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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인명사전/한 국 인 명/ㅎ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하경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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河敬德(1897-1951)

학자·언론인. 본관은 진주이며 전북 익산에서 출생하였다. 평양 숭실중학교를 거쳐 1925년 미국 하버드 대학 사회학과를 졸업하였다. 1928년 하버드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이듬해 귀국하였다. 1931년 연희전문학교 교수를 지냈으며, '흥사단'에 가입하여 독립운동과 후배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광복 후 <코리아 타임스>를 창간하여 사장에 취임하였고 서울신문사·합동통신사의 사장을 지냈다. 그 후 종합잡지 <신천지>를 발행하였다. 이어 1948년 인도에서 개최된 '범아 문화 대회'에 우리나라 대표로 참가하였다. 1950년 6·25전쟁 중 미 국무성의 특별 촉탁으로 일본 도쿄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있다가 이듬해 도쿄 병원에서 죽었다.

하근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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河瑾燦(1931- )

소설가. 경북 영천 출생. 전주 사범 및 동아대학 토목과 수학. 1957년 <한국일보> 신춘 문예에 단편 <수난 2대>가 당선됨으로써 문단에 등장했다. 그의 작품은 역사적 현실에 대한 투철한 작가 정신이 작용하여 1960년대 이후 몇 편의 문제작을 내었다. 1959년 <교육주보> <교육자료사> 기자를 지냈다. 주요 단편으로 <수난 2대> <나룻배 이야기> <흰 종이 수염> <왕릉(王陵)과 주둔군> <삼각의 집> 등이 있다.

하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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河伯

전설상의 인물. 고구려의 시조 주몽의 외조부이다. 주몽의 어머니 유화가 해모수와 사통하자 태백산 남쪽 우발수로 내쫓아 버렸다고 한다.

하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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河緯地(1387-1456)

조선 단종 때 사육신의 한 사람. 자는 천장, 호는 단계, 본관은 진주이다. 1438년 세종 때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집현전 학자가 되었으며, 왕을 가까이에서 보좌하며 정치를 보살폈다. 세종의 명으로 집현전에서 <역대병요>의 편집을 착수했는데 수양 대군이 당시 이를 총재하였다. 1453년 수양 대군이 김종서 등을 죽이고 영의정에 오르자 벼슬을 버리고 선산에서 지냈다. 1455년 단종을 폐위시키고 세조가 즉위하여 예조참판으로 부르자 마지못해 취임하였으나, 녹을 먹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받는 대로 별실에다 쌓아 두기만 하였다. 이듬해 성삼문 등과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김질의 배반으로 붙잡혀 죽었다. 죽은 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하 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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河崙(1347-1416)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자는 대림, 호는 호정, 본관은 진주이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영주목을 잘 다스려 안렴사 김 주는 그의 치적을 가장 높이 평가하였다. 1388년 최 영의 요동 정벌을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다가 양주로 유배되었다. 조선이 건국되어 태조가 계룡산으로 도읍을 옮기려 하자 한양으로 옮길 것을 주장하였다. 1394년 명나라 태조가 정도전이 보낸 글이 불손하다고 하자, 그가 대신 명나라에 가서 오해를 풀었다. 그 후에도 명나라에 자주 왕래하여 외교에 공이 컸다. 1398년 충청도 관찰사로서 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도와 공을 세웠다. 정종이 즉위하자 정당 문학이 되어 정사 1등 공신이 되었고, 1400년 좌의정이 되어 명에 다녀왔다. 1414년(태종 14) 영의정 부사가 되어 70세에 은퇴하였다. 시문에도 뛰어났으며 <태조실록> 15권을 편찬하였다. 저서로 <호정집>이 있다.

하응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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河應臨(1536-1567)

조선의 문장가. 자는 대이, 호는 청천, 본관은 진주이다.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부수찬에 이르렀다. 문장에도 뛰어나 백광훈·이산해·송익필 등과 함께 선조 때의 8대 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졌다.

하홍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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河弘度(1593-1666)

조선의 학자. 자는 중원, 호는 겸재, 본관은 진주이다. 일찍이 조 식에게 <논어>를 배웠으며, 성균관에 들어가 여러 선비들의 존경을 받았다. 광해군 때 과거에 뜻을 버리고 학문에 힘쓰는 한편, 후배들을 양성하였다. 인조 때 여러 번 벼슬에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는 암천산에 살면서 집을 짓고 영귀대라고 이름붙였다. 1662년 암행어사로 내려온 남구만과 가까이 지내면서 예론에 대해서 토론하였다. 남구만은 그의 깊은 지식에 감탄하여 현종에게 아뢰니, 왕은 곡식을 하사하여 표창하였다. 저서로 <겸재집> 12권이 있다.

한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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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甲洙(1913- )

한글학자. 경기도 가평에서 태어나 일본 메이지 대학 법학부와 일본 중앙음악학교를 졸업하였다. 1946년 서울대 사범대 강사를 거쳐 음악대 교수, 1949년 한글 학회 이사를 역임하였다. 1953년 미국 동성 훈장·을지 무공 훈장을 받고 1957년 민의원 의장 비서실장·1965년 대한일보 전무·1975년 민속음악 학회장·1982년 국가 제정 추진위원회 부위원장·1989년 서예가 연맹 총재를 역임하였다. 제5회 외솔상·제1회 방송문화상·금성 충무 무공 훈장을 받았다. 저서로 <원본 훈민정음 풀이> <바른 말 고운 말 사전> <태극기 해설> <국어대사전> 등이 있다.

한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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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繼禧(1423-1482)

조선의 문신·학자. 자는 자순이며 본관은 청주이다.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정자·수찬 등을 지냈다. 그는 학문이 높고 인품이 훌륭하여 세조의 명으로 세자에게 경학을 가르치게 되었다. 1469년 예종 때 남 이를 제거한 공으로 공신이 되었다. 훈구파에 속하는 유학자로서 최 항 등과 함께 <경국대전> 편찬에도 참가하였고 1447년 <의방유취> 30질의 인본 간행을 주관하였다. 성종 때 의정부 좌찬성이 되었다.

한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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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構(1636-?)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긍세, 호는 안소당, 본관은 청주이다.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를 지냈다. 1689년 아들 중혁이 인현 왕후의 복위 운동을 하다가 옥에 갇히자, 그도 유배되었다. 1694년 풀려나온 후 80세 때 가선대부가 되었다. 특히 그는 글씨에 뛰어났는데, 정조 때에 그의 글씨를 자본(字本)으로 8만여 자의 활자를 만들어 '한구자'라고 이름붙였다.

한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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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圭卨(?-1930)

조선 말기의 정치가. 자는 순우이며 본관은 청주이다.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포도대장·의정부 찬성 등을 지냈다. 1905년에는 의정부 참정으로 내각을 조직하였다. 그 해 일본의 전권대사인 이토 히로부미가 우리나라의 여러 대신들에게 을사조약 체결에 대해 의견을 물었을 때, 이에 끝까지 반대하였다. 이어 경술국치 때 일본 정부에 의해서 남작 작위가 수여되었으나 끝내 거절하였다.

한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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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明澮(1415-1487)

조선의 문신. 자는 자준, 호는 압구정, 본관은 청주이다. 수양 대군의 심복이 되어 1453년 김종서 등을 죽이고 단종을 몰아내는 데 공이 컸다. 세조가 즉위한 이듬해 단종의 복위 운동을 좌절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성삼문 등 사육신을 죽이는 데 앞장서 병조판서에 올랐다. 1466년 영의정에 이르렀고, 1468년 세조가 죽자 원상(院相)으로서 여러 가지 일을 하였다. 1471년 최 항·신숙주 등과 <세조실록>을 완성하였다. 딸 둘이 장순 왕후·공혜 왕후가 되었다. 세조의 총신으로 왕을 보필하여 조선 초기 문화 발전에 많은 공을 세웠다. 갑자사화 때 윤비 폐사에 관련했다 하여 부관참시되었다가 뒤에 신원되었다.

한무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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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茂淑(1918-1993)

여류 소설가. 서울에서 출생하였으며 부산고등여학교를 졸업하였다. 학생 시절에 그림을 공부하였으나, 1949년 장편 <역사는 흐른다>가 <국제신보> 현상모집에 당선되어 문단에 등장하였다. 사변적 문장에 능하고 몰락된 인간상의 부조에 큰 특징을 보였다. 1961년 신문 윤리위원·민족문화 촉진위원 등을 지냈다. 그 후 한·프 협회 이사, 한·일 협회 이사, 한·인도 협회 이사 등을 지냈다. 작품으로 장편 <빛의 계단>과 <축제와 운명의 장소> 등이 있으며, 단편 <감정 있는 심연>으로 자유문학상을 받았다.

한백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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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百謙(1552-1615)

조선의 학자. 자는 명길, 호는 구암, 본관은 청주이다. 일찍이 민 순에게 <소학>과 <근사록>을 배웠다. 1586년 천거에 의하여 중부 참봉이 되고 곧이어 경기전 참봉을 지냈다. 1589년 정여립의 난 때 연좌되어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와 청주 목사를 지냈다. 그 후 판결사·호조참의를 지냈다. 역학에 밝아 선조 때 <주역전의>의 교정을 보았으며, <동국지리지>를 지음으로써 실학의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다. 저서로 <기전고> 등이 있다.

한석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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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호

한성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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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成俊(1874-1941)

조선 말기의 고수(鼓手). 박순조의 제자가 되어 북을 배웠으며, 북을 잘 쳐 명성이 높았다. 1933년 조선 성악연구회를 창설하여 후진 양성에 힘썼다. 노래·민속 무용에도 뛰어났다. 1941년 일본의 '모던 니혼 사'가 제정한 예술상을 탔으며, 만년에는 민속 무용에 전념하였는데 특히 학춤에 뛰어났다.

한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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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脩(1333-1384)

고려의 서예가. 자는 맹운, 호는 유항, 본관은 청주이다. 충목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우왕 때 동지밀직에 이르렀다. 그는 글씨를 잘 썼는데, 특히 초서와 예서에 뛰어났다. 또한 학식이 높고 견식이 밝아 사림의 모범이 되었다. 글씨로는 개성의 <노국대장 공주 묘비> <안심사 사리탑비> 등이 있다.

한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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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勝源(1939- )

소설가. 전남 장흥 출생. 서라벌 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1966년 <신아일보> 신춘 문예에 <가증스런 바다>로 입선, 1968년 <대한일보> 신춘 문예에 <목선>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1970년 광주 동신중학교 교사를 지냈다. 주요 작품으로 <갯비나리> <해변의 길손> <산 자들의 축제> <겨울 폐사> <아버지와 아들> <포구의 달> <그 바다 끓며 넘치며> <불의 딸> <아제아제 바라아제> 등 발표. 그는 황폐화된 어촌의 서정적 배경을 중심으로 삶에 대한 토속성과 한의 세계를 다루고 있으며, 고향의 역사적 현실과 숙명을 깊이 있게 파헤치는 작가이다. 한국소설문학상, 이상문학상을 받았다.

한용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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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龍雲(1879-1944)

시인·소설가·독립운동가. 호는 만해이며 본관은 청주이다. 이름은 봉완이며 용운은 법호이다. 18세에 동학혁명에 가담하였으며 28세 때 승려가 되었다. 1908년 일본을 방문하여 약 반년간 신문물을 시찰하고 돌아왔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중국으로 망명하여 의병학교를 설치하고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그 후 귀국하여 불교학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1918년 종합잡지 <유심>을 발간하였다. 이듬해 3·1운동이 일어나자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체포되어 3년간 옥살이를 하였다. 1925년 그의 기념비적인 시집 <님의 침묵>을 출간하였다. 그 후 일제에 대항하는 통일전선인 '신간회'를 창설하고 그 곳의 중앙 집행위원과 경성 지부장을 겸하였다. 1930년 <불교>지를 인수하여 속간하였으며, 1935년 조선일보에 장편소설 <흑풍>을 연재하고, 이어 <후회> <박명> 등을 발표하였다. 그는 문학을 전문으로 하지는 않았지만, 불교적 세계관과 깊은 관조 및 민족적 염원을 노래한 주옥 같은 시들을 남겼다. 1944년 5월 9일 성북동 심우장에서 중풍으로 사망하였다. 1967년 파고다 공원에 그의 비가 세워졌으며,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이 수여되었다. 저서로 <불교유신론> <불교대전> <십현담주해> <삼국지> 등이 있으며, 1973년 <한용운 전집> 6권이 간행되었다.

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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寒雨

조선 중기의 여류 시인. 선조 때의 기생으로 임 제가 부른 노래에 답한 것이라는 시조 1수가 <청구영언>에 전하고 있다.

한원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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寒元震(1682-1751)

조선의 학자·문신. 자는 덕소, 호는 남당, 본관은 청주이다. 권상하의 제자이며 학행으로 천거되어 영릉 참봉을 지냈다. 영조 때 경연관으로 선출되었으며 왕의 신임이 두터웠으나 탕평책에 어긋나는 발언을 하여 파면되었다. 곧 장령·집의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학문 연구에 몰두하여 이기설을 주장하였다. 그는 이 이·송시열 두 선생이 주자학의 최고라 하여 김장생의 후손과 논쟁을 벌였다. 또한 천문·지리·병학·산수 등에도 통달하였다. 죽은 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남당집>이 있다.

한정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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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晶東(1894-1976)

아동문학가·동요작가. 평남 강서에서 출생했며 평양고보를 졸업한 뒤 192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요 <따오기>가 당선된 이후 많은 동요를 발표하였다. 신문·잡지 기자와 교사 생활을 하면서 작품 활동을 하였으며 동화도 썼다. 1968년 '고마우신 선생님 상'을 받았다. 이듬해 '한정동 아동 문학상'이 제정되었으며, 저서로 동요 동화집 <갈잎 피리>가 있다.

한종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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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宗愈(1287-1354)

고려의 문신. 자는 사고, 호는 복재, 본관은 청주이다. 충렬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사복부정이 되었다. 1322년 왕위 찬탈을 꾀한 심양왕이 원 황제에게 충숙왕의 잘못을 고해 바쳐, 충숙왕이 원으로 불려가 옥새(왕의 도장)를 빼앗기자, 원에 가서 충숙왕의 환국을 요청하는 글을 올렸다. 시문에 뛰어났으며, 명사들과 함께 술에 취하면 <양화사>를 읊었으므로 양화도로 불렀다. 저서로 <복재집>이 있다.

한준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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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浚謙(1557-1627)

조선의 문신. 자는 익지, 호는 유천, 본관은 청주로 인조의 장인이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이 되었다. 금천 현감으로 있을 때 정여립의 반란이 일어나자, 앞서 정여립의 사위 이진길을 천거했다는 이유로 수감되었다. 그 후 원주 목사·지평 등을 거쳐 1597년 정유재란 때 승지에 이르렀는데, 명나라 제독 마귀를 도와 말먹이와 식량 등을 보급하였다. 그 후 각도의 관찰사를 거쳐, 1605년 호조판서가 되었다. 선조가 죽을 때 한준겸을 비롯하여 일곱 신하들에게 영창 대군을 부탁한다는 유언을 하였는데, 광해군 때 영창 대군이 반역죄로 몰려 죽게 되자 한준겸도 유배되었다. 그 후 다시 벼슬에 올라 5도 도원수가 되어 국경 지방을 수비하는 데 힘썼다. 1623년 딸이 인조의 비가 되자 영돈령 부사가 되었으며 서평 부원군에 봉해졌다.

한 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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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澄(1886-1944)

한글 학자. 호는 효창이며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1922년부터 10년간 <시대일보> <중외일보> <조선일보> 등의 기자를 지냈다. 1930년 이윤재와 함께 조선어학회 사전을 편찬하는 데 힘썼으며 이어 표준말 사정위원이 되었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에 관련되어 옥살이를 하던 중 1944년 함흥 감옥에서 죽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한치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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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致奫(1765-1814)

조선의 학자. 자는 대연, 호는 옥유당, 본관은 청주이다. 정조 때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청나라 사신으로 가는 한치응을 따라서 고증학의 실사 구시의 학문 탐구 방법을 배워 가지고 돌아왔다. 만년에 <해동역사> 71권을 편찬하였다. <지리고>는 완성하지 못하였으나, 후에 조카 한진서가 7권을 완성하였다.

한하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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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何雲(1919-1975)

시인. 함남 함주에서 출생하였으며 이리 농림학교와 베이징 대학 농학원을 졸업하였다. 1943년 나병으로 귀국하여 함경남도·경기도 도청 등에서 근무하다, 1945년 나병이 재발하여 고향으로 내려갔다. 1948년 월남하여 방랑생활을 하며 병을 고쳐, 1950년 부평 성계원과 신명보육원을 창설하였다. 1954년 대한 한센 연합 위원장을 지냈다. 대표 작품으로는 <한하운 시초> <보리피리> <한하운 전시집> <나의 슬픈 반생기> 등이 있다.

한형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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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亨允(1470-1532)

조선의 문신·서예가. 자는 신경이며 본관은 청주이다. 성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문신으로 무예에 능한 자를 선발하는 데 뽑혀 참의에 이르렀고 선전관을 겸하였다. 그 후 형조판서·지중추 부사 등을 지냈다. 천성이 청렴·강직하여 바른말을 잘 하였으므로 연산군의 미움을 사 유배된 일도 있다. 글씨에도 뛰어나 왕으로부터 왕희지의 필체첩을 하사받았으며 청백리에 뽑혔다. 글씨로 파주의 <영의정 황보 인 묘비>, 양주의 <명숙공 성 준 묘비>가 있다.

한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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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濩(1543-1605)

조선의 명필. 자는 경홍, 호는 석봉, 본관은 삼화이다. 개성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격려로 붓글씨를 익혀 해서·행서·초서·진서 등 각체에 모두 뛰어났다. 명종 때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1583년 선조 때 와서 별제를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사보로서 문서 관계의 일을 맡았으며, 선조도 그의 글씨를 매우 아껴 가평 군수의 벼슬을 내렸다. 당시 그는 명나라로 가는 사신 일행에 자주 끼어 갔는데, 명나라에서도 그의 이름이 유명해져서 왜란 때 왔던 이여송과 마귀 등도 그의 필적을 구해 가지고 돌아갔다. 한석봉 서체의 특징은 그 때까지 중국의 서체를 모방하던 풍조를 벗어나 호쾌하고 강건한 자기 나름대로의 독특한 글씨체를 세운 데 있다. 안평 대군·김 구·양사언과 함께 조선 4대 서가로 꼽힌다. 글씨로 평양의 <기자 묘신비>, 개성의 <선죽교비>, 상주의 <노동비>, 합천의 <박소묘비> 등이 있다.

한 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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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確(1403-1456)

조선의 문신. 자는 자유, 호는 간이재, 본관은 청주이다. 그의 누이가 명나라 선종의 후궁이 되자, 초청을 받고 명에 가서 광록시 소경의 벼슬을 지냈다. 세종이 즉위하자 명의 책봉정사가 되어 귀국하여 판한성 부사가 되었다. 그 후 이조판서·좌찬성 등을 거쳐 세조 때 서성 부원군에 봉해졌다. 1455년 사은사로서 세조의 왕위 찬탈을 양위로 명분을 세워 명나라를 설득하러 연경에 갔다가 귀국 도중에 객사하였다. 그의 둘째 딸은 인수 왕비로 예종의 비였다.

한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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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希愈(?-1306)

고려 말기의 무신. 가주 한씨의 시조이다. 대장군으로 1271년 김방겸을 따라 진도·탐라 등지에서 삼별초를 정벌하는 데 공을 세웠다. 1274년 여·몽 연합군이 일본을 정벌할 때 앞장서서 활약하였다. 1291년 원에서 반란을 일으킨 합단이 우리 나라로 침입해 오자, 원의 장수 설도간과 함께 이를 막아 공을 세웠다. 후에 충렬왕을 모시고 연경에 갔으며, 그 곳에서 죽었다.

함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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咸大勳(1906-1949)

소설가. 호는 일보이며 황해도 송화에서 출생하였다. 1931년 일본 도쿄 외국어대학 러시아어과를 졸업하였다. 김진섭 등과 <해외문학>의 동인으로서 주로 러시아의 작품을 번역하여 소개하였다. 1935년 전후하여 우리 문단에 한때 행동주의가 소개되고 휴머니즘이 논의되자 곧 이헌구·홍효민·김문집 등과 함께 이를 소개하였다. 1935년 3월 <조선일보>에 <지식계급의 불안과 조선문학의 장래>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한국 지식인 연맹의 결성을 주장하였다. 1937년 장편소설 <순정해협>을 <조광> 지에 연재하고 이어 <무풍지대> <폭풍전야> 등을 발표하였다. 해방 후 <한성일보> 편집국장·군정청 공안국장·군정청 공보국장 등을 역임하고, 1947년 국립 경찰 전문학교 교장에 취임하여 재직중 순직하였다. 작품으로 장편 <호반> <청춘보> 등이 있다.

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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咸錫憲(1901-1989)

종교 사상가. 평북 용천에서 태어나 일본 도쿄 고등사범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10여년 간 오산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하였다. 1960년 1월 <사상계>에 집필한 <나라 없는 백성> 필화 사건으로 44일 동안 단식하며 자유당 정권과의 투쟁에 앞장섰던 야인이다. 주로 <사상계>지를 통하여 국민에게 참·의·저항을 외치기도 하고 씨알농장을 경영하면서 농민을 지도하였다. 5·16 군사정변 이후에는 종교인으로서 한일 회담을 반대하였다. <씨올의 소리>라는 월간 잡지의 발행인을 역임하였다. 저서로 <뜻으로 본 한국역사> <새시대의 전망> <인간혁명>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등이 있다.

함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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咸世煇

조선의 중기의 화가. 본관은 강릉이다. 도화서의 화원으로 별제를 지냈으며, 1719년 숙종 때 통신사 홍치중을 따라 일본에 건너가 <부용도>를 그렸다고 한다.

함유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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咸有一(1106-1185)

고려의 관리. 자는 형천이며 본관은 함양이다. 1135년 묘청의 난을 평정할 때 공이 있어 왕 충의 추천으로 내시가 되었다. 명종 때 병부낭중·공부상서 등을 지냈다. 일찍이 교로도감으로 있을 당시 서울에는 무당과 음사(귀신을 모시는 집)가 많아 민심을 현혹시켰다. 그는 이 음사를 모두 불태워 버리고 무당들을 서울 밖으로 내쫓아 미신을 배척한 자로서 유명하였다. 또한 평생 베옷만을 입었으며 질그릇만을 쓰는 등 청빈하게 살았다.

함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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咸在韻(1854-1916)

조선 말기의 국악사. 호는 겸와이며 본관은 양근이다. 어려서 강인식으로부터 거문고를 배웠으며, 아버지 함제홍의 재질을 이어받아 거문고의 대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구 한문보를 현행 음조로 번역하는 한편, 악기조성소 감동을 지냈으며 참서관으로 평양 풍경궁에 있었다. 근대 아악의 정통을 이어받은 악리학자, 음악 행정가·연주가로 유명하다. 아악사장으로 있다가 사망하였다.

함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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咸台永(1873-1964)

독립운동가·정치가·종교인. 함북 무산에서 출생하였으며 법관 양성소를 졸업하였다. 한성재판소 검사가 되어 1898년 독립협회 사건 때 이상재 등의 무죄를 선고하여 파면당하였다. 그 후 대심원·복심법원의 판사를 지냈다. 한일합방 후 기독교에 입교하여 장로가 되었고 3·1운동 때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 선언서에 서명하였다가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다. 광복 후 1949년 제2대 심계원장에 취임하였으며 이어 한국신학대 학장을 지냈다. 1952년 제3대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단장이 수여되었으며, 죽은 후 국민장으로 거행되었다.

함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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咸和鎭(1884-1949)

아악가. 호는 오당, 본관은 양근이며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거문고의 명인 함재운의 아들로 17세에 장악원 전악이 되어 이병문에게서 거문고를, 명완벽에게서 가야금을 배웠다. 장악·아악사장을 거쳐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처음으로 국악을 가르쳤다. 광복 후 '대한 국악원'을 창설하고 국악의 발전을 위해 헌신 노력하였다. 저서로 <증보 가곡원류> <조선 음악 통론> 등이 있다.

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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解明(기원전 12-기원후 9)

고구려 유리왕의 아들. 4년에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힘이 무척 세었다. 8년 황룡국의 왕이 보내준 강궁을 꺾어 힘을 자랑하자, 아버지 유리왕은 황룡국 왕에게 무례한 짓을 저지른 해명을 죽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인품에 눌린 황룡국 왕은 그를 살려보냈다. 그러나 아버지로부터 자살하라는 명을 받자 창을 거꾸로 꽂아 놓고 그 위로 말을 달리게 하여 자결하였다. 그가 죽은 곳을 창원이라 하고, 그 자리에 사당을 세웠다.

해모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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解慕漱

북부여의 시조. 일찍이 흘승골성에 도읍을 정한 뒤 천제의 아들이라 자칭하였다. 왕이 되어 국호를 북부여라 하고 하백의 딸 유화와의 사이에서 주몽을 낳았다고 한다.

해부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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解扶婁

동부여의 시조. 해모수의 아들이라는 설과, 단군과 하백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라는 설이 있다. 그는 늙도록 아들이 없어 걱정하였는데, 하루는 곤연에서 큰 돌 밑에 한 아이를 발견하고 데려다가 이름을 금와라 하고 태자로 삼았다. 그 후 도읍을 동해안의 가섭원으로 옮기고 국호를 동부여라 하였다.

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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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圓(1262-1340)

고려의 승려. 10세 때 승려가 되어 금산사 석굉 대사로부터 불법을 배웠다. 1294년 충렬왕 때 승과에 급제한 뒤 불주사 주지가 되었다. 1305년 원나라 안서왕의 초청으로 중국으로 건너가 안서왕과 함께 삭방에 가서 2년간 고행하였으며, 그 후 원의 수도로 돌아와 1312년 건립된 대숭은복원사에서 지냈다. 그가 죽은 후 대숭은복원사에는 <고려 제일대사 원공비>라는 비가 세워졌다.

허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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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繼道

고려 말기의 효자. 본관은 김해이며 우왕 때 개성 소윤을 지냈다. 1383년 왜구가 침입하여 나라가 어지러울 때 어머니가 죽었다. 그는 어머니의 무덤 옆에 초가집을 짓고 3년간 무덤을 지켰다. 후에 우왕이 이 사실을 알고 그의 고향에 정문(旌門)을 세워 주었다.

허 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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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1-1529)

조선의 현신. 호는 징와, 본관은 양천이다. 연산군 때 문과에 급제하였다. 지평으로 있을 때 중종반정의 원종공신 호를 외람되게 받은 자가 많음을 강경하게 논박하였다. 대사간·대사헌을 거쳐 함경도·평안도 관찰사를 지냈다. 1520년 조윤손이 여연·무창에 정주한 야인을 정벌할 때 그를 후원, 큰 공을 세워 예조판서에 올랐다. 평안도 관찰사에 재직중 사망하였다.

허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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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喬(1567-1632)

조선의 문신. 자는 유악이며 본관은 양천이다. 허 강의 아들이며 효행이 뛰어나 김명원의 추천을 받고 군자감 참봉이 되었다. 그 후 직장·판관 등을 거쳐 거창 현감으로 있을 때, 세력 있는 자들의 은폐로 오랫동안 미결로 있던 살인 사건을 해결하여 곽재우의 탄복을 받았다. 1632년 포천 현감으로 있을 때 죽었으며, 큰 아들은 우의정 허 목이다.

허 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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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筠(1569-1618)

조선의 문신·소설가. 자는 단보, 호는 교산, 본관은 양천이다. 시문에 뛰어났으며 여류 시인인 허난설헌의 동생이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세자 시강원 설서를 지냈으며, 1597년 문과 중시에 장원급제하여 의정부 참찬까지 올랐다. 1610년 사신을 따라 베이징에 갔다가 천주교 12단(端)을 얻어왔다. 중국 소설들을 탐독하였으며, 시문이 당대에 뛰어나 그의 이름이 명나라에까지 널리 알려졌다. 서얼 출신 이 달에게 시를 배운 탓으로 스스로 서민으로 자처하였다. 1617년 폐모론을 주장했으며, 대북파의 한 사람이었던 하인준 등과 함께 반란을 계획하였다가 참형당하였다. 그가 쓴 <홍길동전>은 조선의 계급 제도 등 사회의 모순을 비판한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걸작이다.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국문 소설로서, 문학사적 의의가 크다. 저서로 <성소복부고> <성수시화> <도문대작> 등이 있다.

허난설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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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蘭雪軒(1563-1589)

조선의 여류 시인. 자는 경변이며 본관은 양천이다. 본래 이름은 초희이며 난설헌은 호이다. 허 균의 누이로 강릉에서 태어났고 천품이 뛰어났다. 아름다운 용모에 총명하여 어렸을 때 여신동이라고 하였다. 김성립과 결혼하여 두 남매를 낳았으나 모두 잃어 불행한 생활을 하였다. 또한 친정집의 재난이 마음을 슬프게 하여 시를 쓰며 괴로운 마음을 달래었다 이 달에게 시를 배웠으며 천부적인 재능을 발휘하여 여성의 섬세한 감상을 애닯게 그려 독특한 시의 세계를 이루었다. 27세로 죽었으며, 유언에 따라 광주리에 가득히 지어놓은 시를 태워 버렸다고 한다. 유고집 <난설헌집>에 작품이 실려 전하며, 일설에 <봉선화가>도 그의 작품이라고 한다.

허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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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穆(1595-1682)

조선의 문신·학자. 자는 화보, 호는 미수, 본관은 양천이다. 50세가 될 때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오직 학문에만 힘써 예학에 일가를 이루었다. 1557년 지평을 지낸 뒤, 이듬해 장령에 올라 자의 대비의 복상 문제가 예론에 어긋남을 논박하였다. 1659년 현종 때 송시열과 복상 문제로 맞서다가 삼척 부사로 좌천되었다. 그 후 대사헌·이조참판이 되어 덕·예·형·정 등의 4조에 대한 상소를 한 바 있고, 1677년에는 <경설> <동사> 등을 지어 숙종에게 바쳤다. 이듬해 판중추 부사가 되어 송시열과 허 적 등을 탄핵하여 왕의 노여움을 사자 벼슬에서 물러나 학문에 몰두하였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죽은 후 유생들이 서원을 세웠다. 일찍이 허 목은 허 적과 같은 남인이었으나, 송시열에 대한 공격에 있어서 허 목은 과격파였고, 허 적은 온건파였다. 그래서 허 목 파는 청남당, 허 적 파는 탁남당이라고 하였다. 저서로 <방국왕조례> 등이 있다.

허백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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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百鍊(1890-1977)

화가. 전남 진도에서 태어나 일본 메이지 대학 법과 3년을 수료하고, 1935-37년 조선전람회에서 수석상을 받았다. 1953년 광주농업고등기술학교 교장을 지냈고 미전 심사위원·예술원 종신회원이 되었다. 1966년 예술원상을 받았고, 1973년 회고전을 가졌다.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허 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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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曄(1517-1580)

조선의 문신. 자는 태휘, 호는 초당, 본관은 양천이다. 허 균과 허난설헌의 아버지이다.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장령에 이르렀다. 1575년 동인과 서인 사이에 당쟁이 일어났을 때 김효원 등과 함께 동인의 지도자로서 활약하였다. 이어 부제학을 거쳐 경상도 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하였다. 일찍이 김정국이 엮은 <경민편>을 보충하기도 하였으며 <삼강오륜행실>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저서로 <초당집> <전언주행록> 등이 있다.

허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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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永浩(1954- ) 산악인이자 탐험가. 충북 제천 출생. 1995년 12월 12일 남극대륙 최고봉인 빈슨 매시프산(해발 5,140m)을 올라 세계 최초로 3대 극점과 7대륙 최고봉을 정복했다. 1994년 1월 남극점, 11월 오세아니아의 카르스텐츠(뉴기니, 4,884m, 1995년 3월 북극점, 9월 유럽의 엘부르스(러시아, 5,642m)를 차례로 올랐다. 1982년 5월에는 히말라야산맥의 마칼루봉(해발 8,481m)을 밟아 처음으로 8,000m 등정에 성공했고, 1983년 10월 마나슬루봉(해발 8,163m) 등정, 중국-네팔 에베레스트 종단 같은 수많은 증정과 탐험 기록을 세웠다.

허 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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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煜

조선 중기의 서예가. 호는 취남이며 1710년 숙종 때에 진사가 되었다. 서화 수집가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서예에 힘썼는데, 특히 초서에 뛰어났고 시문에도 능하였다.

허 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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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雄(1918- )

한글 학자·언어 학자. 경남 김해에서 출생하였으며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중퇴하였다. 연세대·서울대·성균관대 교수 등을 거쳐 한글학회 이사장·독립기념관 건립추진회 이사·동아대 대학원 교수를 지냈고 현재는 서울대 명예교수로 있다. 외솔상·노산문학상·국민훈장 모란장·성곡 학술 문화상 등을 수상하였다. 저서로 <중세 국어 연구> <국어 국문학 사전> <언어학 개론> 등이 있다.

허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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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遠

조선 중기의 과학자. 1705년 숙종 때 관상감 제조로 청나라에 건너가 역관 하 석에게서 역법을 배우고 돌아와 <세초유휘>를 저술, 간행하였다.

허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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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蔿(1855-1908)

조선 말기의 의병장. 호는 왕산, 본관은 김해이며 경북 선산에서 출생하였다. 1897년 이은찬·조동호 등과 의병을 일으켜 금산 등지에서 일본군과 싸우던 중, 고종의 명으로 해산하고 고향에 내려갔다. 이듬해 성균관 박사·의정부 참찬 등을 지냈다. 1905년 을사조약을 반대하는 격문을 돌리다가 체포되었으며, 1907년 이인영 등과 원주에서 전국 의병 연합부대를 조직하여 정식 군대로서의 발족을 선언하였다. 이때 이인영이 부친상을 당하자 그가 대신 군사장이 되었다. 그는 일본의 통감부를 격파하기 위해 3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동대문 밖에 당도하였으나 포위되었다. 포로가 된 그는 재판을 거부하다가 서대문 감옥에서 죽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이 수여되었다.

허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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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維(1809-1892)

조선의 서화가·문신. 자는 마힐, 호는 소치, 본관은 양천이다. 진도에서 출생하였으며 벼슬은 지중추 부사에 이르렀다. 문장·그림·글씨에 능하여 '3절'로서 이름을 날렸다. 그중에서도 특히 묵죽에 뛰어났으며, 글씨에 있어서는 김정희의 글씨를 따라 화제(畵題)에 흔히 추사체를 썼다. 작품으로 <하경산수도> <추강만교도> <산수병풍> <노송도병풍> 등이 있다.

허 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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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任

조선 선조 때의 명의. 본관은 양천이며 본래 상인 출신이다. 뜸과 침에 뛰어났으며 선조 때 침을 잘 놓는 의사로 뽑혀 왕을 치료하였다. 1612년 허 준과 함께 의사로서 이름난 사람들을 기록한 <의관록>에 기록되었다. 벼슬은 부평 부사·남양 부사에까지 이르렀다.

허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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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의 전의. 내의원의 주부·판관 등을 지내면서 궁중의 진료와 방역(防疫)에 관한 일을 맡아 보았다. 1493년 성종 때 <의방요록> 3권을 지어 간행하였다.

허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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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積(1610-1680)

조선의 문신. 자는 여차, 호는 묵재, 본관은 양천이다. 인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에 들어갔다. 사헌부에 있을 때, 뇌물을 받고 인재를 관직에 등용시킨 이경석·이시백 등의 사형을 주청하여 대신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 후 평안 감사를 거쳐 영의정에까지 이르렀으나 얼마 후 사직하고 충주에 내려갔다. 1674년 숙종이 즉위하자 다시 등용되어 변무사로 청에 다녀왔다. 1678년 상평통보를 주조하여 사용하게 하였다. 허 목과 함께 남인을 지도하다가 허 목의 송시열에 대한 과격론에 반대하여 청남·탁남당으로 분열되자, 탁남당을 이끌었다. 1680년 그의 서자인 허 견이 반역 사건을 일으키자, 이로 인해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 후 죄가 풀려 관작이 복구되었다.

허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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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政(1896-1988)

정치가. 부산에서 출생하였으며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3·1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중국으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요원으로 활약하였다. 1920년 프랑스 거주 한국인 거류민 회장·1922년 북미 거주 한국인 교민 총단장 등을 지냈으며, 1923년 <3·1 신보> 사장이 되었다. 광복 후 제헌 국회의원·교통부 장관·국무총리 서리·서울 특별시장 등을 지냈다. 1959년 4차 한일회담 수석대표로 참석하였고, 1960년 4·19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자 과도 정부의 내각 수반 겸 외무부 장관을 거쳐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었다. 1963년 국민의 당을 조직하고 당 대표 최고위원을 역임한 뒤에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허 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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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浚(1546-1615)

조선 중기의 명의·한의학자. 자는 청원이며 본관은 양천이다. 선조 때 전의로 왕실의 진료에 많은 공을 세웠다. 임진왜란 때 선조를 모시고 의주에 다녀와서 1604년 양평군에 봉해졌다. 1608년 선조의 치료를 소홀히 하여 죽게 하였다는 죄로 파직되었으나 곧 광해군의 특명으로 해제되었다. 1610년 16년에 걸친 오랜 연구 끝에 방대한 의학책 <동의보감> 25권을 완성하였다. 의서의 번역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죽은 후 숭록대부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신찬 벽온방> <벽역신방> 등이 있다.

허 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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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琛(1444-1505)

조선의 문신. 자는 헌지, 호는 이헌, 본관은 양천이다. 성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교리를 거쳐 대사헌·이조판서 등을 지냈다. 당대의 유명한 학자인 신종호·조 위·유호인 등과 함께 학문과 덕행으로 이름을 떨쳐 세자(연산군)의 신임을 받았다. 1489년에 <삼강행실>을 정리하였으며, 1504년 좌의정이 되었다. 성종 때 윤비 폐위를 반대했기 때문에 갑자사화 때에는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그는 연산군의 옳지 못한 정치를 바로잡으려고 노력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병이 생겨 사망하였다.

허황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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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黃玉(33-189)

대가야국 수로왕의 왕비. 본래는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로 48년에 배를 타고 가야로 와서 왕비가 되었다. 이듬해 태자 등거공을 낳았으며, 그가 가야국에 상륙한 곳은 주포촌이라 불렀고 비단 바지를 벗어 산령에게 제사를 지낸 곳은 능현이라고 불렀다. 아홉 아들을 낳았는데, 그 중 한 아들에게 어머니의 성인 허씨를 주었다고 한다.

헌강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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憲康王(?-886)

신라의 제49대 왕(재위 875-886). 경문왕의 아들이다. 876년 황룡사에 백고좌를 열어 불경을 강연하게 하였고, 그가 재위하였을 때는 처용무가 유행하고 경주에는 사치와 향락이 심하여 신라는 차츰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헌덕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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憲德王(?-826)

신라의 제41대 왕(재위 809-826). 소성왕의 동생이며 805년 당나라에 다녀와 병부령이 되었다. 조카인 애장왕이 즉위하자, 섭정을 하다가 809년에 왕을 죽이고 즉위하였다. 이듬해 제방을 수리하고 왕자를 시켜 불상·불경을 당에 보내어 친당 정책을 썼다. 822년 웅주 도독 김헌창의 반란을 평정하였고, 이듬해 그의 아들 김범문의 모반도 진압하였다. 824년 백 영에게 명하여 패강(대동강)에다 300리에 걸친 장성을 쌓게 하였다.

헌안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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憲安王(?-861)

신라의 제47대 왕(재위 857-860). 균정의 아들이며 신무왕의 이복 동생이다. 859년 흉년이 들자 백성들을 구제하였으며, 제방을 쌓아 농사를 장려하였다. 왕족 응렴(경문왕)을 사위로 삼고 후사가 없자 그에게 양위하고 죽었다.

헌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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獻宗(1084-1097) 고려의 제14대 왕(재위 1094-1095). 선종의 원자(元子). 어려서부터 서화에 능하고 총명하였다. 1094년 이자의의 난을 평정하였고 다음해 신병으로 숙부 계림공 희(숙종)에게 양위하였다.

헌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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憲宗(1827-1849) 조선의 제24대 왕(재위 1834-1849). 순조의 손자이다. 8세에 즉위하자 순조의 비인 순원 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여 정권은 외척 안동 김씨의 손에 있었다. 1839년 천주교를 탄압한 기해박해가 있었으며, 1840년 풍양 조씨가 정권을 잡았다. 재위 기간 동안 정권은 외척의 손에 있었고 나라 안팎이 혼란하였다.

현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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玄德秀(?-1215)

고려 중기의 장군. 본관은 연주이다. 어렸을 때 당시 연주 분도 장군 김치규에게 발탁되어 서울로 올라와 공부하였으나 번번이 과거에 떨어졌다. 1174년 조위총이 난을 일으켜 철령 이북에 있는 40여 개의 성이 모두 조위총의 편이 되었으나, 아버지 현담윤과 함께 성을 굳게 지키며 반란군을 맞아 용감히 싸웠다. 그 후 반란군 1만 명에게 포위되었을 때 적을 크게 무찔렀다. 그 공으로 아버지는 장군이 되고 그는 안남도호부 부사가 되었다. 그 뒤 병부상서에 올랐으나 나이가 많아 스스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현석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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玄錫文(1799-1846)

조선의 천주교 순교자. 서울에서 출생하였으며 1836년 헌종 때에 의주로 가서 프랑스 선교사 앵베르 주교를 맞아들였다. 그 후 샤스탕 신부를 도와 전도 사업에 힘써 천주교 한양 회장이 되었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아내와 누이가 순교하자 <조선 천주교 순교자 열전>을 집필하였으며, 그 해 앵베르·샤스탕·모방 신부 등도 잡혀 죽었다. 그는 계속 전도에 힘쓰는 한편, <순교자 열전> 편찬을 필생의 사업으로 생각하고 상하이까지 피해 다니면서 자료를 정리하여 3년 만에 <기해일기>라는 이름으로 이를 완성하였다. 1845년 김대건 신부와 함께 상하이에 가서 조선 교구 제3대 교구장인 페레올 주교를 맞아들였다. 이듬해 김대건 신부와 함께 붙잡혀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1925년 로마 교황 비오 11세에 의하여 복자위에 올랐다.

현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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玄濟明(1902-1960)

음악가. 호는 현석이며 경북 대구에서 출생하였다. 숭실전문학교에 들어가서 선교사들로부터 음악 교육을 받았는데, 특히 합창단의 테너로서 각광을 받았다. 그 후 시카고 거언 음악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받고 돌아와 교단·연주회·강습회 등을 통해 음악 보급에 힘썼다. 1932년 '조선 음악가 협회'를 창설하였고, 1954년 고려 교향악단을 창설하였다. 광복 후 서울 경성음악학교를 세웠으며, 서울대학교 초대 음대 학장을 지냈다. 또한 1957년 시카고 음악대학에서 음악박사 학위를 받았고 예술원 종신회원에 선임되었다. 작품으로 오페라 <춘향전> <왕자 호동>이 있고, 가곡 <고향 생각> <그 집 앞> <바다로 가자> 등이 있다.

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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顯宗(992-1031) 고려의 제8대 왕(재위 1010-1031). 태조의 여덟째 아들인 안종의 아들이다. 처음에는 대량원군에 봉해졌다가 강 조의 추대로 왕위로 올랐다. 그 해 거란의 성왕이 쳐들어오자 강 조로 하여금 방어하게 하였으나, 개경이 함락되어 왕의 친조(왕이 거란의 조정에 들어가 거란 왕을 뵙는 것)를 조건으로 화해하였다. 현종이 친조하지 않자 소배압이 다시 쳐들어왔으나, 강감찬 장군이 귀주에서 크게 이겼다. 이후 현종은 거란에 대해 평화 정책을 썼다. 또한 불교와 유교의 발전을 위해 폐지되었던 팔관회·연등회 등을 부활시켰으며 부처의 힘을 빌려 거란족을 물리치고자 대장경 6천 권을 완성하였다. 그는 농업을 장려하고 지방 제도를 고쳐 거란족의 침입으로 어수선하던 정세를 안정시켜 다음 왕인 덕종과 정종 시대에 황금기를 이룩하게 하였다.

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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顯宗(1641-1674) 조선의 제18대 왕(재위 1660-1674). 효종의 아들이며 숙종의 아버지이다. 병자호란 이후 아버지 봉림 대군(효종)이 볼모로 가 있던 선양에서 출생하였으며, 1649년 세자에 책봉되어 1660년 즉위하였으다. 재위 기간 동안 서인과 남인의 당쟁이 심하여 나라 안이 어지럽고 국력은 약화되어 백성들은 질병과 굶주림에 허덕였다. 한편, 두만강 쪽에 자주 침입하는 여진족을 북쪽으로 몰아냈으며 전라도에 대동법을 실시하였다. 이어 농업을 진흥시키고자 경기도에 양전(토지 측량)을 실시하였으며, 1668년 김좌명에게 명하여 동철 활자 10만여 자를 주조하였다. 이듬해 송시열의 건의로 동성 통혼을 금하는 등 치적이 있었으나, 격심한 당쟁과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과단성 있는 정책이 실시되지 못하였다.

현진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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玄鎭健(1900-1941)

소설가. 호는 빙허이며 경북 대구에서 출생하였다. 일본 도쿄 독일어학교를 졸업한 뒤 중국으로 건너가 상하이 외국어학교를 졸업했다. 1920년 <개벽>지에 단편 <희생화>를 발표하여 문단에 등장하였으며, 이듬해 <빈처>를 발표하여 인정을 받았다. 1935년 이상화·박종화 등과 동인지 <백조>를 발간하여 <운수 좋은 날> <불> 등을 계속 발표함으로써 염상섭과 함께 사실주의 문학을 개척하였다. 그는 특히 단편소설의 명수이며, 문학에 있어서 기교의 가치를 최초로 보여준 작가로 평가된다. 그 후 <동아일보> 사회부장으로서 일장기 말살 사건을 일으켜 1년간 감옥살이를 하기도 하였다. 대표작으로 <무영탑> <술 권하는 사회> 등이 있다.

혜경궁 홍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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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의 왕후

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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惠空

신라 중기의 승려. 어릴 때부터 이상한 행동을 많이 하였으며 승려가 되어서도 삼태기를 지고 취한 채로 다니며 노래하고 춤을 추었으므로 사람들이 '부궤화상'이라고 하였고 그의 암자를 '부개사'라고 하였다. 만년에는 원사사에 있으면서 원효가 불교 경전을 지을 때에 의심나는 것을 물으면 가르쳐 주었다. 그는 기적을 많이 행하였는데, 죽을 때도 몸이 공중에 떠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신라의 10대 성인 중의 한 사람이며 흥륜사 금당에 탑이 세워졌다.

혜공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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惠恭王(756-780)

신라의 제36대 왕(재위 756-780). 경덕왕의 맏아들이며 8세에 즉위하였다. 한때 태후가 섭정을 하였고 당나라와 친교를 맺어 매년 사신을 파견하였으며, 768년 당 태종으로부터 신라 왕에 책봉되었다. 재위 기간 중 천재지변이 자주 일어나고 흉년이 들었으며 사치스럽고 방탕하여 정치가 문란해졌다. 768년 일길찬 대공의 모반을 비롯하여, 770년 김 융의 모반·775년 김은거의 모반 등이 연이어 일어났다. 780년 김지정의 반란 때 왕비와 함께 살해되었다.

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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慧灌

고구려 말기의 승려. 중국 수나라에 가서 길장에게 삼론종의 교리를 배우고 돌아왔다. 625년 영류왕 때에 일본에 건너가서 겐코 사에 있으면서 승정이 되었다. 682년 선림사의 도사가 되었고 세이죠사를 창건하였다. 일본 삼론종의 시조이다.

혜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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惠能(1562-1636)

조선의 승려. 자는 중열, 호는 양성당, 속성은 남씨이다. 12세에 응철에게 구족계(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를 받고 8년간 내외 경전을 배워 통달하였다. 산을 좋아하여 두류산·금강산·오대산·치악산 등을 돌아다녔으며 만년에는 천축사의 주지로 있다가 죽었다.

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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慧亮

고구려 말기의 승려. 고구려로 국력을 정탐하러 온 신라의 거칠부를 속히 돌아가게 함으로써 잡히는 것을 모면하게 하였다. 그 후 거칠부의 권유로 신라에 귀화하여 진흥왕의 명으로 국통이 되었다. 이어 인왕 백좌강회와 팔관회를 주재하였다.

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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慧明 고려 광종 때의 승려. 968년 은진 반약산에 큰 돌이 땅에서 솟아나자 나라에서는 그 돌로 불상을 만들기 위해 전국에 불상을 잘 조각하는 사람을 구하였다. 이에 혜명이 백 명의 기술자를 데리고 공사를 시작하여 37년 후에 완성하였다. 그러나 커다란 불상을 세울 길이 막연하였는데, 하루는 사제촌에서 한쌍의 동자가 진흙으로 3단으로 된 불상을 쌓아가며 세우는 것을 보고 깨우쳐, 마침내 높이 55자 5치의 불상을 세웠다. 이 불상은 나라가 태평하면 온몸에 광채가 나고 흉란이 있으면 땀이 난다고 한다. 이 불상이 바로 지금 충남 은진면 관촉사의 미륵불이다.

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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慧明(1861-1937) 조선 말기의 승려. 호는 혜월, 본관은 예산, 속성은 신씨이다. 11세에 덕산 정혜사에서 승려가 되었다. 1884년 경허에게서 지눌의 <수심경>을 듣고 뜻을 깨달았으며 1901년 성우의 법을 이어받았다. 그 후 도리사·파계사·미타암·통도사 등을 다니며 설법을 하다가, 1921년 부산 선암사 주지가 되어 산지를 개간하였다. 그 후 부산 양안암에서 죽었다.

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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慧昭(774-850) 신라의 승려. 본관은 전주이며 속성은 최씨이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843년 당에 가서 창주 신감 대사 밑에서 승려가 되었다. 810년 숭산 소림사에서 구족계(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를 받고 종남산에 들어가 도를 닦았다. 830년에 귀국하여 상주 장백사에서 선(禪)을 설법하였다. 그 후 지리산 화개곡에 들어가 옥천사를 짓고 여생을 마쳤다. 후에 정강왕이 최치원으로 하여금 옥천사를 쌍계사로 고치게 하고 진감(혜소의 시호) 국사비를 세우게 하였다.

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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惠素 고려 인종 때의 승려. 대각 국사의 제자로 내외의 모든 경전에 통달하였다. 대각 국사의 행록 10권을 지었으며 화엄경을 강의하였다. 김부식이 벼슬에서 물러난 뒤 혜소를 찾아와 함께 시를 지었는데, 1천여 편이나 되었다고 한다.

혜소 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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惠炤國師(972-1054)

고려의 승려. 승명은 정현이며 속성은 이씨이다. 10세 때에 영통사에서 구족계(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를 받았으며 996년 승과에 급제하여 칠장사에 들어가 있었다. 999년 대사가 되었고 덕종 때 승통으로 현화사의 주지가 되었다. 1046년 문종 때 왕에게 <금고경>을 강의하였으며 가뭄이 들었을 때 불경을 읽어 비를 내리게 하였다. 1049년 왕사가 되었으며, 1054년 국사가 되었다.

혜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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慧諶(1178-1234)

고려의 승려. 자는 영을, 호는 무의자, 속성은 최씨이다. 1201년 신종 때 사마시에 합격하여 태학에 들어갔다. 그 후 어머니의 병환으로 집에 머물면서 불경을 탐독하였다. 어머니가 죽은 후 조계산에 들어가 보조 국사 지눌 밑에서 승려가 되었다. 1210년 지눌이 죽자 왕명으로 수선사로 들어가 그의 뒤를 이어 조계종의 2세가 되었다. 그 후 고종이 즉위하자 선사가 되었으며 이어 대선사에 올랐다. 송광사에 그의 비가 있다. 저서로 <심요> <무의자 시집> 등이 있다.

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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惠慈(?-622)

고구려 말기의 승려. 595년 영양왕 때 일본에 건너가 쇼토쿠 태자의 스승이 되었으며, 백제의 승려 혜총과 함께 596년 호코사(법흥사)가 세워지자 그 곳에 살면서 포교하였다. 615년 귀국하여 쇼토쿠 태자가 지은 소(죽은 사람을 위해 부처님 앞에 아뢰는 글)를 퍼뜨렸다.

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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惠藏(1772-1811)

조선의 승려. 자는 무진, 호는 연파, 속성은 김씨이다. 어려서 대둔사에서 승려가 되었고 30세에 대흥사의 주지가 되었다. <주역> <논어>를 즐겨 읽고 변려문을 잘하였으며 성리학에도 뛰어났다. 저서로 <아암집>이 있다.

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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惠哲(785-861)

신라의 승려. 16세에 승려가 되어 부석사에서 <화엄경>을 듣고 806년에 구족계(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를 받았다. 814년에는 당에 건너가 서당 지장에게서 심인(부처님의 마음을 깨닫는 것)을 받았다. 그 후 서주에 있는 부사사에서 3년간 대장경을 공부한 후, 839년 귀국하여 곡성 동리산의 대안사에서 불도를 폈다. 이것이 신라 선문 구산의 하나인 동리산파의 개조가 되었다.

혜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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慧超(704-787)

신라의 승려. 일찍이 당에 건너가, 719년 남인도의 밀교승 금강지에게서 불교 공부를 하였다. 그 후 인도로 가서 불교의 유적지를 두루 순례하며 불교를 연구한 후 당에 돌아갔다. 773년 당의 천복사라는 절에서 금강지와 함께 인도어로 된 불경을 한문으로 옮기는 일을 하였다. 그 후 신라로 돌아오지 못하고 당의 오대산으로 들어가 불경 번역과 제자를 가르치는 일에 힘쓰다가 죽었다. 신라 사람 혜초라는 승려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은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되면서부터이다. 1908년 프랑스의 학자 펠리오 박사가 중국 간쑤 성 지방을 탐사하다가 둔황 명사산 천불동의 석실에서 <왕오천축국전>을 발견해 냈다. 이 책은 프랑스 국민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혜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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惠聰

백제 위덕왕 때의 승려. 588년 영근·혜식 등과 함께 석가의 유골인 불사리를 가지고 일본에 다녀왔다. 이어 595년 다시 일본에 건너가 고구려 승려 혜자와 함께 3보의 중진이 되었고, 호코사(법흥사)에 머물면서 일본 불교 발전을 위해 많은 공을 세웠다.

혜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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惠通

신라의 승려. 해동 진언종의 시조이다. 젊어서 물개를 잡아 먹고 뼈를 버렸는데 그 뼈가 제집을 찾아가 새끼를 품고 있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승려가 되었다고 한다. 문무왕 때 당에 건너가 무외삼장의 신묘한 비법을 배우고 655년에 귀국하였다. 왕의 병사들이 그를 해하려 하자 비법으로 물리쳤으며, 신문왕의 병을 고치는 등 많은 기적을 일으켰다고 한다.

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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惠便 고구려 말기의 승려. 일찍이 일본에 건너가 불도를 펴려 하였으나, 일본 백성이 무지하여 포교가 매우 어려웠다. 584년 백제 사신 녹량이 미륵 불상을 가지고 일본에 왔는데, 일본의 대신이며 불교 신자이던 소가가 절을 짓고 석불을 모셨으나, 봉향할 사람이 없어 마침내 혜편이 뽑혔다. 이에 소가는 그의 세 딸을 혜편에게 보내어 비구니가 되게 하였다. 이것이 일본 비구니의 시초가 되었다.

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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惠現(570-627)

백제의 승려. 어려서부터 불도에 전념하여 법화경과 삼론을 깨우치고 신명에 통하였다. 수덕사에 있으면서 강론을 하니 사방에서 사람이 모여와 집 밖까지 신발이 가득할 정도였다. 차차 번잡한 생활이 싫어져 강남의 달라산에 들어가 정좌하며 일생을 마쳤다. 그가 죽은 후 시체를 석굴 안에 두었는데, 호랑이가 와서 다 먹어버리고 혀만 남겼다 한다. 3년이 지나자 혀가 돌처럼 굳어져서 이를 돌탑 속에 간직하였다고 한다. 그는 당나라에 간 일은 없으나,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당나라의 <고승전>에 그의 생애가 기록되어 있다.

호동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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好童王子(?-32)

고구려 대무신왕의 아들. 어느 날 옥저로 사냥을 나갔다가 낙랑 태수 최 이의 딸 낙랑 공주와 사랑하게 되었다. 당시 낙랑에는 적병의 침입을 알리는 자명고가 있어 정벌하기 어려웠으므로, 호동이 낙랑 공주를 꾀어 그 자명고를 찢게 하고 쳐들어갔다. 태수가 이를 알고 공주를 죽인 후 항복하였다. 그 후 호동은 원비(元妃)의 시기와 낙랑 공주에 대한 사랑으로 괴로워하다가 자살하였다.

홍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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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可臣(1541-1615)

조선의 문신. 자는 흥도, 호는 만전당, 본관은 남양이다. 명종 때 진사시에 합격하여 강릉 참봉이 되었으며, 1573년 선조 때 예빈 주부를 거쳐 형조좌랑·안산 군수 등을 지냈다. 그 후 수원 부사가 되어 표창을 받았으나 정여립과 친분이 두터웠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1594년 다시 홍주 목사가 되어 이몽학의 난을 평정하고 1등 공신이 되었다. 광해군 때 영원군에 봉해졌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고 금오당상을 거쳐 형조판서에 이르러 사직하였다.

홍경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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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景來(1780-1812)

조선의 농민 반란 지도자. 본관은 남양이며 평남 용강에서 출생하였다. 정조 때 사마시에 떨어진 뒤 조정에서의 평안도 출신 배척과 안동 김씨의 심한 횡포에 과거시험을 단념하고 반란을 도모하였다. 1800년 순조 때 박천의 청룡사에서 양반집의 서자인 우군칙과 만나 시국을 논하다가 서로 뜻이 통하여 반란을 일으키기로 약속하였다. 이어 만주 마적단 두목 정시수와 갑부이던 이희저를 포섭하여 가산 다복동을 거사의 본거지로 삼았다. 1811년 흉년으로 민심이 흔들리자 군사 2천명을 이끌고 스스로 평서 대원수라 칭하며 난을 일으켰다. 먼저 가산 군청을 습격하여 군수를 죽이고 평안도 일대를 장악하였다. 그러나 안주 싸움에서 크게 패하고 정주까지 후퇴하였다. 그 후 관군이 성 밑에 화약을 묻어 폭파하고 공격해 오자 패하여 전사하였다. 이 홍경래의 난은 조선의 대표적인 민란으로 꼽힌다.

홍경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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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敬謨(1774-1851)

조선의 문신. 자는 경수, 호는 관암, 본관은 풍산이다. 정조 때 동몽 교관으로 경연에 나가 효경을 강론하였다. 순조 때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시독관으로 홍문관에 책이 없음을 한탄하고, <예기> <주역> <퇴계집> 등을 왕에게 간행하도록 청하였다. 한때 법성 첨절제사로 벼슬이 좌천되었으나 곧 이조참의에 복직되었다. 일찍이 함경도 관찰사로 있을 때 함흥판관 이목원 등의 부정 사실을 살피지 못하였다는 견책을 받기도 하였다. 그 후 병조판서·판돈령 부사 등을 지냈다. 저서로 <관암외사> <동유사> <남한지> 등이 있다.

홍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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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啓禧(1703-1771)

조선의 문신. 자는 순보, 호는 담와, 본관은 남양이다. 영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통신사로 일본을 다녀왔으며, 이어 이조판서가 되었다. 균역청을 창설하여 병역 세법인 균역법을 만드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1757년에 편집당상으로 <열성지>를 편찬하였으며, 왕명으로 <해동악>을 지었다. 저서로 <삼운성휘>가 있다.

홍국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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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國榮(1748-1781)

조선의 문신. 자는 덕로이며 본관은 풍산이다. 영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에 들어가 춘방 설서를 겸하였다. 그 후 정후겸 등이 동궁(정조)을 해치려 할 때 동궁을 보호하여 무사히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그 공으로 정조의 총애를 받아 도승지에 올라 정권을 잡았으며, 누이동생을 정조의 빈으로 삼게 하여 세도 정권을 이룩하였다. 대신들은 궁궐로 가기 전에 그의 집에 먼저 들렀고, 모든 정사의 결정이 그의 손을 거쳤다. 그러나 횡포가 날로 심하여지자 벼슬을 빼앗기고 강릉으로 추방되어 죽었다.

홍기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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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基兆(1865-1938)

독립 운동가.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 호는 유암, 평남 용강에서 출생하였으며 홍경래의 후손이다. 22세 때 동학에 들어가 황해도·평안도의 접주 등을 지내며 민중 계몽운동에 힘썼다. 3·1 운동 때 천도교 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여 2년간 감옥살이를 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홍난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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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蘭坡(1897-1941)

음악가. 본명은 영후, 본관은 남양이며 수원에서 출생하였다. 1915년 조선 정악 전습소 양악부를 수료하고 그 곳 음악 교사가 되었다. 1918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우에노 음악학교에서 2년간 공부하고 귀국하였다. 1920년 <봉선화>를 작곡하고 1922년 '연악회'를 창설하였다. 1925년 제1회 바이올린 독주회를 가졌으며, 음악 잡지 <음악계>를 발간하였다. 이듬해 일본에 가서 도쿄 고등음악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27년 도쿄 교향악단의 제1바이올린 연주자가 되었다. 1931년 조선 음악가 협회의 상무 이사를 지내고 미국으로 건너가 셔우드 음악대학에서 연구 생활을 하다가 귀국하여 이화여자전문학교 강사가 되었다. 1936년 경성 중앙방송국 양악부 책임자가 되어 경성 방송 관현악단을 조직하여 서양 음악을 보급하였다. 작품으로 <성불사의 밤> <옛 동산에 올라> <달마중> <낮에 나온 반달> 등이 있으며, 저서로 <음악만필> <세계의 악성> 등이 있다.

홍 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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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娘

조선 선조 때의 기생. 1573년 당시 삼당파 또는 팔문장으로 불리던 고죽 최경창이 북도 평사로 경성에 갔을 때 그도 따라가 함께 있었다. 이듬해 최경창이 서울로 돌아오게 되자 그도 쌍성까지 따라와 작별하면서 최경창을 위해 시조 1수를 지었는데, 지금도 전하고 있다.

홍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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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大容(1731-1783)

조선의 실학자. 자는 덕보, 호는 담헌, 본관은 남양이다. 북학파에 드는 실학자로서 일찍이 김원행에게 배워 국학으로 인정되던 주자학을 학문의 기초로 삼았으나 양명학의 지행합일설에 뜻을 두었다. 그는 중국을 통해서 들어오는 새로운 과학 지식을 빼놓지 않고 배웠으며 혼천의를 만들어 하늘을 관측하는 데 힘썼다. 그 무렵 지구가 자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박지원·박제가 등과 함께 실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1765년 영조 때 서장관으로 베이징에 가는 숙부를 따라가서 3개월간 머물며 그 곳 선비들과 친교를 맺었으며, 독일인 유송령 등으로부터 각종 서양 문물과 천주당을 구경하였다. 그 후 44세로 벼슬에 올라 영주 군수 등을 지냈다. 그는 경제 정책에서도 균전제를 토대로 하여 농민의 최저생활을 보장하고 국가의 재정과 국방을 튼튼히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과거제도를 폐지하고 각 면에 학교를 세워 8세 이상이면 학교에 다닐 수 있어야 한다는 개혁안을 내놓았다. 그는 주자학과 양명학에 밝았으며 천주교는 배척하였다. 저서로 <담헌기> <담헌연기> <유포문답> 등이 있다.

홍만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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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萬選(1643-1715)

조선의 실학자. 자는 사중, 호는 유암, 본관은 풍산이다. 벼슬은 장악원장까지 지냈다. 당쟁에는 일체 참여하지 않았으며 실학을 닦아 선구적 인물이 되었다. 그의 <산림경제>는 농업과 의학에 관한 것으로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과학서이고 실학을 연구하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홍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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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萬植(1842-1905)

조선 말기의 애국 지사. 자는 백헌, 호는 호운, 본관은 남양이다.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주 목사까지 지냈다. 1884년 동생 홍영식이 김옥균 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게 되자, 아버지 홍순목은 자살하고 그는 자수하여 복역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통분한 나머지 음독 자살하였다. 죽은 후 숭정참정 대신에 추증되었으며,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홍만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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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萬宗

조선 효종 때의 학자. 자는 우해, 호는 현묵자, 본관은 풍산이다. 널리 학문에 뛰어나 많은 책을 저술하였는데 <역대총목> <순오지>에서는 정 철의 시를 평하기도 하였다.

홍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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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命喜(1888-?)

충북 괴산 출생. 호는 벽초(碧初). 이광수와 함께 일본 동경 다이세이 중학에서 수학. 1910년 귀국 후 오산 고보 교장, 연희 전문 교수, 중앙 불교 전문의 교수 역임. <임꺽정(林巨正)>을 <조선일보>(1928. 12. 21-1939. 3. 11)에 연재하여 일약 문단에서 명성을 얻었다. 이광수·최남선과 함께 조선의 3대 천재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카프 맹원사건 때 연루되어 투옥되었고 시종 친일을 거부하였다. 광복 직후 월북하여 활동하다가 병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홍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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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範圖(1868-1943)

독립 운동가. 평북 자성에서 출생하였으며 1907년 전국에서 일어난 의병에 자극을 받아 갑산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삼수·갑산 등지에서 유격전을 펼치다 만주 간도로 건너가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1919년 간도 국민회의 대한 독립군 사령관이 되어 국내로 들어와서 일본군을 습격하였다. 1920년 일본군이 봉오동을 공격해 오자, 3일간의 전투 끝에 120명을 사살하고 최대의 전과를 올렸다. 청산리 전투 후에 독립군의 통합운동을 벌여 대한 독립군단을 조직하여 김좌진과 함께 부총재가 되었다. 그 후 흑하사변을 당하여 군대를 해산하고 만주와 노령 지방을 방랑하다가 시베리아에서 병사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홍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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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秉箕(1868-1949)

독립 운동가.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 호는 인암이며 경기도 여주에서 출생하였다. 일찍이 동학혁명에 가담하였으며 3·1운동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여 2년간 복역하였다. 1926년 만주 길림성에서 고려혁명당을 조직하고 고문이 되었으나 붙잡혀 신의주에서 감옥살이를 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홍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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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福源(1206-1258)

고려의 역신. 본래 이름은 복량이다. 1218년 고종 때 원나라가 강동성에 침입하였을 때 아버지 홍대순이 자진해 항복하여 적병을 불러들였고, 그도 또한 1231년 살리타가 쳐들어오자 서경 낭장으로 있으면서 적에게 항복하였다. 몽고군이 돌아간 뒤 그는 반란을 일으켜 붙잡혔으나 원나라로 도망하여 동경 총관이 되었다. 그 후 원이 고려를 칠 때마다 그 앞잡이가 되어 들어오므로 '주인을 무는 개'라고 하였다. 후에 몽고에 볼모로 간 영녕공 준과 사이가 나빠지자 몽고 황족 출신인 영녕공 준의 부인이 황제에게 일러바침으로써 황제가 보낸 10여 명의 장사에게 맞아 죽었다.

홍봉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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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鳳漢(1713-1778)

조선의 문신. 자는 익여, 호는 익익재, 본관은 풍산이다. 사도(장헌) 세자의 장인이다. 영조 때 영의정까지 이르렀으며, 사도 세자를 죽게 한 김귀주 일당을 탄핵하였다. 1763년 청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영조의 정책을 잘 받들어 많은 업적을 남겼다. 특히 당파 싸움을 없앨 것과 인재를 뽑아 등용시킬 것을 왕에게 적극 건의하였다. 그는 영조를 도움으로써 조선 후기 문화부흥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홍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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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思九(1875-1895)

조선의 항일 운동가. 자는 우용이고 본관은 남양이며, 경북 순흥에서 출생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민비가 시해되었을 때 안승우를 중심으로 해서 의병이 일어나자 그도 이에 가담하여 제천에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죽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홍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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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思容(1900-1947)

시인. 호는 노작이며 수원에서 출생하였다. 휘문의숙을 졸업하고 1921년 <백조> 동인이 되어 <나는 왕이로소이다> <백조는 흐르는데 별 하나 나 하나> 등을 발표하였다. 또한 '토월회'의 동인이 되어 사극 운동에 참여하였다. <백조> 간행과 극단 운영에 재산을 다 써버리고 절과 친구 집을 전전하다가 폐결핵으로 죽었다. 작품에 <꿈이면은> <봄은 가더이다> 등이 있다.

홍석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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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奭周(1774-1842)

조선의 문신. 자는 성백, 호는 연천, 본관은 풍산이다. 정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수찬·교리 등을 거쳐 병조판서에 이르렀다. 그 후 정사로 청에 다녀와 이조판서가 되었으며, 순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벼슬이 좌의정에까지 올랐다. 1834년 순조가 죽자 실록청 총재관에 임명되어 <순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는 주자학에 밝았을 뿐 아니라, 정치·경제·과학 등의 학문에도 이름이 높았다. 많은 저술을 하였는데 <풍산세고> 6권, <상예회수> 10권, <학강산필저> 4권, <연천집> 등이 있다.

홍수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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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受疇(1642-1702)

조선의 화가·문신. 자는 구언, 호는 호은, 본관은 남양이다.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참판에까지 이르렀다. 그림에 뛰어났으며 특히 포도·대나무를 잘 그렸다. 그의 딸이 빌려 온 치마에 간장을 엎질러 울상이 된 것을 보고 그 치마에 다 포도를 그려 팔아 새 비단을 몇 필 사왔다는 일화도 있다. 작품으로 <포도도>가 있다.

홍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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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淳穆(1816-1884)

조선의 문신. 자는 희세, 호는 분계, 본관은 남양이다. 헌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지평·수찬 등을 지냈다. 1863년 고종이 즉위하자 황해도 관찰사를 거쳐 예조판서를 지냈으며, 1869년 영의정에 이르렀다. 그는 당시 수구당 강경파의 우두머리로서 흥선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도왔다. 1871년 중국 주재 미국 공사 로와 로저스 제독이 콜로라드 호를 이끌고 통상을 요구하자 이를 적극 반대하였다. 그 후 벼슬에서 물러났다가 1882년 임오군란으로 대원군이 다시 정권을 잡자 등용되어 대원군의 정책 시행을 받들었다. 1884년 아들 홍영식이 갑신정변을 일으켜 3일 만에 실각하여 살해되자, 그도 벼슬에서 쫓겨나 자살하였다.

홍언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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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彦博(1309-1363)

고려의 문신. 자는 중용, 호는 양파, 본관은 남양이다.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충목왕 때 밀직제학을 거쳐 지신사가 되었다. 1361년 공민왕 때 문하시중으로 있으면서 홍건적이 쳐들어오자, 피란하는 왕을 모셨으며, 왕에게 절제생활을 하도록 권하였다. 1363년 김 용이 흥왕사에서 난을 일으키자, 피하라는 아들의 권고를 물리치고는 “한 나라의 재상이 되어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여 적을 피할 수 있겠느냐”며 최후까지 항거하다가 살해되었다. 죽은 후 정승에 추증되었다.

홍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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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汝諄(1547-1609)

조선의 문신. 자는 자신이며 본관은 남양이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황해도 도사가 되었으며, 성절사 하정관으로 명에 다녀왔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북도 순찰사를 지냈으며, 성품이 나빠 대간의 탄핵을 받고 순천에 유배되었다. 북인으로서 임진왜란이 끝나자 유성룡을 몰아내고 정권을 쥐었다. 북인들은 둘로 갈라졌는데, 그는 대북파의 우두머리가 되어 소북파와 싸움을 벌였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진도에 유배되었다가 그 곳에서 죽었다.

홍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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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英植(1855-1884)

조선 말기의 문신. 자는 중육, 호는 금석, 본관은 남양이다. 영의정 홍순목의 아들로 고종 때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 후 옥당·대교·승지 등을 거쳐 참판이 되었다. 조준영·어윤중 등과 함께 일본을 시찰하였으며, 1883년 특사로 미국에 다녀와 해외 정세에 밝았다. 1894년 개화당 간부로서 우정국이 설치되자 총판이 되었다. 그 해 김옥균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켜 새 정부를 세우고 우의정이 되었지만, 청의 개입으로 3일 만에 내각이 무너지자 살해되었다. 1894년 갑오경장 때 김홍집의 상주로 죄명을 씻고 관에 복귀되어 1910년 규장각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홍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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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儒(?-936)

고려 초기의 무신. 의성 홍씨의 시조이다. 본래는 궁예의 부하였으나 신숭겸·배현경·복지겸 등과 힘을 모아 왕 건을 왕으로 추대하고 고려 건국에 공을 세워 1등 공신이 되었다. 936년 후백제를 멸망시킨 일리천 싸움에서 공을 세웠다.

홍유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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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裕孫(1431-1529)

조선의 문신·시인. 자는 여경, 호는 조총, 본관은 남양이다. 김종직을 스승으로 모시고 학문을 닦았다.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세속적인 일에 뜻을 잃고 남효온·이 총 등과 모임을 가지며 노자·장자 등의 학문을 중심으로 연구하였다. 때로는 시와 술을 곁들여가며 토론하여 '청담파'라고 불리었다. 무오사화 때 제주에 유배되어 노예가 되었다가 중종반정 이후 풀려 나왔다.

홍윤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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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允成(1425-1475)

조선의 문신. 자는 수옹, 본관은 회인으로 세종 32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가 되었다. 무인의 기질이 있어 사복시 직을 겸하였으며 사복주부에 올랐다. 1453년 수양 대군을 옹위하여 정난의 공을 세우고 여러 벼슬을 거쳐 판사 복시사가 되었다. 1460년 모린위에 여진족이 침입하여 변경을 소란하게 하자 신숙주의 부장으로 이를 토벌하였고,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되었다. 성종 즉위 후 인산 부원군에 봉해지고 이듬해 좌리공신의 호를 받았다. 용모가 크고 힘이 장사였으나 재물을 탐하고 횡포한 성질이 있어 백성의 원성이 높았다. 세조는 그의 행동에 크게 노하였으나 지난날의 공로가 크다 하여 용서해 주었다고 한다.

홍익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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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翼漢(1586-1637)

조선의 문신. 자는 백승, 호는 화포, 본관은 남양이다. 인조 때 과거에 급제하여 사서를 거쳐 사헌부 장령을 지냈다. 1636년 청나라가 조선을 속국시하는 모욕적인 조건을 내세워 사신을 보내 오자, 청 사신을 죽임으로써 모욕을 씻자고 주장하였다. 그 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최명길의 주화론을 극구 반대하였다. 결국 남한산성에서 왕이 항복하자 오달제·윤 집 등과 함께 청나라에 잡혀가 죽음을 당하니 이들을 '3학사'라고 하였다. 죽은 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홍인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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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仁祐(1515-1554)

조선의 학자. 자는 응길, 호는 치재, 본관은 남양이다. 서경덕·이 황의 제자로 1537년 중종 때 아버지의 권유로 사마시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그러나 벼슬에 뜻이 없어 학문에만 전력하였다. 당시 이름을 떨쳤던 노사신도 그에게 학문을 물었다고 한다. 효성이 지극하였는데, 아버지가 병들자 의서를 연구하여 마침내 약 처방을 손수 하였고 정성껏 간호하였다고 한다 저서로 <관동일록> <치제유고> 등이 있다.

홍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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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迪(1549-1591)

조선의 문신. 자는 태고, 호는 양재, 본관은 남양이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10년간 홍문관에서 일하였다. 특히 경학에 밝아 천재라고 불렀으며, 시와 문장·글씨 등에도 뛰어났다. 저서로 <하의집> <하의시집>이 있다.

홍종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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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鍾宇

조선 말기 수구파의 문신. 자는 재원으로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였다. 당시 갑신정변에 실패하여 망명했던 김옥균을 상하이에서 죽이고 중국 경찰에게 붙잡혔다. 그 후 청의 군함으로 귀국하였으며, 그 해 문과에 급제하여 교리를 지냈다. 1898년 독립협회가 만민공동회를 개최하면서 개혁을 주장하자, 그는 '황국협회'를 조직하여 독립협회의 활동을 방해하였다. 성품이 과격하고 대담하였으며, 당시 수구파 정책을 적극 옹호하였다.

홍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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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震(1878-1946)

독립운동가. 호는 만오이며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3·1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의 법무총장·국무령 등을 지냈다. 1928년 김 구 등과 한국 독립당을 조직하여 간부로서 활약하였다. 1938년 독립운동 단체가 통합되어 한국 광복전선이라는 이름으로 발족되자 최고 간부로 활약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홍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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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璡基(1917-1986)

언론인. 서울에서 태어나 경성제국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전주 지방 판사·법무부 조사국장 겸 한일회담 대표·법무차관·제네바 회담 한국 대표·해무청장·법무부 장관·내무부 장관 등을 역임하였다. 1964년 중앙 라디오 방송 사장·중앙일보 부사장을 거쳐 회장을 역임하였다. 1975년 이후 중앙일보·동양방송 사장을 지냈다. 1984년 한국 신문협회 고문을 지냈으며, 국민 훈장 동백장을 서훈받았다.

홍 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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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陟

신라 말기의 승려. 일명 남한조사이며 헌덕왕 때 당나라에 가서 지장에게 마음을 수련하는 법을 배운 후 826년에 귀국하였다. 그 후 남악(지리산)에 머물면서 불법을 폈다. 후에 흥덕왕과 선광 태자에게 불교의 교리를 믿도록 하였고, 실상사로 들어가 지장의 설법을 이어받아 선종 구산의 하나인 실상산파를 이룩하였다.

환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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桓雄

신화 속의 인물. 천제자·천왕·천왕랑이라고 한다. 천제 환인의 아들이며 단군의 아버지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그는 아버지 환인에게서 천부인 3개와 3천명의 부하를 이끌고 세상에 내려와 태백산 신단수 밑에 신시를 열고,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맡아 세상을 다스렸다고 한다. 단군 신화에 의하면 웅녀를 맞이하여 단군을 낳았다고 한다.

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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桓因

신화 속의 인물. 환웅의 아버지이며 단군의 할아버지이다. 천제로서 환인의 이름은 불전에서 빌려온 제석신(帝釋神)의 이름에 불과하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사람이 사는 세상을 탐내는 아들 환웅에게 천부인 3개를 주고 세상에 보내어 다스리게 하였다고 한다.

환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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桓祖(1315-1361)

조선의 태조 이성계의 아버지. 자는 자춘이며 고려 때의 사람이다. 함경도 쌍성(영흥)에서 세력을 떨치며 원나라의 벼슬을 하고 있었다. 1355년 공민왕 때 처음으로 고려 조정에 들어와 소부윤의 벼슬을 하였다. 그 당시 쌍성에는 원나라의 총관부가 들어와 함경도 일대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원의 세력이 점차 약해지자, 환조는 밀직부사 유인우와 함께 쌍성총관부를 점령하여 함주 이북을 회복하였다. 이 공으로 1360년 대중대부 사복경이 되어 개경에 있었다. 그 후 삭방도 만호 겸 병마사가 되어 함경도 지방을 다스리다가 죽었다. 아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환왕이라고 하였으며, 1411년 태종 때 묘호를 환조라고 하였다.

황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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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道淵(?-1885)

조선 말기의 명의. 호는 혜암이며 본관은 창원이다. 서울 무교동에 병원을 내어 명의로서 이름을 떨쳤다. 여러 가지 의서를 저술하여 의학의 대중화에 공을 세웠다. 저서로 <부방편람> <의종손익> <의방활투> 등이 있다.

황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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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東奎(1938- ) 시인. 서울 출생. 서울대 영문과 졸업. 1966년 동대학원 석사. 서울대 영문과 교수. 1958년 <현대문학>에 <시월> <즐거운 편지> 등이 추천되어 등단. 시집으로 <비가>(1964), <삼남에 내리는 눈>(1975), <사랑의 뿌리>(1976),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1978), <열하일기>(1982), <풍장>(1984), <악어를 조심하라고?>(1986) 등이 있다. 1991년 서울대 대학신문 주간을 지냈고 현대문학상, 한국문학상을 받았다.

황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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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秉冀(1936- )

국악인. 서울 출생. 서울대 음대를 졸업하고 국악원에서 가야금과 작곡을 연구하였다. 1961년 한국 최초로 서양 오케스트라와 가야금 협주를 하였고, 1965년 하와이 '20세기 음악 예술제'에서 연주를 하고, 미국 주요 도시에서 가야금 독주회를 가졌다. 미국 워싱턴 주립대학 및 이화여대 강사를 거쳐 현재 이화여대 국악과 교수 및 미국 하버드 대학 객원교수로 있다. 1990년 평양 범민족 통일음악회 서울 전통음악 연주단장·서울 90 송년 통일음악회 집행위원장·1994년 국악의 해 조직위원장을 지냈다. 국악상·영화음악상·공연예술 평론가협회 예술가상·중앙문화대상을 수상하였다. 저서로 <가야금곡집> 5권, 작품으로 가야금곡 <숲> <석류집> <비단길> <전설> <미궁> <밤의 소리> 등이 있다.

황보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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皇甫仁(?-1453)

조선의 문신. 자는 사겸, 호는 지봉, 본관은 영천이다. 태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세종 때에 북도 체찰사로서 김종서와 더불어 6진을 개척하고 돌아와 영의정이 되었다. 그 후 1452년 문종 때 다시 영의정이 되었으며, 단종을 잘 보살피라는 문종의 유언을 받들어 어린 단종을 보호하다가, 1453년 수양 대군에게 김종서와 함께 살해되었다. 뒤에 숙종이 다시 벼슬에 올리고 영조가 충정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황보 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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皇甫抗

고려 명종 때의 시인. 시를 잘 지어 이름을 떨쳤으며, 이인로·오세재·임춘·함순·이담지·조 통 등과 사귀면서 시작과 술로 세월을 보냈다. 이들은 당시 중국의 '강좌 7현'에 비유되었다.

황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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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嗣永(1775-1801)

조선의 천주교도. 자는 덕소이며 본관은 창원이다. 정약용의 큰 형인 정약현의 사위로 천주교도가 되었다. 1794년 우리 나라에 들어온 중국인 신부 주문모에게 가르침을 받아, 알렉산드르라는 교명을 받았다. 1801년 신유박해 때에는 제천의 산중에 피신하여 토굴 속에서 지냈다. 그는 여기에 있는 동안 주문모의 입국 후부터 신유박해에 이르기까지 교세 및 박해의 상황 등을 적어 베이징의 주교 구베아에게 전할 계획이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황 심 등과 함께 붙잡혀 모두 처형당하였다. 이 밀서를 '황사영 백서'라고 하며, 이 사건 이후 천주교에 대한 정부의 박해가 한층 더 엄중해졌다.

황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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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裳

고려 우왕 때의 무신. 본관은 의창이며 충혜왕 때 호군이 되었다. 1362년 공민왕 때 홍건적이 쳐들어오자 왕을 모시고 피란하였다. 이어 강원도 도만호가 되어 안 우 등과 함께 서울을 다시 탈환하는 데 공을 세워 1등 공신이 되었다. 그 후 여러 벼슬을 거친 후, 1377년 우왕 때 서강 도원수로서 왜구를 막는 데 공을 세웠다. 무예에 뛰어나고 용맹스러워 여러 왕의 사랑을 받았으며, 원나라 순제도 그의 무술에 찬탄하였다고 한다.

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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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晳暎(1943- )

소설가. 만주 신징 출생. 광복 후 귀국. 경북고교를 거쳐 동국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경북고교 재학시 <입시부근>으로 <사상계> 신인문학상에 입선, 1970년 조선일보에 <탑(塔)>이 당선되면서 다시 문단에 나섰다. 1971년 <창작과 비평>에 소설 <객지>를 발표했다. <객지>는 리얼리즘에 바탕을 둔 민중적 차원에 있어서의 현실 파악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는 작품으로, 이후 현장문학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70년대부터 80년대까지 <한국일보>에 소설 <장길산>을 연재하여 역사소설의 한 획을 그었다. 특히 1980년 광주민주화항쟁 당시의 일을 르포 형식으로 쓴 <죽음을 넘어 시대의 사선을 넘어>는 80년대 르포 문학의 새 장을 여는 작품이기도 하다. 1989년 북한에 가서 경험한 <사람이 살고 있었네>를 발표했다. 현재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로 있다.

황석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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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錫禹(1895-1959)

시인. 호는 상아탑이며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일본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과를 졸업하였으며, 1920년 김 억·남궁 벽·오상순·염상섭 등과 문학지 <폐허>의 동인이 되어 상징주의 시 운동의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듬해 박영희·변영로·노자영·박종화 등과 동인지 <장미촌>을 창간하였으며, 1929년 동인지 <조선시단>을 창간하였다. 한편, 중외일보·조선일보 기자와 국민대학 교무처장 등을 지냈다. 저서로 <자연송>이 있다.

황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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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順元(1915-2000)

소설가. 평남 대동에서 출생하였으며 일본 와세다 대학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처음에는 <단층>의 동인으로 1934년 시집 <목가>와 <골동품>을 출간하였다. 그 후 1940년 <황순원 단편집>을 발간하면서부터 소설로 전환하였다. 초기 소설은 애수나 정감을 간결한 수법으로 다루었으나 후기에 와서는 사회적 문제를 소재로 삼았다. 즉 고아의 세계, 백정의 특수사회, 광복 후 북한의 토지개혁 등을 소재로 삼았다. 표현 수법은 신심리주의적 경향이 짙고 문장의 세련과 긴축이 특징이다. 잡문을 쓰지 않는 작가로 정평이 나 있다. 1960년 경희대학교 교수·학술원 회원·문인협회 이사 등을 지냈고, 1970년 경희대학교 문학부장, 1980-92년 경희대 명예교수를 지냈다. 1954년 자유문학상·1960년 예술원상·국민훈장 동백장을 비롯하여, 아시아 자유문학상·3·1 문화상·대한민국 문학상 본상·인촌상을 수상하였다. 대표작으로 <별> <소나기> <학> <카인의 후예> <기러기> <곡예사> 등이 있으며, 저서로 <황순원 전집> 6권이 있다.

황 에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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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류 독립 운동가. 서울에서 출생하였으며 3·1운동 때 많은 기독교인이 투옥되자, 오현관·오현주·이정숙 등과 함께 옥에 갇힌 사람들과 그 가족들을 돕기 위해 '애국부인회'를 조직하였다. 그는 애국부인회의 총무가 되어 의연금을 모집하는 한편, 전국에 지부를 확장하여 독립군 자금을 모아 상하이 임시정부에 보냈다. 그 후 '대조선 독립 애국부인회'와 통합 발족된 '대한민국 애국부인회'의 총무부장이 되었다가 체포되어 3년간 복역하였다.

황여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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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汝獻(1486-?)

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헌지, 호는 유촌, 본관은 장수이다. 황 희의 5세손이며,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참의·울산군수 등을 지냈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는데, 소세양·정사룡 등과 어깨를 겨룰 정도로 당시 이름이 높았다. 그가 지은 <죽지사>는 명나라 사람들에게까지 격찬을 받았다. 저서로 <유촌집>이 있다.

황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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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瑩 고려 숙종 때의 학자. 1103년 숙종 때 중서시랑 등을 지냈으며 사학을 세워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다. 이 제자들을 '정경공도'라 불렀는데 고려 12공도 중의 하나였다.

황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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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永祖(1970- )

마라톤 선수. 1992년 제25회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손기정 이후 56년 만에 마라톤 우승 신화를 재현했다. 1991년 제16회 하계 유니버시아드대회의 마라톤경기에서 우승했고, 1992년 2월 일본 벳푸·오이타 마라톤대회에서 우리나라 최고 기록으로 2위를 하였으며, 1994년 10월 제12회 히로시마 아시아경기대회 마라톤에서 우승했다.

황윤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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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允吉(1536-?)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길재, 호는 우송당, 본관은 장수이다. 황 희의 5세손으로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1590년 선조 때 통신정사로 일본에 다녀왔다.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우리나라를 침입할 것이라고 아뢰었는데, 같이 갔던 김성일이 침입이 없을 것이라고 하자 선조는 김성일의 말만 듣고 적을 맞을 준비를 소홀히 하였다. 2년 후 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황윤길의 말을 믿지 않았음을 크게 후회하였다고 한다.

황윤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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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胤錫(1729-1791) 조선의 학자. 자는 영수, 호는 이재, 본관은 장수이다. 김원행의 제자로 특히 경학에 밝았다. 영조 때 사마시에 급제하여 익찬에 이르렀다. 저서로 <이재유고> 25권과 <화음 방언 자의해> <자모변> 등이 있는데, 이는 오늘날 국어 연구에 있어서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황윤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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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允石(1929-1961) 최초의 여판사. 본관은 장수이며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 철학·문학에 관심이 컸으나, 아버지의 권유로 법률을 지망하여 1952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였다. 이 해 제3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하여 1954년 서울 지방법원 판사에 임명됨으로써 우리 나라 최초의 여판사가 되었다. 1960년 숙명여고에서 선구여성으로 표창을 받고, 이 해 필리핀에서 열린 세계 여성 법률가 회의에 참석하였다. 이듬해 여성 문제 연구회 실행위원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이 해 4월 자택에서 변사하여 그 사인을 둘러싸고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켰다. 그 후 여성 단체에서 고인의 뜻을 추모하여 사법고시 준비생을 위한 '윤석 장학회'를 설립하였다.

황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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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晸(1689-1752)

조선의 문신. 자는 양보이며 본관은 장수이다.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정자·지평 등을 지냈다. 1723년 경종 때 진위사의 서장관으로 청에 다녀와서 동부승지·의주 부윤·안동 부사 등을 지냈다. 1749년 영조 때 사신으로 청에 다녀와서 형조참판이 되어 부총관을 겸하였다. 1751년 함경도 관찰사가 되어 병마절도사·수군절도사·순찰사 등을 겸하였다. 이 때 경상도의 곡식을 운반하여 빈민을 구제하였으며, 농사를 장려하여 유랑민을 막았다.

황주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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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周亮(?-1043)

고려 초기의 문신. 호는 경문으로 현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중독원 부사에 이르렀다. 덕종 때 수국사로 있으면서 거란의 침입으로 소실된 고려의 역대 왕들에 대한 실록 편찬에 참가하였다. 그리하여 1032년 태조에서 목종까지 7대에 걸친 사적 36권을 완성하였다. 1043년 정종 때 공신의 호를 받았다. 죽은 후 정종의 사당에 함께 모시고 선종 때 개부의 동삼사에 추증되었다.

황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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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進伊

조선 중종 때의 명기. 본명은 진, 기명은 명월이며 개성에서 출생하였다. 개성 황진사의 서녀라고 한다. 태어날 때부터 얼굴이 아름다워 선녀라고 불리어졌다. 그녀가 기생이 된 까닭은 확실하지 않고, 다만 15세 때 동네의 한 총각이 그녀를 사모하다가 상사병으로 죽자, 그를 불쌍히 여겨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 결심하여 기생이 되었다고 한다. 당시의 대학자이며 시인인 서경덕을 비롯하여 많은 문인들과 가까이 사귀었으며, 서경덕·박연폭포와 더불어 '송도 3절'로 불리었다. 그녀는 시조와 한시에 뛰어나, 인생과 자연·사랑을 시로써 노래하고 읊었다. 짧은 생애를 열정적으로 살다간 여인으로 그녀가 죽자, 임 제 등 후세의 문인들이 시를 지어 추모하였다. <해동가요> <청구영언> <가곡원류> 등에 시조가 실려 전한다. 작품으로 <만월대 회고시> <박연폭포시> <영초월시> 등이 있다.

황집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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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執中(1533-?)

조선 선조 때의 화가. 자는 시망, 호는 영곡, 본관은 창원이다. 1576년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특히 포도를 잘 그렸다. 당시 이 정의 대나무와 어몽룡의 매화와 더불어 '3절'로 불리었다. 작품으로 <포도도>가 있다.

황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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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玹(1855-1910)

조선 말기의 학자. 자는 운경, 호는 매천, 본관은 장수이다. 1885년 고종 때 생원시에 장원 급제하였고 고향에서 이건창 등과 사귀면서 시를 지으며 지냈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나라를 빼앗긴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유시 4수를 남기고 음독 자살하였다. 1911년 유시집 <매천집> 3권이 김택영과 영남·호남 선비들의 성금으로 출간되었다. 또한 그가 지은 <매천야록>은 광복 후, 국사편찬위원회 사료 총서 제1집으로 간행되어 근세사 연구에 중요한 문헌이 되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저서로 <동비기략> 등이 있다.

황 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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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喜(1363-1452)

고려말 조선 초의 명신. 자는 구부, 호는 방촌, 본관은 장수이다. 고려가 망할 무렵에 개성 가조리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인격 도야에 남다른 노력을 하였으며 온후한 인품을 지녔다. 고려 무왕 때 27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학관이 되었다. 조선에 들어와서는 정자·사간 등을 지냈는데, 그가 정치가로서의 수완을 발휘한 것은 47세에 지신사가 되던 때부터이다. 그는 태종의 극진한 총애를 받았으며, 육조의 판서를 역임하였고, 대사헌·한성 판사 등의 요직에 있으면서 문물과 제도의 정비에 노력하여 훌륭한 업적을 많이 남겼다. 농사 짓는 법을 개량하고 씨앗을 농민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뽕나무를 많이 심게 하였다. 또한 북방의 오랑캐와 남쪽의 왜적을 막기 위한 방비책에 힘썼다. 당시 천민을 차별하지 않는 평등 사상을 내세우는 등 덕망이 높았다. 1413년 세자 양녕 대군을 폐하는 데에 반대하였다가 남원으로 유배되기도 하였다. 그 후 1422년 세종 때 등용되어 영의정에 올랐다. 87세로 영의정에서 물러났을 때, 재물에 욕심이 없어 청빈한 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집안이 무척 가난하였다고 한다. 이후 청백리의 귀감이 되었으며 세종묘에 배향되었다. 저서로 <방촌집>이 있다.

회안 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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懷安大君(?-1421)

조선 태조 이성계의 넷째 아들로 이름은 방간, 시호는 양희이다. 어머니는 신의 왕후 한씨로 조선 건국 후 회안 대군에 봉해졌다. 왕위 계승에 대한 야심을 품고 동생 방원을 질시하던 중,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논공 행상에 불만을 품고 있던 박 포의 거짓 밀고를 믿고, 1400년 군사를 일으켜 방원을 공격하였다. 정종이 이문화를 보내어 달랬으나 듣지 않고 개경에서 싸움을 벌여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그 결과 패하여 서동으로 도주하다 잡혀 토산현에 귀양갔고, 박 포는 사형당하였다.

효공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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孝恭王(?-912)

신라 제52대 왕(재위 897-912). 헌강왕의 서자로 897년 진성 여왕이 죽자 즉위하였다. 당시는 궁예와 견훤이 세력을 펴 각축을 벌이던 때로, 신라는 정치가 문란하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진 상태였다. 897년 궁예에게 패하여 한산주 등 30여 성을 빼앗겼으며, 900년 서남쪽 땅을 견훤에게 빼앗겨 신라의 영토는 점점 줄어들었다. 그러나 왕은 주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효령 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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孝寧大君(1396-1486)

조선 태종의 둘째 아들. 자는 선숙이며 이름은 보이다. 세종의 형으로 글 읽기와 활쏘기를 좋아하였다. 효성이 지극하여 태종이 병에 걸리자 손수 약을 달이는 등 곁을 떠나지 않았다. 또한 세종과 우애가 깊었으며 불교를 좋아하여 승도를 모아 불경을 강의하였다. 1464년 원각사가 창건되자 스스로 나가 공사를 감독하였으며 <원각경>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발간하였다.

효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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曉峰(1888-1966)

승려. 평남 평양에서 출생하였으며 평양고보를 거쳐 일본 와세다 대학 법과를 졸업하였다. 그 후 판사가 되어 6년간 법관 생활을 하였다. 이때 한 죄수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것이 잘못으로 밝혀지자, 양심의 가책과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고 전국을 방랑하다가, 1925년 금강산 신계사로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1929년 순천 송광사에서 불교 최고의 과정인 대교과를 공부하였다. 그 후 상원사 등 여러 절을 돌아다니며 불법을 편 후, 1941년 송광사에서 대종사의 직위를 받았다. 1954년 불교 종단 정화 준비위원이 되어 불교 정화운동에 앞장섰으며, 1956년 네팔에서 개최된 불교도 대회에 우리나라 대표로 참석하였다. 1958년 우리나라 불교계의 최고 지도자가 되어 여러 파로 갈라져 있는 불교계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였다. 1966년 밀양 표충사에서 죽었는데, 32개의 사리가 나왔다.

효의 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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孝懿王后(1753-1821)

조선 정조의 왕비. 본관은 청풍이며 병조판서 김성응의 손녀이다. 10세 때 세손 빈에 봉해졌으며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왕비가 되었다. 자식은 낳지 못했으나 성품이 부드럽고 온후하여 신하들의 칭송과 흠모를 받았다.

효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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孝宗(1619-1659)

조선 제17대 왕(재위 1649-1659). 인조의 둘째아들이다. 병자호란 때 형 소현 세자와 함께 선양에 인질로 잡혀가 8년간 머물렀다. 즉위하자 선양에서의 굴욕을 씻고자 북벌 계획을 세우고 군비를 정비하였다. 송시열·송준길 등을 등용하여 군정에 힘썼으나, 김자점의 밀고로 청에 알려지자 일시 중단되었다. 그 후 흑룡강으로 침입하는 러시아 군을 물리치기 위해 청이 원군을 요청하자, 함께 나선을 정벌하였다. 안으로는 북벌 계획을 버리지 않고 군복 개량 등 북벌 준비를 계속하였고, 호서 지방에서 대동법을 실시하였다. 또한 김 육의 건의로 상평통보를 만들어 화폐를 사용하게 하였다. <농가집성> <내훈> <선조 수정실록> 등을 간행하게 하였고, 제주도로 표류해 온 하멜 일행으로 하여금 서양 무기를 만들게 하였다. 필생의 집념이던 북벌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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休靜(1520-1604)

조선의 승려. 자는 현응, 호는 청허·서산, 본관은 완산이다. 속성은 최씨이며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지리산에 들어가 불교의 깊은 진리를 깨닫고 승려가 되었다. 29세 때 승과 시험에 합격하여 교종·선종의 판사를 지냈으며 그 후 봉은사의 주지가 되었다. 38세에 승직을 버리고 금강산에 들어가 삼몽사를 짓고 수도에만 힘썼다. 1589년 정여립의 모반 때 요승 무업의 무고로 옥에 갇혔으나, 선조가 그 억울함을 알고 석방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73세의 고령으로 의주에 있는 선조를 찾아가 나라를 구할 것을 맹세하고 8도 16종 도총섭에 임명되었다. 휴정은 곧 전국의 승려들에게 명하여 나라를 위해 궐기하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 유정은 관동에서, 처영은 호남에서, 영규는 공주에서 승병을 모았다. 이들 승병들은 각지에서 관군을 도와 큰 공을 세웠다. 1594년 8도 16종 도총섭의 자리를 제자인 유정에게 물려주고 묘향산으로 들어가 여생을 보내다가 85세로 죽었다. 그의 시를 '오도송(도를 깨달은 노래)'이라고 하는데, 깊고 심오한 경지가 잘 나타나 있다. 특히 나라와 백성에 대한 사랑이 담긴 시는 <청허집> 속에 실려 있다. 그는 유교·불교·도교가 일치한다고 하는 '3교 통합론'을 주장하였으며, 우리 나라 불교를 조계종으로 통합하였다. 저서로 <선교결> <선교석> <선가귀감> <운수단> 등이 있다.

흑치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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黑齒常之

백제 의자왕 때의 장군. 용맹하고 지략이 있어 의자왕 때 달솔이 되어 풍달군장을 겸하였다. 660년 백제가 망하자 남은 군사들을 모아 임존성에 들어가 백제의 부흥을 꾀하였다. 그는 100여 개의 성을 다시 찾는 등 기세를 떨쳤으나, 나·당 연합군에게 주류성을 빼앗기자 당의 장군 유인궤에게 항복하였다. 그 후 당에 들어가 좌령군 원외장군이 되었고, 678년 돌궐을 정벌하여 공을 세웠다. 그 후 하원도 경략대사 등의 요직을 지냈으나, 그를 시기하는 당나라 신하들의 무고로 누명을 쓰고 옥에 갇혀 죽었다.

흥덕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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興德王(?-836)

신라의 제42대 왕(재위 826-836). 헌덕왕의 동생으로 왕위에 즉위하자, 장보고를 청해진 대사로 삼아 해적의 침입을 방지하게 하였다. 또한 그 해 대렴이 당에서 차 씨앗을 가져오자 이를 재배하게 하여 전국적으로 차가 퍼지게 되었다. 830년 승려 혜소가 당나라에서 귀국하였으며, 834년 복색 제도를 고치고 백성들에게 검소한 생활을 권장하였다. 후사가 없어 종제인 균정에게 왕위를 물리려 하였으나, 그가 죽자 제륭(희강왕)이 균정을 죽이고 왕이 되었다.

흥선 대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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興宣大院君(1820-1898)

조선 말기의 정치가. 자는 시백, 호는 석파이며 이름은 하응이다. 영조의 현손이며 고종의 아버지이다. 1843년 헌종 때 흥선군에 봉해졌으나, 당시 안동 김씨의 세도 정권 밑에서 불우한 생활을 하였다. 철종이 후사 없이 죽자, 조 대비(헌종의 어머니)에게 가까이하여 그의 둘째 아들 명복(고종)을 후계자로 삼을 것을 몰래 승낙받았다. 1863년 철종이 죽자, 조 대비의 명으로 고종이 즉위하여 대원군에 오르고, 섭정과 정책 결정권의 권한을 부여받았다. 그는 안동 김씨를 몰아내고 당파와 신분에 관계없이 인재를 골고루 등용하였다. 또한 당쟁의 소굴인 서원을 47개를 제외하고 모두 철폐하였다. 이어 <대전회통> <육전조례> <오례편고> 등을 간행하여 법률제도의 확립을 꾀하였다. 의정부를 부활시키고 비변사를 폐지하였으며, 삼군부를 두어 정권과 군권을 분리하였다. 의복제도를 개량하여 사치와 낭비를 억제하였으며, 세금제도를 뜯어 고쳐 귀족과 서민의 차별 없이 세금을 거두었다. 또한 세금을 받아 옮기는 도중에 일어나는 지방 관리들의 부정을 없애기 위하여 사창을 세워 국고를 충실하게 하였다. 그러나 경복궁의 중건으로 경제가 혼란하여 민생이 도탄에 빠졌으며, 천주교를 탄압하여 선교사를 죽임으로써 대외적인 감정을 악화시켰다. 또한 강경한 쇄국 정책을 씀으로써 병인양요·신미양요를 일으키는 등 국제 관계가 나빠지고 외국 문물의 흡수가 늦어졌다. 이러한 실정으로 반대 세력이 생겨나게 되었고 고종이 직접 정치를 하게 되자, 며느리인 민비가 반대파와 손을 잡고 1873년 대원군을 탄핵하여 정계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그 후 1882년 임오군란으로 다시 정권을 잡았으나, 민비의 요청으로 청나라 군사가 출동하여 톈진에 4년간 붙잡혀 있었다. 1885년 귀국한 후 청나라 장군 위안스카이와 결탁하여 고종을 폐위시키고 맏아들 재면을 왕으로 옹립하여 재집권하려다 실패하였다. 1895년 일본 공사 미우라와 짜고 을미사변을 일으켜 정권을 쥐었으나, 명성황후 시해사건으로 미우라 공사가 본국으로 불려가자 정권을 내놓고 은퇴하였다. 아들인 고종이 그의 장례식에도 나타나지 않을 정도로 부자 관계가 나쁜 상태로 죽었다. 1907년 대원왕에 추증되었다.

흥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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興安君(?-1624)

조선 선조의 열 번째 아들. 이름은 제이며 어머니는 온빈 한씨이다. 1624년 이 괄의 난이 일어나자 이들과 내통했다는 설이 있어 대신들이 그를 위리 안치(죄인을 가두는 가시 울타리)하자고 청했으나, 인조는 허락하지 않고 공주로 피란할 때 같이 데리고 갔다. 그는 도망하여 이 괄의 진영에 들어가 한때 왕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이 괄이 관군에게 패하자 소천에 숨어 있다가 안사성에게 붙잡혀 압송된 후 도원수 심기원에게 살해되었다.

희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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熙宗(1181-1237)

고려의 제21대 왕(재위 1204-1211). 신종의 큰 아들이다. 즉위하여 최충헌을 문하시중에 봉하였는데, 그의 횡포가 심하였으므로 왕은 내시 왕준명 등과 모의하여 죽이려고 하였으나 성사하지 못하였다. 1211년 도리어 최충헌에 의해 폐위되어 강화 교동으로 유배된 후, 그곳에서 죽었다.

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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