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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마가[편집]

Mark, John(1세기경)

<마가복음>의 저자. 유대인으로 요한이라고도 한다. 어머니는 마리아이고, 그의 집은 예루살렘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초대 기독교의 집회소였다. 사도 바울의 전도 여행 때 바나바와 함께 동행하였으며, 베드로의 통역원으로 지내는 등 교회 일에 열성이었다. 55-62년 무렵에 <마가 복음>을 썼으며, 알렉산드리아에 교회를 창립하고, 그곳에서 전도하다가 순교하였다고 한다.

마귀[편집]

麻貴(16세기경)

중국 명나라 신종 때의 장군.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명나라가 파견한 조선 구원병의 제독으로 서울에 들어왔다. 권 율과 합세하여 울산의 도산성에서 왜구와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1598년 다시 도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왜구의 철수로 귀국하였다.

마네[편집]

Manet,

douard(1832-1883)

프랑스의 화가. 인상파의 창시자로 '근대 회화의 아버지'로 불린다. 파리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부유한 사법관으로 그의 화가 지망에 반대하였다. 그래서 한때 선원을 지망하고, 상선 학교의 연습생으로서 브라질을 항해하였다. 귀국 후 역사 화가 쿠튀르에게 배웠으나, 부자연스런 아카데미풍의 그림에 불만을 느껴 그의 곁을 떠난 후, 루브르의 옛 명화를 통하여 독습하여 자신의 독특한 화풍을 개발하였다. 주위에 모네를 비롯하여 많은 젊은 화가들이 모이게 됨에 따라 인상파 회화가 생기게 되었다. 그의 화풍의 특색은 단순한 선 처리와 강한 필치, 풍부한 색채감에 있다. 만년에는 병이 들어 손발이 마비되는 등 고통의 나날들을 보내다가 51세에 세상을 떠났다. 주요 작품에 <풀밭 위의 식사> <피리 부는 소년> <페르 라튀유 가게에서> 등이 있다.

마니[편집]

Mani(216-277)

페르시아의 마니교의 창시자. 246년경 조로아스터교·크리스트교·불교를 결합한 신종교인 마니교를 부르짖고 중앙 아시아와 인도에 전도하였다. 스스로를 세계에 있어서의 최종적인 예언자로 칭하였다. 페르시아에서 포교 활동을 하다가 조로아스터 교도의 박해를 받아 처형당하였다.

마라[편집]

Marat, Jean Paul(1743-1793)

프랑스의 혁명가·의사. 스위스에서 출생하여 런던과 파리에서 의사로 지냈다. 프랑스 혁명 때에 <인민의 벗>이라는 신문을 내어 민중의 사기를 돋우었다. 후에 국민 공회에서 대의원으로 뽑혀, 로베스피에르와 함께 자코뱅 당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혁명에 반대하는 자를 과격하게 누르는 독재 정치를 하였기 때문에, 반대파인 지롱드 당의 사주를 받은 한 여인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마르코니[편집]

Marconi, Marchese Guglielmo(1874-1937)

이탈리아의 전기 기술자·발명가. 볼로냐 출신으로 무선 전신을 실용화하였다. 1895년 헤르츠의 전자파에 기초하여 실험을 거듭하여, 무선 전신 장치를 발명하고, 이듬해 영국으로 가서 특허를 얻었으며, 9마일 떨어진 지점 사이의 무선 송수신에 성공하였다. 또 영국 해군 대연습에서 약 120km 거리 사이의 통신에 성공하고, 1899년 영국에서 등대선 조난 구제에 처음으로 성공하였다. 1901년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행한 통신에 성공하여 이 부터 무선은 함선을 비롯한 각종 통신에 실용화되고, 1907년 유럽과 미국 사이의 공공 통신 사업이 그에 의해 시작되었다. 1909년 브라운과 함께 노벨상을 수상하였다.

마르코스[편집]

Marcos, Ferdinando(1917-1989)필리핀의 정치가. 필리핀 대학을 졸업하고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으나 탈출하여 게릴라 대장이 되었다. 1949년 하원 의원, 1959년 상원 의원, 1963년 상원 의장에 이어, 1965년 국민당 공천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 후 1969년, 1973년 두 차례에 걸쳐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1972년 이후의 계엄령, 특히 아키노 의원의 암살 사건으로 국민의 신임을 잃었다. 1986년 대통령 선거가 부정 선거라는 사실이 드러나, 군부의 반란과 이에 호응한 전 국민의 의거에 의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 이멜다 여사와 함께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마르코 폴로[편집]

Marco Polo(1254-1324)이탈리아의 동양 여행가. 베네치아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날 때 중앙 아시아의 일 한국에 있었으며, 그가 15세 때 돌아왔다. 17세 때 아버지와 함께 베네치아를 떠나 중국으로 가게 되었다. 1275년 원나라의 세조가 있던 카이펑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세조의 신임을 얻은 그는 정치, 외교 등의 요직을 맡게 되었다. 17년 동안 중국의 여러 도시와 지방을 비롯하여 몽고·버마·베트남까지 다녀왔다. 1295년 베네치아에 돌아왔고, 1298년 제노바와의 전쟁이 일어나자 가리 함대에 속하여 출전하였으나 전쟁에 패하여 포로가 되었다. 1년간 감옥 생활을 하면서 아시아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동료들에게 들려 주었는데, 동료인 루스티치아노가 그의 이야기를 받아 쓴 것이 유명한 <동방 견문록>이다. 이 서적은 유럽인의 동방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으며 중세 동방 연구에 관한 중요한 문헌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편집]

Marcus Aurelius Antoninus(121-180)

로마의 제16대 황제(재위 161-180). 로마 5현제 중의 한 사람. 에스파냐의 명문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로서 철학책을 즐겨 읽고 전쟁터에서 틈틈이 쓴 그의 <자성록> 12편은 로마 스토아 철학의 대표적인 책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는 언제나 인정이 많고 자비로워 백성을 널리 사랑하였으나 정책상 크리스트 교도를 억눌렀다. 중국에도 사신을 보내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중국 <후한서>에는 '대진왕 안돈'이라고 그의 이름이 적혀 있다. 그의 유명한 저서인 <명상록>에는 철학인으로서의 그의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마르크스[편집]

Marx, Karl(1818-1883)

독일의 경제학자·사상가·국제 노동자 운동 및 그 이론, 과학적 사회주의(마르크스주의)의 창시자. 유대 계 부모에게서 태어나, 가정은 비교적 유복한 편이었다. 본 대학에서 법률을 배웠고, 베를린 대학에서 철학과 역사를 배웠다. 그는 헤겔과 포이어바흐의 철학을 연결짓고 거기에 자기의 생각을 덧붙여,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철학을 만들었다. 파리에서는 학문을 하며, 프랑스 사회주의자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그는 또 자본주의 사회를 뒤엎고, 토지·공장·은행 등을 모두 국가의 것으로 만듦으로써, 모든 사람이 즐겁게 일하고 평등한 생활을 할 수 있다고 하는 이른바 공산주의 사회를 만들 것을 주장하였다. 그의 이러한 사상은 뒤에 레닌과 스탈린에 의해 계승, 발전되었다. 그 후에 소련을 비롯한 공산주의 국가가 생겨나 세계를 혼란과 대립 속에 빠뜨리는 불씨가 되었다. 저서에 <경제학 비판> <철학의 빈곤> <자본론> 등이 있다.

마르티니[편집]

Martini, Simone(1283년경-1344)이탈리아의 화가. 비잔틴 양식에서 르네상스로 바뀌는 과도기 때의 화가이다. 아름다운 색채의 장식적인 화풍을 나타낸 시에나 공회당·아시시 교회·아비뇽 교황궁 등의 그림에서 그의 뛰어난 재능을 엿볼 수 있다. 작품에 <장엄> <성모와 성자들> <성고> 등이 있다. 시에나 및 아비뇽의 화가들에게 준 그의 영향은 크다.

마리 드 메디치스[편집]

Marie de Medicis(1573-1642)

프랑스의 왕비. 이탈리아의 명문 메디치 가 출신으로, 1600년 프랑스 왕 앙리 4세와 결혼하여 루이 13세를 낳았다. 남편 앙리 4세가 죽자, 어린 왕 루이 13세의 섭정이 되었으나, 실정이 많았다. 정권을 차지하려는 루이 13세 및 재상 리슐리외의 미움을 받아 국외로 도주하였다.

마리 루이즈[편집]

Marie Louise(1791-1847)프랑스의 나폴레옹 1세의 두번째 왕후. 오스트리아의 프란세츠 1세의 딸로 빈에서 출생하였다. 조제핀과 이혼한 나폴레옹과 1810년 정략적으로 결혼하였다. 원정 중의 나폴레옹으로부터 받은 318통의 편지는 당시의 중요한 문헌이다.

마리아 테레지아[편집]

Maria, Theresia(1717-1780)

오스트리아의 여왕(재위 1740-1780). 아버지 카를 6세가 죽은 뒤 여왕이 되었으나, 프랑스·프로이센·에스파냐 등이 이에 반대하여 오스트리아 계승 전쟁(1740-1748)이 일어났다. 이 전쟁에서 슐레지엔 지방을 프로이센에게 빼앗기자, 되찾기 위해 프랑스·러시아와 손잡고 7년 전쟁(1756-1763)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그녀의 치적 중 중요한 것으로는 대학의 개혁, 법전의 개정, 고문의 폐지, 모범적인 소학교의 창설 등 오스트리아를 근대적 국가로 통일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는 16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그들 중에 요제프 2세, 레오폴트 2세는 즉위하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 루이 16세의 왕후가 되었다.

마리 앙투아네트[편집]

Marie Antoinette(1755-1793)

프랑스 루이 16세의 왕비.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와 마리아 테레지아 시대의 딸로서, 1774년 루이 16세와 정략적인 결혼을 하였다. 그녀의 정치적 영향력은 강력하여 네케르 등의 자유주의 개혁을 좌절케 하였다. 또 사치, 낭비벽, 하층 계급의 멸시 등이 지나쳐 국민의 비난을 받았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자, 루이 16세를 부추켜서 이를 누르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국외 도망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하고, 1793년 10월 자코뱅 당에 의하여 처형되었다.

마리우스[편집]

Marius, Gaius(기원전 155년경-89)로마의 장군·정치가. 이탈리아의 중부 아르피눔에서 하층 계급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프리카에서 일어난 유그르타의 난을 평정하였고, 북부 이탈리아에 침범한 게르만 족과 킴브리 족을 막아냄으로써 이름을 떨쳤다. 군제 개혁의 하나로 사병제를 채택하였으며, 통령을 지내면서 일반 시민을 보살핀 로마 민중의 지도자였다.

마사리크[편집]

Masaryk, Tomas Garrigue(1850-1937)

체코슬로바키아의 초대 대통령·철학자·사회학자. 프라하 대학 교수를 지냈으며, 국민당 당수가 되어 독립 운동 지도에 앞장서서 '체코슬로바키아 건국의 아버지'로 불린다. 1918-1935년까지 대통령으로서 체코슬로바키아 발전에 온 힘을 기울였다. 저서에 <마르크시즘의 철학적·사회학적 기초>가 있다.

마사초[편집]

Masaccio(1401-1429)

이탈리아의 화가.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시작될 무렵 사실주의적인 그림으로 근대 미술의 문을 열었고, 르네상스 미술의 선구가 되었다. 그는 자연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렸으며, 종교화에도 뛰어났다. 작품으로 <낙원 추방> <공물의 돈> <성모와 성도들> <성 모자와 성안나> 등이 있다.

마셜[편집]

Marshall, Alfred(1842-1924) 영국의 경제학자·케임브리지 학파의 창시자. 클래팜의 가난한 가정에서 출생하였다.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전공하였다. 고전파 경제학을 근대화하여 신고전학파의 기초를 닦았다. 그는 영국 경제학계의 지도자로 학계뿐만 아니라 정책상으로도 공헌하고, 영국 정통 학파의 기반에 서서 한계 효용학파로부터 시간의 요약, 탄력성 등 새로운 학설을 도입하여 케임브리지 학파 경제학의 기초를 세웠다.

마오쩌둥[편집]

毛澤東(1893-1976)

중국 공산당의 최고 지도자·정치가. 후난성 출신으로, 18세 때 신해 혁명에 참가하였다. 그 후 장사(長沙) 사범 학교를 졸업하고, 마르크스주의 연구에 몰두하였다. 1921년 공산당 창립 대회에 후난성 대표로 참가하였고, 그 후 공산당 지도자로, 폭동 지휘자로 활약하였다. 1924년 국민당과 공산당의 합작 시기에는 공산당 중앙위원, 국민당 제1기 후보, 중앙 집행위원, 선전 부장 대리 등을 겸임하다가, 국민당과 헤어진 뒤 농민을 중심으로 한 공산당을 조직하였다. 1931년 중화 소비에트 정부를 만들어 그 주석이 되었다. 국민 정부의 공격을 받아 멀리 옌안으로 달아나기도 하였다. 일본군이 중국으로 쳐들어오자, 1936년 제2차 국공합작으로 항일 민족 통일 전선을 이루어 일본군과 싸웠다. 1946년부터 국민 정부군과 공산군은 전면적으로 싸우게 되었다. 1949년 중국 정권이 수립되자 그 주석이 되었다. 그 후 국민 정부를 타이완으로 밀어내고 본토를 차지하였다. 1965년부터 탄압 정책을 쓰기 시작하였으며, 반대파를 숙청하였다. 6·25전쟁 때에는 중국군을 한반도로 보내어 싸우게 하였다.

마이어[편집]

Mayer, Julius Robert von(1814-1878)

독일의 의사·물리학자. 약제사의 아들로 튀빙겐·뮌헨·파리 등지에서 의학을 배운 후,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에 부임하였다. 정맥의 피가 열대 지방에서 더 붉은 빛을 나타내는 것을 관찰하였다. 또 체내의 신진 대사가 외계의 기온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고, 1841년 귀국 후 작업량과 발생 열량과는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아냈다. 1842년 '에너지 보존 법칙'을 발표하였다. 이 법칙은 물리학뿐만 아니라 자연 과학 전반에 적용되는 근본 법칙이 되었고 19세기의 큰 업적이다. 저서에 <화학 및 약학 잡지> <열의 일당량에 의한 소론> 등이 있다.

마이욜[편집]

Maillol, Aristide(1861-1944)

프랑스의 조각가. 로댕과 부르델이 죽은 뒤, 데스피오와 함께 프랑스 조각계를 대표하였던 조각가이다. 파리 미술 학교에서 그림 공부를 하였고, 1900년경부터 조각을 발표하였다. 단순하고 다듬어진 모양을 찾는 그의 작품은 고대 그리스 미술의 정신을 이어받은 것이다. 작품으로 <지중해> <목욕하는 여인> 등이 있다.

마이켈슨[편집]

Michelson, Albert Abraham(1852-1931)

미국의 물리학자. 독일에서 출생하여 미국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880년 유럽에 유학하였다. 클리블랜드 대학 물리학 교수를 거쳐, 시카고 대학 교수를 지냈다. 1881년 빛이 간섭하는 현상을 이용하여 광파의 길이를 재는 마이켈슨 간섭계를 발명하고, 그것으로 지구상의 공전 궤도에 따르는 방향과 빛의 속도가 거의 같음을 실제로 측정하였다. 또한 빛의 속도를 정확히 측정하여 초속 18만 6,153마일이라 정하였다. 그 후 상대성 이론의 논거를 제공하여, 1907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마자랭[편집]

Mazarin, Jules(1602-1661)

프랑스의 정치가.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출생하여, 1639년 프랑스로 귀화하였다. 리슐리외의 신임을 얻어 그가 죽은 후에 재상이 되었다. 그는 리슐리외 정책을 계승하여 교묘한 외교 수완으로 베스트팔렌 조약을 맺고 30년 전쟁을 유리하게 끝내어 합스부르크 가를 눌렀다. 내정에 있어서는 부르봉 왕조 확립에 노력하였기 때문에, 이 정책에 반대한 귀족·고등 법원은 파리를 중심으로, 1648-1653년 프롱드의 난을 일으켰다. 그는 이를 진압하고, 봉건 세력을 억압, 절대주의 강화에 성공하였다. 또 라인 동맹을 체결하여 독일에 세력을 뻗치고, 영국과 동맹하여 에스파냐의 합스부르크가에 대항, 피레네 조약을 승인하게 하고, 에스파냐 왕녀 마리아 테레사와 루이 14세의 결혼을 성립케 하였다. 문예의 보호에도 노력하고, '마자랭 문고'를 창설하였다. 프랑스 최대의 정치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마젤란[편집]

Magellan, Ferdinand(1480년경-1521)에스파냐의 항해가·해양 탐험가. 포르투갈의 하급 귀족으로 태어났으며, 1504년부터 포르투갈령 인도 총독 알메이타의 지배하에 있는 동남아시아에서 일하였다. 1517년 에스파냐로 건너가 부자 상인과 손을 잡고, 국왕 카를로스 1세(황제 카를 5세)의 허락을 얻어, 1519년 서쪽 항로로 몰루카 제도로 갈 계획을 세워, 빅토리아 호를 비롯하여 5척의 배와 300여 명으로 된 선단을 이끌고 에스파냐의 산루칼 항을 출발하였다. 그는 대서양을 남하하여 그 해 말경에 남아메리카의 리우데자네이루에 도착하였으며, 1520년 1월에는 라플라타 강 하류에 이르러 그곳에서 겨울을 지냈다. 다시 남하하여 그 해 10월 마젤란 해협을 발견한 데 이어 '태평양'을 북서쪽으로 발견하였다. 그 후 98일 동안 계속 항해하다가 1521년 3월 괌 섬에 도착, 이어 필리핀의 남단을 발견하였다. 그는 인도 총독 밑에 있을 때에 와 본 적이 있는 몰루카 제도의 경선을 넘음으로써, 사실상 그의 세계일주는 이루어진 것이다. 마리아나 제도와 필리핀 군도는 이때 이름 붙여진 것이다. 이 무렵 그의 배는 3척밖에 남지 않았다. 4월 필리핀 군도 중의 세부 섬에 도착하였으나, 마탄 섬 추장과의 싸움에서 패하여 그곳에서 죽었다.

마지노[편집]

Maginot, Andre(1877-1932)

프랑스 군인·정치가. 1910년 이후 하원 의원을 지냈다. 민주 사회 운동파에 속하며, 1913년 육군 차관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중상을 입었다. 1917년 식민상, 1921년 은급상이 되었고, 1922년·1926년·1931년 세 차례에 걸쳐 육군상을 지냈다. 독일의 지크프리트 선에 대항하기 위해, 프랑스의 동부 국경에 난공불락의 요새인 '마지노 선'을 건설하였다. 이것은 세계적인 화제가 되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의 우회 작전과 항공기의 발달 등으로 간단히 돌파되었다.

마치니[편집]

Mazzini, Giuseppe(1805-1872)이탈리아의 혁명가·저술가. 제노바에서 출생하여, 제노바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고 변호사가 되었다. 오스트리아의 압정에 신음하는 조국의 민족 해방과 국토 통일을 위해 혁명 운동을 시작하였다. 1829년 카르보나리 당에 입당하고, 1831년 청년 이탈리아 당을 조직하여 이탈리아 국가 부흥 운동을 위해 활동을 계속하였다. 1849년 로마 공화국을 세웠으나 실패하였다. 두 번이나 사형 선고를 받으면서 평생을 애국 운동에 바쳐, 가리발디·카보우르와 함께 이탈리아 통일 운동의 3걸이라고 불린다. 그는 순수한 정열을 가진 예언적인 인물로서 국가 통일기의 청년들에게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한편 그는 저작자로서도 유명하였는데, 영·프 문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단테의 주석자로서도 이름을 알렸다. 그의 많은 저서 중에서 유명한 <인간 의무론>은, 사회주의의 결점과 경제 정책의 빈곤을 정면에서 말한 것이다. 그는 종교를 기초로 한 정신적·도의적 입장에서 해방론자였다.

마카리오스[편집]

Makarios, Archibishop(1913-1977)

키프로스의 정치가·대주교. 1948년 주교로 임명되고, 1950년 대주교가 되었다. 키프로스의 그리스 병합 운동을 비폭력 투쟁으로 이끌어 그리스계 사람들로부터 '민족의 아버지'로 존경받았다. 1959년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에 성공하고, 같은 해 4월 임시 정부 수상에 취임, 1960년 완전 독립과 함께 대통령에 당선되고, 1968년 재선되었다. 키프로스에 살고 있는 터키계 주민들이 그리스 합병 운동에 반대하여 폭동을 일으켜 그리스와 터키 두 나라 정부 사이에 긴장을 가져왔다. 그는 정책을 바꿔 그리스와의 합병을 반대하고 키프로스의 독립을 지키려 하였다. 그러나 1974년 그리스와 합병을 원하는 에노시스 운동파의 군사 쿠데타에 의해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났다.

마크 트웨인[편집]

Mark Twain(1835-1910)미국의 소설가. 미주리 주에서 출생하여 인쇄공·신문 기자·편집원 등을 거쳐 유머 작가로 알려져 있다. 1865년 <뜀뛰는 개구리>로 문단에 등단하였고, 이어 <순박한 여행기>로 인기를 끌었다. 생활의 체험을 소재로 한 많은 작품을 발표하여, 그 속에 자연 존중, 물질 문명의 배격, 사회 풍자 등을 표현하면서 유머와 풍자에 넘치는 작품 경향을 보였다. 뒤에 인류에 대한 절망, 비관론자가 되어 <인간이란 무엇이냐> <보지 못한 소년> 등을 남겼다. 그 밖의 작품으로 <톰소여의 모험> <왕자와 거지> 등이 있다.

마키노 도미타로[편집]

牧野富太郎(1862-1957)일본의 식물 분류학자. 고치에서 출생하여 도쿄 대학 강사를 지냈다. 일본 식물 연구에 종사하고, 1927년 학위를 받았다. 일본인으로 일본 식물에 학명을 붙인 최초의 사람으로, 그의 명명에 의한 일본 식물은 신종 1,000종, 신변종 1,500종에 이른다. 1936년 과거 50년 동안의 연구를 집대성한 <마키노 식물학 전집>을 완성하였다.

마키아벨리[편집]

Machiavelli, Nicollo(1469-1527)이탈리아의 정치학자·역사학자. 피렌체의 가난한 귀족 가정에서 출생하여 피렌체의 공화국 10인 위원회의 서기장이 되었으며, 외교 사절로서 신성 로마 제국 등에 파견되었다. 외교와 군사 방면에서 크게 활약하였으나, 1512년 정계에서 물러나 독서와 글을 쓰며 지냈다. 1513년 발표한 <군주론>에서는 위대한 군주와 강한 군대, 풍부한 재정이 국가를 번영하게 하는 것이고,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 군주는 어떠한 수단을 취하더라도 허용되어야 하며, 국가의 행동에는 종교 및 도덕의 요소를 첨가할 것이 아니라는 마키아벨리즘을 발표하였다. 이러한 그의 정치 사상은 일찍부터 격렬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저서에 <로마 사론> <전술론> 등이 있으며, 또 희곡 <만드라 골라>는 이탈리아 연극 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걸작이다.

마테오 리치[편집]

Matteo Ricci(1552-1610)이탈리아의 제수이트파 선교사. 1571년 입교하여 동양에 전도할 뜻을 품고, 1578년 인도로 건너갔다. 1582년 본국으로부터 중국에 포교하라는 지시를 받고 아오먼(澳門:마카오)에 이르러 사오저우(韶州)·난창(南昌) 등지를 다니면서 선교에 힘썼다. 1587년 난징(南京)으로 가 고관 명사들에게 천문·지리·수학을 가르쳤다. 1601년 신종 황제를 만나 황제의 호의로 선무문(宣武門) 안에 천주교당 건설을 허가받았다. 1605년 베이징에 교회당을 세우고 200여 명의 신도를 얻어, 비로소 천주교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는 천주교 서적을 저작하는 한편, 서광계·이지조의 협력을 얻어 과학 기술 서적을 번역하였으며, 중국 최초의 세계 지도로서 유명한 '곤여만국전도'를 제작하였다. 그는 일생을 중국에서 활약하였다. 중국 이름은 이마두(利瑪竇)이다. 우리나라 실학파 학자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마티스[편집]

Matisse, Henri(1869-1954)

프랑스의 화가. 피카소와 함께 '20세기 최대의 화가'로 일컬어진다. 북프랑스 카토에서 출생하였다. 22세 때 파리로 나가 그림 공부를 하고, 1893년 파리 국립 미술 학교에 들어가 구스타프 모로에게서 배웠다. 이 무렵 세잔·고흐·고갱에게 끌려 그들의 채색 방법에 강한 공감을 느꼈다. 1904년 무렵에 전부터 친분이 있는 피카소·드랭·블라맹크 등과 함께 20세기 회화의 제일보로 불리는 야수파 운동에 참가하여, 그 중심 인물로서 활약하였다. 1910년경부터 피카소 등의 입체파의 영향을 받아 엄격한 구성과 단순화에 관심을 기울이고, 독자적 화풍을 전개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후에는 주로 니스에 머무르면서, 모로코·타히티 섬을 여행하였다. 만년에는 색도 형체도 단순화 되었으며, 밝고 순수한 빛의 광휘와 청순 명쾌한 선에 의하여 훌륭하게 구성된 평면적인 화면은 '세기의 경이'라고까지 평가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착수하여 1951년에 완성한 반(Vannes) 예배당의 장식은 세계 화단의 새로운 기념물이다. 그는 조각·동판화에도 능하였고, 직물의 디자인, 삽화 등 새로운 분야도 개척하였다. 대표작으로 <춤> <젊은 선원>이 있다.

마하비라[편집]

Mahavira(기원전 448-376)

인도의 종교가·자이나교의 시조. 30세에 출가하여 12년 동안 고행하면서 큰 깨달음을 얻었다. 그의 교리는 물질을 영혼으로부터 멀리하고 살생을 금하였다. 불교와 같은 지방에서 발달되어 지금도 서북 인도에 100여만 명의 신도가 있다.

마호메트[편집]

Mahomet(570-632)

아라비아의 예언자·이슬람교의 창시자. 아라비아의 메카의 명문 귀족의 집안에서 출생하였다. 일찍이 부모를 잃고 큰아버지 집에서 자랐다. 12세 때 큰아버지를 따라 시리아로 가는 상인들 틈에 끼어 가서 크리스트교 수도사를 사귀게 되었다. 그는 유대교와 크리스트교를 통하여 종교에 눈을 뜨기 시작하였으며, 인간의 괴로움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였다. 그 당시 아라비아 사회는 우상 숭배와 여러 잡신을 섬기며, 종족 사이에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610년 메카 근처에 있는 히라 산의 동굴에서 명상에 잠기던 중, "마호메트여, 그대는 알라 신의 사도이다"라는 계시를 받았다. 이때부터 하늘의 계시에 의하여 유일신 알라의 전지 전능, 만물의 창조, 최후의 심판 및 천국과 지옥 등을 주장하고, 자신이 '알라의 사자'라고 믿어 포교를 시작하였다. 그는 잡신을 배격하고 알라 신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설교함으로써 부유한 상인들의 미움을 받았다. 이에 신도들을 메디나로 피난시키고, 자기 혼자 메카에 남아 포교 활동을 계속하였다. 622년 그도 메카를 떠나 메디나로 갔는데, 이것을 신도들은 '헤지라(성천)'라 하며 그 해를 이슬람교의 기원으로 하였다. 메디나 시대에 이슬람 교단의 예언자이며, 정치적 지배자, 무장(武將)이기도 한 그는 계속 하늘의 계시를 전하였다. 한편 종교법, 사회적·경제적 여러 규정을 정함과 동시에 메카와 시리아의 통상로를 위협하고, 624년 해마다 메디나를 공격하는 메카 군을 메디나 남서에서 격파함으로써 교도의 사기를 크게 높였다. 630년 메카에 입성하여 카바 신전의 우상을 모두 파괴하면서, 그는 "진리는 왔고, 거짓은 멸망하였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는 이슬람교를 포교하는 데는 나라의 힘이 강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한 손에는 <코란>, 한 손에는 칼'을 주장하며 아라비아 반도 대부분을 통일하였다. 632년 이슬람교로써 아라비아 세계의 정치적 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원정을 계획하던 중 병사하였다. 그의 사상은 <코란> 속에 잘 나타나 있는데, 그것은 그가 말한 알라의 계시를 그의 제자들이 기록한 것으로, 6신 등을 중심으로 하는 교리를 5행에 의하여 터득하려는 것이다. 이슬람교는 계율이 엄하고, 신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며, 종파의 확고한 구분은 있으나 교리의 올바른 본질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함으로써, 신앙이 인간의 생활을 규율에 맞게 지켜준다고 한다.

막사이사이[편집]

Magsaysay, Ramon(1907-1957) 필리핀의 정치가. 1932년 필리핀 공과 대학을 졸업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미국 군대와 함께 항일 투쟁을 하였다. 전쟁이 끝나자 군정 장관을 거쳐, 1950년 국방 장관이 되었으며, 1953년 대통령이 되었다. 뛰어난 정치력과 청렴 결백한 인격으로 필리핀 발전에 많은 공을 세웠다. 1957년 비행기 사고로 같이 타고 있던 많은 관리들과 함께 순직하였다. 자유를 위한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아시아 발전에 이바지하는 사람에게 주는 '막사이사이상'이 제정되었다.

막시밀리안 1세[편집]

Maximilian Ⅰ(1459-1519)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재위 1493-1519). 교묘한 혼인 정책과 외교로 영토를 확장하여 합스부르크 가 번영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부르고뉴 공의 후손과 결혼하여 그 공국을 차지하는 한편, 에스파냐 왕에게 딸을 시집 보내 왕위 계승을 꾀하고, 오스트리아의 옛 영토를 회복하였다. 그는 인문주의의 신봉자로 학자와 문인을 우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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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n, Thomas(1875-1955)

독일의 소설가·평론가. 독일 최대 작가 중 한 사람으로 뤼베크에서 출생하였다. 유대계인 그는 미국 시민으로서 스위스의 취리히에서 죽었다. 그의 형인 하인리히, 그리고 그의 장남인 클라우스도 유명한 작가이다. 1893년 뮌헨으로 이주하여 보험 회사의 견습 사원이 되었다. 이때 처녀작 <호의>가 잡지에 실리면서 문단에 데뷔하였다. 1901년 부유한 상인의 집안이 4대에 걸쳐 몰락하는 과정을 그린 장편 <부덴브로크스 가의 사람들>을 발표하여 문단에서의 자리를 굳혔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프리드리히와 대동맹> <비정치적 인간의 고찰> <독일 공화국에 대하여> 등 정치적 논설을 발표하고, 점차 구낭만주의적인 반지성주의를 벗어나, 새로운 휴머니즘을 품기 시작하였다. 1924년 12년간의 노력의 결정인 장편소설 <마의 산>을 발표하였는데, 이 소설은 손꼽히는 발전 소설로서 독일 문학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933년 나치스 정권 성립으로 조국을 떠나, 남프랑스·스위스 등을 거쳐, 1938년 미국에 이르렀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높은 휴머니즘의 입장에서 민주주의 옹호를 위해 싸웠다. 사상적인 깊이, 높은 식견, 연마된 언어 표현, 짜임새 있는 구성 등에 있어서 20세기 독일 제일의 작가로 알려져 있다. 1929년 노벨 문학상을 비롯, 괴테 상 등 많은 상을 받았다.

만토바니[편집]

Mantovani, Annunzio(1905-1980) 영국의 작곡가·지휘자. 이탈리아 출신으로 아버지에게서 바이올린을 배웠고, 영국으로 이주하였다. 1931년 탱고 악단을 편성하였고, 제2차 세계 대전 후에는 현악기를 중심으로 하는 교향악적인 악단을 편성하였다. 그는 유행 음악의 편곡과 연주에 새로운 분야를 개척한 무드 음악의 창시자로 세계적인 인기를 모았다.

말라르메[편집]

Mallarme, Stephane(1842-1898)프랑스의 시인. '상징파'의 시인으로, 감정이나 사상을 그대로 나타내지 않고 부드럽게 싸는 느낌이지만 암시적이거나 작품이 많지는 않다. 그의 집에서 매주 열린 '화요회'에서는 발렐·지도·클로델 등 20세기의 프랑스 문학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대표 시집으로는 <목신의 오후> <주사위 던지기> 등이 있다.

말로[편집]

Malot, Hector Henri(1830-1907)프랑스의 소설가·비평가. 잡지의 문예 비평을 담당하면서 가정 소설·소년 소녀 소설을 써서 세계적으로 알려졌다. 작품으로 <집 없는 아이> <사랑의 소녀> <집 없는 소녀> <젊은 사람들의 사랑> 등 가정이나 젊은이들을 위한 소설이 많다.

말피기[편집]

Malpighi, Marcello(1628-1694)이탈리아의 생물학자·의사. 생물 해부학에 처음으로 현미경을 사용하여, 모세 혈관과 피 속의 붉은 피톨을 발견하였다. 곤충의 기관·사람의 폐·신장의 구조를 연구하고, 신장의 말피기 소체와 곤충 기관의 말피 기관을 발견하였다. 식물의 관찰에도 힘써 <식물 해부학>을 지었다.

망사르[편집]

Mansart, Jules Hardouin(1646-1708) 프랑스의 건축가. 파리에서 출생하였다. 1674년 루이 14세의 궁정 건축가가 되어, 17세기 전반에 프랑스를 지배한 고전 건축을 17세 후반까지 보급시킨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베르사유 궁전의 본관을 다시 짓고 정원을 설계하였다. 망사르 지붕으로 유명하며, 작품에 <성내 예배당> <여왕의 계단> 등이 있다.

매디슨[편집]

Madison, James(1751-1836)

미국의 정치가·제4대 대통령. 뉴저지 주에서 출생하여, 프린스턴 대학을 졸업하고 독립 혁명의 지도자가 되었다. 버지니아 식민지 의회 의원을 거쳐, 대륙 회의 버지니아 대표로 미국 독립 전쟁에 참가하였다. 1809년 제퍼슨의 뒤를 이어 제4대 대통령이 되고, 중임하였다.

매클레이[편집]

Maclay, Robert Samuel(1824-1907) 미국의 선교사·교육자. 펜실베이니아 출생으로, 1848년 중국에 부임하여 주로 푸저우(福州)에서 활동하고, 후에 일본으로 건너가 선교 활동을 하였다. 이때 당시 일본에 가 있던 김옥균과 사귀게 되었다. 1884년 김옥균과 함께 우리나라에 온 그는, 고종의 허락을 받아 선교 활동을 하면서, 스크랜튼·아펜젤러 등을 우리나라에 오게 하였다. 저서에 <각세문> <신덕통론> 등이 있다.

매클로드[편집]

Macleod, John James Rickard(1876-1935)

영국의 생리학자. 스코틀랜드 출생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오하이오 주의 클리블랜드 대학 교수로 있다가, 캐나다의 토론토 대학을 거쳐 영국으로 돌아와 고향의 애버딘 대학 교수를 지냈다. 반팅과 함께 당뇨병의 연구를 하여 글리코겐이 포도당이 되는 것을 억제하는 '인슐린'이란 호르몬을 발견, 1923년 반팅과 함께 노벨 의학·생리학상을 받았다.

매킨리[편집]

Mckinley, William(1843-1901)미국의 제25대 대통령(재임 1897-1901). 스코틀랜드계이며, 오하이오 주에서 출생하였다. 1861-1865년 남북 전쟁에 종군하고, 전쟁 후에 변호사를 개업하였다. 1877년 하원 의원이 되고, 1890년 매킨리 관세법을 제안하여 가결시켰다. 1896년 공화당 후보로 대통령에 당선된 후, 쿠바의 반란을 원조, 1898년 미국·에스파냐 전쟁에 의해 필리핀과 푸에르토리코를 얻었고, 쿠바 독립 성취 등의 성과를 올렸다. 1900년 하와이의 병합, 금 본위제의 확립 등으로 같은 해 재선되었으나, 무정부주의자에게 저격당하였다.

맥도널드[편집]

MacDonald, James Ramsay(1866-1937)

영국의 정치가. 스코틀랜드의 농가에서 출생하여 독학으로 공부하였다. 1884년 런던으로 이주, 1884년 독립 노동당에 가입하였고, 1911년 당수가 되었으나, 제1차 세계대전의 참전을 반대하고 사임하였다. 1924년 영국 사상 최초의 노동당 내각을 조직하여, 수상 및 외상을 겸임하였다. 1929년 재선되었으나, 당시 세계 공황으로 인한 실업자의 격증, 재정 위기 등을 해결하지 못하여 노동당의 반대를 받고 사직하였다. 1931년 총선거에서 국민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수상이 되었다. 1932년 오타와 회의, 런던 군축 회의, 제네바 회의, 1933년 런던 세계 경제 회의 등에서 활약하였다. 후에 수상직을 보수당 볼드윈에게 양보하였으며, 남미 여행중에 사망하였다. 그는 평화주의자로서 알려져 있으며, 공산당을 배척하였다.

맥밀런[편집]

Macmillan, Harold(1894-1986)영국의 정치가. 런던에서 출생하여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하고, 1924년 보수당 하원 의원이 되었다. 그 후 국방·외무 장관 등을 지내고, 1957년 이든 수상 뒤를 이어 수상직에 올라 미국과의 협력 체제를 강화하면서 동서 냉전을 완화시키는 데 노력하였다. 1963년 병으로 수상직에서 물러나 맥밀런 출판회사 사장이 되었다.

맥스웰[편집]

Maxwell, James Clerk(1831-1879)영국의 물리학자. 에든버러에서 출생하여, 에든버러·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배우고, 애버딘·런던·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교수를 지냈다. 케임브리지 대학에 케번디시 연구소를 창립, 그 초대 소장이 되었다. 1860년 기체 분자의 속도 분포 법칙을 이론적으로 나타내었고, 기체의 점성 계수에서 기체의 평균 자유 행로를 산출하였다. 1865년 패러데이의 전자 기장의 연구를 기초로 하여 '맥스웰의 기초 방정식'을 유도하여 전자기학 이론 체계를 수립하였으며, 빛의 전자 이론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맥심[편집]

Maxim, Sir Hiram Stevens(1840-1916) 영국의 발명가. 미국 메인 주 출생으로 14세 때 운반차 제조 공장의 견습공으로 들어가 램프 용의 가스 연소법을 완성하고, 전등을 비롯한 전기 기구를 개량하였다. 1884년 맥심 기관총을 발명하였으며, 그 후 영국에 귀화하였다. 그의 발명은 100가지도 넘는데, 그 중에 특히 유명한 것은 연기가 나지 않는 화약의 발명이었다.

맥아더[편집]

MacArthur, Douglas(1880-1964)미국의 군인. 아칸소의 리틀로크에서 출생하여 육군사관학교와 육군 대학을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일본·필리핀 등지에서 근무하였고 제1차 세계대전 때는 참모 장교로서 종군하였다. 1919년 육군사관학교 교장이 되고, 이어 육군 소장, 육군 대장, 육군 참모총장이 되었다. 1935-1937년 필리핀 정부 최고 군사 고문을 지냈고, 1937년 퇴역하였다. 1941년 현역에 복귀함과 동시에 필리핀 주재 미국 극동군 사령관이 되었다. 1942년 서남 태평양 방면 연합군 총사령관이 되고, 1944년 원수가 되었다. 1945년 일본군을 격파하고 필리핀에 상륙하였으며, 이후 대일(對日) 점령 연합군 최고 사령관으로서 도쿄에 머물면서, 일본의 민주화의 자립 재건을 위해 탁월한 업적을 쌓았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유엔 군 총사령관에 취임하여 인천 상륙 작전 등의 빛나는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중공군이 개입하자 만주 폭격과 중국 연안 봉쇄, 국부군의 활용 등을 주장하다가 트루먼 대통령과 대립되어 1951년 해임되었다. 귀국 후 레밍튼 랜드 회사 사장에 취임하여 조용한 만년을 보냈다. 우리나라에서의 전공을 기념하기 위하여 1956년 인천에 동상을 건립하였다.

맬서스[편집]

Malthus, Thomas Robert(1766-1834) 영국의 경제학자. 인구론자로 유명하며 세계 최초의 경제학 교수로 불린다. 서리 주에서 출생하여,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하고, 앨버리에서 부목사가 되었으며, 재임중에 '인구론'을 발표하였다. 후에 사망할 때까지 헤일리 베리 동인도대학 교수로 지냈다. 그는 '인구론'에서 인구의 자연 증가는 기하 급수적인데, 식량의 생산은 산술 급수적이므로, 인간의 빈곤은 자연 법칙의 결과라 하고, 이것으로써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합리화하여 사회주의적 사상에 반격을 가하였다. 또 그의 <경제학 원리>는 리카도에 반대하여 부·노동·가치·차액 지대·공황 등에 관한 자기 주장을 서술한 것인데, 전적으로 지주 및 자본가를 옹호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는 영국 경제학에 있어서 스미스·리카도와 함께 대표적인 고전파 경제학자로 꼽힌다.

맹자[편집]

孟子(기원전 372년경-289년경)

중국 전국시대의 사상가·유학자. 산둥(山東) 성추 현에서 출생하였다. 이름은 가, 자는 자여, 또는 자거이다. 어릴 때부터 공자를 숭배하고, 공자의 사상을 발전시켜 유교를 후세에 전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어머니는 삼천지교·단기지계 등으로 유명한 현모로서, 어머니에게서도 큰 감화를 받았다. 그의 윤리설 및 정치설의 중심 사상은 성선설로서,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선하며 이것이 마음의 본질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잔인한 것을 보았을 때는 측은한 생각, 추악한 행동을 부끄럽게 여기는 수치심, 어른에 대해 공경하고 사양하는 마음, 선악을 식별하는 시비의 마음의 4가지를 인·의·예·지로써 설명하여, 이것이 존재하는 한 원래 '인간의 마음이 선하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하였다. 사람이 악한 일을 하게 되는 것은 외부의 영향을 받아 물욕에 빠지기 때문이라고 하였으며, 학문의 방법에 있어서는 선천적인 선한 성질을 잘 길러서 물욕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다. 정치설에 있어서는 공자와 거의 같으나, 시대적인 변화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즉, 공자가 존주론을 주장한 데 반하여 맹자는 민권주의로 발전하여 아무리 군주라도 덕을 잃었을 때는 대체할 수 있다는 혁명론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성선설에 입각하여 왕도론·교화론을 주장하는 한편, 주나라의 문왕을 이상으로 하여 정전법의 실시를 주장하였다. 그의 학설은 실현되지 못하였으나, 공자의 인의설을 확장하고 유학의 이론적 기반을 세운 면에서 높이 평가된다. 현재 남아 있는 <맹자> 7권은 맹자가 직접 쓴 것이라지만, 문하생들에 의하여 기술된 것이 아닌가 하는 설도 있다.

맹호연[편집]

孟浩然(689-740)

중국 당나라의 시인. 이름은 호이며, 자는 호연이다. 샹양(襄陽) 사람으로 절개와 의리를 존중하였다. 한때 루먼 산(鹿門山)에 숨어 살면서 시 짓는 일을 매우 즐겼다. 40세 때 장안(長安)에 나가 시로써 이름을 날리고, 왕 유·장구령 등과 사귀었다. 그의 시는 왕 유의 시풍과 비슷하며, 도연명의 영향을 받아 5언시에 뛰어났다. 격조 높은 시로 산수의 아름다움을 읊어 왕 유와 함께 '산수 시인의 대표자'로 불린다. 맹샹양(孟襄陽)으로도 불리며 저서에 <맹호연집> 4권이 있다.

머도크[편집]

Murdocke, William(1754-1839)영국의 발명가. 증기 기관을 개량하여, 1784년 증기 기관차의 모형을 처음으로 만들었으며, 증기총 등을 발명하였다. 1829년 석탄 가스 등을 조명용으로 사용하는 데 성공하였다.

머독[편집]

Murdoch, Iris(1919- ) 영국의 여류 소설가.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태어났다. 옥스퍼드 대학 졸업 후, 오랫동안 모교에서 철학을 강의했다. 처음에는 <사르트르론>(1953)을 썼으나, 후에는 소설 창작에 전념하여, 현대 영국의 대표적인 소설가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그의 작품 경향은 다양하여 대표작이라고 평가된 <종(鍾)>(1958), <소박한 장미>(1962)와 같은 시정이 풍부한 작품과, <잘린 목>(1961)과 같이 복잡하고 위험한 인간 관계를 그린 것도 있다. 이 밖의 작품에 처녀작인 <그물 속>(1954)을 비롯하여 <요술쟁이로부터의 도주> <모래성> <유니콘> <수녀와 병사> <철학자의 제자들> 등이 있다.

머피[편집]

Murphy, William Parry(1892-?)

미국의 의사. 위스콘신의 스토튼에서 출생하여 오리건 및 하버드 대학을 마치고, 1923년 보스턴에서 개업하였다. 악성 빈혈의 치료에 간장(肝臟) 식이 요법을 고안하였다. 이것이 오늘날의 간장 익스트랙트 치료법의 선구가 되었다. 1934년 마이너트 및 휘플과 함께 노벨 의학·생리학상을 받았다.

먼로[편집]

Monroe, James(1758-1831)

미국의 정치가·제5대 대통령(재임 1817-1825). 버지니아 주 출신으로 18세 때 독립 전쟁에 종군하고, 후에 정계에 들어가 상원 의원·프랑스 공사·버지니아 주 지사·국무 장관 등을 역임하였다. 1816년과 1820년 2차례, 공화당 선출의 대통령이 되었다. 1823년 먼로 교서를 발표하여 "미국이 유럽 여러 나라의 싸움에 간섭하지 않는 대신, 유럽 여러 나라도 미국에 간섭하지 말라"는 '먼로주의'를 제창하였다. 이것은 미국 외교의 근본이 되는 정책으로 계속 이어져 내려왔다. 또 에스파냐로부터 플로리다 지방을 사들이고 미주리 협정을 맺었다.

멀러[편집]

Muller, Hermann Joseph(1890-1967)미국의 유전학자. 뉴욕에서 출생하여, 컬럼비아 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 강사를 거쳐 텍사스 대학 교수가 되었다. 한때는 러시아를 방문하여 모스크바 유전학 연구소에서 유전학을 연구하다가, 1937년 루이센코와의 논쟁으로 인하여 귀국하였다. 모건의 제자이며 모건 학파의 유전학자로서, 유전자의 이론 및 돌연변이의 연구로 알려져 있다. 파리에 X선을 쬐어 인위적으로 돌연변이가 일어나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1946년 노벨 의학·생리학상을 받았다.

메뉴인[편집]

Menuhin, Yehudi(1916- )

미국의 바이올린 연주가. 뉴욕에서 출생하여, 4세 때부터 샌프란시스코에서 퍼싱어에게 배우고, 7세 때 샌프란시스코 관현악단의 독주자로 데뷔하였다. 9세 때 파리에서 에네스코, 스위스에서 부시에게 배운 후, 파리에서 라무루 관현악단과 함께 연주하였다. 귀국 후 12세에 뉴욕 교향악단의 독주자로서 베토벤의 협주곡을 연주, 천재 소년의 명성을 얻고, 세계 각국을 순회하면서 연주하여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바이올린 연주가 중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메디치[편집]

Medici, Lorenzo(1449-1492)

이탈리아의 정치가·시인. 피렌체의 명문 메디치 가 출신으로, 15세기 최대의 정치가로 꼽히고 있다. 바쁜 정치 생활을 하면서도 많은 문학 작품을 썼다. 어려서부터 고전 문학과 13·14세기 이탈리아 문학에 대해 공부하였다. 그의 시는 여러 종류의 다양한 경향을 나타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즉 <사랑의 수풀>은 비가적 엘레지 시풍이고, <콘초니에레>는 청신체풍이며, <코린토스>는 목가풍이다.

메르카토르[편집]

Mercator, Gerhardus(1512-1594)

네덜란드의 지리학자. 아피아누스에게서 배우고, 1534년 루뱅에 지리학 연구소를 설립, 플랑드르 지방을 측량하여 지도를 만들었다. 프톨레 마이오스·클라우디우스의 방법에 의하여 1538년 세계 지도를 제작하였으며 지구의와 천구의도 만들었다. 1569년 '메르카토르 투영 도법'에 의한 세계 지도를 제작하였는데, 이 도법은 방위를 바르게 표시하고, 항해에 편리하여 항해 도법으로 불린다. 1558년 이전에 나온 지도들을 기초로 하여 대지도를 계획하였으나, 이 일은 그의 아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메리 1세[편집]

Mary Ⅰ(1516-1558)

영국의 여왕(재위 1553-1558). 헨리 8세와 캐서린 왕비의 딸로, 이복 동생 에드워드 6세의 치하에서 가톨릭 신앙과, 통일령 및 신기도서의 거부로 박해를 받았다. 1552년 에드워드 6세가 죽은 후 1553년에 즉위하였다. 그는 구교를 부활하고 이단자 탄압의 여러 법을 부활, 크랜머·래티머 등을 비롯하여 재위 중에 약 300인의 신교도를 처형하여 '피비린내 나는 메리'로 불리었다. 1558년 프랑스와의 싸움에서 200여 년이나 영국의 대륙 최후의 영토였던 칼레를 잃었다.

메리 2세[편집]

Mary Ⅱ(1662-1694)

영국의 여왕(재위 1689-1694). 제임스 2세의 장녀로, 신교도로서 교육받고 1677년 네덜란드의 오렌지 공(公) 윌리엄과 결혼하였다. 아버지 제임스 2세가 구교를 국교로 하고 전제 정치를 하려 하자 이에 반대하여, 국민은 신교도인 메리를 새로운 왕으로 앉히려 하였다. 1688년, 마침내 의회의 지도자들은 메리와 남편을 왕으로 추대하였다(명예 혁명). 의회는 메리 여왕과 윌리엄 공에게, 의회와 인민의 권리를 굳게 지킬 것을 약속하게 하였다(권리장전). 이들은 메리 2세, 윌리엄 3세가 되어 함께 나라를 다스렸다.

메이지 천황[편집]

明治天皇(1852-1912)

일본의 제122대 천황. 고메이 천황의 둘째 아들로서 이름은 무츠히토(睦仁), 교토(京都)에서 출생하였다. 무력으로 실권을 누려 오던 도쿠가와 막부를 타도하고 집권하였다. 수도 에도를 도쿄로 옮기고, 연호를 메이지로 정하였다. 헌법을 처음으로 펴고, 국회를 열어 천황을 중심으로 한 근대적인 국가의 기틀을 세웠다. 서양 문화를 받아들이고 일본을 모든 면에서 근대적으로 발전시키는 데 힘썼다. 한편 청일 전쟁·러일 전쟁·한국 강점 등을 통해 강대한 군사적 제국주의를 만들었다. 일본을 근대화시켜 국민들로부터 존경받았으나, 국내의 반(半)봉건적 여러 관제와 국민 생활의 빈곤은 변함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정부는 항상 인민 반항의 위협을 받았는데, 그때마다 탄압하였다. 그러자, 1910년 천황 암살을 기도한 고토쿠 사건이 일어났다.

메치니코프[편집]

Mechnikov, Il'ya Il'ich(1845-1916)

프랑스의 생물학자·세균학자. 유대계 러시아인으로, 하르코프 출생. 하르코프 대학 졸업 후 원형질을 연구하기 위하여 독일 뷔르츠부르크 대학에 입학하였다. 1870년 오데사 대학 교수를 거쳐, 1888년에는 파스퇴르 연구소에 들어가 파스퇴르 밑에서 세균학과 면역학을 연구하다가 백혈구의 식균 작용과 면역과의 관계를 발견하였다. 또한, 인간의 노화 현상을 연구하여 유산균을 먹으면 노화가 방지된다고 주장하였다. 1908년 에를리히와 함께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메테르니히[편집]

Metternich, Klemens Wenzel Lothar von(1773-1859)

오스트리아의 정치가·외교가. 명문 귀족 출신으로 프랑크푸르트, 마인츠에서 공부하였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네덜란드 총독으로 있는 아버지를 도와 혁명을 막는 데 힘썼다. 1803년 드레스덴 주재 공사를 거쳐, 프랑스 대사가 되었다. 1809년 오스트리아·프랑스 전쟁을 일으켰으나 패하였다. 1814년 나폴레옹이 몰락하자 유럽 문제를 논의하는 의장이 되었는데, 이때 능숙한 외교 정책으로 오스트리아의 위신을 회복시켰다. 1821년 재상, 1826년 내각 회의 의장이 된 후, 거의 권력을 장악하였다. 그는 보수적이어서 프랑스 혁명이나 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동시에, 독일 및 이탈리아의 국민적 통일을 두려워하고, 신성 동맹을 이용하여 제국의 자유와 통일 운동에 무력적인 간섭을 하였다. 1848년 혁명이 일어나 실각한 후 영국에 망명하였다. 1851년 귀국하여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정치적 상담 역할을 하였다.

멘델[편집]

Mendel, Gregor Johann(1822-1884)오스트리아의 식물학자·유전학자. 슐레지엔의 소도시인 하이첸도르프에서 농부의 아들로 출생하여, 농사와 원예 일을 도우며 자연과 친하게 지냈다. 독학으로 올뮈츠에 있는 학교를 22세가 되어서 졸업하였다. 졸업 후 곧 브륀 교회의 목사 후보자로 들어가 부목사를 거쳐 목사가 되었고, 고등학교 교사도 지냈다. 1854년 브륀 국립 실과 학교의 자연 과학 교사가 되었으며, 1856년부터는 교회에 있는 조그마한 뜰에서 완두를 재료로 하여 유전에 대한 실험을 시작, 7년 후 '멘델의 법칙'을 발견하였다. 이 사실을 1865년 브륀의 자연 과학 협회의 정례회에서 발표하고, 그 논문은 따로 인쇄하여 발표하였다. 그러나 그의 이론은 1900년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사람들에게 이해되었다. 그동안 식물에 대한 225회에 이르는 인공 교배를 하여 1만 2,000종의 잡종을 얻었으며, 계속 실험에 열중하였다. 1868년 주교가 되었으나 1872년 공포된 교회 과세법에 반대, 정부와 대립하여 전 재산을 몰수당하였다. 만성 신장병으로 고생하는 등 불우한 가운데 일생을 마쳤다. 그러나 그가 죽은 뒤 그의 예언대로 멘델의 법칙이 학계에 받아들여졌다. 1910년 브륀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으며, 그곳은 '멘델 광장'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만년에 그는 "나의 시대는 반드시 온다"라고 말하였다고 하는데, 사실 그의 업적은 유전과 진화의 문제를 해석하는 데 있어 획기적인 대발견이었으며, 그에 의하여 유전학이 창시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실험은 그 계획의 교묘함과 실험의 정확성, 자료 처리법이 탁월한 점, 논리가 명쾌한 점 등 생물학 사상 가장 뛰어난 실험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멘델레예프[편집]

Mendeleev, Dmitrii Ivanovich(1834-1907)

러시아의 화학자. 토불스크 출생. 페테르스부르크 사범 학교에서 자연 과학을 공부했다. 1855년 졸업 후에 오데사 등의 중학교 교사가 되었다. 이듬해 페테르스부르크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하고 강사가 되었으며. 1859년 이후 파리·하이델베르크 등지에서 공부를 계속했다. 1861년 귀국해 실험에 몰두하며 페테르스부르크 대학 교수를 지냈다. 1869년 원소의 주기율을 발표하였으며, 이때에 제작된 원소 주기율표는 오늘날까지 이용되고 있다. 한편 석유가 어떻게 생겨났는가에 관한 독특한 학설도 발표하여 물리·화학 분야에 큰 업적을 남겼다.

저서로 <화학 원론> 등이 있다.

멘델스존[편집]

Mendelssohn, Felix(1809-1847)독일의 작곡가. 유대계인 은행가의 아들로 함부르크에서 출생하였다. 어릴 때부터 충분한 음악 교육을 받아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나타냈다. 3세 때 베를린으로 이주, 당시의 대작곡가들과 만날 수 있었고, 17세 때 <한여름 밤의 꿈>의 서곡을 발표하여 작곡가로서 이름을 날렸다. 1843년 라이프치히 음악원을 창립하고, 이어 프로이센 국립 음악장, 라이프치히 대학 명예 박사가 되었다. 그의 일생은 실로 작곡과 연주의 연속이었다. 그는 슈베르트와 같은 생활의 고통이 없이 비상한 재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었는데, 그것이 작품상에 나타나, 명쾌하고도 아름다운 음악이 되었다. 그는 색채적이며 우아한 낭만적인 작품을 많이 남겼는데, 그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베토벤·브람스의 곡과 함께 3대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손꼽힌다. 그의 유명한 작품은 바흐의 고전 음악 연구에서 배워 얻은 바가 많고, 바흐를 세상에 소개한 공적은 실로 크다. 그는 낭만파의 선구자로, 신고전파의 길을 지시한 것으로서, 음악 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주요 작품에 <스코틀랜드 교향곡> <핑갈의 동굴> <고요한 바다와 즐거운 항해> 등이 있다.

멜란히톤[편집]

Melanchthon, Philipp Schwarzert(1497-1560)

독일의 신학자. 루터의 종교 개혁 운동의 지도급 인물로서 복음적 기독교의 확립을 위하여 투쟁하였다.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수로 있으면서, 신교 신학의 기초를 세우는 데 노력하였다. 저서에 <신학 강요>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 등이 있다.

멜빌[편집]

Melville, Herman(1819-1891)

미국의 소설가. 뉴욕 무역상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하자 18세 때부터 선원이 되어 배를 탔다. 포경선의 선원 생활을 하던 중, 배에서 도망나와 식인종이 살고 있는 섬에서 지내다가 미국 군함에 구조되어 돌아온 일도 있다. 그의 작품은 대개 이러한 선원 생활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것으로, 당시에는 별로 평판이 좋지 않았으나, 1920년경부터 갑자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백경>은 세계 10대 소설에 들어가는 뛰어난 작품이다. 작품으로 <타이피 족> <오무> <마디> <흰 재킷> 등이 있다.

모건[편집]

Morgan, Thomas Hunt(1866-1945)미국의 동물학자. 고향인 켄터키의 주립 대학을 마치고, 1890년 학위를 받았다. 1891-1904년 브린모어 여자대학교를 거쳐, 1904-1928년 콜럼비아 대학 교수, 캘리포니아 대학 이공과 대학 생물학 실험 소장 등을 역임하였다. 처음에는 실험 발생학을 연구하였으나, 후에 초파리를 재료로 하는 유전학을 연구하고, 유전자설을 확립하였다. 또 유전학과 발생학을 통일하려 하고, 유전자설로 진화를 완전히 설명할 수 있다고 믿었다. 1933년 유전학 연구로 노벨 의학·생리학상을 받았다. 저서로 <실험 동물학> <유전자설> <진화와 적응> 등이 있다.

모네[편집]

Monet, Claude(1840-1926)

프랑스의 화가. 인상파의 개척자이며 지도자로, 파리에서 출생하여 소년 시절을 르아브르에서 보냈다. 그곳에서 부댕의 문하생이 되어 정식 미술 교육을 받게 되었다. 그 후 1859년 파리로 나가 피사로·시슬레·르누아르·바질 등과 사귀게 되었다. 마네의 밝은 화풍에 끌려 밝은 야외 광선 묘사에 주력하였다. 마네를 중심으로 르누아르 및 피사로·드가·세잔 등과 함께 신예술 창조에 전력하였다. 1871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중에는 런던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터너 등의 작품에 영향을 받아 더욱 밝은 색조에 대한 연구를 하게 되었다. 귀국 후, 1874년 그의 동료 화가들과 함께 제1회 인상파 전람회를 개최하였다. 그러나 출품된 작품이 물체 본래의 색깔을 쓰지 않고, 신선하고 밝은 색채로만 그려진 데 대해 비난과 공격이 쏟아졌다. 특히 모네의 <해돋이 인상>이 가장 심한 비난을 받았는데, '인상파'라는 말은 이 때 모네의 작품을 야유한 데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주요 작품에 <짚단> <수련> <생 타들레스의 테라스> <루앙 성당> <템스 강> 등이 있다.

모딜리아니[편집]

Modigliani, Amedeo(1884-1920) 이탈리아의 화가. 베네치아·피렌체 미술 학교에서 공부하고 파리로 나가 세잔의 영향을 받았다. 독립 미술파에 속하며, 파리 화단의 특이한 화가로서 인정되었다. 조각도 하여, 브랑쿠시, 콕토 등과도 사귀었다. 일생을 가난에 시달리고, 몸도 약한데다가 술과 마약을 즐겨 36세에 요절하였다. 파리의 뒷거리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 및 여성의 나체 등을 즐겨 그렸다. 그는 항상 인물만을 그렸는데, 가늘고 긴 목이나 달걀 모양의 얼굴을 가는 선으로 둘러 독특한 기품과 아름다움을 나타냈다. 주요 작품에 <꽃 파는 소녀> <문지기의 아들> <벌거벗은 에리부리> <폴 기용의 초상> 등이 있다.

모로[편집]

Moreau, Gustave(1826-1898)

프랑스의 화가. 파리에서 출생하여 미술 대학을 졸업하고 22세 때부터 그림을 그렸다. 성서의 이야기나 신화를 많이 그려 이름을 날렸다. 매우 화려한 기교로 시적·환상적 표현을 하였다. 후에 미술 학교 교수가 되어 마티스·루오·마르케 등 뛰어난 화가를 배출하였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통일 아랍 왕과 스핑크스> <오르페우스> <프로메테우스> 등이 있다.

모리슨[편집]

Morrison, Robert(1782-1834)

영국의 기독교 선교사. 1789년 런던 전도 학교를 졸업하고 1807년 중국에 건너가 개척 선교사로 일하였다. 1813년 <신약 성서>를 한문으로 번역하였고, 1816년(순조 16) 영국인 바실 흘을 통하여 우리나라에 최초로 <성경>을 전해 주었다. 그가 처음에 중국에서 전도를 할 때 7년 동안이나 걸려서 겨우 한 사람의 신자를 얻었다 한다. 그 후 <구약 성서>와 <영한 사전>을 출판하고, 일생을 중국에서 전도 사업에 바쳤다.

모방[편집]

Maubant, Pierre-Philibert(1803-1839) 프랑스의 선교사. 한국 이름은 나백다록(羅伯多祿). 우리나라에 입국한 최초의 서양 선교사로서, 헌종 3년(1837)에 김대건·최양업 등을 마카오 신학교에 유학시키는 등 조선 교구의 교세 확장에 획기적인 업적을 쌓았다. 그는 1831년 브뤼기에르 주교를 따라 우리나라에 입국하려 하였으나, 국경의 감시가 심하여 만주에 머물렀다. 그 후 브뤼기에르 주교가 죽자, 그는 혼자 삿갓에 상복 차림을 하고 입국하였다. 정하상의 안내로 서울에 들어와 전도에 힘써, 전국 6,000명의 신도를 9,000명으로 증가시켰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앵베르 주교·샤스탕 신부와 함께 순교하였다. 1925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다.

모세[편집]

Moses(기원전 13세기경)

이스라엘의 민족 통일자·입법자. 이스라엘 박해 시대에 이집트에서 태어나 나일 강가에 버려졌으나, 바로의 왕녀에게 양육되어,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 성인이 된 후 이스라엘인 해방 운동을 지도하다가 미디안으로 피신하여 이드로의 딸 십보라와 결혼하여 그곳에서 40년을 살았다. 80세 때 신으로부터 민족 해방의 사명을 받고 형 아론과 함께 이집트로 돌아가 바로에 대항, 바로를 설복시키고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신의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향하여 이집트를 떠났다. 40여 년 간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민족을 지도하였으며, 시내산에 도착하여 신의 말씀을 받아 열 가지 '모세 율법'을 정하였는데 이것이 '십계명'으로, 그 후의 유대 교나 크리스트교의 근본이 되었다.

모스[편집]

Morse, Samuel Finley Breese(1791-1872)

미국의 발명가. 매사추세츠 주에서 출생하여, 예일 학교를 졸업한 뒤, 화가가 되기 위하여 1811년 영국으로 건너가 그림 공부를 하였다. 1815년 귀국하여 열심히 그림을 그렸으나 크게 성공하지 못하였다. 유학중 전자석 연구가인 드나의 영향으로 전신을 연구한 끝에, 1844년 마침내 모스 전신기를 발명하여 워싱턴과 볼티모어간의 전보 통신에 성공하였다. 그의 전신 방식과 모스 부호는 세계적으로 채택되었으며 해저 전신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후에 은판 사진 기구를 발명하였다.

모어[편집]

More Sir Thomas(1478-1535)

영국의 정치가·사상가. 런던에서 출생하여 옥스퍼드 대학에서 그리스어·라틴어·신학 등을, 링컨 법학원에서 법률을 배웠다. 그때 에라스무스와 친교를 맺어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졸업 후 변호사를 개업하였다. 1504년 하원 의원에 선출되고, 1510년 런던 부시장·하원 의장 등을 역임하고, 1529년 최고 관직인 대법관이 되었다. 헨리 8세가 왕후와 이혼하고 앤 볼린과 재혼하여 교황과 대립되자 이에 불만을 품고 퇴임하였다. 왕이 교회의 주권자를 겸임하려는 데 반대한다는 이유로 런던 탑에 투옥된 후 처형되었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 <유토피아>는 가장 살기 좋은 사회를 묘사한 것으로, 사유 재산을 비난하고 사회 평등을 주장하였다. 유토피아는 '아무 데도 없는 나라'를 의미하는 말이었지만, 그의 이 사상은 후세에 큰 영향을 미쳐 소위 '유토피아 문학'을 이루었다.

모용 수[편집]

慕容垂(326-396)

중국 5호 16국 중 후연의 시조. 모용 황의 다섯째 아들로, 352년 오나라 왕으로 책봉되어 이름을 떨쳤다. 369년 동진의 환온이 공격하여 오자 이를 격퇴하였다. 숙부 모용 평이 시기하여 해하려 하므로 전진왕 부견에게 피신한 뒤, 관군 장군이 되어 사방을 정복하고, 386년 스스로 나라를 세워 이름을 후연이라 하였다.

모용[편집]

慕容

중국 연의 왕. 3세기경 만주 지방에서 강한 세력을 가지고 285년경(고구려 서천왕 16) 눙안 부근에 살던 부여족을 멸망시키고 남쪽으로 몰아냈다.

모용 황[편집]

慕容晃(297-348)

중국 5호 16국 중 연의 제2대 왕. 모용씨의 셋째 아들로, 모용 외가 랴오둥 방면에까지 뻗친 세력을 이어받아 영토를 확장하였다. 고구려 고국원왕 21년(342)에 고구려에 침입, 환도성을 공략하였다. 중국 문화를 받아들여 학문을 장려하였다.

모즐리[편집]

Moseley, Henry Gwyn Jeffreys(1887-1915)

영국의 물리학자. 도싯 주 웨이머스 출생. 이튼 대학과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하고, 맨체스터 대학 특별 연구원이 되었다. E. 러더퍼드 밑에서 방사능을 연구하다가 X선 연구로 방향을 바꾸었다. 1913년에는 각 원소의 고유 X선을 측정하여 '모즐리의 법칙'을 발견하여 원소의 분석에 획기적인 방법을 제공함으로써 X선 분광학의 개척자가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가 전사했다.

모차르트[편집]

Mozart, Wolfgang Amadeus(1756-1791)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잘츠부르크의 음악가 집안에서 출생한 그는 어릴 때부터 음악에 대한 재능을 나타내었다. 어려서부터 엄격한 음악 교육을 받아 3세 때 피아노를 연주하였고, 4세 때에는 작곡을 하였다. 6세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유럽 각지를 연주 여행하여 신동이란 소리를 들었다. 여행 중에 우아하고 경쾌한 스타일의 프랑스 음악에 감명받고, 영국에서 바흐의 작품을 접하여 작곡 기술을 배우는 등 많은 영향을 받았다. 1773년에 빈 학파, 특히 하이든의 작품에서 교향곡·협주곡·피아노곡 등 기악곡을 배웠으며, 만하임에 가서 만하임 파의 악기법을 익혔다. 1781년 재능의 발휘와 좋은 취직처 등을 찾아 자주 여행하는 그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엄격한 대주교와 다투고 오랫동안 몸담았던 잘츠부르크의 궁정 악단을 사직하고, 빈에 정주하였다. 이때부터 자유로운 예술가로서 작곡과 연주 활동을 활발히 하면서 하이든과 친교를 맺어, 서로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극한 생활고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아 건강을 해치고 35세에 요절하고 말았다. 그는 감정과 감각이 극도로 예민하여 당시의 각종 음악 양식을 부드러운 태도로 흡수, 여기에 개성의 심오한 특성을 반영하여 독일 고전주의 음악의 정수를 표현함으로써 후세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의 교향곡은 그 개성적 창작이 베토벤에게 이어졌고, 가극은 베버에 의한 독일 국민 가극의 선구가 되었다. 작품으로 오페라 약 26곡, 교향곡 약 67곡, 행진곡 약 31곡, 관현악용 무곡 약 45곡, 피아노 협주곡 약 42곡, 바이올린 협주곡 약 12곡, 회유곡 약 40곡, 그 외 독주곡, 교회용 성악곡, 실내 악곡 칸타타, 미사곡 등 엄청난 작품을 최고의 수준으로 작곡하여 그의 천재성에 감탄을 금치 못하게 했다. 주요 작품 <주피터 교향곡> <피가로의 결혼> <돈 지오반니> <마적> 등과, 최후의 작품 <진혼곡>은 특히 유명하며, 고전 음악을 완성한 음악 사상 보기 드문 천재이다.

모트[편집]

Mott, John Raleigh(1865-1955)미국의 기독교 교육가. 뉴욕 주 출생. 코넬 대학을 졸업하고, 1881-1915년까지 국제 Y.M.C.A.의 학생부 책임자였다. 그 후 동 사무총장, 1926년 Y.M.C.A.의 세계 위원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원조 사업에 대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모파상[편집]

Maupassant, Guy de(1850-1893)프랑스의 작가. 프랑스 자연주의의 대표적인 작가 중 한 사람이다. 노르망디에서 출생하여 플로베르에게서 배우는 한편, 다른 자연주의 작가들과도 교제가 잦았다. 1880년 중편 <비계 덩어리>를 발표하여 이름을 날렸다. 그의 작품은 일반적으로 표면적·물질적이어서 깊은 정신면이 부족하다고 하지만, 무감동한 문체를 통해서 일관한 감수성과 고독감은 인생의 허무와 싸우는 그의 불안한 영혼을 나타내고 있다. 작품으로 <여자의 일생> <벨 아미> <피에르와 장> 등의 장편도 물론 유명하지만, <진주 목걸이> <피피 양> 등의 단편도 잘 알려져 있다.

모펫[편집]

Moffet, Samuel Austin

미국의 선교사·교육자. 1890년 우리나라에 와서 3년간 전도 생활을 하였으며, 평양에서 22명의 전도인에게 성경을 가르친 것이 현재 장로교의 신학교가 되었다. 숭실전문학교 창설에 중심적인 인물이 되었고, 1911년 우리나라 독립 운동가를 체포한 105인 사건 때는 미국 장로회 본부 전도국에 보고하여 국제적인 여론을 일으켰다. 1934년 일제의 탄압 때문에 활동할 수 없음을 깨닫고 귀국하였다. 한국 이름은 마포삼열(馬布三悅)이다.

몬드리안[편집]

Mondrian, Pieter Cornelis(1872-1944)

네덜란드의 화가. 암스테르담의 아카데미에서 공부하고, 1910년 파리로 건너가 피카소의 감화를 받아 입체파풍의 작품을 묘사하다가 추상주의에 참가, 신조형주의를 주장함으로써 지도자적 역할을 하였다. 추상 형태를 궁극에까지 찾아, 모든 대상을 수평선과 그것에 직각으로 교차하는 수직선으로 극도로 추상화하여, 현대 미술의 한 정상을 이루었다. 1936년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에서 일생을 마쳤는데, 그는 현대 예술 전체에 큰 영향을 끼쳤다. 작품에 <콤퍼지션> <수목> <브로드웨이 부기우기> 등이 있다.

몬테베르디[편집]

Monteverdi, Claudio(1567-1643)이탈리아의 작곡가. 크레모나의 의사 집안에서 태어나 16세에 <교회용 합창곡집>을 발표하였다. 1590년부터 만토바 공(公) 빈첸초 1세 아래서 궁정 음악가로서 약 20년 동안을 지냈다. 가극 <오르페오>와 <아리안나>를 작곡하여 명성을 떨쳤다. 1613년 당시 이탈리아 음악가 최고의 영예인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교회당의 악장이 되어 교회 음악의 개량 등에 힘을 쏟았다. 1637년 베네치아에 세계 최초의 공중 가극장이 개관되자, 가극·발레 음악을 발표하여 가극의 창시자로 불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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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hl, Hugo von(1805-1872)

독일의 식물학자. 슈투트가르트에서 출생하여 튀빙겐·뮌헨 대학에서 의학과 식물학을 전공하였다. 식물 세포에 대한 연구로 식물에 있어서도 세포가 생명의 중심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확인하고, 원형질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세포 분열 때의 원형질의 변화·세포막·도관 등에 대한 연구로 세포학의 기초를 이룩하였다. 저서에 <식물 세포의 해부학 및 생리학적 특징>이 있다.

몰리에르[편집]

Moliere, Jean Baptiste Poquelin(1622-1673)

프랑스의 극작가·배우. 프랑스 고전 희극의 완성자로 종교 학교에서 철학과 법률을 배웠다. 1643년 베쟈르 형제와 극단을 조직, 공연하였으나 많은 빚을 지게 되어 고통을 겪었다. 다행히 후원자가 나타나 실력을 쌓았다. 루이 14세 앞에서 <연애하는 박사>를 공연하여 성공, 정기 공연을 허락받았다. 이후 <기분 환자>의 공연 도중 졸도하여 사망할 때까지 수많은 작품을 쓰는 한편, 감독과 배우를 겸하여 활약하였다. 그는 종래의 단순한 희극에서 벗어나 예민한 관찰로 당시의 풍속을 무대 위에 재현시켰으며, 심리 발전을 토대로 하는 성격 묘사, 무대의 조화, 이성과 양식을 존중한 자연스럽고 힘찬 표현에 있어서 뛰어났다. 작품으로 <타르프> <수전노> 등 걸작을 발표하였다.

몰바이데[편집]

Mollweide, Karl Brandan(1774-1825)

독일의 수학자·천문학자. 1805년에 세계 전도(全圖)에 쓰이는 지도 투영법의 하나인 '몰바이데 도법'을 고안하여 발표했다. 이를 호몰로그래프 도법, 또는 타원 도법이라고도 한다.

몰트케[편집]

Moltke, Helmuth von(1800-1891)독일의 군인. 1818년 코펜하겐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프로이센 육군에 입대하여, 베를린 사관학교 연구생을 거쳐 참모 본부에 근무하였다. 1835-1839년 모하메드 2세의 고문이 되어 터키 군대를 프로이센 식으로 개편하였다. 1856년 참모총장이 되어 빌헬름 1세의 강병책과 비스마르크 수상에게 협력하여 프로이센 군을 정비하고 덴마크, 오스트리아, 프랑스 등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1866년 보병 대장, 1871년 야전 장군을 지냈고, 1872년 종신 프로이센 상원 의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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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ugham, William Somerset(1874-1965) 영국의 작가·극작가. 파리에서 출생하여 처음에는 의학을 공부하였으나, 뒤에 문학으로 전향하였다. 그는 동양의 신비에 대한 강한 동경심을 나타내고, 인생관을 강하고 명석한 문체로 묘사하였으며, 특히 기지와 해학이 넘치는 대중적인 풍자 희극의 전통을 세웠다. 제1·2차 세계대전 때에는 정보 기관원으로 활약하였으며, 그 체험을 소설화하기도 하였다. 작품에 <인간의 굴레> <달과 6펜스> <람베스> 등 소설과 <훌륭한 사람들> <순환> 등 희곡이 있으며, 1957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몽고메리[편집]

Montgomery, Lucy Maud (1874-1942) 캐나다 여류 소설가. 캐나다 남동부 세인트로렌스 만에 있는 프린스 에드워드 섬에서 태어났다. 소녀 시절부터 작가가 되려고 하였다. 작품은 향토를 무대로 하여 순진한 소녀가 인생 행로를 걸어가며 꺾이지 않고 성장해 가는 과정을 그린 청춘 소설인 동시에 가정 소설을 많이 썼다. 1908년 발표한 <빨강머리 앤>으로 시작되는 앤 시리즈와 <귀여운 에밀리>로 시작되는 에밀리 시리즈를 포함한 21권의 가정 소설과 시집이 있다.

몽고메리[편집]

몽골피에[편집]

Montgolfier, Joseph Michel(1740-1810)

프랑스의 발명가. 처음에는 건축에 종사하였으나 공기보다 가벼운 기체가 있다는 것을 알고, 동생 자크(Jacques Etienne:1745-1799)와 함께 열을 가한 공기를 넣은 커다란 기구를 높게띄워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1783년 처음으로 사람을 태운 기구를 파리의 하늘에 띄우는 일에 성공하였다.

몽테뉴[편집]

Montaigne, Michel Eyquem de(1533-1592)

프랑스의 사상가·수필가. 몽테뉴라는 마을의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법률을 공부한 후, 보르도 법원에서 법관을 지냈다. 그 후 1571년 고향으로 돌아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1580년 유명한 <수상록>을 완성시켰는데, 그는 이 책에서 인간의 거짓 없는 모습을 그렸다. 그와 같은 인간의 연구가·관찰가를 프랑스 문학사에서는 모랄리스트(인간 연구가)라 부르고 있다. 그는 프랑스의 모랄리스트 문학의 토대를 쌓았을 뿐만 아니라 수필 문학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그는 처음에는 금욕적인 인생관을 가르쳤으나, 천동설이 지동설로 바뀌고, 신대륙이 발견되는 등 상식이 붕괴되자 충격을 받아, 인간 이성의 한계를 주장하면서 개혁을 혐오하고 보수주의를 신봉하였다. 그러나 내심으로는 자유주의를 지지하고, 귀족보다는 농민의 태도를 찬양하였으며, 형식주의적 법 이론을 배척하여 인간애를 고취하는 등 인간의 가치를 추구하였다.

몽테스키외[편집]

Montesquieu, Charles Secondat(1689-1755)

프랑스의 철학자·정치학자·계몽 사상가. 귀족 집안 출신으로 법률을 공부하고, 보르도 고등 법원의 변호사·평정관을 거쳐, 1716년 고등 법원의 원장이 되었다. 1721년 <페르시아인의 편지>라는 글을 발표하여 당시의 정치와 사회를 비꼬았다. 그 후 법률 연구를 위하여 각국을 여행하였는데, 특히 영국 정치의 좋은 점에 감명을 받았다. 1748년 <법의 정신>을 발표하였는데, 이 책에서 그는 법학 연구에 처음으로 역사 법학적, 비교 법학적, 사회학적 방법을 적용하여 법학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또 삼권 분립설, 입헌 군주 제도론 등을 전개하는 한편, 전제주의를 극력 공격하면서 법은 각국의 여러 환경에 적합한 고유한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 정치 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는 디드로, 달랑베르 등이 편찬한 <백과전서>에도 협력하는 등 프랑스 혁명의 사상적 토대를 만드는 데 공헌하였다. 혁명이 시작되자 그의 사상이 실현되는 듯하였으나, 삼권 분립론을 제외하고는 그 영향력을 잃었다.

뫼비우스[편집]

Mobius, Augustus Ferdinand(1790-1868)

독일의 천문학자·수학자. 프로이센에서 무용 교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라이프치히·괴팅겐·할레 등지의 여러 대학에서 수학하고, 라이프치히 대학의 천문학 교수가 되었다. 기하학·역학 분야에서도 많은 연구를 하였으며, 특히 사영 기하학(射影幾何學)의 기초를 세웠다. 그는 또 면의 앞뒤 구별이 없는 '뫼비우스의 띠'에 대한 연구로도 유명하다.

묄렌도르프[편집]

Mollendorf, Paul George Von(1848-1901)

독일의 외교 고문. 할레 대학에서 동양어와 법률을 배우고, 청나라 주재 독일 영사관에 근무하였다. 1882년 청나라 이홍장의 추천으로 우리나라 통리 아문 협판이 되어 외교와 세관 업무를 담당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 때 수구파에 협조하여 한성조약을 체결한 뒤, 일본의 러시아 공사와 합세하여 러시아 세력을 우리나라에 끌어들였다. 한국 이름은 목인덕(穆麟德)이다.

무소르그스키[편집]

Musorgski, Modest Petrovich(1835-1881)

러시아의 작곡가.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 피아노를 공부했으나 군대에 지원, 1856년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군대 생활을 했다. 그러나 곧 청산하고 농노 해방으로 집안이 몰락하자 독학으로 작곡을 공부한 뒤 창작에 몰두하였다. 러시아 국민 음악 5인조의 한 사람으로 글린카의 뒤를 이어 러시아의 국민 음악 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는 작곡가로서 지식은 빈약하였으나, 타고난 음악적 재능이 이것을 채워서 좋은 작곡으로 프랑스 인상파 등 현대의 음악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가극 <보리스 고두노프>, 가곡집 <죽음의 노래와 춤> <아이들 방>, 피아노곡 <전람회의 그림>, 관현악곡 <벌거숭이 산의 하룻밤> 등이 있다.

무솔리니[편집]

Mussolini, Benito(1883-1945)이탈리아의 정치가·혁명가. 히틀러와 함께 독재자의 전형적인 인물로 꼽히는 그는, 대장장이의 아들로 프레답피오에서 출생하였다. 사범 학교를 졸업하고, 1901년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으나, 이듬해 스위스로 떠돌아다니다가 귀국하였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사회당 좌파를 떠나 <이탈리아 인민지>를 발간하면서 참전을 주장하다가 사회당에서 제명되어 혁명 행동단에 가입함으로써 우익 지도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 좌파 사회주의 계열을 격파하려고 국가주의적 단체를 규합 '파시스트 당'을 결성하였다. 1919년 무력 전투적 성격으로 당을 지휘하여 당의 세력을 강화시켰으며, 1922년 국내 혼란을 틈타서 산업 자본가의 원조를 받아 로마로 진군하였다. 스스로 내각을 조직한 뒤, 정치·문화·경제를 개혁하고 강경한 외교 정책으로 국제 연맹과 그리스를 위협하면서 독재 정치를 강화하였다. 1929년 로마 교황청과 '라테란 조약'을 맺고 이탈리아 건국 이래 계속되어 온 교황과의 대립을 종결지었다. 식민지 획득을 위한 프랑스와의 대결에서 실패하였으나, 에티오피아·알바니아 등을 병합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신로마 제국을 건설하려던 그의 꿈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깨어지고, 1943년 바트지아의 쿠데타 군에 체포되었으나, 독일군의 도움으로 구출되었다. 그는 재기를 꾀하며 분주하게 노력하였으나 이탈리아의 항복으로 그의 꿈은 완전히 무너졌다. 1945년 코모 호반에서 의용군에게 체포되어 피살되었다.

무아상[편집]

Moissan, Henri(1852-1907)

프랑스의 과학자. 파리에서 출생하였다. 1886년 저온에서 불화 칼륨의 액체 불화 수소 용액을 전해하여 불소 유리에 성공하였다. 그 밖에 전기로와 인조 다이아몬드를 만들었고, 여러 가지 탄화물·규화물을 얻었다. 1906년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무아위야 1세[편집]

Muawiyah Ⅰ(602년경-680)사라센 제국의 우마이야 왕조의 시조(재위 661-680). 메카에서 출생하였다. 마호메트가 메카 성에 들어오자 이슬람교로 개종하였다. 1대 칼리프(이슬람교의 교주)인 아부바크르 때 시리아 원정에 공로를 세워, 후에 다마스쿠스의 지사가 되었다. 2대 칼리프가 암살된 후 칼리프가 되어 4대 알리와 대립하였다. 661년 알리가 암살되자 예루살렘에서 즉위, 수도를 다마스쿠스로 옮겼다. 그 후 이라크를 평정하여 이슬람권 최초의 세습 왕조를 세워 국정의 정비와 영토의 확장에 노력하였다.

무어[편집]

Moore, George Edward(1873-1958)영국의 철학자. 런던 출생. 케임브리지 대학의 트리니티 칼리지를 졸업한 후, 1921-1947년까지는 철학 잡지 <마인드>의 편집 주간을 맡아보았다. 1903년의 <관념론 논박>, 1925년의 <상식의 옹호>에서 영국 헤겔 학파의 관념론을 비판하고 20세기의 영국의 실재론(實在論)을 대표하는 철학자가 되었다. 대표적 저서인 <윤리학 원리>는 현대 앵글로-아메리카에 등장한 '메타 윤리학'의 동향을 결정했다. 이 밖의 저서에 <윤리학> <철학의 주요 문제> <철학 연구> 등이 있다.

무제[편집]

武帝(기원전 159-87)

중국 전한의 제7대 황제(재위 기원전 140-87). 고조 유 방의 증손자로 중국 최초의 중앙 집권제를 확립, 고대 전제 국가를 수립하였다. 그는 서역과의 교통로를 열고, 대완을 정벌하고 흉노를 몰아냈다. 또 위만을 멸망시키고 한사군을 설치하였다.

묵자[편집]

墨子(기원전 480-390)

중국 노나라의 철학자·전국 시대의 사상가. 이름은 적, 제학파의 하나인 묵가의 시조로 알려져 있다. 그의 사상에 의하면 세상이 어지러운 원인은 사랑이 부족한 까닭이므로, 사람들이 평등하게 서로 사랑하고 남에게 이롭게 하면 하늘의 뜻과 일치하여 싸움이 없어진다는 '겸애설'을 주장했다. 그 실행 방법으로 근검하여 생활을 간소화하며, 예악을 가볍게 생각할 것을 주장하고, 정치설로서는 비전론(非戰論)을 주장하였다. 애의 사상은 유가의 인, 크리스트교의 박애와 비슷한 것이다. 또 귀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종교적 색채는 민간 신앙을 계승한 것으로 생각되며, 계단식 질서를 존중하여 전통과 예악을 숭상하는 유가와 상대하였으나, 그 애의 개념은 철학적 발전을 그대로 수행하지 못하였다. 묵가는 진나라 이후에 쇠퇴하여 소멸하였다. 그의 주장과 제자들의 설을 모은 책 <묵가>에 그의 사상이 실려 있다.

문징명[편집]

文徵明(1470-1559)

중국 명나라의 문인·화가. 장쑤 성 사람으로, 글씨와 그림에 능하였는데, 산수·화조를 잘 그렸다. 명나라 4대가의 한 사람으로 불린다. 작품으로 <혜산다회도>, 시문집으로 <보전집(甫田集)>이 있다.

뭉크[편집]

Munch, Edvard(1863-1944)

노르웨이의 화가. 표현파의 선구자. 처음에는 신(新)인상파의 영향을 받아 점묘의 수법을 사용하여 삶과 죽음에의 극적이고 내면적인 그림을 그렸다. 1892년 베를린으로 이주, 그곳의 미술 협회에 출품했다. 그는 나면서부터 몸이 약해 작품에도 그 영향이 드러나 있는데, 나치스는 퇴폐예술이라는 이유로 그의 그림을 몰수하기도 했다. 작품으로 <절규> <병든 소녀> 등이 있다.

뮈텔[편집]

Mutel, Gustave Charles Marie(1854-1933)

프랑스의 선교사. 한국이름은 민덕효이다. 1881년 우리나라에 와서 선교에 힘썼다. 1885년 파리 대학 학장이 되어 돌아갔다가, 1890년 제8대 조선 교구장이 되어 다시 우리나라에 왔다. 조선 가톨릭 교회의 확립을 위해 힘썼으며, 신학교를 창설하고, 명동성당 등을 건립하였다. 한문에 능하였고, 순교자의 공적을 조사하였으며, 가톨릭 교회의 자료를 수집·보존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1906년 경향신문을 발간하였고, <황사영 백서>를 프랑스어로 번역하였다.

뮌처[편집]

Munzer, Thomas(1489-1525)

독일의 종교 개혁자. 신학을 공부하고 1520년 츠빅카우에 부임하였다. 처음에는 루터와 협력하였으나, 후에 루터의 종교 개혁 운동을 비판하면서, '빈부의 격차가 없는 사회가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나라'라고 설교하다 추방당하였다. 1524년 뮐하우젠에서 비밀 결사대를 조직, 민주적인 정부를 수립하고자 농민들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로 돌아가 체포되어 교수형을 당하였다.

뮐러[편집]

Muller,Wilhelm(1794-1827) 독일의 시인. 데사우에서 출생하여, 베를린 대학을 졸업하였다. 1813년 프랑스와의 전쟁에 참전하였으며, 1817-1818년 이탈리아 여행 후, 고향에서 김나지움 교사를 지냈다. 후기 낭만파에 속하는 서정 시인으로 맑고 깨끗한 민요풍의 시구는 읊기가 매우 쉽다. 많은 시를 썼는데, <보리수>를 비롯한 <겨울 나그네>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처녀> 등의 시는 슈베르트가 작곡하여 세계적으로 유명한 가곡이 되었다. 그 밖에 <그리스인의 노래>가 유명하다.

미나미 지로[편집]

南次郎(1874-1955)

일본의 군인·정치가. 육군사관학교·육군대학을 졸업하고 러·일 전쟁에 참가하였다. 그 후 육군 대신·관동군 사령관을 거쳐, 1936년 제7대 조선 총독이 되어 우리나라에 부임하였다. 6년 동안 있으면서 민족문화 말살 정책을 강행하였다. 우리 말을 쓰지 못하게 하고, 일본식의 이름으로 창씨 개명을 하게 하였으며, 지원병 제도를 실시하여 중·일 전쟁에 청년들을 참전시켰다. 1945년 전쟁이 끝난 후, 국제 군사 재판에서 전쟁 범죄자로 종신형을 받았다.

미라보[편집]

Mirabeau, Honore Gabriel Victor Riqueti(1749-1791)

프랑스의 정치가·사상가. 미라보 후작의 아들로 방탕한 젊은 시절을 보냈으나, 계몽주의 사상에 감화되어 학자·문필가로서 명성을 떨쳤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제3신분인 평민의 대표로 국민 의회에 나가 그 성립에 전력하였다. 박식하고 능란한 웅변으로 삼부회의 지도적 인물로 활약, 영국식 입헌 정치를 목표로 자유주의 귀족과 부르주아지를 대표하였다. 1791년 국민 의회 의장이 되어, 민권의 신장과 왕권의 존립을 조화시키려고 노력하였으나, 궁정에 매수되었음이 밝혀져 반역자로 낙인찍혔다. 무절제한 방탕한 생활로 건강이 악화되어 42세 때 사망하였다. 저서로 <전제 군주론> <프로이센 왕국> 등이 있다.

미로[편집]

Miro, Joan(1893-1983)

에스파냐의 화가·공예가. 바르셀로나에서 출생하였다. 바르셀로나 미술 학교를 중퇴하고 작품 활동을 시작, 초기의 작품에는 사물에 대한 정밀한 형태적 감수성과 친밀감이 드는 서정적인 감동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1923년부터 칸딘스키의 영향을 받아 초현실주의 화풍으로 바뀌었다. 그의 작품은 밝고 가벼운 색채와 소박하며 단순한 형식으로 이루어져 신선한 정서가 풍긴다. 1937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 출품한 <추수>가 유명하다. 1947년 미국으로 건너가 신시내티 호텔 벽화, 하버드 대학 벽화를 그렸다. 1954년 베네치아 국제전에서 판화 부문 국제상을 받았다. 대표작으로 <야곡> <곡립의 귀> <해맑은 웃음> 등이 있다.

미론[편집]

Myron(기원전 480-440년경)

그리스의 조각가. 그리스 아르카크에서 클래식의 전환기에 선구적·획기적 역할을 하였다. 청동상 작가로서 사실적인 다양한 모티프를 가지고 격동하는 조각상을 만들었고, 현실에의 박진감을 나타냈다. 당시의 조각에서 미숙하였던 육체의 자유로운 운동 표현을 성취하였으며, 감정의 표출에까지도 성공하였다. 그의 작품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것은 없으나, <원반 던지는 사람>은 그의 작품을 그대로 옮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작품은 격렬하게 움직이는 순간의 자세를 잘 잡아, 긴박하고 아름다운 느낌을 준다.

미첼[편집]

Mitchell, Margaret(1900-1949)

미국의 여류 소설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쓴 작가로, 의학을 배우다가 그만두고, 고향의 신문사에서 일하였다. 발을 다쳐 신문사를 그만두고, 이 무렵부터 10년에 걸쳐 쓴 것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인데, 남북 전쟁을 배경으로 하였다. 1937년 퓰리처상을 받았다.

미추린[편집]

Michurin, Ivan Vladimirovich(1855-1935)

러시아의 과수 원예가·생물학자. 추위를 이겨내는 과수 육성을 연구하여 처음 10년간은 계속 실패하였으나, 식물의 유전과 환경의 영향을 고려하여 실험을 반복하여 마침내 교잡법에 성공하였다. 그리하여 추위를 이겨 내는 좋은 품종을 많이 만들어 내었다. 그의 사업은 후에 루이센코에게 계승되어, 생물학과 농업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미켈란젤로[편집]

Michelangelo, Buonarroti(1475-1564)

이탈리아의 화가·조각가·건축가. 다 빈치·라파엘로와 함께 르네상스기에 이탈리아가 낳은 최대의 미술가로서, 피렌체 근처 카프레세에서 출생하였다. 1488년 가족과 함께 피렌체로 돌아왔는데, 어려서부터 미술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13세 때 화가 도메니코와 기를란다요에게서 배우고, 이듬해 조각가 베를톨드에게 옮겨 도나텔로 작품을 배움과 아울러 메디치 가의 고대 조각품을 수집 연구하던 중, 공작 로렌초에게 발탁되어 그집에서 조각과 인체 해부에 전념하였다. 또, 그는 신화와 신·구약 성서 등 많은 고전을 탐독하고 교양을 쌓았다. 1496년 로마로 나가 고대 미술과 접하고 이교적인 <바쿠스>를 제작하였다. 1499년 프랑스 추기경의 위촉을 받아 성 베드로 대성당의 <피에타> 대리석상을 완성하였다. 1501년 피렌체로 돌아와, 시청의 위탁으로 <다비드> 대리석상을 3년에 걸쳐 완성하였다. 계속하여 원형 부조인 <성 모자>를 만들고, 원형화 <성 가족>을 그렸다. 1504년 피렌체 시청의 위촉으로 대회장의 벽화 <카시나 수중 접전도>를 그리게 되었는데, 맞은편 벽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앙기아리 기마 접전도>를 그렸으므로 경쟁을 하게 되었다. 1508년 바티칸 궁의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정화를 위촉받고 4년 만에 완성하였다. 1520년 메디치 가 예배당의 묘비를 10년에 걸쳐 조각하는 한편, 산로렌초 교회 부속 도서관 입구를 건축하였으며, 1529년 독일 카를 5세 군의 피렌체 포위 때 방위 위원으로 뽑혀 성을 쌓았다. 후에 메디치 가의 폭군 알렉산드르와 사이가 나빠져, 1534년 고향인 피렌체를 영원히 떠났다. 로마로 옮긴 그는 새로운 교황 파울스 3세로부터 시스티나 예배당의 정면 대벽화를 위촉받고, 노령으로 발판 위에서 떨어져 가면서까지 혼자 꾸준히 그려 6년에 걸쳐 <최후의 심판>을 완성하였다. 1550년 바티칸 파울리나 예배당의 벽화 <파울로의 개종>과 <페테로의 책형>을 완성하였다. 이어 성 베드로 대성당 돔(dome), 피렌체 성당의 <피에타> <팔레스티나의 피에타> <론다니니의 피에타> 등 세 조상을 미완성으로 남긴 채 89세를 일기로, 외롭고 괴로운 긴 생애를 로마에서 마쳤다. 그의 예술은 인생의 고뇌, 사회의 부정과 대결한 분노, 신앙을 미적으로 잘 조화시킨 것이다.

미테랑[편집]

Francois Mitterrand(1916-1996)프랑스의 정치가. 파리 대학 법문과를 졸업하였으며 변호사를 개업하였다. 1946-1958년 사이 국민의회 의원으로 활약하면서, 1947-1957년 재향군인상, 국무상, 해외 영토상, 내상 등을 지냈다. 1959-1962년 상원 의원을 지냈으며, 국민 의회 의원에 선출되었다. 1965-1968년 좌익연합 총재(대통령후보)를 지냈다. 1971년 사회당 제1서기가 되었고, 1974년 좌익 통일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패배하였다. 1981년 사회당 서기장(당수)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저서로 <영구적 쿠데타> <가능한 사회주의> 등이 있다.

미헬[편집]

Michel, Hartmut(1948- )

독일의 생물 물리학자. J. 다이젠호퍼, R. 후버와 함께 광합성 작용의 연구로 식물의 단백질 생성 과정을 규명하여, 생물의 성장 구조를 해명한 공로로 1988년에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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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ll, John Stuart(1806-1873)

영국의 철학자·경제학자·심리학자. 런던에서 출생하여, 공부는 14세 때 겨우 1년간 벤담에게 사사하였다. 1823년 친구들과 함께 공리주의자 협회를 만들고, 1823-1858년 동인도 회사에 있으면서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1843년 그의 중요 저서인 <논리학 체계>를 발표하였는데 이는 베이컨이 이룩한 귀납법의 논리를 완성한 것으로 진보가 빠르고 가장 정확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자연 과학 연구의 방법론으로서 획기적인 저술이었다. 인식론에 있어서는 해밀턴이 대표하는 스코틀랜드의 상식학파에 반대하고, 외적 대상은 항상 감각할 수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1866년 런던에서 하원 의원에 선출되어 노동자에게도 선거권을 줄 것을 주장하고, 비례대표제도 설치를 역설하였다. 1859년 <자유론>을 발표하여, 국가의 가치는 개인의 가치에 의해 존재하므로 개인의 비사회적 행동은 제재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남에게 해를 주는 행위에 한해서 책임을 물어야 함을 주장, 근대 민주주의에 관한 위대한 문헌이 되었다. 저서로 <논문집> <공리주의> <자서전> 등이 있다.

밀러[편집]

Miller, Arthur(1915- )

미국의 극작가. 뉴욕에서 출생하여 미시간 대학을 졸업하고 극작에 전념하였다. 그는 테네시 윌리엄스와 함께 미국의 연극계를 대표하는 작가이다. 그는 전쟁을 비판한 심리극 <모두 내 아들>로 평론가상을, <세일즈맨의 죽음>으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밀레[편집]

Millet, Jean Francois(1814-1875)프랑스의 화가. 노르망디의 시골 농가에서 출생한 그는, 일찍부터 성인전에 감명을 받아 종교적인 장면의 데생을 즐겨 그렸다. 재능을 인정한 아버지에 의해 랑글루아에게서 사사하고, 후에 장학금을 받아 파리의 미술 학교에서 배우는 한편, 루브르 박물관에서 푸생의 작품을 연구하였다. 1840년 살롱에 입선되고 일시 귀향하여 결혼하였는데, 생활이 어려워 다시 파리에 나와 간판·미인화 등을 그려 생활해 나갔다. 1848년 살롱에 출품한 작품이 입선되고, 정부에 팔림으로써 이름이 알려졌으나 파리에 콜레라가 유행하자 파리의 교외인 바르비종으로 옮기고, 본격적인 농민 화가로서 전원 생활의 정경을 그렸다. 그는 가난에 쪼들렸으나 신념을 굽히지 않고, 농민의 모습을 종교적인 분위기로 심화시켜 소박한 아름다움으로 표현하였다. 만년에 <이삭줍기> <만종> 등 걸작을 발표하고, 차츰 명성이 높아졌으나 빈곤하였을 때 얻은 결핵이 원인이 되어 61세로 사망하였다. 그는 데생과 동판화에도 뛰어나 많은 걸작품을 남겼다.

밀리컨[편집]

Millikan, Robert Andrews(1868-1953) 미국의 물리학자. 일리노이 주 출신으로 컬럼비아 대학을 졸업하고, 독일에 건너가 베를린·괴팅겐 대학에서 공부하였다. 귀국 후 시카고 대학 교수를 거쳐, 1921-1946년 캘리포니아 공대의 노만 브리지 물리학 연구소장을 역임하였다. 1909년 기름 방울에 의하여 전자 전하(물체가 띠고 있는 전기)의 크기를 정밀하게 측정하는 데 성공하였다. 또한 스펙트럼 선을 연구하고, 단파장의 '밀리컨 선'을 발견하였다. 그 밖에 광선 효과와 우주선을 연구하는 등 세계 과학사에 큰 업적을 남겼다. 1923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밀턴[편집]

Milton, John(1608-1674)

영국의 시인. 셰익스피어를 잇는 대시인이다. 케임브리지 대학을 다닐 때 귀부인이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용모가 고귀하였으며, 천재성을 발휘하여 <크리스트 탄생의 아침>을 썼다. 졸업 후 전원에서 고전·수학 등을 연구하여, 몇 편의 작품을 썼다. 1637년 이탈리아를 여행하고, 1639년 귀국하여서는 국교회에 대항하여 청교도주의를 받들고 크롬웰을 지지하였다. 혁명이 일어난 뒤 한때 관직에 있었으나 왕정 복고 후 추방되고, 과로로 실명한 채 시작(詩作)에 몰두하였다. 1667년 불후의 대작 <실락원>을 발표하였는데, 이것은 영문학 사상 유일한 세계적 서사시가 되어 후세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어 <투사 삼손> <복락원> 등 청교도적 사상을 나타낸 대작을 계속 발표하여, 영문학 사상 최대의 시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