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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 각국의 정치사정[편집]

東南亞各國-政治事情

동남아시아는 보통 아시아 대륙 중 인도차이나 반도와 그 부근의 많은 섬들을 포함하는 지역에 대한 지칭이며, 인도대륙은 별개의 지역으로 취급하는 것이 통례이지만, 여기에서는 편의상 후자의 여러 나라도 포함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는 하나의 지역으로 명백히 식별될 만큼 공통성이 크지 못하다는 견해가 있기는 하나 다른 영역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정치적 영역에 있어서는 어떤 공통성이 발견된다. 다시 말해서 이 지역 안의 국가들 사이에는 한 나라의 동태가 다른 나라에 큰 영향을 끼치는 상호연관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1) 이 지역 국가들은 서구문화나 세력이 침투하기 이전에 인도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에 정치역할들에 관한 신분성향적 관념과 치자와 피치자간의 관계에 있어서 차등적 관념이 하나의 지배적 공통성이 되고 있다. 서구문화의 영향으로 민주주의 제도가 도입되었다고는 하나 이러한 전통적 관념이나 정치형태에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지는 못했다. 오히려 서구화 과정에서 모든 근대화의 혜택이 새로이 발달된 도시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사회적 격차가 확대되었고 따라서 소수 정치 엘리트가 독점적 역할과 지위를 차지하는 결과를 낳았다.

(2) 이 지역의 국가들은 타이를 제외하고서는 한결같이 외세에 의한 식민통치의 경험을 갖고 있다. 따라서 이 지역 국가들의 가장 두드러진 이념적 공통분모가 되고 있는 것은 반식민주의이며 또한 반서구적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반식민주의, 또는 민족주의는 이 지역국가들의 정치적 통합과 외교정책 방향과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

(3) 이 지역 국가들은 대내·대외적으로 공통적인 문제들을 갖고 있다. 중국대륙과 인접하고 있는 특수한 지리적 환경으로 인해서 중국의 존재가 하나의 위협이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영향력에 대처해야만 하는 안보상의 예민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리고 식민통치 당시에 불합리하게 획정된 국경들로 해서 이들 국가들 사이에 국경분쟁의 위험이 항시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대내적으로도 경제적 후진성을 탈피하기 위한 근대화에의 압력이 이들 국가 모두에게 하나의 심각한 공통적 과제가 되고 있으며 정치체제의 측면에 있어서도 이 지역국가들의 정치문화와 정치제도간의 괴리가 여러 가지 정치적 부작용을 낳고 있는 것이다.

동남아 각국의 정치적 추세[편집]

東南亞各國-政治的趨勢

동남아 각국의 정치적 추세를 개별 국가별로 볼 것이 아니라 일반적 관점에서 본다면 대체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측면에서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1) 이데올로기적 추세와 대외정책 ― 앞서도 지적한 이 지역국가들을 휩쓸고 있는 이데올로기는 반식민주의적이고 반서구적인민족주의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이 지역에 있어서 민족주의가 강력한 이념적 동력으로 있는 원인은 첫째로 자국의 독립과 대외적 추세성을 외세의 압력으로부터 수호하고자 하는 배타적 의식이고, 둘째로는 복합사회(複合社會)의 사회적 인종적 격차를 극복하고 국민적 일체성을 확립하고자 하는 정치통합에의 요구와 또 다른 한편으로 경제적 후진성을 극복하기 위한 신속한 근대화에의 의지에서 나오고 있다. 따라서 신속한 경제개발의 필요는 강력한 경제계획으로 표현되고 이것은 곧 사회주의의 발전으로 나타나고 있다. 1950년대로부터 시작해서 동남아국가들의 사회주의화 경향은 두드러지게 들어나고 있다. 미얀마를 비롯하여 캄보디아(크메르)·인도·스리랑카(실론)등 국가의 예는 대표적인 것이 될 것이다. 한 가지 유의할 것은 이들 국가의 사회주의는 공산주의나 자본주의의 어느 것과도 틀릴 뿐더러 자국의 전통과 실정에 근거를 둔 특이한 사회주의를 택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한 예로 미얀마식 사회주의나 촌락 판차얏(village panchayat)의 전통을 살린 인도의 사회주의를 들 수 있을 것이다.

(2) 정치체제의 추세 ― 2차대전 후 대부분 독립을 쟁취한 동남아의 신생국가들은 서구적 영향에 따라 대체로 의회민주정치체제를 세웠다. 그러나 이 체제들은 처음부터 불안한 것이었고 그 체제의 안정이 정치지도자의 카리스마에 의해서 지탱되다시피 했다. 그리고 의회정치의 성패를 가름하는 정당제도 역시 독립운동의 주체세력으로 구성된 정당이 거의 독점적 지위를 차지함으로써 균형있는 정당제가 이룩될 수도 없었고, 과거 열강의 식민지배정책으로 인한 국민의 무지와 정치적 의식의 결여의 문제가 있었고, 사회의 상층에는 토착식민세력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으므로 정치적 공백에 따른 정변이나 쿠데타의 연속이 의회정치를 대신했다. 1970년대에 들어와서도 대부분의 국가의 정권교체는 이런 양상을 나타냈으며, 그 주역들에 의한 독재정치 ― 외견상은 헌정질서를 보이고 있었지만 ― 가 계속되는 사정이었다. 이러한 독재정치에 따른 국민의 민주화요구와 경제적 피폐와 더불어 또 하나의 불안요인이 공산화위협이었다. 25년간의 전쟁에서 공산화에 성공한 베트남의 팽창정책과 사회적·정치적 불안에 편승한 자생적 공산게릴라의 준동은 독재정권에게 위협과 동시에 대국민통치정책의 주요한 명분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아시아 여러 나라의 독립[편집]

Asia-獨立

제2차대전의 종결과 함께 최초로 열강의 식민지상태에서 벗어나 새로운 민족국가를 탄생시킨 것은 역시 아시아였다. 1945년 8월 이후 50년에 이르기까지 종전에 영국·프랑스·네덜란드·일본·미국 등의 식민지이거나 반식민지이었던 인도·미얀마·파키스탄·스리랑카·베트남·라오스·캄보디아·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필리핀·한국 등이 독립하고 신흥제국으로서 출현했다.

이들 아시아 제국의 독립은 실로 1세기에 걸친 민족해방운동 내지 독립운동의 결실이었다. 대전 초기 일본군의 동남아 점령으로 영국·프랑스·네덜란드·미국 등의 식민지 통치기구가 큰 타격을 받고, 후에 연합군의 반격으로 일본군이 패퇴하자, 동남아시아 일대에는 독립전쟁이 본격화되어 일본군을 공격하는 한편 옛 종주국인 연합국에 대하여 독립을 요구하고, 불응시에는 끈질긴 유격전을 벌였다. 한편 전후에 미·소 양대진영의 냉전체제가 강화되자 그들은 민족의 독립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하여 미·소간의 대립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었다. 특히 일본의 침략을 격퇴시키기 위한 좌·우합작에 의한 중국의 항일민족통일전선, 한국임시정부의 대일항쟁, 호치민(胡志明)이 이끈 베트남 독립동맹, 미얀마의 반파시스트 인민자유연맹(AFPFL), 인도의 국민회의파, 파키스탄의 회교도연맹 등은 민족 독립에 큰 역할을 한 단체들이었다.

아시아의 국내전쟁[편집]

Asia-國內戰爭

전후에 독립한 아시아의 신생국들은 ① 제국주의 열강의 분리·독립정책, ② 미·소의 분할점령, ③ 이데올로기상의 내분, ④ 이에 대한 강대국의 지원 혹은 개입 등으로 새로운 형태의 국내전쟁에 빠져드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비극적인 것은 이데올로기나 종교의 차이에 원인을 둔 동족간의 전쟁형태가 세계 어느 지역보다도 장기적으로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전자의 주요 원인은 공산주의 세력에 의해 '공산혁명'이라는 미명하에 벌어진 것으로, 국공내전·베트남전쟁·한국동란·캄보디아내전(1970∼79년 사이) 등이 이에 해당하며, 더욱이 양극체제에서의 대리전 양상으로 확대됨으로써 그 결과는 더욱 비참하였다. 인도·파키스탄·방글라데시 3국 사이에 계속되고 있는 분쟁은 후자에 속하는 것으로, 이들 국가는 1947년 전까지는 하나의 국가였다. 또 하나의 형태는 간섭전쟁·국경분쟁으로 중·인 국경분쟁, 중·베트남 전쟁,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 등이 여기에 속한다.

아시아 신생국의 유형[편집]

Asia新生國-類型

구서구열강의 식민지배하에 놓여 있다가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이후부터 1950년대에 걸쳐 독립·주권회복을 쟁취한 동남아권 국가들의 국가형태는 대부분 구식민통치국의 영향을 받아 외견상 민주주의 공화국 정체와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도입하였다. 예외적으로 자생적 공산주의가 진전된 베트남과 중국은 내전에 휩쓸렸고, 연합국의 패전 처리과정에서 한국은 남북으로 분단되어 민주주의 공화국과 사회주의 정권이 남북에 각각 수립되었다. 따라서 동남아시아 제국의 국체와 정체는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로 2분할 수 있는데, 일부 예외(수카르노 당시의 인도네시아·네윈의 미얀마 등)가 있다.

그러나 공산주의 국가는 차치하고서라도 민주주의·자본주의 체제 국가라도 실질적으로는 군사정권·독재정권이 양상이 대부분이었으며 체제에 관계없이 외교정책에 있어서는 친서방·친소·친중국을 완전하게 구분할 수 없다. 과거 1960년대와 1970년대까지는 지역정세로 인하여 그러한 편향이 나타나기도 하였으나, 그 후 비동맹권의 대두와 독자실리 외교노선을 취함으로써 몇몇 국가를 제외하면 거의 구분이 모호하다. 다만 경제부문에 있어서는 자국의 근대화를 위해 친서방경향이 농후하다.

반둥회의와 아시아 신생국가[편집]

Bandung 會議-Asia 新生國家

1950년대 중반 신생제국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한국과 인도차이나 두 전쟁의 휴전이다. 이로써 강력하게 대두한 새로운 중국의 국제적 지위와 그 영향력 그리고 인도 네루 수상의 비동맹주의 외교, 저우언라이·네루 공동성명에 의해 확립된 1954년의 평화 5원칙 ― 이러한 것들의 결실로 나타난 1955년의 반둥회의(아시아 아프리카 회의) 등은 매우 주목할 만한 것들이었다.

이에 따라 중국·인도·미얀마·인도네시아 등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 신생국은 소위 반제국주의, 반식민주의, 평화적 공존 등의 대외노선을 내세우면서 국가 건설에 정력적으로 매진하였다.

예컨대 인도네시아에 있어서 수카르노 대통령(재임 1949∼1967)은 1957년에 카리아(일하는) 내각을 조직하고 서이리안(西 Irian) 해방을 선언하여 네덜란드계 기업을 국유화시켰다. 한편 1945년 헌법으로 복귀를 선언하면서 강력한 대통령치를 시작하여 서구의회제도와는 질적으로 다른 이른바 교도민주주의(敎導民主主義)체제를 내세웠다. 또한 수카르노 대통령은 국민당·나후다돌·우라마당 및 공산당을 묶어 나사콤(NASACOM)체제(민족주의, 종교, 공산주의 등 3정치세력의 협력체제)를 확립하였으나 1965년 9·30 쿠데타로 붕괴되었다. 또한 스리랑카에서는 1956년 자유당의 반다라나이케 수상(재임 1956∼59)이 진보적인 여러 정당과 연합정권을 결성하여 1957년에는 영국의 해군·공군기지를 철거시키고 소련·중국과의 외교·경제관계를 여는 한편 외국자본을 국유화하였다. 그러나 1959년 공용어제정을 둘러싸고 신하리·다미루 양 어족(語族)의 대립이 일어나서 반다라나이케 수상은 암살되고 그의 부인이 정권을 계승하였다.

미얀마·파키스탄의 군사독재[편집]

Myanmar·Pakistan-軍事獨裁

파키스탄은 당초 영국의 자치령으로서 독립하였지만 1956년에 파키스탄 회교공화국(回敎共和國)으로 영연방내의 독립국이 되었다. 부르주아지와 봉건지주당인 회교도 연맹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영국에 대한 의존도가 높고, 봉건적 지주제도가 존속하고 있어서 식민지적·봉건적 사회경제구조가 현존하고 있으며 또한 동·서 파키스탄의 지리적 단절 때문에 경제적 격차가 극심한 모순이 있었다. 이로 인하여 공산당이나 아와미 회교도연맹 등 혁신세력의 진출이나 여당내의 분열이 일어났으며 정치적 위기가 항상 고조되어 왔다. 이러는 동안에 1958년 10월 아유브 칸 장군이 쿠데타로 집권하여 헌법을 정지하고 의회와 정당을 해산하고 군사독재를 하였다.

그러나 칸 대통령(재임 1958∼69)은 1959년 의회제도를 대신하는 형태로서 전국의 지방촌과 지방의회에 이르는 5단계 팡제트(評議機構)를 설치하여 재래의 정당과 바꾸고 국민의 직접적 정치참가를 촉구하는 것과 같은 소위(기초적 민주주의) 체제를 수립하였다. 칸은 1960년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대통령에 취임, 1962년 신헌법을 공포하였으나 1인 장기독재에 대한 국민의 반정부시위로 1969년 당시 계엄사령관이었던 아히아 칸에게 권력을 이양했다. 그러나 그도 1971년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밀려나 13년간의 군정이 종식되고 인민당의 알리 부토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그도 전횡적인 독재정치를 행하여 국민과 야당을 탄압, 또다시 전국적인 유혈폭력 사태를 유발하였다. 이러한 정정불안은 군부에 명분을 제공하게 되어 1977년 육참총장인 지아 울 하크가 쿠데타를 일으켜 전권을 장악했다.

미얀마는 독립 후에 토지국유화법을 만들어 인도인, 부재지주(不在地主)의 토지를 접수하였으나 미얀마인 봉건지주의 소유지는 그대로 방치하였다. 국유화한 국영기업은 새로운 관료의 출현을 촉진하였을 뿐이며 이 때문에 국가건설은 상당한 저해를 받았다. 그리고 집권여당(與黨)인 반(反)파시스트 인민자유연맹과 정부는 거듭되는 내부적 분열을 일삼았다. 이러한 정정불안에 편승, 1958년 참모총장 네윈인 쿠데타를 일으켜 일시 정권을 장악했으나, 1960년 총선에서 다시 반파시스트 인민자유연맹의 우 누가 승리, 민정으로 복귀되었다. 그러나 1962년 네윈은 2차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 혁명평의회를 설치하여 헌법을 정지시키고 의회를 해산하였으며 소위 '미얀마식 사회주의'를 표방, 미얀마 사회주의 계획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을 불법화했다. 1974년 민정이양을 선언하여 1당체제의 사회주의 신헌법을 공포하고 네 윈이대통령에 취임하였으나 학생·지식층을 중심으로 민주화 운동이 가열되고 있다.

1990년 5월 총선에서 아웅산수지가 이끄는 민주국민동맹(NLD)이 예상 외의 압승을 거두었으나 군사정부는 정권이양을 거부했다. 1995년 1월 군사정부는 정치범 47명을 석방하고 내외국인의 투자를 총괄할 투자위원회를 설립하는 등 시장경제개혁을 추진했다. 한편 분리독립을 위해 무력투쟁해온 카렌족반군과 휴전을 깨고 대공세를 펼쳐 2월 최후거점인 카우무라 기지를 점령했다.

7월 국가법질서회복위원회(SLORC)가 향후 정치·경제·사회목표를 공표했다. 군정은 NLD지도자 수지 여사를 가택연금했다. 1995년 5월 연금에서 풀려난 수지 여사는 대중집회를 개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이다 11월 민주국민동맹을 국민회의에서 탈퇴시켰다. 1996년 SLORC는 수지 여사의 활동을 막기 위해 공공질서 파괴활동 금지법안을 통과시켰다. 12월 현 군사정부는 철권통치에 국민적 거부감이 거세지자 군사정부는 수지를 다시 가택연금했다.

인도차이나 공산화[편집]

Indochina 共産化

1970년대의 동남아시아 정세 가운데 가장 위기적인 상황이 베트남·라오스·캄보디아의 공산화로서 이는 동남아시아 전역에 급격한 변화를 가져왔다.

베트남은 1954년 7월 북위 17°선으로 분단된 이래 남베트남 내전(베트남 민족해방전선과 고 딘 디엠 정권간)을 시작으로 1960년 북베트남이 개입하고, 1965년 이후 미국과 한국이 개입함으로써 확대된 후, 1973년 일시 파리 휴전협상이 타결되었으나 1975년 4월 북베트남의 공격으로 남베트남 정권이 항복, 공산화되었다.

1997년 7월 20일 임기 5년의 의원 450명을 뽑는 총선을 실시했다. 1당 체제지만 처음으로 무소속후보가 출마하는 등 민주적 절차가 가미됐다. 총선결과 비공산당후보가 69석을 차지했다. 9월 24일 임시전당대회에서 레둑 안 대통령을 퇴임시키고 국회투표를 통해 트란 둑 루웅 전 베트남 부총리를 새대통령으로 선출한 데 이어 보 반키에트 총리 후임으로 판 반 카이를 새총리로 임명했다.

캄보디아는 1949년 대프랑스조약을 체결하여 프랑스연합내의 1국으로 독립, 1953년 전왕(前王) 시아누크가 스스로 퇴위하여 국가원수로 집권하다가 1970년 론 놀의 우익 쿠데타로 실각하고 친서방정권이 수립되었다(국명 크메르). 이에 시아누크가 북경에서 캄보디아 민족연합정부를 수립함으로써 내전상태에 돌입했으며, 과거 반시아누크 세력이었던 크메르 루주가 시아누크와 합세, 1975년 론 놀정권을 붕괴시키고 일시 시아누크를 복귀시켰으나, 동년 그를 제거하고 키우 삼판을 국가원수로 하는 사회주의 민주 캄보디아 정부를 수립, 공산화되었다. 그러나 크메르 루주는 경악스러울 정도의 급진적 사회주의를 추진, 대량학살과 국가파괴를 획책함으로써 1978년 반크메르 루즈파가 구국민족통일전선을 결성, 1979년 베트남의 지원하에 폴 포트 정권을 축출하고 헹 삼린 정권이 들어섰다. 이와 동시에 캄보디아 폴 포트· 헹 삼린·시아누크·손 센 4파의 내전상태가 시작되었다.

1993년 6월 14일 첫 소집된 헌법제정의회에서 시아누크 공을 국왕으로 추대하고 신정부 비동맹 중립 노선을 채택했다. 1995년 11월 훈센 제2총리 암살을 기도했다는 혐의로 민족통일전선 서기장 시리부드를 구속하면서 연립정권의 균열이 표면화됐다. 1996년 11월 훈센 총리의 처남인 콜고브사모스 내무부 경제국 부국장이 피살돼 총선을 앞둔 정국이 더욱 어수선해졌다. 1997년 들어 라나니드 제1총리가 와해 직전의 크메르 루주를 끌어들이자 7월 훈센 제2총리는 무력으로 프놈펜시를 장악, 시아누크 국왕으로부터 쿠데타를 승인받았다. 8월 의회는 라나니드 제1총리 후임으로 웅 후옷 외무장관을 승인했다.

라오스는 1950년 독립 이후 소련이 지원하는 중립파, 친미적인 우파, 좌파인 파테트라오의 3파가 대립했다. 1962년 연립정부가 출범했으나, 1964년 푸마 노사반 장군의 우파가 쿠데타를 일으켜 이를 붕괴시키자 파테트라오가 좌파 정부를 수립, 좌우파 내전상태에 돌입하였다. 1973년 20년간의 내전을 종식하는 휴전협정이 성립되어 1974년 연립정부가 출범했으나, 1975년 베트남과 캄보디아 공산화에 자극받은 좌파가 군사적·정치적 공세를 강화함으로써 연정내 우파가 실각하기 시작, 라오스는 파테트라오의 수중에 들어갔다. 동년 페테트라오는 라오스 왕정을 폐지하고 인민민주공화국을 선포, 공산화되었으며 파테트라오의 지도자 수파누봉이 국가원수로 추대되었다.

1993년 2월 국회는 누하크 품사반 의장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1당독재체제를 유지하고 있으며 정치는 안정돼 있다. 1996년 3월 집권 인민혁명당은 당대회를 개최해 4명의 정치국원을 새로 선출했다. 대통령은 국회에서 출석의원 2/3 이상의 찬성으로 선출되며 임기는 5년이다.

비동맹국이지만 사회주의 제국과 연대를 견지하는데 특히 정치·군사적으로 베트남에 의존하고 있다. 1994년 11월 메콩강 개발을 위해 캄보디아, 태국, 베트남 등과 협정을 체결한 데 이어 1995년 4월 이들 3개국과 메콩강위원회를 설립했다. 1997년 7월 동남아국가연합(ASEAN) 신규회원국으로 가입했으며 한국과는 1975년에 단교한 뒤 1995년 복교하고 1997년 10월 렝사왓 외무장관의 방한으로 경제협력문제를 협의하고 대외경제협력기금 차관협정을 체결했다.

이와 같은 공산화 과정의 이면에는 소련의 대 아시아 세력팽창의 기도가 숨어 있었으며, 이에 대한 미국의 지배권 유지를 위한 개입과 같은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중국간의 패권다툼(친소인 베트남에 의한 친중국인 폴 포트 정권의 붕괴)이 개제되어 있었다. 주변국가들은 정정의 불안과 함께 공산화의 위협(게릴라의 준동과 베트남의 세력확장 정책)에 시달리게 되었으며, 동중국해의 구 소련 수역화는 경제침체에 시달리고 있는 주변국들에 군사비증액의 부담까지 가중시켰다.

신국제질서와 동남아[편집]

新國際秩序-東南亞

이념대립이 퇴조함에 따라 새로운 국제관계에 있어서 경제문제는 안보문제보다 더욱 중요해졌다. 대공산권 봉쇄는 더 이상 미국이나 그 동맹국들의 중심적 정책목표가 될 수 없게 되었다. 그 대신 일본, 유럽공동체(EC:the European Community), 신흥공업국, 그리고 중국 등과의 무역관계가 보다 큰 중요성과 함께 주요 관심사가 되었다. 걸프전쟁만 하더라도 정치적 이념문제와는 별로 관계가 없는 것이었으며 실제로 미국과 그 동맹국들의 경제안보에 크게 관련된 것이었다.

이러한 병화의 주요 촉매는 소련의 번영을 위해서는 오로지 소련사회의 근본적인 개혁(perestroika)과 개방(glasnost)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가정하에 개혁을 추진한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yov) 소련대통령이었다. 페레스트로이카는 소련공산당기구의 몰락, 새로운 다원주의적 정부체제의 등장, 연방내 공화국들간의 고조된 민족주의, 시장경제체제의 도입 등을 초래했다.

아시아에 있어서 이러한 소련 내부계획의 부수적 결과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군 철수, 동남아의 공산게릴라 활동에 대한 지원중단, ASEAN 비공산국가들과의 경제 및 무역관계 증진, 이념적으로 경직된 베트남 공산지도부에 대한 비판과 이에 따른 원조감축, 캄보디아내 베트남군 철수를 위한 압력행사, 동남아에서 미국의 중요한 역할 인정, 중·소 국경의 비무장화, 그리고 베트남내 소련기지의 점진적 축소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동남아지역에 대해 군사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던 소련의 관심이 감소한 상징적 증거로는 베트남내 캄란만과 다낭의 감축된 기지 사용과 그 기지들을 곧 포기할 것이라는 징후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소련은 이 기지들을 사용하여 동남아지역의 특정한 사태에 개입하여 영향력을 행사한 적은 없지만, 그 기지들은 미국의 무역로이자 일본의 석유수송로이며 ASEAN 국가들의 안보에 필수불가결한 태평양, 남중국해, 그리고 인도양을 연결하는 핵심적 해로에 대해 소련이 지배권을 행사할 수 있는 잠재력을 제공해 주었다. 따라서 소련의 철수는 이러한 위협이 급박한 것이 아니며 동남아는 소련 또는 그 위성국인 베트남의 팽창정책의 목표가 아니라는 분명한 신호인 셈이다.

베트남에 대한 지지철회를 결정한 것은 소련-베트남간 동맹관계 때문에 소련이 경제적으로 다이나믹한 동남아국가들로부터 소외되고 있다는 소련의 현실인식을 반영하고 있다. 이 동맹관계는 ASEAN국가들이 미국과 동맹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중국과 관계증진을 도모하는 캄보디아내전의 평화적 해결을 지지하고 있는 이유로 ASEAN 국가들과의 관계강화를 열망하는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의지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1987년 세바르드나제(Eduard Shevardnadze) 외상이 소련의 고위관리로서는 처음으로 몇몇 ASEAN

국가들의 수도를 공식 방문했다. 이 순방은 ASEAN 국가들로 하여금 소련이 미국, 중국, 일본 등 다른 강대국들과 함께 동남아 지역의 힘의 균형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긍정적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인식을 제고해 주었다.

소련 국내정치와 대외정책의 극적인 대전환이 일어난 것과 마찬가지로 마오쩌둥 시대의 중국은 동남아국가들의 가장 두려운 적대세력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부터는 중국이 태국에 대한 베트남의 군사적 도발을 억제해 주는 주요 안정세력으로 등장했고 ASEAN의 보다 중요한 교역상대국으로 부상했다. 또 각 지역의 공산반란세력에 대한 원조도 중단했다. 중국의 정치적 자유화를 후퇴시켰던 1989년 6월의 톈안문사태에도 불구하고 중국지도자들은 동남아에 대해 미국과 동일한 정책목표를 추구했다. 즉 중국은 동남아에 대한 소련의 팽창주의 억제, ASEAN과의 긴밀한 경제관계 발전, 베트남이 점령한 캄보디아의 독립 보장, 그리고 단일의 초강세력에 의한 동남아지배를 반대하는 정책을 계속 추구해 왔다.

1980년대 중반 이후 동남아에 대한 소련, 중국, 베트남 등 공산세력으로부터의 안보위협은 사라졌다.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의 등장으로 소련이 동남아에 대해 무력개입을 할 가능성은 원천적으로 줄어들었다. 중국도 ASEAN을 포함한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교역을 증진시킴으로써 자신의 경제를 강화하려는 노력을 가일층 배가하고 있다. 1989년 캄보디아에서 자국군대를 철수시키고 도이모이(Doi Moi)의 개혁·개방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베트남도 자신의 어려운 국내경제사정을 감안할 때 동지역에 또 다른 군사적 개입을 감행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1970년 이후 일본경제의 역동성은 국제관계를 극적으로 변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동남아경제의 구조적 변화를 초래했다. 일본은 미국의 가장 중요한 동맹국이 되었으며, 미국에 있어서 아시아의 경제적 중요성은 해마다 커져가고 있다. 1989년의 경우 미국의 대아시아 태평양지역 무역고는 2,150억 달러에 달했으며 이는 미국의 대유럽 무역고를 50% 이상을 상회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태평양 연안지역이 미국의 최대 농산물 수출시장이 되고 있지만 1,700억 달러에 달하는 미국 무역적자의 60%가 아시아(일본과만도 35%에 달하는)에서 발생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중 일본이 동남아지역을 침공하고 점령했던 것과 패전 후 일본이 비군사화된 사실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오늘날 동남아에 있어서 아직도 핵심적 역할을 맡고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대전중 일본이 실현하지 못한 '공영권(co-prosperity)' 구상이 오늘날 동남아에 있어서 경제적으로 실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로서 태국의 외국인 투자 중 53%가 일본의 자본인데, 이는 미국이 5.8%를 차지하고 있는 대만의 외국인 투자 중 일본이 12.5%를 차지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큰 경우이다. 1987년부터 1989년까지 823개의 일본회사가 태국에 50-60억 달러를 투자했다. 일본은 태국의 가장 주요한 원조공여국이자 교역대상국이 되었다. 실로 모든 ASEAN 국가들은 주요 수입원이자 수출시장국으로서뿐만 아니라 원조공여자로서 그리고 외국 투자국으로서 일본에 경제적으로 종속되어 있다.

동남아에 대한 일본, 한국, 대만의 경제적 이해는 외국기업이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양질과 저임의 노동력에 있다. 동남아인들이 전통적 노동계급 역할을 맡는 새로운 국제분업체제의 등장은 현지 조립공장과 다른 수출상품 생산산업의 증대를 가져왔다. 동아시아의 신흥공업국들(NICs:newly industrializing countries)과 일본은 자국내 임금상승과 환율변동에 대응하여 동남아지역에 대한 투자를 확대해 왔다. 이러한 극적인 변화는 ASEAN 국가들이 수입대체경제로부터 수출주도 산업화로 이행하는 발전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급속한 산업화는 주로 내적 기술개발에 의한 것이기 보다는 외부적 압력에 기인한 것이다. ASEAN 국가들은 자체기술개발이나 연구발전의 축적된 경험을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최근 동남아국가들의 발전은 자신들의 영향력 밖에 있는 외부세력의 자본, 기술, 경영, 시장 등에 의존하고 있다.

동남아 지역경제의 세계화는 동남아국가들을 외부세력, 특히 일본과 동아시아 신흥공업국들의 경제적 지배에 취약하게 만들고 있다.

세계자본시장의 하향세, 세계경제성장의 둔화, 세계은행과 같은 다자기구의 불안한 장래, 그리고 서방국가들의 점증하는 보호주의(유럽의 EC를 포함하여) 등은 동남아에 대해 직접적으로 부정적 파급효과를 계속 미칠 것이다. 1990년 8월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야기된 중동의 위기는 동남아국가들 영향력 밖에 있는 세계정신의 변화가 어떻게 동남아국가 경제의 안정과 성장에 직접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일 것이다.

강대국들의 개입으로 인한 전쟁확산 가능성을 안고 있는 캄보디아의 끝없는 내전과 필리핀내 미군기지 철수문제를 제외하고는 현재 동남아에 대한 미국의 안보이해는 최소한의 것이다. 지켜야 할 이해관계가 있는 곳에 공약이 있다는 원칙에 따른다면 동남아에 대한 미국의 공약은 세계의 다른 지역에 비해 분명히 부차적인 것이다.

이러한 미국의 부차적 이해는 동남아가 1950년부터 1970년 사이에 단일적인 국제공산주의로부터의 위협을 봉쇄하려는 미국 대외정책의 초점이 되었던 기간으로부터의 완전한 전환을 의미한다.

이 기간중 미국은 필리핀, 태국, 남베트남과 안보조약을 체결했고, 동남아시아조약기구(SEATO:Southeast Asia Treaty Organization)에 참여했으며, 동남아 전역에 군사기지를 유지했으며, 총 420만 명의 군대를 파견하여 1,200억 달러의 전비를 쏟아부었고, 결국 남베트남의 공산화를 저지하기 위해 5만 8천 명의 인명손실을 냈다.

이렇게 동남아에 대한 미국의 직접개입이 강화된 시기는 1970년대 초반에 보다 차별적인 군사정책에 의해 대체되었다. 괌독트린(Guam Doctrine)을 통하여 닉슨 대통령은 아시아의 전쟁은 미국인이 아닌 아시아인들에 의해 수행되어져야 한다고 선언했다. 미국은 베트남과 태국내 기지사용이 어려워진 이후 전쟁의 '베트남화'(Vietnamization) 과정을 통하여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발을 빼버렸다.

1970년대 후반기에 미국은 이 지역안보에 관한 이차적 역할만을 수행했다.

1978년 12월 소련의 지원을 받은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과 연이은 중국의 베트남에 대한 무력시위로 이 지역은 다시 전쟁에 휩쓸리게 되었다. 미국은 ASEAN 동맹국들에 대한 군사원조를 확대하고 ASEAN 공동의 반베트남 정책에 동참하였다. 이 기간중 초보수적인 레이건 대통령의 지원에 힘입어 ASEAN 동맹국들에 대한 군사원조를 확대하고 ASEAN 공동의 반베트남 정책에 동참하였다.

그러나 1980년대 말까지 이러한 열기는 급진적 국제정세 변화의 결과로 사라졌다. 베트남은 1989년 9월 캄보디아에 한때 약 15만 명에 달했던 자국군대를 철수시켰다(크메르루즈군의 공격에 대비해 서부지방에 배치한 3,000-5,000의 병력 제외). 동남아 냉전기간 중 한때 최전방 국가였던 태국은 중국으로부터 값싼 무기를 사들이기 시작했으며, 찻차이(Chatichai Choonhavan) 태국수상이 '인도차이나의 교역시장화' 구호를 내건 이래 베트남과 경제관계를 발전시켜나가고 있다. 베트남과 교역을 증대시키려는 노력과 캄보디아 훈 센(Hun Sen) 수상의 방콕 초청은 오랫동안 베트남과 캄보디아와의 국교정상화를 반대해 왔던 기존 태국정책의 일대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다.

강대국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려는 새로운 민족주의적 외교정책은 동남아의 공산 및 비공산국가들의 중심적 과제가 되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민족주의는 세계 모든 국가들과의 균형된 외교관계와 이념으로부터 탈피, 그리고 무역과 같은 국제경제의 상호의존성을 강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