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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정치/한국의 정치/한국의 외교/한국과 공산권 제국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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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공산권 제국의 관계〔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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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共産圈諸國-關係〔序說〕

1970년대에 있어 공산권제국의 상황의 변화과정은 '나 위주(domesticism)'의 대외행위(對外行爲)의 선정에 방향전환을 시도하고 있음이 현저함을 뜻한다. 1960년대 후반기부터 표면화되고 있는 동구공산제국의 서방접근외교는 동·서교류를 통한 자국이익의 추구와 직결되고 있다. 그들 국가는 호혜원칙(互惠原則)에 입각하여 각종의 경제교류는 물론 문화적·인적 교류를 통해 국가간의 관계개선을 적극 추진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동·서구제국이 변모하고 있는 양태(樣態)이다.

한편 주도권 쟁탈을 둘러싼 대립과 경합관계에 있는 소련과 중국의 대외정책도 1970년대에 이르러 획기적으로 변화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중·소는 다같이 대미·대일관계의 정상화에로 그들의 외교궤도를 대폭 수정하고 있음은 물론, 여타 제국인 아(亞)·아(阿), 라틴 아메리카 및 서구 제국과의 관계 개선을 서두르고 있다. 이와 같은 공산권 내부의 다양한 상황변화는 국제정치체계상 일대 전환기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본다. 물론 단기적인 안목에서 우리의 대공산권외교의 방향을 급전환시킨다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보지만, 그러나 급템포로 변천하고 있는 국제정세라는 상황 속에서 우리의 외교의 향방은 보다 신축성 있고 실질적인 적극외교(積極外交)의 단행만이 한국의 국가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길이라고 간주된다. 그러므로 한국외교의 다양성은 단순하게 쌍무적인 정치협력 또는 군사적인 동맹관계의 강화만을 전제로 하는 지역기구에의 적극 참여에만 총력을 동원할 것이 아니라, 그러한 관계를 위한 외교를 우선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국제정치체계의 변동에 민감하고 폭넓은 외교가 필요했다고 본다.

대공산권 외교방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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對共産圈外交方針

공산권 제국은 한국의 국체를 부정하는 입장을 취해 왔기 때문에 한국과 공산국가와의 관계는 완전단절 상태를 지속해 왔다. 그러나 1960년대에 들어와 한국정부가 적극적인 다변외교(多邊外交)를 지향, 중립제국과의 관계개선에 노력하였고, 1970년대에 들어와 북한을 능가하는 경제력과 국력을 갖게 되면서 다변외교를 공산권에까지 확대하려는 정책을 취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실질적인 다변외교의 시발점이 된 것은 비적성(非敵性) 공산국가와의 통상관계를 허용하겠다는 71년 봄의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발언으로서, 이를 계기로 정부는 대공산권 관계개선방침을 세우고서 유고슬라비아와 직접적인 통상관계를 수립하려고 시도하였다. 남북적십자회담의 진전 및 7·4 공동성명의 발표는 이러한 정부 방침상에 보다 적극성을 띠게 만들었다. 김용식(金溶植) 외무장관이 7월 8일 국회의 대정부 질문에 대한 답변을 통해 소련·중국·동구 국가와 통상을 포함한 관계 개선을 희망한다고 발언한 것은 그러한 증거라 할 수 있다. 김종필 국무총리 역시 7월 18일 국회에 대한 서면답변에서 중립국과 비적성 공산국가와의 접근은 정부의 다변안보외교라는 기본방침에 따라서 취하고 있는 조처이며, 단계적으로 교류를 시도하되 종국에가서는 외교관계까지 확대되어야 할 것이라고 밝히는 한편, 할슈타인원칙을 맹목적으로 고수하지 않고 신축성 있게 상황 변동의 추이에 따라 운용한다는 정부방침을 제시하였다. 특히 김종필 국무총리는 8월 11일 방미(訪美) 중 『뉴욕 타임스』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만일 중국과 소련이 한국에 적대적인 정책을 버리고 한국의 주권을 인정한다면 이들과의 관계도 수립할 용의가 있다고 말하여, 한국의 대공산권 외교가 원칙론적인 데서 상대적인 것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으며 적성국가의 개념이 고착적(固着的)인 것에서 신축성 있는 개념으로 변경되고 있음을 명백히 하였다. 요컨대 한국의 대공산권 외교방침은 박정희 대통령이 1972년 9월 2일에 행한 시정연설에서 밝혔듯이 유연성 있고 자주적인 실리외교(實利外交)를 추구한다는 원칙하에 이데올로기를 초월하여 비적성 공산국가와의 통상교류로부터 시작, 점차 그 접촉의 폭을 넓혀가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한국정부가 이러한 방침을 취하게 된 것은 국제적인 다원화경향 속에서 종래의 폐쇄적인 대공산국 대결정책을 취하기 힘든 상황이 전개되고 있기 때문에 한국도 내정불간섭(內政不干涉)·상호주권존중 원칙하에 국가적 실리를 추구하려는 현실주의적 정책을 지향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더욱 중요한 것은 남북접촉을 통한 북한과의 정치·사회·경제의 비교에서 우리가 절대적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것이 증명됨으로써 국제적인 문제에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면 취할수록 우리에게 유리하다는 자신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남북적십자회담 제2차 서울본회담 등을 통해서 한국인의 반공의식이 확고부동하다는 것이 증명됨으로써 공산국가와의 접촉에서 생겨날지도 모를 부작용에 대한 우려가 점차 사라지게 된다는 것 등이 그 원인이 되고 있다.

공산국가와의 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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共産國家-交流

완전 봉쇄정책을 추진해 오던 한국이 1970년대에 와서는 개방 정책을 쓰고 있다. 1972년 8월 방미 중이던 김종필 총리가 제2차 남북적십자 회담에 공산권의 기자 입국을 허용한다고 밝혔고, 이어 비정치적인 경제교류에서 유연성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70년 12월 개정된 무역거래법에 따라 대공산권 교역을 종래의 간접거래에서 직접거래로 전환시키고자 시도해 왔는데 그 결과 매년 거래액이 증가해 갔다. 뿐만 아니라 교통부 훈령 제386호 1조에 규정되어 있는 외국선박에 대한 출입항(出入港) 규정 중 북한·중국·월맹·쿠바 등 적대국가로 가는 배의 입항금지 부분 중 쿠바를 해제했다. 또 한국 선박의 공산국 기항문제와 다국적 기업 종사자의 공산국가 상륙 문제도 신축정책을 적용토록 했다. 이와 같은 대공산권과의 교류는 6·23 선언 이후 적극 추진되었으나 아직 뚜렷한 성과는 얻지 못했다.

6·23 선언 이후의 대공산권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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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二三宣言以後-對共産圈外交

1970년대 이후 세계정세가 화해와 대화의 시대로 변모하자 우리나라도 이에 적응할 수 있는 외교정책을 필요로 하게 되었던바 1973년 박정희 대통령은 '6·23 외교선언'을 대통령 특별성명 형식으로 발표했다. 그 내용 요지는 ① 평화통일을 위한 노력 및 남북한의 상호불침략과 대화 재개, ② 남북한이 UN 및 국제기구에 동시 가입, ③ 대공산권 국가 등에 대해서도 상호평등의 원칙하에 문호를 개방한다는 등으로 되어 있다. 이로써 지금까지의 사회주의 국가들과 단절시켜 오던 폐쇄정책 대신 문호개방 정책을 펴면서 비동맹 세력을 비롯한 다각적인 외교전략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6·23 선언 이후에도 소련·중국 및 동구 공산권으로부터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다만 국제적인 화해 무드에 의한 직접·간접적인 교류가 다소 늘어나고 있을 뿐이었다. 소련과의 관계에서는 1973년 유니버시아드 대회에 한국 선수가 참가한 것을 비롯하여 1974년에는 국회 도서관과의 자료교환이 있었고, 1975년엔 역도·레슬링 등의 선수권 대회에 우리 선수가 참가하기도 했다. 동구권과도 각종 국제회의나 대회 때 우리 대표가 입국할 수 있는 계기가 늘어나고 있는데 IPU 이사회, 적십자평화회의 등으로 유고에 입국한 것을 비롯해 1976년에는 동구권 인사가 6명이나 한국을 다녀갔다. 중국은 6·23 선언 이후에도 계속 적대감을 보이면서 오히려 소련이 한국인을 입국시킨 사실을 맹렬히 공격하는 태도를 취했다. 또한 한국 어부들이 중국의 어로(漁撈)를 방해한다는 등의 비난을 계속하면서 가끔 우리 어부들을 납치해 가서는 송환시키기도 했다. 6·23 선언 이후 한국이 보여준 개방정책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대공산권 외교는 그 한계가 있었다.

북방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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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方外交

1988년 10월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 주 헝가리 한국대표부가 개설, 6·23 이후 한국의 대공산권 외교는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제6공화국의 출범과 동시에 가속화된 북방정책은 지극히 바람직스러운 것으로 제5공화국까지의 북방외교는 거의 답보상태에 있었고 교역·통상분야도 간접·제3자 형식의 미미한 규모였다. 북방외교의 성과는 1970년대 말 중국의 실용주의 노선 채택, 냉전체제의 종식과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대두,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와 그에 유발된 동유럽 국가들의 정치·경제개혁 및 개방 등의 국제정세의 변화에 한국의 경제성장(과장된 면이 많았다)과 국민적 논의의 대두라는 국내 정세변화가 맞물린 결과로 그러나 급변하는 정세변화에 한국이 조금 더 빨리 진지하게 대응하고 그 주체가 정부나 정치권 일부에 그치지 않고 정보개방과 국민적 의사의 결집에 의하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한국과 러시아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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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Russia-關係

19세기 후반 러시아인들이 한반도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이후 현재까지 한­러 관계의 역사를 약 100여 년의 기간으로 본다면, 198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그 대부분 기간 동안 러시아인들은 한반도 정책을 대체로 안보·전략적 고려에서 수행하였다. 여기에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러시아인들은 제정러시아 시기나 소련 시기나 동북아시아에서 항상 수세적인 위치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양 시기 모두 러시아인들의 대외 팽창정책이 다른 지역에서는 대단히 성공적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예외라고 할 수 있다. 동북아시아 지역에서만은 러시아인들의 진출과 팽창은 늘 경쟁 해양세력 국가들로부터 견제를 당했고, 항상 이 지역에서만은 러시아인들은 우방국가를 가지지 못하고 고립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러시아인들은 한반도에 접근함에 있어 19세기 말이나 2차대전 이후에나 자신들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 보장되는 수준에 만족했다. 즉, 동북아시아 지역전체는 물론이고 한반도 자체에 대한 패권적인 기도는 가지지 않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 이후 러시아인들의 한반도 정책은 그러한 전통적인 접근 양식에서 상당히 변화하였다. 그것은 소련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 과정과 직접 관련이 있다. 그러한 체제 전환의 혼란기에서 소련 말기 고르바초프 정부나 신생 러시아연방의 옐친 정부 모두에게 있어 한반도 정책은 대체로 국내사정의 연장에서 형성되었다. 고르바초프 정부의 경우 그것은 국내경제의 회복이라는 과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한반도 정책의 골자는 한편으로는 소련이 필요한 경제적 도움을 한국적으로부터 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소련에 부담이 되는 북한과의 경제협력 양식을 상업적 원칙에 따라 전환하는 것이었다. 고르바초프 정부의 입장에서 한국과의 수교란 그에 필요한 외교적 환경을 형성하는 데에 필요한 보완적인 조치였다. 따라서 한국과의 수교에도 불구하고 고르바초프 정부는 남·북한을 대상으로 한 정치·외교적 관계의 근본적인 변화를 추구한다든지 한반도 상황의 개선 혹은 해결에 필요한 정치적 역할을 담당할 의사는 없었던 것이다.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연방의 옐친 정부에서도 1993년 말 -1994년 초를 기점으로 한반도 정책에 새로운 변화가 나타났다. 그것은 러시아 사회에 급격히 확산된 민족주의 정서가 러시아 외교노선 전반에 영향을 미친 결과였다. 따라서 한반도에 대한 러시아 연방의 정책 변화도 이러한 국내 정국의 변화와 맥을 같이 하였다. 즉 1993년 후반기 이후 민족주의 정서의 확산이 러시아 연방 정부로 하여금 국제무대에서 상실한 강대국으로서의 위상을 다시금 과시하도록 노력하게 만들었고, 그리하여 러시아 연방은 서방과의 공동보조보다는 독자적 입장에서 한반도 문제를 다루려는 새로운 시도를 보였다. 북한 핵문제에 대한 입장 변경이나 북한과의 동맹관계 재확인 등은 옐친 정부의 그러한 시도로 이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