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정치/한국의 정치/한국의 외교/북한의 외교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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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외교 현황[편집]

北韓外交現況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의 구소련 및 동구 공산 정권의 붕괴는 제2차세계 대전 이후 지속되던 동·서 냉전을 종식시키고 탈냉전이라는 새로운 국제질서를 태동시키게 되었다. 이러한 국제질서의 변화는 동북아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으며, 특히 북한·중국·러시아 관계의 재조정을 초래하게 되었다. 특히, 1990년 9월 한·러 수교로 인하여 북한과 소련과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치닫고 있었다. 북한은 한·러 수교 후 러시아에 대하여 '달러에 눈이 어두워 동맹국을 버린 배신자'라고 극렬히 비판하였다. 이러한 북한·러시아 관계의 악화는 경제 관계에 반영되어 북한·러시아간의 무역은 점차 감소되기 시작하였으며, 1991년 1월 러시아는 양국간의 관행으로 지속되어 오던 구상무역제도를 경화결제방식으로 전환할 것과 과거 소련이 대북한 무역에 적용한 우호가격을 국제가격으로 전환할 것임을 북한에 통보하는 등 양국간의 관계는 그 어느 때보다도 악화되었다. 북한과 러시아의 관계는 계속 악화되어 1992년 1월 평양을 방문한 러시아 외무 차관 쿠나제(Georgy Kunadze)는 1961년에 체결한 '북·소 우호협력조약'을 폐기할 용의가 있음을 북한측에 전달하였다. 또한 북한의 러시아에 대한 미상환 부채의 조속한 해결을 촉구하였다.

1990년대에 들어오면서 북한과 러시아 관계는 최악의 상태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중국은 북한의 믿을 만한 유일한 우방국이 되었다. 반면, 중국도 한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추진하는 등 한국과의 관계를 계속 증진시키자 북한은 침묵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었으나, 중국과의 교류를 감소시키는 등 북한의 불편한 입장을 간접적으로 표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한국과의 수교 후 더 이상 북한의 고려연방제 통일방안을 지지하지 않을 것임을 천명하였으며, 북한은 이에 대하여 2,500억 원에 달하는 대중국 채무를 이행하지 않을 것임을 선언하였다.

1989년 중국의 톈안문 사태 이후 북한과 중국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왔지만, 중국의 대서방 개방정책은 북한의 폐쇄적 정책 노선과는 양립할 수 없는 한계가 있었다. 한국과 중국의 지속적인 무역 증대는 북한을 자극하는 것이었으며, 한·중 수교는 북한의 마지막 동맹국인 중국조차 북한을 더 이상 일방적으로 지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90년대 초의 북한의 대러시아 및 대중국 관계의 변화는 북한으로 하여금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밖에 없도록 강요하였다. 이에 북한은 외교적 고립을 타개하기 위하여 새로운 전략을 추구하게 되었으며, 그 대안은 미국 및 일본과의 수교였다.

1991년 1월부터 시작된 북·일 수교 협상은 현재까지 8차례에 걸쳐 진행되었지만, 이은혜 사건 및 일본의 대북한 배상금 문제로 인하여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이후 핵문제로 인하여 협상은 중단되고 말았다. 북한은 핵문제가 북·일 수교 협상과는 무관한 문제라고 주장하였지만, 일본은 북한의 핵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수교 협상에서 어떠한 진전도 있을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였다. 일본의 이러한 강경한 태도에 대하여 북한은 전략을 수정하여 미국과의 관계를 증진시키는 데 관심을 집중하기 시작하였다. 북한은 일본과의 수교 협상에서 걸림돌이 되는 것은 이은혜 사건 또는 배상금 문제가 아니고 바로 미국이라고 판단하였다. 이러한 상황 판단하에서 북한은 '국가적 자존심을 버리고 일본과 협상할 용의가 없음'을 선언하면서 일본과의 협상을 중단하였다.

그러나 북한과 미국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어떠한 진전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1992년 1월 노동당 국제담당비서인 김용순이 뉴욕을 방문하여 미국의 아놀드 캔터 정치담당차관과 고위급 회담을 개최한 것은 큰 성과라고 할 수 있다. 같은 해 11월에는 허종 주유엔 대사가 워싱턴을 방문하여 북·미 관계 증진에 관심이 있음을 미국 정부에 전달하였다.

1992년 12월 8일 북한과 미국은 북경에서 제28차 정치 참사관 회의를 개최하고, 난항을 거듭하고 있던 남·북 핵협상, 미·북한 관계 개선, 그리고 한국 전쟁 기간 동안 실종된 미군 유해의 송환에 대하여 의견을 교환하였다. 이 회담에서 북한은 핵무기를 개발할 의도가 없음을 설명하는 한편, 미·북한간의 고위급 회담의 개최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북한 핵문제의 우선적 해결이 없이는 관계를 증진시킬 수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이와 같이 80년대 말부터 한국 정부의 북방 정책의 성공에 비하여 북한은 미국 및 일본과 관계를 개선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북한의 외교적 고립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심화되었다. 중국과 러시아는 더 이상 북한을 일방적으로 지원할 수 없는 입장에 처하게 되었으며, 반대로 북한은 핵문제로 인하여 미국 및 일본과의 관계 증진에 어떠한 성과를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북한의 핵외교[편집]

北韓-核外交

지난 1993년 3월 12일 NPT 탈퇴선언 이후 시작된 미·북 핵협상이 1년 7개월이라는 오랜 과정의 협상을 거친 끝에 미국과 북한은 1994년 10월 21일 제네바에서 합의문을 교환함으로써 북한 핵문제는 일단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되었다. 그 동안 북한 핵문제는 탈냉전 시대의 가장 큰 세계적인 관심사로 등장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북한 핵문제는 기본적으로는 한반도의 평화에 관련된 것이지만, 동시에 세계적인 핵확산 방지체제의 안정성을 결정짓는 관건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한반도 평화에 대한 위협인 동시에 범세계적 평화를 위협할 수 있는 요소로 부각되어 왔다.

북한 핵문제가 세계적인 관심사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지난 1993년 2월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영변의 핵시설 중 핵폐기물을 저장하고 있는 곳으로 추정된 두 개의 의심 지역에 대한 특별 사찰을 요구하자 북한이 이를 거부하고 3월 12일 IAEA 탈퇴를 선언하면서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 북한의 IAEA 탈퇴 선언을 IAEA 및 한국, 미국 등 서방 국가들은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려는 명시적 의도로 받아들였으며, 따라서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노력을 집중해 왔다.

북한의 원자력 개발 역사는 19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북한은 1956년 3월 소련의 '드브나' 다국적 핵연구소 창설에 참가하기 위하여 소련과 협정을 체결하였으며, 1959년 9월 '조·소 원자력 평화적 이용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여 소련과의 공식적인 원자력 협력체계를 마련하였다. 1962년에는 소련으로부터 연구용 원자로를 도입하여 영변에 원자력 연구소를 설치하였으며, 1965년 6월 2메가와트급의 연구용 원자로를 도입하여 본격적인 원자력 연구에 돌입하였다. 또한 매년 약 200명의 원자력 관련 연구원을 소련의 '드브나' 연구소에 파견하여 선진 기술의 습득에 매진해 왔다.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려는 이유는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분석해 볼 수 있다. 첫째, 북한은 군사적 안전보장을 위하여 핵무기를 개발해 왔다고 할 수 있다. 군사적 측면에서 볼 때, 북한은 한반도 유사시 체제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으로서 핵무기의 효용성을 믿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핵개발 역사가 50년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발전용보다는 실험용에 막대한 자원을 투입해 왔다는 사실은 북한의 핵개발이 핵무기 개발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둘째는 북한 정치체제의 안정성을 제고하기 위한 측면이다. 북한의 핵개발은 김일성·김정일 체제의 정치적 생존성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지속적인 경제 성장의 부진과 더욱 심화되고 있는 남·북한간의 경제력 격차, 구소련 및 동구 공산 정권의 붕괴 이후 가속되어 온 외교적 고립감, 구동독의 붕괴 이후 서독에 의한 독일의 흡수 통일 등을 보면서 김일성과 김정일은 주체 사상에 기초한 북한 체제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떨쳐 버릴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핵무기는 전체주의 일인 독재체제를 지켜 줄 수 있는 최후의 보루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셋째, 북한은 핵무기 개발을 협상 카드로 이용하여 최대의 반대 급부를 취하고자 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북한은 경제적·외교적 난관을 돌파할 수 있는 협상 카드로 활용하기 위하여 핵의혹을 증폭시켜 왔으며, 핵협상을 미끼로 하여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선진 제국으로부터 최대한의 반대 급부를 얻어내려 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북한은 공식적으로 핵무기 개발을 부정하고 있으며, 나름대로 돌파구를 찾기 위해 노력해 왔다. 1991년 12월 한·미 양국 정부가 남한에서 미군 전술핵의 전면 철수를 선언한 후 직후 북한은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에 합의·서명하여 그들이 핵무기 개발 의도가 없음을 내외에 천명하였다. 이 공동 선언에서 남북한은 ① 핵무기의 시험, 제조, 생산, 접수, 보유, 저장, 배치, 사용하지 않으며(제1조), ② 핵에너지를 오직 평화적 목적으로만 이용하며(제2조), ③ 핵재처리 시설과 우라늄 농축 시설을 보유하지 않으며(제3조), ④ 남·북 핵통제 공동위원회가 규정하는 절차와 방법에 의한 상호 사찰의 이행(제4조)에 합의하였다. 북한은 최초에 주한 미군 전술핵의 철수를 전제 조건으로 내세웠다가 한국과 미군이 이를 수용하는 한편, 1991년 11월 노태우 대통령이 남한에서의 '핵부재'를 선언하였고, 1992년 1월 7일 '92 팀스피리트' 한·미 합동 군사 훈령의 중지를 결정하자 '한반도 비핵화 공동 선언'에 서명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한반도 핵문제와 관련하여 한국측의 북한의 요구 조건을 대부분 수용하자 1992년 4월 북한은 미국의 북한에 대한 핵위협을 근거로 거부하고 있던 IAEA의 핵 안전 협정에 서명하게 되었고, 이로써 북한이 자체적으로 건설한 핵시설에 대한 국제적 사찰이 가능하게 되었다. IAEA에 의한 영변 핵시설 사찰이 시작됨으로써 비로소 북한이 말하는 '방사화학실험실'이 재처리 시설임이 확인되었고, 이후 몇 번에 걸친 임시 사찰에 의하여 북한이 소량의 플루토늄을 추출한 것도 확인이 되었다. 이후 미국의 정보 계통은 북한이 IAEA에 신고한 플루토늄 추출량에 대하여 의혹을 제기하였고, IAEA는 이에 대한 확인을 북한에 요구하였다. 이로써 북한의 핵의혹에 대한 국제적인 관심이 집중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제1, 2차 미·북한 핵협상[편집]

이후 북한은 핵무기 개발 의도를 감추기 위하여 핵사철과 관련, 절차와 방법에 이견을 제기하여 핵사찰 협상을 방해해 왔다. 1993년 6월에 있었던 제1차 미·북 고위급 회담을 통하여 북한은 ① 미국의 전반적인 대남 핵우산 보장의 부분적 희석, ② IAEA와의 단독 협상 실시, ③ 미국과의 직접 협상 실시라는 '시간 벌기'에 성공하였다. 북한은 핵카드를 이용하여 최대한의 외교적 이득을 획득하려 하였으며, 궁극적으로는 미·북 관계 정상화를 목표로 하였다. 1993년 7월에 있었던 제2차 미·북 고위급 회담에서 북한은 핵사찰과 관련하여 빠른 시일내에 IAEA와의 협의를 가질 것을 약속하였고, IAEA와의 협의 및 남·북 관계의 진전이 제3단계 미·북 회담의 전제 조건임을 인정하였다. 이외에 미국과 북한은 ① 같은 해 6월 11일자 미·북 제1차 공동 성명의 재확인, ② 미국의 핵무기를 비롯한 무력의 불사용 원칙 재확인, ③ 북한 핵시설의 경수로 교체 문제, ④ 핵 안전협정조치의 완전하고 공정한 적용, ⑤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의 이행, ⑥ 남·북 회담 재개, ⑦ 2개월내에 제3단계 미·북 회담의 개최 등에 관하여 합의하였다.

두 차례에 걸친 미·북 핵협상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핵문제는 미국과의 협상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는 문제'라고 하면서 IAEA의 사찰을 방해하였으며, 남·북 관계의 진전에도 성의를 보이지 않았다. 또한 1993년 11월 4일로 예정되었던 남·북 특사 교환을 위한 제4차 실무 접촉을 일방적으로 취소하는 한편, 같은 해 11월 11일 북한의 강석주 외교부 제1부부장은 미국에 대하여 핵문제 일괄 타결안 수용을 촉구하면서 미국이 북한에 대해 핵위협과 적대 정책을 포기한다면 IAEA의 핵 안전 협정을 완전히 이행할 것이라고 하면서, 미·북 3차 고위급 회담을 조속히 재개하여 일괄 타결안을 협상하자고 제의하였다. 이후 미국과 북한은 실무 접촉을 통하여 북한이 핵사찰과 남·북 특사 교환을 수락하면 미국은 팀스피리트 훈련을 중단하고 제3단계 미·북 고위급 회담을 개최할 것을 합의하였으나, 북한과 IAEA의 핵사찰 협상 결과 북한은 IAEA의 요구 조건을 거부하였다. 1994년 2월 북한은 IAEA의 임시 사찰 수용을 발표하여 긴장 국면을 전환시키려 하였으나, 4월에는 돌연 5메가와트급 원자로의 폐연로봉을 교체함으로써 새로운 긴장을 조성하였다.

1994년 4월 북한은 5메가와트 원자로의 핵연료봉 교체 필요성을 제기하고 IAEA의 입회를 요청하였다. 이에 대하여 IAEA는 핵연료봉의 교체 입회는 물론이고 과거 진행된 북한의 핵개발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연료봉에서의 시료 채취가 허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같은 해 5월 25일부터 28일까지 계속된 북한과 IAEA간의 협상이 실패로 끝나고 북한이 핵연료봉 인출을 가속화함으로써 북한 핵문제는 또다시 긴장 국면으로 치달았다. 핵연료봉 교체 입회를 둘러싼 갈등의 근원은 북한이 과거 동 원자로에서 플루토늄을 추출했는지의 여부를 확인하려는 IAEA 및 국제 사회의 노력과 이를 저지하기 위한 북한의 반발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영변의 5메가와트급 원자로에는 '채널'이라고 부르는 핵원료봉이 장전되는 원통형 구멍이 801개가 있으며, 각 채널에는 10개씩의 연료봉이 들어가 모두 810개의 연료봉이 장전되어 있다. IAEA는 801개의 채널 중 임의로 1개 지름을 선정하여, 이 지름 선상에 있는 30개의 채널에 들어 있는 300개의 사용 후 핵연료를 점검하고자 하였으며, 또한 북한이 1989년부터 1991년 사이 얼마나 많은 플루토늄을 추출하였으며 어떻게 처리하였는지, 그리고 현재 어떠한 상태에 있는지를 파악하려 하였다. 반면, 북한은 이에 대해 모든 연료봉을 수거하여 일괄 보관하는 방법을 고수하면서 핵문제의 일괄 타결을 주장하였다. 핵연료봉의 교체를 둘러싼 북한과 IAEA의 갈등이 고조되자 5월 30일 유엔 안보리는 북한에 대하여 핵연료봉 교체를 계속하더라도 이들에 대한 추후 계측이 가능하도록 보장할 것을 촉구하는 의장 성명을 15개 안보리 이사국 만장 일치로 채택하였다. 안보리가 의장 성명을 채택한 것은 북한이 빠른 속도로 핵연료봉을 인출하고 있는 데 따라 사태의 긴박성이 고조되었으며, 또한 경제 제재 등 유엔의 대북 제재가 취해질 경우 제재 성공의 열쇠를 쥐고 있는 중국에 대하여 안보리의 대북 제재조치가 불가피한 데 대한 공감대를 형성케 하여, 안보리의 대북 제재 결의시 중국이 대북 제재 조치에 동참하도록 유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북한의 IAEA 사찰 수용을 촉구하는 유엔 안보리의 의장 성명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계속 이를 거부하자 IAEA는 6월 10일 이사회를 통하여 대북 제재 결의안을 찬성 28, 반대 1, 기권 4의 압도적인 다수의 지지로 통과시켰다. 동 결의안은 영변의 5 메가와트급 원자로의 연료봉 교체 강행으로 인하여 IAEA는 핵 안전협정 불이행의 폭이 더욱 커졌음을 우려하고, 북한에 대하여 모든 핵시설의 정보와 장소에 대한 접근 허용을 촉구하였다. 이 결의안에 대하여 중국·레바논·인도·시리아가 기권하였으며, 리비아가 유일하게 반대하였다. IAEA의 대북 제재 결의안에서 IAEA는 인도적 차원의 의료 기술 부문을 제외한 연간 56만 달러(약 4억 5,000만원) 상당의 기술원조 중단을 결정하였으며, 그간 IAEA 헌장 제12조 C항에 따른 제재 조치를 받은 국가는 이스라엘, 이라크, 남아공 3국가뿐이었다. IAEA의 대북 제재 결의가 채택되자 북한은 6월 13일 IAEA로부터 탈퇴를 선언하였고, 이에 대응하여 미국은 대북 제재 결의안 초안을 안보리에 제출함으로써 핵문제를 둘러싼 긴장 국면을 더욱 고조되었다. 이와 같이 북한의 핵문제는 핵연료봉 교체를 둘러싼 북한·IAEA간의 갈등으로부터 시작하여, 유엔안보리 의장성명 채택, IAEA의 대북 제재 결의, 북한의 IAEA 탈퇴 선언, 미국의 대북 제재 결의 초안 안보리 제출이라는 일련의 긴장 국면으로 치닫고 있었다.

제재와 대결 국면으로 치닫던 북한 핵문제는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방문으로 인하여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되었다. 1994년 6월 15일부터 17일까지 북한을 방문한 카터 전 미대통령은 김일성과의 회담에서 북한 핵문제의 대화를 통한 해결과 남·북 정상회담 제의를 미국과 우리측에 전달하여 북한 핵문제에 있어서 극적인 반전의 계기를 제공하였다. 미국은 교체된 핵연료봉의 재처리 금지, 새로운 연료봉 재장전 금지, 사찰단의 체류 보장 등을 조건으로 북한과의 제3단계 고위급 회담을 7월 초에 개최하는 것에 동의하였으며, 따라서 제3단계 고위급 회담은 북한의 일괄 타결 주장과 미국의 포괄적이고 철저한 해결 원칙에 의해 북한 핵문제 해결에 대한 기대가 어느 때보다도 컸다. 한편, 김일성이 제의한 남·북정상회담에 대해 우리측은 즉각 예비 회담 개최를 제의하였으며, 6월 28일부터 실시된 예비 회담에서 7월 25일-27일간 평양에서의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합의하였다. 그러나 7월 8일 김일성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남·북정상회담은 무산되었고, 미·북 고위급회담은 연기되는 돌발 상황이 발생하여 북한 핵문제의 해결은 또다시 지연되고 말았다.

제3단계 미·북한 고위급 회담[편집]

김일성의 사망으로 연기되었던 3단계 고위급 회담의 1차 회담이 제네바에서 8월 5일-12까지 재개되었으며, 8월 13일 미국과 북한은 다음 4개항의 합의문을 발표하였다. 첫째, 북한은 흑연 감속로 원자로의 경수로 교체 용의를 표명하였고, 미국은 가능한 빠른 시일내에 2,000메가와트의 경수로 발전소를 제공하며, 그 기간까지 대체 에너지 제공 조치를 취하기로 하였다. 북한은 이에 대한 대가로 50만 킬로와트와 200만 킬로와트 흑연 감속로 원자로의 건설 계획을 동결하고, 폐연료봉을 재처리하지 않으며 방사화학실험실을 봉인하고 IAEA의 감시를 받기로 하였다. 둘째, 북한과 미국은 정치·경제 관계의 완전 정상화를 위한 조치로 상대방의 수도에 연락 사무소를 설치하고 무역 및 투자 장벽을 완화하기로 하였다. 셋째, 미국은 북한에 핵무기 불사용 및 불위협 용의를 표명하고 북한은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이행 용의를 표명하였다. 넷째, 북한은 NPT 회원국으로 잔류하며 동 조약에 따른 안정 협정의 이행 의사를 표명하였다. 미국과 북한은 동 합의사항의 구체적 논의를 위하여 전문가 회의에 착수하였다. 전문가 회의에서 협의된 4가지의 주요 안건은 ① 북한 원자로의 경수로 전환문제, ② 폐연료봉의 보관과 처리 문제, ③ 대체 에너지 제공 문제, ④ 연락 사무소 개설 문제였다.

9월 23일부터 제네바에서 재개된 미·북 3단계 고위급 회담 제2차 회담은 난항을 거듭하면서 10월 17일 남·북 대화의 재개를 포함하는 핵문제의 일괄 타결에 미국과 북한이 완전 합의하고, 10월 21일 조인함으로써 북한 핵문제는 새로운 장으로 진입하게 되었다. 3단계 고위급 회담에서 타결된 주요 내용은 크게 ① 북한 핵개발 동결 조치, ② 대북 경수로 지원, ③ 북한에 대한 대체에너지 지원, ④ 미·북한 관계 개선, ⑤ 남·북한 관계 개선 등 5가지로 대별된다.

이를 다시 북한측 이행 예정 사항과 미국측 이행 예정 사항으로 분류해 보면, 세부 항목은 다음과 같다. 우선 북한측 이행 예정 사항으로서는 ① 5메가와트 원자로 가동 중단, ② 50메가와트·200메가와트 원자로 건설 중단, ③ IAEA 감시 활동 협력, ④ 경수로 핵심 부품 인도 전 IAEA

안전조치 의무 전면 이행, ⑤ 폐연료봉 제3국 이전, ⑥ NPT 완전 복귀, ⑦ 한반도 비핵화 이행 및 남·북 대화 재개 노력, ⑧ 미국 연락사무소 설치 등이다. 미국측 이행 예정 사항으로서는, ① 미국 주도의 2,000메가와트 경수로 제공, ② 경수로 완공시까지 대체에너지 제공, ③ 대북 투자 및 무역 규제조치 완화 및 ③ 평양 연락사무소 설치 등이다.

이러한 미·북한 협상에서 양측은 서로에 대하여 몇 가지를 양보했는데, 미국측이 대북 특별 사찰의 시기를 연기한 것은 대표적인 양보 사항이라 할 수 있다. 미국은 '경수로 핵심 기자재 북한 반입 전'에 특별 사찰을 시행하기로 합의하였는바, 경수로 계약 기간 2년과 핵심 기자재 반입 기간 3년을 합한 총 5년간을 대북 경수로 지원 기간으로 산정할 때, 경수로 총비용의 약 2분의 1이 투입된 이후 특별 사찰이 가능할 것으로 판단됨으로써 대북 특별 사찰 시한을 현재보다 2-3년 정도 유예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미국측이 북한측에 대하여 폐연료봉을 당분간 건식 보관하는 것을 허용하고, 방사 화학 실험실을 폐기하는 대신 봉인하는 수준에서 용인한 것도 양보 사항으로 판단할 수 있다.

반면, 북한은 기존의 5메가와트급 원자로의 가동을 동결하고 폐연료봉의 재처리를 포기하는 양보를 하였으며, 지원된 경수로 1기가 완성되는 시기를 기하여 방사화학실험실을 폐쇄하는 데에도 합의하였다. 또한 그들이 건설중이었던 50메가와트 및 200메가와트급 원자로의 건설을 중단하고 IAEA의 안전 조치를 전면 이행키로 합의한 것도 중요한 양보 사항이라 할 수 있다.

미·북한 협상의 합의 결과에 대하여서는 여러 갈래의 평가가 가능하나, 이를 한국과 북한, 그리고 미국의 입장으로 대별해 보면 다음과 같다. 즉, 한국의 입장에서는 북한으로부터의 핵위협을 어느 정도 해소하였고, 북한의 미래 핵활동을 동결시킬 수 있게 되었으며, 한국형 원자로의 수출 기회를 확보하였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한반도 평화 정착의 기틀을 마련함으로써 통일을 위한 긍정적 여건을 마련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득을 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동 합의가 북한의 과거 핵의혹 규명에 대해서는 여전히 미진한 점을 남김으로써 그동안 북한 핵의혹의 완전한 규명을 주장해 온 우리 정부로서는 그 만큼의 정치적 부담을 안게 될 수밖에 없으며, 경수로 지원에 따른 경제적 부담을 감수해야 하며, 대체에너지 자원에 대한 추가적 경비 부담의 가능성이 남아 있다는 부정적 측면도 있다.

또한 북한의 입장에서는 외부로부터 지원된 경수로와 대체 에너지를 획득함으로써 고질적인 에너지난을 해소할 수 있게 되었고, 대미·일 관계개선의 계기를 마련하였으며, 대북 제재 압력의 소멸로 김정일 체제의 안정화를 기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이점이 있다. 그러나 장차 독자적인 핵활동을 전개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고, 그 동안 요긴하게 사용했던 한국 및 미국, 그리고 일본 등에 대한 핵카드가 사실상 유명무실하게 될 수도 있으며, 일관되게 거부의 입장을 나타내었던 IAEA 사찰을 수용하는 것이 불가피하게 됨에 따라 명분론 면에서도 손해를 보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동 합의사항은 남·북한 관계 개선에 대한 압력으로 작용할 전망이어서, 폐쇄적인 체제 유지를 목표로 해 온 그들의 국내 정치 노선에도 장애적 요소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미국은 동 합의를 통하여 NPT체제의 유지를 기약할 수 있게 됨으로써 국제 사회에서의 주도적 위치를 재확인하고, 대북 직접 통로를 개설함으로써 동북아 지역에서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클린턴 행정부의 외교·정치적 입지를 강화할 수 있게 되었으나, 북한에 대한 지나친 양보라는 정치 공세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북한에 대한 경수로 지원의 경제적 부담 이외에도 대체에너지 지원의 1차적 책임을 떠맡게 되었으며, 북한 이외의 잠재적 핵개발국에 대하여 핵카드를 이용한 적적한 보상 유도라는 전술을 유용할 수 있는 나쁜 선례를 남겼다고 할 수 있다.

반면, 미·북한 협상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지난 3년간 지속된 한반도의 긴장을 완화함으로써 한반도에서의 전쟁 발발 위기를 해소하였다고 할 수 있다. 향후 북한의 성실한 합의 이행이 이루어질 경우, 한반도에 데탕트가 도래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또한, 그 동안 북한이 남·북한 관계 및 대미 협상의 지렛대로 활용해 왔던 핵카드가 앞으로는 그 효용성이 약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즉, 대북 특별 사찰의 이행시까지는 여전히 북한이 핵카드를 사용하려 할 것이나, 합의 사항이 본격 이행됨에 따라 그 효용성은 현저히 감소될 것이 분명하다. 또한 미·북한 적대 관계가 청산되고 관계 개선의

기반이 마련됨으로써 대화에 의한 문제 해결을 기대할 수 있으며, 향후 미·북한 협상과 남·북 대화를 통하여 북한의 대외 개방 및 체제 변화를 유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 또한 동 협상의 의의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큰 의의는 남·북관계 개선 노력이 합의사항에 명문화됨으로써 한반도 비핵화 실현 결국 미·북한 핵협상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긍정적 측면에서 보면, 미·북한 3단계 고위급 회담은 ① 북한 핵문제 해결 국면 본격화, ② 남·북 대화, 헙력의 최대 장애물 제거, ③ 북한 핵의혹의 현재·미래 동결, ④ 한국 주도의 경수로 건설 기틀 마련, ⑤ 북한 핵문제로 인한 대주변국 저자세 외교요인이 소멸됨으로써 한국의 외교적 입장 제고, ⑥ 한반도에 탈냉전 가능성 증대, ⑦ 한반도에 비핵화 추진의 포석 마련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미·북한 3단계 고위급 회담의 부정적 측면으로서는, ① 특별 사찰 지연으로 북한에 핵개발 시간을 부여할지도 모른다는 위험 상존, ② 북한에 일정 기간 핵카드 지속 허용, ③ IAEA 안전조치의무 거부 등 북한의 약속 불이행시 핵문제의 원점 복귀 위험, ④ 북한의 성공적인 대미 직접 통로 개설의 선례를 남김으로써 한국의 외교적 위상 손상, ⑤ 북한의 과거 핵에 대한 규명이 미흡함으로써 자칫 북한의 과거 핵활동에 면죄부를 부여하는 것이 될 위험, ⑥ 경수로 지원에 따른 경제적 부담, ⑦ 향후 북한이 한·미간의 동맹체제 이완을 시도할 가능성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볼 때 미·북한 협상은 긍정과 부정의 측면이 교차하나 비록 최선책은 아니라 할지라도 차선의 선택이라 할 수 있다.

북한 핵문제의 향후 쟁점[편집]

미·북한 합의 사항을 중심으로 전망할 때, 향후의 북한 핵문제 해결 전망은 다음과 같다. 미·북한간의 전문가 회의의 결과에 따라 북한의 흑연 감속 원자로 동결 및 방사화학실험실 봉인이 이루어질 것이며, 미국은 이에 따라 대체에너지 지원, 무역·투자 제한 완화 등의 조치를 이행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북한의 NPT 복귀, 경수로 지원을 위한 국제 컨소시엄 구성 등이 이루어질 것이며, 합의사항에 따른 미·북한 연락 사무소도 개설될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96년부터 북한 신포 지역에 한국형 경수로의 착공에 들어갔다. 이의 후속 조치로서 경수로 핵심 부품이 북한에 인도될 것으로 보이는 1999년 경에는 북한에 대한 IAEA의 특별 사찰이 실시되었으며, 미·북 관계의 본격적 정상화도 가능할 것이다. 이어 경수로가 완공될 2008년 경에는 북한의 흑연 원자로가 완전 해체되고, 방사화학실험실이 해체되며, 폐연료봉이 제3국으로 이전되는 최종 국면에 도달할 것으로 전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