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정치/국 제 정 치/현대의 국제정치/국제정치와 테러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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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리즘의 정의[편집]

terrorism-定義

테러리즘은 오늘날의 특별한 현상이 아니다. 테러 또는 테러리즘으로 불리는 폭력은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하면서 시작하였다.

테러리즘을 정의하기는 어려운 문제이다. 이는 테러리즘을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른 견해를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편에서는 테러리스트가 되지만 그 반대편에서는 '자유투사'라는 영웅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테러리즘을 정의 내린 학자들마저도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테러리즘은 일반 사회범죄와는 다른 이데올로기적·정칙적 성향이 있기 때문에 사건이 발생하였을 때 구별하기는 용이하다. 단지 학문적으로 단순한 정의를 내리기는 다변화되는 사회와 국제사회의 변화로 거의 불가능하다.

테러리즘은 이데올로기와 정치적 목적을 위하여 도덕성이 결여된 폭력수단으로 위협과 반응이라는 상호작용 상황에서 여론과 관심을 모으려는 행위이다. 테러리즘은 국가가 아닌 사회를 공격목표로 하고 있어 여론과 사회에 호소한다는 긍정적 목적에도 불구하고 사회를 공격 목표로 하고 있는 모순성을 보이고 있다. 이에 따라 테러목표가 사회이기 때문에 선량한 시민이 테러의 공격목표로 희생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테러리즘이 정치행위이냐 범죄행위이냐는 끊임없는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또한 정부측의 테러진압도 정치적 방어라고 하기에는 시민의 희생이 너무 크다. 1974년 5월 3명의 PFLP(팔레스타인 인민해방전선) 소속 테러리스트들이 이스라엘의 한 초등학교를 습격하여 100명의 어린학생들을 인질로 삼았을 때 이스라엘 특공대의 테러 진압공격으로 22명의 어린이가 희생되었다. 이와 같이 테러리즘은 상징적인 희생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테러리즘의 3요소는 폭력원·청중·희생이며 청중은 언론과 방송에 의하여 조성된다. 테러리즘의 부산물은 공포이며 최종목표는 '강제'이다. 테러리즘의 신비주의적이고, 영웅주의적인 요소는 이데올로기 또는 정치적인 목적에서 미화되며 이와 같은 국민적 동정심 때문에 테러리스트 자원이 사회로부터 보충되고 있다. 그러나 테러리즘이 정치적 의미를 가졌다고는 하지만 무질서한 폭력의 한 파괴행위임에도 틀림없다.

1968년 안드레아스 바더(Andreas Baader;바더-마인호프조직의 창설자 중 한 사람)의 프랑크푸르트 백화점 방화사건은 소비주의 산업의 상징성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다. 1972년 뮌헨올림픽 사건은 이스라엘 선수의 상징성 때문이며 독일의 적군파 (RAF)가 서구 자본주의 상징으로 기업가 한스 마르틴 쉴라이어(Hans Martin Schleyer)를 납치 살해한 사건(1977년), 이탈리아의 붉은여단(BR) 게릴라들이 NATO 장성인 미육군 준장 제임스 도치어(James Dozier) 납치사건(1981년), 교황 요한 바오로 Ⅱ세 암살 미수사건(1981년), 사다트 이집트대통령 암살사건(1981년), 대처 영국 수상에 대한 IRA의 폭탄테러 미수사건(1984년) 등은 모두 이데올로기 또는 정치적 상징성 때문에 일어난 사건들이다.

베이루트의 TWA 847기사건(1985년 6월), 로마와 빈 공항 참사사건(1985년 12월) 등도 상징성을 공격목표로 한 잔인한 정치 테러리즘의 한 예이다. 테러리즘이 상징성과 공개성이 강한 공격목표물에 대한 테러행위로 이어졌을 때는 범죄적인 성격보다는 그 잔인성에 비례하여 정치적 성격이 크게 부상하고 있다. 이는 심리적인 공포와 위협에 노출된 여론을 의식한 정부와 사회가 강제되고 있는 현상을 의미한다. 이것이 테러리즘의 강점이 되고 있으며 정치적 호소력과 힘을 갖게 되는 것이다.

테러리즘이 미래사회의 새로운 범죄형태로 발전하는 이유는 과학문명의 발달로 일어나는 인간성 상실과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사회불안과 좌절감에 대한 충격효과 때문이라는 일반적 설명과는 다르게 오늘날의 테러리즘은 인종적, 종교적, 이데올로기적인 성향을 가진 소수민족의 분리주의운동으로 발전하고 있다. 국제테러리즘이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테러조직은 PLO의 테러조직이며 지역마다 독립과 해방을 원하는 소수민족들이 테러리즘을 이용하여 민족문제를 국제이슈화 하려는 경향이 있다. 물론 테러리즘은 중동지역에 국한된 문제는 절대 아니다. 그래서 본 장에서는 중동 이외의 지역에서 발생한 테러리즘 문제도 포함하고 있다. 우리의 논의는 주로 중동지역의 정치적 질서와 성격 규명에 목적이 있다. 하지만 테러리즘에 대한 이해는 보다 광범위한 차원에서 접근함으로써 만이 적절히 설명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였다.

국제테러리즘 환경[편집]

國際 terrorism 環境

과거의 테러리즘은 한정된 영토 안에서 일어났으나 1960년대에 와서는 세계의 모든 지역이 지진대에 노출된 것처럼 테러리즘에 노출되었다. 이와 같은 국제테러리즘 환경의 발달은 1967년 아랍-이스라엘간의 제2차 중동전쟁인 6월 전쟁 이후부터 나타나고 있다. 6월 전쟁에서 아랍국가들이 패전하면서 나세르의 지도력과 아랍민족주의라는 팔레스타인 민족의 희망이 사라진 것이다. 팔레스타인 민족의 좌절은 민족 문제를 스스로 국제정치 문제화 하겠다는 의지로서 전세계에 있는 미국과 이스라엘의 주권과 재산이 테러 공격목표가 되었다. 팔레스타인의 테러리즘은 항공기 납치가 주요 전술이었다.

국제테러리즘 환경을 더욱 가열시킨 요소로는 1968년 북아일랜드 임시공화군(IRA)의 결성과 같은 해 서독에서의 학생폭동(1968년 4월 2일 프랑크푸르트의 한 백화점 방화사건)으로 시작되어 결성된 바더-마인호프조직인 적군파(RAF)의 활동으로 PLO의 테러활동과 함께 전세계를 테러리즘의 공포로 몰아 넣었다. 이밖에도 1962년 쿠바 봉쇄사건으로 인한 소련의 공산주의 정책 강화는 공산주의 이념을 테러리스트들에게 재무장시키는 가운데 테러리즘 환경을 조성하였다. 1970년대와 1980년대의 국제테러리즘 환경은 테러리즘이 소수민족운동의 정치적 수단으로 강력한 설득력을 갖고 있었다. 적어도 테러리스트들은 그들의 행동을 로빈 훗이나 윌리엄 텔과 같은 영웅적인 행동으로 생각하였다. 더욱이 1972년 전후하여 테러조직들은 초국가적인 제휴를 하면서 훈련·무기공급·자금지원·피신처 제공 등의 협력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1970년 요르단을 중심으로 PFLP는 4대의 항공기를 거의 동시에 피랍, 그 중 3대는 요르단의 도슨(Dawson) 공군기지에서 폭파(1970년 9월 3일)시켰으며 1대는 이미 카이로 공항에서 폭발되었다. PFLP와 일본적군은 연계체계를 가지고 있다. 1972년 5월 30일 일본적군이 로드공항에서 수류탄과 기관총을 난사하여 28명을 살해하고 78명을 부상시키는 대량살상테러를 자행하였다. 1972년 9월 5일 '검은 구월단(Black September)' 조직에 의하여 일어난 뮌헨올림픽 선수촌 테러사건으로 로드공항 참사와 함께 전세계를 테러리즘 공포환경으로 만들었다. 1973년 7월 20일 싱가포르의 쉘 석유저장고 습격사건, 1975년 12월 21일 빈의 OPEC석유상 각료회의 점거사건 등은 PFLP 및 일본 적군파와 서독의 바더-마인호프(적군파) 조직과의 협력으로 만든 테러작품이다.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무자헤딘 등 무술림 반군의 게릴라 활동과 테러공격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새로운 지역테러환경을 조성하였으며 정치이슈화 되어 가고 있었다. 이는 베이루트에서 지하드(성전), 헤즈볼라(신의 당) 등의 테러조직들의 활동을 강화시켰다. 지하드와 헤즈볼라조직에 의하여 자행된 베이루트의 차량폭파 테러공격이나 외국인 인질사건은 국제테러리즘이다. 1960년부터는 자살특공대에 의한 차량 폭파테러 공격이 베이루트에서 새로운 전술로 소개되었다. 외국인 인질사건은 오늘날까지 국제정치의 핫이슈가 되고 있다. 이에 반하여 유럽의 테러전술은 폭파·납치·암살 등의 사회범죄적인 성격의 테러전술이었다.

국제테러리즘 환경은 국제정치 환경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미·소의 양극체제에서 소련과 쿠바 등 동구권은 독립을 원하는 대부분의 소수민족 또는 게릴라조직에게 훈련·재정지원·무기를 공급하여 왔다. 더욱이 무기 판매경쟁, 대중정보 매체의 발달, 유럽의 국경선 관리문제, 대량살상무기 개발 등은 국제테러리즘을 조장하는 요소가 되었다. 이에 이란·리비아·시리아·이라크·쿠바·나카라과·북한 등의 테러지원국가들이 있어서 테러조직 간에 테러활동을 합동으로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고 있다.

국제테러리즘을 일으키고 있는 조직으로는 아랍의 PLO조직들, 구서독의 적군과, 영국의 북아일랜드 공화군(IRA), 이탈리아의 붉은여단(BR), 에스파냐의 바스크(Basque) ETA, 인도의 시크교도, 스리랑카의 타밀족, 카나다의 퀘벡(Quebec) FLQ 등이 있다. 그 중에서 PFLP, 지하드, 헤즈볼라, IRA, 시크교도, 타밀족, 바스크 ETA, 퀘벡 FLQ, 쿠르드족, 에리트리안족, 폴리사리오 게릴라, 크로아티아, 아르베니아, 중앙아시아의 소수민족들, 발칸반도의 소수민족들, 도파르반군, 오가덴 분리주의자 등의 소수민족 저항운동인 테러리즘은 그 자체가 국제정치 문제이며 국제테러리즘 환경을 조성하는 행위자들이다. 이 밖에도 뉴레프트의 테러조직들과 무정부주의 또는 허무주의자들의 테러조직들이나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테러리즘이 관계하고 있다.

베이루트에서는 이란의 지원을 받은 시아파 테러리스트들이 1983년을 중심으로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과 미국 및 유럽정책에 대한 불만으로 차량 자살특공대에 의한 미해병대 막사 공격과 프랑스 군부대 공격 그리고 베이루트와 레바논 주재 미국 및 프랑스 대사관 공격으로 레바논을 국제테러리즘 온상으로 만들었다.

1985년 12월 영국성공회 특사인 테리 와이트(Terry Waite) 신부가 기독교 관계 일을 하다 피랍된 미국인 인질 2명의 석방교섭 노력을 하던 중 이슬람 지하드조직에 의하여 피랍되었다. 이란의 콘트라사건은 1979년 이란내 미대사관 직원 인질문제와 레바논의 미국인 인질문제로 일어난 정치사건이다. 또한 유고내전은 크로아티아 민족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유럽의 소수민족 저항운동 환경을 조성하였다. 즉 국제테러리즘 환경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발칸화하는 다원성을 보였던 것이다.

중동의 테러리즘 환경과 PLO[편집]

中東-terrorism環境-PLO

중동지역은 분쟁 다발지역으로 자연적으로 테러환경을 가지고 있다. 크게는 아랍과 이스라엘 분쟁이며 1948년 이전부터 시온주의와 아랍민족주의간의 갈등은 팔레스타인지방에서 서로 맞물린 테러리즘 환경을 만들어 왔다. 특히 영토를 빼앗기고 새로운 정치난민이 된 팔레스타인 국민들은 테러리즘 그 자체가 생존의 가치였다.

오스만 터키제국 밑에서 하나의 문화권이었던 아랍세계가 22개 국가로 분열되었으며 이들 아랍국가간의 지역분쟁은 정치망명 또는 피신처 및 테러지원으로 상대적으로 대립적 테러리즘 환경을 만들고 있다. 폴리사리오 게릴라 문제는 모로코와 모리타니아 및 알제리의 테러환경이며 시리아와 이라크의 경합은 이념정당인 바아쓰당의 경쟁으로 대립하고 있다. 더욱이 터키와 이라크 및 이란 지역에 광범위하게 거주하고 있는 산악유목민인 쿠르드족 문제는 걸프전쟁 이후 새로운 테러리즘 환경의 주역이 되고 있다. PLO문제는 정치적 중요성을 가진 국제정치적 이슈이며 국제테러리즘의 요소이다. 이슬람문화의 보호장치와 주권민족의 정통성을 가지고 있으며 1974년 이후 국제기구인 UN에서까지 정통성을 인정받은 PLO와 쿠르드족문제는 국제정치와 국제테러리즘 환경에서 가장 예민한 국제정치 변수이다.

1979년 이란의 호메이니 정권에 의해 등장한 이슬람 원리주의사상의 영향으로 전이슬람문화권이 심각한 사회안정의 도전을 받고 있다. 이집트의 무슬림 형제당(Muslim Brothers)을 중심으로 한 원리주의자들의 도전은 사다트대통령 테러사건(1981년)으로까지 발전하였다. 더욱이 시아파의 영향력을 강화시켜 이슬람 보수주의자들을 고무시키고 있다. 베이루트를 중심으로 시아파 무슬림 테러조직인 지하드, 헤즈볼라 등의 테러리즘은 이란의 정신적·물질적 지원에 의한 것이다. 베이루트는 지금까지도 전세계 테러리즘의 중심지가 되고 있다. 특히 자살특공대와 인질수법은 새로운 테러리즘 환경을 만들고 있다. 과거 PLO의 요인암살과 항공기 납치에서 폭탄테러와 인질이라는 새로운 테러전술을 소개한 것이다.

더욱이 공화제와 군주제, 급진주의 성향의 아랍국가들과 보수주의 세력의 아랍국가들간의 대립도 테러리즘 환경을 만들고 있다. 중동은 과거 소련과 쿠바 및 동구권의 지원을 받아 국제테러리즘을 지원하는 국가들이 밀집되어 있다. 이로써 PLO의 테러조직들은 전세계의 테러조직들과 유대관계를 갖게 되었다. 바더-마인호프조직도 요르단의 PLO 캠프에서 테러특수훈련을 받았었다. IRA는 리비아로부터 무기를 공급받아 왔었다. 남예멘(1990년 5월 22일 예멘통일)·리비아·베이루트·시리아·이라크·알제리 등은 테러지원국가였다.

국제테러리즘의 대명사인 PLO테러조직은 지원받은 아랍국가의 대외정책에 영향을 받고 있다. 이라크가 지원하는 PFLP조직과 시리아의 지원을 받는 사이가(Saiga) 조직은 반제국주의, 반시온주의에 의한 미국과 이스라엘에 대한 테러리즘 목적은 같지만 서로 대립적이다.

쿠르드족 문제는 터키·시리아·이라크·이란의 경쟁적인 정치변수로 지역테러리즘 환경을 만들고 있다. 또한 쿠르드족 문제는 테러리즘 환경이 언제든지 확대되어 국제테러리즘 환경으로 발전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그외 지역분쟁 환경에 의한 테러리즘 환경은 계속되고 있다. 마그레브지역, 아프리카 뿔의 지역, 오만, 레바논, 리비아, 레반트지역, 아프가니스탄, 중앙아시아 등의 분쟁환경이 중동테러리즘 환경으로 되어 있다. 중동은 식민지 유산, 석유, 이슬람과 기독교인 종교분쟁, 지역분쟁, 소수인종, 미·러 등 강대국의 정치적 각축 등이 분쟁과 테러리즘의 환경을 조성하였다.

소수민족의 테러리즘[편집]

小數民族-terrorism

국제정치 환경에서 테러리즘은 새로운 정치이슈 영역으로 자리잡으면서 이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있다. 유럽사회에서 나타나는 무정부주의자 또는 허무주의자들의 기존 질서파괴를 위한 맑스-레닌주의적 테러리즘보다는 PLO를 중심으로 전세계가 관심과 어느 정도 동정심을 보이는 소수민족의 저항으로 나타나는 해방과 독립투쟁 목적의 테러리즘 성향으로 변천하고 있다.

이와 같은 소수민족의 분리주의운동은 지역마다 존재하지만 중남미와 아시아의 소수민족분리주의 운동은 국지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국제정치와 같은 관계를 가지고 실질적으로 유럽안보와 세계평화에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소수민족의 테러조직으로는 중동의 PLO, 영국의 IRA, 터키의 소수민족, 아르메니안 민족주의, 인도의 시크교도, 에스파냐의 바스크 분리주의자 등의 소수민족 저항운동과 이들의 테러리즘이 주된 요인들이다.

1989년을 기점으로 폭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중앙아시아와 발칸반도의 인종분규도 새로운 국제테러리즘으로 발전하고 있다. 이데올로기 성향이 강한 민족주의적 테러리즘은 다른 소수민족의 테러리즘을 국제정치에서는 현상유지정책(Status Quo)으로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다.

북아일랜드의 테러리즘(IRA)[편집]

北Ireland terrorism

북아일랜드의 테러리즘은 영국과 아일랜드 관계에서 시작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아일랜드인들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여 통일하려는 노력을 테러리즘 전략과 게릴라 전략을 이용하고 있다. 영국과 북아일랜드의 통일을 목표로 하는 북아일랜드 공화군(TRA:The Irish Republican Army)은 영국 정치인, 기업인, 군인, 의사당, 우체국, 철도역 등 영국과 관계된 것이 공격목표이며 북아일랜드에 거주하는 카톨릭인들에게는 실업, 주택, 금융 등에서 차별정책으로 취하고 있다. 더욱이 프로테스탄트(신교)계 주민도 IRA 이념에 위배된다고 생각될 때는 공격목표가 된다.

1956-1962년 IRA의 테러공격은 영국의 심각한 정치문제가 되었다. 국경경찰, 세관원 등이 테러공격 목표로서 폭탄테러 수법을 사용하였다. 레바논의 자살특공대는 IRA 테러수법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1938-1939년 영국정부의 대IRA 작전으로 대부분의 IRA 분자를 체포하여 IRA 세력을 약화시켰지만 1969년 미국의 킹목사의 평화행진에 영향을 받아 북아일랜드 민권협회(NICRA:The Northern Ireland Civil Right Association:1967년 설립)가 민권운동으로 벨파스트에서 데리까지 평화대행진을 하였다. 이 행진은 프로테스탄트 자경대와 영국경찰의 제지를 받았으며 폭력에 의한 충돌로 끝났다. 이 사건으로 북아일랜드 지역은 다시 테러리즘의 내전상태가 되었으며 1972년 3월 영국은 이 지역을 직접 통치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영국의 북아일랜드 정책은 새로운 민족주의 감정을 고취시켜 IRA의 민족주의적 테러리즘은 계속되었다. IRA보다도 더 극렬한 테러조직은 사회주의 아일랜드 민족해방군(INLA)이며 IRA와 함께 민족해방운동으로 테러리즘을 이용하고 있다. 1973 년 서닝데일 회의(Suningdale Conferencd), 1985년 힐스베러프협약(Hillsverough Agreement) 등 영국과 아일랜드 정부간에 북아일랜드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있었지만 IRA(INLA 포함) 저항운동은 계속되고 있다.

1979년 3월 런던에서 보수당원 북아일랜드 대변인인 니브(Airey Neave) 암살사건, 1981년 벨파스트에서 신교 지도자인 멕덕(John McDeague) 살해 등의 사건들은 모두 INLA의 테러에 의한 것이었다. IRA는 1972년 공식적으로 휴전을 선언하였지만 급진주의자들에 의한 테러행위가 계속되었다. 1988년 네덜란드의 뢰몽드 (Roermond) 에서 발생한 방화사건과 뇌브 베르겐(Nieuw Bergen) 지역에서 폭발사고(5월) 등과 서독 뒤스부르크에서 9명이 부상한 폭발물 사고는 영국이 아닌 유럽에서 IRA가 테러활동을 한 예이다. 1984년 대처수상 암살미수 사건은 런던에서 개최되는 크고 작은 국제회의의 안보문제를 심각하게 만들었다. IRA는 폭탄테러 수법이 특징이다. 1974년 웨스트민스터 홀(Westminster Hall) 폭탄 폭발사고와 1982년 하이드 파크(Hyde Park)의 폭탄테러사건은 IRA가 영국사회를 대상으로 공격하겠다는 선전포고와 같은 것이다.

IRA는 아일랜드인들의 지원을 받는 국제테러조직으로 종교문제와 경제문제까지도 아일랜드 민족주의 운동으로 해결하려는 테러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아일랜드지역에서 전 영국인을 철수시켜 아일랜드 통일을 위한 아일랜드 민족국가 건설을 목적으로 하는 IRA 테러리즘은 영국의 안보에 심각한 불안과 고통을 주고 있다.

터키의 소수민족과 테러리즘[편집]

Turkey-少數民族-terrorism

터키에서는 여러 소수민족이 존재하고 있으나 가장 정치적으로 문제가 되는 인종은 쿠르드족과 아르메니아인이다. 1920년 세브르조약에 의하여 인구 4백만 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은 구소련과 터키로 분할되었다. 1921년 구소련쪽의 아르메니아인들은 독립하여 구소련연방에 편입되었기 때문에 아르메니아인 문제는 구소련 내에서만 정치적으로 정리되었다. 그러나 터키내의 아르메니아인들은 종교적·인종적으로 차별대우를 받아왔다. 특히 오스만제국의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정책으로 아르메니아인들은 풀 수 없는 민족의 한을 가지고 있다.

아르메니아 테러리즘은 1973년 이후부터 아테네, 베이루트, 베오그라드, 베를린, 브뤼셀, 제네바, 헤이그, 리스본, 로스엔젤레스, 마드리드, 오타와, 파리, 로마, 시드니, 바티칸, 비엔나 등의 도시에서 터키외교관과 정부대표들을 암살 또는 폭탄테러 공격을 가하여 국제테러리즘 전술을 민족저항운동으로 이용하고 있다.

1981년은 아르메니아인들의 테러의 해였다. 1년 동안 ASALA는 11개 국가에서 40개 이상의 테러공격을 자행하였다. 아르메니아 테러조직은 베이루트에서 PLO 테러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다. 오스만 터키제국의 아르메니아인 정책은 민족적 단결을 약화시키는 터키 동화정책이었다. 1894-1896년 기간중에도 터키정부가 아르메니아인들을 학살한 기록이 있으며 1909년에도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학살기록이 있다. 특히 1915-1916의 아르메니아인 학살은 프랑스 정부는 당시 터키정책을 인류애의 대한 범죄행위로 간주하고 이를 비난하였다.

터키정부는 제1차 세계대전중에 구소련 편에 선 아르메니아인들이 30만명 정도 희생되었다고 하지만 아르메니아인들은 1백만 내지 2백만 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시리아 사막으로 강제로 추방되고 물과 빵과 은신처도 없이 사막에서 죽어갔다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아르메니아인들의 저항운동은 독립된 민족국가 건설과 아르메니아인 학살에 대한 터키정부의 보상을 요구하고 있다.

1973년 캘리포니아의 산타바바라시에서 터키 총영사가 암살당하는 것을 시점으로 아르메니아의 청년 테러리스트들은 전세계에서 터키에 테러전쟁을 선포하는 민족적 테러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로써 1975년에서 1985년까지 20차례 이상의 터키 외교관들에 대한 테러공격으로 국제사회에 정치적 관심을 갖게 하였다. 아르메니아인들의 테러조직이 다른 민족의 테러조직과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증거는 없으며, 단지 동정적인 연대 의식만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터키정부는 러시아가 아르메니아인을 선동하여 NATO의 단결을 깨뜨리는 정책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아르메니아인의 민족주의와 터키정부간의 갈등은 해결할 수 없는 국제정치의 중요한 이슈 중의 하나이다. 이는 다인종사회에서 일어나는 현상으로 테러리즘 환경은 역사와 함께 계속될 것으로 보여진다. 중앙아시아의 인종분규와 함께 새로운 국면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이 아르메니아인과 같은 소수민족 테러리즘의 정치환경이다.

인도의 소수민족과 테러리즘[편집]

Indo-少數民族-terrorism

인도는 다민족문화의 복잡한 정치, 종교환경을 가진 국가이다. 종교적으로 크게는 이슬람문화와 힌두교문화의 갈등관계이다. 이는 인도와 파키스탄 국경분쟁이 되고 있는 캐슈미르 분쟁이며 인도와 중국과의 분쟁으로 발전하는 특수관계가 설정된다. 따라서 인도는 중국보다는 구소련과 등거리 외교관계를 가지며 비동맹정책으로 국제사회에서 고립적 환경을 피하였다.

이와 같은 인도의 주된 갈등요인 이외에 인도안보에 크게 위협되는 시크교도들의 테러리즘은 종교적 의미의 민족주의 운동이 되고 있다. 1984년 2명의 시크교도 경호원에 의한 인디라 간디수상의 암살사건은 전세계에 충격을 주었다. 시크교도들이 소수민족 공동사회의 자치권을 위한 투쟁으로 세계여론에 비춰졌기 때문이다.

1991년 5월 인디라 간디의 맏아들이며 인도 집권당인 의회당 지도자인 라지브 간디 전총리가 선거 유세중 폭탄테러로 희생되었다. 라지브 간디의 암살은 스리랑카의 민족분쟁인 타밀족의 테러리즘에 의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타밀족은 스리랑카에서 싱할리족과 분쟁을 하고 있는 인도남부 이민족이며 스리랑카의 정치적 난제에 해당한다. 라지브 간디에 대한 테러공격은 인도의 스리랑카 정책인 타밀진압정책으로 1987년 총리 재직시에 스리랑카에 군대를 파견한 정책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타밀민족의 저항에 따른 테러리즘도 인도로 확대되어 국제테러리즘 성격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시크교도들의 테러리즘은 자신의 공동체건설을 위한 수단이라는 점에서 보다 큰 의미를 갖고 있다. 한편 시크교도들은 펀자브(Punjab)주 주민들로 1982년부터 아칼리 달당(the Akali Dal Party)을 중심으로 독립국가인 칼리스탄(Khalistan) 국가건설을 위해 테러를 계속하여 왔다. 시크교도는 이슬람과 힌두교의 장점을 융합한 종교로 인도의 카스트제도를 반대하는 친이슬람계 종교이며 15세기 경에 실용 종교로 시작하였다. 인도 인구 8억 중 1천 5백만 명이 시크교도이다. 1947년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할 당시에 시크교도들은 인도를 택하였다. 시크교도들은 펀잡주에서 인도, 중국, 미얀마, 방글라데시의 틈바구니에서 독자적인 민족성을 지켜온 강한 민족성을 가지고 있다.

시크교도들은 펀자브주를 중심으로 칼리스탄 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달칼사운동(The Dal Khalsa Movement)을 통하여 시크민족 민족주의자들은 종교·문화·경제분야에서 힌두교들의 지배적인 위상에 반대하는 것이다. 영국은 간디에 의하여 인도들이 단결하는 혁명적 분위기를 약화시키기 위하여 시크교도들의 위상을 높였다. 영국인 지배하에서 시크교도들은 펀잡주에서 종교적으로 우월감을 인정받았으며 비록 하나에 불과하였지만 대학도 세울 수 있었다. 따라서 펀잡주 의회에서도 시크교도가 정치력을 장악하고 있다.

파키스탄과 인도가 분리독립(1947)되었을 때 인도에 편입된 시크교도들은 인도의 차별정책에 민족의 자치권을 얻으려는 정치적 야망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아칼리 달당은 시크교도들을 선동하였으며 그 결과 1966년 시크 소수민족의 주가 탄생하였다. 1973년 시크교 공동체는 종교문제에 있어서만은 모든 주권을 요구하며 아난드푸르 사하브결의안(The Anandpur Sahib Resolution)에 의하여 뉴델리 정부는 국방·외교·통화·통신·수송문제만을 지배하여 그 이외의 사항에 대해서는 시크교도들에게 자치권을 인정해 주었다.

시크교도들은 펀자브주와 해외에서(영국에 시크교도 공동체가 있음) 인도를 공격목표로 테러활동을 하고 있다. 1985년 6월 329명이 사망한 인도항공기 폭발사고도 시크교도들의 소행이었다. 중국과 파키스탄의 영향을 받고 있는 시크교도들의 펀잡주는 국경지역으로 국제테러리즘을 위한 환경을 가지고 있다. 이에 5천명의 타밀족도 새로운 정치이슈로 부상하고 있다. 지금은 타밀족 문제가 스리랑카의 정치문제이지만 시크교도들의 자치권 투쟁은 타밀족들에게도 영향을 주는 예민한 문제이다. 1987년 시크교도들은 버스와 철도 등에 폭탄테러를 시작하여 전형적인 테러 전술을 이용하고 있는 테러조직으로 발전하고 있다.

1986년 황금사원 작전을 지휘하였던 인도군 참모장 바이드야(A.S. Vaidya) 장군 암살사건에서 보는 것처럼 시크교도들은 폭발물테러와 암살사건을 민족주의적인 저항운동으로 이용하고 있으며 1985년과 1986년 PLO를 중심으로 하는 국제테러리즘 환경조성에 한 몫을 하였다. 1991년 라지브 간디 암살사건으로 일주일간 선거가 연기된 펀잡주에서 6월 15일 시크민병대들의 열차 습격으로 힌두교도들 126명이 사망하고 수십명이 부상하는 테러가 발생하였다. 열차테러 이외에도 최소한 20명 이상이 선거 당시 테러로 희생되었으며 총 280여명이 테러희생자로 기록되고 있다.

에스파냐 바스크민족과 테러리즘[편집]

E'Spania Basques民族-terrorism

바스크(Basques)민족은 유럽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민족 중의 하나이며 외세에 가장 배타적인 민족감정을 가진 민족이다. 바스크민족은 유럽에서 아일랜드인들의 민족감정과 유사하며 그들의 민족주의 운동도 같은 이념적 환경인 독립된 민족국가 건설이며 에스파냐정부의 일부 타협안 등의 유화정책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또한 유럽전역에서 저항운동으로 발생하는 암살·폭탄폭발·인질 등의 테러전술이 IRA조직의 그것과 동일하다. 실제로 바스크민족해방(ETA)은 알제리, 레바논, 남예멘, 쿠바 등지에서 IRA조직과 함께 테러훈련을 받았으며 일부는 니카라과에서 소모사정책에 반대하는 니카라과 민족해방전선과 같이 활동하기도 하였다.

바스크지역은 하나의 언어와 민족이 사는 민족공동체 지역이지만 세계대전 후 강대국의 파워게임으로 4개 지역의 바스크 지역사회는 에스파냐에 편입되었으며 3개 지역은 프랑스에 편입되었다. 이와 같은 바스크민족의 분할은 영국의 북아일랜드 분할독립과 같다. 또한 중동의 쿠르드족과도 같은 분할 거주지역의 공동체가 바스크민족의 모습이다. 이에 바스크 민족주의자들은 통일을 역사적으로 염원하고 있는 것이다. 바스크민족 문제는 에스파냐와 프랑스 국경문제이며 ETA의 테러공격으로 인해 유럽안보 문제가 되고 있다.

1973년 12월 ETA는 루이스 카레로 블랑코(Luis Carrero Blanco) 수상을 암살하는 것을 시작으로 정부요인 암살을 본격화 하였으며 이로 인해 에스파냐 고급장교만 해도 50여명 이상이 테러공격으로 희생되었다. 미구엘 퀸타나 (Miguel Quintana) 장군(1984), 후앙 아타레스(Juan Atares) 장군(1985), 해군중장인 크리스토발 콜론(Cristobal Colon) 장군(1986) 등 군고위지휘관들이 ETA의 테러공격으로 암살당했다. 이는 에스파냐의 국방정책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을 초래하는 사회불안의 환경을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1978년 ETA는 평화적인 방법으로는 바스크조국 건설이 불가능하다며 무장투쟁을 선언하면서 다음해인 1979년에는 바스크지역과 마드리드에서 39명의 경찰·군장교들을 공격하여 희생시켰다. 1980년에는 테러공격의 목표를 보다 선별적으로 하여 고위급 경찰·군장교에 대한 테러를 계속하였다. 1980년 ETA는 알라바(Alava) 지방 경찰청장과 부청장을 암살하였으며 1982년 마드리드 전화국을 폭파하여 2천만 달러의 재산피해를 냈다. 1985년과 1986년은 ETA 의 테러공격 목표에 에스파냐내의 관광지가 추가되었으며 이는 정부에 대한 새로운 압력수단이었다. 1987년 6월 바르셀로나 백화점 지하 주차장에서 발생한 자동차 폭탄테러는 15명의 사망자와 40여명의 부상자를 발생시켰다. 이 사건은 1972년 PLO의 뮌헨올림픽 선수촌 테러사건의 충격과 더불어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의 안전문제로 대두되어 심각한 국제적 여론의 관심이 되었다.

ETA의 테러공격목표는 에스파냐 전역과 프랑스이며 경찰, 군, 관리, 기업인, 관광지 등 다양한 양태로서 에스파냐 정부를 약화시키는데 있다. 에스파냐 정부로 하여금 평화를 ETA의 독립조건과 에스파냐 강경정책인 단결동화정책을 강요하였던 것이다. 1978년 PNV정당은 새로이 에스파냐정권의 유화정책을 받아들였으나 ETA는 정부와의 협상을 반대하였으며, 에스파냐 민족주의와 바스크 민족주의 간에는 평화적인 해결책이 존재할 수 없다는 강경입장으로 계속적인 테러리즘 환경을 경고하였다.

유럽의 테러조직 중에서 IRA와 ETA는 여러 가지 유사성을 가진 민족저항운동의 테러조직이 있다. 그러나 그 성격에 있어서는 구서독의 적군파, 일본적군, 이탈리아의 붉은여단 등의 무정부주의적 테러리즘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쿠르드 민족주의운동과 테러리즘[편집]

Kurde 民族主義運動-terrorism

쿠르드족은 터키, 이라크, 이란 접경의 산악지대에 거주하는 비아랍 유목민족이다. 그런데 이들이 시리아와 구소련 지역에도 거주하고 있음으로써 국제적 문제로 화할 가능성을 안고 있다는 것이다. 쿠르드족은 2,000만명-2,500만명으로 추산되고 있지만, 3,000만명-5,000만명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처럼 규모가 큰 민족이 1920년 세브류조약으로 3국으로 분열되었다. 1923년 터키가 칼리프제를 폐지하자 쿠르드족은 종교적으로 터키에 충성할 명분이 없어졌으며 쿠르드족도 민족국가를 건설하려는 민족저항운동을 계속하게 되었다. 쿠르드족의 저항운동은 터키, 이라크, 이란 3국에서 계속되고 있으며, 3국 중 한 국가가 정치적으로 불안정할 때 이를 이용하여 자치권을 요구하고 있다. 1925년과 1930년에 일어난 쿠르드족 봉기도 터키정부의 취약한 상태를 이용한 민족봉기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46년에는 이란의 북부지역에 소련군이 주둔한 것을 이용하여 이 지역에 쿠르드공화국을 잠시 건설한 적이 있다. 이라크에서는 1975년 쿠르드족의 게릴라들이 무장투쟁을 하자 이란 국경지역의 800여개의 쿠르드 마을을 쿠르디스탄(쿠르드인 거주지역)으로 소개시켰으며 그 일부는 이라크 남부지역으로 이주시켰다.

이란-이라크 전쟁중에 쿠르드족들은 이란군을 지원하였다. 이는 이라크 정부의 쿠르드족 탄압정책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 1988년 3월 이라크정부군은 쿠르드의 할라브야(Halabja) 도시를 화학무기로 공격하여 4,000명 이상의 쿠르드인들을 살해하였다. 이에 1988년 5월 쿠르드반군 조직인 쿠르드 민주당(The Democratic Party of Kurdistan:DPK)과 쿠르드 애국연맹(The Patriotie Union of Kurdistan:PUK)의 2개 조직이 6개의 쿠르드조직과 연합하여 투쟁할 것을 선언하였다. 걸프전쟁 이후 이라크 남부 바스라지방에서 시아무슬림들의 봉기와 북부지방의 쿠르드족 봉기는 미국과 다국적군의 정치적 선전에 의하여 고무된 분리주의운동이었다. 사담 후세인 정권을 제거하려다 오히려 시아무슬림과 쿠르드족만이 위험한 반정부운동으로 이라크의 전범자가 된 것이다. 순니무슬림들은 친아란계 시아무슬림들의 반란으로 바그다드와 바스라의 지역감정은 골이 깊어졌다.

더욱이 쿠르드족은 1991년 4월 사담 후세인 정권에 의하여 완전 진압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이라크 북부국경지대는 150만명의 쿠르드족 피난민만 하여도 85만명 이상이 되었다. 이란 국경지역에도 수십만 명의 쿠르드족 피난민들이 있었다. 이라크 내의 쿠르드족 분리주의운동은 터키와 이란의 심각한 정치문제가 되었으며 국제사회에서도 새로운 인권문제가 되었다. 걸프전쟁은 쿠르드족 문제만을 새로 개척한 전쟁으로서 지역분쟁과 국제테러리즘 환경으로 쿠르드족의 테러리즘을 이용한 민족저항운동을 알리는 결과만 가져왔다. 중동에서 레바논 안정을 찾는 대신 PLO와 쿠르드족의 좌절감을 가져온 시기가 1990년대이며 걸프전쟁의 결과이다.

이슬람 원리주의와 테러리즘[편집]

Islam 原理主義-terrorism 이집트의 무슬림형제당( Muslim Brother)과 같은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있었으나 낫세르 정권의 탄압으로 아랍세계가 세속화되는 과정에서 비밀결사적인 국가적 테러활동만을 하여 왔다. 무슬림형제당은 남예멘에서 독립 초기에 민족주의자들에게 영향을 줄 정도로 정치적인 힘이 없었다. 그러나 1979년 이란의 호메이니 이슬람혁명은 이슬람 원리주의 사상을 다시 아랍세계에 보급시켰다. 특히 호메이니의 이슬람 국가건설은 이슬람 원리주의의 상징이 되었다. 호메이니가 주장하는 시아무슬림을 중심으로 하는 이슬람 원리주의 정책은 순니아랍국가들에게는 이슬람 혁명수출이라는 위협으로 생각되었다.

1979년 메카봉기와 1988년 메카순례 폭동사건은 호메이니의 이슬람 원리주의 정책에 의한 사건이다. 이란이 지원하는 시아파 무슬림테러조직으로는 레바논의 지하드(성전) 조직과 헤즈볼라(신의 당) 조직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헤즈볼라 조직이 테러행위를 하고 사용하는 이름중에 이슬람지하드, 혁명정의기구, 피압박자의 기구 등이 있으므로 호메이니옹이 지원하는 테러조직은 하나로서 헤즈볼라조직이다.

헤즈볼라는 1983년 이후 레바논과 쿠웨이트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테러활동에 관계되어 있다. 1985년 6월 TWA 847항공기 피랍사건뿐만 아니라 1983년 10월 베이루트의 미해병대 본부와 프랑스 부대에 자살특공대의 차량폭발 테러는 12월 쿠웨이트에서 미국과 프랑스대사관에 대한 폭탄테러 사건과 함께 중동뿐만 아니라 세계를 테러의 공포분위기로 위협하였다.

헤즈볼라의 테러공격 특징은 차량폭탄을 이용한 자살테러 공격이다. 글자 그대로 지하드인 성전이론식 테러이다. 또한 외국인을 납치하여 정치인질로 삼는 외국인 인질이 새로운 테러공격 방법으로 알려졌다. 헤즈볼라의 테러리즘은 PLO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슬람 전체를 위한 것으로 선전하고 있다. 호메이니의 이슬람 원리주의 정신은 이집트에서도 나타났다. 1990년 10월 12일 이집트의 국회의장인 리파아트알-마우구브 박사는 경호원 2명과 함께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인 테러리스트들에 의하여 테러공격을 당하여 희생되었다. 이는 이집트의 걸프전쟁에 대한 친미정책에 불만을 품은 급진주의 테러리스트 소행으로 국회의장이라는 상징성으로 공격목표가 된 것이다. 걸프전쟁과 미국의 걸프전 개입은 아랍민족주의자들이나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에게는 제국주의 정책으로 생각하여 반대하였다.

알제리와 모로코 등 마그레브지역까지도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은 걸프전쟁에서 다국적군의 정책에 협조하는 국가정책에 반대하는 시위가 계속되었다. 다국적군의 정책에 협조하는 국가정책에 반대하는 시위가 계속되었다. 특히 1991년초부터는 알제리에서는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과격한 시위가 계속되어 치안까지 불안하게 만들었다. 1991년 7월 1일 알제리 정부는 이슬람 원리주의에 의한 이슬람국가 건설을 주장하는 반정부시위가 폭동으로 발전하였으며 이슬람구국전선(FIS)의 당수인 아바시 마다니와 부당수인 알리벨하디가 성전이라는 이름으로 반정부 무장시위를 주동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알제리 보안군은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이슬람지도자 체포에 항의하는 시위군중과 계속 유혈충돌이 일어났다. 이와 같은 알제리 이슬람원리주의자들의 시위는 유혈충돌이 일어났다. 이와 같은 알제리 이슬람원리주의자들의 시위는 수십명의 사상자를 내면서 과격해졌다. 알제리 정부는 국민의 모든 집회활동을 금지시켰으며 공수부대를 배치하는 비상사태로 이슬람 시위를 봉쇄하였던 것이다. 이는 이란의 이슬람 원리주의의 영향이 전 아랍세계에 미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1991년 7월 초에는 이가리시 교수가 난자당하여 살해되었다. 이 사건은 살만 루시디의 「악마의 시」를 번역 소개한 데 대한 테러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란정부는 살만 루시디에 대한 공개적인 테러위협을 이미 여러 차례 발표한 바 있다. 1991년 8월 8일 이란 팔레비 왕정시대의 마지막 총리였던 사프르바크티아르총리가 비서실장과 함께 피살되었다. 이는 이란의 이슬람지도자들의 공개적인 테러행위라고 바니 사드르 전 이란 대통령이 밝히고 있다.

이란의 이슬람 원리주의는 이슬람 정신에 위배되는 모든 것을 성전으로 정화한다는 의미가 강하다. 이슬람의 원리주의 운동은 걸프전쟁에서 미국을 중심으로 한 다국적군에 참여로 급진적인 반서구 감정을 보이고 있다. 이는 전아랍세계가 국제테러리즘 환경의 위험에 놓여 있는 것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