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인명사전/세 계 인 명/ㅍ
파가니니
[편집]Paganini, Nicolo(1782-1840)이탈리아의 음악가. 제노바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현악기의 기초 교육을 받았으며, 9세 때 바이올린 연주회에서 자작곡을 연주하기도 하였다. 뛰어난 바이올린 연주가로서 크게 활약하였으며, 대단히 어려운 기교의 바이올린 곡을 만들었다. 2개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24의 광상곡> 등이 그의 주요 작품이다. 파가니니의 예술은 관현악의 작곡가인 베를리오즈나 피아노의 작곡가인 리스트에게 많은 영향을 끼쳐 낭만파 음악의 흐름 속에 깊게 흘러들어 갔다.
파데레프스키
[편집]Paderewskii, Ignacy Jan(1860-1941)
폴란드의 피아니스트·작곡가·정치가. 폴란드의 남동부에 있는 포돌리아 주(제2차 세계대전 후 소련 영토가 되었다)의 크릴로프카에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17세 때 바르샤바 음악원을 졸업하고, 1878-1883년 모교의 피아노 교사가 되었다. 재학시절부터 연주와 작곡 활동을 해 온 그는, 다시 베를린으로 유학하여 작곡을 연구하고, 빈으로 건너가 거장 레셰티츠키 밑에서 피아노 연주를 배운 뒤, 1887년 그곳에서 피아니스트로 데뷔하였다. 그 후 그는 베를린·파리·런던·뉴욕 등지에서 연주를 하여 절찬을 받았다. 1909년 바르샤바 음악원 원장이 되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조국을 위한 의연금 모금을 위해 연주회를 개최하는 등 독립운동에 힘썼다. 또한 파리에 설치된 폴란드 국민 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가 조국의 독립이 이룩되자, 1919년 폴란드 공화국 건국과 함께 초대 수상에 선출되었다. 베르사유 평화회의 전권 대사로 활약한 뒤 수상직을 사임하고, 한때 미국에서 휴양한 뒤 악단에 복귀하여 다시 미국과 유럽을 순회하며 연주하였다. 1936년 영국 영화 <월광곡>에 출연하였으며, 스위스에서 은퇴 생활을 하다가 뉴욕에서 죽었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최고 훈장과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작품으로 오페라 <망르> 외에 피아노곡과 교향곡 및 협주곡이 있다.
파렌하이트
[편집]Fahrenheit, Gabriel Daniel(1686-1736)
독일의 물리학자. 단치히에서 출생하여, 오랫동안 영국에서 살았다. 1724년 왕립 협회 회원이 되었고, 1714년 알코올 온도계 대신 수은 한란계를 발명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온도계의 화씨 눈금을 생각해 냈다. 액체가 끓는 온도는 기압에 따라 변하며, 또 물이 액체인 그대로 빙점 이하의 온도로 되는 것을 발견하였다.
파르메니데스
[편집]Parmenides(기원전 5세기)그리스의 철학자. 엘레아 학파의 대표적인 철학자로 남이탈리아의 엘레아에서 태어났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모든 진리의 바탕은 바로 이성인데, 이성에 의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제논의 스승이며, <자연에 대하여>라는 시를 지었으나 일부분만이 남아 있다.
파브르
[편집]Fabre, Jean Henri(1823-1915)프랑스의 곤충학자. 남프랑스 생 레옹의 시골 농가에서 태어났다. 그는 집이 가난하여 장난감이라곤 가져 보지 못하였으나, 벌레들을 좋아하여 벌레를 가지고 놀았으며, 벌레의 생김새를 관찰하고, 또 그들의 생활하는 모습을 살피기를 즐겼다. 그리하여 남들이 싫어하는 벌레들을 사랑하여 키우기도 하였다. 초등 학교를 졸업하고 철도공으로 일하게 되었는데, 처음 받은 돈으로 벌레와 꽃, 그리고 새들을 노래한 시집을 사서 열심히 읽었다. 그는 일을 하면서도 한편으로 열심히 공부하여 고학으로 사범 학교를 졸업하고, 1852년 공립 중학교 교사가 되었다. 생활은 늘 가난하였지만, 그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도 곤충을 관찰하고 연구하는 데서 삶의 보람을 느꼈다. 그 후 그는 논문 <자연 과학의 역사>를 발표하여 파리에서 학위를 받았다. 은퇴한 뒤 56세 때부터 <곤충기>를 쓰기 시작하여, 84세 때 10권을 완성하였다. 무려 30년에 걸친 이 대작으로 인해 그는 세계적인 곤충학자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파블로프
[편집]Pavlov, Ivan Petrovich(1849-1936)
구 소련의 생리학자. 중부 러시아의 랴잔에서 출생하여 페테르스부르크 대학을 졸업하고 독일에 유학하였다. 군의 학교 교수·국립 실험 의학 연구소 생리학 주임·고차 신경 활동 생리학 연구소장 등을 역임하였다. 타액선의 연구에서 출발하여 유명한 조건 반사의 이론을 창시하고, 대뇌 생리를 연구하여 세계적인 대생리학자가 되었다. 1904년 노벨 의학·생리학상을 받았다.
파스칼
[편집]Pascal, Blaise(1623-1662)
프랑스의 종교 사상가·철학자·자연 과학자. 남프랑스 오베르뉴의 클레르몽에서 사법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3세 때 어머니를 잃고, 소년시대에 아버지를 따라 파리로 이주하였다. 그는 학교 교육은 받지 않았으나, 독학으로 유클리드 기하학을 연구하였다. 또한 수학·물리학에 관한 새로운 실증적·자연 과학적 방법을 배우고, 가톨릭 교회에서 종교 교육을 받아 이성의 대상과 이성 이상과의 구별을 할 수 있는 실력을 닦았다. 16세 때 <원뿔 곡선론>을 저술하여 데카르트를 놀라게 하였다. 사영 기하학에 있어서의 '파스칼의 원리'는 이 원뿔론에서 발견된 것이다. 1636년 아버지와 함께 루앙으로 옮겨 그곳에서 계산기를 고안, 제작하였다. 그 해 토리첼리의 실험을 시험한 진공 문제, 유체 정역학 문제에 흥미를 느끼고, <진공에 관한 새 실험>을 발표하는 등, 물리학상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그는 수녀가 된 여동생의 감화를 받고서, 1654년 종교에 대한 체험을 하고 포르로열 수도원의 객원이 되었다. <죄인의 회심에 관해서> <요약 예수 그리스도 전기> 등은 그 시대의 작품이다. 1658년 우연한 기회에 사이클로이드 문제를 해결하는 적분법을 창시하였다. <사이클로이드의 역사> <원호론> <사이클로이드 일반론> <삼선형론> 등의 수학 논문에 그것이 나타나 있다. <크리스트교의 변증론>을 쓸 것을 결심하고 단편적인 원고를 쓰고 있었는데, 병 때문에 완성하지 못하고 39세로 죽었다. 그가 죽은 후 그의 친구들이 그의 원고를 정리하여 간행한 것이 <팡세>로, 그의 대표작품이 되었다. 그의 업적은 르네상스에 새로 일어난 자연 과학·인도주의적인 인간 형성, 종교 개혁을 계기로 일어난 아우구스티누스의 종교 사상 등을 이어받아 발전시켰으며, 이것을 물체와 정신과 사랑의 3가지로 묶은 데에 있다.
파스테르나크
[편집]Pasternak, Boris Leonidovich(1890-1960)
구 소련의 시인·소설가. 모스크바에서 화가인 아버지와 피아니스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음악을 지망하였다가 철학에 몰두하여 모스크바 대학을 졸업, 독일 마르부르크에 유학하여 철학을 연구하였다. 고국에 돌아온 그는 미래파의 기관지 <레프>를 중심으로 많은 서정시를 발표하여, 러시아 최후의 순수 예술파 시인으로 불리게 되었다. 1958년 스웨덴의 한림원에서는 그의 장편 소설 <의사 지바고>를 노벨 문학상 수상 작품으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혁명을 비판한 내용이 들어 있다고 하여 구 소련 정부와 작가 동맹으로부터 압력을 받게 되어, 이를 거부하였다. 주요 작품으로는 <성루 위에서> <1950년> <안전 보증> 등이 있다.
파스퇴르
[편집]Pasteur, Louis(1822-1895)
프랑스의 화학자·세균학자. 코흐와 함께 세균학의 기초를 다졌다. 가난한 직공의 아들이었으나, 부모가 교육에 열성이어서, 에콜 노르말(고등 사범 학교)에서 공부하였다. 1846년 학교를 졸업하고 모교에 남아서 화학 연구에 힘써, 주석산의 결정과 그 용액의 선광성에 관한 최초의 연구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 후 디종 중학교 교사·스트라스부르 대학의 화학 교수를 거쳐, 1854년 릴 대학 학장 겸 화학 교수가 되어 발효에 관한 연구를 하였다. 1857년 젖산 발효에 관한 연구 논문을 발표하고, 같은 해 모교인 에콜 노르말의 교무과장 겸 자연 과학 지도자가 되어, 알코올 발효에 관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발효가 효모균이라는 생물의 작용으로 일어난다는 것을 밝혔다. 그리고 썩는 것, 즉 세균을 죽이려면 열을 가하면 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 연구는 '생물의 발생'이라는 큰 문제를 해결하는 중요한 열쇠가 되었다. 그 까닭은 그때까지 '생물은 알이 없어도 생겨난다'고 하는 자연 발생설이 옳다고 여겨져 왔으나, 이것을 뒤엎는 실마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또 미생물도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님을 밝혀 자연 발생설에 쐐기를 박았다. 그 후부터 생물학 분야에 관한 연구를 시작하여, 포도주 방부법을 발견하였다. 그는 전염병의 근원도 세균이라고 하여 동물과 인간의 질병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그리고 누에의 미립자병의 예방, 양의 탄저병 등의 예방을 완성하였다. 이러한 연구에서 병의 근원이 되는 세균을 약하게 하여 주사하면(예방 접종), 그 다음에는 강한 세균이 몸에 침입해도 병에 걸리지 않는 '면역'이 생긴다는 중요한 것을 발견하였다. 1885년 이 방법을 사람의 몸에 적용하여, 광견병의 예방 접종에 성공하였다.
파시
[편집]Passy, Frederic(1822-1912)
프랑스의 경제학자·정치가. 1867년 '국제 영구 평화 동맹'을 설립하고 서기장이 되었으며, 1874년 하원 의원이 되자, 영국인 크리머와 함께 국제 평화 동맹·국제 의회 연합을 만드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1901년 뒤낭과 함께 제1회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저서에 <평화 운동의 역사> <유럽의 장래> 등이 있다.
파시엔
[편집]Paschen, Friedrich(1865-1947)독일의 물리학자. 본·베를린 대학 교수를 지냈다. 1889년 가스 속의 불꽃 방전에 관한 연구를 발표했으며, 1893년 감도가 높은 전류계를 발명하였다. 그는 또한 적외선 등의 스펙트럼을 연구하여 수소 스펙트럼의 '파시엔 계열'을 발견하는 등 분광학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파슨스
[편집]Parsons, Charles Algernon(1854-1931)
영국의 기계 기술자·발명가.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하고, 1883년 증기 터빈을 발명하여 그 개량에 힘썼다. 그는 물의 흐름과 증기의 흐름이 비슷한 점에 착안하여, 물 대신에 증기를 쓸 수 있는 기관을 연구하였다. 즉, 증기의 힘으로 바퀴를 돌리는 증기 터빈은 역시 증기의 힘으로 피스톤을 왕복시키는 증기 기관보다 증기의 낭비가 적어, 적은 양으로도 큰 힘을 낼 수가 있다. 이후 이 증기 터빈은 공장·발전소·기선 등에 널리 이용되었다. 또 그는 1897년 세계 최초로 증기 터빈을 장치한 시속 63km의 속력을 낼 수 있는 터빈 선(船)도 만들었다.
파시키비
[편집]Paashikivi, Juho(1870-1956)핀란드의 정치가·실업가. 그는 처음으로 소련과 외교 관계를 맺어 활약하였다. 제정 러시아의 국회 의원·재무상·스웨덴 대사·소련 대사 등을 지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1944년 소련과의 강화를 혼자 이루어 놓았다. 1946년 대통령에 취임하고, 1950년 다시 재선되었다.
파얀스
[편집]Fajans, Kasimir(1887-1975)
미국의 물리 화학자. 폴란드에서 출생하였다. 뮌헨 대학 교수로 지내다가 나치스를 피하여 미국으로 건너갔다. 1936년부터 미시간 대학의 교수로 일하며, 우라늄 X2를 발견하여 이름을 떨쳤다. 또한 방사성 원소의 변위 법칙을 발견하였으며, 이온의 성질에 관해서도 연구하였다. 저서에 <방사능 원소와 동위원소> 등이 있다.
파운드
[편집]Paund, Ezra Weston Loomis(1885-1972)
미국의 시인·문예 비평가. 아이다호주 출생.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수학하였다. 1909년 영국으로 건너간 뒤에 신문학 운동의 중심 인물이 되어 T. S. 엘리엇과 J. 조이스 등을 세상에 소개하였다. 그는 언어를 조각과 같이 구체적인 형태로 표현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다방면에 걸쳐 뛰어난 번역을 남겼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반미 활동의 혐의로 오랫동안 정신 변원에 연금되었으나 시인들의 운동으로 풀려났다. 시집에 <가면> <캔토스> 등이 있다.
파울리
[편집]Pauli, Wolfgang(1900-1958)
스위스의 이론 물리학자. 빈에서 출생하여 뮌헨 대학에서 공부하였다. 취리히 국립 공업 대학 교수, 미국의 프린스턴 대학 고등 연구소 객원 교수를 지냈다. 상대성 이론의 전개에 기여하였고, 양자론의 체계화에 노력하였다. 1924년 원자 구조에 관한 '파울리 배타 원리'를 발견하였는데, 이것은 페르미의 통계법과 저온의 물질 상태 해명의 출발점이 되었다. 1945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저서로 <상대성 원리> <양자론> 등이 있다.
파이닝어
[편집]Feininger, Lyonel(1871-1956)미국의 화가. 미국 표현파의 대표적인 화가로 뉴욕에서 출생하였다. 베를린 미술 학교를 졸업하고, 바우하우스에서 학생을 가르쳤다. 신문의 삽화·풍자화를 그렸으며, <시카고 트리뷴>지 등에 정치적 만화를 많이 그렸다. 그 후에 순수 회화에 전념하여 입체파의 영향을 받았다. 바다나 배에 큰 관심을 나타내어 이것을 내용으로 한 작품이 많다. 대표 작품으로 <거울 같은 바다> <기선과 범선> 등이 있다.
파이오니오스
[편집]Paionios(기원전 450년경)그리스의 조각가. 올림피아에서 발굴된 <승리의 여신 니케>상을 만든 조각가로 알려져 있다. 그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육체와 의복의 아름다움은 기원전 5세기의 특징이다.
파피니아누스
[편집]Papinianus, Aemilius(140년경-212)
로마의 법학자. 고전 법학자 중의 제일인자로, 그의 학설은 로마 법학에서 최고로 친다. 세베루스와 함께 스카에볼라에게서 배운 후, 세베루스가 로마 황제의 자리에 앉자 중용되었다. 황제가 죽은 후 황제의 아들 카라칼리가 그의 동생 게타를 죽이고 그 변호를 부탁하자 거절하여 피살되었다. 주요 저서로 37편으로 이루어진 <탐구>를 비롯하여, <정의> <간통론> 등이 있다.
팔라비
[편집]Pahlevi, Riza Shah(1877-1944)이란 팔라비 왕조의 창시자(재위 1925-1941). 명문 집안의 출신으로 육상·수상을 지냈으며, 카자르 왕조를 무너뜨리고 황제가 되어, 1935년 페르시아였던 나라 이름을 이란으로 고쳤다. 1941년 영국과 프랑스의 간섭으로 물러나고, 왕위를 황태자에게 물려주었다.
팔라비
[편집]Pahlavi, Mohammad Riza(1919-1980) 이란 국왕(재위 1941-1979). 제2차 세계대전 중 아버지 리자 왕이 영국과 프랑스의 간섭으로 물러나자 왕위를 이어받았다. 1951년 석유를 모두 국유화하여 영국의 세력을 몰아냈으며, 소련을 멀리하고 친미 정책을 폈다. 토지 개혁 등 근대화를 위해 힘썼으나, 반정부 세력의 데모로 인해 외국으로 망명,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병사하였다.
팔마 베키오
[편집]Palma, Vecchio, Jacopo(1480년경-1528)
이탈리아의 화가. 벨리니의 제자로 지오르지오네·티치아노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르네상스의 베네치아 파를 대표하는 화가로, 성화와 유연한 색조로 그린 미녀의 초상화 등으로 유명하다. 작품에 <아담과 이브> <비너스> <마리아의 피승천> <목자의 예배> <야곱과 라헬의 만남> 등이 있다.
패러데이
[편집]Faraday, Michael(1791-1867)영국의 물리학자·화학자. 과학 사상 최대의 실험 물리학자로 일컬어진다. 런던 근교의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나 학교 교육은 전혀 받지 못하였다. 13세 때 제본소 직공으로 들어가 밤을 새워 가며 책을 읽던 중 과학에 취미가 생겨 과학자가 될 것을 결심하였다. 1813년 왕립 연구소 데이비의 조수가 되어 3년 동안 데이비와 함께 유럽에 연구 여행을 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이 연구소에 있는 동안 많은 업적을 올려, 1823년 그 연구소의 화학 교수가 되었다. 1821년 전기가 흐르고 있는 철사를 자석의 둘레에 회전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1823년 염소의 산화, 1819-1824년 철의 합금, 1825년 벤젠을 발견하는 한편, 유리의 개량에도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패러데이의 최대의 발견은 1831년 자석에 의해 전기를 일으키는 전자 유도의 발견이었다. 이 발견으로 발전기·모터의 원리를 비로소 알게 되고 전기를 대량으로 생산하게 되었다. 1833년 전기 분해에 의해 생기는 물질의 양에 대하여 '패러데이의 법칙'을 발견하였다. 또 전자기학의 기초가 되는 전계·자계라는 것을 생각해 냈다. 빛과 자기와의 관계를 나타낸 '패러데이의 효과', 자석과 반대되는 성질을 가진 반자성도 발견하였다. 이것들은 훗날 과학의 진보에 기초가 되었다. 저서에 <전기의 실험적 연구> <화학 및 물리학의 실험적 연구> 등이 있다.
패트릭 헨리
[편집]퍼셀
[편집]Purcell, Edward Mills(1912-1997)
미국의 물리학자. 일리노이 주에서 출생하여 퍼듀 대학을 졸업하고, 독일 칼스르의 공과 대학에 1년 동안 유학하였다. 미국으로 돌아와 하버드 대학에서 공부하여 학위를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방열 연구소에서 도파관 회로·마이크로 파 전자 기술 등을 연구하였고, 전쟁이 끝나자 하버드 대학 교수가 되었다. 액체나 고체 시료로 고주파의 핵자기 공명 흡수법에 의하여 원자핵의 자기 능률을 측정하는 방법을 고안하였다. 1952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퍼스
[편집]Peirce, Charles Sanders(1839-1914)미국의 물리학자·수학자·논리학자. 1872년 지구의 밀도·모양에 관한 실험 결과를 발표하였다. 또 러더퍼드와 함께 광도에 관하여 연구하였으며, 존스 홉킨스 대학과 하버드 대학에서 논리학을 가르쳤는데, 철학계에 커다란 일파를 이룬 실용주의(프래그머티즘)라는 말을 처음으로 만들었다.
퍼킨
[편집]Perkin, Sir William Henry(1838-1907) 영국의 유기 화학자. 런던에서 출생하였다. 18세 때 집에다 실험실을 만들어 연구를 하고 호프만의 제자가 되었다. 1856년 화학 실험을 하다가 우연히 보라의 색소를 발견했는데, 이 색소가 사람의 손으로 합성해서 만든 아닐린 염료이다. 그 후에 그는 런던 교외에 공장을 세우고 인조 염료 공업의 선구자가 되었다. 계속 연구를 하여 몇 개의 합성 염료를 더 만들어 내었으며, 공장에서 은퇴해서도 화학 연구를 계속하여 향료도 만들었다.
펄 벅
[편집]페랭
[편집]Perrin, Jean Baptiste(1870-1942)프랑스의 물리학자·화학자. 릴에서 출생하여, 고등 사범 학교를 졸업하였다. 파리 대학 교수와 동교 생물 이학 연구소장을 지냈다. 그는 콜로이드 용액의 연구로, 분자가 실제로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물 분자의 측정에 성공하였다. 또한 화학 반응 속도의 복사 이론을 제안하였고, 광화학 방면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1926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으며, 제2차 세계대전 때에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저서에 <원자> <물리 화학 개론> 등이 있다.
페레올
[편집]Ferreol, Jean Joseph Jena Baptiste(1808-1853)
프랑스의 선교사. 1838년 파리의 외방 전교회의 신부가 되었으며, 이듬해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어, 1840년 마카오를 거쳐 우리 나라에 들어오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843년 조선 교구 제3대 주교가 되자, 헌종 11년(1845) 김대건 신부의 안내로 다블뤼 신부와 함께 서울에 와서 선교를 하였다. 1847년 현석문이 지은 <기해일기>를 보충하였고, 1846년 천주교 박해 사실과 우리나라 순교자의 전기를 써서 파리 외방 전교회 본부와 로마 교황청으로 보냈다.
페로
[편집]Perrault, Charles(1628-1703)
프랑스의 시인·동화 작가. 파리에서 출생하여, 23세에 변호사가 되었다. 관리가 된 후에는 설계에 흥미를 가져 베르사유 궁전의 설계에 종사하는 등 만능인으로 알려졌다. 아들의 이름을 빌려 <옛날 이야기>를 발표하였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 <장화를 신은 고양이> <푸른 수염> <신데렐라> 등이 이 책에 실려 있다. 그 밖에 <루이 14세의 세기> 등의 저서가 있다.
페론
[편집]Peron, Juan Domingo(1895-1974)아르헨티나의 정치가. 육군 대학을 졸업했으며 1943년 수상, 1944년 육군상, 1946년 대통령을 지냈다. 1955년 쿠데타로 망명하여 1960년 이후 에스파냐에서 망명 생활을 하였다. 1973년 귀국 후 부부가 정부통령으로 당선, 1974년 부인 페론 여사에게 대통령을 물려주고 사망하였다.
페르디난트 1세
[편집]Ferdinand Ⅰ(1503-1564)신성 로마의 황제(재위 1556-1564). 1526년 보헤미아·헝가리의 왕으로 뽑혔고, 오스만 터키와 여러 번 싸웠으며, 제국을 통일하기 위해 크리스트 교도를 융숭히 대접하였다. 그는 독일 합스부르크 가의 시조이며,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회의 성립에도 노력하였다.
페르마
[편집]Fermat, Pierre de(1601-1665)프랑스의 수학자. '미분·적분학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법률학을 공부하고 변호사가 되었으나 틈틈이 수학을 연구하였다. 정수론과 확률론을 연구하여 '페르마의 정리'를 발견하였다. 또 광선은 극소 시간에 도달할 수 있는 경로를 진행한다는 '페르마의 원리'를 주장하였다.
페르미
[편집]Fermi, Enrico(1901-1954)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로마에서 출생하여, 피사의 사범 학교를 졸업한 후, 괴팅겐 대학에 유학하여 연구에 열중하였다. 피렌체 대학 강사를 거쳐, 1927년 로마 대학 물리학 교수를 지냈다. 1933년 우라늄·라듐 같은 방사성 원소가 전자를 내놓으면서 다른 원소로 바뀌어 가는 '(베타) 붕괴의 이론'을 발표하였다. 또 우라늄에 중성자를 충돌시켜서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원소인 초우라늄을 발견하여, 1938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그 후 이것을 바탕으로 독일의 한슈트라스만은 우라늄의 원자에 중성자를 충돌시키면 핵 분열을 일으키면서 열과 빛을 내고 몇 개의 중성자가 튀어나옴을 발견하였다. 그는 이것을 실험하여 보고 연쇄 반응의 가능성을 증명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노벨상을 받기 위해 스웨덴으로 갔다가 그대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에서 원자폭탄 제조 연구에 지도적인 역할을 하였고, 1942년 세계 최초의 원자로를 만들었다.
페르비스트
[편집]Verbiest, Ferdinand(1623-1688) 벨기에의 제수이트 선교사. 1659년 중국에 포교 사업을 위해서 건너갔다가, 강희제의 신임을 얻어 흠천감(천문대장)이 되어 역법의 개정에 이바지하였다. 1673년 '삼번의 난'이 일어나자, 대포를 만들어 청나라를 돕기도 하였다. 저서에 <강희 영년의 연력법> <곤여전도> 등이 있다. 중국 이름은 남회인이다.
페르스
[편집]Perse, St. John(1887-1975)
프랑스의 시인·외교관. 서인도 제도에서 출생하였다. 클로델의 음률에 위고의 웅변을 더한 것 같은 우주적인 시를 썼으며, 그는 동양 여러 곳의 외교관으로 일하였다. 1960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으며, 작품으로 <원정> <유적> <편년사> 등이 있다.
페리
[편집]Perry, Mathew Calbraith(1794-1858)미국의 군인. 해군으로 각지에서 근무하다가 1833년 미국 최초의 증기 기선 '풀턴' 호를 만들었다. 1847년 미국·멕시코 전쟁에 나가 용맹을 떨치고, 1852년 동인도 함대 사령관이 되었다. 그 후 일본과의 통상 교섭 책임자로 일을 하였으며, 주요 저서로 <동양 기행>이 있다.
페리
[편집]Ferry, Jules Francois Camille(1832-1893) 프랑스의 정치가. 처음에는 변호사로 일하다가 국회의원이 되었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때는 국방 정부에 참가하였다. 그는 공화당의 중심 인물로서, 1880-1883년 수상이 되었다. 그는 계속 식민지 정책을 밀고 나갔지만 통킹에서 권력을 잃고 물러났다.
페리클레스
[편집]Perikles(기원전 495년경-기원전 429)
고대 그리스의 정치가. 아테네의 명문 집안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보수파를 물리치고 민주파를 지휘하여 아르콘(집정관)이 되어 30년간 아테네 정치를 지도하였다. 관리는 모두 급료를 받게 되고, 빈민도 많은 혜택을 입었다. 문예·미술도 발전하여 '페리클레스 시대'라고 불리는 아테네 최대의 번영 시대를 맞이했다. 소포클레스·소크라테스·히포크라테스 등을 포함하는 같은 시대의 중심 인물로서, 그의 존재는 높이 평가되고 있다. 기원전 431년 스파르타와의 전쟁인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에 두 아들과 함께 페스트에 걸려 죽었다.
페스탈로치
[편집]Pestalozzi, Johann Heinrich(1746-1827)
스위스의 교육가·교육학자. 취리히에서 출생한 그는, 어려서부터 매우 순진하면서도 앞뒤를 가리지 않는 성격을 갖고 있었다. 취리히 대학에 입학하자 이와 같은 성격은 더욱 뚜렷해져 보드머 교수의 감화로 학우들과 함께 '애국자단'을 조직하였다. 그 무렵의 작품인 단편 <희망>에서는, 열렬한 애국적인 이상주의자로서의 그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그는 당시 유행했던 중농주의에 따라 농업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자기와 뜻을 같이 하는 안나 솔테스와 1769년 결혼하였다. 부르크에 농장을 만들고, 또 빈민 학교를 세워 가난한 어린이들을 가르쳤다. 1780년 시탄스에서 고아원을 다시 열 때까지 약 20년 동안을 오직 내면적 사색에 몰두하였다. 그는 <은자의 황혼> <라인하르트와 게르트루트>에서 인간의 본분과 인간 교육의 근본 원리를 '생활권'의 사상으로서 전개하였다. 그는 여기서 인간의 교육이란 피교육자의 '개인적 경우'와 결합함으로써만이 성공할 수 있으며, 부모와 자식간의 인격적·감정적 바탕 위에서 이룩된다고 말하고 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은 전 유럽을 뒤흔들었는데, 그는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발표하여 절대주의 국가를 통렬히 비판하였다. 1800년 <메토디>, 1801년 <게르트루트는 어떻게 그 아이를 그르치나>에서 그는 인간의 도야를 지적 도야·신체적 도야 및 도덕·종교적 도야로 나누어, 그 각각의 원리와 방법을 찾아 이의 조화적 발달을 교육의 목표로 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도덕적 도야를 전체 도야의 중심과 바탕으로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교육의 출발점·초보점을 구하여 '자발성·직관·노작' 등의 원리에 도달하였다. 이들의 여러 원리는 모두 근대 교육학의 중심적인 원리가 되었다. 그는 1805년 이베르돈에 학교를 세웠는데, 약 20년간 이곳은 전 유럽 교육의 중심지가 되었다. 1825년 이 학원을 떠나 부르크의 집으로 돌아가 자서전 <백조의 노래>를 집필하였다. 그 속에는 '생활을 도야한다'라는 명제 아래 그의 종래의 교육 사상이 통일적으로 전부 서술되어 있다.
페이디아스
[편집]Pheidias(기원전 490년경-기원전 430)
그리스의 조각가. 처음에는 그림을 배웠으나 조각에도 뜻을 두었다. 기원전 449년 페리클레스가 정권을 잡자 그는 조각뿐 아니라 전체 예술 활동에 대한 지배 위임을 받았다. 그 후 15년간은 그의 전성기로서 그 동안에 아크로폴리스 언덕 위에 파르테논 신전을 재건한 것은 그의 최대의 업적이다. 특히 우수한 신상을 만들어 '신들의 상 제작자'로 칭송되었다. 대표작으로 <아테네 레무니아> <올림피아의 제우스> <아테네 파르테노스> 등이 있다.
페이터
[편집]Pater, Walter Horatio(1839-1894)영국의 문학가·평론가.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하고 평생을 동 대학 교수로 지냈다. '예술을 위한 예술'의 대변자로서 <문예부흥>을 저술하여 미적 인상의 강렬하고 풍부한 경험을 유일의 목적으로 하는 허무주의적 심미주의를 역설하였다. 근대 영국의 가장 위대한 비평가의 한 사람이다. 저서로 <쾌락주의자 마리우스> <사상적 초상>등이 있다.
페인만
[편집]Feynman, Richard Phillips(1918- ) 미국의 물리학자. 뉴욕에서 출생하여, 매사추세츠 공과 대학을 졸업하고, 1942년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동 대학 교수 겸 멕시코의 로스 알라모스 핵 연구소원이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원자탄 제조 계획에 참가하였으며, 1965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페텐코퍼
[편집]Pettenkofer, Max von(1818-1901) 독일의 위생학자·화학자. 집과 통풍, 대기와 의복 등의 관계를 밝힘으로써 현대 환경 위생학의 창시자로 불린다. 뮌헨 대학의 교수로 일한 그는 전염병의 원리를 연구한 후, 그 발생의 원인은 지하수와 관계가 있음을 주장하여 세균설에 반대하였다. 코흐가 콜레라균을 발견하였을 때는 그 균을 마셔 그의 주장을 부정하려 하였다.
페트라르카
[편집]Petrarca, Francesco(1304-1374) 이탈리아의 시인·인문학자.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피렌체 공증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볼로냐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아비뇽으로 돌아왔다. 그는 법률을 공부했으나 문학에 더 열중하였다. 사랑하는 여성 라우라를 위한 연애 서정시집 <칸초니에르>를 발표하여 후대 시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뛰어난 자연 묘사와 아름다운 운율은 당시 단테의 <신곡>과 더불어 14세기 시의 최대 걸작으로, 후에 '페트라르카풍'이라는 시의 형식을 이루었다. 1333년 프랑스·플랑드르·독일 등지를 여행하고 돌아와 고대 로마의 영웅인 스키피오(아프리카누스)를 주제로 한 <아프리카>라는 라틴어로 된 서사시를 써서, 1341년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계관 시인의 영예를 받았다. 그는 또 그리스·로마의 고전을 정리, 번역하여 인문주의 사상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그 밖의 저서로 <목가> <서한시> 등이 있다.
페티
[편집]Petty, Sir William(1623-1687)
영국의 경제학자. 처음에 의학을 공부하였으나, 뒤에 경제학에 열중하였다. 1649년 옥스퍼드 대학 교수가 되었으며, 경제학자인 동시에 여러 방면에 걸쳐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는 중농주의의 선구자로서 노동 가치설을 주장하였으며, 그가 지은 <정치산술>에서 사회 경제를 통계적으로 설명하려고 하였다. 또한 분업론에서도 스미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페팽
[편집]Pepin(714년경-768)
프랑크 왕조의 시조(재위 751-768). 카롤링거 왕조의 초대 왕. 샤를 마르텔의 아들이고 샤를마뉴 대제의 아버지이다. 처음에는 메로빙거 집안의 오스트레지아 궁정 재상이었는데 왕 힐데릭 3세를 쫓아내고 여러 제후들의 회의에서 왕으로 뽑혀 751년 카롤링거 왕조를 열었다. 그는 교황을 도와 롬바르디아를 쳐부수고 라벤나 등의 땅을 교황에게 바쳤다. 이를 '페팽의 기진'이라 부르며 1880년까지 계속된 교황령의 시작이 되었다.
펠리페 2세
[편집]Felipe Ⅱ(1527-1598)
에스파냐의 왕(재위 1556-1598).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의 아들이다. 1571년 레판토 해전에서 터키를 누르고 지중해의 재해권을 장악하였으며, 강대한 왕권으로 포르투갈을 병합하였다. 그는 구교를 지키고 신교를 압박하여 네덜란드에서 독립 운동이 일어나게 하였다. 1588년 네덜란드를 돕기 위하여 식민지를 습격한 영국을 쳐부수려고 무적 함대를 보냈으나 패하고 말았다. 그 후 프랑스의 구교도를 도왔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국내의 무어 인을 쫓아내고 국민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내게 하여 국력이 약화되었다.
펠리페 5세
[편집]Felipe Ⅴ(1683-1746)
에스파냐 왕(재위 1700-1746). 에스파냐 부르봉 왕조의 초대 왕이며, 루이 14세의 손자이다. 카를로스 2세의 유언에 따라서 왕위에 올랐다. 에스파냐 계승 전쟁이 끝난 후,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왕의 자리를 굳건히 하였다. 한때 아들 루이 1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으나, 몇 개월 후 아들이 죽자 다시 왕위에 올랐다. 그는 정치 제도를 프랑스식으로 개혁하였고, 영토를 넓히는 데 힘을 기울여 폴란드 계승 전쟁·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 참가하였다.
포
[편집]Poe, Edgar Allan(1809-1849)
미국의 소설가·시인. 보스턴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고아가 되었다. 유년 시절에 영국으로 건너가 런던 교외의 초등 학교를 다녔다. 1826년 버지니아 대학에 입학하였는데 중퇴하고, 시인이 되려고 결심하였다. 1833년 신문 현상 소설에 <병 속의 수기>가 당선되어 인정을 받고, 그 후 잡지 편집을 하기도 하고 평론도 썼다. 시인으로서는 음악적인 시를 써서 이름을 떨쳤으며 특히 단편소설이 많은데, 괴기스럽고 무서운 분위기에 찬 환상 세계를 그려, 근대 괴기 소설과 탐정 소설의 한 영역을 개척하였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별로 인정을 받지 못하였다. 후에 시인 보들레르가 포의 시를 프랑스에 소개하여 프랑스 문학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작품에 단편 <아서 가의 몰락> <검은 고양이> <모르그 가의 살인사건> <황금벌레>와 시 <까마귀> <방울> <애나벨리> <종> 등이 있고, 평론으로 <시의 원리>가 있다.
포드
[편집]Ford, Henry(1863-1947) 미국의 자동차 제조업자. 미시간 주 그린필드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어릴 때부터 기계에 흥미를 갖고 있었다. 1877년 디트로이트로 나가 기계 공장의 견습공으로 들어갔으며, 그 후 스스로 노력하여 기술을 익혔다. 1890년 에디슨 전기 회사의 전기 기사가 되었다. 그는 기계에 관한 연구를 계속하여 1892년 최초의 자동차를 완성하였다. 그는 자동차의 공업화를 목표로 1903년 포드 자동차 회사를 건립하고, 독자적인 생산 방식을 연구하여 실시한 끝에 세계 최대의 자동차 기업을 만들었다. 1918년 아들 에드셀에게 물려주었으나, 1943년 아들이 죽자 다시 사장이 되었다. 저서에 <나의 생애와 사업> <오늘과 내일> <전진> 등이 있다.
포드
[편집]Ford, Gerald Rudolph(1913- ) 미국의 제38대 대통령. 네브래스카 주 오마하 시에서 출생하였다. 1935년 미시간 대학과 1941년 예일 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1965년 미시간 주 하원 의원이 되어 정계에 나섰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해군 장교로 복무하고, 해군 중령으로 제대하였다. 1963년 공화당 협의회 의장이 되고, 1966년 원내 총무의 자리에 올랐다. 1973년 애그뉴의 사임으로 부통령으로 지목되었다. 재직중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1974년 8월 닉슨 대통령이 사임하자,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1974년 11월에 우리 나라를 방문하였다.
포레
[편집]Faure, Gabriel Urbain (1845-1924)프랑스의 작곡가. 파리의 니데르마이어 음악학교에서 공부하고, 생상스에게서 가르침을 받았으며, 교회의 오르간 연주도 하였다. 파리 음악원의 원장을 역임하였고, 제자로는 라벨 등 뛰어난 음악가가 많이 있다. 그의 곡은 기품 있고 자유스러우며 마음 속의 깊은 감동을 나타내면서 프랑스 인다운 깨끗한 감각을 갖는다. 드뷔시보다 앞서서 현대 프랑스 음악의 기초를 닦았다고 할 수 있다. 실내악이나 가곡에 뛰어난 작품이 많다. 작품에 현악 4중주곡·피아노 4중주곡·바이올린 소나타가 있으며, 그 중 종교 음악의 걸작인 <진혼곡>, 가곡 <꿈을 깨고서> <달빛> 등이 유명하다.
포렐
[편집]Forel, Francois Alphonse(1841-1912) 스위스의 호소학자·박물학자. 호소(호수와 늪)학의 창시자로, 1869년 로잔 대학 교수가 되었다. 레만 호수를 중심으로 호소학에 관한 생태학적 분류·수색 표준액·물의 온도·수위를 분류하여 이름을 짓는 등 호소학에 공헌하였다. 30년간의 연구 결과인 <레만 호의 육수학적 연구>와 <해양학 제요>는 호소학의 고전이자 교과서이다. 또 호소 생물학을 시작하여 호저 생물대의 분류·명명 등에 관하여 공적을 세우고, 지진 강도의 계급·구분 등에 관한 업적도 남겼다.
포송령
[편집]蒲松齡(1640-1715)
중국 청나라 초기의 소설가. 산둥 성에서 출생하였다. 호는 유천으로 명나라와 청나라가 바뀌는 혼란한 때에 태어나 나이가 들어서까지 서당의 선생으로 지내다가, 괴담 소설 <요재지이>를 지어 유명해졌다. 이 소설은 옛부터 전해오는 이야기에 환상적인 내용을 섞어 괴상하고 기이하게 엮어져 있다.
포스터
[편집]Foster, Stephen Collins(1826-1864) 미국의 가곡 작곡가.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그 시 교외의 로렌스빌에서 지방 기업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사업 관계로 여러 학교를 옮겨 다녔다. 15세 때 학교를 중단하고 음악에 열중하였는데, 독일 음악 교사로부터 피아노와 화성에 관한 기초를 배우고, 소가곡을 작곡하기 시작하였다. 20세부터 신시내티 시에서 형 다닝이 경영하는 회사의 경리로 있었다. 이때 그의 여러 작품들이 출판되었다. 특히 <오! 수잔나>는 1849년의 황금 발견 시대에 태평양 연안으로 몰려드는 젊은이들 사이에 크게 유행하였다. 여기서 힘을 얻은 그는, 23세 때 형의 회사를 그만두고 알레게니로 와서 가곡 작곡 활동에 몰두하였다. 그의 가곡에서는 미국 남부의 농장에서 일하는 흑인의 사투리를 사용하여 그들의 생활 감정을 노래한 농장의 노래를 많이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당시 각지에서 흥행하고 있던 흑인 연예단을 위해 썼기 때문이다. 그가 남부에 여행한 것은 1852년 단 한 번뿐이었다. 그때 머물렀던 켄터키 주 버즈타운에 있는 친척 라우완 판사의 저택은, 켄터키 옛집과 인연이 있는 집이라 하여 주 기념관으로 되어 있다. 그가 작사 작곡한 <시골 경마> <스와니 강> <켄터키 옛집> <올드 블랙 조> 등의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민요적 소가곡은, 미국은 물론 세계적으로 널리 애창되고 있다. 그가 작곡한 가곡의 수는 모두 1,888편이며, 그에 관한 문헌과 기록은 피츠버그 대학의 포스터 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다.
포이어바흐
[편집]Feuerbach, Ludwing Andreas(1804-1872)
독일의 철학자. 란트슈트에서 출생하여 하이델베르크 대학을 졸업하고, 베를린 대학에서 헤겔에게 철학을 배우고 에를랑겐 대학 강사로 있었으나, 크리스트교를 비판하는 저서로 인하여 파면되었다. 마르크스·엥겔스에게 큰 영향을 준 유물론적 철학자로서, 헤겔 좌파의 급진적인 사상가였다. 그러나 그는 후에 유물론과 무신론을 주장하여 마르크스를 비롯한 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저서로 <크리스트교의 본질> <미래의 철학 원리> <종교의 본질> <헤겔 철학 비판> 등이 있다.
포크너
[편집]Faulkner, William Cuthbert(1897-1962)
미국의 소설가. 미시시피 주의 뉴올바니에서 출생하여, 미시시피 대학을 졸업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때 공군으로 참전하여 심한 부상을 입었으며, 그가 탄 비행기가 두 번이나 격추당하기도 하였다. 그의 단편 소설은 소재·인물·구상과 전개가 동일한 것이 특징이며, 그의 작품들은 형식에서 벗어난 길고 어려운 문장으로 되어 있어, 그와 대조적인 헤밍웨이와 함께 세계의 주목을 끌었다. 그의 작품의 무대는 주로 남부 지방이었고, 문명의 그늘에 있는 혼란·살인 등 사회의 어두운 면을 그렸다. 주요 작품에 <군인의 봉급> <이야기들> <음향과 분노> <무덤의 침입자> 등이 있다. 1949년 노벨 문학상, 1955년 퓰리처 상을 받았다.
포킨
[편집]Fokine, Michel(1880-1942)
미국의 무용가·안무가. 러시아의 페테르스부르크에서 출생하여, 러시아 황실 무용 학교를 졸업한 후, 1898년 마린스키 극장에서 솔리스트로 활약하였다. 1902년 황실 무용 학교 교사로 제자들을 가르쳤다. 1905년 파블로바를 위하여 <백조의 죽음>을 안무하여 유명해졌다. 1909년 디아길레프의 러시아 발레단이 만들어졌을 때 안무가로 참가하였다. 1923년부터 뉴욕에서 살았으며, 1932년 미국에 귀화하였다. 그는 발레를 종합예술로 발전시키는 데 공헌하여 '근대 발레의 아버지'라 불리고 있다. 그가 안무한 작품은 <장미의 요정> <셰헤라자데> <페트루시카> 등이 있다.
폰타나
[편집]Fontana, Lucio(1899-1968)
이탈리아의 화가·조각가. 아르헨티나에서 출생하여 밀라노에서 조각을 배웠다. 1939년부터 아르헨티나에서 전위 예술 운동을 조직하고 '하얀 선언'을 발표하였다. 이듬해부터 밀라노에서 공간주의를 주장하였으며 그의 작품 가운데에는 칼로 캔버스를 찢은 것이 많다.
폴로
[편집]폴록
[편집]Pollock, Jackson(1912-1956)
미국의 추상화가. 와이오밍 주에서 태어나 로스앤젤레스와 뉴욕에서 공부하였다. 1930년대부터 표현주의에서 추상화로 방향을 바꾸었다. 1947년 마루바닥에 편 화포 위에 공업용 페인트를 떨어뜨리는 기법을 개발하여 하루 아침에 이름을 떨쳤다. 이것은 작가의 제작 행위를 직접 화포에 기록하는 것이라 하여 '액션 페인팅'이라 불렀다. 대표작으로 <가을의 리듬> 등이 있다.
폴리그노토스
[편집]Polygnotos(기원전 475년경-기원전 447년경)
그리스의 화가. 타소스 성에서 태어나 아테네의 테세우스 신전 등의 벽화를 그려, 화가로서의 이름을 떨쳐 시민권을 얻었다. 그는 미콘과 함께 그리스 회화의 가장 위대한 화가로 불리고 있으며, 입을 연 사람의 얼굴을 처음으로 그린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아테네의 <트로이 함락>의 대벽화는 유명하며, 조각·건축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폴리클레이토스
[편집]Polycleitos(기원전 5세기경) 그리스의 조각가. 페디아스와 함께 전기 고전주의파의 조각가로, 사람 몸의 구성을 머리와 팔의 길이를 기준으로 나누어서, 이상적인 아름다움의 표준을 처음으로 만든 조각가로 알려져 있으며, 저서 <카논(규범)>은 그것에 관한 연구를 설명한 책이다. 그 이론을 실제에 옮긴 작품 <창을 잡은 남자의 상>은 육체의 아름다움을 완전히 나타낸 걸작으로 꼽힌다. 그는 특히 청동 조각에 뛰어났다.
폼페이우스
[편집]Pompeius Magnus, Gnaeus(기원전 106-기원전 48)
로마의 정치가·장군. 술라를 지지한 그는 마리우스의 잔당과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을 진압하고, 기원전 67년 지중해의 해적을 소탕하였다. 기원전 66년부터 5년에 걸쳐 동방 원정에서 공을 세웠으나 원로원이 그의 공을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기원전 60년 카이사르·크라수스와 함께 제1회 삼두 정치를 시작하였다. 기원전 48년 카이사르와 반목하여 파르살루에서 카이사르에게 패하고 이집트로 도망하였으나 암살당하였다.
퐁피두
[편집]Pompidou, Georges(1911-1974)프랑스의 정치가. 고등 사범 학교를 졸업, 1944년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드골 임시 정부에 참가하였다. 한때 사업계에 들어가 은행 총지배인을 지낸 일도 있었으나, 1958년 드골 내각의 관방 장관이 되었다. 1961년 석유 문제로 알제리 정부와 회담하고 평화를 이루어, 이듬해 수상에 당선되었다. 1969년 드골이 죽자 그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되었다가 1974년 병사하였다.
표트르 1세(대제)
[편집]Pyotr Ⅰ(1672-1725)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제4대 황제(재위 1682-1725). 1697년 서유럽으로 가는 사절단 속에 황제의 신분을 숨기고 참가하여 몸소 서유럽의 문화를 살폈다. 귀국 후에는 강력한 권력으로 정치 조직을 개혁하고, 서유럽식 제도·풍속을 받아들였으며, 해군을 만들고 학교를 세우기도 하였다. 1700년 바다로 나가는 길을 찾아, 스웨덴과 북방 전쟁을 시작하여 발트해 연안의 스웨덴령을 획득하였다. 또한 페테르스부르크라는 도시를 세워 수도로 삼았다. 이리하여 러시아는 근대적인 국가로서 알려지게 되었으나,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은 무거운 세금을 내고, 전쟁과 여러 가지 부역에 시달리며 괴로운 생활을 하였다.
푸거
[편집]Fugger, Jacob(1459-1525)
독일의 은행가. 조상으로부터 많은 재산을 물려받아 은행·광산 등에 손을 대어 막대한 부자가 되었다. 마침내 그의 집안은 전 유럽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으며, 여러 나라에도 자금을 대주었다. 그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막시밀리안 1세가 황제가 되는 것을 여러 면에서 도와 많은 땅을 얻어서 영주가 되었다.
푸리에
[편집]Fourier, Jean Baptiste Joseph(1768-1830)
프랑스의 수학자·물리학자. 오세르에서 태어나, 파리의 이공과 대학 교수가 되었다. 그는 열이 전해져 가는 이론을 연구하여 유명한 '푸리에 급수'를 발표하여 근대 수학·물리학에 큰 변혁을 일으켰다. 한편, 정치에도 개입하여 비난을 받았다. 저서로 <고체 중의 열 전도 이론> <열 분석론> 등이 있다.
푸생
[편집]푸셰
[편집]Poussin, Nicolas(1594-1665) 프랑스의 화가. 노르망디의 레장들리 출생. 라파엘로의 작품에 감화되어, 1624년에 로마로 가서 당시의 유행 작풍이었던 카라치파의 작품을 배우고 고전적 교양을 쌓았다. 1628년 성 베드로 대성당의 제단화를 그릴 무렵부터 유명해져 1639년에 고국 프랑스의 루이 13세로부터 수석 화가로서 초빙되었다. 그는 17세기 프랑스 최대의 화가이며, 프랑스 근대 회화의 시조로 불린다. 주요 작품으로는 <예루살렘의 파괴> <바쿠스 제> <아르카디아의 목자> 등이 있다.
푸슈킨
[편집]Pushkin, Aleksander Sergeevich(1799-1837)
러시아의 시인·작가. 러시아 근대 문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그는 모스크바 귀족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학생 시절에 이미 훌륭한 시를 지었으며, 1820년 최초의 장시 <루슬란과 루드밀라>를 발표하여 유명해졌다. 같은 해에 <자유에의 길>이 발표되자, 혁명을 찬양하고 정부를 조롱하는 시라는 비판을 받아 남러시아로 추방되었다. 그 후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와 비슷한 희곡 <보리스 고두노프>를 발표하고, 뒤이어 소설 <오네긴> <대위의 딸>을 발표하였다. 그는 농노제에 시달리고 있는 러시아의 현실을 정확하게 그려내어 사실주의자로 불리며, 러시아 문학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올려놓았고, 러시아의 문어를 확립하였다.
푸아송
[편집]Poisson, Simeon Denis(1781-1840)프랑스의 수학자·물리학자. 에콜 공과 대학을 졸업하고 후에 그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그는 유체와 탄성 역학에 대한 푸아송의 방정식·푸아송의 법칙·탄성 물질에 관한 푸아송의 비율 등으로 크게 이바지하였다. 또한 순수 수학의 분야에서도 정적분·푸리에 급수·변분법·확률론 등에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저서에 <역학> 등이 있다.
푸앵카레
[편집]Poincare, Jules Henri(1854-1912) 프랑스의 수학자·천문학자·물리학자. 파리 대학 수리 천문학 교수를 거쳐 1907년 프랑스 학사원 회원이 되었다. 수학에서는 정수론·함수론·미분 방정식·확률론·위상 기하학과 천문학으로는 천체 역학, 물리학으로는 전기 역학·광학·전자론 등에 걸친 뛰어난 연구를 하였다. 특히 1889년 천문학 3체 문제에 관한 논문으로 스웨덴 국왕으로부터 오스카상을 받았다. 그는 또한 과학 사상가로서, 그 당시의 과학 실용주의를 비판하고, '과학을 위한 과학'을 주장하였다. 저서로 <과학과 방법> <과학과 가설> <천체 역학> 등이 있다.
푸치니
[편집]Puccini, Giacono(1858-1924)
이탈리아의 가극 작곡가. 모차르트·슈트라우스·베르디·바그너와 함께 오늘날 연주되고 있는 가극의 근본을 이룬 음악가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루카의 직업적인 음악 가정에서 출생하였다. 처음에는 별로 마음에 내키지 않는 음악 공부를 하고 오르간 연주를 하였으나, 차차 작품을 발표하면서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는 베르디의 <아이다>를 듣고 나서 작곡가가 될 것을 결심하고, 밀라노 음악 학교에 들어가 폰키엘리의 가르침을 받았다. 재학 중 그의 첫 가극 <빌리>를 상연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그 후 1893년 <마농 레스코>를 발표하여 베르디의 후계자로 불릴 정도로 명성을 얻기 시작하였다. 그의 가극은 완벽한 극적 효과와 정감이 풍부한 멜로디 및 뛰어난 조화로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그의 가극은 이탈리아의 작곡가 프랑코 알파노에 의하여 완성되었다. 주요 작품에 <라보엠> <토스카> <나비 부인> <투란도트> 등이 있다.
푸케
[편집]Fouquet, Nicolas(1615-1680)
프랑스 정치가. 루이 14세 시대에 마자랭의 신임을 받아 1653년 재무상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미술가와 문학가를 보호하고 호화로운 '보의 성관'을 세웠으나, 자기의 욕심만을 채운다는 죄로 콜베르에게 고발되어 무기 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는 소설 <철가면>의 주인공 모델이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푸코
[편집]Foucault, Jean Bernard Leon(1819-1868)
프랑스의 물리학자. 파리에서 출생하여, 처음에는 의학을 공부했으나, 후에 물리학으로 바꿨다. 1851년 스스로 발명한 '푸코 진자'로 지구가 자전하고 있음을 직접 밝혔다. 또, 물 속에서의 빛의 속도가 공기 속에서의 속도보다 느림을 측정하여 빛의 파동설을 증명하였다. 1852년 자이로스코프를 발명하고, 1855년 '푸코 전류'라는 맴돌며 흐르는 전류를 발견하였다. 1862년 회전 거울로써 빛의 속도를 1초에 29만 8,000km라고 정하였다. 1865년 반사 망원경의 반사 거울면을 회전 타원면이나 포물면으로 만드는 방법을 고안하는 등 여러 가지 업적을 남겼다.
풀턴
[편집]Fulton, Robert(1765-1815)
미국의 기술자·발명가. 펜실베이니아 주 랭커스터에서 태어났다. 그는 그림에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어, 처음에는 화가로서 미국과 영국에서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그는 프랭클린의 초상화를 그린 것이 인연이 되어, 그의 소개로 영국에 건너가게 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미술 공부와 함께 작품 활동을 하는 한편, 방적기와 증기 기관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여 우선 기계 기술자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대리석을 자르는 톱과 운하를 파는 기계·아마 직기·잠수함 등을 발명하였으나 큰 반응은 없었다. 1797년 이래 파리에서 잠수함의 수리를 하는 한편, 증기선 제작에도 손을 대었다. 마침내 그의 연구와 노력은 결실을 맺어, 1803년 파리 센강에서 시험한 결과 성공을 거두었다. 1806년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그 배의 개량을 거듭한 끝에 커다란 물레방아 수레를 두 개 단 182톤짜리 증기선 '클레르몬트 호'를 만들었다. 이듬해 손님 40명을 태우고 뉴욕에서 허드슨강을 거슬러 올라가, 242km 상류에 있는 올바니까지 32분 만에 도착하였다. 철도는 물론 도로도 발달하지 못했던 당시의 미개한 신대륙 미국에 있어서의 그의 증기선은 획기적인 발명품이었다.
퓰리처
[편집]Pulitzer, Joseph(1847-1911)
미국의 언론인·신문 경영자. 헝가리에서 태어나, 1864년 미국으로 이주하여 남북 전쟁 때 북군의 기병대에 참가하였으며, 1867년 미국에 귀화하였다. 1868-1873년 세인트루이스에서 <웨스틀리체 포스트>지의 기자가 되었으며, 이때 정계에도 진출하여 1869년 미주리 주 의원이 되었다. 1878년 <세인트루이스 디스패치>지를 사들여 <이브닝 포스트>지와 합병, <포스트 디스패치>로서 창간하였다. 그는 이어 1883년 경영이 부진한 <뉴욕 월드>지를 사들여 뉴욕으로 진출하였다. 다시 1887년부터는 석간 신문 <이브닝 월드>를 발행하였다. 그 사이 1884년 건강을 해쳐 시력 감퇴와 신경쇠약으로 시력을 거의 잃었다. 1903년 콜럼비아대학에 신문학과를 개설할 때는 200만 달러의 자금을 기부하였다. 그가 죽은 뒤 그의 유언에 따라 1917년 퓰리처상이 제정되었다.
프라 안젤리코
[편집]프라운호퍼
[편집]Fraunhofer, Joseph von(1787-1826)
독일의 물리학자. 광학 기계를 제작한 외에 광학과 수학을 홀로 공부하여 태양과 별의 스펙트럼을 연구하였다. 여러 가지 유리의 굴절률을 연구하던 중 나트륨 스펙트럼 D를 발견하였다. 1814년 태양의 스펙트럼에서 324개의 검은 선을 발견하였다. 이 선을 '프라운호퍼 선'이라 한다. 또, 처음으로 회절 현상을 연구하여 빛의 파장을 계산해 냈다.
프란체스카
[편집]Francesca, Piero della(1416-1492)
이탈리아의 화가. 투시도법을 이론적으로 연구하여 이것을 작품에다 응용하였다. 그의 작품은 너무 이론적인 것 같아 보이나 풍부한 감정이 넘쳐 흘러 벽화나 초상화에 우수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처음 피렌체로 나아가 도미니크 베네치아의 조수로 일하기도 하였는데, 1445년경에 그린 <자바의 마돈나>는 오늘날 남아 있는 그의 작품 중 가장 오래 된 제단화라고 전해진다. 성 프란체스코 사원의 벽화 <성 십자가 이야기>는 최대의 걸작으로서, 세련된 색채와 완전한 구도가 잘 나타나 있다. 또한 초상화로 <우즈비노 공의 초상> 등이 있는데, 주로 옆얼굴을 많이 그렸다. 그 밖의 작품으로 <시바 여왕의 예배>가 있다.
프란체스코
[편집]Francesco(1182년경-1226)이탈리아의 종교가.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창립자로, 중부 이탈리아 아시시에서 출생하였다. 처음에는 방탕한 생활을 하였으나, 24세 때 모든 재산과 가족을 버리고 청빈한 종교 생활로 들어가, 수도와 전도에 힘을 기울였다. 처음에는 동지와 함께 포르티운쿨라의 낡은 집을 본거지로 하여 수도와 전도를 하였다. 클라라와 협력하여 수도회를 위한 제2수도회(클라라 회)를 창설하고, 1223년 교황의 인가를 얻어 제3수도회(프란체스코 회)를 설립하였다. 저서에 <유언>이 있다.
프란츠 1세
[편집]Franz Ⅰ, Stephen(1708-1765)신성 로마의 황제(재위 1745-1765). 1736년 오스트리아 황녀 마리아 테레지아와 결혼하여, 1745-1765년 아내와 함께 오스트리아를 다스렸으나, 정치적인 수단이 없었다. 1745년 카를 1세의 후계자로 신성 로마 황제가 되었다.
프란치아
[편집]Francia(1450년경-1517)
이탈리아의 화가. 처음에는 동판화 등의 작품을 만들었지만, 뒤에 그림으로 바꾸고 로렌체코스타에게 배웠다고 한다. 작품으로 <여섯 사람의 성인을 데리고 있는 성 모자> <성탄> 등이 있다.
프랑수아 1세
[편집]Francois Ⅰ(1494-1547)프랑스의 왕(재위 1515-1547). 왕이 된 후 이탈리아 전쟁을 계속하였다. 1521년 파비아의 전쟁에서 지고 에스파냐의 포로가 되었으나, 1526년 마드리드 조약을 맺은 후 풀려나왔다. 카를 5세와 신성 로마 황제 자리를 다투었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는 프랑스 문예 부흥을 일으켜, '문예 부흥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프랑스
[편집]France, Anatole(1844-1924)
프랑스의 소설가·비평가. 그리스·라틴·프랑스의 고전을 읽고 철저한 고전주의자가 되었다. 중학교 졸업 후 <황금 시집>을 발표하였다. 그 후에는 소설과 비평을 썼으며, 아카데미 문학상을 받았다. 단편 소설 <타이스> <붉은 백합> 등으로 명성을 떨쳤다. 5년 동안 정기적으로 문예 시평을 썼으며, 극평에도 뛰어났다. 1896년 아카데미 프랑세스 회원에 선출되었고, 1910년에는 철학적인 풍자 소설을 썼으며, 제1차 세계대전 후에는 평화주의를 강조하였다. 1921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프랑코
[편집]Franco, Francisco(1892-1975)에스파냐의 군인·정치가. 에스파냐의 총통 겸 수상을 지냈다. 갈리시아 지방에서 출생하여, 육군 사관 학교에서 군사 교육을 받았다. 32세의 젊은 나이에 장군이 되어 차차 세력을 강화하였다. 1931년의 공화 혁명 때 공화 정부 쪽에 가담하였으나, 얼마 후 거기서 터전을 닦아 1936년 총선거에 인민 전선파가 승리하자 중앙의 정치에서 떨어져 나가게 되었다. 그러나 독일과 이탈리아의 후원을 받아 모로코에서 인민 전선파에 반대하는 내란을 일으켰다. 이것은 마침내 본국에 번져 에스파냐 내란이 되었으며, 독일·이탈리아의 도움으로 1939년 수도 마드리드가 함락되었다. 그 해 8월 스스로 에스파냐 파시스트 당의 당수가 되어 독재 정치를 확립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중립을 선언하였으나, 독일측을 원조하였는데, 전세가 변함에 따라 애매한 입장을 취하였다. 전쟁이 끝나자, 에스파냐는 유일한 파시스트 독재국이 되어 당의 지배권은 차츰 약해졌다. 1947년 실시된 국민 투표에서 프랑코 종신 총통제가 결정되어 죽을 때까지 계속 정권을 잡았다.
프랑크
[편집]Franck, Ceser Auguste(1822-1890)프랑스의 작곡가. 벨기에의 리에지에서 출생하여 파리 음악원을 졸업하고, 교회에서 오르간 연주도 하였으며, 모교에서 교수도 지냈다. 그의 음악은 종교적인 깊은 감명을 주며, 바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주요 작품에 <교향곡 D단조> <바이올린 소나타 C장조>, 전주곡 <코랄> <푸가>, 피아노를 위한 <교향 변주곡> 등이 있다. 음악 교육가로서도 활약하여, 댕디·쇼송·뒤파르크 등의 뛰어난 작곡가를 길러내, 근대 프랑스 음악에 공헌하였다.
프랑크
[편집]Franck, James(1882-1964) 미국의 실험 물리학자. 독일 함부르크에서 출생하여 제1차 세계대전 후 빌헬름 대학 물리학 부장을 거쳐서 괴팅겐 대학 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히틀러 정부에 반대하여 미국으로 건너가 존스 홉킨스 대학 교수로 있었다. 그는 헤르츠와 함께 처음으로 전자 충돌을 실험하였고, 이어서 '프랑크·헤르츠의 실험'을 하였다. 1925년 헤르츠와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프랭클린
[편집]Franklin, Benjamin(1706-1790)미국의 정치가·과학자. 미국이 영국 식민지 아래 있을 때 보스턴에서 출생하였다. 어릴 때부터 책 읽기를 좋아한 프랭클린은 12세 때 형이 경영하는 인쇄소에서 일하였다. 42세에 사업을 그만두고, 주로 정치가·외교가로 활약하였으며, 특히 미국의 독립을 위하여 열심히 노력하였다. 1776년 '독립 선언'의 초안을 작성하는 위원이 되었으며, 그 해 프랑스 대사에 임명되어 미국·프랑스 동맹을 맺고 파리 조약을 체결하였다. 과학자로서도 훌륭한 업적을 남긴 그는, 번개가 전기와 똑같은 것임을 알아내기 위해, 1752년 연을 날려 구름에서 전기를 땅으로 끌어내리는 실험을 하고 피뢰침을 발명하였다. 독립한 합중국의 헌법을 제정하는 헌법 제정 위원회에서도 활약하였다. 사후에 출판된 <자서전>은 미국 산문문학 중 일품으로 꼽힌다. 그의 묘비에는 \"그는 하늘에서 번개를, 폭군에게서 매를 빼앗았다\"라고 새겨져 있다.
프레글
[편집]Pregl, Fritz(1869-1930)
오스트리아의 화학자. 그라츠 대학에서 공부하고, 동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유기 화합물의 적은 양의 원소를 분석하였기 때문에 극히 적은 양을 잴 수 있는 천칭을 연구하였다. 원소 분석법의 새 계통을 완성하여 화학·생리학·의학·공업 등 여러 방면의 연구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1923년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프레보
[편집]Prevost d'Exiles, Antoine Francois(1697-1763)
프랑스의 소설가. 보통은 아베 프레보라 부른다.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제수이트 파의 교육을 받았다. 큰 뜻을 품고 군에 입대하여 영국으로 건너갔으나, 사랑과 연애로 시간을 보냈다. 나이가 들자 귀국하여 1731년 <한 귀부인의 수기> 20권을 썼다. 그 중 특히 유명한 <마농 레스코>는 제7권에 나온다. 그 밖에 <클레블랑>이라는 소설을 썼으며, 한때는 영국을 소개하기 위한 잡지를 발간하였다.
프로스트
[편집]Frost, Robert Lee(1874-1963)미국의 시인. 뉴햄프셔의 농장에서 오랫동안 생활한 그는, 그 지방의 아름다운 자연을 맑고 쉬운 언어로 표현하였다. 그는 자연 속에서 인생의 깊고 상징적인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한 시인이었으며, 20세기 미국 최대의 국민적 시인으로, 전후 3회에 걸쳐 퓰리처상을 받았다. 작품으로 <소년의 의지> <보스턴의 북쪽> <시집> 등이 있다.
프로이트
[편집]Freud, Sigmund(1856-1939)오스트리아의 심리학자. 지금은 체코의 영토인 모라비아의 프라이베르크에서 유대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괴테에게서 깊은 감명을 받아 의학도가 되기로 결심하고서 비엔나 대학을 나온 후, 심리학에 몰두하기 전에 신경계 질병에 대한 여러 가지 치료법을 저술하였다. 1902년부터 비엔나 대학의 신경 병리학 교수로 있다가, 1938년 나치스의 박해로 인해 런던으로 망명하였다. 그는 정신 분석법을 개발하였으며,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잠재 의식의 세계를 정확하게 그려 냄으로써, 위대한 정신 묘사가로서 인정을 받게 되었다. 또 잠재 의식적인 마음에 쌓인 기억들이 인간의 정신 생활에 많은 영향을 준다고 주장하고, 그러한 기억에서 생기는 정신적인 병은 무의식의 세계를 더듬어 밝힘으로써, 정신 분석학적으로 치료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러한 생각을 더욱 발전시켜 남자와 여자 사이의 사랑과 같은 것이 항상 인간의 마음에 활동하고 있어서, 그것이 아름답게 나타나면 종교나 예술이 된다고 하였다. 저서로 <꿈의 해석> <히스테리 연구> <토템과 터부> <정신 분석학 입문> 등이 있다.
프로타고라스
[편집]Protagoras(B. C. 5세기경)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스스로를 최초로 소피스트(궤변론자)라고 부르기 시작한 사람이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고 한 그의 유명한 말은, '각 개인의 주관적인 판단이 곧 진리'라는 뜻이다. 철저한 회의론자로서 지식의 상대성을 주장하였다.
프롬
[편집]Fromm, Erich(1900-1980)
미국의 정신 분석학자·사회학자·사상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유대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프랑크푸르트 사회 조사 연구소의 강사로 있었으나, 나치스의 출현으로 1934년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1952년 멕시코 국립대학 교수로 취임하였다. 그는 현대인들의 신경 증상이나 정신적 불안은 개인적 정신 분석 요법으로는 해결될 수 없고, 사회 구조의 개혁이 뒤따라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저서로 <자유로부터의 도피> <건전한 사회> <인간의 승리를 찾아서> <사랑의 기술> 등이 있다.
프뢰벨
[편집]Frobel Friedrich(1782-1852)
독일의 교육가. 19세기에 유치원을 처음 만들었다. 목사이던 엄격한 아버지와 계모 슬하에서 쓸쓸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23세 때 건축 기사가 되기 위해 프랑크푸르트에 갔으나, 초등 학교 교사가 되어 교육자로서의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그 후 페스탈로치의 새 교육법을 알고, 후에 그의 조수가 되어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1817년 처음으로 페스탈로치의 사상을 받아들인 조그마한 학교를 세워 아이들을 가르쳤다. 1835년 스위스 정부의 초청으로 4-6세까지의 아이들을 교육하면서 유치원을 만들 생각을 하였다. 1838년 귀국하자 곧 브란켄부르크에 교육소를 만들고 '유치원'이라 이름지었다. 그러나 프로이센 정부는 그의 교육 사업을 인정하지 않고 유치원 세우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의 교육 사상은 유아가 가지고 있는 신과 같은 창조력을 개발하여 길러주는 것으로, 장난감을 고안하기도 하고, 모성 교육의 중요함도 강조하였다. 그는 평생을 어린이 교육에 힘을 쏟았다. 저서에 <인간 교육>이 있으며, 현대 심리학·교육학의 선구자로 불린다.
프루스트
[편집]Proust, Marcel(1871-1922)프랑스의 소설가. 부유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파리 대학에 다니면서 베르그송의 강의를 듣기도 하였으며 블룸과 함께 동인지 <향연>을 간행하였다. 일찍부터 사교계에 드나들었으나, 지병인 천식이 심해지면서 요양소에 들어가 소설 쓰기에 몰두하였다. 그는 코르크로 둘러싸인 병실 안에서 죽음과 싸우면서 장편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완성하였다. 이 소설은 프랑스 심리 소설 중에서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며 20세기의 소설에 큰 영향을 주었다. 작품에 소설 <장상토이유> <스왕가 쪽으로>, 평론집 <상토부브에 반대하여> 등이 있다.
프뤼동
[편집]Prud'hon, Pierre-Paul(1758-1823)프랑스의 화가. 19세기 고전주의 화가의 한 사람이다. 파리에서 공부하고, 이탈리아에 유학하여 라파엘로·레오나르도 다 빈치 등의 영향을 받았다. 역사화와 초상화를 잘 그렸고, 아름답고 우아한 것이 그의 그림의 특징이다. 대표적인 작품에 <푸시케의 약탈> <조제핀의 초상> 등이 있다.
프리드리히 1세
[편집]Friedrich Ⅰ(1123년경-1190)신성 로마의 황제(재위 1152-1190). 붉은 수염 왕이라고도 하며 슈타우펜 왕조의 가장 번영하였던 한 시대를 만들었다. 1152년 독일 황제에 추대되자, 로마 제국을 다시 일으킬 생각으로 5번이나 이탈리아에 원정하였다. 제3회 십자군 원정 때 소아시아의 사레프강을 건너다 물에 빠져 죽었다. 그는 기사적인 예의범절을 잘 갖추었기 때문에 기사의 전형이라 불리었다.
프리드리히 2세
[편집]Friedrich Ⅱ(1712-1786)프로이센의 왕(재위 1740-1786). 프리드리히 1세의 아들로 청년기에는 정치나 전쟁보다는 독서나 음악을 즐겼고, 교양 있는 사람들과 사귀었다. 1738년 <유럽의 정치적 현상에 대한 고찰>을 출간하였다. 1740년 즉위하여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 이기고, 1756년부터는 오스트리아·러시아·프랑스 3국과 7년 전쟁을 시작하였다. 이 두 차례의 전쟁으로 슐레지엔 지방을 오스트리아로부터 빼앗았다. 1772년 폴란드 분할에 의해서 프로이센을 손에 넣었다. 이리하여 프로이센은 유럽에서 손꼽히는 강국이 되었다. 그는 국내를 순찰하면서 지방 관리와 유대 관계를 돈독히 하고 훈련으로 군의 통일을 꾀하였으며, 농민에 대한 재정적인 보호정책을 실시하였다. 또한, 학문과 예술을 보호하고, 교육과 산업을 일으켜 프로이센을 문명국의 대열에 끼게 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편집]Friedrich Wilhelm Ⅰ(1688-1740)
프로이센의 왕(재위 1713-1740). 프로이센의 절대주의를 확립시킨 왕으로서, 군국주의를 나라의 정책으로 삼아 용병제, 그 밖에 일종의 징병 제도를 실시하여, 농민·기술자 등을 군대로 끌어들이고 귀족들을 장교로 임명하였다. 그는 중상주의 정책으로 상업과 공업을 육성하였으나, 학문과 예술에는 힘을 기울이지 않았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편집]Friedrich Wilhelm Ⅲ(1770-1840)
프로이센의 왕(재위 1797-1840). 나폴레옹 1세에게 크게 패하여, 틸지트 조약을 맺어 국토의 대부분을 빼앗겼다. 후에 슈타인을 등용하여 나라의 정치를 개혁하게 하였으며, 라이프치히의 싸움에서 연합군과 함께 나폴레옹을 이겼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편집]Friedrich Wilhelm Ⅳ(1795-1861)
프로이센의 왕(재위 1840-1861). 학문과 예술을 사랑하였고 열렬한 신앙을 가졌으나, 결단력이 없고 정치 수완이 없었다. 1848년 베를린에 3월 혁명이 일어나자, 시민들에게 헌법 개정과 독일의 통일을 약속하였지만, 통일 독일의 황제 자리를 거부하여 독일 통일을 지연시켰다. 1850년부터는 정치에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프리드리히 현공
[편집]Friedrich 賢公(1463-1525) 독일의 작센 선거후(재위 1486-1525). 현명하기로 이름이 나 '현공'이라는 칭호가 붙었다. 교양이 풍부하고 음악과 역사에 관심이 많았으며 비텐베르크를 예술 활동의 중심지가 되게 하였다. 신성 로마 황제의 자리에 오르지 않고, 1502년 비텐베르크 대학을 세웠다. 그는 열렬한 구교도였지만 루터를 보호하고 그를 바르트부르크 성에 숨겨 주고 종교개혁을 도와, 그에 의하여 종교개혁이 진전되었다.
프리트
[편집]Fried, Alfred Hermann(1864-1921)오스트리아의 평화주의자. 오스트리아 및 독일의 평화 협회를 세우는 데 힘쓰는 등, 국제 평화 운동에 활약하였다. 1891년 베를린에서 반전 평화 잡지인 <무기를 버리자!>라는 잡지를 발행하였다. 1911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프톨레마이오스
[편집]Ptolemaeos, Klaudios(2세기경)
그리스의 천문학자·지리학자.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천체 관측에 종사하고 그리스의 천문학을 정리하여 <천문학 집대성>이란 책을 썼다. 이 책은 후에 아라비아어로 번역되어 <알마게스트>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오랫동안 권위 있는 책이 되었다. 그러나 그 책은 지구는 움직이지 않고 하늘이 그 둘레를 돈다는 '천동설'의 입장에서 씌어졌기 때문에, 그 후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의해 그의 학설은 수정되었다. 지리학 분야로는 <지리학 개요>를 저술하여 수학적 방법에 의하여 자오선 및 위도선을 도입하여, 15세기까지의 그의 사상은 움직일 수 없는 것으로 이어져 왔다. 그 밖에 광학·수학 등 자연 분야에서도 크게 활약하였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
[편집]Ptolemaeos Ⅰ(기원전 367년경-기원전 283)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초대 왕(재위 기원전 323-기원전 285). 마케도니아에서 출생하였다. 알렉산더 대왕의 어릴 때 친구로 알렉산더 대왕 밑에서 장군으로 있었고, 이집트의 지사를 지냈다. 기원전 323년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후, 스스로 왕이라 불렀으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열었다.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그리스와 같이 빛나는 나라를 만들기 위하여 학자·상공인·용병들을 모아들이고, 알렉산드리아에 박물관과 도서관을 세웠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
[편집]Ptolemaeos Ⅱ(기원전 308-기원전 246)
이집트의 왕(재위 기원전 285-기원전 246).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아들로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 형 대신에 왕위에 올랐다. 그는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궁중에 학자·문인·예술인들을 초청하여 알렉산드리아 문화의 황금 시대를 이루게 하였다.
프톨레마이오스 3세
[편집]Ptolemaeos Ⅲ(기원전 288년경-기원전 221)
이집트의 임금(재위 기원전 246-기원전 221).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아들로 페르시아에 빼앗겼던 이집트의 보물을 다시 찾았으며, 도서 수집에도 노력하였다. 알렉산드리아에 있어서 지리학·천문학이 가장 번영한 시기를 이루었다.
플라톤
[편집]Platon(기원전 427년경-기원전 347)그리스의 철학자. 아테네의 명문 가정에서 출생하였다. 젊었을 때 소크라테스에게 배우고 그에게서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따라서 모든 사상은 소크라테스의 연장이며 발전인데, 그의 저서는 모두 소크라테스가 주인공으로 된 변증론에 의한 대화편이어서 그와 스승과의 학설을 구별하기 힘들다. 스승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은 그는 정치가로서의 꿈을 버리고 정의를 가르치기로 결심하였다. 이탈리아를 여행하여 키레네 학파로부터 이데아와 변증법의 기초를 얻고 피타고라스 학파에 접하며 실천적 정신과 실생활에의 흥미를 얻어 그의 독자적인 사상을 반성하게 되었다. 그 사이 <변명> <크리톤> <라시스> 등을 쓰고, 40세에 귀국하여 <골기아스> <대(大)히피아스> <소(小) 히피아스>를 썼다. 그는 그의 이상 국가를 실현해 보고자 친구인 디온의 권고로 시칠리아의 참주 디오니소스의 초청에 응하였으나, 그의 과두 정치를 비난함으로써 분노를 얻어 노예로 팔리기까지 하였다. 후에 그의 저작을 본 키레네 사람에 의해 구출되어 귀국한 뒤, 아카데미 학원을 건립하고 제자 양성에 전력하면서 저작에 몰두하였다. <향연> <파이돈> <국가론> <파이드로스> 등 주요 저술이 여기서 이루어졌고, 이 학원은 529년까지 계속되었다. 대학(University)의 처음 형태인 '아카데미(Academy)'라는 말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357년 디오니소스의 간청을 받자 망설이던 끝에 다시 시칠리아로 가서 이상 정치를 펴보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1년 만에 귀국하여 <법률> 등 몇 개의 저서를 더 쓴 뒤 81세로 사망하였다. 그는 인간의 영혼이 육체와 결합된 충동적이며 감각적 욕망을 추구하는 정욕(情慾:epithymetikon)과, 육체와 결합되지 않으며 불사적인 순수한 이성(理性:logistikon)으로 되어 있다고 하고, '이성'은 매우 순수한 것이지만 이 세계의 배후에 있는 완전 지선(至善)의 실체계인 이데아(Idea)를 직관할 수 없으며 세상에 탄생하여 육체 속에 듦으로써 이데아를 잊고 있다. 이 잊었던 이데아를 동경하는 마음이 에로스(Eros)이며, 현상을 보고 그 원형인 이데아를 '상기'하여(상기설), 인식하는 것이 진리라고 한다. 그리고 인간의 이성적 부분의 덕이 지혜(Sophia)이며, 정욕적 부분의 덕을 절제(Sophrosyhne), 이성의 명령에 복종하여 정욕을 억압하는 기개(氣槪:thymoeides)의 덕을 용기(andreia)라고 하는 것이다. '정의(dikaiosyne)란 여러 덕이 알맞게 그 기능을 발휘할 때의 상태를 말한다.' 그는 이러한 덕론을 통하여 인간 개인의 윤리학을 논하였다. 그러나 정의의 실현은 개인의 덕을 달성하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여 사회 전체의 윤리설을 주장하였다. 그것이 그의 '국가론(Politeia)'이다. 그는 국가를 개인의 확대로 생각하여 개인에 있어서의 정욕의 부분이 농·공·상업의 서민이며, 기개의 부분은 군인·관리, 이성의 부분은 통치자라고 하고, 이는 당연히 선의 이데아를 인식하여야 하므로 \"철학자가 왕이 되거나, 왕이 철학을 해야 한다\"고 하는 유명한 철인 정치론을 전개했다. 이러한 통치자의 교육 제도와 방법에서 그의 교육학을 엿볼 수 있다.
플랑크
[편집]Planck, Max(1858-1947)
독일의 이론 물리학자. 킬에서 출생하여, 킬·베를린 대학 조교수를 거쳐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의 총재가 되었다. 그는 열 역학 제2법칙과 열 역학의 물리적·화학적 응용 및 전기 전도에 대하여 많은 연구를 하였다. 열 복사를 연구하여 '플랑크의 복사 법칙'을 발표하였으며, 1900년 복사 에너지의 불연속성을 가정하여 양자론의 바탕을 세웠다. 이 연구는 아인슈타인·보어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 1918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플레밍
[편집]Fleming, Sir John Ambrose(1849-1945) 영국의 전기 기술자. 랭카스터에서 출생하여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공부하고, 런던 대학 교수를 지냈다. 전기 과학 응용 부문의 개척자로서, 독창적인 연구에 의한 전자기학·전기로·표준전지·무선전지·전등·전화 등 여러 분야의 발달에 공헌하였다. 그 중에서도 1885년 전류·자장·도체 운동의 3방향에 관한 '플레밍의 법칙'은 특히 유명하다. 1904년 2극 진공관을 처음으로 만들어, 오늘날 진공관 기술이 발전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1882-1894년 에디슨 전등 회사 고문, 마르코니 무선 전신 회사 기술 고문을 지냈다.
플레밍
[편집]Fleming, Sir Alexander(1881-1955)영국의 세균학자. 스코틀랜드 태생으로 페니실린을 발명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1922년 세균을 죽이는 리소짐을 발견하였고, 1929년 포도상 구균의 곰팡이가 박테리아를 파괴하는 것에서 암시를 얻어, 그 곰팡이를 분리·배양하는 데 성공하여 페니실린이라 이름지었다. 이 연구로 1945년 공동 연구자인 체인·플로리와 함께 노벨 의학·생리학상을 받았다.
플로리
[편집]Florey, Sir Howard Walter(1898-1968)
영국의 병리학자. 오스트레일리아 아델레이드 태생으로, 셰필드·옥스퍼드 대학 교수를 지냈다. 주로 염증·모세관 임파구의 기능을 연구하였고, 1935년 체인과 함께 페니실린의 효력을 밝혔다. 1945년 플레밍·체인과 함께 노벨 의학·생리학상을 받았다.
플로베르
[편집]Flaubert, Gustave(1821-1880)프랑스의 소설가. 의사의 아들로 루앙에서 출생하였다. 10세쯤 되어서부터 소설·희곡 등을 쓰기 시작했으며, 파리 대학에 다니던 중 간질과 비슷한 증상의 발작을 한 후로 문학에 힘을 쏟았다. 1856년 처음으로 발표한 소설 <보봐리 부인>은 프랑스 사실주의 문학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으며, 프랑스 최고의 작가라는 칭찬을 받게 하였다. 그 밖에 주요 작품으로 <살람보> <감정교육> <성 앙투아느의 유혹> <세 가지 이야기> 등이 있다. 그의 문학은 자유로운 공간과 자연의 감정을 중시하는 낭만주의의 기분을 다분히 지니면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사실주의 문학을 세워, 자연주의 문학의 길을 열었다. 의사인 아버지에게서 과학 정신을 이어받아, 사물의 올바른 모습을 묘사하려 하였다. 돌 한 개를 묘사하는 데도 그것에 가장 알맞는 단 하나의 낱말을 찾았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플루타르코스
[편집]Ploutarchos(46년경-120년경) 그리스의 철학자·전기 작가. 케로네아 태생으로 아테네에서 수사학 및 철학을 공부한 다음 고향으로 돌아가 저술에 열중하였다. 박학 다식하고 인품이 훌륭하여 로마인들의 존경을 받았다. 많은 전기 작품을 썼는데, 특히 유명한 것은 <모랄리아>와 <영웅전>으로 불완전하나마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영웅전>은 그의 말년에 쓴 작품으로, 인생과 도덕면에 일종의 교훈적인 의도가 깃들어 있다. 또, 탁상 연설집 <심포지아카>는 철학·역사학·고고학·자연 과학 등의 문제에 대하여 다루어져 있다. 그는 그리스적 사상가의 마지막 인물이다.
피란델로
[편집]Pirandello, Luigi(1867-1936)이탈리아의 극작가·소설가. 시칠리아에서 출생하여, 본·로마 대학을 졸업하고, 로마의 여자 고등 사범 대학에서 수사학을 가르치면서 시와 소설을 썼다. 1913년부터 희곡을 쓰기 시작하였으며, 1921년 <작가를 찾는 6인의 등장 인물>로 명성을 떨쳤다. 1934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으며, 작품으로 소설 <죽은 마티아 파스칼>과 희곡 <헨리 4세> <각인 각설> 등이 있다.
피르호
[편집]Virchow, Rudolf(1821-1902)
독일의 병리학자·인류학자. 근대 병리학의 창시자로 1856년 베를린 대학 교수가 되어 세포 병리학을 세웠다. \"모든 병원체는 세포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주장으로 병의 원인이 세포의 기능적이고 형태적인 변화에 있다고 하였다. 1862년 프로이센 하원 의원이 되어, 진보당의 수령으로서 비스마르크의 군국주의에 반대하였다. 또한 독일 인류학회를 만들고 슐리만과 함께 트로이의 유적을 발굴하였다. 저서에 <세포 병리학과 조직학> <병적 종양론> 등이 있다.
피비거
[편집]Fibiger, Johannes(1867-1928)덴마크의 병리학자. 코펜하겐에서 출생하였다. 그곳의 대학을 졸업하고, 세균학을 연구하여 1900년부터 코펜하겐 대학의 병리 해부학 교수를 역임하였다. 쥐에게 선충이 기생하는 유충을 먹여, 그 자극으로 암이 발생하는 것을 발견하고, 간암을 앓는 고양이의 촌백충의 유충으로 쥐에 간육종을 발생시켰다. 1926년 노벨 의학·생리학상을 받았으며, 코펜하겐 대학 총장이 되었다.
피사넬로
[편집]Pisanello(1395년경-1455)
이탈리아의 화가·조각가. 베로나·베네치아·로마에서 활약하였는데, 벽화를 주로 그렸다. 중세기적인 환상과 자연 묘사가 혼합된 신비적인 화풍으로, 풍속화 풍의 독자적인 형식의 그림을 그렸다. 깊은 자연 관찰과 정확한 인체 묘사로, 개·말 등의 세밀한 표현이 특징이다. 또한 초상화가로서도 독특한 작품을 남기고 있다. 그의 작품은 르네상스 시대에 가장 성했다. 주요 작품으로 <성 모자상> <성 조르지오> 등이 있다.
피사로
[편집]Pizarro, Francisco(1470-1541)에스파냐의 탐험가. 남아메리카 잉카 제국의 정복자이다. 1510년 바르보아와 함께 태평양을 발견하였다. 에스파냐 정부의 원조를 얻어 1531년 파나마로부터 잉카로 쳐들어가 잉카 제국을 멸망시키고 식민지를 세웠다. 그는 자기를 도와준 알마그로를 죽이고, 자기 자신도 부하의 손에 피살되었다.
피셔
[편집]Fischer, Kuno(1824-1907) 독일의 철학자. 슐레지엔의 산데바르네에서 출생하여, 라이프치히·할레·하이델베르크 대학을 졸업하였다. 예나·하이델베르크의 각 대학 교수를 지냈으며, 헤겔 학자로 인정되고 있으나, 헤겔을 통하여 신칸트 파를 제창한 사람 중 한 사람이다. <칸트의 생애와 철학의 기초> <임마누엘 칸트 비판 철학의 발달사와 체계>에 의하여 칸트의 철학을 부흥시켰으며, 스피노자의 속성을 실재론적으로 해석하였다. 그는 독일 철학사 연구의 황금 시대를 이룩하였다. 그의 저서 <근세 철학사> 10권은 연구자들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다. 또한 그는 독일 고전 문학의 미학적 분석을 남겼다.
피셔
[편집]Fischer, Emil(1852-1919) 독일의 유기 화학자. 오이스킬헨에서 출생하여 본 대학을 졸업하고, 뷔르츠부르크·베를린 대학 교수가 되었다. 생물체에 관계하는 유기물·각종 색소·염료의 합성과 구조 결정에 관한 연구가 있고, 단백질 성분 구조로 많은 아미노산을 얻어 거기에서 많은 폴리펩티드를 합성하였다. 1902년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피셔
[편집]Fisher, Irving(1867-1947) 미국의 경제학자. 계량 경제학회 초대 회장을 지냈고, 근대 경제 이론의 개척자이다. 1898년 예일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화폐 수량설과 물가 지수론을 주장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는 미국 수리 경제학을 대표하는 학자로, 저서에 <가치와 가격 이론의 수학적 연구> <지수론> 등이 있다.
피셔
[편집]Fisher, Ronald Aylmer(1890-1962)영국의 농학자·통계학자. 1919-1933년 로장스테드 농사 시험소 통계 연구실 근무, 1933-1943년 런던 대학 우생학 교수, 1943년 이래 케임브리지 대학 유전학 교수를 지냈다. 모집단과 표본을 구별, 모집단에 관한 지식을 정밀한 소표본에 의하여 추정하는 방법을 수립, 추계 통계학을 창시하였다. 저서에 <노동자 조사에 관한 통계적 방법> <수학적 통계학에 대한 기고>등이 있다.
피아제
[편집]Piaget, Jean(1896-1980)
스위스의 심리학자. 뉘샤텔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생물에 취미를 갖고 공부하였으며, 10세 때 이미 새에 대한 논문을 출판하였고, 그 후 박물관에 있으면서 연체 동물에 관심을 가져 연체 동물학에 대한 연구 보고서를 출판하였다. 그는 뉘샤텔 대학에 다녔고, 1915년 연체동물학으로서 학사 학위를 받은 후 소르본 대학에서 비네에게 심리학에 대해 배우기 시작하여, 1921-1922년 사이에 4편의 심리학 논문을 발표하였다. 1929년 루소의 연구기관장이 되어 어린이 연구를 하게 되었으며, 이것이 피아제를 심리학과 교육학에서 중요한 인물로 만들어 준 계기가 되었다. 그는 생물학과 심리학에 흥미를 가진 결과 발생학적 견지에서 인식론에 접근해 갔다. 아동의 정신의 본질이 자기 중심성에 있다고 주장하고 아동의 인지 발달 이론을 발표하였다. 피아제는 인간의 인지 발달 단계를 ① 감각 동작 단계 ② 전(前) 조작적 단계 ③ 구체적 조작 단계로 구분하였으며, 이 단계는 반드시 순서적으로 계속되는데 단계 중의 공백은 영원한 공백이 되고 단계의 속도는 개인에 따라 독특한 속도를 가지고 진행된다고 주장한다. 저서로 <아동의 언어와 사상> 등이 있다.
피어리
[편집]Peary, Robert Edwin(1856-1920)미국의 해군·북극 탐험가. 북극 탐험에 뜻을 품고 여러 번 그린란드를 조사하였다. 1898년 이후에는 북극 탐험을 행하였고, 1909년 북극의 극지에 성조기를 꽂음으로써, 인류 최초의 발자국을 남겼다. 이 탐험으로 북극이 깊은 바다라는 것과 북극에 대한 여러 가지 사실이 밝혀졌다. 저서로 <북극> <북쪽의 빙하> 등이 있다.
피어스
[편집]Pierce, Franklin(1804-1869)
미국의 정치가·제14대 대통령. 뉴햄프셔 주 의회 의원 및 하원 의원·상원 의원을 지냈다. 1834년 변호사로 일하였고, 1847년 멕시코 전쟁에 참가하였다. 1852년 민주당으로 출마하여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1853년부터는 대통령으로서 서부의 개척과 외교정책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는 노예 해방 문제에 찬성하여 1857년 사직하였는데, 이것이 남북 전쟁이 일어나는 원인이 되었다.
피어슨
[편집]Pearson, Lester Bowles(1897-1972)캐나다의 정치가. 옥스퍼드 대학에서 배우고 토론토 대학의 현대사 교수를 거쳐, 1928년 외무성에 들어가 제2차 세계대전 후 주미 대사, 1947년 UN 캐나다 수석 대표, 1948년 외상이 되고 7회 UN 총회 의장을 역임하였다. 10회 UN 총회에서 18개국 가맹안을 추진하였고, 1956년 수에즈 전쟁 때 UN 경찰군을 파견하는 등 국제 평화에 힘쓴 공로로, 1957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1963년 총선거에 의해 수상이 되었으며, 고령으로 1968년 수상직을 사퇴하였다. 저서로 <현대의 외교>가 있다.
피우스 7세
[편집]Pius Ⅶ(1742-1823)
로마의 교황(재위 1800-1823). 1785년 추기경이 되어 파리로 가서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후에 나폴레옹의 침략 전쟁 정책에 반대하였다가 교황권을 잃었다. 그 후 1814년 빈 회의에서 교황령을 찾고, 제수이트회를 부흥시켰다.
피우스 9세
[편집]Pius Ⅸ(1792-1878)
로마의 교황(재위 1846-1878). 처음에는 자유주의적으로 이탈리아 통일을 찬성했으나, 후에 반대하였기 때문에 1848년 이탈리아 군에 의하여 교황청에서 쫓겨났다. 1870년 이탈리아 왕국이 이루어지자 이와 대립하여 스스로 바티칸 궁전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제1회 바티칸 공의회를 주재하였다. 그는 자연주의·사회주의·공산주의에 반대하였고 비스마르크와 문화 투쟁을 일으켰다.
피우스 11세
[편집]Pius ⅩⅠ(1857-1939)
로마의 교황(재위 1922-1939). 1929년 파첼리 경(후에 피우스 12세)을 교황청 대표로 뽑아 무솔리니와 교섭을 벌여 '라테라노 조약'을 맺게 하였으며, 바티칸 제국의 독립과 로마 교황의 주권을 다시 찾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는 새로 독립한 여러 나라와 정치·종교 조약을 맺고 여러 강대국과도 국교를 가졌다. 또한 포교 전도회를 새로 세워 가톨릭을 널리 전파하고 교회의 통일과 강화에 이바지 하였다.
피우스 12세
[편집]Pius ⅩⅡ(1876-1958)
로마의 교황(재위 1939-1958). 로마 출신으로 1930년 교황청 추기 장관이 되었고, 63세 때 교황에 뽑혔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중립을 지켰으나, 전쟁이 끝난 후 가톨릭 종교 단체를 일으켜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정치 운동을 하였다. 러시아를 반대한 교황으로서 유명하다.
피조
[편집]Fizeau, Armand Hippolyte Louis(1819-1896)
프랑스의 물리학자. 처음에는 빛과 열을 연구하고, 후에는 톱니바퀴를 사용하여 광속도를 측정하였으며, 다시 에테르와 지구와의 상대 운동을 연구하기 위해 매질 중에서의 광속도를 측정하였는데, 그때의 '피조 간섭 실험'은 유명하다. 또 '도플러 효과'에서 별의 운동 속도를 결정하고 피조의 팽창계를 만들었다.
피카소
[편집]Picasso, Pablo(1881-1973)
에스파냐의 화가. 남에스파냐 말라가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가졌으며, 마드리드 왕립 미술 학교를 졸업하였다. 1900년 파리로 나가, 일생을 거의 파리에서 생활하였다. 1901년 개인전을 개최했으며, 고흐 등의 영향을 받은 1904년까지의 초기 작품은 단색인 푸른색 한 가지만으로 그렸다. 이어 분홍색 한 가지만으로 그리는 화풍으로 바뀌었다. 1907년부터는 흑인 조각에 큰 충격을 받아 <아비뇽의 처녀들>이라는 힘찬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다. 1908년부터는 추상적인 그림을 그림으로써 입체파 운동에 앞장섰으며, 사실적인 초상도 많이 그렸다. 1919년경부터 신고전주의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1924년경부터는 사실주의와 입체파의 혼합된 작품을 만들고, 그 기간에 <3의 얼굴> <3인의 음악가> 등 입체파의 저명한 작품을 발표하였다. 1937년 에스파냐의 내란에 영향을 받아 파시즘에 대한 분노와 조국애로 일관된 걸작 <게르니카>를 발표하였다. 1938년이 되자 오늘날 흔히 볼 수 있는 괴상한 얼굴 모습의 사람들을 거친 수법으로 그리기 시작하여 '표현주의 시대'라 일컬어진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독일군 점령하에 파리에 머무르면서, 나치스에 대한 분격과 반항을 작품 속에 담고 있다. 1946년 이후에는 남프랑스의 발로리에서 석판화를 주로 그렸다. 1950년 <조선의 학살>, 1954년 <전쟁과 평화> 등의 문제작을 그림으로써 평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려는 의도를 보이기도 하였다. 19세기부터 20세기에 걸쳐서, 미술의 표현 양식의 혁명 시대에 최대의 역할을 완수했으며, 1907년 브라크와 더불어 입체파 운동을 시작한 이래, 전 세계의 예술계에 미친 영향은 절대적이다. 그는 회화·조각·석판·도기 등 모든 미술의 영역에서 활약하였다.
피타고라스
[편집]Pythagoras(기원전 582년경-기원전 497년경)
그리스의 종교가·철학자·수학자. 사모스의 명문가에서 출생하였다. 후에 크로톤에 이주하여 종교 단체 겸 학술 단체를 만들고 남이탈리아 귀족주의 당파의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민주주의파의 압박을 받고 메타폰티온으로 도망쳐 거기서 죽었다. 그는 당시의 문예 부흥 운동에 학문을 결부시키려 하였다. 그의 학당은 영혼의 불멸과 윤회, 사후의 응보를 믿으며 영혼의 정화를 위하여 금욕과 계율에의 복종을 중히 여기고 원시적 터부(taboo)의 흔적을 나타내는 계율, 아폴로 숭배의 주요 관념인 결신(潔身) 등을 믿었다. 그들은 이 영혼을 진정시키는 음악과 영원 불변의 진리를 가르치는 수학의 연구에 전진한 것이다. 그에 의하면 수는 만물의 근본 물질이며 원형이고, 만물은 수의 관계에 따라서 질서 있는 코스모스(그 자체 속에 질서와 조화를 지니는 우주 또는 세계)를 만든다고 하였다. 우주를 장식이라든가 질서의 뜻을 가진 코스모스라 이름지은 것도 그에게서 시작되었다. 수학을 영혼의 정화 수단으로 삼았기 때문에 기하학, 수론, 측량술, 계산술의 단계를 넘어서 이론에까지 발전되었다. 수를 만물의 원리로 삼은 것은 수학·천문학 발달에 좋은 자극이 되었으나, 한편 너무 조급하게 수 및 그 관계를 가지고 모든 것을 설명하려 하여, 무의미한 수의 신비주의에 빠져버린 결과가 되었다. 이 학파는 수학적 법칙이 우주를 관철하고 있음을 주장하여, 수학을 실용 수학의 영역에서 이론 수학에까지 높인 점에서 불멸의 공적을 남겼다. 그의 '피타고라스 정리'는 유명하다. 이 밖에 '삼각형의 내각의 합의 정리' '면적의 응용' '정5각형의 작도' 등을 증명 또는 발견하였다. 천문학에서는 지구의 구상을 믿어 일종의 지동설을 주장하였다. 음악도 수의 비례와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음악에 사용되는 음의 높이를 정하는 데 있어서 수학적인 비율에 의하여 나누는 것을 고안하였다. 이것을 '피타고라스 음계'라고 한다. 그와 그 일파의 이와 같은 수학적·천문학적 지식은 최근의 연구에 의해 오리엔트의 과학적 문명의 바탕이 되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피트
[편집]Pitt, William(1708-1778) 영국의 정치가. 그의 아들 피트와 구별하기 위하여 보통 대(大) 피트라고 불린다. 웨스트민스터에서 태어나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하고, 1735년 하원에 들어가 월폴의 정책을 비난하여 주목을 끌었다. 1746년 출판 장관이 되었고, 1756년 7년 전쟁이 일어나자 적극 외교를 주장하였다. 국무 대신의 자리에 올라 프랑스와의 식민지 싸움에서 이겨 인도·북아메리카 등지에서 식민지를 넓혀 대영 제국의 기초를 세움으로써 '위대한 평민'이라 일컬어진다. 그는 식민지와 미국과의 유대관계를 중요시하였지만 식민지의 독립은 반대하였다. 1778년 식민지에 있는 영국 군대의 철수에 대한 청원을 국회가 심의하는 중에 병을 앓으면서도 국회에 나와 반대 연설을 하다가 갑자기 졸도하여 숨을 거두었다.
피트
[편집]Pitt, William(1759-1806) 영국의 정치가. 피트의 둘째 아들로 소(小) 피트라고 부른다.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하고, 변호사가 되어 22세에는 하원 의원이 되었다. 24세 때 가장 나이 어린 수상이 되었다. 하원의 반대당은 그를 무시해 비웃었으나, 1784년 총선거에서 크게 이긴 후, 17년 동안 정권을 잡았다. 미국 독립 전쟁 후의 영국의 경제를 재건하는 데 힘썼다. 또한 자유 무역주의를 존중하여 시민 계급의 지지를 받아 정권이 안정되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자 '대 프랑스 동맹'의 중심이 되어 국내의 개혁 운동을 눌렀으나, 1801년 잠시 물러났다가 새 정부의 실패로 1804년 다시 수상이 되었다. 그러나 거국 일치 내각은 성공하지 못하고, '아우스터리츠의 싸움'에서 져 큰 타격을 받아 이듬해 런던에서 죽었다.
피히테
[편집]Fichte, Johann Gottlieb(1762-1814) 독일의 철학자. 지식의 근본이 되는 학문으로서의 철학인 지식학을 창시한 사람이다. 직공의 아들로 태어나,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였으나 차차 철학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칸트의 논문을 읽고 감격하여 자기의 논문을 칸트에게 보이고, 후에 이것을 출판하여 유명해졌다. 1794년 예나 대학의 교수가 되었으나, 그가 잡지에 쓴 종교론이 무신론이라는 비난을 받고 베를린으로 옮겼다. 후에 에를랑겐 대학의 교수가 되었으나, 독일이 나폴레옹과의 전쟁에 져서 강화 조약을 맺자, 프랑스 군에게 점령되어 있는 베를린에 돌아가, <독일 국민에게 고함>이라는 강연을 하여 독일인의 민족 의식을 높이는 데 힘썼다. 1810년 베를린 대학의 초대 총장이 되었으나, 4년 후에 병으로 죽었다. 저서에 <계시 비판> <전 지식학의 기초> 등이 있다.
핀센
[편집]Finsen, Niels Ryberg(1860-1904)덴마크의 화학자. 코펜하겐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빛, 특히 자외선의 생리 작용에 흥미를 가지고 연구를 하여 근대 광선 요법의 바탕을 만들었다. 이 광선 치료법은 천연두·결핵에 응용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는데, 그 업적으로 1903년 노벨 의학·생리학상을 받았다.
필리포스 2세
[편집]Philippos Ⅱ(기원전 382-기원전 336)
마케도니아 왕(재위 기원전 359-기원전 336).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발휘하여 영토를 확장하고, 헤레스폰트 해협에 이르기까지 국경을 확대하였다. 기원전 338년 아테네를 중심으로 하는 그리스 여러 도시를 정복하고 그 지배자가 되어 마케도니아의 세력을 확립하였다. 페르시아 정벌을 준비하다가 암살되었는데, 그의 정복 사업은 그의 아들인 알렉산더 대왕에 의하여 완성되었다.
필리프
[편집]Philippe, Charles Louis(1874-1909) 프랑스의 소설가. 중학 시절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였다. 1894년 파리로 나와 시청 공무원으로 생활을 하면서 <랑클로>라는 문예 잡지의 동인이 되어 활약하였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애정을 느끼고 소박한 글을 썼는데, 부드럽고 선량하지만 무식한 젊은 창녀를 사랑한 경험으로 쓴 소설 <뷔뷔드 몽파르나스>가 특히 유명하다. 그 밖에 <페르드리 영감님> <어머니와 아들>과 죽은 후에 출판된 <젊은 날의 편지> 등의 작품이 있다.
필리프 2세
[편집]Philippe Ⅱ. Auguste(1165-1223) 프랑스의 왕(재위 1180-1223). 루이 7세의 아들이다. 독일 황제와 영국의 왕들과 함께 제3회 십자군을 이끌고 출정하였으나, 영국 왕 리처드와 사이가 좋지 않아 귀국하였다. 왕권을 확장하려고 영국의 리처드 및 존 왕과 싸워 영국 왕과 손잡은 독일 황제 오토 4세의 군대를 쳐부수었다. 노르망디·브뤼타뉴에서 툴렌에 이르는 지방을 프랑스의 왕권 아래에 두었다. 재정을 정비하고 산업 진흥에 힘썼으며, 학문과 예술을 보호하여 프랑스 왕국의 기초를 다졌다.
필리프 3세
[편집]Philippe Ⅲ(1245-1285)
프랑스의 왕(재위 1270-1285). '강용왕(剛勇王)'이라고도 불린다. 카페 왕조 루이 9세의 아들이다. 아버지가 십자군 원정중에 튀니지에서 죽었으므로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다스린 기간이 짧아 큰 업적을 남기지는 못했다.
필리프 4세
[편집]Philippe Ⅳ(1268-1314)
프랑스의 왕(재위 1285-1314). 프랑스 통일 체제를 처음으로 갖추었고, 왕권을 강화하였다. 국내 교회령에 대한 세금 문제로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와 다투어, 아나니로 교황을 습격하기도 하였다. 그 후 아비뇽에 새로이 클레멘스 5세를 옹립하여 교황의 아비뇽 유수 시대(1309-1377)를 열었다.
필리프 6세
[편집]Philippe Ⅵ(1293-1350)
프랑스의 왕(재위 1328-1350). 발루아 왕조의 시조이다. 샤를마뉴 4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는데 영국의 왕인 에드워드 3세가 왕위 계승권을 요구하였으므로 1337년 백년 전쟁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 전쟁에서 이겨 에드워드 3세를 굴복시켰다.
필머
[편집]Filmer, Robert(1589년경-1653)
영국의 정치가·사상가. 찰스 1세로부터 나이트 작위를 받았다. 그는 왕권 신수설의 대표적인 인물로 청교도 혁명 때에는 국왕파로서 활약하였다. 그가 죽은 후에 간행된 <부권론>은 왕정 복고기에 높이 평가되었으며, 이 책의 이론을 깨뜨린 것이 로크의 <정부 이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