 사원 등에 그린 벽화의 수는 300점이 넘었다. 현존하는 작품은 없으나 생동적이고 양감에 넘친 표현으로 유명하다.

오듀본[편집]

Audubon, John J.(1785-1851)미국의 조류학자·화가. 서인도 제도의 아이티에서 프랑스 해군 사령관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1803년 미국으로 건너가 필라델피아에서 새의 그림을 그렸다. 그 후 켄터키에 가서 조류 연구가인 윌슨의 지도를 받았다. 1838년 <아메리카의 조류>를 출판한 후부터 새를 전문적으로 그리는 화가로 이름을 떨쳤다. 1905년 '오듀본 협회'가 생겼으며, 켄터키 주에 '오듀본 기념 주립 공원'이 있다.

오르만디[편집]

Ormandy, Eugene(1899-1985)미국의 바이올린 연주가·지휘자. 헝가리에서 출생하였으며 5세 때 부다페스트 음악원에 들어가 19세 때 그 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1920년 미국으로 건너가 1927년 귀화하였다. 32세 때 미니애폴리스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가 되고, 이어 필라델피아 관현악단으로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레퍼토리가 광범하고 강렬한 색채의 지휘로 현대 최고의 지휘자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오르프[편집]

Orff, Carl(1895-1982)

독일의 작곡가·음악 교육가. 뮌헨에서 출생하였으며 뮌헨 음악 대학을 졸업한 후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다. 그 후 독일의 여러 가극장에서 지휘자로 일하는 한편, 음악 교육에 전력하였다. 특히 어린이들의 음악 교육을 중요하게 여겨 특별한 리듬 교육을 주장하였다. 그의 작품은 현대 음악의 일반적인 경향인 복잡화의 방향과는 전혀 다르게 음악 요소의 모든 것을 단순화하였고, 같은 화음과 리듬의 집요한 되풀이에 의하여 음악의 원시적인 감각을 나타내고자 하였다. 작품으로 3부작의 무대 형식 칸타타인 <카르미나 브라나> <아프로디테의 승리> <카토리 카르미나> 등이 있다.

오마르 하이얌[편집]

'Umar Khayyam(1040년경-1123)

페르시아의 시인·천문학자·수학자. 그가 만든 달력은 16세기에 나온 그레고리 달력보다 더 정확하였으며, 3차 방정식의 기하학적 해결을 연구하였다. 시집 <루바이야트>가 있는데, 후에 피츠제럴드가 영어로 번역하여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오부치 게이조[편집]

小淵惠三(1937- )

일본의총리. 군마현 출생. 와세다 대학교 졸업. 1963년 26세 때 최연소 의원에 당선됐고, 자민당 부간사장, 총무, 중의원(12선)과 1987년 관방장관, 1991년 자민당

간사장 1992년 다케시다파 회장, 1997년 외무상을 역임하였다.

오비디우스[편집]

Ovidius Naso, Publius(기원전 43-기원후 18년경)

로마의 시인. 사랑의 즐거움을 노래하는 연애시로 유명하며 호라티우스와 더불어 로마 문학의 황금 시대를 이루었다.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를 엮은 시 <변신 이야기>가 있다.

오삼계[편집]

吳三桂(1612-1678)

중국 명나라 말기의 장군. 랴오둥 사람으로 명나라가 망할 무렵 순치제(세조)를 도와 이자성의 난을 진압하였다. 이 공으로 청나라로부터 윈난의 번왕에 봉해졌다. 그러나 강희제 때 나라에서 '번'을 없애려 하자 이에 반대하여 경정충·상지신 등과 함께 난을 일으켰다. 이것을 '3번의 난'이라고 한다.

오스트로프스키[편집]

Ostrovskii, Aleksandr N.(1823-1886)

러시아의 극작가. 러시아의 국민 연극을 확립한 러시아 최대의 극작가로 알려져 있다. 모스크바 대학을 졸업하였으며, 약 50여 편의 희곡을 발표해 '러시아의 셰익스피어'라고 불리었다. 체호프 이전의 러시아 연극계를 지배하였으며, 주로 상인 계급의 생활을 그렸다. 작품으로 <뇌우> <가난은 허물이 아니다> <수지맞는 직위> 등이 있다.

오스트발트[편집]

Ostwald, Wilhelm(1853-1932)독일의 물리 화학자. 1881년 리가 공업 대학 교수, 1887년 라이프치히 대학 물리 화학 교수를 지냈다. 1905년 최초의 미국 교환 교수로서 하버드 대학에서 연구하였다. 그는 반응 속도론·평형론 등에 관한 연구를 하였으며, 1909년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저서로 <화학 개론> <무기 화학 원론> <에너지론> 등이 있다.

오스틴[편집]

Austen, Jane(1775-1817)

영국의 여류 소설가. 목사 집안에서 출생하였으며 평생 결혼하지 않았다. 그의 작품은 시골 목사나 지주의 생활을 주제로 한 것이 많고, 성격 묘사에 뛰어나 영국 문단상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작품으로 <오만과 편견> <분변과 다감> <에마> 등이 있다.

오승은[편집]

吳承恩(1500-1582년경)

중국 명나라의 문인. 글재주가 뛰어나 명성을 떨쳤다. 현장이 인도의 경전을 구하기 위하여 고난의 여행을 한 것을 기록한 <대당서역기>와 민간의 전설을 바탕으로 한 유명한 <서유기>를 써서 크게 이름을 떨쳤다.

오언[편집]

Owen, Robert(1771-1858)

영국의 사상가·사회 개혁 운동가. 웨일스 북부의 뉴타운에서 출생하였으며, 사업에 손을 대었다가 그것이 성공하여 스코틀랜드에 신식 방직 공장을 갖게 되었다. 그는 노동자 관리와 노동자 교육 등에 힘써 25년 만에 대기업을 이루었다. 처음에는 협동 조합을 만들고 임금과 노동 조건을 좋게 고쳐 노동자에게 의욕을 돋우어 주는 운동을 벌였다. 영국 최초의 사회주의자로서 생시몽·푸리에 등과 3대 공상적 사회주의자로 불린다. 저서로 <사회에 관한 새 견해> 등이 있다.

오에 겐자부로[편집]

大江健三郞(1935- )

일본의 작가. 에히메 출생. 도쿄대학 프랑스 문학과를 졸업했다. 재학 당시 사르트르 소설에 심취했으며, <사육(飼育)>이란 작품으로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했다. 초기에는 전후파 작가답게 전쟁 체험과 그 후유증을 소재로 인간의 내면세계를 응시하는 사회비판적인 작품을 많이 썼다. 이런 소재의 작품으로는 <우리들의 시대> <정치 소년 죽다> <용감한 병사의 아우> <인간의 양> 등이 있다. 사회적인 편견 속에서 어렵게 장애자 아들을 키운 경험을 소재로 <개인적인 체험>을 써서 전후세대의 인권 문제를 파헤쳤다는 찬사를 들었다.1994년에 <만엔 원년의 풋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오웰[편집]

Orwell, George(1903-1950)

영국의 소설가·평론가. 에스파냐 내란에 가담하여 반공산주의적인 태도를 취하고 공산주의를 비판하였으며, 전체주의를 풍자하였다. 1945년 스탈린을 비판·풍자한 <동물 농장>으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고, 1949년 <1984년>을 통해 전체주의가 가져올 공포를 고발하였다.

오일러[편집]

Euler, Leonhard(1707-1783)

스위스의 수학자·물리학자. 바젤 대학의 베르누이 밑에서 수학·물리학을 배웠다. 그 후 러시아의 페테르스부르크 학사원에서 수학·물리학을 가르쳤다. 수학의 천재인 그는 천문의 계산을 자기가 생각해 낸 방법으로 하였으며, 수학 외에도 물리학·천문학·의학·식물학·화학·신학 등다방면에 걸쳐 연구하였다. 뿐만 아니라 동양의 언어도 연구하는 등 해박한 지식을 가졌다. 함수의 기호 사인·코사인·탄젠트와 허수의 기호 i, 자연 대수의 밑수 e를 처음으로 쓰기 시작하였다. 18세기 최대의 수학자로 존경받고 있다.

오일러 켈핀[편집]

Euler-Chelpin, Hans K.(1873-1964)

스웨덴의 화학자. 독일에서 출생하였으며 후에 스웨덴으로 귀화하였다. 독일에서 대학을 졸업하였으며, 1906년부터 1941년까지 스톡홀름 대학에서 화학 교수와 생화학 연구소장을 지냈다. 발효와 효소에 관한 연구를 하여 하덴과 함께 1929년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그 후에도 계속 비타민에 관해 연구하여 비타민의 성분 중 '카로틴'이 가장 우수함을 밝혀냈다. 저서로 <식물 화학 개설> <효모와 알코올 발효>가 있다.

오즈번[편집]

Osborn, John(1929-1994)

영국의 극작가. 1956년 그가 쓴 희곡 <성내어 돌아보라>가 1965년 로열 코드 극장에서 상연됨으로써 이름이 알려졌다. 현대 사회에 대한 분노를 대담하게 나타낸 이 작품에 의하여 영국의 연극은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로써 그는 '성난 젊은이들' 모임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작품으로 <밀려든 예술인> <루터> <토요일 밤과 일요일 아침> 등이 있다.

오 진[편집]

吳鎭(1280-1354)

중국 원나라의 화가. 그는 한평생 고향을 떠나지 않은 채 그곳에서 서당을 열어 제자를 가르치며 가난한 생활을 하였다. 그는 원나라 말기 남종화를 성립시킨 화가로서 특히 산수와 대나무를 잘 그렸다. 당시 황공망·예 찬·왕 몽과 함께 4대 화가로 불리어진다. 시와 글씨에도 뛰어나 자기의 그림에 시를 써서 설명한 <매도인 유묵>이 명나라 때 발간되기도 하였다. 작품으로는 <가화 팔경도> <동정어은도> 등이 있다.

오컴[편집]

Occam, William(1300-1349)

영국의 철학자. 스콜라 철학자였으나 실제로는 그 파괴자로서 근세 철학의 시조이기도 하다. 그의 사상은 베이컨의 경험론을 더욱 철저하게 한 것으로, 보편성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에 '유명론'이라 불린다.

오쿠라 신페이[편집]

小倉進平(1882-1944)일본의 언어학자. 도쿄 대학을 졸업한 후 한국어를 연구하기 위해, 1911년 우리나라에 왔다. 1926년 경성 대학 교수로 있을 때 <향가 및 이두의 연구>로써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35년에는 학사원 은사상 및 조선문학공로상을 받았다. 저서로 <일본어 및 조선어 발음 개설> 등이 있다.

오토[편집]

Otto, Nikolaus A.(1832-1891)

독일의 기계 기술자. 1864년 일종의 4 사이클 가스 기관을 만들었으며, 1867년 파리 박람회에 출품하여 인기를 끌었다. 1872년 독일 가스 기관 제작 회사를 세우고 다이믈러의 협력을 얻어 '오토 기관'이라는 실용적인 4사이클 가스 기관을 만들었다. 이로써 내연 기관 발달의 기초를 쌓았다.

오토 1세[편집]

Otto Ⅰ(912-973)

독일 신성 로마 제국의 창시자(재위 936-973). 오토 대제라고도 불린다. 아버지 하인리히 1세의 뒤를 이어 즉위하여 국가의 통일 사업에 힘썼다. 961년 이탈리아까지 통일하여, 이듬해 교황 요한네스 12세에 의해 신성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로 추대되었다. 그는 독일을 중세 유럽의 지도적 위치로 끌어올렸으며, 이탈리아 교회의 대주교 자리를 처음으로 만드는 데 공이 컸다. 당시 훌륭한 예술품이 많이 나와 '오토 왕조의 르네상스'를 이룩하였다.

오파린[편집]

Oparin, Aleksandr I.(1894-1980)구 소련의 생화학자. 1935년 '과학 아카데미' 창립에 참여하였으며, 1946년 바흐 연구소 소장이 되었다. <생명의 기원>을 발표하여 무기 물질로부터 유기물 및 생명이 발생하는 과정에 대하여 과학적인 해설을 주장하였다. 1957년에는 인공 생명체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획기적인 이론을 발표하였다. 또한 구 소련에 있어서의 설탕·빵·술·담배 등의 생산을 연구하고 합리적인 생화학 기초를 만들었다. 후에 세계평화협회의 위원으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오페르트[편집]

Oppert, Ernst J.(1832-?)

독일의 상인·항해가. 1866년 고종 때 영국인 모리슨과 함께 충남 아산만에 들어와 조선에 통상 요구를 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그 해 다시 강화도의 갑곶진에서 통상을 요구하려 했으나, 때마침 일어난 천주교 박해로 실패하였다. 1868년 다시 조선에 와 아산만 덕산군에 상륙하여 흥선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파헤치려다가 실패하였다. 그 후 다시 인천 영종진에 상륙하여 통상을 요구하다 물러갔다. 그는 <금단의 나라 조선 기행>이라는 책을 지었는데, <하멜 표류기>와 함께 외국인이 쓴 우리나라 역사 자료이다.

오펜바흐[편집]

Offenbach, Jacques(1819-1880)프랑스의 작곡가. 독일에서 출생하였으며, 어릴 때 파리에 와서 첼로를 공부하였다. 그는 프랑스 극장의 지휘자가 되어 경쾌하고 재미있는 오페라를 많이 발표하여 '프랑스 오페레타의 창시자'라고 불린다. 작품으로 <호프만의 이야기> <천국과 지옥> 등 100여 편이 있다.

오펜하이머[편집]

Oppenheimer, Franz(1864-1943) 독일의 경제학자·사회학자. 처음에는 의학을 공부하여 의사가 되었으나, 후에 경제학에 관심을 가져 베를린 대학에서 경제학·사회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국가는 종족간의 투쟁에 의한 정복 관계에 따라 성립한다는 '사회적 국가론'을 주장하였다. 저서에 <국가론> 등이 있다.

오펜하이머[편집]

Oppenheimer, John R.(1904-1967) 미국의 이론 물리학자.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후 영국과 독일에 유학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원자폭탄 연구소장이 되어 여러 학자들과 함께 원자폭탄을 처음 만들었다. 1950년 수소폭탄 제조에 반대하였다가 모든 공직에서 쫓겨난 것으로 유명하다.

오 헨리[편집]

O. Henry(1862-1910)

미국의 단편 작가. 북캐롤라이나 주에서 출생하였으며 일찍 부모를 여의어 학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였다. 처음에는 은행원이었으나 공금 유용 혐의로 감옥에 갇혔는데, 이때 단편 소설을 쓰기 시작하였다. 모파상의 영향을 받아 풍자·애수에 찬 화술로 평범한 미국인의 생활을 그렸다. 작품 구성이 완벽하며 특히 결말이 감명을 준다. 작품으로 <20년 후> <마지막 잎새> <순경과 찬송가> <크리스마스 선물> 등이 있다.

옥타비아누스[편집]

Octavianus(기원전 63-기원후 14)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재위 기원전 30-기원후 14). 카이사르의 뒤를 이어 로마 제국을 건설하였다.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에 그의 양자가 되어 안토니우스와 함께 카이사르를 죽인 브루투스의 군대를 누르고, 안토니우스·레피두스와 함께 삼두 정치를 하였다. 그 후 안토니우스가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에게 빠져 로마의 영토를 자기 마음대로 하자, 이에 옥타비아누스는 이집트에 대해 전쟁을 일으켰다. 기원전 31년 악티온 해전에서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의 해군을 무찌르고 소아시아 방면에까지 세력을 뻗쳤다. 로마 사람들은 그의 공로를 찬양하고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위대한 사람)'라는 칭호를 주었다. 이리하여 형식상으로는 공화 정치가 행해졌으나, 실제로는 그가 황제와 같은 힘을 가져 이 시대부터 로마 제정에 들어갔다. 그는 토목과 건축을 일으켜 로마의 도시를 훌륭하게 만들었다.

올비[편집]

Albee, Edward(1928- )

미국의 극작가. 워싱턴에서 출생하였으며 처음에는 시와 소설을 썼으나, 시인 오든의 충고를 받아 희곡을 쓰기 시작하였다. 인종 문제를 다룬 <베시 스미스의 죽음>을 발표하여 사회 여론을 불러일으켰다. 이어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에서 현대 부부의 애정 문제를 파헤쳤다. 대표작으로 <동물원 이야기> <미국의 꿈> <모래 상자> <작은 앨리스> 등이 있다.

올커트[편집]

Alcott, Louisa M.(1832-1888)미국의 여류 소설가. 아버지는 가난한 교육자이고 철학자였으며 그는 네 자매 중 둘째 딸로 출생하였다. 교사·간호사 등을 하면서 문필 생활을 하였다. 그의 전기 <지지 않는 루이저>는 한 집안의 충실한 기록이며, 대표작 <작은 아씨들>은 소녀 시절의 자기 집안에 대해 쓴 생활 기록으로서, 작품 가운데 둘째 딸 조우가 바로 루이저이다. 이 작품이 호평을 받자 속편 <착한 아내들> <8명의 사촌들> 등을 썼다.

[편집]

Ohm, Georg S.(1787-1854)

독일의 물리학자. 에를랑겐에서 출생하였으며 베를린 사관학교·뮌헨 대학 교수를 지냈다. 금속선을 흐르는 전류에 대한 실험으로, 전류의 세기는 전압에 비례하고 전기 저항에 반비례하며, 전기 저항은 도선의 길이에 비례하고 그 단면적에 반비례 한다는 '옴의 법칙'을 발견하였다. 전지 저항의 단위 옴(Ω)은 그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옹스트룀[편집]

Ångstrom, Anders(1814-1874)스웨덴의 물리학자. 웁살라 대학을 졸업하고 그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열학·자기학·광학 등에 관한 연구가 많고, 이외에 태양 스펙트럼·북극광의 스펙트럼에 관한 연구가 많다. 빛의 파장 측정에 사용되는 '옹스트롬' 단위는 그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옹정제[편집]

雍正帝(1678-1735)

중국 청나라의 제5대 황제(재위 1722-1735). 강희제의 아들이며 건륭제의 아버지이다. 군기처를 설치하여 중앙 최고 행정 기관으로 삼고, 지정은 제도를 실시하여 세금 제도를 하나로 하는 등 정치를 정비하였다. 또한 천민 해방·천주교 포교 금지 등을 행하였다. 밖으로는 칭하이와 티베트를 토벌하였으며, 1727년에는 러시아와 캬흐타 조약을 맺어 국경을 정하였다. 문화면에도 힘써 <고금 도서 집성> 등을 편찬하였다.

와일드[편집]

Wilde, Oscar Fingal O.(1854-1900) 영국의 시인·소설가·극작가.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의사인 아버지와 시인인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한 뒤, 예술을 위한 예술을 신조로 하는 탐미주의를 주장하였다. 1882년 미국으로 건너가 미학을 강의하며 이 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는 예술 그 자체를 중히 여겼으며 도덕·규칙 같은 것은 문제 삼지 않았다. 작품에는 장편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희곡 <살로메>, 동화 <행복한 왕자> <옥중기> 등이 있다.

와트[편집]

Watt, James(1736-1819)

영국의 발명가·기계 기술자·증기 기관의 발명자. 스코틀랜드에서 출생하였으며 글래스고 대학의 기계 수리를 맡았다. 1764년 대학에 마련해 놓은 뉴코멘 증기 기관의 모형을 고칠 기회를 얻어 손질하는 동안에 여러 가지 결점을 알아내었다. 그 기관은 피스톤을 움직이기 위해 실린더 속에 증기를 보내면 물로 그것을 식혔기 때문에 열의 손실이 컸다. 그는 증기를 내는 연료의 절약을 생각하고, 1765년 응결기를 실린더에서 떼어 내어 연료인 석탄을 절약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어 대기의 압력 대신에 직접 증기의 힘으로 피스톤을 움직이게 하는 증기 기관을 만들었다. 1781년 회전 운동을 하는 기계에도 사용할 수 있는 회전식 증기 기관을 완성하였다. 이로 인해 탄갱에 괴는 물을 간단히 퍼낼 수 있게 되었으며, 풀턴은 증기선을, 스티븐슨은 증기 기관차를 발명하게 되었다. 또 방적 기계·인쇄기 등도 증기 기관으로 움직이게 되었다.

와트슨[편집]

Watson, James D.(1928- )

미국의 생물학자. 시카고에서 출생하였으며 시카고 대학 동물학과를 졸업하였다. 후에 인디애나 대학에서 미생물의 유전에 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영국으로 건너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크리크와 함께 디옥시리보 핵산(DNA)의 2중 나선 모형을 주장하였다. 이것을 '와트슨-크리크 모형'이라 하며, 학계에 끼친 공로로 1962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왁스먼[편집]

Waksman, Selman A.(1888-1973)미국의 세균학자. 러시아에서 출생하였으나, 1916년 미국으로 귀화하였다. 1944년 흙 속에서 사는 세균을 연구하다가 스트렙토마이신을 만들어 냈다. 이것은 페니실린으로 듣지 않는 병균을 죽이는 항생 물질로서 그때까지 불치의 병으로 알았던 결핵 치료에 사용되었다. 1952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왕 망[편집]

王莽(기원전 45-기원후 23)

중국 전한 말기의 참주. 전한 원제 왕후의 조카로 왕씨 가문의 사람이다. 성제 때 재상이 되었는데, 애제의 뒤를 이어 평제를 즉위하게 하는 등 점차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5년 평제를 죽이고, 8년 자신이 황제에 즉위하여 나라 이름을 '신'이라 하였다. 그는 공자·맹자가 제창한 도덕을 나라의 바탕으로 삼아 이상적인 제도를 정치에 그대로 실행하려 하였으나, 개혁이 너무 급진적이어서 실패하고 말았다. 신 왕조는 건국한 지 15년 만에 후한의 광무제가 된 유 수에게 멸망당하였다.

왕 몽[편집]

王夢(1322-1385)

중국 원나라 말기의 화가. 저장 성에서 출생하였으며 문장과 그림에 뛰어났다. 그림은 황공망에게 배웠는데, 특히 산수·인물 등에 능하였다. 작품으로 <구두 임목도> <추심추휴도> 등이 있다.

왕소군[편집]

王昭君

중국 한나라 원제의 후궁. 당시 한나라는 북쪽의 흉노로부터 여러 차례 침입을 받았는데, 화친 정책으로 중국 여자들을 흉노에게 시집 보내곤 하였다. 후궁인 왕소군도 흉노의 왕 호한야 선우에게 시집을 가게 되어 많은 슬픈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져 왔다. 그녀는 강에 몸을 던져 죽었는데, 그 영혼이 밤마다 원제의 침실에 찾아오곤 했다는 내용의 희곡 <한중추>가 있다. 이 밖에도 초나라 석숭의 <왕소군사>를 비롯하여 이 백·두 보 등의 시에도 많이 등장하고 있으며, 구양 수의 <명비곡>, 왕안석의 <명비곡> 등에 그녀의 전설을 소개하고 있다.

왕시민[편집]

王時敏(1592-1680)

청나라의 화가. 4왕 5운 가운데 한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이름난 그림을 보고 그림 그리는 법을 배워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모든 학문에 능통하였으며 시문에도 뛰어났다. 혼자서 글씨와 그림을 연구하였고, 원나라의 황공망과 명나라의 동기창의 화법을 연구하여 완성시켰다. 작품으로 <부람난취도> <묵필 산수도> 등이 있다.

왕실보[편집]

王實甫

중국 원나라 초기의 극작가. 베이징에서 출생하였으며 희곡 <서상기>의 작가로 유명하다. 관한경·마치원·백박 등과 더불어 원곡의 대작가로 일컬어진다. 대표작으로 <여춘당> <파요기> 등이 있다.

왕안석[편집]

王安石(1021-1086)

중국 북송의 정치가. 나라의 정치를 바로잡는 데 힘썼으며 문장가로서도 유명하다. 신종 때 시참지정사로 임명되어 당시의 재정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신법을 만들어 부국 강병책을 썼다. 이것을 '왕안석의 신법'이라 하며, 청묘법·시역법 등이 있다. 그러나 너무 급진적인 개혁이었기 때문에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가 재상의 자리에서 물러나자, 보수파의 세력이 커져 그의 개혁은 흐지부지되었다. 시문에도 능하여 당송 팔대가의 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저서로 <임천집> <당백사시선> <주관신의> 등이 있다.

왕양명(수인)[편집]

王陽明(守仁)(1472-1528)중국 명나라의 사상가. 양명학을 창시하였다. 15세에 조정에 들어가 치안에 대한 방책을 건의하였으며, 자주 반란을 진압하여 공을 세웠다. 그는 당시 성행하던 주자의 학설에 따르지 않았다. 그 후 1510년, 격물치지의 뜻을 깨달아 <오경억설>을 지었으며 이듬해 '지행합일론'을 주장하였다. 지행합일론이란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가르침으로서 '양명학'이라고 불린다.

왕원기[편집]

王原祁(1642-1715)

중국 청나라 초기의 문인·화가. 4왕 5운의 한 사람이다. 청 시대 우산파와 더불어 남종화 2대 화파의 하나인 '누동파'의 시조이다. 일찍이 진사 시험에 합격하여 호부 시랑을 지냈다. 그는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 왕시민에게 그림을 배웠으며 동기창의 남종화 양식을 이어받았다. 작품으로 <운산도> 등이 있다.

왕 유[편집]

王維(699-759)

중국 당나라의 시인·화가. 756년 안녹산의 난 이후에 숙종에게 등용되어 상서 우승을 지냈다. 시와 그림에도 뛰어났으며, 그의 시는 인간의 괴로움을 아름다운 말로 읊어 밝은 마음이 넘치게 한다. 또한 그림은 산수화를 잘 그려 '남종화'의 시조가 되었다. 저서로 시집 <왕우승집>이 있다.

왕자오밍[편집]

汪兆銘(1885-1944)

중국의 정치가. 광둥 성에서 출생하였으며, 일본으로 유학 가 있던 중 '중국 혁명 동맹회'에 가입하였다. 1916년 광둥 군 정부에 가담하여 쑨원을 도와 활약하였다. 국민당의 좌파로서 우파인 장제스와 대립하였다. 국·공 분열 후 난징의 국민 정부와 통합하였다. 중·일 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과의 화친을 주장하고, 1938년 충칭을 탈출하였다. 1940년 난징에 신국민 정부를 세우고 주석에 취임하였다. 그는 반공 및 일본과의 평화 관계를 맺어 나라의 위기를 구하고자 하였으나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하였다.

왕 휘[편집]

(1632-1717)

중국 청나라의 화가. 명나라 말기부터 청나라 초에 걸쳐서 산수화에 가장 뛰어난 화가이다. 그는 왕감의 눈에 들어 그의 제자가 되었으며, 후에 왕시민에게 그림을 배워 오히려 스승을 능가하는 화가가 되었다. 강희제의 명으로 그림을 그린 일도 있으며, 후에 '우산파'의 시조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왕희지[편집]

王羲之(307-365)

중국 진나라의 서예가. 왕우군이라고도 한다. 서예에 뛰어나 '서성'이라고 일컬어진다. 처음에는 서진의 여류 서예가인 위 부인에게 글씨를 배웠고, 후에 한나라·위나라 비문을 연구하여 해서·행서·초서의 서체를 완성하였다. 아들 왕헌지도 서예가이다. 작품으로 <난정서> <상란첩> <황정경> <악의론> 등이 있다.

[편집]

堯 중국 태고의 황제. 이상적인 군주로 되어 있으나, 실제 인물이라기보다는 전설적인 인물로 본다. 기원전 2367년경에 산시 성 평양에 도읍하였고, 50년간 왕위에 있었다고 한다. 또한 아들 단주가 어리석으므로 순(舜)에게 양위하였다고 한다. 순과 함께 어진 황제의 본보기로 일컬어지고 있다.

요셉[편집]

Joseph

1세기 무렵의 유대의 목수. 마리아의 남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다. <신약 성서> 중 <마태 복음 1장 18-25절>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요셉과 약혼중인 마리아가 성령에 의하여 잉태하고, 요셉은 이 예수 그리스도를 잘 보호하여 길렀다고 한다.

요한[편집]

Johannes, Baptisa 구약 성서 시대 최후의 예언자. 세례 요한으로 알려져 있다. 30세부터 요단 강가의 거친 들판에서 설교를 시작하여, 구세주가 오는 날이 멀지 않았으니 죄를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부르짖었다. 이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자, 이 사람이야말로 '구세주'라 하며 세례를 베풀었다. <마가 복음 6장>에 의하면 요한은 헤롯 왕이 동생의 아내와 같이 사는 것을 비난하다가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요한[편집]

Johannes 예수 그리스도의 12제자 중의 한 사람. 1세기경 사람으로 <신약 성서>의 <요한 복음> <요한 계시록>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전도하던 초기부터의 제자 중 한 사람으로서, 예수가 죽은 후에는 초대 교회의 중요 인물이 되었다.

요한 바오로 2세[편집]

John Paul Ⅱ(1920- )제264대 교황(재위 1978-현재). 폴란드 바도비체에서 출생하였으며 크라쿠프 대학을 졸업하였다. 1946년 사제, 1964년 크라쿠프 대주교, 1967년 추기경에 임명되었다. 1978년 요한 바오로 1세의 뒤를 이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이탈리아 인이 아닌 사람이 교황으로 선출된 것은 455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1984년 한국 천주교 순교자 103위의 시성식을 위하여 우리나라를 방문하였다.

요한슨[편집]

Johannsen, Wilhelm L.(1857-1927) 덴마크의 식물학자. 1881년부터 코펜하겐의 카를르스베르크 연구소에서 생화학을 연구하였다. 그 후 코펜하겐 대학 교수를 지냈으며, 1903년에 콩의 변이 유전을 연구하여 '순계설'을 발표하였다. 저서로 <정밀 유전학 원리>가 있다.

욘손[편집]

Jonson, Eyvind(1900-1976)

스웨덴의 소설가.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독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지적이고 구조적인 문체로 서민의 삶을 그렸다. 스웨덴의 유명한 문학상인 '노르딕 문학상'을 받았으며, 1974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작품으로 <해변의 파도> <햇빛과 같이 사라지다> <긴 생애> <크릴론 여행> 등이 있다.

우나무노[편집]

Unamuno y Jugo, Miguel de(1864-1936)

에스파냐의 사상가·시인·소설가. 우나무노 이 후고라고도 한다. 키에르케고르의 영향을 받았으며, 살라망카 대학의 총장을 지냈다. 당시 에스파냐의 정권과 맞지 않아 파리로 망명하였다가 독재 정권이 무너진 후 귀국하였다. 비극적인 삶의 의미를 파고든 철학적 평론인 <인생의 비극적 감정>이 그의 대표작이다.

우동[편집]

Houdon, Jean A.(1741-1828)

프랑스의 조각가. 베르사유에서 출생하였으며, 날카로운 사실주의적 수법에 의하여 모델의 정확한 성격 묘사에 뛰어났다. 19세기 사실주의 조각의 선구자이며, 특히 흉상 조각가로서 유명하다. 작품으로 <볼테르의 좌상> <다이아나 상> <디드로 좌상> <워싱턴 좌상> <부인상> 등이 있다.

우드워드[편집]

Woodward, Robert B.(1917-1979) 미국의 유기 화학자. 1937년 매사추세츠 공과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하버드 대학에서 연구를 하였다. 미국 예술과학협회회원·국제 과학협회 회원이며, 11개의 명예 박사 학위와 국제 과학 메달을 받았다. 1965년 화학적 합성 기술에 대한 공적으로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우르반 2세[편집]

Urban Ⅱ(1042년경-1099)

로마 교황(재위 1088-1099). 프랑스 귀족 출신으로 그레고리우스 7세의 신임을 받아 1088년 교황이 되었다. 그레고리우스 7세 이래의 대립 교황 클레멘스 3세를 지지하는 독일 황제 하인리히 4세와 싸웠으며, 프랑스 필리프 1세도 파문하였다. 1095년 클레르몽 종교 회의를 소집하여 제1회 십자군을 제창하였다. 이 십자군은 로마에서 클레멘스 3세를 추방하고 그를 맞이하였다.

우마르[편집]

'Umaribnu'l-khattab(581년경-644)이슬람교의 제2대 정통 칼리프(재위 634-644). 오마르라고도 한다. 처음에는 마호메트를 박해하였지만, 후에 이슬람교로 바꾸었다. 그는 제1대 칼리프의 정복 사업을 이어받아, 동로마로부터 시리아·팔레스타인·이집트를 빼앗았으며 사산조 페르시아를 멸망시키고, 페르시아를 합쳐 사라센 제국의 바탕을 이룩하였다. 그는 <코란>을 처음으로 편집하였으며, 622년 헤지라의 해를 이슬람 기원 원년으로 정하였다.

우문 술[편집]

宇文述

중국 수나라의 장군. 본래 선비족 출신으로 성은 파야두였다. 주나라를 섬겨 벼슬이 상주국에 이르고, 589년 수나라 문제 때에 진나라를 평정한 공으로 안주 총관이 되었다가, 605년 양제가 즉위하자 허국공에 봉해졌다. 612년 고구려 영양왕 때 양제의 제2차 고구려 원정 때 우중문과 함께 30만 육군을 이끌고 평양 부근까지 쳐들어왔다. 그러나 을지문덕 장군에게 살수에서 크게 패하고 돌아가 평민으로 떨어졌다가, 후에 다시 등용되었다.

우세남[편집]

虞世南(558-638)

중국 당나라 초기의 서예가. 저장 성 사람으로 벼슬은 비서감에까지 이르렀다. 글씨는 왕희지의 필법을 배웠으며, 특히 해서에 능하여 해서의 아름다운 모양을 완성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구양 순·저수량과 더불어 당나라 초기의 3대가로 일컬어진다. 작품으로 <공자 묘당비> <여남 공주 묘비> <적시첩> 등이 있으며, 저서로 <북당서초>가 있다.

우야소[편집]

烏雅束

여진 완옌부의 추장. 금나라 태조 아구다의 형으로 삼촌인 영가의 뒤를 이어 추장이 되었다. 1104년 동여진에 있는 부락 중 복종을 하지 않는 부락을 쳐서 우리나라 평북 정주에까지 이르렀다. 이에 고려에서는 임 간을 보내 쳤으나 성공하지 못하였고 다시 윤 관을 보내어 화친을 맺고 돌아왔다. 그 후 1107년에 윤 관이 다시 쳐서 평정하고 9성을 쌓아 지켰는데, 우야소의 간청으로 조공을 받기로 하고 9성을 내주었다.

우중문[편집]

于仲文

중국 수나라의 장군. 주나라에서 행군 총관을 지냈으며, 수나라에 들어가 행군 원수가 되었다. 612년 고구려 영양왕 때 수 양제의 제2차 고구려 원정 때 우문 술과 함께 3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으나, 그 해 살수에서 을지 문덕 장군에게 패하고 돌아갔다.

우탄트[편집]

U Thant(1909-1974)

버마의 정치가. 랑군 대학을 졸업하였으며 1957년 이래 버마의 유엔 대표를 지냈다. 1957년 알제리 문제에 관한 아시아 그룹 상임 위원회 위원장·콩고 위원회 위원·유엔 자본 개발 기금 설립 위원 등을 지냈다. 1961년 하마슐드 유엔 사무 총장이 비행기 사고로 죽자, 그의 뒤를 이어 유엔 사무 총장이 되었으며, 1972년까지 재임하였다.

우페이푸[편집]

吳佩孚(1872-1939)

중국의 군벌 정치가. 북양 무비 학당을 졸업한 후 당시의 직례파 우두머리인 차오쿤 밑에서 일하였다. 1920년 안·직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안후이파를 몰아내었다. 1922년 봉·직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직례파가 패권을 잡게 하였다. 이듬해 차오쿤 대총통 밑에서 직로예 순열사가 되었다. 그러나 1924년 제2차 봉·직 전쟁에 패했으며, 그 후 후난에서 직례파 세력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국민 혁명군에게 세력을 빼앗겼다.

운격[편집]

(1633-1690)

중국 청나라 초기의 문인·화가. 운남전이라고도 하며 장쑤 성 사람이다. 4왕 5운의 한 사람으로 시·글씨·그림에 능하여 삼절로 일컬어졌다. 남화의 정통파 화가로서 윤곽선 없이 그리는 방법으로, 특히 꽃·새 등을 그리는 화조화에 뛰어났다.

운세트[편집]

Undset, Sigrid(1882-1949)

노르웨이의 여류 소설가. 덴마크에서 출생하였으며, 정부로부터 장학금을 받아 로마로 유학하였다. 이 때부터 창작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그녀의 작품은 주로 중세기 노르웨이에서 소재를 얻었다. 또한 사회와 여성 문제를 취급하였는데, 특히 연애·결혼 문제를 다루었다. 1928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작품으로 <십자가> <크리스틴 라브란스다터> <예니> <주부> 등이 있다.

울프[편집]

Woolf, Adeline V.(1882-1941) 영국의 여류 소설가. 문학가인 스티븐스의 딸이며, 남편은 정치 평론가이다. 문학적 환경에서 자랐으며, 특히 센트에이브스 별장에서 보낸 어린 시절은 그녀에게 바다를 밀접하게 해 주었다. 1915년 처녀작 <출항>을, 1919년 <밤과 낮>을 발표하였다. 1922년 <제이콥의 방>에서는 주인공이 주위 사람에게 주는 인상과 주위 사람이 주인공에게 주는 인상을 대조시키는 새로운 소설 수법을 썼다. 그녀는 '의식의 흐름'을 추구하는 내면 묘사와 시적인 문체로 유명해졌다. 1941년 의문의 자살을 하였다. 작품으로 <댈러웨이 부인> <등대로> <막간> <파도> 등이 있다.

울프[편집]

Wolfe, Thomas(1900-1938) 미국의 소설가. 북케롤라이나 주에서 출생하였으며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였다. 자신이 직접 겪은 생활을 소설의 소재로 많이 다루었다. 워싱턴 스퀘어 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쳤으며, 미국의 대표적인 소설가가 되었다. 작품으로 <천사여, 고향을 돌아보라> <시간과 강에 대하여> <그대 다시는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리> <저 언덕 너머> 등이 있다.

워싱턴[편집]

Washington, George(1732-1799)미국의 초대 대통령(재위 1789-1797). 미국 건국의 아버지라 불린다. 당시의 미국은 영국의 식민지였는데, 영국에 대한 반감이 강해져 1774년 독립 전쟁이 일어났다. 워싱턴은 제1회 대륙 회의의 버지니아 대표가 되고, 제2회 회의에서 독립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프랑스의 도움을 얻어 독립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1783년 파리 조약으로 미국의 독립을 인정하게 하였다. 1787년 연방 헌법 회의의 의장을 거쳐, 1789년 아메리카 합중국 헌법을 성립시켰으며 초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그는 제퍼슨을 국무장관에, 해밀턴을 재무장관에 임명하여 나라의 토대를 튼튼히 하기에 힘썼다. 1793년 다시 대통령에 선출되고, 다음 선거에서도 다시 대통령에 선출되었으나 3번이나 대통령이 되는 것은 민주 정치에 알맞지 않는다고 거절하였다.

워즈워스[편집]

Wordsworth, William(1770-1850) 영국의 시인. 어린 시절 자연 속에서 자라, 후에 전원시를 쓰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하였으며 유럽 대륙을 여행하였다. 1797년 콜리지와 사귀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듬해 두 시인은 공동 시집 <서정 민요집>을 발표하여 영국 낭만주의의 중심이 되었다. 그는 자연의 미묘한 아름다움을 깊이 관찰하고 사랑과 고요함을 노래하여 영국의 낭만주의를 대표하였다. 후에 정부로부터 '계관 시인'의 영광이 주어졌다. 작품으로 시집 <서정 민요집> <루시의 노래> <서곡> <대륙 여행의 추억> 등이 있다.

월리스[편집]

Wallace, Alfred R.(1823-1913)영국의 박물학자. 1852년부터 동인도를 탐험하여 동양과 오스트레일리아 대륙과의 동물 분포 구역의 경계선을 정하고 '월리스 선'이라고 하였다. 1858년 자연도태에 의한 생물 진화론을 다윈의 진화학설과 함께 린네 학회 총회에서 발표하였다. 월리스는 이 '자연도태설'을 '다위니즘'이라 불렀다. 저서로 <기적과 강신술> <토지 국유화의 필요와 목적> 등이 있다.

월폴[편집]

Walpole, Robert(1676-1745)

영국의 정치가.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한 후 휘그 당에 들어가 1701년 하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조지 1세 때 내각의 중심 인물로서 어려운 문제들을 잘 처리하여 1715년 첫 수상이 되었다. 그 후 20년간 수상으로 있으면서 정당 간의 다툼·종교적인 대립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에스파냐 왕위 계승 문제로 왕과 다투고 1741년 수상직에서 물러났다. 영국 정치사에 있어서 책임 내각 정치를 처음 실시한 정치가로 이름이 높다.

웨더마이어[편집]

Wedemeyer, Albert C.(1897-1989)

미국의 군인·실업가. 육군 대학을 졸업하였으며 태평양 전쟁 때에는 미국·영국·중국의 3국 군사 회의의 미국 대표단 참모장을 지냈다. 1943년 동남 아시아 군의 참모 차장, 이듬해 중국 주둔 미군 사령관 겸 중국군 참모장이 되었다. 그 후 트루먼 대통령의 특사로 한국과 중국·일본을 방문하였다.

웨베르[편집]

Waeber, Karl I.

러시아의 외교관. 베이징 공사관 서기 등을 거쳐 1884년 주한 공사 겸 총영사가 되어 우리나라에 부임하여 한러 조약을 체결하였다. 1894년 청일 전쟁 후에는 삼국 간섭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1896년 일본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모신 '아관파천'을 꾸몄다. 그 후 우리나라에 친러 내각을 만들고 이권 획득에 힘썼다. 1897년 멕시코 공사로 전임되었다.

웨스팅하우스[편집]

Westinghouse, George(1846-1914)

미국의 발명가·사업가. 1867년 공기 브레이크를 발명한 후 특허를 내어 '웨스팅하우스 공기 브레이크' 회사를 세웠다. 1882년 자동식 철도 신호기를 만들었으며, 1886년 웨스팅하우스 전기 회사를 세우고 라디오를 처음으로 만들기 시작하였다. 그 밖에도 400여 개나 되는 특허가 있다.

웰러[편집]

Weller, Thomas H.(1915- )

미국의 의학자. 1954년 하버드 대학 의학부 교수로서 소아마비 병원체인 바이러스균을 키우는 데 성공하여 주사약인 왁친을 만들었다. 그 공으로 그 해 엔더스·로빈스와 함께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웰링턴[편집]

Wellington Arthur W.(1769-1852)영국의 군인·정치가. 1787년 앵거스 사관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796년부터 인도에 복무, 공을 세워 나이트(기사)의 칭호를 받았다. 한때 정계에 진출하였으나 나폴레옹 전쟁으로 에스파냐에서 싸웠으며, 이어 프랑스에 침입하여 툴루스 등지에서 승리하여 웰링턴 공이 되었다. 1814년 전권 대사로서 파리·빈을 왕래하고, 이듬해 나폴레옹을 워털루에서 쳐부수었다.

웰스[편집]

Wells, Herbert G.(1866-1946)

영국의 소설가·문명 비평가. 집안이 가난하여 독학으로 대학을 졸업하였다. <타임머신> <투명 인간> 등 공상 과학 소설 100여 편을 썼다. 차차 사회를 개선하기 위한 의견을 제시하였으며, 국경이 없는 세계 국가를 만들어 민족간의 싸움을 없애자고 하였다. 1905년 <근대 유토피아> 이래 문명 비평에 관심을 가져 '페이비언 협회'에 가입하였다. 저서로 <세계 문화사 대계> <생명의 과학> 등이 있다.

웹스터[편집]

Webster, Noah(1758-1843) 미국의 사전 편찬자. 예일 대학을 졸업한 후 정치에 흥미를 가지고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였다. 그 후 미국의 독자적인 교과서의 필요성을 느끼고 1783년-1785년 <영문법 강화> 3권을 발행하였다. 1806년 백과 사전적인 영어 사전을 발행하였고, 1828년 마침내 <영어 사전>을 간행하여 사서 편찬에 큰 업적을 남겼다. 그 밖에도 미국 역사 교과서를 만들어 역사 교육에 공헌하였다.

웹스터[편집]

Webster, Jean(1876-1916) 미국의 여류 아동 문학가. 마크 트웨인의 조카딸이다. 1912년 쥬디아보트라는 명랑한 성격의 소녀가 고아원에서 생활하는 것을 그린 편지체 소설 <키다리 아저씨>를 1912년 발표하여 유명해졌다. 이 소설은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어 어린이들에게 깊은감동을 주고 있다. 작품으로 <발이 긴 할아버지> <패티의 대학 시절> 등이 있다.

위고[편집]

Hugo, Victor M.(1802-1885)

프랑스의 시인·소설가·극작가. 일찍이 나폴레옹 군의 군인인 아버지를 따라 유럽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다. 1822년 처녀 시집 <오드집>을 내고 나서 문학에 열중하였다. 이어 소설 <아이슬란드의 한>, 희곡 <크롬웰>을 발표하여 명성을 얻었다. 또한 15세기를 무대로 한 소설 <노틀담의 꼽추>에는 약한 자에 대한 동정이 어려 있다. 1851년 민중을 억압하는 나폴레옹 3세의 쿠데타에 반대하여 망명한 그는 19년간 영국 해협의 저지 섬과 간디 섬에서 살았다. 이 때 발표한 <징벌 시집>은 나폴레옹을 비난하는 내용이고, <정관 시집>은 죽은 딸에 대한 추억과 철학 사상을 노래한 걸작이다. 또한 <여러 세기의 전설>은 프랑스 최대의 서사시이며, 소설 <레미제라블>을 비롯하여 <웃는 사나이> <바다의 노동자> 등이 있다.

위너[편집]

Wiener, Norbert (1894-1964)

미국의 수학자·철학자. 천재여서 보통 사람보다 5년이나 빨리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계산기 연구로 전쟁에 협력하였다. 1948년 사람의 신경 작용을 신호로 나타내는 새로운 과학을 개발하여 '사이버 네틱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때에 고사포에 부착시키는 자동 조준기의 발명에 의해서 유명해졌다. 전자 계산기·번역 기계·오토메이션 등의 원리에도 이용되었다. 사이버 네틱스란 심리학·사회학·생리학·경제학 등의 학문을 하나로 종합한 과학이다.

위안스카이[편집]

袁世凱(1859-1916)

중국의 정치가·중화민국 초대 대총통. 허난 성 사람으로 1880년에 군대에 들어가, 1882년 임오군란 때 이홍장의 명령으로 우리나라에 왔다. 대원군을 포로로 하여 군란을 진압하였으며, 일본 세력을 견제하는 데 성공하고 통리 조선 통상 교섭사의가 되어 계속 주재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 때 개화당을 몰아내는 데 큰 역할을 하였으며, 1894년 동학 혁명 때 청일 전쟁을 유발시켜 이홍장의 명령으로 귀국하였으며, 1898년 무술정변을 일으켜 서태후의 총애를 얻고, 군기처 대신 등의 요직에 있다가 서태후가 죽자 고향에서 개인 군대를 양성하였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청나라 조정의 명령으로 혁명당과의 교섭 책임을 받았으나, 오히려 이듬해 청 황제를 폐위시키고 중화민국 제1대 대총통이 되었다.

위앵[편집]

Huin, Martin L.(1836-1866)

프랑스의 가톨릭 선교사. 1861년 신부가 되어 베르뇌 주교의 요청에 따라 도리 신부·브레트니에르 신부 등과 함께 1865년 우리나라에 상륙하였다. 병인박해 속에서도 전교를 계속하다가 자수하여 다블뤼 주교와 함께 순교하였다.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한국 순교자 103위의 한 사람으로 시성되었다.

위클리프[편집]

Wycliffe, John de(1320-1384)영국의 종교 개혁자.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하였으며, 1374년 교황이 납세 문제로 영국왕 에드워드 3세를 불러들였을 때 위클리프도 사절단으로 따라갔다. 그 후 교구장이 되어 로마 교회의 부패를 탄핵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로부터 이단이라는 비난을 받았으나, 계속해서 교황의 권력과 가톨릭의 교리에 공격을 가하였다. 후에 종교 개혁 운동의 여러 원리는 모두 그의 교설 가운데서 싹텄다고 하며 위클리프 파 사람들에 의해 각지에 퍼졌다. 그는 민중에게 복음의 진리를 전하기 위해 라틴어로 된 성서를 영어로 번역하여 마침내 1382년에 완성하였다.

윌리엄 1세[편집]

William Ⅰ(1027-1087)

영국의 왕(재위 1066-1087). 노르만 왕조의 시조이며 '정복왕'이라고도 한다. 본래 노르망디 공이었으나, 1066년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여 영국에 쳐들어가 노르만 왕조를 세웠다. 여러 반란과 데인 족의 침입을 물리쳐, 1070년에 영국 전체를 통일하였다. 그는 대륙의 봉건 제도를 받아들여 영국 왕실의 기초를 튼튼히 하였다.

윌리엄 3세[편집]

William Ⅲ(1650-1702)

영국의 왕(재위 1689-1702). 당시 제임스 2세의 전제 정치에 반대하는 의회 지도자들에게 초빙되어, 1688년 명예혁명 후 아내인 제임스 2세의 딸 메리와 함께 왕위에 올랐다. 그는 에스파냐 계승 전쟁이 일어나자 독일과 동맹을 맺고 루이 14세의 프랑스와 전쟁을 하여 승리하였다. 1701년 천조령을 발표하여 왕위를 스튜어트 가의 프로테스탄트 신봉자에 국한하였으며, 책임 내각제를 시작하였다.

윌리엄스[편집]

Williams, Tennessee(1911-1983)미국의 극작가. 아이오와 주립 대학에서 극작을 공부하였으며, 그 후 희곡·시·단편 등을 썼다. 1945년 그의 출세작인 <유리 동물원>과 1947년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발표함으로써 세계적인 극작가로 이름을 떨쳤다. 그의 작품의 무대는 그가 태어난 남부 지방이 대부분이며 그 곳에서 과거의 생활을 그리며 살아가는 여성들의 슬픔을 시적으로 표현하였다. 그의 작품들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연극으로 상연되고 있다. 작품으로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 <추억의 장미> <여름과 연기> 등이 있다.

윌슨[편집]

Wilson, Woodrow(1856-1924) 미국의 제28대 대통령. 버지니아 주의 스타운턴에서 출생하였으며, 1879년 프린스턴 대학을 졸업하였다. 그 후 변호사와 교수를 지냈으며, 1910년 민주당 추천으로 뉴저지 주지사가 되었다. 1912년 마침내 대통령의 영광을 안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민주주의를 위한 싸움을 부르짖고, 1917년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하였다. 전후에는 베르사유 강화 회의에서 지도자적 역할을 하여, 그의 주장인 민족 자결 등을 포함한 평화 14개 조항에 기초를 둔 강화 조약을 체결하였다. 또한 국제 연맹 창설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미국 상원은 국제 연맹 규약을 포함한 베르사유 조약의 비준을 거부하였다. 이때 윌슨은 건강이 나빠져 임기를 마치고 은퇴하였다. 1919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으며, 그의 민족 자결주의는 3·1운동의 원인이 되었다.

윌슨[편집]

Wilson, Charles T.(1869-1959) 영국의 실험 물리학자. 케임브리지 대학 물리학 교수를 지냈으며, 기체 전리에 관한 연구를 한 끝에 1911년 '윌슨의 안개 상자'를 발명하여 원자핵과 우주선의 발달에 공을 세웠다. 또한, 번개의 전기적 구조에 있어서 '높은 곳은 양, 낮은 곳은 음의 전기를 띠고 있다'는 설을 세웠다. 1927년 콤프턴과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윌킨슨[편집]

Wilkinson, John(1728-1808)

영국의 기계 기술자. 브래들리에서 큰 제철 공장을 경영하고 선조법·압연법·용철법·정련법 등 많은 특허를 얻어 제철계에 크게 공헌하였다. 왕복 운동을 회전 운동으로 바꾸어 기계를 움직이는 와트의 회전식 기관이 처음으로 설치된 것도 그의 공장이었다.

유가와 히데키[편집]

湯川秀樹(1907-1981)

일본의 물리학자. 도쿄에서 출생하였으며 교토 대학을 졸업하였다. 오사카 대학·교토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원자핵 및 장의 양자론을 연구하였다. 1934년 원자핵 속에서 작용하는 핵력을 생각하여 '중간자'가 있음을 예언하였다. 후에 앤더슨에 의해 중간자가 밝혀지자, 1949년 일본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1948년 미국의 초청으로 컬럼비아 대학과 프린스턴 고등 연구소에서 연구 생활을 하였다. 1953년 귀국하여 교토 대학에서 후진을 양성하고 소립자에 관한 연구를 하였다.

유다[편집]

Judas

예수의 열두 제자 중의 한 사람. 보통 가룟 유다라고 한다. 예수를 배반하여 은 30냥을 받고 예수를 바리새 교인들에게 넘겨 주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뒤 크게 뉘우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한다.

유 방[편집]

劉邦(기원전 247-기원전 195)

중국 전한의 고조(재위 기원전 206-기원전 195). 장쑤 성의 농민 출신으로 농사 짓기를 싫어하여 집을 뛰쳐나와 도적의 두목이 되었다. 진나라 말의 혼란 시기에 일어난 '진승의 난'에 군사를 일으켜 항우의 군대와 한때 연합하였다. 그러나 곧 갈라져 나와 서쪽으로 진격하여 진나라의 수도 셴양을 점령하고 진의 황제를 굴복시켰다. 뒤늦게 셴양에 쳐들어온 항우와 대립하여 4년간 싸운 후 승리하여 전한의 황제가 되었다. 장안에 도읍하고 군국제를 실시했으며 흉노에 대해서는 평화 정책을 썼다.

유 비[편집]

劉備(160-223)

중국 촉한의 초대 황제. 제갈 공명·관 우·장 비를 등용하여 위의 조 조·오의 손 권과 중국을 3등분 하였으며 촉(쓰촨 성)에 자리를 잡았다. 220년 조 조의 아들 조 비가 후한을 멸망시키고 위나라의 문제가 되자 이듬해 중국을 셋으로 갈라 3국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편집]

Justinianus Ⅰ(483-565)비잔틴 제국의 황제(재위 527-565). 제국의 옛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서로마 제국의 영토를 되찾으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아프리카의 반달 왕국·이탈리아의 동고트 등을 멸망시켰다. 또한 교회에 대하여 황제의 권위를 확립하고, <로마법>을 편수하였다. 이어 양잠업을 도입하여 상공업을 진흥시켰으며, 성 소피아 사원과 같은 비잔틴 식 건축을 남겨 비잔틴 제국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고 이단자들을 탄압하여 국력을 쇠약하게 만들었다.

유종원[편집]

柳宗元(773-819)

중국 당나라의 문학가. 당송 8대가의 한 사람이다. 일찍이 진사시에 합격하여 31세에 감찰 어사가 되고, 순종이 황제가 되었을 때 상서 예부 원외랑으로서 환관이나 귀족의 세력을 꺾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선정을 베풀어 인망이 높았으며, 그 밖에 철학 논문과 동물을 내용으로 한 우화적 산문 <서민의 인물전> 등을 남겼다. 그는 한 유와 더불어 고문 부흥 운동의 쌍벽으로 불린다. 저서로 <유하동집> 등이 있다.

유클리드[편집]

Euclid

그리스의 수학자·기하학의 창시자이다. 그리스어로는 '에우클레이데스'라고 한다. 플라톤의 아카데미에서 배우고, 알렉산드리아에 가서 학교를 세웠다. 후에 프톨레마이오스에게 초빙되자, 왕에게 “학문에는 왕도가 없다”고 한 말은 유명하다. 그가 쓴 <기하학 원본>은 그리스의 기하학을 완성한 것이다. 이것은 그 후 학교 교과서의 기초가 되었다. 그의 기하학을 '유클리드 기하학'이라고 한다.

육구연[편집]

陸九淵(1139-1192)

중국 남송(南宋)의 유학자·사상가. 형들도 뛰어난 학자들인데 그들에게서 큰 영향을 받아, 주희가 주장한 '이기설'을 반대하고, 우주 안에는 오직 '이(理)'만 있다고 하는 '이기 일원론'을 확립하였다. 뒤에 그의 주장은 사사로운 욕심을 금하는 금욕주의로 발전해 왕수인에게 이어졌다.

육 유[편집]

陸遊(1125-1209)

중국 남송의 시인. 저장 성 사람으로 38세에 진사가 되어 기주 통판을 지냈다. 만년에는 효종·광종의 실록 및 <삼조사>를 완성하였다. 남송에서 가장 뛰어난 시인으로 불리었으며, 저서로 <검남시고> <위남문집> <남당서> <입촉> 등이 있다.

율리우스 2세[편집]

Julius Ⅱ(1443-1513)

로마의 교황(재위 1503-1513). 주교·추기경을 거쳐 교황이 되어 교황령 및 교황의 권력을 확장하는 데 힘썼다. 1511년 영국·에스파냐와 신성 동맹을 맺어 프랑스 군을 몰아내고, 이듬해 라테란 종교 회의를 열어 성직을 사고 파는 행위를 금지시켜 교황의 권위를 높였다. 또한 미켈란젤로·라파엘로·브라만테 등을 보호하였으며 성 베드로 성당을 재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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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l Gustav Jung(1875-1961)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 보덴 호반(湖畔)의 케스빌 출생. 아버지는 프로테스탄트의 목사였다. 4세 때 바젤로 이주하여 초등 교육을 받았다. 1895년 바젤 대학에 입학하여 의학으로 학위를 취득하고, 1900년 졸업과 동시에 취리히 대학 부속 부르크횔츨리 요양소의 조수가 되었다. 이때 소장인 E. 블로일러에게 인정받아 그의 협력자가 되었다. 1905년 취리히 대학의 강사가 되었으며, 1907년 빈에서 프로이트를 처음 만난 뒤, 취리히에 프로이트 연구소를 설립했다. 1910년에 국제 정신분석학회가 창설되자 초대회장이 되었다. 1914년 학회에서 탈퇴하여 독자적인 '분석적 심리학'파를 창설했다. 1944년 바젤 대학에 융을 위한 의학적 심리학 강좌가 설치되었으나, 건강을 이유로 1년 후에 사직하고, 1948년 취리히에 융 연구소를 설립했다. 1961년 퀴스나흐트에서 급사했다.

이노센트 3세[편집]

Innocent Ⅲ(1161-1216)로마의 교황(재위 1198-1216). 로마·파리 등지에서 공부하고 1181년 성 베드로 사원에 들어갔다. 1198년 교황에 선출되어, 프랑스 왕 필리프를 징계하여 제4회 십자군 전쟁을 일으켰다. 이어 오토 4세를 폐위시키고, 1215년 프리드리히를 신성 로마 황제로 임명하였다. 한편 영국의 존 왕과 싸워 이겨 이를 굴복시키고 십자군을 통솔하는 등 교황권이 절정에 달하였다.

이 당[편집]

李唐

중국 송나라의 산수화가. 휘종의 화원에서 그림을 그렸다. 원체화를 확립하였고, 그의 그림은 먹물로 선을 강조하는 방법과 부벽준법(바위의 울퉁불퉁한 모양을 나타내는 기법)이 특징이다. 그가 그린 <산수도>는 중국 산수화의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이든[편집]

Eden, Sir Anthony(1897-1977)

영국의 정치가.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으며 전쟁이 끝난 후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하였다. 1923년 하원 의원으로 당선되어 의회에 진출하였다. 1935년 이후 3번이나 외무 장관이 되었으며, 1955년 처칠의 뒤를 이어 보수당을 이끌고 수상을 지냈다. 이때 수에즈 운하를 장악하기 위한 프랑스와의 협정에서 영국의 정책 결정에 큰 역할을 하였다. 1957년 이집트 침공의 실책으로 사임하였다.

이바노비치[편집]

Ivanovich(1845-1902)

루마니아의 작곡가. 군악대 대장으로 있으면서 많은 작품을 남겼다. 왈츠 작곡가로서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다. 작품으로 <도나우강의 잔 물결> <카르멘 실비아> 등이 있다.

이반 3세[편집]

Ivan Ⅲ(1440-1505)

러시아의 황제(재위 1462-1505). 모스크바 대공으로서 여러 공국을 쳐서 영토를 확장했으며 북동 러시아를 통일하였다. 킵차크 한국의 지배에서 벗어났으며 러시아 제국의 기초를 닦았다. 비잔틴 제국 마지막 황제의 조카딸 소피아와 결혼하여 비잔틴 제국의 후계자로 칭하고, 비잔틴 문화를 받아들여 러시아 문화 발전의 바탕이 되게 하였다.

이반 4세[편집]

Ivan Ⅳ(1530-1584)

러시아의 황제(재위 1533-1584). 3세에 즉위하여 어머니가 섭정을 하였으나, 17세부터 직접 정치를 하였다. 러시아 최초의 법전을 편찬하였으며, 영국과 통상·외교 관계를 열었다. 1558년 발트해 연안까지 진출하려다 실패했으며, 1560년부터 대귀족들의 세력을 누르기 위해 공포 정치를 실시하였다. 1582년 에르마크에 의하여 시베리아가 정복되자 동방에의 길이 열렸다. 정치 능력이 뛰어나 러시아 절대 왕정의 기초를 닦아 놓았다. 그는 외국에 대하여 스스로를 '차르'라고 칭하였다.

이 백[편집]

李白(701-762)

중국 당나라의 시인. 자는 태백이며 촉나라 쓰촨 성 사람이다. 두 보는 시성, 이 백은 시선으로 일컬어진다. 술을 몹시 좋아하여 술에 취해 있을 때 현종의 부름을 받고 그대로 궁전으로 들어가 계속해서 시를 읊었다고 한다. 그의 특색은 주관적인 자유 분방으로, 한 번 붓을 들면 곧 시가 되었다고 한다. 사상에 있어서는 도교적 색채가 엿보이며, 중국 역대를 통해 가장 뛰어난 시인으로 꼽히고 있다. <추포의 노래> <촉도난> <청평조사> 등이 유명하며 <이태백 시집> 30권이 전한다.

이븐 바투타[편집]

Ibn Battutah(1304-1377)아라비아의 여행가. 북모로코에서 출생하였으며, 22세 때부터 여행을 하였다. 이집트로부터 시리아를 거쳐 메카에 도착하고 페르시아·이라크를 여행하였다. 그 후 중앙 아시아를 여행하고, 1345년 수마트라를 거쳐 중국을 여행하였다. 그가 30년에 걸쳐 여행을 한 12만km의 발자취는 1356년에 완성된 <3대륙 주유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븐 사우드[편집]

Ibn Saud(1880-1953)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재위 1932-1953). 1901년 우파비의 도시 리야드를 정복한 후 아라비아 반도를 통일하였다. 1927년 영국과 지다 조약을 맺어 독립을 승인받았으며, 1932년 국명을 '사우디아라비아'로 고쳤다. 경작지를 개척하고 유전을 개발하는 등 사막의 근대화에 노력하였다.

이븐 할둔[편집]

Ibn Khaldun(1332-1406)

아라비아의 역사학자. 근대 사회 과학의 창시자이며 아라비아 최대의 역사가로 알려져 있다. 튀니지에서 출생하였으며 마믈루크 왕조 때 크게 활약하였다. 1401년 시리아 원정에 참가하였으며, 이어 티무르 원정에 참가하였다가 포로가 되었다. 그 후 풀려나 카이로에서 남은 생애를 보내면서 역사 연구에 힘썼다. 저서로 베르베르인의 역사를 기록한 <이바르의 책>과 <실례의 서> 등이 있다.

이사벨라 1세[편집]

Isabella Ⅰ(1451-1504)에스파냐의 여왕(재위 1474-1504). 카스티야의 왕녀로 태어나, 1469년 아라곤의 왕 페르디난드와 결혼하였다. 이리하여 카스티야와 아라곤이 합병하여 에스파냐 왕국이 되었다. 정치적 재능이 뛰어났으며 국민들에게 기독교를 믿게 하고 뒤떨어진 문화를 발전시켰다. 또한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을 원조하여 에스파냐의 해외 발전의 기초를 튼튼히 하였다. 교황 알렉산드르 6세는 '가톨릭 왕'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이사훈[편집]

李思訓(651-716)

중국 당나라의 화가. 측천무후가 정권을 잡고 당나라의 황족을 박해하자, 황족이었던 그는 숨어 살면서 그림 그리는 법을 익혔다. 산수를 세밀하게 묘사하였으며, 색채가 화려하여 당나라 제일의 화가로 불리었다. 그의 아들 이소도와 함께 '금벽산수'의 창시자가 되었다.

이세민[편집]

李世民(598-649)

중국 당나라의 제2대 황제(재위 626-649). 당 태종이며 고조 이 연의 둘째 아들이다. 총명하고 결단력이 있어 수나라가 망할 것을 미리 알고 군사들을 양성하던 중 아버지에게 권하여 군사를 일으켜 산시·허난 등을 평정하고 당나라를 세웠다. 626년 즉위하여 몽고·중앙 아시아 방면에 영토를 넓혔다. 645년 친히 고구려를 원정하였으나 안시성 싸움에서 패하고 돌아갔으며, 647년과 그 이듬해에도 고구려 침략을 꾀했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한편, 문화에 힘을 기울여 '정관의 치'라고 일컬어지는 당나라 전성 시대를 이룩하였으며 후대 황제들의 모범이 되었다.

이솝[편집]

Aesop

기원전 6세기 무렵의 그리스의 우화 작가. 그리스어로는 아이소포스라 하며 <이솝 이야기>의 작가로 알려져 있다.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노예였었는데, 총명하고 이야기를 잘하여 자유의 몸이 되었다고 한다. 동물 우화집인 <이솝 이야기>는 기원전 300년경 알렉산드리아에서 완성되었다.

이여송[편집]

李如松(?-1598)

중국 명나라의 장군. 아버지의 벼슬을 이어받아 지휘사가 되었으며, 1592년 임진왜란 때 도독으로 방해어왜 총병관이 되어 군사 4만을 이끌고 우리나라에 왔다. 이듬해 왜장 고니시에게 점령된 평양을 다시 빼앗았으며, 이 해 벽제관에서 왜장 고바야카와에게 패전한 일이 있으나 공이 컸으므로, 1594년 태자 태보로 벼슬이 올랐다. 후에 본국으로 돌아가 1597년 랴오둥 총병관이 되고 이듬해에 토번을 공격하다가 전사하였다.

이 연[편집]

李淵(565-635)

중국 당나라의 초대 황제(재위 618-626). 당 고조라 하며, 수나라 양제 때에 사회 불안을 틈타 출세하려고 하였다. 612년 태원 유수에 임명되었으며, 그 후 양제가 강도의 이궁에 가 있는 틈을 타서 아들 이세민의 권고로 군사를 일으켜 황제의 손자 공제를 세우고 대승상이 되었다. 618년 양제가 살해되자, 뒤를 이어 즉위하였는데, 나라 이름을 '당'이라고 하였다. 이후 아들 이세민의 도움으로 여러 무장들을 무찔렀으며, 626년 황태자 건성이 세민을 죽이려고 하자, 황제의 자리를 세민(태종)에게 물려주었다.

이자성[편집]

李自成(1606-1645)

중국 명나라 말기의 반란자. 산시 성 사람으로 농가에서 태어나 일꾼으로 일하다가 군대에 들어갔다. 당시 명나라의 정치는 어지러워 농민은 무거운 세금에 시달리고 있었다. 각지에서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도 여기에 가담하였다. 차례차례 정부군을 무찌르고 시안에 도읍을 두어 나라 이름을 '대순국'이라 하였다. 1644년 베이징을 쳐서 명나라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명나라의 장수 오삼계가 만주족의 힘을 빌려 쳐들어왔으므로 이와 싸우다가 패하여 전사하였다.

이토 히로부미[편집]

伊藤博文(1841-1909)

일본 메이지 시대의 정치가. 1863년 영국 런던에 유학하여 유럽의 문물을 배웠으며, 그 후 귀국하여 바쿠후 타도에 앞장섰다. 1868년 신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가 1871년 미국과 유럽을 시찰하였다. 그 후 독일에 가서 헌법을 연구하고 프로이센 헌법을 배워 제국 헌법을 만들었다. 1885년 내각 제도를 창설하고 초대 내각 총리 대신이 되었으며, 이 해 청에 가서 톈진 조약을 체결하였다. 1894년 청일 전쟁을 일으켜 전권 대사로서 마관 조약을 맺었으며, 러·일 전쟁 후 주한 특파 대사로서, 1905년 을사조약을 체결하여 초대 한국 통감이 되었다. 1909년 사임하고 추밀원 의장이 되었으며, 이 해 만주 시찰과 러시아와의 협상차 하얼빈 역에 도착하였다가 안중근 의사의 총탄에 맞아 죽었다.

이홍장[편집]

李鴻章(1823-1901)

중국 청나라 말기의 정치가. 안후이 성 사람으로,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우고 1870년 직례 총독 겸 북양 대신이 되어 외교를 맡았다.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 1900년 베이징 조약을 맺는 등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였다. 또한 방적 공장을 설립하고 외국어 학교·조병소 등을 개설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우리나라에 위안스카이를 파견하여 일본을 견제하였으며 묄렌도르프 등의 외국인 고문을 보내는 등 외교에 간여하였다.

임칙서[편집]

林則徐(1785-1850)

중국 청나라의 정치가. 당시 중국에서는 영국의 아편이 대량 유입되어 은이 밖으로 흘러나가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에 청 정부에서는 아편의 수입을 금지했으나 효과가 없자, 임칙서를 흠차대신으로 삼아 광저우에 파견하였다. 그는 영국 상인으로부터 아편을 빼앗아 불태워 버렸는데, 이것이 원인이 되어 1840년 아편 전쟁이 일어났다. 그는 이 책임을 지고 유배되었으나, 곧 운귀 총독을 지냈다. 1850년 태평천국을 토벌하던 중 병으로 죽었다.

입센[편집]

Ibsen, Henrik(1828-1906)

노르웨이의 시인·극작가. 근대극을 창시하였으며 세계의 연극에 큰 영향을 끼쳤다. 생애의 대부분을 독일·이탈리아 등지에서 보냈으며, 그의 작품 소재는 여성과 사회 문제였다. 특히 <인형의 집>에서 여성 해방을 주장하여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으며 극작계에 혁명적인 영향을 끼쳤다. 1884년 <들오리>를 전환점으로 하여 만년에는 사회에서 자신의 내면 세계로 눈을 돌려 회의적·상징적인 심리극으로 전향하였다. 작품으로 <사랑의 희극> <민중의 적> <카틸리나> <브란드> <유령> 등이 있다.

입셀란테스[편집]

Ypselantes, Alexander(1792-1828)

그리스의 독립운동가. 러시아 군의 장교로 나폴레옹 해방전쟁에 참가하였다. 1820년 그리스의 독립 운동의 비밀 단체인 '헤타이리아 필리케'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듬해 오스만 투르크 제국 안의 분쟁을 틈타 몰다비아 등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드라가샤니 싸움에서 패하여 헝가리에 망명하였다가 오스트리아 정부에 잡혀 1827년까지 옥살이를 하였다. 그의 독립 운동이 그리스 독립의 실마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