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인명사전/세 계 인 명/ㅎ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하 규[편집]

夏珪

중국 남송 시대의 화가. 마 원과 함께 남송원체 산수화의 쌍벽을 이루던 화가로 알려져 있다. 그의 그림은 당시 누구도 따를 수 없을 정도로 깨끗하고 화려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작품으로 <계산 청원도> <풍우 산수도> <강두 박주도> 등이 유명하다.

하그리브스[편집]

Hargreaves, James(1745년경-1778)

영국의 발명가. 랭카셔에서 출생하여 20세 때까지 방적업이 성한 랭카셔 가까이에서 목수일과 베 짜는 일을 하다가 방적기의 개량을 위해 연구를 하였다. 그 무렵, 영국의 방적기는 소를 몰아 움직였으며, 한 대의 기계에 방추(가락)가 하나뿐이었다. 하그리브스는 처음으로 동력을 사용하여 8개의 방추가 달린 기계를 만들었으며, 후에 80본이나 짤 수 있는 기계를 발명하여 '제니 방적기'라 이름지었다. 이 발명으로 영국의 산업혁명이 촉진되었다.

하든[편집]

Harden, Sir Arthur(1865-1940)

영국의 화학자. 맨체스터에서 출생하였다. 에를랑겐 대학에서 피셔와 함께 연구하고, 1888년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런던 대학 교수로 있으면서 알코올 발효의 연구, 인산 결합에 의한 당 조성 등을 설명하고, 1929년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저서로 <돌턴 원자설의 기원> <무기 화학의 진보> <실험 유기 화학의 기초> 등이 있다.

하디[편집]

Hardy, Thomas(1840-1928)

영국의 소설가·시인. 19세기 말부터 20세기에 걸쳐 영국의 대표적인 작가의 한 사람이다. 도싯셔 주 태생으로 건축 사무소에서 일하면서 틈틈이 독서와 연극 관람을 즐겼다. 한때 미술 평론가가 되려 했던 그는, 시 짓기에 뜻을 두어 작품을 썼으나 인정받지 못하여 소설을 쓰기 시작하였다. 차차 어두운 내용으로 변하여 세상의 비난을 받기도 하였는데, 그것은 그가 지내온 불안한 시대를 나타낸 것이라 하겠다. 그의 소설은 뛰어난 구성력으로 고향인 웨섹스 지방을 소재로 삼았기 때문에 '웨섹스 소설'이란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 작품으로 <테스> <귀향> <미천한 사람 주드> 등의 소설과 <패자들> 등의 시집도 있다.

하마슐트[편집]

Hammarskjold, Dag Hjalmar(1905-1961)

스웨덴의 정치가. 웁살라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1932년 스톡홀름 대학 교수를 거쳐, 재무 장관·중앙 은행 총재가 되었다. 1945년 외무성 고문, 1948년 유럽 경제 협력 기구 수석 대표, 1951년 무임소 장관을 지냈으며, 그 후 국제 연합 수석 대표를 거쳐, 1953년 국제 연합 사무 총장이 되었다. 그는 세계 평화를 위하여, 중동 휴전의 특사로 수에즈 운하 문제와 헝가리 의거 사건 등에서 큰 활약을 했으며, 1958년 사무 총장에 재선되었다. 콩고의 내란을 조정하기 위해 가던 도중에 비행기 사고로 죽었다. 1961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으며, 저서에 <길잡이>가 있다.

하멜[편집]

Hamel, Hendik(?-1692)

네덜란드의 선원,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배에서 포수로 근무하던 중, 1651년 인도네시아의 자바로 건너가 거기서 서기가 되었다. 1653년 상선 스페르웨르 호를 타고 타이완을 거쳐 일본 나가사키로 항해 도중, 38명의 일행과 함께 제주도에 표류하여, 이듬해 서울로 호송되어 훈련도감에 편입되었다. 그 후 강진·여수의 병영에 배치되어 잡역에 종사하다가, 1666년 7명의 동료와 함께 탈출하여 일본을 거쳐 1668년 귀국하였다. 그가 쓴 <하멜 표류기>는 <난선 제주도 난파기> 및 부록 <조선 국기>로 되어 있다.

하버[편집]

Haber, Fritz(1868-1934)

독일의 화학자. 하이델베르크·취리히·예나 등의 대학에서 화학을 공부하고, 1906년 칼스루에 공과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그 후 베를린의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의 소장을 거쳐 베를린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그는 공중 질소 고정법인 '하버 법'을 창시하였다. 1918년 암모니아 합성의 공적으로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저서에 <공업 전기 화학의 기초> <유기 화학의 전기 분해법> 등이 있다.

하버드[편집]

Harvard, John(1607-1638)

하버드 대학의 창설자. 영국에서 출생하여 교장을 지낸 후, 미국으로 건너가 1637년 찰스턴의 시민이 되어 그곳 교회의 부목사로 일하였다. 그가 죽은 후 장서와 재산의 반을 뉴타운의 신설 대학에 기부하였다. 그 후 이 대학은 그의 이름을 따서 '하버드 대학'이 되었다.

하비[편집]

Harvey, William(1578-1657)

영국의 의사·생리학자. 켄트 주 포크스턴 출생.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하고, 1598년에 이탈리아의 파도바 대학에 유학한 후 1602년에 돌아왔으며, 1609년에는 바르톨로메 병원의 주임 의사가 되었다. 15년의 해부학 강연 때에 처음으로 혈액 순환론을 발표했다. 그는 또, 동물은 모두 알에서 발생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저서에 <동물의 심장과 혈액 운동에 관한 해부학> <동물의 생성> 등이 있다.

하시모토 류타로[편집]

橋本龍太郞(1937- )일본의 총리·자민당 총재·자민당내 다케시타파를 이끌고 있다. 게이오대학 법학부 졸업. 1963년 중의원(자민당·오카야마·11선·현재), 1970년 후생성정무차관, 1978년 후생상, 1986년 운수상, 1989 자민당간사장과 대장상, 1993-95년 유족회장, 1994년 통산상, 1995년 자민당 총재, 1996년 총리를 지냈으며, 1998년 물러났다.

하우프트만[편집]

Hauptmann, Gerhart(1862-1946)

독일의 극작가·소설가. 처음에는 조각가가 되려 하였으나, 자유주의 운동의 영향을 받아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최초의 희곡 <해뜨기 전>을 발표하여 극작가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독일 자연주의의 대표적인 극작가인 그는 독일의 근대극을 확립시켰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수법을 수립하여서 근대 연극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대표작으로 희곡 <해뜨기 전> 및 <직물> <하넬레의 승천> 등이 있다. 1912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하이네[편집]

Heine, Heinrich(1797-1856)

독일의 시인·평론가. 뒤셀도르프의 가난한 유대인 집안에서 출생하였다. 일찍이 문학적 소질을 보였으나, 처음에는 상인이 되려고 프랑크푸르트에 갔으나 실패하였다. 숙부의 도움으로 1819년 본 대학에 입학하여 법률을 공부하였으나, 문학으로 바꾸었다. 슐레겔의 문학 강의나 헤겔의 철학 강의는 그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1827년 시집 <노래의 책>을 내어 명성을 얻었으며, '7월 혁명'에 감동되어 파리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독일·프랑스의 신문·잡지에 많은 논문과 평론을 내어 언론인으로서는 인정을 받았으나, 정부의 미움을 산 후 국외 추방 결의로 인해 계속 파리에 머물면서 민주주의를 위한 논문과 아름다운 시를 썼다. 초기의 작품은 숙부의 두 딸들에 대한 사랑의 경험을 토대로 씌어졌다. 그는 처음에는 낭만파에서 출발하였으나, 유대인에 대한 차별 의식과 '7월 혁명'의 현실에 의해, 2개의 분열된 요소가 항상 그를 지배하였다. 그리하여 달콤한 낭만적 색채 속에는 냉혹한 현실에 대한 냉소가 숨어 있고, 열렬한 애국심의 이면에는 편협한 독일 사람에 대한 반항심이 불타고 있다. 괴테와 더불어 독일이 낳은 세계적인 시인이다. 작품으로 <로만파> <독일 겨울 이야기> <파우스트 박사> <아타 트롤> <로만체로> 등이 있다. <아타 트롤>은 격조 높은 풍자 서사시로 바이런과 함께 문학사에서 특이한 자리를 차지한다.

하이데거[편집]

Heidegger, Martin(1889-1976)독일의 철학자. 실존주의 철학자로 메르키히에서 출생하였다. 1923년 마르부르크, 1928년 프라이부르크 대학 교수를 지냈다. 처음에는 리케르트의 가치 철학, 후에는 후설의 현상학,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 딜타이의 생의 철학 등의 영향을 받으며, 독자적인 철학을 개척하여 '기초적 존재론'이라는 실존 철학을 만들었다. 그의 철학은 그 방법에 있어서는 현상학이요, 그 대상에서 보면 존재론이다. 그에 의하면 철학은 '현존재의 해석학', 곧 실존의 분석론에서 출발하는 보편적인 현상학적 존재론이다. 만년에는 시의 연구에 관심을 기울였다. 저서에 <존재와 시간> <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 <기초적 본질에 대하여> 등이 있다.

하이든[편집]

Haydn, Franz Joseph(1732-1809)오스트리아의 작곡가. 모차르트·베토벤과 함께 '빈 고전파'의 3대 작곡가 중의 한 사람이며, '교향곡의 아버지'로 불린다. 오스트리아의 로라우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음악에 재능을 나타내었다. 8세 때 빈 교회의 소년 합창단이 되면서부터 음악 생활에 들어갔다. 1759년 보헤미아 부르친 백작 집안의 궁정 악장이 되고, 1761년 에스테르하지 공의 악단 악장이 되어 그의 일생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지냈으며, 단원들이 그를 아버지처럼 따랐다고 한다. 이때부터 환경도 안정되어 작품 활동의 큰 성과를 올렸으며, 음악도 부드럽고 밝으며 쾌활함이 넘쳤다. 그의 음악사적 공적은 교향곡·현악 4중주곡 등의 음악을 오늘날과 같은 것으로 만들어 독일 고전파 음악을 창시한 것이다. 특히 소나타의 형식을 완성시킨 점은 음악사의 큰 공적이다. 작품으로 <놀람 교향곡> <시계 교향곡> 등 100곡 이상의 교향곡과 <황제> <종달새> <세레나데> 등 80곡의 현악 4중주곡, <천지 창조> <사계절> 등의 오라토리오와 50곡 이상의 피아노 소나타가 있다.

하이제[편집]

Heyse, Paul(1830-1914)

독일의 소설가·극작가. 베를린·뮌헨·본 등의 대학에서 공부한 뒤 작가 생활을 하였다. 120여 편에 달하는 단편 소설은 매우 뛰어나며, 이탈리아의 밝은 자연을 배경으로 한 아름다운 사랑을 그렸다. 장편 소설 <현세의 사람들> <낙원에서> 등도 극찬을 받았다. 희곡도 70여 편 썼으나, 폭이 넓은 반면 내용의 깊이가 부족하다고 한다. 1910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84세의 나이로 평온하고 행복한 생애를 마쳤다. 작품에 <한스 랑케> <콜베르크> <안드레아 델핀> 등이 있다.

하이젠베르크[편집]

Heisenberg, Werner(1901-1976)

독일의 이론 물리학자. 뮌헨에서 출생하여 뮌헨·괴팅겐·코펜하겐 대학을 졸업하고, 라이프치히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주로 원자 역학을 연구하고, 1925년 마트릭스 역학에 관한 논문을 썼다. 이 역학은 파동 역학과 함께 이론 양자 물리학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이것이 후에 양자 역학을 생기게 하였다. 이 밖에도 그는 불확정성 원리 등의 중요한 연구를 많이 하였으며, 1932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저서로 <양자론의 물리학적 원칙> <원자핵 물리학> 등이 있다.

하인리히 1세[편집]

Heinrich Ⅰ(876년경-936)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재위 919-936). 포조(捕鳥)왕, 또는 도시 건설왕이라고도 한다. 작센 공 오토의 아들로서, 콘라드 1세를 계승하여 독일의 왕 겸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933년 헝가리의 침입을 물리치고 성의 방비를 튼튼히 하였으며, 독일의 기사를 양성하여 독일의 기초를 튼튼하게 하였다.

하인리히 4세[편집]

Heinrich Ⅳ(1050-1106)신성 로마의 황제(재위 1056-1106). 교황과 황제가 대립하던 시대의 황제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6세 때 왕위에 올라 어머니가 섭정하였는데, 16세에 직접 정치를 하면서 지방 제후들과 충돌하였다. 그는 또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와 충돌, 교황으로부터 파문을 당하였다. 1077년 교황에게 사면을 간청하여 겨우 용서를 받는 '카노사의 굴욕'을 겪었다. 그 후 제후들을 억누르고 그레고리우스 7세를 로마에서 쫓아내었지만 왕후와 아들들에게 배반을 당하였다.

하트셉수트[편집]

H't-spsw·t, M' 'K-'R

고대 이집트의 여왕(재위 기원전 1501-기원전 1480). 투트메스 1세의 딸로서, 정치에 힘을 기울여 시나이 광산을 채굴하였고, 푼토(오늘날의 소말리아 지방)와 새로 무역의 길을 열었다. 에르바프리 언덕의 경사를 이용하여 3단의 대하트셉수트 신전을 건설하였다. 평화주의의 여왕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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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hn Otto(1879-1968)

독일의 화학자. 서부 프랑크푸르트에서 출생하여, 프랑크푸르트·마르부르크·뮌헨 대학에서 공부하였다. 1938년 슈트라스만과 함께 우라늄 원자핵의 핵분열에 관한 연구를 발표하였다. 그보다 앞서 1905-1910년에는 방사성 물질인 토륨과 악티늄의 자연 붕괴에 관한 연구를 하여, 후에 여러 가지 방사성 동위 원소 발견의 계기가 되었다. 1908년 오스트리아의 마이트너와 함께 방사성 물질인 프로트악티늄을 발견하였다. 1928년 괴팅겐의 카이저 빌헬름 화학 연구소장이 되었으며, 1944년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한니발[편집]

Hannibal(기원전 247-기원전 183)카르타고의 장군·정치가. 하밀카르바르카르의 아들로, 제1차 포에니 전쟁에 패전한 후 카르타고에서 에스파냐로 갔다. 기원전 221년 26세의 나이로 에스파냐 주둔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기원전 219년 로마군이 점령하고 있는 사군툼을 함락시키고, 이듬해 로마와 제2회 포에니 전쟁(한니발 전쟁)을 벌였다. 그는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침입하여 칸네 싸움에서 크게 승리하여 남이탈리아를 지배하였다. 그러나 전쟁이 오래갈수록 소모가 많고, 기대하던 마케도니아·카르타고 본국의 원조가 없어 고립되었다. 그에 굴복한 여러 도시가 이탈하고, 로마의 장군 스키피오 장군이 본국을 공격하자 귀국하였으나, 자마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굴욕적인 강화를 맺었다. 전후 내각을 개혁하여 국력 회복에 노력하였으나, 정적에게 배반당하여 시리아로 망명하였다. 로마에 대한 보복을 노렸으나, 실패하였고 결국 자살하였다.

한비자[편집]

韓非子(?-기원전 233)

중국 전국 시대의 사상가. 법치주의를 주장하였다. 한나라의 귀족으로 순자에게 배웠다고 한다. 전쟁으로 혼란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새로운 개혁과 질서 확립을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가 지은 <한비자> 20권은 순자의 성악설, 노장의 무위 자연설을 받아들여 법가의 학설을 일으킨 것으로, 유교에서처럼 도덕과 교육으로 나라를 구하자는 것이 아니라 법으로 나라를 다스리자는 것이었다. 그의 생각은 진나라의 시황제가 받아들여 실시하였으나, 진나라에 갔을 때 그의 벗이며 진나라의 대신인 이사에게 피살되었다.

한센[편집]

Hansen, Peter Andreas(1795-1874)덴마크의 천문학자. 1825년 제베르크 천문대장이 되었고, 1857년 고타 천문대를 창설하고, 대장에 취임한 후 그곳에서 일생을 보냈다. 그의 최대의 업적은 10여 년이나 걸려 만든 정확한 '달의 운행표'를 작성함으로써 가장 힘이 드는 태음 운동론을 완성한 데에 있다. 그 밖에도 혹성·혜성의 진동론에 관해서도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한센[편집]

Hansen, Armauer Gerhard Henrik(1841-1912) 노르웨이의 의학자. 1868년부터 베르겐의 나병 요양소에서 일하면서 나병에 관한 연구를 하였다. 1879년 나병의 균을 발견하여, 그때까지 유전되는 병이라 생각해 온 나병이 전염되는 병이라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 후부터 환자를 격리시키고 소독을 철저히 하는 등, 새로운 치료 방법을 실시하였다. 나병을 그의 이름을 따서 '한센 병'이라고도 부른다.

한 신[편집]

韓信(?-기원전 196)

중국 전한의 장군. 장쑤 성 사람으로 가난한 집안에서 출생하였다. 소하의 신임을 받아 대장이 되었으며, 기원전 205년 유 방의 천하 통일 사업을 도와, 조·위·연·제를 공략하고 초왕이 되었다. 고조가 유씨 외의 성을 가진 왕을 추방하는 정책을 쓸 때에 그도 잡혀 죽었다. 청년 시절에 불량 청년들의 모욕을 견디며, 그들의 다리 밑으로 기어나간, 인내심 강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한 유[편집]

韓愈(768-824)

중국 당나라의 문장가·정치가·사상가. 자는 퇴지로, 당송 8대가의 한 사람이다. 어렸을 때부터 문장에 뛰어나 고어나 고대의 문장을 깊이 연구하여, 독특하고 새로운 문체를 찾아 내려고 애썼다. 그가 찾아낸 '고문'이란 산문체는 자연스러운 표현을 중히 여기는 것으로, 중화 민국 시대에 이르러 일상 용어와 일치하는 '백화문'이 쓰이기 시작할 때까지 중국 문장의 본보기가 되었다. 문인으로서의 그의 명성이 높아지자, 조정에서의 벼슬도 올라가서 중서사인·병부·형부 등의 시랑을 지냈다. 사상가로서는 유교 중심주의를 강조하여, 불교·도교를 맹렬히 공격하였다. 오늘날 <한창려 문집> 40권과 <외집> 10권 등이 남아 있다.

할슈타인[편집]

Hallstein, Walter(1901-1982)독일의 법학자·정치가. 프랑크푸르트 대학 교수를 거쳐 1946-1948년 총장을 지냈다. 이후 내각 지방 장관·외무부 차관 등을 거쳐, 1958년 유럽 공동 시장 초대 위원장이 되어 유럽의 경제 통합을 위해 힘썼다. 그는 서독의 외교 정책의 하나인 '할슈타인의 원칙'을 세워 유명해졌다.

함무라비[편집]

Hammurabi

바빌로니아 제1왕조 제6대 왕(재위 기원전 1955-기원전 1913). 전쟁이나 정치에 수완이 뛰어나, 왕위에 오른 후 30년 전쟁에 의해 바빌로니아의 통일을 이룩하고, 바빌론을 수도로 하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그리고 농업과 상업을 장려하고 운하를 개설하여, 바빌로니아 왕국의 가장 번영한 시대를 이루었다. 그의 업적을 전하는 것으로 <함무라비 법전>과 편지·명령서 및 법률·경제 문서가 점토판으로 많이 남아 있다. 특히 <함무라비 법전>은 유명한데, 이것은 282조에 이르는 법률로서, 1901년 프랑스의 탐험대에 의해 발견되었다. 글자로 기록된 법률로서는 리피트 이슈타르 법전에 이어 세계에서 두번째로 오래된 것이라 한다.

함순[편집]

Hamsun Kunt(1859-1952)

노르웨이의 소설가. 구트브란스달의 가난한 가정에서 출생하여, 방랑 생활을 하다가 24세 때 미국으로 건너갔다. 몸을 다쳐 귀국했다가, 1886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으며, 1890년 <굶주림>을 발표하여 이름을 떨쳤다. 체험에서 오는 심각한 심리 묘사는 도스토예프스키와도 비길 정도로 훌륭하다. 작품에 소설 <신비> <처녀지>와 희곡 <제국의 문턱에서> <투쟁 생활> 등이 있다. 1920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항우[편집]

項羽(기원전 232-기원전 202)

중국 초나라의 장군. 우는 자이고 이름은 적이다. 어릴 때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세고 늠름하여 무인으로서의 소질을 갖추고 있었다. 기원전 209년 군사를 일으켜 진나라를 쳐서 이기고 수도 셴양을 함락하였다. 의제를 추대하여 왕으로 세우고, 스스로 서초 패왕이라 하였다. 기원전 206-기원전 202년 한나라와 싸워 처음은 우세하였으나, 마음이 좁고 재략이 부족하며 뛰어난 부하가 없어서, 하이허에서 유 방에게 패하여 우장에서 자살하였다. 힘은 세나 꾀가 없는 사람을 '항우'라 부르며, 사면이 모두 적에게 둘러싸여 고립된 상태를 말하는 '사면초가' 등의 고사가 생겼다.

해리슨[편집]

Harrison, William Henry(1773-1841) 미국의 정치가. 제9대 대통령. 의학을 공부하고 군에 들어가 북서부군 사령관이 되어, 인디언 토벌과 미국·영국 전쟁 때 크게 활약하였다. 그 후 정계에 들어가 상원·하원 의원을 역임하였고, 공화당 후보로 1841년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1개월도 못 되어 급병으로 사망하였다.

해리슨[편집]

Harrison, Benjamin(1833-1901)미국의 정치가, 제23대 대통령.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해리슨의 증손자이며, 제9대 해리슨 대통령의 손자이다. 마이애미 대학을 졸업하고 변호사로 일하였다. 남북 전쟁 때 중서부 전선에서 활약하였다. 1881년 공화당 상원 의원을 거쳐, 1889년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보호 관세 정책과 내정 개혁 문제를 실시하였다. 다음해 범 아메리카 회의를 열었다. 저서에 <우리들의 나라>가 있다.

해밀턴[편집]

Hamilton, Alexander(1757-1804)미국의 정치가. 서인도 제도에서 출생하였다. 독립 전쟁 때에 워싱턴의 부관이 되었고, 전쟁 후에는 합중국 헌법의 제정과 중앙 집권 정부를 세울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워싱턴 대통령 밑에서 재무 장관을 지냈는데, 뛰어난 정책으로 국가의 재정을 튼튼하게 하였다. 1795년 장관직을 물러난 후, 공화당의 버와 결투하였는데, 중상을 입고 죽었다. 그의 정치 사상은 지금도 계승되어, 미국을 오늘날의 대공업국으로 만든 기초가 되었다.

핼리[편집]

Halley, Edmund(1656-1742)

영국의 천문학자. 옥스퍼드 대학에서 공부하고 후에 동 대학의 교수, 제2대 그리니치 천문대장을 지냈다. 남쪽 하늘의 항성 관측을 위해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가서 항성 목록을 만들었다. 또한 달의 관측과 그 운동의 이론을 연구하고 남아프리카와 아메리카로 여행하며 지자기를 관측하여 세계 최초로 지자기 편각도를 만들었다. 그는 뉴턴과도 친하게 지냈는데, 뉴턴을 격려하여 <자연 철학의 수학적 원리>를 완성하게 하였다. 1682년 파리 혜성을 관측하고 뉴턴의 역학의 법칙을 이용하여 혜성이 나타날 것을 예언하였다. 관측을 계속하여 혜성도 75-76년의 주기를 갖고 타원의 궤도를 그리며 운동한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금성이 태양의 곁을 지날 때 태양의 시차 결정의 발견으로 천문학 발달에 공헌하였다. 이와 같은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1910년 지구 가까이에 온 혜성을 '핼리 혜성'이라 이름 붙였는데, 이 혜성은 1986년에 다시 지구를 찾아왔다.

허긴스[편집]

Huggins, William(1824-1910) 영국의 천문학자. 런던에서 출생하였다. 어릴 때부터 천문학에 흥미를 보였고, 후에 런던에다 사설 천문대를 세워서 천체의 스펙트럼을 연구하였다. 후에 분광기를 발명하고 항성의 스펙트럼 분석으로 항성이 나트륨·칼슘·철·수소 등의 원소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허긴스[편집]

Huggins, Charles B.(1901-?)미국의 의학자.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고, 1927년 시카고 대학 강사, 1936년 교수를 거쳐, 1951년 시카고 대학 벤메이 암 연구소 소장이 되었다. 미국뿐만 아니라 영국·독일로부터 많은 의학상을 받았다. 1966년 '전립선 암의 호르몬 요법' 연구로 노벨 의학·생리학상을 받았다.

허드슨[편집]

Hudson, Henry(1550-1611)

영국의 항해가·탐험가. 1609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명령으로 서북 항로를 개척하는 임무를 띠고 북위 80°까지 갔다. 후에 동북 항로 개척을 계획하여 러시아의 노바야젬랴와 아메리카의 동해안에까지 도달하여 강을 발견하여 '허드슨강'이라 부르게 되었다.

헉슬리[편집]

Huxley, Thomas Henry(1825-1895) 영국의 생물학자. 어릴 때 기계 기사가 되기를 원했지만, 의학을 배워 해군 병원에서 일하였다. 동북부 해상의 탐험과 측량 항해선인 래틀스네이크 호의 의사로 4년 동안 항해를 하였다. 그동안 바다 동물에 흥미를 느껴, 1854년 <대양산의 히드로 충류>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 무렵 다윈의 학설에 영향을 받은 그의 논문은 많은 공격을 받았으나, 그로 인하여 왕립 광산 학교의 교수·런던 대학의 시험 위원 등을 지냈다. 1883년 왕립 협회 회장이 되었다. 뛰어난 수필도 많이 발표한 그는 다윈의 학설을 널리 알리고, 정치 제도의 개선, 과학 교육의 발전 등 여러 방면에 크게 활약하였다. 저서에 <자연계에 있어서의 인간의 위치> 등이 있다.

헉슬리[편집]

Huxley, Aldous Leonard(1894-1963) 영국의 소설가·수필가. 자연 과학자 헉슬리의 손자이고 생물학자인 헉슬리의 동생이다.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에는 시를 썼으나, 소설 <크롬 옐로>가 인정받자 소설로 전환하였다. 1928년 <대위법>를 발표하여, 1920년의 여러 가지 모습의 지식인들을 풍자하였다. 그 밖의 작품으로는 <멋진 신세계> <섬> 등이 있고, 시집으로 <레나>, 단편집으로 <림보> 등이 있다. 그의 창작 활동은 근대 과학에 대해 맹목적인 믿음을 가진 19세기의 사상에 반대하여, 격동하는 20세기에 걸맞는 도덕을 탐구하는 데 바탕을 두고 있다.

헉슬리[편집]

Huxley, Andrew Fielding(1918- )영국의 생리학자.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하고, 제2차 세계대전 후 케임브리지·존스 홉킨스 대학 강사를 거쳐, 1960년 런던 대학 교수가 되었다. 1963년 신경 세포의 말초와 중심부에 있어서의 흥분과 억제 현상에 나타나는 이온 조직에 관한 발견으로, 노벨 의학·생리학상을 받았다.

헌종[편집]

憲宗(778-820)

중국 당나라의 제11대 황제(재위 805-820). 당나라를 다시 일으킨 황제라 일컬어진다. 그는 성격이 곧고 과단성이 있어 안녹산의 난이 끝난 후 절도사의 횡포를 누르고 나라의 명예를 높이는 데 힘을 기울였다. 또한 물가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의 세금을 내려주는 등 당나라의 중흥을 위하여 애쓴 현명한 왕이었다. 한 유·유종원·백거이 등이 활약한 것도 이 때이다. 그 후 헌종은 도교에 빠져 환관에게 암살당하였다.

헌트[편집]

Hunt, Sir John(1910- )

영국의 군인·등산가. 육군 대령으로 인도에 오랫동안 머물렀다. 1952년 5월 29일, 제9차 영국 원정 대장이 되어 세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에베레스트의 꼭대기에 오르는 데 성공하였다. 정복 대원은 뉴질랜드인 힐라리와 네팔의 산지 주민인 텐징 2명이었다. 저서에 <에베레스트 등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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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ll, Cordell(1871-1955)

미국의 정치가. 테네시 주에서 출생하여 컴벌랜드 대학을 졸업하였다. 테네시 주의 하원 의원·상원 의원을 거쳐, 1933년 루스벨트 대통령 밑에서 국무 장관이 되었다. 그는 경제 문제에 밝아 런던 경제 회의·모스크바 외상 회의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수습을 위한 미국과 일본 회의의 일을 맡아서 처리하였다. 이 일로 1945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저서로 <코델 헐의 회상기> 2권이 있다.

헐버트[편집]

Hulbert, Homer Bezaleel(1863-1949) 미국의 선교사·언어학자·사학자. 버몬트 주 뉴헤븐에서 출생하였다. 1884년 다트먼 대학을 졸업하고, 유니언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886년 벙커 등과 우리나라에 와서 육영 공원에서 외국어를 가르쳤다. 을사조약 후, 고종의 밀서를 가지고 미국에 가서 대통령을 만나려고 하였으나, 실패하고 다시 우리나라에 왔다. 1906년 <한국 평론>을 통하여 일본의 야만적 침략 행위를 폭로하는 한편, 고종에게 제2차 만국 평화 회의에 밀사를 보내도록 건의하였다. 그는 헤이그에 가서 우리 대표단의 호소문을 <회의 시보>에 게재하게 하는 등 우리나라의 주권 회복 운동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1949년 국빈으로서 우리나라에 와서 병사하였다. 저서에 <한국사> <대동기년> <한국 견문기> 등이 있다.

험프리[편집]

Humphrey, Hubert Horatiao(1911-1978)

미국의 정치가. 미니애폴리스 시장을 거쳐, 1948년 상원 의원이 되어 공민권·농업 문제를 위하여 활약하였다. 1965년 외교 위원·군축소 위원회 의원장을 지냈고, 국제 연합 대표·군축 대표로서 활약하였다. 1959년 그 당시 소련 수상 흐루시초프를 미국으로 초청하기도 하였다. 1961년 민주당 상원 원내 부총무를 지냈고, 존슨 대통령 밑에서 부통령으로 일하였다. 1968년 대통령에 입후보하였으나, 닉슨에게 패하였다. 웅변가로도 이름이 높은 그는 1974년 6월, 우리나라에 내한한 바 있다.

헤겔[편집]

Hegel, Georg Wilhelm Friedrich(1770-1831)

독일의 철학자. 슈투트가르트의 프로테스탄트 정신에 입각한 엄격한 가정에서 출생하였다. 튀빙겐 대학에서 셸링과 함께 칸트 철학과 루터 신학을 배웠다. 1793년 대학을 졸업하고 1800년까지 베른과 프랑크푸르트에서 가정교사를 지냈으며, 그동안 <피히테·셸링 철학 체계의 차이>를 저술하고, 기독교 신학을 연구하여 <예수의 생애> <기독교의 적극성> <기독교와 그 운명>의 초고를 남겼다. 이 논문들 속에는 이미 그의 변증법 사상과 독특한 사관이 엿보인다. 1801년 예나 대학 강사가 되어 셸링과 함께 <철학 비판> 잡지를 발간하였다. 1807년 <정신 현상학>을 출판하였는데, 그는 이 책을 정신의 탐험 여행이라 일컫고 있다. 그 후 대학을 사직하고 밤베르크의 정치 신문 편집을 맡아 보았으며, 1808년부터는 인문 고등학교 교장으로 있었다. 그때의 철학 강의를 <철학 입문>으로 출판하고, 1811년 <논리학>을 출판하였다. 1816년 하이델베르크 대학 철학 교수에 취임하고, <철학 백과 전서>를 저술하였다. 1818년 피히테의 후임으로 베를린 대학의 철학 강의를 맡았다. 그 후 13년 동안 그의 철학은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한 전 독일 철학계를 지배하였으며, 유력한 학파로 형성되었다. 1821년, 청년 시절부터 관심사였던 법률·도덕·국가의 문제를 체계적으로 다룬 <법 철학>을 저술하였다. 1830년 베를린 대학 총장으로 취임하여, 이듬해 논리학 개정판을 집필하던 중 콜레라에 걸려 사망하였다.

헤딘[편집]

Hedin, Sven Anders(1865-1952)스웨덴의 지리학자·탐험가. 1893-1897년 파미르 고원을 넘어서 호탄 지방의 옛도시를 조사하였고, 1899-1902년 뤼부포 호를 조사하여 많은 유물을 발견하였다. 그 외 여러 차례의 여행을 통해 발견한 풍부한 유물들은 지리학뿐만 아니라, 미술사와 고고학에 공헌한 바가 크다. 저서에 <아시아 횡단기> <남부 티베트> <내가 만난 위인들> 등이 있다.

헤라클레이토스[편집]

Heracleitos(B. C. 6-5세기)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그는 만물의 본질은 불이며, 온갖 사물은 불에서 비롯된 것으로, 변하지 않는 물질이란 없다는 '만물 유전설'을 주창했다. 또한 만물은 대립을 통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낸다고 하여, 이후 헤겔 변증법의 바탕을 만들었다.

헤로도토스[편집]

Herodotos(기원전 484년경-기원전 425년경)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역사책을 써서 '역사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진다. 소아시아에서 출생하여, 후에 고향을 떠나 각지를 여행하였다. 그가 쓴 <역사>는 그가 여행하면서 얻은 많은 경험과 지식을 살려, 페르시아 전쟁을 중심으로 오리엔트 여러 나라의 신기한 모습이나 습관·풍토·전설까지 써 넣은, 아름다운 문장으로 된 이야기이다.

헤론[편집]

Heron(2세기경)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물리학자.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하였다는 것 이외에는 어느 시대 사람인지 분명하지 않다. 업적으로는 수학 외에 역학·측량·기계 제작 등의 응용면과 많은 저서를 남겼다. 2차 방정식을 푸는 방법, 삼각형 변의 길이로 면적을 구하는 '헤론의 공식'과 3제곱근의 근사치의 발견, 원·원뿔·피라미드 형 등의 넓이를 구하는 방법을 발표하여 수학의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이 밖에도 지레와 나사의 단일 기계, 증기력·수력을 이용한 각종 장치의 발명도 유명하다. 저서로 <측량술> <기체 장치> <조준의> 등이 있다.

헤르츠[편집]

Hertz, Heinrich Rudolf(1857-1894)독일의 물리학자. 뮌헨·베를린에서 공학 및 물리학을 배웠다. 1880년 <동전기의 운동 에너지에 관한 연구>로 베를린 대학상을 받았다. 그는 전기 진동으로 생기는 전자파를 실제로 증명해 보여 이것이 광파와 같은 것임을 확인하였다. 또 시간·공간·질량의 3기초에서 시작한 '헤르츠의 역학'을 세웠다. 진동수의 단위 '헤르츠(Hz)'는 그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저서로 <새로운 관점에서 본 역학 원리> <전기력의 전개에 관한 연구> 등이 있다.

헤르츠[편집]

Hertz, Gustav(1887-1975) 독일의 원자 물리학자. 함부르크에서 출생하여, 할레 대학 교수·지멘스 공업 상회 연구소장을 지냈다. 1932년 방사성 동위 원소의 분리법을 개발하였으며, 미국의 원자력 위원회에서 그의 방법을 이용하여 우라늄 분리 공장을 건설하였다. 1945-1954년에 걸쳐 소련에서 연구한 공로로 스탈린 상을 받았다. 보어의 원자론 이론을 증명하여, 1925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헤밍웨이[편집]

Hemingway, Ernest Miller(1899-1961)

미국의 소설가. 일리노이 주에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오크바크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신문 기자가 되었다. 19세 때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이탈리아 전선에 종군하였다. 전쟁 후 귀국하였다가 파리로 건너가 문학 활동을 시작하였다. 1925년 최초의 단편집 <우리들의 시대>를 발표하고, 1926년 귀국하여 제1차 세계대전 후의 순간적인 삶을 묘사한, '로스트 제너레이션'의 쾌락 추구와 환멸을 그린 장편 소설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를 발표하여 이름을 떨치기 시작하였다. 1929년 전쟁 도피 소설 <무기여 잘 있거라> 등의 소설과 단편집을 발표하여, 철저한 사실주의와 구어적 특징을 극도로 발휘한 간결하고 굵은 문체에 의하여 로스트 제너레이션의 대표적 작가가 되었다. 1937년 에스파냐 내란에 특파원으로 활동한 뒤, 그곳에서 취재한 것을 소재로 1940년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발표하여 세계적인 작가가 되었다. 문체는 초기의 직선적인 문체에서 차츰 매끄럽고 암시적이며, 정치적 자유주의의 지지와 감동적인 신앙으로 집필되었다. 1952년 인간 투지의 절정을 묘사한 <노인과 바다>를 발표하여 퓰리처상을 받았다. 1954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1961년 산장에서 엽총 사고로 사망하였다.

헤베시[편집]

Hevesy, Georg de(1885-1966)헝가리의 화학자. 부다페스트에서 출생하여, 스톡홀름 대학 유기 화학 연구소에서 일하였다. 그는 희토류의 원소를 연구하고, 1923년 코스터와 함께 하프늄을 발견하였다. 그 X선 분석을 화학에 응용하고 동위 원소의 생리학적인 응용을 연구하여, 1943년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저서에 <방사능 지시약>이 있다.

헤벨[편집]

Hebbel, Friedrich(1813-1863)

독일의 극작가. 가난한 미장이의 아들로 태어나 교회 관리인의 서기로 일하였다. 23세 때 그의 글재주가 인정되어 어느 여류 작가의 도움으로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공부하였다. 그가 함부르크에 있을 때 하숙집 소녀의 사랑에 감동되어 첫 희곡 <유디트>를 발표하였다. 그 후로 계속 작품을 발표하여, 괴테·실러를 잇는 독일 비극의 전통을 지키면서 사실주의 희곡을 완성시켰다. 헤겔의 영향을 받아 사변적이기는 하지만, 그의 작품 구성은 놀랄 만한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환경과 성격 묘사에 뛰어나 개인과 세계의 숙명적인 갈등을 그렸다. 그는 희곡뿐만 아니라 서정시와 단편 소설에도 걸작을 남겼다. 작품에 희곡 <유디트> <니벨룽겐의 사람들> <마리아 막달레나> 등이 있다.

헤비사이드[편집]

Heaviside, Oliver(1850-1925)영국의 수리 물리학자·전기 공학자. 런던 출생으로 전리층을 발견하였다. 파장이 짧은 전파(단파)가 먼 거리의 통신에 알맞다는 것을, 1902년경 헤비사이드와 미국의 케넬리가 각각 따로 발견하였다. 지상으로부터 100km의 하늘에는 전기를 띤 전리층이 있어, 단파는 그 층과 땅 사이를 되풀이하여 반사하기 때문에, 멀리까지 전파를 보낼 수 있게 된다.

헤세[편집]

Hesse, Hermann(1877-1962)

독일의 시인·철학자. 슈바벤 지방의 칼부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목사이고, 어머니는 선교사의 딸이었다. 처음에는 목사가 되려고 신학교에 들어갔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서 중퇴하였다. 그 후 시계공·서점의 점원으로 일하면서 바젤 대학에서 강의를 들으며, 작품을 발표하여 작가로서 출발하였다. 1911년 인도로 여행, 신비한 인도 사상에 큰 영향을 받았다. 1904년 단편 소설 <페터카멘친트>를 발표하여 유명해졌으며, 그 해 스위스의 보덴 호반으로 이주하여 1923년 스위스 국적을 얻었다. 그곳에서 그의 대표적인 작품을 계속 발표하였다. 그는 여행을 즐겼으며, 제1차 세계대전을 반대한 평화주의자였다. 그의 시·소설·수필은 음악적인 아름다운 리듬과 명상적이며 불교 사상을 나타내고 있다. 1946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대표 작품으로 <데미안> <싯다르타> <유리알 유희>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등과 평론집 <관찰>이 있다.

헤스[편집]

Hess Victor Franz(1883-1964)

미국의 물리학자. 오스트리아에서 출생하였다. 그라츠 대학을 졸업하고, 그라츠·인스부르크 대학의 교수를 역임하였다. 기구로써 하늘을 관측하고 우주선의 성질을 처음부터 정밀하게 조사하여 그 연구로써 1936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헤시오도스[편집]

Hesiodos

고대 그리스의 시인.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서사시인이다. 보이오티아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농민의 하루하루> <신통기> 등의 작품을 썼다. <농민의 하루하루>는 보이오티아 농민의 노동을 그려 노동의 신성함을 노래한 것이다. 이것은 방종한 동생 페르사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하여 썼다고 전해지고 있다. <신통기>는 신들의 계보에 대한 것으로 특히 제우스 신의 덕과 힘을 강조하고 있다.

헤이겐[편집]

Hagen, John P.(1908-?)

미국의 우주 과학자. 보스턴·예일 대학에서 물리학을 공부하고, 1935년 무선 통신 및 레이다를 연구하기 위하여 해군 연구소에 들어갔다. 1949년 천문학 박사 학위를 받고, 1954년 해양의 대기 책임자·천체 물리학 부장, 1955년 '뱅가이드 인공 위성 발사 계획'의 책임자를 역임하고, 1958년 미국 최초의 인공 위성을 발사하였다.

헤이그[편집]

Haig, Alexander Meigs(1924- )미국의 군인·정치가. 1947년 미국 육군 대학을 졸업, 1962년 조지타운 대학 수료, 육군 대장으로 나토 사령관을 거쳐, 1969-1973년 국가 안보 회의 직원으로 일하였다. 1973년 5월부터 9월까지 백악관 막료장으로 일하였다. 레이건 행정부의 국무 장관으로 있다가 1981년 사임하였다.

헤이스팅스[편집]

Hastings, Warren(1732-1818)영국의 정치가. 1750년 동인도 회사의 서기가 되었고, 이어 마드라스 참사회 차석이 되어 행정과 세금 제도를 개혁하였다. 1773년 초대 인도 총독의 자리에 올라 영국 농토로서 인도를 빼앗는 데 성공하였다. 또한 인도 통치에 뛰어난 솜씨를 발휘하여 프랑스와 결탁한 반영 세력의 무력적 침공을 무찌르고, 행정면·재정면에 개혁을 단행하여 영국의 인도 지배의 기초를 굳혔다. 그는 인도를 몹시 가혹하게 다스려 후에 영국인들에게도 큰 비난을 받았다.

헨더슨[편집]

Henderson, Arthur(1863-1935)영국의 정치가. 글래스고에서 출생하여, 1903년 달링턴 시장 및 하원 의장이 되었다. 1924년 제1차 노동당 내각의 내상을 거쳐 제2차 내각의 외상이 되었으나, 맥도널드 수상이 거국 내각을 조직하였을 때, 이를 반대하는 노동당의 지도자가 되었다. 1932년 제네바 군축 회의의 의장으로 활약하였고, 1934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헨델[편집]

Handel, Georg Friedrich(1685-1759)독일의 작곡가. 중부 독일의 할레에서 바흐와 같은 해에 출생하였다. 어릴 때부터 음악에 재능을 나타냈으나, 궁정의 의사였던 아버지는 악기 만지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는 다락방에 숨어서 클라비코드(16세기-19세기에 사용한 피아노)를 치며 연습하였다. 1692년 7세 때 작센 공 앞에서 오르간을 연주하여, 재능을 인정받아 정식으로 음악 공부를 하게 되었다. 1703년 함부르크 가극장에서 바이올린 연주자로 활약하면서, 1705년 처녀작 가극 <알미라>를 작곡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의 명성이 높아짐을 질투한 사람들의 방해를 받자, 이듬해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났다. 그는 그곳에서 이탈리아 음악을 공부하고 1710년 귀국하여 하노버 선제후의 악사장으로 임명되었다. 1711년 영국으로 건너가 영국 가극계에서 활약하고, 오페라 <리날도>를 상연하여 크게 성공하였다. 런던에 머무르는 동안 앤 여왕으로부터 연금을 받았으나, 조지 1세가 왕이 되자 궁정에서 멀어졌다. 1717년 <수상 음악>을 작곡하여 왕과의 사이가 좋아지자, 많은 가극을 작곡하는 등 큰 역할을 하였다. 그동안 반대파의 귀족들이나 음악가들과의 싸움으로 여러 번 곤란한 입장에 처하였으나 1741년 오라토리오 <메시아>를 작곡하고 큰 인기를 얻었다. 1743년 <메시아>를 초연했을 때, 음악이 <할렐루야> 합창곡 대목에 이르자, 국왕이 감격하여 자리에서 일어섰으며, 옆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일어서서 그 곡을 들었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이 곡을 들을 때에는 일어서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그 후 왕립 음악 학교 교장이 되었으나, 백내장의 악화로 앞을 볼 수 없어 연주 활동을 중단한 후, 세상을 떠났다. 그는 외국인이면서도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다. 작품은 웅대하고 장엄하여, 영국의 귀족적 취미와 신흥 산업 자본가의 취미에 알맞았으며, 바흐와 더불어 바로크 음악의 마지막을 빛낸 위대한 음악가이다. 작품은 가극 40편, 성극 80곡, 성악 70곡 외에 기악곡·합창곡이 많다.

헨리[편집]

Henry, Patrick(1736-1799) 미국의 정치가·독립 운동가. 독학으로 변호사가 된 그는, 1765년 버지니아 식민지 회의 의원이 되어 미국의 독립 운동에 앞장섰다. 그 후 대륙 회의 대표, 버지니아 주 지사 등을 지내고, 독립 혁명 후에는 버지니아 주에서 종교의 자유를 법률로 제정하는 데 힘썼다. 또한 민주적인 헌법을 실현시키려고 많은 노력을 하였다. 특히 오뎅에서 그가 한 연설 가운데 독립을 주장하면서 외친, \"우리들에게 자유를 달라!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달라!\"는 말은 유명하다.

헨리[편집]

Henry, William(1774-1836) 영국의 화학자·약학자. 에든버러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맨체스터에서 잠시 의사로 일하였다. 그 후 화학 연구에 전념하여 왕립 화학 연구소에 근무하며 기체에 관한 실험을 통해 1800년 <염소 가스 취급법>을 간행하였다. 1803년 물에 대한 기체의 용해도는 그 기체의 압력에 비례한다고 하는 '헨리의 법칙'을 발견하였다.

헨리[편집]

Henry, Joseph(1797-1878) 미국의 물리학자. 시계 기술자였으나, 후에 물리학을 연구하였다. 1830년 패러데이와는 다르게 전자 유도와 전류의 자기 유도 현상을 발견하여, 전자기학을 발전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유도 계수의 단위인 '헨리'는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헨리 1세[편집]

Henry Ⅰ(1068-1135)

영국의 왕(재위 1100-1135). 윌리엄 1세의 막내아들이다. 그는 귀족의 권리를 인정하고 쫓겨났던 켄터베리 대주교를 다시 돌아오게 하였으며, 색슨 왕조 계통의 스코틀랜드 왕녀와 결혼하는 등 여러 계층 사람들의 지지를 얻었다. 그는 또한 왕의 권력을 높이고 법령을 정리하였으며 순회 재판 제도를 만들었다.

헨리 3세[편집]

Henry Ⅲ(1207-1272)

영국의 왕(재위 1216-1272). 존 왕의 큰 아들로서 정치를 잘 못하고 귀족과 서민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내렸기 때문에, 1258년 귀족인 시몽 드 몽포르가 이끄는 반란이 일어났다. 1264년 몽포르가 죽은 후, 귀족과 그 밖에 주·도시 대표들을 포함한 신분제 의회를 소집하여 영국의 정치 역사상 새로운 길을 열었다.

헨리 4세[편집]

Henry Ⅳ(1367-1413)

영국의 왕(재위 1399-1413). 랭커스터 집안의 창시자로 에드워드 3세의 손자이다. 1398년 사촌형 리처드 2세에게 쫓겨나기도 하였지만 후에 의회의 지지로 왕위에 오름으로써 랭커스터 왕조를 열었다. 그러나 이 때문에 귀족 가운데 왕위를 노리는 사람이 많이 생기고 음모와 반란이 계획되어 이를 막기 위해 몹시 고생하였다.

헨리 7세[편집]

Henry Ⅶ(1457-1509)

영국의 왕(재위 1485-1509). 튜더 왕조의 시조. 리치먼드 공 에드먼드 튜더의 아들이다. 리처드 3세를 물리치고 왕위에 올라 요크 가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하였으며, 장미 전쟁을 종결시켰다. 왕권의 확대를 꾀하여 결혼 정책으로써 스코틀랜드·아라곤 등과 외교를 하여 외국의 압박을 막고, 안으로는 귀족·의회·성직자의 세력을 눌러, 튜더 절대 왕조 확립의 기초를 다졌다.

헨리 8세[편집]

Henry Ⅷ(1491-1547)

영국 튜더 왕조의 제2대 왕(재위 1509-1547). 형이 죽은 후 형수 캐서린과 결혼하였으나, 즉위한 후에 이혼하고 새 왕후를 맞이하였다. 로마 교황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왕을 파면하였다. 이에 1534년 '수장령'을 발표하여, 교황으로부터 독립하여 스스로 영국 국교회의 수장이 되었다. 이리하여 정치·종교의 최고 권력을 쥐고 웨일스·아일랜드·스코틀랜드에까지 세력을 넓혔다. 엘리자베스 1세는 그의 딸이다.

헬렌 켈러[편집]

→ 켈러

헬름홀츠[편집]

Helmholtz, Hermann Ludwing Fe­rd

nand von(1821-1894)

독일의 물리학자·생리학자. 포츠담의 가난한 가정에서 출생하였다. 고학으로 프리드리히 빌헬름 의과 대학을 나와, 1842년 베를린 샤리테 병원 외과 의사로 일하였다. 그 후 군의가 되었는데, 물리학에 흥미를 느끼고 1847년 <힘의 보존>이라는 논문을 발표,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수학으로 밝혀냈다. 이 원리는 물리학을 비롯하여 화학·생물학·의학 등의 근대 물리학에 새로운 바탕을 이룩하는 기초가 되었다. 1851년 눈을 검사하는 검안경을 발명하여 생리 광학의 발달을 촉진하기도 하였다. 1887년 국립 물리 공학 연구소의 소장이 되었다. 그는 철학자로도 유명하다. 저서에 <생리 광학> <이론 물리학 서설> 등이 있다.

헬몬트[편집]

Helmont, Jan Baptista van(1579-1644)

벨기에의 화학자. 브뤼셀에서 출생하여, 처음에는 의학을 공부하였으나, 후에 화학·자연 철학으로 바꾸었다. 그는 화학에 있어서 천평(저울)을 써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또 화학 변화를 할 때에는 물질이 없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혔다. 화학 용어에 관해서도 기체나 산·염기의 결합에 '포화'라고 하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하는 등 화학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현각[편집]

玄覺(637-713)

중국의 승려. 본성은 대(戴), 자는 명도, 호는 일숙각, 시호는 무상 대사·진각 대사이다. 원저우(溫州) 융자(永嘉) 현 사람으로 8세에 승려가 되어 경론을 널리 연구하였다. 특히 천태 지관에 정통하였고, 처음 용주의 용흥사에 있다가 스스로 선암을 짓고 선관을 닦았으며, 후에 조계의 혜능을 뵙고 의심을 결단하였다. 용흥사 별원에서 사망하였다.

현장[편집]

玄裝(602-664)

중국 당나라의 승려. 본성은 진(陳), 본이름은 위이다. 낙주(落州) 구씨현(九氏縣) 사람이다. 13세에 절에 들어간 그는 인도에 가서 공부를 하고 싶어, 632년경 몰래 국경을 넘어 서역으로 향하여, 괴로운 여행을 계속한 끝에 마침내 인도에 도착하였다. 그 당시 불교의 중심지였던 나란다 사에서 공부를 하였다. 또 석가모니와 유서 깊은 인도의 여러 곳을 여행하며 연구를 거듭하였다. 많은 불경을 가지고, 고국을 떠난 지 20여년 만에 돌아왔다. 당나라 황제에게서 크게 환영을 받고 존경을 받았다. 그 후 인도에서 가져 온 불경을 번역하는 데 몰두하며 일생을 마쳤다. 천축(인도)으로 불경을 얻으러 가는 삼장 법사를 모시고 가는 손오공의 활약을 내용으로 하는 <서유기>는 현장의 여행기를 기초로 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현장이 저술한 <당대 서역기>는 그 당시 서역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는 중요한 역사 자료이다.

현종[편집]

玄宗(685-762)

중국 당나라의 제6대 황제(재위 712-756). 왕위에 오르자 어지러워진 정치를 바로잡는 데에 힘을 다해, '개원의 치세'라고 일컬어지는 평화로운 번영의 시대가 계속되었다. 시인 이 백과 두 보가 활약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당나라의 형세는 국외에도 알려지고 수도인 장안에는 외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문물을 구하려고 찾아들었다. 그러나 만년에 양귀비에게 빠져 나라의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755년 절도사인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켰다. 양귀비는 살해되고 현종은 촉나라로 도망가 그곳에서 죽었다. 이후 당나라는 힘이 약해져 통일을 이루지 못하였다.

호라티우스[편집]

Horatius, Flaccus Quintus(기원전 65-기원전 8)

로마의 시인. 베네치아에서 출생하여 로마에서 교육을 받고 18세 때 아테네의 아카데미에 들어가 그리스어를 공부하였다. 기원전 44년 브루투스를 따라 종군하였으며, 패하여 귀국한 후로 생활이 어려워 시를 쓰기 시작하였다. 그는 시인 베르길리우스에게 인정받았으며, 문예 애호가인 귀족 메키나스를 알게 되어 궁정의 계관 시인이 되었다. 첫 시집 <에포디>를 발표한 후, 그의 서정시의 극치를 이루는 <서정 시집> 4권을 발표하였다. 그의 시의 형식은 완벽한 아름다움을 갖춘 서정시로, 그가 완성한 시법은 후세에 큰 영향을 끼쳤다.

호르텐시우스[편집]

Hortensius

로마의 정치가. 기원전 286년 귀족과 평민과의 싸움을 조정하기 위하여 총통으로 뽑혔다. 그는 평민회가 결정한 일은 원로원의 승인을 거치지 않더라도 효력을 갖는다는 '호르텐시우스 법'을 만들었다. 이로써 귀족과 평민간의 계급 투쟁에 일단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호메로스[편집]

Homeros(기원전 800년경-기원전 750)

그리스의 시인. 호머라고도 한다. 유럽 문학에서 가장 오래 된 최대의 서사시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썼다고 한다. 이들 서사시는 장편으로 각각 24권으로 되어 있으며, 고대 그리스의 국민적 서사시로 로마와 그 후의 서사시의 모범이 되었다.

호메이니[편집]

Khomeini, Ayatollah R.(1900-1989)

이란의 종교 정치 지도자. 1927년부터 회교 교당에서 강의하였으며, 1953년 반왕정 운동을 이끌다가 팔라비에 의해 투옥되었다. 1963년 반왕정 운동 주도 혐의로 다시 구속되어 터키·이라크·파리 등지로 망명하였다. 1979년 팔라비가 왕위에서 물러나자, 호메이니는 수백만 국민의 환영 속에 귀국하여 이란 국민의 정신적 지도자로 받들어졌다.

호손[편집]

Hawthorne, Nathaniel(1804-1864)미국의 소설가. 매사추세츠 주의 항구 도시 세일럼에서 선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보든 대학에 입학하여 그곳에서 프랭클린, 롱펠로 등과 사귀었다. 대학 졸업 후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하였다. 1837년 발표한 단편집 <트와이 스톨드테일즈>로 인정받고, 후에 장편 소설 <주홍 글씨>, 어린이들을 위해 신화를 쉽게 풀어쓴 <원더 북> 등을 발표하였다. 후에 영국 대사로 영국에 부임하고 귀국하였으나, 남북 전쟁이 일어나 불안한 만년을 보냈다. 그의 작품의 대부분은 인간의 죄를 거듭해서 탐구하는 청교도적인 전통을 잘 표현하였다. 현실성이 부족하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으나, 냉정하면서도 이지적인 관찰을 쉽고 정확한 문장으로 표현하여 소설가로서의 재질을 발휘하였다. 포와 더불어 미국 단편 소설의 형식을 만들어 낸 사람이다.

호이겐스[편집]

Huyghens, Christian(1629-1695)네덜란드의 수학자·물리학자·천문학자. 형과 함께 렌즈의 새로운 연마법을 연구하여 망원경을 개량하였고, 1655년 태양계를 관측하여 토성을 둘러싸고 있는 고리 모양의 원과 위성을 발견하였다. 그는 원운동에 있어서 원심력의 법칙, 추시계 제작 등을 연구하고, '빛의 파동설'을 발표하였다. 에테르 개념을 도입한 파동 전파의 설명으로 '호이겐스 원리'를 세워 반사 굴절·복굴절 등 광학 현상을 이론적으로 밝혔다. 저서로 <광론> 등이 있다.

호이스[편집]

Heuss, Theodor(1884-1963)

독일의 정치가. 서독의 초대 대통령을 지냈다. 뮌헨·베를린 대학을 졸업하고 신문 기자 생활을 하였다. 1924년 국회 의원이 되었으며, 나치스 정권이 무너진 후에는 문필 생활을 하였다. 1945년 문화 교육상을 거쳐, 1948년 미군 점령 지구에서 자유 민주당 당수가 되었다. 이듬해 초대 대통령이 되었으며, 1959년까지 재임하였다. 그는 명령을 내리기보다 그렇게 하도록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것을 지도자의 신념으로 삼았다.

호치민[편집]

→ 후즈밍

호프만[편집]

Hoffmann, Ernst T.(1776-1822)독일의 후기 낭만파 소설가. 프러시아의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출생하였으며, 그림과 음악에 뛰어났고 대법원 판사를 지냈다. 그 후 소설을 쓰기 시작했는데, 공상적이며 마법적인 기괴한 것이 많으며 포에게 영향을 주었다. 작품으로 단편 <칼로 풍의 환상곡> <소야곡> 등과 장편 <악마의 영액> <수코양이 무르의 인생관> 등이 있다. 오펜 바흐의 가극에 유명한 <호프만 이야기>가 있다.

호프만슈탈[편집]

Hofmannsthal, Hugo von(1874-1929)

오스트리아의 시인·극작가. 빈에서 출생하였으며, 17세 때 <어제>를 발표하고 계속하여 서정시와 극을 발표하였는데, 특히 <어리석은 사람과 죽음>은 유명하다. 당시는 자연주의 시대의 절정기였는데도, 그는 개인주의적·귀족주의적·유미주의적인 서정극을 발표하였다. 고전극을 번역한 <엘렉트라>와 오페라도 있는데, 특히 오페라 <장미 기사>는 슈트라우스의 작곡으로 유명해졌다. 그 밖에 우화 소설 <그림자 없는 여자>와 서정적인 상징시를 모은 <시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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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ll, Granville S.(1844-1924) 미국의 심리학자. 미국에서 처음으로 실험소를 열어 실험 심리학자로 이름을 떨쳤다. 또한 아동 심리와 청년 심리의 연구를 교육학에 응용하여 교육자로서도 이름이 높았다. 1887년 <미국 심리학보>를 창간하였으며, 미국 심리학회를 조직하여 초대 회장이 되었다. 저서로 <청년기의 연구> 2권이 있다.

[편집]

Hall, Charles M.(1863-1914) 미국의 야금학자. 1886년 알루미늄의 전해 야금법을 발명하였다. 또 에루와 더불어 알루미늄 공업 개척자의 한 사람이다.

홀바인[편집]

Holbein, Hans(1497-1543)

독일의 화가. 아우구스부르크에서 출생하였으며, 화가였던 아버지로부터 큰 감화를 받으며 자랐다. 헨리 8세의 궁정 화가로, 특히 초상화에 능하여 신성한 것과 세속적인 것이 동등하게 그려진 종교적인 기풍 등으로 인해 독일 최대의 화가로 일컬어진다. 작품으로 <헨리 8세> <모레테 상> <에라스무스> <죽음의 무도> <대사들> 등이 있다.

홉스[편집]

Hobbes, Thomas(1588-1679)

영국의 철학자·법학자. 맘즈베리에서 출생하였으며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하였다. 그 후 여러 차례 유럽 등지를 여행하면서 데카르트·메르센 등과 사귀었다. 그는 인간은 자기 자신의 행복만을 얻으려고 하는 이기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사람은 사람에 대하여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따라서 공동 사회의 이익과 질서를 지키기 위해서는 국가에서 강제적으로 백성을 복종시켜야 한다는 국가 계약설을 주장하였다. 저서로 <철학 입문> <법학 요론> <리바이어던> <인간론> 등이 있다.

홉킨스[편집]

Hopkins, Frederik G.(1861-1947)영국의 생화학자.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로 있으면서 동물의 영양 화학을 실험할 때 부영양소가 있음을 알고 비타민 연구의 길을 열었다. 또한 근육 수축과 유산·몸 안의 색소·세포 안의 호흡 연구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1929년 에이크만과 함께 노벨 의학상을 받았다.

홍수전[편집]

洪秀全(1813-1864)

중국 청왕조에 반대한 태평천국의 우두머리. 그는 스스로 크리스트의 동생이라고 주장하여 '상제회'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1851년 청왕조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켜 나라 이름을 '태평천국'이라 하고 스스로 천왕이라고 하였다. 그는 만주족의 나라를 무너뜨리고 한족의 나라를 세우자는 멸만 흥한을 내세웠으며, 만주족의 풍습인 변발을 하지 않고 머리를 길렀으므로 '장발적의 난'이라고도 한다. 당시 청왕조에 불만을 품고 있던 가난한 농민들이 이에 많이 합세하여 태평천국의 세력은 점점 커졌다. 그리하여 1853년 난징을 점령하고 이곳을 수도로 삼아 새로운 토지 제도를 실시하는 등 새 정책을 폈다. 그러나 내분이 일어나고, 또 청의 증국번과 영국의 고든 장군 등 외세의 공격을 받아 1864년 자살하였다.

화궈펑[편집]

華國鋒(1920- )

중국의 정치가. 중학교를 중퇴하고 17세 때 항일 유격대에 참가하였다. 1949년 후난 성 샹인 현 지구당의 초대 서기로 뽑혔다가, 1956년 당 상무위원으로 올랐다. 1969년 당 중앙위원이 되고, 당 정치국원 등을 거쳐서, 1975년 부수상 겸 공안상의 자리에 올랐다. 이듬해 마오쩌둥이 죽자 덩샤오핑 일파에게 밀려 모든 실권을 빼앗겼다.

화이트[편집]

White, Patrick(1912- )

오스트레일리아의 작가. 케임브리지 대학 재학중에 시집 <밭가는 사람>으로 문단에 등장하였다. <행복의 골짜기>에서 의식의 흐름의 수법을 채용한 인상파적 문체로 각광을 받았다. 그 밖에 <죽은 자와 산 자> <인간의 나무>, 단편집 <타버린 자들>이 있다. 1973년 <폭풍의 눈>을 쓴 후 문학상의 신대륙인 오스트레일리아의 모습을 소개한 공로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황 소[편집]

黃巢(?-884)

중국 당나라 말기의 농민 반란 주모자. 관리에 뜻을 두었으나 과거에 낙방하고 소금 장사를 하였다. 당시는 정치가 몹시 어지러워 농민은 과중한 세금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마침 큰 흉년이 들어 민심이 동요한 틈을 타 왕선지가 난을 일으키자 이에 호응하여 난을 일으켰다. 이에 수많은 농민이 이에 가담하여 산둥으로부터 광둥에 걸쳐 정부군을 격파하고 마침내 도읍인 장안을 점령하였다. 884년 황 소는 희종을 내쫓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 나라 이름을 대제(大齊)라 하였다. 그러나 당나라 병마사 이극용에게 패하여 죽었다. 10년간이나 계속된 황 소의 난은 당나라가 망하는 원인이 되었다. 이 난 때 신라의 최치원이 당나라에 있으면서 <토황소격문>을 지었다.

황정견[편집]

黃庭堅(1045-1105)

중국 송나라의 시인. 장시 성 사람으로 23세 때 진사 시험에 합격하여 국사 편수관이 되었다. 그는 소 식의 제자 가운데 '4학사'의 한 사람으로 불리어진다. 소 식이 자기보다 더 뛰어났다고 말하였을 만큼 송나라 제일의 걸작을 남겼다. 강서파의 원조이며 서예에도 뛰어나 송나라 4대가의 한 사람이다. 저서로 <산곡내집> 30권과 <외집> 2권이 있다.

황종희[편집]

黃宗羲(1610-1695)

중국 명나라의 유학자·고증학자. 저장 성 사람으로 '남뇌 선생'이라고도 한다. 명나라 말기에 만주족이 쳐들어오자 마을 청년들을 모아 고향을 지켰고, 명나라가 망한 뒤에는 청나라의 벼슬을 받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그는 양명학의 전통을 이어받아 비판적인 태도로 현실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철학·사학·천문학·수학 등 여러 학문에 걸쳐서 연구하여, 청나라의 역사학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청나라 말기 양계초 등의 정치 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저서로 <명이대방록> <명유학안> <송원학안> 등이 있다.

황준헌(쭌셴)[편집]

黃遵憲

중국 청나라의 외교관. 1880년 주일 청국 공사관 참찬관으로 있을 때, 수신사로 일본에 간 김홍집에게 '러시아의 침략을 막기 위해서는 조선이 중국·일본·미국 등과 협상을 맺어야 한다'는 내용이 적힌 <조선 책략>을 주었다. 1882년 한·미 조약을 체결할 때 이홍장의 명령으로 조약문을 기초하였다. 그 후 벼슬이 호남 안찰사에까지 이르렀다.

횔덜린[편집]

Holderlin, Johann C.(1770-1843)독일의 시인. 라우헨에서 출생하였으며 튀빙겐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였다. 재학 당시 철학자 헤겔·셸링 등과 사귀었다. 고대 그리스를 동경하여 낭만적·종교적인 이상주의를 노래한 그의 시는 오늘날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작품으로는 소설 <히페리온>, 비극 <엠페도클레스>, 시 <라인> <다도해> <시인의 위기> 등이 있다.

효문제[편집]

孝文帝(467-499)

중국 북위의 제6대 황제(재위 471-499). 5세에 즉위하여 문명 태후가 섭정하였다. 490년부터 친히 정치를 돌보았다. 중국 문화를 숭배하여 그가 태어난 선비족에게 선비의 말과 옷을 금하고, 중국 사람과 결혼할 것을 장려하는 등 중국화 정책을 썼다. 또한 황실의 성인 탁발씨를 원씨로 고쳤으며, 균전제를 실시하고 평성에서 뤄양으로 도읍을 옮겼다.

후버[편집]

Hoover, Herbert C.(1874-1964)미국의 제31대 대통령. 스탠포드 대학을 졸업하였으며 광산 기사로 일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때에 윌슨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식량국 장관·연합국 식량 회의 의장이 되었다. 1929년 공화당으로 입후보하여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그 해 세계 대공황이 시작되어 어려움을 겪었다. 1932년 대통령 선거에서 루스벨트에게 크게 패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도 세계의 식량 문제 해결에 노력하였으며, 행정 기구 재편성 위원회인 후버 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있었다.

후세인[편집]

Hussein(1935-1999)

요르단의 국왕. '분쟁의 해결사' '줄타기 외교의 명수' '천의 얼굴을 가진 사나이'라고 일컬어짐. 암만 출생.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이슬람학교를 거쳐 영국의 샌드허스트 왕립군사학교에서 공부했다. 할아버지 압달라 국왕의 암살에 이어 즉위한 아버지가 1952년 8월 건강이 나빠져 퇴위하자 17세 때 왕위를 이어받았다. 1967년 제3차 중동전쟁(6일전쟁)에 아랍의 일원으로 참전했다가 패배해 동예루살렘과 요르단강 서안을 이스라엘에 빼앗기기도 했다. 1970년 9월 요르단 내 팔레스타인인들이 봉기하자 무력으로 진압, 무려 3천여 명의 팔레스타인인이 사망하는 대참극이 빚어졌다. 1980년과 1987년 각각 아랍정상회의를 성사시켰으며, 1988년에는 요르단강 서안에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의 대표권을 인정했다. 1991년 걸프전 때는 이라크를 지지했으나 94년에는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수완을 발휘했다. 그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평화협상 중재를 위해서도 노력, 1998년 10월 워싱턴 근교 와이밀스에서 열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협상이 난관에 빠지자 투병중임에도 현지에 달려가 협상을 성사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후스[편집]

Hus, Johannes(1370년경-1415) 체코슬로바키아의 종교가. 보헤미아의 한 농가에서 출생하였으며 프라하 대학을 졸업하였다. 그 후 프라하 대학의 교수·총장을 지냈으며, 이어 베들레헴 교회의 주임 목사로 활약하였다. 그는 위클리프의 영향을 받아, 종교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교회의 부패와 타락을 비난하였다. 그러자 프라하의 대사교는 그를 파문하였으며, 콘스탄츠 종교 회의에서 화형의 형을 받았다. 그는 형벌 앞에서도 종교 개혁을 하려는 강한 태도를 바꾸지 않아, 보헤미아의 순교자라고 불린다. 그 후 그의 신봉자들이 후스 전쟁을 일으켰다. 저서로 <교회사>가 있다.

후스[편집]

胡適(1891-1962) 중국의 문학자·사상가. 안후이 성 사람으로 19세 때 장학생으로 미국의 콜럼비아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여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17년 귀국하여 베이징 대학 철학 교수로 있으면서 <매주 평론>을 발간하여 계몽 운동을 폈다. 당시 중국에서는 문학에 옛날의 어려운 문체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후스는 일상 생활에서 쓰이는 말을 그대로 작품에 쓰자는 '백화 운동'을 벌였다. 이러한 그의 계몽적인 활동은 문학뿐 아니라 역사·철학·정치 평론 등의 모든 분야에까지 미쳤다. 1927년부터 3년간 상하이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중국 문화를 영어로 번역·해설하여, 중국 문화의 체계와 가치를 세우는 등의 업적을 남겼다. 다시 베이징 대학 교수가 되었으며 그 후 국민 정부의 요직을 지냈다. 저서로 <백화문학사> <후스 문존> <중국 철학사 대강> 등이 있다.

후즈밍[편집]

胡志明(1892-1969) 베트남의 정치가·초대 대통령. 일찍이 반 프랑스 운동에 가담하였으며, 러시아에 가서 공산주의를 연구하고 돌아와 공산당을 조직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항일 운동을 하였으며, 전후에는 독립 운동을 일으켜 바오다이를 물러나게 하고, 북부 베트남에 공산 정권을 세워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1946년 프랑스와 전쟁을 하였으며, 1954년 전쟁이 끝나자 국토가 남북으로 갈리었다. 1955년 월맹의 대통령이 되고 당 제1서기가 되었다. 재임중 심장병으로 죽었다.

후크[편집]

Hooke, Robert(1635-1703)

영국의 물리학자·천문학자. 왕립 협회 실험실에 있으면서 빛의 여러 가지 현상과 천체의 움직임을 연구하고 물리학과 천문학에 큰 업적을 남겼다. 그는 빛이 파동의 한 종류라는 것을 밝힘으로써 '빛의 파동설'의 선구자가 되었다. 물리학에서 역학의 기본적인 법칙인 '후크의 법칙'을 발견하였다. 이것은 고체에 힘을 가하여 모양을 변화시킬 때 힘이 어떤 크기를 넘지 않는 한 변화되는 양은 힘의 크기에 비례한다는 법칙이다. 한편, 천문학에 있어서의 지구의 중심이 태양의 둘레에 타원형을 그린다는 것을 실험으로 증명하였다. 뿐만 아니라 현미경으로 세포를 발견하고 '세포'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저서로 <현미경 제도>가 있다.

훌라구[편집]

Hulagu(1218년경-1265)

몽고 제국 일 한국의 초대 왕(재위 1258-1265). 칭기즈 칸의 손자로, 1253년 서방을 원정하여 엘부르즈 산의 이슬람 교도를 멸망시켰다. 또한 이라크의 바그다드와 시리아의 다마스쿠스를 점령하여 이란 서북의 타브리즈와 마라가에 도읍을 정하고 '일 한국'을 세웠다. 그는 천문대·궁전·불교 사원 등을 세웠으며 크리스트 교인을 보호하였다.

훈센[편집]

Hun Sen(1951- )

캄보디아의 제2총리·인민혁명당 정치국원으로 1979년 캄보디아 민족구국 통일전선 중앙위원겸 외무장관, 1981년 부총리겸 외무장관을 지냈으며, 1985년엔 총리, 1987년 외무장관 겸임, 1990년 국방장관겸 내무장관의 자리에 있었다. 1991년부터 현재까지 당중앙위부의장, 제2총리로 있으며, 1996년 방한한 바 있다.

훔볼트[편집]

Humboldt, Alexander von(1769-1859)독일의 지리학자·자연과학자. 베를린에서 출생하였으며 지질학을 공부한 후 광산 감독으로 일하였다. 그 후 남미·중앙 아시아 등을 여행하고 그 경험을 정리하여, 1829년 빈 대학에서 자연 지리학을 가르쳤다. 또한 국제적인 지자기 관측소를 만들었으며 프로이센에 기상학 연구소를 세웠다. 그 외에도 동식물·천문·기후·광물·해양 등의 분야에 큰 업적을 쌓았다. 저서로 <우주> 등이 있다.

휘트먼[편집]

Whitman, Walt(1819-1892)

미국의 시인. 뉴욕에서 가난한 농가의 아들로 출생하였으며, 독학으로 교양을 쌓았다. 그 후 초등 학교 교사·신문 편집 등의 일을 하였으며, 1855년 시집 <풀잎>을 발표하였다. 그는 자유시의 제일인자로 서민의 희망·감회를 자유로운 수법으로 솔직히 노래하였다. 그 밖에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과 미국의 독특한 문학을 주장한 <민주주의 전망>은 미국 물질주의적 경향을 비판하고 인격주의의 필요성을 주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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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e, David(1711-1776)

영국의 철학자·역사가·경제학자. 에든버러에서 출생하였으며, 에든버러 대학을 졸업한 후 철학·문학에 관심을 두고 프랑스로 유학하였다. 귀국 후 <인성론> <도덕 및 정치론>을 저술하였다. 그는 로크의 경험론과 버클리의 관념론을 계승하여 종래의 형이상학에 파괴적인 비판을 가하였다. 1752년 에든버러 도서관장을 지냈으며, 1763년 주 프랑스 대사의 비서로서 루소와 사귀었다.

흐루시초프[편집]

Khrushchev, Nikolai S.(1894-1971)

소련의 정치가. 1918년 공산당에 입당한 후, 우크라이나 공산당 서기장을 지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육군 중장으로 우크라이나를 방위하였고 스탈린의 총애를 받았다. 1952년 중앙 위원회 제1서기로 취임하고, 스탈린이 죽자 정권을 잡았다. 1956년 헝가리의 자유 의거를 무력으로 진압하였으며, 철의 장막을 열어 자유 진영과의 외교를 폈다. 1959년 소련 수상으로서는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1962년 소련 최고 회의에서 수상에 재선되었으나, 1964년 돌연 은퇴하였다.

히로히토[편집]

裕人(1901-1989)

일본의 제124대 국왕(재위 1926-1989). 다이쇼(大正) 국왕의 맏아들로 1916년 15세 때 오아세자로 책봉되었다. 1921년에 다이쇼 국왕의 섭정이 되고, 1924년에 나가코(良子) 왕녀와 결혼, 1926년 12월에 124대 왕위에 올랐다. 중일 전쟁에 이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으며, 1945년 신격을 부정하는 '인간 선언'을 발표하여 일본국 헌법 제정과 함께 상징적인 국가 원수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와의 역사에서 보면 그는 을사조약·경술국치의 일본측 최고 책임자였으며, 한글 말살·창씨 개명·징용 등 한(韓)민족사의 맥을 끊은 식민 지배의 주역으로 평가된다. 1989년에 그의 뒤를 이어 아키히토(明仁) 왕세자가 제125대 국왕에 취임하였다. 이로써 일본의 연호는 쇼와(昭和)에서 헤이세이(平成)로 바뀌게 되었다.

히틀러[편집]

Hitler, Adolf(1889-1945)

독일의 정치가. 오스트리아에서 출생하였으며, 제1차 세계대전 때에는 독일군에 참가하여 싸웠다. 전후 독일 노동당에 들어가 힘을 길렀으며, 1921년 나치스의 당수가 되었다. 히틀러는 공화제 정치를 반대하고 유대인을 배격하며 독일 민족의 우수성을 자랑하면서 세계 정복을 꿈꾸었다. 1933년 총선거에서 나치스 정권을 확립한 그는 이듬해 수상이 되었다. 그는 공산당을 위시한 나치스 이외의 정당을 없애고, 비밀 경찰을 만들어 국민에게서 모든 자유를 빼앗고 독재 정치를 하였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죽자, 1934년 대통령 겸 총통이 되어 독일의 재군비를 시작하였다. 마침내 1939년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온 세계를 전쟁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연합군에게 패하여, 1945년 베를린이 함락되자 자살하였다.

히포크라테스[편집]

Hippocrates(기원전 460년경-기원전 377)

그리스의 의학자. 소아시아 연안에 가까운 코스 섬에서 출생하였으며 아버지로부터 의학을 배웠다. 그 후 철학자·의학자들과 사귀며 지식과 견문을 넓히고 경험을 쌓아, 의학의 여러 분야에 뛰어난 해석과 발견을 이룩하였다. <히포크라테스 전집> 87권이 있는데, 질병의 증세·원인에 대한 계통적 분류·의료 방법·의사가 지녀야 할 책임감과 사명 등을 밝혀서 '의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히포크라테스 의사의 계율'은 지금까지도 의사 계율의 기초가 되고 있다.

히피아스[편집]

Hippias(기원전 560-기원전 490)그리스의 정치가.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아들이다. 아버지가 죽은 후 동생 히파르쿠스와 함께 아테네를 다스렸다. 그 후 아우가 죽자 포악한 정치를 하여 쫓겨났다. 그는 페르시아의 왕 다리우스 1세가 있는 곳으로 가서 페르시아 전쟁에 참가하였다.

힌데미트[편집]

Hindemith, Paul(1895-1963)독일의 바이올리니스트·작곡가. 프랑크푸르트 암마인의 고등 음악학교를 마치고, 프랑크푸르트 가극장의 제1악장으로 일하는 등 초기에는 바이올린 연주자로서 이름을 날렸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작곡가로 활동하였는데, <제3 현악 4중주곡>은 음악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그 후 실내악, 가곡 <성모 마리아의 생애> 등을 발표하고, 1930년경부터 신고전주의적인 중후한 작품을 내놓았다. 교향곡 <화가 마티스>는 이 시대의 유럽 음악을 대표하는 걸작이다.

힌덴부르크[편집]

Hindenburg, Paul von(1847-1934)

독일의 군인·정치가. 1866년 프로이센 군에 들어가 점점 승진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제8군 사령관으로서 러시아군을 크게 이기고, 1916년 이래 패전할 때까지 참모총장으로서 최고 통수의 자리에서 지휘하였다. 1925년 제2대 대통령이 되었고 1932년 재선되었으나, 이듬해 히틀러에게 정권을 넘겨주고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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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ll, Sir Rowland(1795-1879)

영국의 교육자·우편 제도의 개혁자. 그는 아동들의 자주적인 활동을 위한 교육법을 실행하여 새로운 교육 제도를 만드는 데 힘썼다.

힐데브란트[편집]

Hildebrand, Adolf von(1847-1921)

독일의 미학자·조각가. 1867년 이탈리아에 유학하여 피렌체에서 조각을 연구하였다. 그는 고전 작품의 귀족적 예술 이상에 감화하여 시각적이며 구성적인 본질을 주장하였다. 1835년부터는 우편 제도에 흥미를 가져 정해진 값의 우표만 붙이면 어디서나 받아볼 수 있는 우편 제도를 제창하였다. 그는 독일 조각의 아버지라고 불리며, 미술 교육자로서도 유명하다. 작품으로 <비텔스바하 분수장> <브람스 기념상> 등이 있으며, 저서로 <조형 미술에 있어서의 형식상 문제>가 있다.

힐라리[편집]

Hillary, Sir Edmund P.(1919- )뉴질랜드의 등산가·양봉가·탐험가. 1953년 영국 에베레스트 등반대에 끼어, 5월 29일 네팔의 텐징과 함께 뉴질랜드인으로는 처음으로 에베레스트산을 정복하였다. 1936년부터 양봉가로 이름을 떨쳤고, 뉴질랜드의 스키와 등산의 지도자가 되었다. 1955년 남극 탐험 대원이 되었으며, 1958년 남극점에 도달하였다. 저서로 <4개의 에베레스트> <에베레스트의 동쪽> 등이 있다.

힐베르트[편집]

Hilbert, David(1862-1943)

독일의 수학자. 리니히스베르크 대학·괴팅겐 대학의 교수를 지냈다. 정수론과 불변식론을 연구하여 1899년 <기하학 기초론>을 저술하여 공리주의를 제창하였다. 또한 '힐베르트의 공간론'을 만들어 적분 방정식론에 큰 업적을 남겼다. 저서로 <선형 적분 방정식 범론> <논리학> <수리 물리학의 방법> 등이 있다.

힐튼[편집]

Hilton, James(1900-1954)

영국의 소설가. 케임브리지 대학 재학 중 소설을 발표하였고, 1933년 <잃어버린 지평선>으로써 호돈상을 수상하였다. 또한 노교사의 추억을 그린 <칩스 선생님 안녕>으로 유명해졌다. 그 밖에 <투구 없는 기사> <마음의 여로> <학교 살인 사건> 등이 있다.

힐티[편집]

Hity, Carl(1833-1909)

스위스의 사상가·법률가. 베르덴베르크 출생. 독일의 괴팅겐·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법률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1855년 고향인 쿨로 돌아가 18년간 변호사로 활약하였고, 1873년부터 베를린 대학에서 헌법과 국제법을 강의하였으며, 1902년 이후 육군재판장이 되었다. 1909년에는 국제법의 권위자로서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의 스위스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정치적 저서로 1886년 이후에 나온 <스위스 연방 정치연감> <민주정치의 이론가와 이상가> 등이 있으나, 종교적·윤리적 저작으로 유명해졌다. 세계 각국어로 번역되어 널리 읽히고 있는 작품으로는<행복론>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 등이 특히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