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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정치/국 제 정 치/세계각국의 정치사정/아프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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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의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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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rica-政治

아프리카 대륙은 오랜 세계사의 형성과정에서 거의 망각된 존재였으며 한낱 피동적 객체에 불과했다. 그러나 전후 서구식민주의의 쇠퇴와 더불어 아프리카 대륙은 정치적 각성기를 맞이하게 되어 현실 국제사회의 다이내믹한 변화에 주체적이며 능동적으로 참여케 되었다.

대륙 전체를 통하여 전전(戰前)에 불과 4개국밖에 없던 독립국이 이제는 53개국으로 증가되었으며, 그 중 로디지아를 제외한 50개국이 UN회원국으로 당당히 가입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20세기 후반기의 국제사회에 있어서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국제무대에 두각을 나타낸 아프리카대륙의 새로운 진출일 것이다. 1951년 리비아의 독립을 효시로 1956년에는 튀니지, 수단, 모로코 등이 독립하였으며, 1962년에 독립한 알제리를 제외하고 소위 아랍아프리카에서는 1950년대에 독립을 완성하였던 것이다. 사하라 이남의 흑아(黑阿) 대륙에 있어서도 1957년의 가나 독립, 1958년의 기니의 독립 등은 1950년대에 이루어졌으며 특히 1960년에 들어와서는 무려 17개국이 대거 독립을 성취하여 그 중 모리타니를 제외한 16개국이 그 해에 UN에 가입됨으로써 국제정치의 판도형성에 새로운 국면을 야기시켰으며 그러한 연유로 하여 UN에서는 1960년을 '아프리카의 해'라고 부르게 되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걸쳐 가속화된 아프리카의 정치적 각성은 1970∼80년대 분리독립운동과 대백인정권 타도투쟁을 거쳐 1990년 최후의 식민지였던 나미비아가 독립, 유엔에 가입함으로써 식민시대의 막을 내렸다.

그러한 결과 현재 191개국 UN가맹국 중에서 아프리카 대륙이 52개국을 차지하고 있다. 일찍이 역사에서 잊혀진 대륙 혹은 암흑의 대륙으로서 버림받던 아프리카 대륙이 전후 국제사회의 새로운 각광을 받음으로써 더 이상 유럽 열강의 지배체제에 종속된 연장물이 아니며 아프리카 대륙도 이젠 아프리카적 주체 즉 흑인 일체감(black identity, negritude)의 개성적 모색에 그들의 정치적 총화의 구심점이 집약되어 그들의 국가건설이 진척되고 있다. 국제정치적 측면에서 볼 때 아프리카대륙의 신생독립국들의 건설은 1960년대의 후기 전후사회가 파생시킨 변질된 환경 즉 종전의 미소 양세력을 축으로 하는 양극화의 대결을 지양한 다원화에로의 공존 모색이라는 특수한 상황 여건을 이용하여 타대륙에 비하여 강대국의 입김이 적게 미쳐 대국들의 세력권 부식에 크게 노출되지 않았으며, 또한 그들 자신들의 비중도 결코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비대화되었기 때문에 후발독립국으로서의 아프리카 제국들의 국가건설에 대한 포부는 충천하고 있는 실정이다. 주어진 그러한 여건 속에서의 아프리카대륙의 국가건설의 특징은 그들 사회의 특수성을 충분히 참작한 현실론에서 그들의 목적달성을 추구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동일한 언어·종족 혹은 문화적 배경의 동일성 추구는 사하라 이북의 아랍아프리카를 제외하고는, 즉 사하라 이남의 흑(黑)아프리카에 있어서는 아무런 의의가 없다. 일차적으로 독립과 동시에 주어진 현실적 장(場)의 윤리(倫理)에 순응하여 그 윤곽 내에서 국가건설을 기도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일반론에서 중앙집권적 권위에 직결된 정치질서의 존재 혹은 명확히 구분된 국가영역의 변경을 전제하고 이에 수반된 귀속감이나 문화적·정치적 및 도의적 공동의식에 귀의되는 그러한 모든 여건의 통합된 가치체계에 의하여 조성된 결과를 국가라 정의한다면 현시점에서 본 아프리카 대륙에는 그러한 정의개념에 해당되는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봄이 타당하다. 따라서 아프리카 대륙에 있어서 약간의 예외는 있지만 대체적으로 민족의식 운운은 실감나지 않으며, 현실의 아프리카적 특수사정이나 환경에서는 그러한 문제제기 자체가 명확한 의의를 갖지 못한다.

즉 아프리카적 장(場)의 윤리가 지닌 특수성으로 인하여 아프리카 민족주의 지도자들은 다른 대륙의 민족주의운동의 전개과정에서 그 성취목표로서 강력히 추구하던 민족자결원칙에는 그렇게 깊은 관심과 흥미를 느끼지 못하였다. 개별적 단위에 귀착되는 민족자결주의의 모색은 활발하지 못하였다고 하더라도 역사적 사회적 조건의 근사성과 현실적 상황의 동질성에 기인되어 대륙적 차원의 동시적 각성을 가능하게 하였으며 이것이 그들 국가건설의 기초가 되는 아프리카 민족주의 발발의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아프리카 민족주의의 당면과제는 일찍이 존재한 일이 없는 민족국가 내지 국민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프리카 대륙의 현실은 지난 식민지시대에 유럽의 세력균형에 의한 영향권에 따라 확정되어 통치되었던 인위적 경계가 독립된 지금의 국경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공통의식을 가진 민족이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국가기구가 먼저 성립되고 그러한 정치적 권력에 의하여 국민적 통일을 이룩하여야 하는 국가국민 내지 국가민족의 특수성을 지닌다. 국가건설의 주도권을 국가의 지도성에 귀착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아프리카 대륙의 특수성에서 볼 때 그 건설원리로서 소위 일종의 에타티슴이 등장되었던 것이다. 식민지 유산을 과감히 불식하며 식민지적 경제체제에서 탈피하여 과감한 정책적 선택으로 교육의 보편화, 국민생활의 근대화를 수반하는 국민적 경제사회체제로의 체제전환을 위하여 국가의 창의적 지도가 필요한 것은 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와 같은 국가중심적 성장이 기초가 되는 아프리카 대륙은 국가건설에 직결된 국가건설 원리에 입각, 체제의 형식에서 볼 때 거의 공통적으로 일당제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다는 것이다.

유럽적 의회민주주의는 유럽제국과 같이 산업혁명과 정치적 시민혁명을 통하여 계급형성이 사회화된 곳에는 가능하며 거기에서는 정당한 성립은 불가피하였으나 오늘날 아프리카에 있어서와 같이 분화된 사회계급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는 복수정당의 존재는 오히려 부족의식을 현재화시켜 결과적으로 국가건설에 저해요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프리카신생국의 국가건설 문제는 독립 직후의 열렬한 기대에도 불구하고 목적의 달성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었다. 독립은 달성하였으나 대부분의 국가는 관료제 중앙정부와 전통적인 부족 중심의 족장(族長) 지배체제가 공존하는 2원적인 정치·사회구조로 근대화 작업의 정체, 족벌체제, 국가권력의 미통합과 불확산, 권력을 둘러싼 부족간의 갈등 등 국가형성 작업의 어려움과 과거 식민지배국의 수탈과 우민화 책동으로 국가·사회건설을 위한 국민적 제반 여건이 황폐화되어 만성적인 가난과 기아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특히 언어·종족의 이질성은 국가 내부의 비동질성을 초래, 과도기적 상황을 틈탄 군부·좌파사회주의 세력의 집권음모와 함께 내란과 국경분쟁, 분리독립 투쟁이 계속되고 있다. 여기에 구종주국의 기득권 요구와 리비아·쿠바·소련·중국 등 제3세계에 대한 영향력 강화를 기도하는 국가들의 이해관계가 맞물려 주체적인 국가개혁 세력이 형성되지 못하고 20세기 최대의 난문제로 지칭될 정도로 경제적·정치적 후진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검은 아프리카의 민족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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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rica -民族運動

사하라 사막 남쪽의 아프리카는 일반적으로 '검은 아프리카'라고 불린다. 그리하여 사하라 사막 북쪽 아랍권의 아프리카와 구별되는데, 이는 주민의 피부색이 검기 때문이다. 이 지역은 19세기 말경까지 영국·프랑스·독일·벨기에·포르투갈·에스파냐 등의 유럽 열강에서 분할 점령된 식민지로서 억압과 착취의 대상이 되었다. 즉, 네덜란드계의 보어인이 세운 남아프리카 연방(현재의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해방되어 돌아온 아메리카 흑인 노예들이 세운 라이베리아를 제외한 거의 전지역이 식민지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아메리카의 흑인이었던 W.E.B. 뒤부아 박사 등이 '범아프리카 회의'를 창설하여 범아프리카주의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본격적인 민족독립 운동으로까지 발전하지는 못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점진적으로 조직화되고, 제2차 세계대전 후 대중조직을 기반으로 하는 정치세력으로 성장한 민족주의 운동은 그 투쟁목표를 과거 백인과 흑인의 인종차별철폐에서 완전한 자치(自治)와 독립확보로 전환하였다.

1944년 영국령 나이지리아에서 결성된 나이지리아·카메룬 국민회의(NCNC), 1946년 프랑스령 서아프리카 및 적도 아프리카 지역의 민족운동가들이 결성한 아프리카 민주동맹(RDA), 가나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은크루마가 주도한 황금해안 통일회의(UGCC:가나 인민회의당의 전신), 케냐의 전(前) 대통령 케냐타가 주도했던 케냐·아프리카인 동맹(KAU) 등에 의해 견인된 민족해방운동은 1951년 북아프리카에서 리비아가, 또 1956년에는 튀니지·모로코·수단이, 1957년 사하라 이남에서 최초로 가나가 각각 독립함으로써 그 결실을 맺기 시작하였다. 이와 동시에 식민지배국의 민족운동에 대한 탄압이 거세졌으나, 극심한 영국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은 케냐의 마우마우단(團)의 무장항쟁은 알제리 민족해방전선(FLN)의 오랜 무장독립 투쟁과 함께 그 새로운 돌파구를 제시함으로써 민족해방운동은 아프리카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1960년은 국제연합에서 '아프리카의 해'로 정했을 정도로 아프리카 전역에서 17개국이 독립, 민족해방운동의 절정기였다. 그러나 이들 독립국들은 영국·프랑스·벨기에 등 구(舊) 식민지배국들로부터 정치적인 독립을 인정받았을 뿐, 일부 국가들은 민족주의적인 의욕이나 반식민주의적 연대가 강하지 못했으므로, 당시 아프리카 제국은 반식민·급진적인 팬아프리커니즘의 카사블랑카 그룹과 친서구적인 브라자빌 그룹으로 분열·대립하였고, 알제리 독립전쟁과 콩고 내전(그 결과 콩고와 자이르로 분리되었다)에서 가시화되었다.

이러한 노선대립은 1962년 알제리가 독립하고, 1963년 콩고 내전이 일차 진정된 후 아프리카가 단결해서 제국주의·식민주의에 항거했던 것처럼 아프리카 제국의 의사를 통합, 당면한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민족주의적 각성으로 '아프리카는 하나'라는 팬아프리커니즘이 압도, 1963년 5월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에서 제1회 아프리카 정상회담이 개최되어 아프리카 제국 협력과 단결을 위한 '아프리카 통일기구'가 창설됨으로써 해소되었으며, OAU의 출범 이후 아프리카의 민족주의 운동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1961년 시에라리온의 독립을 시작으로 1977년 지부티의 독립까지 1960∼70년대 사이에 23개국이 독립했는데, 1975년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한 앙골라는 인민해방운동(MPLA)·민족해방전선(FNLA)·전면(全面) 독립민족동맹(UNITA)의 3파가 내전에 돌입, 여기에 소련·쿠바·미국 등의 개입으로 1989년 일시 정전에 이르기까지 주변 남아프리카 공화국·잠비아·자이르·콩고·짐바브웨로 비화, 아프리카 분쟁의 초점이 되고 있다.

1980년, 1976년 이래 소수 백인통치에 항거, 다수파 흑인이 무장항쟁을 벌여 온 로디지아에서 흑인 급진파가 승리함으로써 영국 감독하에 독립총선거가 실시되고, 마침내 흑인주권국가 짐바브웨로 독립함으로써 아프리카 민족주의 운동의 한 장을 기록하였고, 1990년 아프리카 대륙의 최후의 식민지였던 나미비아가 남아프리카 공화국 위임통치령에서 독립함으로써 아프리카 민족해방운동은 그 일차적 목표를 달성했다. 그러나 구(舊) 종주국에 대한 정치·경제·군사적 종속성, 1979년 이후 OAU의 좌경화로 상징되는 급진·좌파 세력권의 급증, 리비아·쿠바·소련·미국 등 이해관계를 노린 외세의 영향력 가중, 내전·국경분쟁·분리독립운동 등의 난기류 속에서 아프리카의 민족주의 운동은 그 이상 진전이 없다.

불안한 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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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安-政情

신생 아프리카 제국은 레소토·모로코·스와질랜드 등 입헌군주국을 포함하여 대부분 의회민주주의 정체를 표방하고 있으나 정치·사회적 구조는 그 운영을 불가능하게 하고 있다. 더욱이 정치세력 또한 서구에서처럼 대중적 의사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 지식층의 자의적 판단에 의거하여 조직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점에서 모순이 심각하다. 여기에 국가권력의 근간인 무장력 또한 과거 식민지 괴뢰군부 출신이 중심이며, 같은 식민지배국권(權)의 무장력 사이에는 상호 동질성이 있다는 점이 문민(文民) 중심의 의회민주주의 체제 발전의 근본 장애가 되고 있다. 따라서 대부분의 국가에서 복수정당제란 찾아볼 수 없고, 1부족 또는 1인 중심의 장기 족벌·독재·권위적 정치체제가 실시되고 있으며, 쿠데타·정변은 연례 행사나 다름이 없다. 국가 무장력 또한 집권자의 사병(私兵) 조직이며, 그 역시 자신의 사병에 의해서 또는 새로운 무장 세력에 의해서 축출되는 식의 악순환이 보편화되어 있다. 여기에 각 국가 무장력의 상호 동질성은 1국 쿠데타 성공이 인접 나라로 연속 파급되는 현상의 근본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더욱이 신생 독립국들의 영토·국경은 그 구성원의 주체적 의사로 확정된 것이 아니라 과거 식민제국들에 의해 인위적으로 구획된 것이기 때문에 끊임없는 내란·영토분쟁·분리독립투쟁이 발생하고 있으며, 이로 인한 군부·강경파 세력의 득세 또한 정정불안의 주요 요인이다.

이러한 결과 아프리카 제국 중에는 민간정부보다 군사독재정권이 압도적 우위를 점하고 있고, 민간정부라 하더라도 일당독재를 실시하고 있으며, 1970년대 이후에는 전제군주와 다름없는 종신대통령제 및 사실상의 종신대통령제를 취하는 국가가 늘어나 선거에 의한 평화적 정권교체가 불가능하게 되고 있다.

이와 같은 독재와 쿠데타 외에도 과거 식민통치에 대한 반발과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저항에서 비롯된 아프리카 국가들의 탈서구화의 비동맹 중립·좌파 사회주의 노선은 식민 역사의 유산인 구지배국의 기득권, 내부적 식민협력세력 또는 친서구파의 이해관계와 맞물려 정정불안을 가속화시키고 있다.

아프리카 통일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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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ganization of African Unity;OAU

1963년 5월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에서 개최된 제1회 아프리카 정상회담에서 '아프리카는 하나'라는 팬아프리커니즘을 기조로 채택된 동기구 헌장에 의해 동년 10월 발족했다. 아프리카 제국의 협력과 단결을 촉진, 식민지주의의 소멸을 목적으로 아프리카 제국의 국민생활 향상을 도모하며 주권의 평등, 내정 불간섭, 영토의 보전, 분쟁의 평화적 해결, 파괴활동의 금지, 비독립지역의 해방운동 지지, 비동맹정책 견지 등을 강령으로 하고 있다.

산하기구로 정상회담(연1회), 각료회의(연2회 이상), 중재위원회, 전문위원회(경제·사회·문화·교육) 등을 설치하고 있으며, 1990년 현재 회원국은 남아프리카공화국·모로코를 제외한 아프리카 51개국과 사하라 아랍민주공화국(폴리사리오 전선이 1976년 선포)이다. 사무국은 아디스아바바에 있다.

이 기구는 반(反)서구·급진 팬아프리카니즘의 카사블랑카 그룹과 친서구·보수파인 브라자빌 그룹(몬로비아 그룹 포함)이 대동단결하여 조직된 '아프리카 문제는 아프리카에 의해서'라는 민족주의 운동의 결집체이나, 그 구조적 모순이나 시대적 상황으로 일련의 사태에 구체적인 조치나 합의에 도달하지 못함으로써 비판의 대상이 되어 왔다.

1970년대 말 이후에는 알제리를 중심으로 한 좌파 강경·급진파의 영향력이 강화되어 온건파 내지 친서방 국가들의 퇴조가 두드러지고, 친소 내지 사회주의 노선 국가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어서 소위 'OAU의 좌경화'라고까지 불려졌다. 그러나 경제부문에 있어서는 개별적인 친서방 접근을 나타내고 있다.

아파르트헤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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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artheid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비(非)백인에 대한 분리와 차별정책을 말한다. 1960년 독립 이래 소수파인 보어인과 영국계 백인이 아프리카너(Africaner)에 대한 절대적 지배와 국민당(國民黨:집권 백인 정당)의 영구집권 기도 과정에서 이론화·조직화·제도화되었다. 유색인에 대해서는 정치적 권리는 물론 거주·영업·교육 등 사회 전분야에 걸쳐 제약을 가하고 있는데, 1976년 아프리칸스어(Afrikaans:공용 네덜란드어) 교육 문제로 소웨토 행동위원회(SAC)가 중심이 된 인종차별반대 흑인운동이 발생했고, 1978년 아자니아 인민조직(AIAPO)이 이를 계승하였으나 백인정권의 탄압으로 강제 해산되었다. 소수 백인정권의 인종차별정책은 OAU를 중심으로 한 급진·사회주의 주변국과 마찰을 일으켜 양측 사이에 무력충돌이 발생하는 등, 이 지역 정세불안의 주요 원인이 되어 왔다. 1974년 국제연합에서의 총회 의결권 박탈을 시작으로 한 국제기구와 EC제국·미국 등 서방진영에서의 대남아공 금수(禁輸)·제재 조치에도 불구하고 백인정권은 강경입장을 고수하여 오고 있으며, 1983년 흑인 이외의 유색인에 대해서는 투표권을 부여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개헌안이 국민투표에서 통과, 1984년 유색인종회의가 구성되었다. 그러나 제외된 흑인들의 파업·시위와 아프리카 민족회의의 무장항쟁은 더욱 가속되었고, 백인정부는 비상사태 선포와 동시에 대대적인 탄압을 가해 비극적인 유혈참사 사태가 일어났다.

차드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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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d 內戰

1960년 프랑스 식민지에서 독립한 차드는 11개 주요 종족과 192개의 소수종족이라는 국민 구성에 종교적 갈등까지 겹쳐 남부 수단계 사라·차리족 정권에 불만을 가진 북부의 회교계 투부족을 중심으로 차드 민족해방전선(FCNC)이 결성, 내전에 돌입했다. FCNC는 식민주의 타도, 민주연합정부 수립, 모든 외국군 기지 폐쇄를 표방하며 분리독립운동을 전개하였는데, 1978년 11개 주요 종족간의 합의로 통합과도정부(GUNT)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1979년 쿠데타에 의한 우에데의 집권, 문두 시(市)에서의 종교분쟁으로 회교도의 대학살 사건이 일어나자 GUNT는 와해되고, 당시 국방장관 아브르가 반정부 북부군(FAN)을 이끌고 우에데 정부와 무력충돌, 1982년 수도 은자메나를 점령하고 대통령에 취임했다. 1983년 우에데가 리비아의 군사개입을 요청하고, 이에 대한 프랑스의 개입으로 차드 내전은 국제대리전 양상으로 변질되었으며, 차드는 소위 적색선을 중심으로 아브르 통치지역과 우에데 통치지역으로 양분되었다.

나미비아의 독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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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ibia-獨立

1990년 3월 아프리카 최후의 식민지였던 나미비아는 105년만에 주권을 되찾았다. 구 서남아프리카 왕국으로서 1949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국제연합의 결의를 무시하고 나미비아를 자국 영토로 편입해 강점해 왔다. 이에 서남아프리카 인민기구(SWAPO)가 독립운동을 전개, 1976년 국제연합에서 '유일·정통한 대표권'을 인정받고 참관인 자격을 부여받았다. 남아공은 나미비아에 괴뢰정권 수립을 기도하여 오다가 국제적인 압력에 굴복하고, 1989년 11월의 총선에서 SWAPO가 압도적 지지를 획득함으로써 독립을 선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