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정치/국 제 정 치/현대의 국제정치/제3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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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세계의 개념규정[편집]

第三世界-槪念規定

100여 개국과 30억 가까운 인구를 가진 이른바 제3세계는 오늘날 국제정치 무대에서 강력한 발언권을 행사하고 있다. 유엔회원국의 4분의 3을 차지하고 있는 사실만으로 이 그룹이 국제정치 사회에서 수행하고 있는 커다란 역할을 짐작할 수 있다. 냉전의 정점기였던 1950년대 초부터 하나의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한 이 제3세계는 제나름의 특성을 갖고 있다. 제3세계란 일반적으로 비서방·비공산·비동맹 개발도상국가들 (non­European, non­Communism, non­Aligend, underdeveloped nations)을 가리킨다. 즉, 제1세계(선진자본주의 국가군)와 제2세계(공업화를 달성한 소련 및 동구 공산국가)를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을 말하는데, 이는 주로 서구적 개념규정이다.

소련도 이와 비슷하게 분류하면서 제1세계를 미국·영국·프랑스·서독·일본 등 선진 자본주의 국가로 하고 제2세계를 소·중국·동구 등 사회주의 블록으로 하며, 나머지 아시아·아프리카·라틴 아메리카를 제3세계로 보았다. 중국은 서구 및 소련과는 달리 제3세계를 '세계 혁명의 폭풍의 주요지대', '반제투쟁의 주요세력'이라 규정하며 제1세계에 미·소의 두 초대강국을 넣고, 제2세계엔 서구 자본주의 국가와 일본 및 동구국가를 포함시키고, 제3세계에는 아시아·아프리카·라틴 아메리카에 중국까지 넣어 구분하고 있다. 중국의 이같은 구분태도는 중국이 제3세계의 후원자임을 자처하면서 이 지역에 대한 미·소의 진출과 영향력을 봉쇄하려는 저의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다. 소련의 경우, 스탈린 시대엔 이 제3세계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는데 소련으로서는 오직 공산주의 진영과 비공산주의 진영의 두 진영이 있을뿐, 제3의 존재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후 흐루시초프시대의 소련은 평화공존론(平和共存論)에 입각하여 제3세계가 불가피하게 사회주의 진영에 가담하리라고 낙관적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계획은 인도네시아의 1965년 9·30사건을 계기로 허물어지고 말았다. 비자본주의적 발전단계에서 사회주의적 발전으로 직결되지 않는다는 것이 이 사건으로 증명되었으며, 소련은 이런 현실적 실패 위에서 다시 '사회주의 오리엔테이션 제국가론(諸國家論)'이라는 것을 내세웠다. 그 후 브레즈네프 정권이 들어서자 소련은 기존 정권과의 유대를 강화하는 한편, 그간 소홀히 했던 민족해방운동도 적극 지원하는 정책을 취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기존 정권은 소련, 민족해방투쟁은 중국이라는 종래의 패턴과 한계가 그만 뒤얽히게 되었고, 제3세계에 대한 중·소의 헤게모니 쟁탈전은 더욱 치열화했다.

한편 미국은 델레스식 사고에 따라 "중립은 부도덕하다"는 관점에서 제3세계를 경원했다. 그러다가 정책을 전환하여 친서방적 경향의 신생국가들이 중립주의를 표방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 이 지역에 적극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소련이 제3세계를 제편으로 끌어들이는 한편 중국을 배제하기 위해 민족주의 국가론, 사회주의 오리엔테이션 제국가론, 아시아 집단안보구상을 들고나온 것에 맞서, 중국도 중간지대론(中間地帶論), 신(新)중간지대론, 신 제3세계론을 내세웠다. 중국은 처음 중간지대론을 주장했는데, 이는 중·소를 비롯한 이른바 사회주의 진영을 하나의 극(極)으로 하고 이와 대립되는 한 극에 이른바 제국주의가 있고, 그 중간에 제1(개발도상국)과 제2(선진국)그룹이 존재한다고 규정한 이론이다.

그후 미제국주의와 소련사회제국주의(社會帝國主義)를 중국의 2대 적으로 보고, 다시 소련을 제1공적(公敵)으로 규정하면서 종래의 중간지대론을 수정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 중간지대론은 중·소는 같은 진영으로 하였고, 중·소와 미국 양진영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국가를 중간지대로 불렀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중간지대론에서는 종전의 중·소를 비롯한 사회주의 진영이 아니라 미국과 소련의 두 초대국을 한 극으로 하고 이에 대립하는 한 극에 중국 및 약간의 '사회주의 국가(알바니아 등)'를 대치시키고 그 중간에 중간지대가 존재한다고 했다. 그러다가 새로운 제3세계론을 제기했다. 1974년 5월 유엔자원특별총회(資源特別總會)에서 등소평은 "현재의 세계는 사실상 상호관련되면서도 모순되고 있는 3개의 방면, 3개의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 미국과 소련이 제1세계이고, 아시아·아프리카·라틴 아메리카, 기타 지역의 발전 도상국이 제3세계이며, 이 양자의 사이에 있는 선진국이 제2세계이다"라고 선언했다. 중국의 이 이론은 "전후의 어떤 시기에 존재하였던 사회주의진영은 사회제국주의(소련)의 출현으로 이미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는 전제에 입각하여 종전의 소위 제국주의 대 사회주의라는 2진영론 이론을 청산한 후 제3세계의 역량을 높이 평가했다. 그리고 스스로 '사회주의 개발도상국'으로 부르면서 제3세계의 지도권을 장악하려는 의도를 명백히 했다.

그런데 친중국적 입장을 취해 왔던 알바니아는 중국의 제3세계론을 '몰계급적·몰자본주의적 분석'이라고 비난했다. 중국식 구분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구별을 혼란시키고, 대중투쟁의 방향을 빗나가게 하여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정신에 찬물을 끼얹는다'는 것이다.

제3세계의 개념규정이 이처럼 엇갈리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오늘날 제3세계는 하나의 공동 이데올로기를 갖는 행동주체로서 규정하기 어려울 만큼 내부사정이 복잡 미묘하며, 통합 요인과 대립·분열 요인이 혼재해 있다.

역사적 배경과 발전과정[편집]

歷史的背景-發展過程

제3세계란 제2차대전후 제국주의의 식민지 내지 반식민지(半植民地)적 지배에서 해방된 아시아·아프리카·라틴 아메리카 3대륙의 신생국 그룹을 말한다. 따라서 제3세계에 속하는 국가들의 공통분모는 그들의 다양한 이해관계와 정책노선에도 불구하고 주로 민족해방운동을 통한 정치적 독립과 신식민지주의 예속에서 벗어나기 위한 경제적 발전을 추구한다. 이를 위해서 무엇보다도 비동맹·중립주의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여기에 제3세계의 국제적 특성이 있다.

이처럼 제3세계에 속하는 국가들이 비동맹·중립주의 노선을 취하게된 이유는 오랜 식민지 지배의 굴레에서 해방된 신생국가들이 세계사적 전후의 국제상황 전개에 주체적·능동적으로 참여하면서 긴 세월 동안 소외되고 희생되었던 역사적 과거에 대한 민족적 각성의 발로요, 이의 행동화를 천명한 정책설정이었다.

이같은 역사적 배경을 가진 비동맹·중립주의의 생성과 발전단계를 살필 경우, 이의 효시를 인도의 '네루외교(外交)'에서 찾게 된다. 초기 네루외교의 특징은 양대 강국의 이데올로기 분쟁에서 초연한 입장을 취하는데 있었다. 네루외교의 철학은 "어떠한 진영에도 가담하지 않는 것이 외교적 분규를 벗어나는 길이며, 남의 싸움에 개입치 않으며 국제적 분규에 개입하는 것이 적으면 적을수록 좋다"라는 것이었다. 네루의 '블록불가담(Non-Alignment with Blocks'원칙은 그후 1954년 4월 중국 저우언라이(周恩來)와의 회담에서 합의된 평화5원칙의 확립에 의해 보다 적극적인 차원으로 발전되었다. 이 평화 5원칙은 1955년 4월에 열린 반둥회의의 기본원칙으로 되었고, 반제·반식민·평화공존·아시아·아프리카 연대를 기조로 하는 반둥정신을 확립시켰다.

반둥회의를 계기로 비동맹주의는 아시아에서 아랍·아프리카권으로 확대되었고 다시 라틴 아메리카로 확산되었는데, 이 원칙과 정책은 비동맹제국 수뇌회의라는 기구를 통해 전개되었다.

아시아-아프리카회의[편집]

Afro­Asian Conference

1955년 4월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아시아·아프리카 지역에서 신생독립한 29개국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아시아·아프리카 지역의 신생독립국가들간의 긴밀한 협력도모와 냉전상황하에서 독자적인 중립화 구축, 식민주의의 종식촉진을 목적으로 개최되었다. 즉 과거 수세기에 걸친 서구열강의 아시아·아프리카 지역의 식민지배에 대한 최초의 연대적 저항이며 궁극적으로는 식민지배체제의 종식과 민족해방투쟁 지원 및 신흥국가의 연대를 도모하고 있었다. 그 대상은 미국·유럽국가들과 소련이었는데 1954년 6월 저우언라이(周恩來)-네루간 회담에서 평화5원칙을 발표, 아시아·아프리카 신흥국가들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시작한 중국은 이 회의에서 주도적 위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회의 결과 국제 연합헌장의 정신과 평화5원칙을 결합시킨 '10개항의 선언문(平和十原則)'을 채택하였고 무역·문화·협력에 관한 협정들이 체결되었다. 중국의 독자영역 구축과 제3세계의 대두라는 정치적 의미와 함께 반둥 정신으로 일컬어지는 평화10원칙은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에 파급돼 비동맹·중립주의 운동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평화10원칙[편집]

平和十原則

반둥회의에서 채택된 '국제평화와 촉진에 관한 공동선언문'에서 제시된 10개항의 원칙으로 ① 기본적 인권과 국제연합헌장의 목적·원칙의 존중, ② 주권과 영토보전의 존중, ③ 인종 및 대소 국가의 평등, ④ 내정불간섭, ⑤ 국제연합헌장에 입각한 개별적·집단적 자위권의 존중 ⑥ 대국 중심의 집단적 군사동맹에의 참가지부, ⑦ 상호불가침, ⑧ 평화적 수단·방법에 의한 분쟁의 해결, ⑨ 상호이익과 협력의 촉진, ⑩ 정의와 국제의무의 존중이 그 내용이다. 이것은 1950년대 말 이후부터 잇달아 독립한 아시아·아프리카 지역의 신흥국가들에 의해서 외교기조로 채택되었고 제3세계 비동맹·중립주의 운동의 지도원리로 굳어졌다.

평화5원칙[편집]

平和五原則

1954년 6월 저우언라이-네루간의 회담결과 채택된 공동성명에서 양국의 우호적인 국가관계 기조로서 확인된 5개항의 원칙이다. ① 영토·주권의 상호존중, ② 상호불가침, ③ 내정불간섭, ④ 평등과 호혜의 원칙, ⑤ 평화적 공존이 그 내용이며 티베트 문제의 협상과정에서 도출된 이 원칙은 외견상 냉전체제와 식민주의 종식 및 그로 인한 분쟁의 해소라는 새로운 국제관계 원칙의 도출이나 중국의 독자영역 구축기도가 내재되어 있었다. 주로 미국·서구권을 겨냥한 이 원칙은 평화10원칙의 기초가 되었다.

비동맹회의[편집]

非同盟會議

Conference of Non­Aligned Nations

1950년대 동서냉전체제를 기초로 한 군사동맹에의 불참가 및 중립주의를 기치로 평화공존과 국제 긴장완화를 모색하는 비동맹주의 운동에서 발단되었다. 주로 제2차 세계대전 후 서구열강의 식민·반식민 상태에서 독립한 신생국가들과 소련의 지배권에서 이탈한 중국·유고슬라비아 등 사회주의권 독자노선 국가들이 주축이며 경제적으로는 저위의 상태에 있는 개발도상국가·저개발국가들의 권익을 대변하는 압력단체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1961년 6월 네루·티토·수카르노·나세르 4인이 카이로에서 준비회의를 개최한 후 동년 9월 베오그라드에서 25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제1차 정상회의를 개최함으로써 정식발족된 비동맹회의는 3년마다 개최되는 정상회의(최고기관), 정상회의의 간극이나 국제연합 총회를 전후하여 개최되는 외무장관회의, 조정사무국 회의를 상설기관으로 설치하고 있고, 그 아래 국제연합 상주대표회의·비동맹 경제사회개발 연대기금·비동맹국가 통신사 등 부설기관을 두고 있다. 국제연합 상주대표부는 36개국으로 구성되는데 아프리카17.5, 아시아 12, 라틴아메리카 5, 유럽 1.5의 지분형태로 지역적 안분이 고려되어 있다(0.5는 반임기제).

1970년대 이후에 민족주의·반식민주의·반제국(패권)주의·반강대국주의의 입장을 강화시켜 국제연합을 중심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했는데, 문제는 비동맹그룹이 반미·반서방적인 성향이 짙고, 1980년대 이후 급진·강경 세력이 헤게모니를 획득함으로써 양측간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국제연합의 4분의 3을 점하고 있는 이 그룹은 총회 표결에서 절대다수로서 해양법회의나 인구회의 등 각종의 국제회의와 경제관련안 심의에서 그 위력을 십분 발휘했다. 미국이나 서방측으로서는 경제력이나 국제기구 기여도가 미미하기 이를 데 없는 비동맹그룹이 수적 우위를 내세워 번번히 반대 입장을 취하고 있음이 지극히 불쾌하였다. 더욱이 비동맹그룹은 물론이고 그와 동일한 성격의 OAU·OIC·아랍연맹 등도 연대적인 입장을 취함으로써 그 우려는 일층 심각해지고 있다.

그러나 비동맹회의 역시 내부적인 갈등을 겪고 있는데, 그것은 온건실용주의 노선과 이데올로기적 투쟁을 내세우고 있는 급진강경의 좌파노선간의 대립과 헤게모니 쟁탈전이다. 출범 초기부터 비동맹국가들의 지상과제는 경제개발과 자립이었는데, 그것은 미국·서방국가의 원조와 투자를 필요로 했다. 중소분쟁 이후 중국이 비동맹운동의 후원자임을 자처했고, 소련도 대서방전략의 일환으로서 접근을 시도하고 나왔으나 이들의 경제적인 원조·투자를 충족시켜 주지는 못했다. 결국 1980년대 중반 이후 얄타체제가 해체되어 군사적 긴장이 완화된 신질서수립 움직임이 고조되자 인권·환경·남북문제·국제교역 등 현안으로의 노선전환이 시도되고 있다.

그러나 1980년대까지의 국지 분쟁사태가 대부분 회원국간의 무력행사나 내부적 권력투쟁이었음은 분열적 요소가 상존하고 있음을 실증하는 것이다. 더욱이 급진파 내부의 친소반중노선과 친중반소노선간의 갈등 또한 심각하다. 1989년 9월 현재 100개국이 참가하고 있는데 PLO·SWAPO도 정회원이며 참관인 자격으로 10개국이 참석하고 있다.

비동맹운동의 전망[편집]

非同盟運動-展望

제3세계의 비동맹운동은 1955년 반둥회의에서 태동하여 40년 동안 지속되어 왔다. 비동맹운동은 냉전의 산물이며 세계정치게임에 있어서 제3세계 국가들에게 도덕적인 외교정책 이데올로기를 제공하였다. 그것이 비록 그들에게 자신의 국내문제에 있어서 원하지 않는 간섭에 노출시키기도 했지만, 강대국에게 대항하는 수단을 제공해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간의 국제상황은 비동맹운동 초창기와는 크게 달라졌고 비동맹운동 자체에도 많은 변질을 가져 왔다.

스페니어(John Spanier)는 "비동맹주의정책은 힘의 동일한 분배가 이루어졌을 때에만 가능하다"고 보고 "① 강대국간의 갈등이 없어지고 화해를 하게 된다거나 ② 어느 한 초강대국이 국제무대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거나 ③ 2개 이상의 강대국이 존재하면서 힘없는 비동맹국의 지지보다는 동료국가의 지지획득에 더욱 노력한다면 비동맹은 생존이 불가능하다"고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논리에서 본다면 정치안보적 의미에서 비동맹은 세력의 양극화에서만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비동맹운동은 ① 세계적인 대규모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때 ② 비동맹국가들의 연대의식이 강렬할 때에는 현실적으로 성공할 수 있으나,

비동맹국의 국내사정이 안정되고 자국의 독립과 영토보전을 방어할 수 있는 국력을 갖추고 국가안보상 위험이 없을 때에는 현실적으로 비동맹운동에의 참여가 부정적으로 나타난다.

이상과 같은 비동맹운동의 일반적 가능조건이 국제정치 현실에서는 어떻게 작용해 왔으며 앞으로는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를 몇 가지 측면에서 구체적으로 검토해 본다.

첫째, 비동맹운동의 독자·중립노선문제이다. 이것은 현재까지는 선언적 의미에서는 계속 지켜지고 있다. 그러나 1970년대에 좌경화 변질을 겪었고 앞으로도 변질의 요인은 많다. 초기 비동맹운동은 반식민, 반제, 경제적 자립에의 열망 등을 공동분모로 하여 결속하였는데 비동맹권이 양적으로 팽창함에 따라 친소·친중국·친서방 등 제분파 현상을 보이면서 자국의 이익에 따라 어느 일방에 치우친 적이 있다.

1970년대 후반에는 소련이나 소련의 추종국(예:쿠바, 베트남)의 위협을 느끼고 있는 비동맹국들은 비록 이전에는 적대국이었던 미국이나 전식민지국과의 관계개선도 고려한 바 있다. 비동맹국은 서구에 대해 강·온건파로 갈라져 대립하는 가운데 독자·중립노선을 가까스로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이같은 분열과 대립에도 불구하고 비동맹의 이념에 역행하는 개별 국가의 이익에 편중된 소위 덜레스류의 부도덕한 비동맹정책은 지양될 것이다. 이같은 전망의 근거로서 1979년 아바나 정상회의에서 카스트로의 친소동맹화 정책에 제동을 건 티토의 독자·중립노선의 주장이 관철되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더욱이 현재는 소련 연방이 해체된 탈냉전의 국제환경일 뿐만 아니라 비동맹회의가 '만장일치에 의한 합의체(Unanimity)'가 아니라 '조정에 의한 합의체(Consensus)'적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존립에 치명적인 이념의 거부사태까지 발전하지는 않을 것이다.

둘째, 경제적 남북문제이다. 장래의 비동맹운동은 남북문제에 보다 큰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이것은 1970년대 이후 자원민족주의 혹은 신국제경제질서의 수립을 위해 이념보다는 실리를 추구하게 된 경향에서 나타났는데, 1980년대 중반 이후 냉전이 종식되고, 1990년대에 접어들어 UR에 의해 WTO(World Trade Organization) 체제가 등장하여 경제적 경쟁과 협력이 강화됨으로써 더욱 뚜렷해졌으며, 남북문제의 해결이야말로 저개발 혹은 개발도상국이 대부분인 비동맹권의 변함없는 공통분모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비동맹운동이 냉전과는 독립적으로 제3세계의 정치적 동질성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전의 문제를 세계화하는 데는 강대국들에 의존하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경제발전문제에 관심을 증대시키게 된 배경은 비동맹세력이 제3자로서 국제무대에서 줄 수 있는 영향력에는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비동맹국은 현실적으로 독자노선을 지킬 수 없는 정치적·경제적·군사적 고민이 있을 뿐 아니라, 아직도 국제기구로서 단결되지 못한 매우 유약한 조직체로서 강대국에 영향력을 행사하기란 역부족이다. 따라서 비동맹국은 국제정치환경이 아직도 제3자의 위치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강대국의 압력 앞에 자주성을 확보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경제적 독립을 향한 자원민족주의와 경제발전을 서두르는 근대화 작업을 차선의 방법으로 택하고 있다고 하겠다. 국제평화아카데미 의장인 오투뉴는 탈냉전과 더불어 제기되고 있는 남북문제의 새로운 이슈로서 환경· 건강·테러리즘·마약·난민·이민문제 등을 지적하고, 이러한 것들이 남북간의 새로운 양식(modality)의 기초를 형성할 것이라고 보았다.

셋째, 비동맹세력의 영향력문제이다. 비동맹세력은 양극구조의 붕괴로 인하여 위상이 크게 약화되었으나 비록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국제정치·경제관계에서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국제분쟁과 같은 실질적 문제에 관해서는 강대국의 영향력 및 자국과의 이해관계로 인해 행동통일을 보기는 어려울 것이며, 단지 UN과 같은 국제회의에서 반제, 반식민, 인종차별반대, 경제적 불리(不利)의 시정 등 각종 선언으로써 그들의 주장을 표시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수의 정치'와 '자원의 힘'으로 그들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다.

넷째, 강대국과의 관계이다. 중국은 오래 전부터 소위 '중간지대론'에 입각하여 중국 스스로가 제3세계에 속한다고 선언하면서 이들과의 연대성을 강조해 왔다.

구(舊) 소련은 제3세계의 민족해방투쟁을 정의의 싸움으로 간주하고 지원하기 시작한 흐루시초프 시대 이후 공산권에서 중국과 대립하면서 동조세력 확대에 힘써 왔다. 1979년 회의에서도 소련-베트남-쿠바로 연결되는 그룹과 중국-유고로 이어지는 그룹의 대립이 격돌한 바 있다. 미국은 그간 비동맹국에 대해 냉대 혹은 이들의 반미선언에 강경대처로 계속해 왔으나 1980년대에 들어와 개별국가와의 쌍무적 관계를 통해 제3세계정책을 강화하여 왔다.

그런데 1980년대 중반 이후 일어난 전반적인 탈냉전의 전개로 인하여 비동맹권을 대상으로 한 경쟁과 대립이 약화, 해소되어 가고 있다. 특히 구 소련의 붕괴와 동구지역국가들의 민주화, 시장경제체제로의 전환에 따른 동서진영의 붕괴 등으로 비동맹운동에의 존재의의가 매우 심각한 단계에 이르렀다. 특히 비동맹운동 가맹국들의 국내적인 많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제의 분출로 말미암아 국제적 결속은 초기와는 비교가 되지 않으며, 또한 국제사회에서 갖는 비동맹의 한계성 때문에 국제현안논의는 일과성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아직도 합의체 결성이후 지속적으로 비동맹운동 각료회의와 정상회담이 개최되고 있으며, 특히 최근 국제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핵문제(NPT 연장문제 등), 인종학살, 기아문제, 남북반구발전문제와 UN안보리 개편문제 등 국제현안들이 그곳에서 폭넓게 논의되고 있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여러 가지 요인과 연계되어 국제사회의 앞으로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생각된다.

장래 비동맹운동의 사활(死活)은 비동맹국들이 서로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여러 분파현상과 강대국의 영향력을 최소화시키면서 비동맹국 공동의 이익과 목표를 어떻게 추구해 나갈 것이냐에 달려 있다고 하겠다.

제3세계의 고민과 딜레마[편집]

第三世界-苦憫-Dilemma

비동맹그룹이 확대강화됨에 따라 내부적인 대립과 갈등, 블록화 경향이 날로 심화되어 가고 있는 데 제3세계가 당면하고 있는 가장 큰 어려움이 있다. '싸우는 비동맹그룹'의 기수로 자처해 왔던 좌경강경파에 대립하는 온건보수파의 등장이 바로 그것이다. 강경파는 주로 반미(反美)·반서방과 친소(親蘇)나 친중국노선을 취해 왔던 것인데, 온건파는 이와 반대로 친미·친서방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같은 강경·온건노선의 대립은 사회주의국가와 비공산국가 간의 모순, 아랍과 아프리카, 아시아 같은 지역적인 차이, 종교적인 분규 등 이질적인 착잡한 요소로 인해 반목과 분열을 한층 심화시키고 있다.

역내(域內) 국가들의 노선과 정치체제상의 차이, 이상의 심각한 문제는 자원국(資源國)과 비자원국간의 빈부의 격차이다. 산유국과 비산유국 간의 갈등은 심각하기 그지 없다. 비산유국들은 "이제 우리는 과거 선진국으로부터 당하던 수탈을 산유국으로부터 당하고 있다"는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이같은 제3세계내의 빈부의 격차 때문에 제3세계 내부에서는 '제4세계(Fourth world)'가 등장하고 있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그것은 프랑스혁명 때 등장한 제3신분 혹은 제3계급(시민계급)으로부터 제4계급인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대두하게 되었다는 것과 같은 인식에 입각하고 있다. 실제로 국제연합 통계연감에 의하여 아프리카·아시아 지역의 인구 중 다수가 절대빈곤 계층으로 기아와 질병에 신음하고 있으며 후진성을 탈피 못하고 있다는 조사보고가 나와 있다.

제3세계가 당면하고 있는 또하나의 난점은 리더십의 부재로 인한 구심력의 결여로서 이로 말미암아 본래의 목적을 탈피한 국가이익 추구경향과 소그룹화, 분열화 현상이 점차 증가하고 있다.

제3세계는 이같은 내부적 고민말고도 세찬 외부적 도전을 받고 있다. 강대국들은 비동맹의 정치 세력화에 경계 이상의 대응태세를 취하고 있다. 제3세계의 대두와 비동맹 그룹으로 인해 가장 큰 불이익을 경험한 것은 미국이다. 이 때문에 미국은 '수에만 의존하는 제3세계의 횡포'에 대해 심한 불평을 토로해 온 끝에 반격에 나서고 있다. 미국은 '불만의 정치(Politics of resentment)'를 강력히 추구하는 비동맹그룹에 대해서 식량의 자급(自給), 정부의 민주화를 요구하고 나섰다. 세계의 경제적 생산능력의 측면에서 볼 때 하잘 없는 부분밖에 점하지 못하는 비동맹 그룹이 자립의 노력을 게을리하고 국내의 빈부의 격차나 부패를 시정하지 못할 뿐더러 유엔예산의 분담금(分擔金)이나 IMF 출자부담도 적은 주제에 단순한 숫적 우세만 믿고 강한 발언만 한다는 것이다.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가들의 이와 같은 반발 이상으로 비동맹그룹에 시련을 안겨주고 있는 것은 중·소간의 경쟁적인 침투공작과 영향력 추구이다. 중·소는 제3세계 전략에 광분상태이다. 중·소간의 치열한 지원과 공작은 앙골라 내전, 에티오피아와 소말리아 분쟁 등에 깊숙이 개입되었을 뿐 아니라 날카로운 대립을 드러내었다. 이데올로기의 순결성을 포기한 채 국가이익을 앞세워 소련·쿠바가 어느 한 쪽을 지원하면 중국은 그 반대세력을 지지하며 때로는 미국과 공동전선을 펴는 사태까지 야기시키기도 했다. 강대국들의 이러한 개입과 원조는 불가피하게 비동맹그룹내의 대립과 분열에 박차를 가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77그룹[편집]

Group of 77

1964년 3월 제네바에서 개최된 제1차 국제연합무역개발회의(UNCTAD)는 제3세계 국가들이 경제개발과 자립화라는 지상과제와 자본주의의 불균등 모순에서 촉발된 남북문제의 해결·시정을 목적으로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 대한 연대적 노력의 결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국제연합 경제총회로 지칭되는 UNCTAD 제1차 총회에서 제3세계권에 속하는 개발도상국 77개국이 선진국과의 협상에 있어서 의견통일과 공동대처를 도모할 목적으로 공동선언을 채택함으로써 출범, 77그룹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조직과 형식을 갖춘 특정기구는 아니지만 UNCTAD는 물론 국제연합·경제관련 기구나 회의에서 개발도상국가들의 권익을 대변하고 있다. 비동맹회의가 제3세계 비동맹운동의 정치적 중추라고 한다면 77그룹은 그와 동일한 성격의 경제적 협력체라고 볼 수 있다. UNCTAD나 GATT 등 국제회의에 대비해 개최되는 각료급 회의가 유일한 조직 형식이지만 대선진국 협상에서의 연대성은 매우 강하다. 주로 개발도상국간의 협력촉진, 남북문제 시정, 관세장벽 철폐, 선진국의 원조·투자견인 등을 목표로 하여 지속적인 대선진국 협상을 벌여 부분적이나마 성과를 거두었다. 1993년 현재 147개국·지역(세계 각국의 약 80%)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최근에는 폴란드·루마니아·중앙아시아제국 등 러시아 및 동유럽 국가들도 가입해 있다.

제3세계와 남북한관계[편집]

第三世界-南北韓關係

역사적 과정이나 경제발전 단계로 볼 때 남·북한은 공히 제3세계권에 속한다. 북한은 중·소의 틀 안에서 안주해오다가 중소분쟁 이후부터 제3세계에 대한 외교적 접근을 강화하기 시작하여 1975년 8월 페루 리마에서 개최된 제5차 비동맹회의에서 정식으로 가입하였다. 그러나 북한은 비동맹운동보다는 김일성 개인에 대한 선전과 대남견제에 치중하였고 비동맹회의 내부의 친소노선과 친중노선의 논쟁에 말려들어 한때 난관에 봉착했었다. 이후 비동맹국가들에 대한 대대적인 초청·방문외교를 전개하고 경제·문화 부문의 친선협조관계를 강화하는 한편 쿠바·리비아와 함께 아프리카 지역의 분쟁사태에 깊숙히 개입, 지반을 확대하기 시작했는데 그 제1과제가 한반도 문제에 있어서의 대남 우위확보와 지지확보였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한국도 과거 친미·친서방노선을 견지하여 그에 안주함으로써 자체적으로 비동맹 외교의 필요성에 대해 절실한 느낌을 갖지 못했다. 설령 인정했더라도 비교국익상 전통적 우방관계유지라는 한계에 부닥쳤을 것이며 한국의 정치외교적 상황에서 볼 때도 비동맹권이 거부하였을 것이다. 한국이 비동맹 외교를 추진하기 시작한 때는 1970년대 중반 이후로 국제기구에서의 수적 우세와 자원민족주의를 기초로 한 비동맹권의 영향력을 인식하였기 때문이었는데 사실상 형식적이고 상징적인 의미에 머물렀을 뿐만 아니라 1988년의 '7·7선언' 이전에는 대북견제에 주력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