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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유럽통합[편집]

Europe 統合

지역주의에 기초한 역내(域內) 공동보조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와 같은 시도는 제1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비극의 방지를 위해 확산되었으나 뒤이은 세계공황과 전체주의의 대두로 구체화되지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유럽은 전쟁으로 인한 파괴와 동서분열로 과거의 영화를 잃고 미국과 소련의 양대 세력권하에 놓임으로써 이에 대한 반동으로 범유럽주의가 다시금 부활되고 상실한 국제 정치·경제에서의 지위회복을 위한 노력이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동구권과 서구권의 2분된 상황과 양극체제, 각국의 복잡한 정치사정과 이해관계의 대립으로 그 과정은 순탄치 못했으며 더욱이 새로운 국제질서 속에서의 제반 기류는 1970년대에 들어서도 급격하기만 했다.

유럽통합은 그 단계상 군사협력에서 경제통합 그리고 그 최종단계로서 사회정치통합에 의한 유럽 연방이 상정되고 있으나, 그 앞에는 숱한 장애가 가로막고 있다.

1949년 4월 북대서양조약에 의해 1950년 성립된 나토 (NATO)는 그 회원국 구성에 있어서 서유럽 국가들이 절대다수이나 주도적 지위에 있는 국가는 미국이고 동서냉전 격화에 따른 소련의 군사력 확장에 대한 억제와 대항이 성립목적이었으므로 엄밀히 볼 때 유럽통합의 구체화라고는 할 수 없다. 따라서 최초의 실천은 1949년 서유럽 연합 5개국 외무장관 회의에서 구체화되고 동년 서유럽 10개국이 '유럽회의헌장'에 서명함으로써 성립된 유럽회의(Council of Europe)라고 볼 수 있다. 특이한 것은 이후 성립된 각종 지역협력기구들도 그 분야에 관계 없이 유럽통합을 위한 정치적 성격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유럽회의[편집]

Council of Europe

1949년 1월 브뤼셀 조약기구(현재의 서유럽연합) 외무장관 회의에서 채택되어 동년 동기구 회원국을 포함한 서유럽 10개국이 '유럽회의헌장'에 서명함으로써 발족되었다. 유럽의 경제·사회적 발전을 촉진하기 위해 가맹국의 긴밀한 협조에 의한 공동의 이상과 원칙을 옹호함과 유럽의 점진적 통합을 목적으로 하는데, 국방(군사)문제는 다루지 않는다. 산하에 회원국 외무장관으로 구성되는 각료위원회, 자문위원회, 유럽협의회, 유럽인권위원회, 유럽 인권재판소, 사무국 등의 기구를 두고 있다. 1992년 현재 가입국은 27개국이며, 사무국은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 있다.

브뤼셀 조약기구[편집]

--> 서유럽 연합

서유럽 연합[편집]

Western European Union;WEU

1948년 영국·프랑스·베네룩스 3국 등 5개국이 독일 침략정책의 부활저지를 목적으로 '브뤼셀 조약'을 체결, 지역집단안보체제로서 발족된 브뤼셀 조약기구가 1955년 서독·이탈리아가 추가된 파리협정이 체결됨으로써 서유럽 연합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성립목적 또한 회원국간의 국방정책·군비의 조정 및 사회·문화·법률 분야의 협력촉진으로 변경, 유럽의 단결과 통합의 도모를 표방하고 있다. 산하에 총회, 회원국 외무장관으로 구성되는 이사회, 사무국, 군비관리국 등의 기구를 두고 있으며 나토와 긴밀한 협력관계에 있다. 1988년 현재 회원국은 조인 7개국과 에스파냐·포르투갈 등 9개국이며 미국과 캐나다는 제휴국이다. 사무국은 런던에 있다.

북유럽 이사회[편집]

Nordic Council

북유럽 여러 나라의 정부·의회간의 협력기구로서 1953년 아이슬란드·노르웨이·덴마크·스웨덴 4개국에 의해 성립되었고, 1956년 핀란드가 가입함으로써 1988년 현재 회원국은 5개국이다. 북유럽지역 공통의 경제·사회·문화 분야 문제를 협의·결정하여 회원국 정부에 권고한다. 산하에 이사회·사무국, 보조기관으로 경제·사회·통신·문화·법률 등 4개 분과위원회를 두고 있다.

유럽 안보협력회의[편집]

Conference Security and Cooperation in Europe;CSCE

1954년 당시 소련 외무장관인 안드레이 그로미코가 미·영·프·소 4개국 회담에서 전유럽 안보조약 체결을 제의한 이후 소련에 의해 그 성립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 난제와 베를린 장벽 구축으로 서방측이 회의(懷疑)를 가짐으로써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그 후 1972년 6월 동사안(同事案)뿐 아니라 전후 유럽의 최대 난제였던 베를린 문제가 베를린협정의정서의 조인에 따라 일단락되자, 서방측이 태도를 바꾸어 동의를 선언함으로써 타결의 실마리가 풀렸다.

1972년 11월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동서유럽제국과 미국·캐나다 등 34개국이 예비회담을 열고 본회의를 3단계로 나누어 개최키로 합의, 이에 따라 1973년 3월 헬싱키에서 외무장관 회담이, 동년 9월 제네바에서 위원회별 회담이 개최되었다. 그 최종단계로서 1975년 7월 핀란드 헬싱키에서 35개국 유럽안보 정상회담이 개최되어 전후 유럽 관계를 현상고착화하고 점진적인 유럽의 평화공존관계 수립을 내용으로 하는 '헬싱키 협정(CSCE의 최종문서:유럽 안보협력 의정서)'이 체결되었다. 서명국은 나토 15개 회원국과 바르샤바 조약기구 7개 회원국 및 중립·비동맹 13개국 등 총 35개국이다. 그후 헬싱키 협정의 이행을 검토·평가하기 위한 후속회의가 1977년 6월 유고슬라비아 베오그라드에서 개최되어 동협정의 보완을 위한 안건을 토의했으나 동서진영간의 논쟁으로 결렬되었고, 1980년 에스파냐 마드리드 예비회담에서는 한때 결렬의 위기에까지 도달했으나 1985년에는 핀란드 헬싱키에서 서명 35개국 외무장관들이 '협정체결 10주년 기념회의'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경제협력기구[편집]

經濟協力機構

1951년 당시 프랑스 외무장관이었던 쉬망(Schumann)의 제창으로 발족된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가 유럽경제통합을 위한 최초의 구체화이며, 1956년 동회의에서 마련된 기본조약에 의해 1957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유럽경제공동체(EEC) 조약과 유럽 원자력공동체(EURATTOM) 조약이 체결이 되어 1958년 1월 둘의 기구가 각각 발족되었다. 그러나 이와 함께 마셜 플랜의 수용기구로서 1948년 발족되었던 유럽경제협력기구(OEEC:OECD)의 발족으로 해체되었다. 회원국 중 EEC에 참여하지 않은 7개국이 1959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유럽자유무역연합(EFTA) 조약을 체결, 1960년 정식 출범시킴으로써 유럽 경제는 EEC와 EFTA의 양축으로 2분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경제통합을 달성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유럽연방(통합)을 이루려고 하는 분위기가 고조되어, 1967년 EEC 이사회는 독립된 기구로서 각각의 집행기관을 갖고 있는 EEC·ECSC·EURATOM을 통합키로 결정, 1967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회원국의 비준을 받아 3기구의 집행기관과 이사회가 일원화됨으로써 유럽공동체(EC)가 성립되었다. 따라서 EC는 3기구를 총칭하는 유럽지역공동체로서의 성격을 가지며, 그 영역이 경제분야에만 국한되지 않는 고도의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다. EC의 출범과 함께 EFTA는 퇴조하기 시작하여 1973년 회원국이었던 영국·덴마크가 탈퇴, EC에 가입하고, 1986년에는 포르투갈도 EC에 가입하였다. 결국 EFTA는 EC와의 긴밀한 협력관계를 추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며, 1980년대에 들어와서는 EC에의 통합논의가 일고 있다. EC는 3기구 공동기관으로 각료이사회·유럽위원회·유럽의회·유럽재판소 등을 두고 있는데, 유럽의회는 감독기관으로 1979년까지는 회원국 의회의 대표자로 구성되었으나, 1979년 회원국 국민의 직접선거에 의해 구성됨으로써 유럽통합의 한 획을 그었다.

영 국[편집]

1970년대의 정치사정[편집]

一九七十年代-政治事情

전통적인 보수·노동의 2대정당제를 취해 오고 있는 의회민주주의의 시원인 영국의 1970년대는 1960년대 말의 파운드화 평가절하와 제1차 에너지 파동, 경기침체를 핫 이슈로 양당이 교대로 총선거에서 승리·패배하는 격동을 겪었다. 1966년 선거에서 승리했던 노동당은 경제불황 책임과 EC 가입문제로 1970년 선거에서 보수당에 정권을 이양해야 했으나, 1974년 의회해산 후 실시된 총선에서 다시 집권했다. 1970년대 유럽에 고조된 보수복귀 사조는 1979년 제2차 석유파동으로 인한 세계경제의 불안·침체와 함께 거세게 전유럽을 강타, 1979년 총선에서 중도좌익 노선의 제임스 캘러헌 노동당 정부가 마거릿 대처가 이끄는 보수당에 패배함으로써 영국 및 유럽 사상 최초의 여수상이 탄생했다. 마거릿 대처 수상의 보수당 정부는 보수노선으로의 전환을 표방했다.

영연방[편집]

The Commonwealth of Nations

1926년 발포어 협정에 의해 과거 영국의 식민지였다가 독립한 국가들이 경제적인 공동이해 관계를 바탕으로 결합한 비정치적 협력기구이다. 1989년 현재의 회원국은 48개국이며, 그 인구 총수는 12억에 이른다. 영연방 정상회담이 부정기적으로 개최되고 있다.

각내장관·각외장관[편집]

閣內長官·閣外長官

영국의 각료 정수는 1985년 현재 21인인데 이들 중 항상 각의(閣議)에 출석하는 각료를 각내장관, 소관사항 토의 때만 출석하는 각료를 각외장관이라고 한다.

섀도 캐비닛[편집]

Shadow cabinet

영국은 의원내각제 정체를 취하고 있으므로 총선에서 승리한 의원다수파가 내각을 조직한다. 따라서 항상 야당은 정책개발과 내각접수를 위해 당수를 중심으로 하는 예비내각을 구성하고 있는데, 이를 섀도 캐비닛이라 한다. 통상 각내장관 규모로 조직된다.

경제와 외교[편집]

經濟-外交

영국의 경제는 1960년대에 최악의 위기를 맞이하였다. 세계시장에서의 경쟁력 저하, 해외속령 유지를 위한 대외지출 증가, 실업, 만성적인 인플레이션에 파업사태 등의 복합적인 이유로 1960년 말 EEC 가입을 둘러싸고 파운드화 평가절하 사태가 계속되었으며, 여기에 제1차 석유파동까지 겹쳐 1975년에는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고, 1976년에는 파운드화 시세폭락으로 계속되었다. 그러나 1975년부터 상업생산이 시작된 북해유전의 산출고 증가로 회복세를 보이기 시작하였다가 1979년 집권한 대처 정부의 감세, 정부지출감축, 외환통제철폐 정책으로 인플레이션이 재현되었으며, 무역수지가 다시 악화되었고, 외환통제철폐는 사실상의 파운드화 평가절상을 가져왔다.

영국의 외교는 전통적인 대미 우호협력관계를 기조로 1973년 EEC 가입 이후 주도적 지위확보를 추구하였다. 그러나 대소·동구권 외교는 미진한 반면 중국과는 관계개선을 도모, 1979년 화궈펑과 대처의 영·중 정상회담이 개최되었다. 아프리카 제국과는 속령인 로디지아 사태로 갈등적인 현상을 나타냈다.

핵무장 반대운동(CND)[편집]

核武裝反對運動

1958년 이래 영국시민은 해마다 열리는 부활제를 기해서 런던교외의 핵병기연구소가 있는 올더마스턴으로부터 런던의 트라팔가 광장에 이르기까지 평화행진을 벌이는 일이 관례로 되어 왔다. 그러던 중에 이를 미끼로 국가기밀 누설사건이 발생하게 되었다. CND 행진은 글자 그대로 평화행진이었지만 1963년 4월에 발생한 이 같은 사건, 즉 '평화를 위한 스파이'라는 사건으로 말미암아 그 후로는 평화데모에 만족치 않는 사람들, 예컨대 '평화를 구출하자'는 파(派)와 런던 아나키스트(無政府主義者) 연맹이 지도자의 통제에 복종하지 않고 직접적인 행동에 나서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다.

백인위원회[편집]

白人委員會

1960년 10월 그때까지 핵무장 반대운동(CND)의 회장을 맡아온 버트런드 러셀경(1872∼1970 哲學者)이 이 운동에 불만을 품고 회장직을 사임하고 '시민으로서의 반항'이라고 하는 직접행동을 하기 위하여 별도로 만든 조직체이다. '시민으로서의 반항'이란 뜻은 여러 가지 기성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대중들의 감정 속에 파고들어 이것의 편견을 타파하기 위하여 행하는 운동 전술이다. 다시 말하면 지금까지의 산책 나가는 식의 CND 운동이나 상투적인 방법을 넘어서 투옥, 그 외의 개인적 위험을 무릅쓰고(다만 비폭력의 한계는 지킨다) 참된 시민으로서의 반항을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평화를 위한 스파이사건[편집]

平和-spy 事件

1963년 4월 12일 영국의 핵무장 반대운동(CND)이 올더마스턴을 출발해서 행진하려 할 때 '평화를 위한 스파이'라고 하는 이름으로 핵전쟁에 관한 영국정부의 대책을 수록한 국가기밀을 폭로한 팜플렛이 행진 참가자들에게 배포되었다. 이 사건은 영국정부가 국가기밀 누설사건으로 다루어 주모자의 색출에 전력을 기울였으나 결국 찾아내지 못하였다.

프로퓨모사건[편집]

Profumo 事件

맥밀런 내각의 육군상 존.D.프로퓨모와 매춘부 크리스틴 킬러와의 불륜(不倫) 관계를 둘러싸고 일어난 추문이다. 킬러가 소련의 주영 대사관(駐英大使館)에 근무하는 무관(武官)과 접촉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사건은 스파이사건으로도 일컬어지고 또한 킬러가 자메이카의 사나이로부터 저격을 받았기 때문에 인종차별 사건과도 관계된다. 이 사건으로 1963년 6월 프로퓨모는 육군상을 사임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집권 보수당 정부는 큰 타격을 입었다.

과학·기술과 사회주의의 결합[편집]

科學·技術-社會主義-結合

1964년 스카보러의 노동당 전당대회에서 윌슨 당수가 행한 연설. 1951년 이래 보수당 정권의 시대에 일찍부터 착수했어야 할 과학과 기술의 분야에서 영국이 뒤늦어졌기 때문에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지도 못하고 국제경제에 대한 경쟁력도 잃어버리게 되었으며, 영국은 이것을 만회하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먼저 사회주의 정책과 새로운 과학기술의 결합을 도입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한 것이다. 1964년 10월의 총선거에서 노동당은 근소한 표차로 13년만에 정권을 되찾았으나 1966년 3월의 총선거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노쇠한 영국 경제를 걸머지고 노동당 정권은 다난한 과정을 겪어야만 했다.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파운드화의 위기로 대표되는 영국의 경제위기에 직면한 캘러헌 노동당 정권은 산업의 국유화를 통한 사회주의 경제정책을 지향함으로써 숱한 시련 끝에 1970년대 중반 이후 영국경제를 회복세로 반전시켰으나, 1970년대 말 유럽을 강타한 보수주의 조류 앞에 2선으로 밀려갔다.

파운드화의 위기[편집]

Pound貨-危機

영국 경제는 세계시장에 있어서 경쟁력의 저하, 대외지배를 계속하기 위한 해외지출의 증대, 장단기 자본유출 등 때문에 만성적 위기에 빠졌다. 이 때문에 파운드는 끊임없는 위기에 직면했으며 1964년에는 국제협력에 의해서 회복하는 듯했으나 1967년 6월의 중동전쟁(中東戰爭), 9월의 부두노동자의 파업, 영국의 EEC 가입교섭의 정체 등으로 인하여 파운드 보유고(保有高)가 고갈되어 결국 11월 8일에 14.3%의 파운드 평가절하와 공정할인율을 6.5%로부터 8%로 인상하는 등의 시책을 폈다. 1968년 3월 2차 평가절하 이후 각국의 파운드화 대량매각과, 수출증진을 위한 영국정부의 시장불개입으로 파운드화의 폭락세는 계속되었다. 1976년 영국정부의 일련의 회복조치에도 불구하고 계속되어 온 파운드화의 시세하락은 1977년 영국의 경상수지가 흑자로 전환되면서 회복세로 반전했다.

북아일랜드의 분쟁[편집]

北Ireland-紛爭

영국의 서부에 위치한 아일랜드 섬의 북부를 점한 대영제국의 일원을 구성한 지역이다. 양원제(兩院制)의 의회와 내각(內閣:地方政府)을 가지고 있으며 외교·국방 등을 제외하고는 광범한 입법권과 대폭적인 자치권을 인정받고 있다. 아일랜드는 1801년 영국에 합병되었고 1921년에는 32개 지역 중에서 가톨릭교(舊敎)가 우세한 남부 26개 주(州)는 에이레공화국이 되었고 신교도가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는 북부의 6개 주는 대영제국의 자치주가 되었다. 150만 명의 주민 가운데 100만명의 신교도는 50년 동안 자치정부·자치의회·지방행정기구·공공기업 등을 독점하고 가톨릭 교도들을 학대해 왔다. 억눌려 살던 가톨릭계 주민의 분노는 1968년 8월 신교도 청년들이 가톨릭계의 한 주민 집에 불을 지른 사건으로 폭발되어 그 후 끊임없는 피의 대결이 계속되고 있다.

이 분쟁은 종교분쟁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제는 단순한 종교적 대립을 벗어나 정치·경제·사회면에서의 평등을 부르짖다가 급기야는 독립을 부르짖는 독립운동으로까지 발전되고 있다. 북부 아일랜드의 6개 주는 1922년의 아일랜드 자유국성립(自由國成立) 때 중남부에서 분리하여 영국 영토로서 남게 되었다. 이 지역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는 가톨릭계 주민이 신교의 지배, 즉 정치·경제·사회 생활에 있어서의 많은 차별에 불만을 증대시켜 비합법단체인 IRA (아일랜드 공화국군)를 조직, 남북아일랜드 통일을 목표로 무력항쟁을 계속했다. 1968년의 가톨릭교도들의 평등한 권리의 요구는 공민권운동으로서 강한 기세를 보였으며 북아일랜드 지방정부도 이에 귀를 기울이고 서서히 재산의 금액에 따른 지방선거에 선거권 부여제도(選擧權附與制度)의 폐지(가톨릭계통의 주민은 일반적으로 빈곤) 등의 개혁에 착수했다. 그러나 이런 조치는 구교 주민을 만족시키는 것이 못되었으며 더욱이 신교도들의 과격파를 오히려 경화시키는 결과까지 초래케 했다. 그래서 1969년 8월∼10월에 런던델리와 벨파스트를 비롯한 여러 도시에서 양파의 주민이 충돌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본격적인 유혈사태와 정치폭력으로 비화되었다.

1971년 종교분쟁에서 내란상태로 확대된 북아일랜드에 영국정부는 치안유지를 목적으로 정규군을 투입하고, 1972년 지방정부와 의회의 기능을 정지시킴으로써 직접통치를 실시하였으나 긴장은 계속 고조되었다. 1973년 영국정부는 직접통치를 해제하여 지방정부·의회의 기능을 부활, 지방선거에서 신교 온건파인 브라이언 포크너를 수반으로 하는 신구교 연립정부가 출범시켰으나, 이에 불만을 가진 신교 강경파 세력이 1975년 전면적인 총파업을 강행함으로써 또다시 극도의 혼란이 야기되었다. 이에 영국정부는 이 지역에 비상상태를 선포하고 연립정부를 해산시킨 후, 북아일랜드 담당장관을 통한 직접통치에 들어갔다. 그러나 정치폭력은 준 군사조직인 구교파의 IRA와 신교파의 UDA(Ulster Defence Association) 사이의 충돌과 민간인에 대한 테러로 더욱 격렬해지고 있다. 특히 IRA는 영국 왕실·중앙정부·의회 등에 대한 테러활동을 강화함으로써 사실상 영국 정부와 IRA간의 대치로 확대되었다. 더욱이 북아일랜드 분쟁은 영국 국내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 또 하나의 당사자인 아일랜드 공화국의 문제로 발전되어 수도 더블린 등 주요 도시에서도 양측의 충돌사태가 일어났다. 아일랜드는 전통적으로 북아일랜드의 통합을 희망하고 있었기 때문에 계속적으로 이에 대한 협상을 영국에 제의해 오고 있었다. 1981년 대처 수상과 아일랜드의 피츠제럴드 총리 사이에 북아일랜드 분쟁종식을 위한 정부간협의회 구성이 합의되자 신교파가 반발, 반정부투쟁과 파업을 선언했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종교분쟁에서 발단된 북아일랜드 분쟁사태는, 구교측의 영국군 철수와 아일랜드에의 통합주장과 신교측의 현상유지 주장이 맞물린 것으로, 여기에 강경한 세력의 무장대립이 개제되어 있는 상황이다.

프랑스[편집]

1970년대의 정치사정[편집]

一九七十年代-政治事情

1958년 10월 성립된 제5공화국은 1981년 4월 좌파인 프랑수아 미테랑 사회당 정부가 출범하기까지 23년간 우파인 드골파가 집권하여 왔다. 1958년 복귀한 드골은 강력한 대통령제를 내용으로 하는 제5공과국 헌법을 제정·공포하고 '위대한 프랑스의 영광 회복'의 기치 아래 독자적인 드골 외교를 추진, 1962년의 대통령 직선제 헌법개정에서 국민의 지지를 얻음으로써 골리즘(드골주의)이라고 불리는 드골 체제(우파 체제)를 완성하였다. 그러나 1968년부터 시작된 파업사태와 카리스마적인 국내통치 및 우익편향(사실상 이 당시에 좌파는 대단히 억제되었다)은 미증유의 사회불안을 야기시킴으로써 1969년 4월 스스로 하야하고 이듬해 지병으로 죽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정치는 그 후에도 우파·중도파가 연합한 드골파 세력이 변함없이 주도하였다. 1969년 9월 대통령선거에서 조르주 퐁피두(당치 총리)가 대통령에 당선·취임하였다가 1974년 급서하였고, 1975년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 독립공화파 소속의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이 당선·취임하였다.

1970년대 말 프랑스의 정치판도는 공화국연합(RPR , 드골파)·독립공화파(드골 지지파)·중도민주진보파(드골 지지파)·민주중도파(중립) 등 우파인 드골파가 정당·정파 연합형태로 의회 절대다수를 점하고 있었고, 좌파인 사회당과 공산당은 상대적으로 수세에 몰려 있었으나 1970년대 중반 이후 좌파연합 형태로 우파 정권에 도전, 1977년 지방선거에서는 221개 시(市) 중 3분의 2 이상을 석권하는 등 그 신장세가 두드러졌다. 1960∼1970년대에 좌파세력이 정체되어 있었던 근본 이유 중에는 드골이 제5공화국 성립 당시부터 이를 의도적으로 추진한 것도 내포되어 있었다.

골리즘[편집]

Gaullisme

드골과 그 지지파들에 의해 전개된 정치적인 주장 또는 그로부터 파생된 정치체제를 말한다. 단적으로 '위대한 프랑스의 영광 회복'과 '유럽 내셔널리즘'으로 표현할 수 있는 이 사상은 1958년 이후부터 1980년대 초까지 부분적인 수정이 있기는 하였으나 프랑스의 정치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현재도 드골파에 의해 계승되고 있다).

외교 및 군사[편집]

外交-軍事

1958년 대통령에 취임한 드골은 소위 '드골외교'라 불리는 독자노선을 추구하여 미·소 주도권의 불인정 및 유럽 내셔널리즘(유럽 제일주의라고도 하며, 이러한 입장은 1966년 나토 탈퇴로 타나났다), 독자적인 핵개발 및 핵군비추진, 대 동구권 관계정상화, 비동맹권(제3세계) 외교강화 등 파격적이고 개성적인 정책을 펴나갔다. 따라서 그의 집권 당시에는 미국과의 관계가 다소 소원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후임인 퐁피두 지스카르 대통령에 의해 개선·수정되기는 하였으나 그 기조는 계속 유지되었다. 군사면에서도 핵확산금지조약과 제네바 군축회의에 참여치 않고 있으며, 나토와는 정치적인 유대관계를 유지하면서도 군사기구에는 불참하고 있다.

사하라 핵실험[편집]

Sahara 核實驗

드골대통령이 견지하는 '위대한 프랑스'의 실현을 위해 독자의 핵전력을 확보하는 방침에 따라 1960년 2월 사하라사막에서 원폭실험을 실시했다. 이후에도 프랑스는 태평양상에서 대기권 핵실험을 계속하다가 주변국의 항의에 부딪치자 1976년부터는 지하핵실험으로 전환, 비밀리에 실시하고 있다.

알제리·드골안[편집]

Algeria·de Gaulle案

1959년 9월 16일의 방송에서 드골 대통령이 발표한 알제리 문제. 알제리 문제 해결을 위한 새로운 정책이다. 이 내용은 알제리에 민족자결권(民族自決權)을 인정하고, 그 자결권을 행사할 때까지 알제리 잠정기구(暫定機構)를 설립한다고하는 것이다.

이 정책에 대해서 군(軍)의 일부와 알제리 입식자(入植者)들은 이 신정책에 반대하여 1960년 1월 폭동을 일으켰지만 드골 대통령은 이것을 강력히 진압하고, 한때는 자기를 옹립하였지만 이들을 지원한 스스텔 국무장관을 파면시켰다. 이어서 드골 대통령은 1961년 1월 이 신정책을 국민투표에 붙여 프랑스 본국과 알제리를 통틀어 72.3%라는 압도적인 지지를 얻었다. 이것을 기초로 하여 드골 대통령은 에비앙 협정에 서명하였다.

비밀군사조직(OAS)[편집]

秘密軍事組織

드골 대통령의 알제리 정책에 반대하는 본국 및 알제리의 반(反)드골파를 결집하여 만든 비밀 테러조직. 이것이 결성된 것은 1961년 1월 국민투표에서 드골의 알제리 정책이 지지를 받은 때이다. OAS의 목적은 반드시 프랑스 본국에서 권력을 획득하자는 것이 아니고 알제리를 본국과 분리하지 못하도록 하여 프랑스 사람이 지배하는 알제리 독립국가를 수립하자는 것이다. 프랑스·알제리 사이에 휴전협정이 성립된 후에도 OAS는 이의 실시를 방해하는 테러를 행하였으나 지도자인 사랑 장군이 체포됨으로써 그 세력은 쇠퇴하였다.

에비앙 협정[편집]

Evien 協定

1962년 3월 프랑스 정부와 알제리 임시정부(GPRA)가 체결한 휴전협정이다. 그 주요내용은 ① 독립 후 1년 이내에 프랑스군을 8만 명으로 감축하고 3년 이내에 완전철퇴한다. ② 프랑스의 메르세로게릴 군항(軍港) 사용을 15년간 인정한다. ③ 알제리는 프랑스의 권익을 보증하고, 프랑스는 기술적·문화적 재정적 원조를 한다. ④ 알제리는 독자적 통화(通貨)를 가지며 프랑스공동체에 소속한다. ⑤ 사하라에 있어서 프랑스의 석유권익을 그대로 둔다는 등이다. 이에 의하여 알제리의 8년 전쟁이 끝을 맺고 국민투표를 하여 7월 1일 독립하였다. 1964년 5월의 개정협정에 의하여 프랑스 군대의 철군시기가 단축되고 1964년 9월에는 메르세르게빌의 기수부대를 남겨 놓고 모든 프랑스군대는 철수하였다.

엘리제 조약[편집]

Elysee 條約

1963년 1월 파리의 엘리제궁에서 조인된 프랑스·서독(西獨) 협력조약을 말한다. 동시에 공동선언을 발표하였는데 조약의 내용은 양국의 수뇌·외상·국방상·문교상·참모본부장은 정기적으로 회합을 가지고 외교·방위·교육의 부문에서 긴밀한 협력관계를 가진다고 하는 것들이다. 또한 공동선언은 수세기에 걸쳐 내려온 적대의식을 버리고 양 국민이 우호관계를 맺은 것은 역사적으로 획기적인 사건이라고 말하고 양국간의 협력강화는 통일유럽을 향한 불가결의 단계라고 선언하였다. 이 조약은 파리와 본의 동맹관계를 확실하게 구성한 것이다. 두 나라의 협력관계는 서독의 에르하르트 정권 때(1963∼66)에 일시적으로 냉각되었지만 키징거 정권 및 브란트 사회민주당 정권 이후부터 더욱 긴밀한 관계가 계속되고 있다.

군축삼부회[편집]

軍縮三部會

1963년 5월 파리에서 행한 평화집회(平和集會)이다. 프랑스는 알제리 전쟁 때문에 영국에서와 같은 국민적 핵반대운동은 그리 찾아볼 수 없었으나 알제리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회복되는 한편에서 프랑스의 핵무장이 추진됨에 따라 여러 가지 핵반대 운동이 잇달아 일어났다. 군축삼부회(軍縮三部會)는 그 가운데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이다.

삼부회란 원래 봉건시대의 등족회의(等族會議)로서, 프랑스 대혁명을 일으킨 것은 그 최후의 것이었다. 군축 삼부회의 명칭은 여기에서 따왔는데 이념을 넘어서 전국민의 평화를 위한 결집을 상징한 것이다. 이 집회에서는 많은 문화인과 더불어 각 지역으로부터 모여든 참가자가 파리 시내 곳곳으로부터 축구 경기장으로 행진하고 완전한 군비축소와 핵실험 중지 요구의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그러나 군축삼부회뿐만 아니라 당시의 평화운동 단체들의 반핵·반전 운동이 대중적인 성격으로 확대되기까지는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

포르 보고서[편집]

Faure 報告書

1963년 10월부터 1월까지 드골 대통령의 특사로서 중국을 방문하고 중국의 요인들과 회견한 급진사회당(急進社會黨)의 당수 에드가 포르가 1964년 1월 9일 피가로 신문에 발표한 보고서. 그 속에서 포르는 장제스(蔣介石) 정부가 북경에 존재하지 않고 중국이 중국대륙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법적으로 명확하게 설명하였다. 마침내 프랑스는 1월 27일 중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게 되었고 대만의 국민당 정부는 프랑스와 단교(斷交)했다.

불·소 공동선언[편집]

佛·蘇共同宣言

1966년 6월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은 NATO로부터 탈퇴한 후 소련을 방문하여 양국간에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그 내용은 양국정부간에 정기적으로 협의를 한다는 것, 파리와 모스크바 사이에 직통전화를 설치한다는 것 등을 합의하고, 제네바 협정에 따라 월남전쟁을 해결하며, 유럽 전체의 협력·발전을 위하여 두 나라가 공헌한다는 것, 그리고 유럽의 안전보장이나 독일문제에 대해서 상호의견을 교환한다는 것 등이다. 드골 대통령의 소련 방문은 프랑스의 핵억지력을 배경으로 해서 독립 프랑스의 유럽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유럽인에 의한 유럽의 건설 그리고 동서 유럽의 접근과 긴장완화에 의한 '대서양으로부터 우랄까지'라는 원대한 계획을 실현시키기 위한 포석이었다. 그 후 같은 해 12월에 소련의 코시긴 각료회의 의장이 파리를 방문하는 등 프랑스와 소련의 접근은 눈에 띄는 진전을 보였다.

프랑스 공동체[편집]

Communaute Francaise

프랑스와 과거 프랑스 식민지였던 국가들(현재의 속령을 포함한다) 사이의 특수한 국가결합으로서, 제2차 세계대전 후 성립되었던 프랑스 연합(Union Francaise)를 전신으로 1958년 제5공화국 헌법에 의해 성립되었다. 수차의 해체위기를 겪었으며 회원국에 대한 어떤 특권은 없고 각 국가별로 프랑스와 쌍무협력협정을 체결한 형태로 조직되어 있다. 현재의 공동체는 프랑스 본국·해외제현·해외 영토 외에 마다가스카르·세네갈·가봉·차드·중앙아프리카·콩고로 구성되어 있으나, 결합관계는 긴밀하지 못해서 그 실체는 유명무실한 상태이다.

제5공화국 민주연합[편집]

第五共和國民主聯合

1967년 11월 26일 프랑스의 신공화국연합(UNR)과 노동민주연합(UDT)이 결합하여 성립된 새로운 정당. UNR 은 드골이 1947년에 결성한 프랑스 민주연합(RPF)을 이어 받아 사회공화파를 주체로 하여 1958년 9월 결성된 정당이다. UDT는 UNR의 우파적 경향을 경계하여 그 당에 참가하지 않았던 좌파 드골파가 1959년 4월에 결성한 정당이다. 그 후 모든 정세가 변화함에 따라 1962년 이래 이들 두 정당은 서로 접근하게 되어 합당하였다. 1968년

학생데모 이후에 공화제방어 연합으로, 1973년 총선거 후 공화국 민주연합으로, 1976년 공화국연합으로 개칭하였다.

5월 혁명[편집]

五月革命

1967년 11월 파리대학 낭테르 분교의 좌파 학생들은 대학개혁을 위한 여러 가지 요구를 관철하기 위하여 동맹휴학을 하였고 이로부터 1968년 5월에는 반체제, 반전으로 기울었다. 이 분교가 폐쇄되자 이에 항의해서 일어난 소르본 대학생들에게 경찰이 무자비한 탄압을 가하자 대학교수들이 학생들을 지지하고 나섰고, 다음에는 3대노조인 CGT·CFD T·FO가 24시간 태업을 지령하는 등 데모가 전국적으로 퍼짐으로써 프랑스는 중대위기에 빠졌다.

학원분쟁을 계기로 노동자가 일어난 이유는 드골정치의 국내외적 실패에 따른 누적되어 온 국민의 저항의식이었다. '5월 위기'라고 불리어진 이 사태로 드골의 정치기반은 동요되었지만 6월초 선거에서도 드골파가 우세를 점하였다. 그러나 1969년 4월 드골이 제안한 지방제도와 원로원의 개혁을 내용으로 하는 국민투표에서 프랑스 국민은 반대함으로써 그 의사를 분명히 하였고 드골은 하야하였다.

독 일[편집]

본헌법[편집]

Bonn 憲法

1949년 5월에 제정된 독일연방 공화국의 기본법을 말한다. 장래 동서분단 독일의 통일을 예상하고 있는 점에서 과도기적 성격을 지녔다. 헌법개정은 연방의회와 연방참의원의 3분의 2 이상의 의결을 필요로 한다.

오데르 나이제선[편집]

Oder Neisse 線

1950년 7월 폴란드와 동독과의 국경협정에서 독일의 동부 국경으로 정한 오데르강과 서쪽의 나이제강을 연결한 선을 말한다. 서독·미국·영국·프랑스는 평화조약에 의하지 않는 국경은 인정할 수 없다고 강력히 반대하여 왔다. 그러나 브란트 수상의 동방정책이 추진되자 1970년 11월에는 폴란드와의 최종합의에 도달하여 국경선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할슈타인 원칙[편집]

Hallstein 原則

소련을 제외하고 동독을 승인하는 어떤 국가와도 국교를 맺지 않는다는 서독의 외교원칙을 말하는데 1955년 12월 당시 서독의 외무차관 할슈타인이 이를 성안(成案)시켜 시행하였다. 1957년 유고슬라비아, 1963년에는 쿠바에 이를 적용한 바 있다. 이 원칙은 처음에 독일 통일의 전제조건으로 생각되어 왔으나 그 후, 가까운 장래에는 통일의 가능성이 어렵게 보임에 따라 서독정부의 태도도 변화되기 시작하였다. 키징거 정권(1966∼1970)의 성립과 더불어 1967년에는 루마니아와의 국교를 다시 열게 된 후 사실상 할슈타인 원칙은 사장(死藏)되었다.

자르 문제[편집]

Saar 問題

독일과 프랑스 사이의 자르 지역(영토) 및 경제적 권익의 귀속에 관한 분쟁을 말한다. 이 지역은 양국이 접하는 국방상의 요충지이며 풍부한 석탄자원을 갖고 있다. 1871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이후 프로이센에 귀속되었다가 베르사유 체제하에서는 국제연맹의 감시하에 자치가 실시되고 경제적 권익은 프랑스에 배상으로서 양도되었다. 1935년 주민투표로 독일에 귀속되었다가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프랑스에 점령되었다. 프랑스는 이 지역에 자치권을 부여하는 대신에 경제통합을 기도하는 '자르의 유럽화'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서독의 재흥은 영토회복 운동을 촉발, 1950년 당시 총리 아데나워가 그 반환과 경제통합을 요구하였다. 프랑스의 현상유지 시도는 1955년 주민의 거부로 실패하고, 1956년 10월 자르 조약이 체결, 1957년 서독에 반환되었다. 현재의 자를란트 주로 주도(州都)는 자르브뤼켄이다.

일반 징병법[편집]

一般徵兵法

1956년 7월에 제정되었다. 서독이 NATO에 가입하고 힘의 입장에서 독일을 통일하겠다는 당시 총리 아데나워가 실현시킨 재군비계획이다. 이 법은 50만의 군대창설을 가능하게 하였으며 서유럽 최대의 병력을 설치하는 데 있어서 커다란 뜻을 가진다. 이 법의 채택 당시에 있어서는 7년간의 서독의회 사상 최초로 대논쟁이 벌어졌으며 사회민주당·난민당(難民黨)의 의원 전부와 자유민주당 의원의 대부분이 중도에 퇴장하는 등 전례없는 방법으로 저항하였다. 이 법에 따라 만 18세 이상 45세(장교와 하사관은 60세)까지의 모든 독일인 남자에게 병역의무가 부과되었다. 징병기간에 대해서는 별도의 법률로써 1년 반으로 정하도록 하였다.

괴팅겐 선언[편집]

Gottingen 宣言

1957년 4월 괴팅겐대학의 막스 프랑크연구소에서 서독의 지도적 원자과학자 18명이 원자폭탄의 제조·실험·사용에 대하여 협력을 거부하겠다고 발표한 선언이다. 이 선언의 서명자 중에는 오토한 교수 이하 노벨상 수상자 4명이 포함되어 있어 그 충격은 대단히 큰 것이었다.

슈피겔 주간지 사건[편집]

Spiegel 週刊誌事件

1962년 10월 발행부수 50만을 과시하는 유럽대륙 최대의 서독 주간지 슈피겔사의 함부르크 본사와 본 지사가 가택수색을 당하고 간부사원이 체포된 사건이다. 그 이유는 1962년 10월 10일호에 그 해 9월 서독에서 행한 NATO의 도상연습을 게재한 것이 반역죄와 수뢰죄에 걸린 것이다. 체포에 있어서 책임자인 자유민주당의 슈담베르가 법무장관을 위시로 관할자인 주정부의 내무장관·내무차관 등 자유 민주당의 간부에게 사전에 아무런 통고도 없었던 연유로 여당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또한 동지(誌)가 당시 국방장관 슈트라우스에 비판적이어서 그로 인한 보복이었다는 풍설도 있었다. 언론의 자유 문제로 확대된 이 사건은 당시 아데나워 내각 붕괴의 한 원인이 되었다.

1970년대의 정치사정[편집]

-年代-政治事情

1969년 자유민주당과의 연립으로 발족한 빌리 브란트 사회민주당 정부는 혁신계열로서 동방외교를 추진, 동구권과 국교정상화를 달성했으나 보수파의 반발로 1972년 연방의회를 해산, 총선거를 실시했다. 총선에서 승리한 브란트는 제2차 연립내각을 발족하였으나 1974년 '기욤 사건'으로 사임했다. '기욤 사건'이란 동독 스파이 사건으로 브란트 총리의 개인 비서도 스파이였던 사실이 밝혀졌다. 후임으로 재무장관 헬무트 슈미트가 총리로 지명되어 내각을 인수했으나, 1976년 총선에서 사민당과 자민당은 동 사건의 영향으로 의석 감소 현상을 보였다. 1977년 출범한 슈미트 내각은 핵물질 확산 반대운동, 도청사건, 당내분열 등의 난제에 부닥쳤으나 일련의 사건에서 적절히 대처, 국민의 지지를 회복하였다. 그러나 1978년 9월 루마니아 대통령 국무담당비서였던 파세파가 미국에 망명, 서독정부 내의 비밀을 폭로한 사건으로 궁지에 몰렸다.

통독협정[편집]

統獨協定

1970년 3월 제1차 총리회담으로 시작된 통일협상은 1972년 12월 상호관계를 정상화하고 상호존재를 인정하는 '기본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제일보를 디뎠다. 상호 유엔가입, 상호 주권 및 독립 존중, 무력행사 포기, 상호 국경불가침, 선린협력관계 수립, 상호 전권특사 파견 등을 골자로 한 기본조약에 의해 1973년 동·서독은 유엔에 동시가입하는 한편, 1974년에는 베를린과 본에 상주 대표부를 설치함으로써 통일의 기초를 세웠고, 1979년 10월 동·서독간 자유왕래를 보장하는 2개의 협정이 체결되었다. 1970년대 동·서독간에 조인된 독일 통일에 관한 협정은 1971년 9월 조인되어 1972년 발효한 베를린 협정과 함께 1980년대 통일협상의 전도를 밝게 했다.

전독일 공개토론회[편집]

全獨逸公開討論會

1966년 2월 7일 동독의 울부리히트 국가평의회(國家評議會) 의장이 도르트문트 서독 사회민주당(SPD) 대회에 제안한 공개토론회를 말함. 브란트 SPD 당수의 승낙에 따라 7월 14일에 서독의 카를 마르크스시에서 7월 21일에는 서독의 하노버에서 개회가 예정되었다. 그러나 서독정부가 자기를 전체 독일을 대표하는 유일한 정부로 한다는 기본적 태도를 고집하고 동독이 이것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이 공개토론회 계획은 무산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동서 두 독일 사이에서 화해가 조용히 깊어지는 조짐으로 보여졌다.

대연합정권[편집]

大聯合政權

에르하르트 수상이 불신임안에 따라 퇴진한 후에 1966년 12월에 성립한 기독교민주동맹(CDU)이 야당인 사회민주당(SPD)과 결합한 연립 정권을 말한다. 보통의 연립정권과는 달리 야당인 사회민주당과의 연립정권을 대연합정권(大聯合政權)이라 한다. 서독의 역사상 처음으로 대연합이 탄생한 이유는 유럽의 냉전이 격화하여 독일 통일과 베를린 문제 등이 어렵게 되었다는 점, 헤센과 바이에른 양주(兩州)에서 극우파의 국가민주당이 현저한 진출을 보였다는 점 등 서독이 직면한 난국을 타개해 나아가기 위하여 거국일치체제(擧國一致體制)가 요청되었다는 사실이다. 키징거 기독교 민주당 당수가 총리, 브란트 사회민주당 당수가 외무장관으로 입각(入閣)한 외에 이 내각의 각료들의 비율은 사회민주당 9명, 기독교민주당 8명, 기독교 사회동맹(CSU) 3명이었다.

반슈프링거 데모사건[편집]

反Springer-事件

1968년 4월 1일 독일 사회주의 학생연맹(SDS)의 지도자 도추케의 암살미수 사건을 계기로 하여 서독의 좌파 학생들이 베를린 등 8개 도시에서 슈프링거 계통 신문사옥을 일제히 공격한 유혈사건, 슈프링거는 1940년대 방송 프로그램에서 출발하여 1960년대 서독 신문의 40%를 지배하였던 언론 재벌이었으나 독점과 우익 편향의 보도로 좌파의 공격목표가 되었고 당시 브란트 내각과도 갈등을 빚어 1970년에는 일부 지분을 타사(他社)에 양도하였다.

베를린 문제[편집]

Berlin 問題

베를린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영·프·소 4개국이 공동관리했다. 서독은 서베를린을 자국 영토의 일부로 간주하고 있으나 소련과 동독은 상호 우호조약에서 독립된 정치단위로 규정하고 있었다.

비상사태법[편집]

非常事態法

비상사태에 대비하기 위하여 1968년 6월에 제정한 것으로 기본법(헌법) 개정법(비상사태 헌법이라고 불리움)과 관련된 다섯 가지의 '단순비상사태법'을 전부 합쳐서 일컫는다. 기본법 개정법은 서신·통신의 비밀, 거주의 자유, 직업의 자유 등 시민생활에 직결된 24개 조항을 개정하여 비상사태가 발생할 때에는 즉각 대폭적인 제한을 가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예를 들면 18세부터 60세까지의 남자와 18세부터 55세까지의 여자를 동원할 수 있다든지, 전신이나 전화의 도청(盜聽), 거주지구 자유 이전의 제한, 자동차 등의 징발, 연료 및 전력의 할당, 그리고 금융기관 등의 일시적 폐쇄조치와 암거래에 대한 벌금형 등이 포함된다.

브란트의 동방외교[편집]

Brandt-東方外交

1969년 서독의 총선거에서 승리한 사회민주당과 자유민주당의 연립정권에 의하여 적극 추진된 동방접근 외교정책. 브란트 수상은 집권 직후 동독정권의 존재를 사실상 인정하고, 1955년 이래의 할슈타인 원칙을 폐기하면서 적극적으로 소련·동독·폴란드·루마니아 등에 접근, 동·서 화해에 큰 성과를 거두었다. 1970년 8월 소련과의 무력불행사조약 체결, 동년 12월 폴란드와의 국경선 승인조약, 1970년 이후 동독수뇌와의 회담, 1971년 8월 4대국회담을 통한 베를린 문제의 해결 등으로 전개된 동방외교는 유럽안보회의의 병력삭감 등에도 좋은 전망을 보여주어 유럽의 긴장완화에 큰 기여를 했다. 1972년 6월에 중국과도 국교를 정상화했는데, 이 정책은 그 후 서독의 전통적인 외교기조가 되었다.

통일 이후 독일의 외교정책[편집]

統一以後獨逸-外交政策

통일 이후에도 독일의 외교 정책은 대체로 유럽 중심적이다. 이는 탈냉전기의 유럽 질서가 아직 제대로 분명한 모습을 보이지 못하는 데 연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에서 제3의 경제 대국인 독일이 신국제질서의 형성 과정에서 유럽 차원을 넘어 범세계적인 문제들의 해결에 적극 동참할 것을 요구받는 것은 당연하다. 현재까지 국내적 차원에서보다 국외적 차원에서 그러한 요구가 더 높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에 대한 국내적 부응도가 점증하고 있다.

범세계적 문제에 대한 통일 독일의 동참 요구는 1990년과 1991년 걸프 위기를 시작으로 가시화되었다. 사실 전쟁으로 막을 내린 걸프 위기의 전 과정을 통해서 독일은 어떠한 뚜렷한 외교 정책을 내놓을 입장이 아니었다(Muller 1992, 135-139). 무엇보다 독일은 통일 문제에 전력을 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통일 독일의 강대국화에 대한 국제적 우려 속에서 어떠한 경우에도 평화적 해결을 강조하는 것이 국내외적 정서에 합치되는 것이었다. 더구나 헌법상 독일군의 NATO 역외 활동은 실현되기 힘들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독일은 일차적으로 평화적 해결을 역설했지만, 결국 전쟁을 불사하는 유엔의 결의에 순종하는 길 이외 다른 도리가 없었다. 따라서 헌법상의 문제를 내세워 직접적인 전투병의 파견 대신 55억 달러에 달하는 전쟁 비용을 부담하였다. 이외에도 연합군의 병참 및 중간 전투 기지의 제공, 그리고 NATO군의 일원으로 이라크와 접경한 터키 영내에 전투기 배치 및 전쟁 직후 걸프 지역에 기뢰 제거함의 파견 등 비전투적 군사 작전에 참여하였다.

걸프 전을 통하여 독일은 새로운 국제 환경에 걸맞은 외교 정책의 모색이 필요하다는 교훈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즉, 구조적으로 전쟁 참여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서방으로부터 국제적 책임 회피라는 질시를 받으면서 전비도 엄청나게 져야 하는 이중적 부담이 되풀이되지 않을 방도를 찾아야 했다. 독일이 WEU를 활성화하여 독일군의 NATO 역외 활동 가능성을 모색한 데는 바로 걸프 전과 유고슬라비아 내전이 직접적 계기로 작용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독일은 국내 정치적 논란 끝에 국제 평화 유지를 위해 독일군의 유엔 평화유지군 참여를 결정했다. 걸프 전 이후 독일의 국외 파병 사례로는 쿠르드(Kurd) 족 박해를 방지하기 위한 이란 내 파병, 캄보디아·소말리아에 대한 평화유지군 참가, 그리고 유고슬라비아 내전에서 비전투적 군사 작전 참여 등을 들 수 있다(Gordon 1994, 231). 비록 미미하나마 독일의 이러한 국제적 기여가 현실화되면서 겐셔의 뒤를 이은 새로운 외무장관 킨켈(K. Kinkel)은 과감하게 독일의 유엔 상임 이사국 진출 의사를 밝혔다. 이는 나치의 악몽을 떨쳐 버리고 독일의 국제적 위상에 걸맞는 지위를 확보하려는 전후 세대 정치 엘리트들의 의지를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적어도 나치의 교훈을 잊지 않는다면 그러한 의지는 장차 독일 외교 정책의 새로운 방향 모색에 큰 영향력을 보이게 될 것이다.

이탈리아[편집]

정정불안[편집]

政情不安

제2차 세계대전 후 왕정을 폐지하고 1948년 공화국으로 출발한 이탈리아의 정치는 가톨릭계 보수계열이며 초계급 정당인 기독교민주당이 제1당의 위치를 고수하며 연립내각 또는 단독소수내각 형태로 장기집권했으나, 정정·경제 불안으로 40여 차례나 내각교체가 있었다. 이탈리아의 정치는 제1기 기민당 절대우위(1948∼1963), 제2기 소수 우익 또는 사회당 참여형태의 기민당 중심 연립내각(1963∼1975), 제3기 기민·공산당연합(1976∼1979), 제4기 사회당 참여형태의 기민당 중심 독립내각(1979∼1983)시대의 4기(期)로 구분할 수 있다. 1963년 출범한 모로 내각은 사회당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 정국은 안정된 듯하였으나 사회당의 연정거부로 1976년 1월과 5월 모로 내각이 사퇴하자 레오네 대통령은 의회를 해산, 동년 6월 총선거를 실시했다. 총선거 결과 기민당은 제1당을 고수했으나 공산당이 3분의 1을 점하였다. 공산당의 연정제의를 거부한 기민당은 안드레오티를 총리로 단독소수내각을 구성, 공산당의 묵시적 협력으로 유지되어 오다가 1979년 공산당의 지지철회로 붕괴되었다. 1978년에는 전(前)총리 알도 모로가 극좌 도시게릴라인 붉은 여단에게 납치, 살해된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1979년 조기총선 이후 정치위기를 수습한 코시가 총리의 소수연립내각이 출범하였다.

이탈리아 사회당의 통합[편집]

Italia 社會黨-統合

1943년에 다시 발족한 바 있는 이탈리아 사회당에서는 냉전의 격화에도 불구하고 당내의 우파인 사라가트가 탈당해서 민주사회당을 결성하였다. 그 후 두 당을 합당하자는 움직임이 몇 번 있었으나 실현을 보지 못하였다. 1963년 이후 기독교민주당이 좌경화하자 사회당을 정권에 참여시킴으로써 다시 통합 기운이 일어나 1966년 10월에 두 당은 19년만에 통합하게 되었다. 이 통합에 따라 사회당은 공산당과 완전히 멀어지게 되었다.

구조개혁론[편집]

構造改革論

이탈리아 공산당이 제2차 대전 후에 처음으로 제창한 평화혁명론이다. 제2차 대전 후에 세계의 정치·경제의 구조적 변화와 이탈리아 국내의 새로운 정세 전개에 따라 일련의 합법적인 개혁을 통하여 자본주의적 사회구조를 사회주의적 사회구조로 평화스럽게 이행시킬 수 있다는 주장을 가리킨다. 특히 이탈리아 헌법에는 반(反)파시즘 투쟁에 있어서 좌파세력의 적극적인 참여와 아울러 사회주의적 조항이 규정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은 좌파들이 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단순한 수단만은 아니고, 권력을 획득한 후에도 이 헌법을 기초로 하여 모든 개혁을 실현하고 이탈리아의 사회구조를 민주주의·사회주의의 방향으로 개조할 수 있다고 하는 주장이다.

바티칸의 르네상스[편집]

Vatican-Renaissance

로마교황이었던 요하네스 23세는 가톨릭 교회에 혁명적 기풍을 불어 넣은 바 있었다. 그는 '지상의 평화'(1963년 4월)를 최후로 8회에 걸쳐 회칙(回勅:교황이 전세계의 주교·신부·신자에게 보내는 편지)을 내어 모든 기독교회의 통합과 평화를 위한 대화가 있도록 하는 독창적인 평화공존의 길을 외쳤다. 이같은 두 가지 큰 문제해결을 위한 추구는 당시의 교황인 바오로 6세도 계승하기에 이르러 1965년 10월에는 UN총회에 출석하여 평화를 위한 연설까지 행하였다. 같은 해 12월에는 교황의 호소에 힘 입어 월남에서 크리스마스 휴전이 실현된 바 있다.

세계 각국의 수많은 정부 수뇌들도 바티칸을 방문하고 전쟁과 평화의 문제에 관하여 의견을 교환하게 되었다. 바티칸은 또한 독재정권들의 타도를 위해서도 활동하였다. 에스파냐의 프랑코 총통은 1966년 11월 에스파냐의 국가조직접(憲法)을 개정하여 독재체제로부터 입헌군주제(立憲君主制)로 이행하기 위한 조치를 발표하였는데 그 이면(裏面)에는 바티칸의 강력한 권유가 작용하였다고 한다. 종교면에서는 2천 년만에 기독교 역사상 최대규모의 제2바티칸회의가 기독교 재통일의 기운을 북돋게 하였으며 한편으로는 공통성서(共通聖書) 번역작업을 개시하였다. 이같은 활발한 움직임은 바티칸 교황청의 권위를 한층 높여주었다.

캐나다[편집]

캐나다의 내셔널리즘[편집]

Canada-Nationalism

캐나다의 정치는 자유당과 보수진보당이 1867년 이래 교대로 정권을 담당해오고 있다. 1957년 총선에서 자유당을 누르고 출범한 보수진보당 정부는 경제적·군사적 대미 의존관계를 탈피, 캐나다 내셔널리점의 부흥을 기도했으나 1963년 핵탄투 국내반입 사건으로 미국과 갈등을 일으킨 끝에 의회불신임 결의로 사퇴하고 자유주의적 중립노선의 자유당이 재집권하였다. 1968년 출범한 트뤼도 내각은 자주독립노선을 선언, 미주기구(OAS)에 불참하고 캐나다 영역내의 미국의 북미 방공망 배치를 엄격히 하는 한편 나토(NATO)에서의 캐나다군을 단계적으로 감축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그 이면에는 트뤼도 내각이 1972년 선거에서의 의석감소, 1974년 예산안 표결에서의 패배 등 정치적 위기상황에서, 의회해산 후 실시한 총선거에서 '캐나다화(化)의 추진'이란 정강정책으로 과반수를 획득함으로써 단독 다수정부를 구성한 배경이 있다.

1972년 트뤼도 총리는 미국자본의 대규모 침투에 반발, 외자(外資) 규제정책을 실시하고 1973년에는 자원 내셔널리즘을 배경으로 각종 원자재의 수출을 규제하였으며 주로 미국에 수출되는 석유의 가격인상을 실시했다. 정치적으로는 1970년 중국을 승인했고 1973년 트뤼도 수상이 중국을 방문, 통상협정 등을 체결했으며 중동·아시아 여러 나라와도 수교하는 등 대미편향에서의 탈피를 시도했다.

서방측에서는 유일하게 핵기술을 수출해 오던 캐나다는 1976년 핵확산금지조약에 서명하고 1978년 유럽공동체(EC)와 원자력 평화이용에 관한 보장조치협정에 조인한 후 비핵보유국에 대해서는 규제조치를 취하고 있다. 1979년 5월 총선거에서 조 클라크의 진보보수당이 트뤼도의 자유당에 신승, 진보당 중심 연립내각이 발족되었다.

퀘벡주 분리문제[편집]

Quebec州 分離問題

캐나다는 영연방국이지만 퀘벡은 과거 프랑스 식민지였던 지역으로 지금도 캐나다는 영어와 프랑스어가 공용어이다. 퀘벡주의 경우는 주민의 절대다수가 프랑스어권으로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 함께 분리주장이 거세게 일고 있다.

1967년 몬트리올을 방문한 드골 프랑스 대통령이 퀘벡주 분리를 주장, 캐나다·프랑스 사이의 외교문제로까지 비화되었던 이 문제는 1976년 주의회선거에서 분리주의를 표방한 퀘벡당이 압승함으로써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이어 출범한 레베스크 주정부는 1980년 퀘벡의 분리독립 찬반을 주민투표에 부의(附議)하였으나 부결되었다. 그러나 레베스크는 주 의회를 조종, 중앙정부로부터의 광범위한 자치권 부여를 촉구하는 한편 분리독립운동의 추진을 선언하였다.

유럽 제국[편집]

에스파냐[편집]

Espana

1936∼39년 내란에서 승리한 프랑코 파시스트 정권은 37년간의 장기독재 끝에 1975년 11월 독재자 프랑코 총통이 사망함으로써 붕괴되었다. 1975년 11월 입헌군주국으로 복귀한 후 국왕에 즉위한 후안 카를로스 1세는 전면적인 자유화를 선언, 1977년 41년만에 실시된 총선거에서 수아레스가 이끄는 중도우파의 민주중도연합이 압도적으로 승리했다. 수아레스 수상은 공산당을 합법화하고 언론자유화 등 민주화작업을 추진함과 동시에 1979년 주민투표를 거쳐 바스크 지방 3개 주(州) 및 카탈루냐 지방 3개주의 자치를 허용, 동 지방의 분리 독립운동을 진정시켰다. 1978년 국왕과 수상의 권한을 제한하고 기본권 보장·강화를 내용으로 하는 신헌법이 국민투표로 확정되었는데 1979년 신헌법의 발효로 실시된 총선거에서는 공산당과 노동자사회당(PSOE) 등 좌파세력이 급격히 신장되었다. 수아레스 수상은 바스크 분리주의자의 계속적인 테러와 좌파세력의 신장 등의 정치적 위기에서 군부·종교계 등 보수세력의 압력까지 가중되어 1981년 사임하고 칼보 소텔로가 수상에 임명되었다. 동년 2월 발생한 프랑코 추종자인 극우 군부세력의 쿠데타는 카를로스 국왕의 강력한 민주화 의지로 실패하였지만 민주화의 전도에 암영을 드리우는 사건이었다.

그리스[편집]

Greece

1935년 왕정복귀 후 1967년 군부의 쿠데타로 당시 국왕 콘스탄티노스는 국외로 망명하고 군사통치가 시작되었다. 1967년 집권한 파파도플리스 제1군사정권은 1973년의 우파 쿠데타로 붕괴하고 기지키스 장군의 제2군정이 시작되었다. 1974년 키프로스의 인종분규로 발생한 그리스·터키전쟁(키프로스 전쟁)에서 그리스가 패배, 제2군정은 붕괴되었다. 1974년 군부는 환국한 카라만리스(그리스 민주화의 아버지로 일컬어진다)에게 조각을 위촉, 외형상의 민간정부가 출범했다. 1973년·1974년의 국민투표에 의해 공화제를 선포한 그리스는 1975년 공화제헌법에 따라 콘스탄티노스 차초스가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1974년 총선거에서 신민주당 단독내각을 수립한 카라만리스는 국민의 지지하에 군부를 축출하고 차초스 대통령의 권한을 제한함으로써 민주화 작업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였다. 1980년 5월 대통령선거에서 카라만리스가 당선, 취임하였고 그에 따라 신민주당 랄리스 내각이 출범하였다.

포르투갈[편집]

Portugal

1910년 10월 혁명으로 공화국을 성립시켰으나 1916년 내란이 발생했고 1925년 내란을 수습한 카르모나 군사정권이 수립되었다. 1932년 집권한 살라자르는 우익독재정권을 수립, 조합주의 국가를 지향하였는데 1969년 카에타노에게 정권을 이양하였다. 카에타노는 부분적인 자유화를 실시했으나 독재 자체는 변함이 없었고 '최후의 식민제국'으로 지칭될 정도로 식민지 정책을 유지해 오다가 1974년 군부 혁신파의 쿠데타로 붕괴되었다. 쿠데타에 성공한 군부는 '구국군사평의회'를 구성, 비식민주의·민주화를 선언하여 자유화 작업에 착수했으나 군부 내의 강온파 대립과 좌우파 정치세력간의 충돌로 인한 정치적 위기와 경제침체로 정정은 매우 불안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아레스가 이끄는 사회당이 불안스럽지만 정국을 주도, 1976년 좌파 사회주의 지향의 민주국가 건설을 이념으로 하는 신헌법을 제정하고 1982년 군통수권을 대통령으로부터 내각으로 이양시켰다.

베네룩스 3국[편집]

Benelux 三國

1948년 체결된 벨기에·네덜란드·룩셈부르크 3국간의 관세협정을 가리키는데 동 조약 이후 3국이 정치·경제적으로 긴밀한 공동보조를 취하였으므로 동맹관계로까지 일컬어지고 있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와서는 부분적이지만 독자노선 추구 경향을 보이고 있다.

벨기에 언어문제[편집]

Belgie 言語問題

벨기에의 국민구성에서 기인한 문제로서 벨기에는 국민의 55%가 프라만어를 사용하는 네덜란드계 프라만인이고 45%가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라틴계 왈롱인, 나머지는 동부지역의 독일어 계통으로 네덜란드와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으나 언어문제와 왕위계승 문제로 인한 분규가 계속되었다. 1963년 북부의 프라만어권, 남부의 프랑스어권, 동부의 독일어권, 브뤼셀은 공통어권으로 하는 언어경계가 설정되었으나 계속적으로 정치쟁점화되고 있다.

북유럽[편집]

北Europe

덴마크·핀란드·스웨덴·노르웨이·아이슬란드 5개국은 과거 중립주의를 견지, 서유럽 제국과는 별개의 노선을 추구해 왔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련의 변화를 겪게 되는데, 덴마크·아이슬란드·노르웨이 3국의 친서방화와 나토(NATO) 가입, 유럽자유무역연합(EFTA)가입국이었던 5개국 중 덴마크의 탈퇴와 유럽공동체 가입(EC) 등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북유럽 5개국은 1953년은 정부·의회간 협의기구로 북유럽이사회(NC)를 구성, 공동보조를 계속하고는 있다. 중립주의 2국 중 핀란드는 지정학적·역사적 조건으로 인하여 대소우호가 외교 기조이며 스웨덴은 영세중립국이지만 경제 부문에 있어서는 친서방화 경향을 보이고 있다. 5국 중 아이슬란드는 비무장주의, 스웨덴은 무장중립주의를 취하고 있다. 아이슬란드를 제외한 4국은 소련·동구권과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정치·경제적으로 상당히 안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