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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이후의 정치제도〔서설〕[편집]

建國以後-政治制度〔序說〕

건국 이후의 정치제도와 이데올로기[편집]

建國以後-政治制度-ideologie

정치제도는 사회에 대하여 정책결정 등 가치 권위적으로 배분하는 틀이며, 장치(裝置)이다. 한 나라의 정치생명, 활력 및 내부적 추진과 정치제도는 직결되며, 정치제도는 한 국민의 교양의 집적(集積) 위에 형성되는 국민조직화 및 국민의지의 지주역할을 한다.

정치제도는 이데올로기(사회적인 사상 또는 정치이념) 및 권력과 더불어 정치체계의 기본변수이다. 즉 이데올로기는 관념형태이며 전문적으로 정신적인 활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생기고 또 체계화된 것이다. 정치적 이데올로기는 목적이나 가치 또는 이념을 표현하지만 제도는 그와 같은 목적이나 가치 또는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기술적 존재이다. 따라서 정치제도라는 존재에 뜻을 부여하는 것이 곧 이데올로기이며, 이데올로기의 실제화의 기회를 부여하는 것이 곧 정치제도이다. 따라서 이데올로기와의 관계는 마치 사람에 있어서 마음과 몸과의 관계와 같다.

정치적 이데올로기 또는 사회적 사상을 어떻게 정치제도에 유도하는가는 큰 의의를 갖는다. 왜냐하면 정치제도가 있음으로써 그것을 통하여 정치과정이 진행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있어서 사회적인 사상 또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는 해방후 큰 혼란을 겪기도 했지만, 자유민주주의의 이념이 그 주된 정치적 내지 사회적 사상으로 되었다. 자유민주주의는 주로 미국식의 소수자 보호로 요약되는 개인주의적 지향성과 유럽식의 일반의지(一般意志)의 존중, 즉 집단주의적 지향성이라는 최대공약수를 찾으려는데 그 뜻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채택한 것은 건국후 한국사회의 이데올로기적 변형이라는 형식주의의 측면을 보인 것이었다. 그리하여 점차 그것을 교과서적 민주주의라고 칭하여 풍토적으로 토착화(土着化)하려는 노력을 보였다.

건국 이후의 정치제도와 권력[편집]

建國以後-政治制度-權力

정치권력은 항상 정치(政治)의 기본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정치는 영향을 주고 받는 권력의 획득·배분행사이기 때문이다. 1952년 7월의 제1차 개헌에서부터 1987년 10월의 개헌에 이르기까지 9차에 걸친 개헌의 내용이 주로 정부의 권력구조 문제를 거의 예외없이 중심으로 제기하였다. 오랜 세월에 걸쳐 공식적 정치제도에 참가하는 데 지나친 제약을 받았던 한국 국민은 해방이 되자 욕구에서 유래하는 과도한 욕구량(慾求量)으로 적절한 간격의 수와 내용이 시간적 인자(因子)로 한정되어 입력(入力)을 처리하지 못하고 정치적 분열과 투쟁이 지나치게 중요시되었다. 이 입력을 적절히 처리할 틀이 바로 정치제도라고 할 수 있다.

건국 이후의 정치제도의 3기본원리[편집]

建國以後-政治制度-三基本原理

우리나라의 정치제도는 원리적(原理的)으로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국민투표의 3기본원리를 기반으로 하였다. 자유주의의 구현은 형식상 자유주의적 권력분립의 원리를 취하였다. 권력분립의 원칙은 절대왕제에의 저항의 이론으로서 권력의 집중화의 거부와 그것으로 인한 권리남용의 억제를 위해서 제창된 것이다. 근대국가에 있어서 이 원칙은 중앙권력의 과도한 집중을 억제하는 것으로서 적지않은 의의를 가지고 있다.

한국정부가 수립되자마자 권력분립의 원칙은 국가의 통치기구에 적용되었다. 즉 입법·행정·사법의 세 기능이 서로 다른 기관에 의하여 담당되는 형식을 취하였다. 또한 한국정부가 수립되자마자 한때 권력분쟁의 또 다른 형태를 취한 것이 지방분권(地方分權)이었다. 지방분권의 제도화는 중앙정부에 모든 권력을 집중하는 것을 거부하고, 지방정부에도 상당한 권력을 부여하여 중앙과 지방정부의 상호억제에 의하여 권력의 남용을 방지하고자 한 것이었다. 건국 후 우리나라는 법제상으로 지방분권의 원리가 규정되었으나 사실상 중앙집권성, 형식주의, 이중성을 나타냈다. 3권분립제도(三權分立制度)가 형식적으로 지배되는 듯 보이지만, 권력분립의 전통이 거의 없는 한국의 경우 3권 중 행정권이 가장 강력한 것이었다.

또한 건국 이후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핵심을 이룬 것은 동질의 국민에 의하여 나라의 정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요청이었다. 즉 국민에 의한 정치를 기본원리로 하는 이상 정치제도는 이 원리를 구현하는 틀이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국민투표의 기본원리를 들 수 있다. 이 원리는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을 받는 자 간의 동질성, 주체와 객체간의 자동성에 기초한 대표의 원리로, 국민적 의지를 정치적 결정 및 정책에 직접 결합시키는 데 극히 유효한 원리였다. 우리나라의 정당이 해방직후, 특히 건국후부터 이와 같은 국민대표의 원리와 결합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정당은 한쪽의 발을 사회에 두고 또다른 쪽의 발을 국가에 둔 다리(橋)이다. 정당은 사회적·정치적 이데올로기와 토론의 물을 정치제도라는 물수레(水車)에 인도하고 이 물수레를 회전시키기 위해서는 도관(導管)과 수로(水路)의 기능을 하여야 하는 것이다.

한국의 정당이 정치제도로서 사회에 존재하는 각개의 개별의지(個別意志)를 일반적인 정치의지에까지 집결하고 조직화하는 중요한 정치적인 기능을 널리 인정하게 된 것은 의회제도의 발달에 기인하였다. 정당은 조직화된 정치집단이며 그 근본적 목적은 정치권력의 획득과 유지에 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대통령의 정당에 소속되어 있는 우리나라 여당의원은 특정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대통령의 행위나 정책을 변호하게 되고 건설적인 대안이나 이른바 안전을 위한 수정을 성안(成案)하는 역할을 하였다.

선거는 건국후 대의제의 발달과 더불어 선거제도로서 공인되었다. 국민대표의 개념을 제도적으로 현실적으로 구체화한 수단이 곧 선거이다. 이제 한국선거제도의 특징을 크게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① 공인후보(公認候補)는 파벌을 조성하는 기능을 하였다. 따라서 민주적 규율이 잘 적용되지 못하였다. ② 무제한의 출마를 허용한 것은 이른바 포말후보(泡沫候補)를 낳고, 이것은 결과적으로 여당 또는 어느 일당에게 유리하게 된다. ③ 고급공무원의 출마가 증가한 결과는 공무원의 공정성과 정치적 중립성을 저해하게 되었다.

건국 이후의 정치제도의 특징[편집]

建國以後-政治制度-特徵

건국 이후 한국정치제도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⑴ 한국의 정치제도는 미국이나 독일에서 보는 바와 같은 연방제도가 아니라 단원(單元) 정치제도이다.

⑵ 지방자치나 다원주의(多元主義)에 의한 비교적 작은 정치단위 및 도(道)의 활력이 약하다.

⑶ 건국 초기에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리고 2년 11개월 동안의 미군정(美軍政) 후에 수립된 한국정부는 민주헌법에 입각하여 법의 지배, 시민의 자유, 대통령 및 국회의 각 역할의 상호존중, 사법부가 행정부·입법부 체제에 거리를 두고 숙고하는 등의 제도를 헌법에 포함시켰다. 그러나 그 헌법은 한국전쟁 때부터 비상시의 신축적 운용을 필요로 하여 국내·국제면에서 정치적·경제적 그리고 정부의 거대화로 인해 국제적 시련을 겪고 있다.

⑷ 한국의 정치제도는 명확한 질서나 책임제도에 익숙하지는 못하였다. 이것은 곧 한국의 정치제도가 환경과의 사이에 생기는 침투작용에 대한 적응체계라고 설명할 수 있다.

⑸ 건국 후 한국의 정치제도는 큰 변화와 돌발적 위기에 적응성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특히 행정부가 자기의 권한을 확대해석하고 그 권한을 충분히 발휘함으로써 달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⑹ 권력의 중앙집권과 책임의 집중이 한국정치제도의 특징이라고 비교적 간단하게 설명될 수 있다.

⑺ 한국정치제도의 다양성은 정치·경제·사회·문화에 있어서 다원주의(多元主義)에 기초한 까닭이다. 이 특징은 높아가는 한국인의 정치의식에 지탱되어 정치적 성숙을 촉진하였다.

끝으로 한국정치제도를 전망해 보면 능률과 민주주의의 병진(倂進)이 그 기본 바탕이 되는데 적합한 정치제도의 정립이라고 할 수 있다.

<朴 文 玉>

대통령부[편집]

大統領府

한국의 정치제도 특히 행정부분 내부에서의 하나의 국면으로 대통령부(大統領府)에 주의를 집중시킬 필요가 있다. 대통령은 국회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 않는다. 그는 공무원 임면권을 갖고 있으며, 행정각부의 장관을 임명하여 국무회의를 구성한다. 국무위원은 대통령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만 국회에 대하여는 책임을 지지 않으며, 국무위원은 국회의원이 될 수 없었다.

제2공화국 정부하에서의 대통령은 국정에 관하여 초연한 존재였지만, 제3공화국의 신대통령제는 행정권의 우위를 장식할 필연적 운명을 내포하고 있었다. 행정의 실질적 권한을 장악할 이 대통령은 한국과 같이 적극적 국가가 필요로 하는 지도력을 구비한 인물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임기 동안 행정권의 안정성과 강력하고도 안정된 정치로 효율적으로 일을 할 수 있는 정부가 요청되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① 국가의 원수이며, 통일국가를 상징·대표하고 국가의 독립, 영토의 보전, 국가의 계속성과 헌법을 수호하는 자이다. 또한 그는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성실한 의무의 이행자이다. ② 대통령은 행정권의 수반이며 최고행사자인 까닭에 국정을 자기의 책임과 지도 밑에서 관리하며, 헌법과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거대한 정부의 국가공무원을 임명한다. ③ 대통령은 국가의 지도자이며, 주요 법률안의 제안자이며, 국회를 통과한 법률에 대하여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 ④ 대통령은 전국적인 정당의 조직자이며, 정당의 대표이면서도 정당 위에 선다. ⑤ 대통령은 외교정책형성의 제일인자이며, 그는 국가조약을 체결·비준하고, 외교사절을 신임·접수 또는 파견한다. 여기서 대통령은 제외국정부와의 유일한 연락 창구이다. ⑥ 대통령은 헌법과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육·해·공 3군을 통수한 국군의 최고통수자이다.

독립정부수립 후부터 입법이 점차로 전문적인 성격을 띠게 된 결과 대통령의 권력과 영향력은 더욱 확대되었다.

대통령 행정부(Executive Office of President)라고도 불리는 대통령부는 독자적인 참모·보좌·자문기관으로서 점차 전문화·미분화되고 있다. 헌법과 정부조직법상 한국의 대통령부는 대통령비서실·경호실, 직속 국가기관인 국가안전기획부·감사원, 자문기관인 국가원로자문회의·국가안전보장회의·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설화된 이상의 조직 외에도 임의적·시한적 성격의 기관도 있는데 이러한 제도는 이른바 거대정부의 성공과 그 기능성 자체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대통령부(실)는 20세기적인 공화제적 군주제라고 비판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나라는 건국 이후 개인적 권력화에 흘러 이른바 탈제도화의 경향을 띠었다. 어떻든 대통령부(실)는 대통령에 직접 봉사하는 점에서 다른 집행부서와 제도적 성격을 달리하며, 다음의 내각제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각 부처장관들이 그 조직의 기준으로서 부처중심주의와 관료기구의 자율성의 논리를 갖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朴 文 玉>

내각제도[편집]

內閣制度

내각(cabinet)이란 용어는 통상 의원내각제 정부형태에서 주로 사용되고 대통령제 정부형태에서는 행정부(the executive)라는 용어가 일반적이다. 제9차 개정헌법에서는 대통령과 행정부를 통합한 개념으로 정부라고 분류했는데, 이 경우 정부라는 개념은 입법부와 사법부에 대하는 행정부를 의미한다.

제헌헌법 이후 제3차 개정헌법에 의한 제2공화국의 의원내각제를 제외하면 한국의 정부형태는 대통령중심제로 일관되어 왔다. 그러나 한국의 대통령제에는 의원내각제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있고 과거의 집권자들이 장기집권을 목적으로 자의적인 수정을 가함으로써 변질되었었다. 내각제도를 논하는 자리에서 정체를 논하는 것은 대통령제하에서의 내각이란 결국 집권자의 자의로 조직되는 것이며 특히 한국적 특질인 국무총리 제도의 본질을 규명하기 위함이다.

제헌헌법하에서의 내각은 국무원으로 대통령·국무총리 기타 국무위원으로 조직되었는데 국무원은 합의체로서 대통령의 권한에 속한 중요국책을 의결하는 실질적 권한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국무총리 임명은 국회의 사후승인을 요하였을 뿐이고 국무위원은 대통령이 자유로이 임명할 수 있었으며 비교적 순수한 대통령제를 취하여 대통령의 국회해산권이 없는 대신에 국회의 내각불신임결의권도 없었다. 제1차 개정헌법에서는 대통령 직선제와 부통령제가 채택되었고 국회의 내각불신임결의권이 신설되었으며, 국무위원은 국무총리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면하도록 하여 그 위상이 강화되었다. 그러나 제2차 개정헌법에서는 당시 대통령 이승만의 장기독재집권화가 기도되어 국무총리제가 폐지되었으며 대통령의 권한강화와 내각의 위상격하 현상이 발생했다. 제3차 개정헌법에서의 의원내각제도 채택은 역사적인 필연성으로 행정권은 내각인 국무원에 귀속되고 국무원은 국무총리와 국무위원으로 조직되었으며, 민의원에 연대책임을 지는 형식이었다. 국무총리는 대통령이 지명하여 민의원의 동의를 구하여 선출되었고 국무위원은 국무총리가 임명하여 대통령이 확인하였으며 국무회의 또한 국무총리가 주재하는 의결기관이었다.

5·16 쿠데타로 제2공화국은 붕괴되었고, 제5차 개정헌법에서는 다시 대통령제로 환원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내각제도는 크게 변화되었다. 과거 국무위원은 행정각부의 장관으로서의 지위를 겸하였으나 형식적인 분리가 이루어졌고 국무회의는 의결기관에서 심의기관으로 약화되었다. 과거 국무총리 임명에 대한 국회의 승인이 삭제되었고 국무위원은 국무총리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하는 동시에 국무총리에게 국무위원 해임건의권이 부여되었다. 제7차 개정헌법에서의 한국정치사상 유래없는 절대적 신대통령제가 채택되어 국무총리·국무위원은 대통령의 보좌기관으로서의 기능에 국한되는 행정권의 통합화가 가속화되었고 이는 제8차·제9차 개정헌법에서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제9차 개정헌법에서는 대통령제도를 비교적 본래의 형태로 환원하였으나 국무총리·국무위원·국무회의·행정각부 등 내각제도는 제5차 개정헌법 이후의 틀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입법기관[편집]

立法機關

정치제도로서의 한국의 국회는 프랑스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절대주의체제에 대한 혁명을 통해 국민의회가 형성된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또한 영국에서 보는 바와 같이 등족회의(等族會議)가 기본적으로 그 구성의 골격이 되어 근대의회로 전환한 것도 물론 아니었다. 한국의 의회는 국민국가 형성기에 기반없이 성립시킨 통치기관이다. 개인주의가 발달되지 않은 곳에서 정치제도의 주체적 구성자인 개인은 의회주의를 정통화하기 위한 신화(神話)로서 역할하였으며, 따라서 많은 제도적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다. 국가의 정책결정상 건국 초기에는 국회의 권한이 강력하였으나 점차 약화되었고, 구조상으로는 국회와 행정부의 균형적 분화가 이루어진 듯하였으나 기능상으로는 상회침범과 행정의 우월성이 뚜렷하였다. 헌법에 담겨진 구조와 제도는 시간과 역사와 선례(先例)의 누적(累積)을 형식적으로 다듬은 유형을 규정한 것이다.

건국 후 우리나라 정치제도의 유형규정을 정리하면 다음 표에서 보는 바와 같다.

행정관료기구[편집]

行政官僚機構

관료제는 임명직의 전문행정관리가 책임을 지지 않으면서 정치지도를 행하는 정치형태를 의미한다. 건국 후의 우리나라 관료제는 민주적 공무원제와 신관료제를 채택하고 있다. 민주적 공무원제는 시민사회의 성장과정에 나타난 것으로 절대제적 관료제의 개념에 대립되는 것이다. 이러한 관료제 하에서의 관리는 지배자와 피지배자와의 자동성의 사회구조에서 분명한 것처럼 피지배자의 공복(公僕)이다.

관료제가 가장 큰 정치문제로 된 것은 현대사회의 이른바 신관료제의 경우이다. 건국 후 대중적 민주주의가 출현하면서 경제문제나 사회문제를 신속히 그리고 능률적으로 해결해야 할 필요성에서 행정기능도 필연적으로 양과 질의 두 면에서 확대되었다. 이와 같은 복잡한 정책의 전문화와 규격화는 불가피하게 되어, 위와 같은 기능적 담당자로서의 새로운 행정관료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권력은 상부에서 주로 관료기구를 통하여 정책을 사회의 저변으로 하강(下降)·침투시킨다. 또한 사회의 저변에서 권력에로 향하는 상부과정이 정치권력의 동태적 과정이다.

영국에서는 항구적 직업공무원제도 19세기 초엽에 싹트고 발전되었지만, 한국에서는 형식상 건국 후 그 제도보장이 논의되었다. 그러나 사실상 정치와 행정의 분명한 구분이 미확인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朴 文 玉>

민주의원[편집]

民主議院

미군정(美軍政)의 최고자문기관. 미군정청은 1946년 2월 14일 미군정청 제1회의실에서 남조선 대한민국대표 민주의원을 개원(開院)하고 의장에는 이승만, 부의장에는 김구(金九)·김규식(金奎植)이 취임하였다.

민주의원이 개원하게 된 것은 좌익정당은 좌익대로 소위 민주주의 민족전선을 결성하여 임시적인 민주주의정부 수립의 책임을 담당하려고 하기 때문에 미·소 공동위원회도 큰 성과가 기대되지 않던 분위기에서 탄생되었다. 따라서 민주의원의 성격은 한국에서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과도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미군정의 최고 자문기관 역할을 하는데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미군정 당국이 민족진영의 정당지도자 및 유교·불교·천주교·기독교 대표 기타 애국지사들을 망라하려고 노력하였던 데서 알 수 있다.

민주의원은 그해 3월 18일 임시정책대강 27개조를 결정·발표하기에 이르렀는데, 계획경제체제에 유사한 경제체제에 입각하여 균등사회(均等社會)를 건설한다는 데 그 목표를 두었다. 그러나 그 뒤 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개최됨에 따라 모스크바 결정에 의한 신탁통치를 반대해 오던 우익계의 입장이 미묘하게 되었다. 또 민주의원 의장 이승만의 사의(辭意)를 만류함으로써 사임은 형식상 보류되었으나 실질적인 집무를 못하게 되자, 김규식 부의장 주재하에 운영하였으나 민주의원의 활동은 부진상태에 빠졌다.

미·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이승만은 남한만이라도 임시정부를 조직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단독정부운동을 벌였고, 이에 대해 김규식·여운영(呂運亨) 등 좌·우 합작운동을 구체화하여 10월 7일 좌·우합작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좌·우합작위원회가 구성된 후 동년 10월에 이르러 입법의원(立法議院)이 설치되어 중간 우파의 합작을 보게 되었다. 이와 같은 사태의 발전으로 비상국민회의(非常國民會議)와 민주의원은 실질적인 기능이 중지되었으며, 1948년 대한민국 국회성립에 앞서 해산되었다.

입법의원[편집]

立法議院

미군정 하의 입법기관. 좌·우합작운동이 좌·우 각 정당의 강력한 반발로 오랫동안 혼란을 겪고 있는 동안 미군정은 입법기구 설치준비를 진행하여 1946년 10월 12일 군정법령 제118호로써 입법의원의 창설을 발표하였다.

입법의원은 90명의 의원으로 구성되었고 그 중 45명은 민선(民選)으로 하였는데, 민선 45명은 주로 한민당·독립촉성중앙협의회·무소속이 다수를 차지했고, 관선(官選) 45명은 중간 좌·우파를 중심으로 하여 좌·우의 균형에 주력한 것을 볼 수 있다.

미군정청이 입법의원을 설치한 목적은 모스크바 협정에 따라 미군정이 남조선에 존속할 때까지 정치적·경제적·사회적 개혁의 기초로 사용될 법령초안을 작성하여 군정장관에게 제출하는데 있었다.

그런데 미군정청의 정책적 지향은 김규식(金奎植) 의장을 중심한 좌·우합작파의 중간노선이 한 정치세력으로 중추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건전한 정치적 중심세력이 형성되지 않았고, 극우(極右)나 극좌(極左)에 참여하기를 꺼리는 대부분의 지식층까지도 조직화되지 않았으며, 좌·우익의 대립을 타협·조정할 만한 역량이 결여되어 좌·우합작에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또한 입법의원의 운영상황도 미미하여 그 존속 기간인 1년 반 동안 단 11개의 효력발생적 법률을 통과시킨 데 불과했다.

입법의원이 개원된 뒤 1946년 12월 17일 민주의원은 성명을 발표하여 그 자주적인 존속을 주장하였으니, 그 성명에서, '본원(本院)은 본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에서 최고정무위원회로서 설립되었던 바 금반 입법의원의 설립과 동시에 하지 중장의 자문에 응할 기능을 해소하고 본래의 임시정부의 사명을 완수하도록 계속 노력함' 이라 한 것으로 보아 입법의원과의 관계를 알 수 있다.

입법의원은 1948년 5월 19일 해산될 때까지 그 기능면에서 질·량 어느 면에서도 비능률적이며 비정상적인 존재에 불과했지만 남한의

대외민주정치 육성의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제1공화국의 정치체제[편집]

第一共和國-政治體制

제헌당시[편집]

制憲當時

해방후 미·소 양국의 국가이익이 상반되었기 때문에 미·소 공동위원회는 완전히 결렬, 남한에서는 급진적인 단극화 과정(單極化過程)을 밟아 1948년 5월 10일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이 역사적인 5·10 선거에서는 이승만 노선을 지지해 오던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와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이 제헌국회에서 수위를 차지하였다. 제헌국회의 제1보적 업무는 헌법기초에 있었다. 그 기초과정에서 있어서는 국회의 단원제(單院制)와 양원제(兩院制), 대통령중심제와 내각책임제, 대통령 선출에 있어서 직접선거와 간접선거, 대통령에게 부여될 비상권의 범위와 정도 등 국가권력 구조에 있어서 조직기술 문제가 주로 토의되었다. 당시 한국민주당은 이승만을 형식상 국가수반으로 하고 행정의 수반을 자당(自黨)에서 차지할 것을 고려하여 의원내각제를 기도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국가와 행정의 수반인 미국의 대통령제를 모방한 실권있는 대통령이 되기를 원하였으므로, 내각책임제로 되어 있던 헌법초안을 수정하여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광범한 연립정부를 형성하였다.

당시의 헌법은 첫째, 정치정세가 복잡다난한 건국 초기에 있어서 참의원(參議院)을 구성하는 문제의 필요성은 있었지만, 국정의 신속한 처리와 재정의 긴축을 위하여 우선 단원제(單院制)를 채택하였다. 그 대신 국회의 횡포와 경솔한 행동을 견제하는 수단으로서 대통령에게 법률안에 대한 거부권을 부여하였다. 둘째, 제헌당시의 한국은 정당제도의 기초가 확립되어 있지 않았고 군소정당이 분립하여 다수정당이 동요하고 그 이합집산(離合集散)이 부단했다. 이러한 상태에서 예견되는 정부의 불안정성을 극복하고 안정된 기초 위에서 강력한 행정을 추진하기 위해 대통령중심제가 채택되었다. 셋째, 대통령과 부통령은 국회에서 무기명투표로써 선출하는 간접선거의 방법을 채택하였다. 넷째, 대통령에게 법률의 효력을 가진 긴급명령권과 긴급재정처분권을 부여하였다. 다섯째, 제헌시의 헌법에 있어서 국민의 권리의무와 삼권분립제도 등 이외에 경제에 관한 규정도 설정, 정치적·사회적·경제적 민주주의의 조화를 꾀하려 하고 있다. 권력구조에 있어서는 대통령중심제 헌법의 골격에다 내각책임제적 요소를 가미했는데, 그것은 대립된 정치세력의 타협문서였다.

제1차 개헌[편집]

第一次改憲

개헌 당시 내각책임제를 기도한 한국민주당(후에 민주국민당으로 개칭)은 대통령제를 개정하여 대통령을 국민의 상징적인 존재로 하고, 행정의 수반과 실권을 국무총리가 장악하는 의원내각책임제로 개정하고자 제1차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하였으나 부결되고 말았다. 1950년 5월 30일의 제2회 총선거에서는 남북협상(南北協商)을 추진하던 여러 세력이 많이 진출하였다. 동년 6월 25일의 전쟁으로 말미암아 정국까지도 혼란과 무질서와 불안의 연속상태를 이루었다. 정부에서는 이대통령이 초대 선거 때와 같이 야당세력이 많은 국회에서는 선출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예측하여 1951년 11월 30일 대통령직선제를 주요 골자로 하는 헌법개정안을 제출하였으나 1952년 부결되었고, 이후 계속된 정치적 파동을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해졌다. 이에 제2차 개헌안을 다소 수정하여 정부측의 개헌안과 절충한 소위 '발췌개헌안'을 통과시켰다. 이 발췌개헌안의 통과에 따라 이승만이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이를 계기로 이승만을 중심으로 하는 자유당 정부의 독재정치화가 전개되었고 이에 대해 민주국민당(이전의 한국민주당)은 적극적인 호헌투쟁(護憲鬪爭)을 개시했다.

제1차 개정헌법은 민의원의 국무원불신임권을 인정하고, 이에 대응하여 국무총리 및 국무위원의 책임을 규정함으로써 내각책임제의 본질적 요소를 채택한데 반해 정부는 국회해산권이 없었다. 그 위에 당시의 헌법은 국무총리의 임명에 대한 국회의 승인권 및 국무위원과 행정 각부의 장의 임면에 대한 국무총리의 제청권까지도 규정함으로써 내각책임제적 색채를 농후하게 하고 있었다. 대통령은 명실상부한 행정권의 수반이며 국무회의의 의장이고 행정 각부의 사무집행을 감독할 실권이 있었다. 대통령의 임기는 4년으로, 국민에 의하여 선거되고 불신임권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국무총리를 임명할 때에는 국회의 승인을 얻어야 하되 그 해면(解免)은 대통령의 자유에 속하였다는 사실 등을 고려할 때, 당시의 헌법은 우리나라의 정부형태를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없는 기묘한 절충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제2차 개헌[편집]

第二次改憲

발췌개헌안의 통과 이후 자유당은 장기집권을 위해 1954년 11월 29일의 소위 4사5입(四捨五入) 헌법개정과 2·4 파동에 의한 국가보안법 제정을 자행하여, 부산정치파동 때 이미 4·19 혁명의 씨를 자유당 자신이 뿌려 놓았다. 자유당은 1954년 5월 20일의 총선거에서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자 또다시 동년 9월 6일 국회에 헌법개정안을 제출하고, 11월 29일 4사5입이란 전대미문의 의결방법으로 이 개헌안을 통과시킴으로써 여·야간이 폭력에 호소하는 투쟁까지 벌여 평화적 정권교체의 분위기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 개헌안의 주요 골자는 국민투표제의 채택, 국무총리제 및 국무원 연대책임제의 폐지, 자유경제체제에의 이행, 이대통령에 대한 중임제한(重任制限)의 철폐 등이다. 이 헌법에는 대통령의 국회해산권이 없는 대신 국회의 정부 불신임권도 없고, 따라서 대통령의 임기 동안은 대통령을 중심으로 하여 행정이 운용된다는 의미에서, 그 근본에 있어서 미국식 대통령중심제를 채택하였다. 다만 우리나라의 정부형태는 제1차 및 제2차의 개헌을 통하여도 국회와 정부 사이의 긴밀한 연락에 관한 제규정을 그대로 존치(存置)한 점과, 의결기관으로서의 국무원이 존재하는 점에서 순수한 미국식 대통령중심제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과도정부의 정치체제[편집]

過渡政府-政治體制

1960년도의 4·19 혁명으로 자유당의 이승만정권은 붕괴되고 그 수습을 위하여 허정(許政) 과도정부가 수립되어, 제2공화국이 수립될 때까지 정국의 안정을 도모하고 신정부에 정권을 맡길 과도적인 정부역할을 하게 되었다. 즉 허정 과도정부는 자유당정부가 경찰국가화되어 시정(施政)을 마음대로 하던 횡포정치를 고쳐 새로운 정치질서를 마련하는데 교량역할을 하게 되었다.

선거관리내각(選擧管理內閣)인 과도정부는 1960년 4월 25일, 28일에 걸쳐 조각(組閣)을 완료했다. 허정 수반은 조각이 끝난 날 담화를 발표하여 국민의 여망에 따라 3·15 부정선거의 책임을 밝혀 엄정 처단할 것과 경찰을 중립화하고 질서를 회복할 것을 약속했다. 4월 29일의 첫 각의(閣議)에서는 과도정부가 국내외의 신임획득에 노력할 것이며, 각 도의 지사와 경찰국장을 전면적으로 경질·정리할 것을 결의하고, 치안확보와 공무원의 기강쇄신에 노력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과도정부는 4·19 혁명의 주체세력에 의하여 구성된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과도정부는 4·19 정신에 의거한 과감한 정책을 수행한다기 보다는 오히려 혁명 이후의 사태수습과 총선거의 공정관리라는 사명을 수행하여야 했다.

한편 4·19 이후 자유당에 대체하여 민주당이 전국에 걸쳐 조직력을 확대·강화하게 되니, 행정부는 상층부가 과도정부로 되어 있는데 비해 국회는 민주당 세력이 지배하였다. 민주당은 그들이 재야투쟁 시절에 제시해 오던 의원내각제(議院內閣制)로 권력구조를 변모시키게 되었다. 민주당 내부에서도 개헌문제에 관해서 신·구파의 의견이 일치한 것은 아니었으나, 자유당 타도의 여세를 몰아 효과적으로 권력장악에 적용하기 위해 개헌하는 방향으로 기울어졌다.

당시 국회에서 개헌문제에 관한 논의의 초점이 된 것은 첫째, 국회를 해산하고 총선거를 실시하여 신정부를 조직하자는 안(案)과, 둘째 국회에서 내각책임제 개헌을 한 다음 총선거를 실시하여 정부를 수립하자는 안이었다. 결국 선결(先決)·후선(後選)에 합의를 본 국회에서는 개헌기초위원회(改憲起草委員會)를 구성하였다. 이 개헌 위원회에서는 기본권의 수정, 내각책임제로의 권력구조 개편, 정당의 헌법적 보장, 법관선거제, 헌법재판소의 신설 등 광범한 개정을 하였다.

이 개정안은 그해 6월 15일 국회본회의에서 통과되어 제2공화국의 신헌법으로 채택되었고, 동년 7월 29일 새선거법에 의거하여 제5대 민의원·참의원선거가 실시되고 제2공화국이 탄생하게 되었다.

제2공화국의 정치체제[편집]

第二共和國-政治體制

내각책임제[편집]

內閣責任制

한국정부의 권력구조문제는 1948년 7월 17일의 제헌(制憲) 당시부터 1962년 12월 26일에 제3공화국헌법이 국민투표에 의하여 확정될 때까지 끊임없이 논의되어 온 문제의 하나였다. 1952년 7월의 제1차 개헌안에서부터 1960년 11월의 제4차 개헌안까지의 내용이 주로 정부의 권력구조 문제를 위요(圍繞)하고 제기된 것도 바로 그와 같은 사정을 말해주고 있다. 우리 정부의 권력구조에 있어 이른바 미국식의 대통령제와 영국식의 내각책임제(內閣責任制)의 타당성 여부는 그것이 이승만 치하에서 정치적 타당성을 둘러싸고 제기된 듯이 보이지만, 기실 그것은 당시 각 정당의 정략(政略)과 관련되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시 민주당의 정강정책에서는 내각책임제야말로 가장 민주적 책임정치를 수행할 수 있는 방법임을 주장하고 있었으나, 이러한 민주당 및 모든 내각책임제의 주장은 이승만의 독재정치에 대항하는 무기에 불과하였음이 사실이다.

1960년 4·19 혁명으로 탄생한 제2공화국의 장면(張勉) 총리는 초대국무위원의 조각(組閣)을 발표하고 건국 12년만에 최초로 내각책임제를 채택하는 제3차 헌법개정을 단행했다. 개정된 헌법에서는 국민의 기본권의 강화, 내각책임제의 채택, 경찰의 중립, 지방자치단체의 장의 선거제 채택 등이 주요 내용으로 되어 있었다. 이러한 내각책임제에 기초하여 제2공화국에서 권력의 핵심인 국무원(내각)은 국무총리와 국무위원으로써 조직하되 국무위원의 수는 8인 이상 15인 이내로 하였고, 국무위원은 국무총리가 임명하여 대통령이 확인하되 군인은 현역을 면해야 임명될 수가 있었고, 그 과반수는 국회의원이어야 했다(헌법 69조). 제2공화국의 헌법이 내각책임제의 이념형(理念型)에서 모색되었기 때문에 국무총리는 내각구축의 초석(礎石)으로서 다음과 같은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즉 국무총리는 ① 국무원의 조직자로서 국무회의를 소집하고 그 의장이 되는 내각의 주재자이며, ② 국회의 지도자 및 원내세력의 중재자로서 최대의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국회에 참여하며, ③ 국무원과 국회, 국무원과 국가원수 사이의 매개자이며, ④ 관직의 분배자였다. 따라서 국무총리는 각료 중의 제1인자적 존재였을 뿐만 아니라 각료의 승인없이 정책결정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입헌적 정치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국무총리는 다수당의 당수 또는 지도자임과 동시에 국회의 지도자이고 국무회의의 의장이기 때문에, 제반 행정·정책결정의 조정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제2공화국의 장면정권은 그 출발 당시부터 파쟁으로 말미암아 불안정하였으며, 성급한 대중의 혁명과업 수행의 촉구와 학생청년층의 부단한 압력, 경제적 역조(逆調) 등의 여러 가지 여건 아래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면정권은 정치적으로는 건국 후 가장 뚜렷한 민주주의제도와 지방분권과 민권신장에의 장치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정치적 지도성과 정치적 감각이 이에 따르지 못했기 때문에 집권 9개월 동안 혼란과 무질서의 극한 상태에 놓여 있다가 붕괴되고 말았다. 사회적인 통합의 실체가 결여되어 있는 과도적 후진사회에 있어서 그 유일한 거점인 정치적 내지 권력적 통합기능이 해이될 때, 유기적인 제사회구조나 사회기능도 전면적으로 붕괴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민주당집권 9개월 동안의 귀중한 정치적 경험이라 할 수 있다. 제2공화국이 탄생하였을 때는 그것이 발전을 수반하는 자유와 민주주의의 촉진제라고까지 보였지만 그것은 결과적으로 의회정치에 대한 불신까지 초래하여 5·16 군사정변을 가져왔다.

국가재건최고회의[편집]

國家再建最高會議

제3차 개헌 후에 집권하게 된 민주당정권은 내각책임제의 장점을 구현하지 못하고 도리어 약체정부, 정쟁(政爭)의 격화, 정치인의 부정·부패라는 폐단을 낳았다. 특히 정쟁으로 인한 정계의 불안정과 사회질서의 혼란으로 인하여 국가의 기본질서가 동요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1961년 5월 16일 미명에 군사혁명이 이루어졌다. 군사혁명의 주체는 군사혁명위원회(軍事革命委員會)를 설치하고 3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 군사혁명으로 말미암아 정당·사회단체는 해체하는 동시, 7·29 총선거를 통해 수립된 제2공화국은 헌정(憲政)을 중단하게 되었다. 5월 19일에는 군사혁명위원회가 개칭되어 국가재건최고회의(國家再建最高會議)로 발족하게 되었다. 그후 1961년 6월 6일에 제정·시행된 국가재건비상조치법(國家再建非常措置法)은 혁명기간의 최고통치기관으로서 국가재건최고회의를 두고, 입헌민주국가가 정상적일 때는 그 예가 없는 강력한 권력집중주의를 채택하였으며, 헌법에 규정된 국민의 기본적 권리도 혁명과업의 수행에 저촉되지 아니하는 범위 안에서 보장하는 등 헌법의 일부효력을 정지하게 되었다.

1962년 봄부터 이듬해 여름경에 민정이양을 전제로 한 제3공화국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헌법개정이 논의되었다. 이리하여 1962년 11월 5일 국가재건최고회의는 대통령책임제, 단원제(單院制)를 주요 내용으로 한 헌법개정안을 의결하여 공고했다. 공고된 헌법개정안은 국민투표를 거쳐 12월 26일 정식으로 공포되었다. 그 후 혁명주체 세력의 민정참여 여부 및 민정이양 시기 등의 문제로 국내정국은 중대한 파란을 겪었는데 국가재건최고회의는 1963년 12월 17일 제3공화국의 탄생과 함께 해체되었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은 20∼32인 이내로 구성되며 최고위원의 권한은 국회의 권한 행사, 대통령의 권한 대행, 행정에 관한 권한, 내각의 조직에 대한 권한, 사법에 대한 행정권의 통제 등 광범한 영역에 미치고 있었다.

제3공화국의 정치체제[편집]

第三共和國-政治體制

대통령중심제[편집]

大統領中心制

일반적으로 후진국가에 관한 한 미국식 의미의 대통령제는 존재하기 어렵다. 미국헌법의 대통령제는 요컨대 권력 담당자간의 상호독립 내지 입법부와 행정부의 양극적 관계, 권력담당자간의 동위(同位)를 통한 상호의존, 입법부와 행정부의 견제와 균형을 원리로 하는 고전적 권력분립주의에 입각하여, 국회와 정부의 상호독립 및 양자간의 견제를 통한 균형 내지 동위성을 그 조직원리로 한다. 그러나 후진국에서는 헌법상의 권력구조를 비록 미국헌법의 체제에서 모방했다 하더라도, 그 실제의 운영에 있어서는 위에서와 같은 미국헌법의 경우와는 거리가 먼 것이며, 오로지 권력의 단극화(單極化) 내지 집중화를 기함으로써 정치적 권력의 안전한 행사를 목표로 하고 있다. 집행부의 비대해진 권력은 새로운 독재라고 비난받기도 했지만 이와 같은 새로운 현상은 특히 한국 정부가 전시 또는 준(準)전시체제하에 장기간 놓여 있었기 때문에 도래한 것이었으며, 한때는 독재화 방지의 안전판인 사법부가 제청한 법관임명을 거부하는 것 등을 비롯하여 사법권의 독립까지도 커다란 위협을 받곤 했다.

제3공화국의 대통령중심제는 정부의 국회해산권이 인정되지 않는 대신 내각책임제의 본질적 요소인 국회의 정부에 대한 불신임권(不信任權)이 인정되지 않는 점에서 고전적 권력분립주의에 충실한 대통령중심제가 되어 있다.

⑴ 행정권은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정부에 속하는 바 국회는 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은 물론 대통령과 더불어 국무회의를 구성하는 국무총리와 국무위원에 대하여도 불신임권을 가지지 못한다. 이 점에 관하여 종래의 대통령중심제가 국무위원에 대한 개별적 불신임권만은 인정한 데 반하여, 제3공화국의 대통령중심제에서는 이것마저 부인하고 그 대신 국무총리나 국무위원 해임건의권을 국회에 인정했을 뿐이다.

⑵ 제2공화국의 내각책임제에서는 물론 그 이전에도 제헌 이래 계속하여 의결기관의 성격을 가졌던 국무원(國務院)의 회의인 국무회의의 성질이 변경되어 단순한 심의기관으로서의 지위를 가질 뿐이고 대통령을 구속할 수 있는 의결기관의 기능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대통령은 그의 권한에 속하는 사항은 국무회의의 심의 결과 여하를 불문하고 소신에 따라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점에서 명실상부한 행정권의 수반이었다. 이 점 과거의 국무원 중심제적 성격을 탈피한 그야말로 미국식의 순수한 대통령중심제인 것이다.

⑶ 국무총리제를 두면서도 종래의 경우와는 달리 그 임명에 대한 국회의 동의를 필요로 하지 않게 한 것도 대통령중심제의 원리에 충실하려고 한 것이다. 이에 반해 국무총리는 대통령의 단순한 보좌관이며 국회의원을 겸할 수 없고 행정권의 수반도 아니며 국회가 국무총리의 해임을 대통령에게 건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정부의 행정관리인이었다.

요컨대 제3공화국은 대통령중심제를 채택하고 있으나 그것은 주로 다음의 세 가지 점에서 미국의 대통령중심제와는 다르다.

⑴ 부통령제(副統領制)가 없다는 점이다. 이것은 만일 부통령을 두면 첫째, 상원의장을 겸하는 미국과는 상이하여 부통령은 대통령이 유고시에 그 직무를 대행할 뿐 별다른 기능이 없고, 오히려 무용지물이 되는 반면 국비의 남용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 둘째 정부내에 각각 대통령과 부통령을 중심으로 파당(派黨)이 형성될 염려가 있고, 특히 과거의 예에서와 같이 양자가 소속정당을 달리하는 경우에는 그 위험이 크다는 것, 셋째 부통령이 대통령과 동일정당에서 선출되는 경우 부통령은 여러 가지 고려 때문에 그 정당의 참다운 제2인자가 아닌 2류 인물이 될 염려가 있다는 점 등을 고려한 데서 유래한다. 이리하여 제3공화국의 대통령중심제에서는 부통령을 두지 않는 대신 행정부의 명실상부한 제2인자로서 대통령을 보좌하고 대통령의 의사를 받들어 정부를 통할·조정할 국무총리를 두게 된 것이다.

⑵ 제3공화국에서의 국무회의는 헌법상의 기관으로 단순한 자문기관이 아닌 점에서 미국의 이른바 내각(cabinet)과 다르다. 즉 국무회의는 헌법기관으로서 비록 의결권은 없어도 정부의 권한에 속하는 중요사항은 반드시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야 하는 것이다.

⑶ 제3공화국에서의 개헌(改憲)의 결과 국무총리와 국회의원의 겸임이 인정되었는데 이는 가능한 한 엄격한 권력분립(權力分立)의 원칙에 따라 국무장관을 비롯한 행정공무원과 국회의원의 겸임을 인정하지 않는 미국헌법 및 그 취지에 따른 제5차 개헌 때의 그것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그리고 그 주요 목적이 국회와 행정부의 협조의 강화 및 정당(여당)을 통해 양자를 함께 움직이려는데 있었지만, 그것이 순수한 대통령중심제의 상례(常例)를 벗어난 것은 사실이다. 또 이러한 겸임의 허용으로 말미암아 대통령의 정치운영의 여하에 따라 대통령중심제에서도 내각책임제적 운용이 어느 정도 가능하게 되었지만, 국무회의가 의결기관이 아니고 단순한 심의기관에 그치는 한 그 가능성은 희소하다.

⑷ 미국과는 달리 우리나라의 국회와 정부는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즉 정부의 법률안제출권, 국무총리·국무위원·정부위원의 국회본회의 출석·답변 요구권이 국회에 있다는 것 등이 그것이다.

제4공화국의 정치체제[편집]

第四共和國-政治體制

신대통령제[편집]

新大統領制

1972년 10월 17일 대통령 특별선언 형식으로 발표된 유신적 정치개혁안, 이른바 10월유신은 격동하는 국제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구시대적 유산인 무질서·비능률·정치적 파쟁을 척결하여 국론통일과 권력의 극대화를 기하며 민족적 지상과제인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추진하기 위한 비상조치라고 그 배경과 이유를 내세웠는데 한 마디로 5·16에 이은 두 번째 쿠데타였다. 한국적 민주주의를 표방한 집권세력들의 주장과는 달리 장기집권과 독재의 시나리오에 지나지 않는 10월유신은 한국의 민주주의 제도를 수십년 후퇴시켰을 뿐이었다.

비상계엄령이 발동된 가운데 국회가 해산되고 정당 및 정치활동이 중지되었으며 헌법조항의 일부가 효력이 정지되었다. 비상국무회의가 국회의 기능을 대신하였고 동회의에서 입안된 헌법개정안이 동년 10월 27일 공고되어 동년 11월 21일 국민투표에 부의, 확정되었다. 동년 11월 25일 통일주체 국민회의 대의원선거법이 제정·공포되어 동년 12월 15일 선거가 실시되었고 동월 23일 제1차 집회에서 박정희를 제8대 대통령으로 선출함으로써 제4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이상의 과정에서 알 수 있는 바, 이는 헌정질서의 파괴이며 집권욕에 눈이 먼 반민주·반민족적 파쇼군부집단의 만행일 따름이었다.

제7차 개정헌법에 의한 제4공화국의 정부형태는 프랑스 제5공화국 헌법에서 나타난 신대통령제 또는 절대적 대통령중심제로서 이는 사실상의 독재체제를 의미하며 카를 뢰벤슈타인이 '공화정적 군주'라고 갈파한 것이었다. 즉 본래의 대통령제 정부형태에서의 대통령은 수평적으로 병립하는 입법·사법·행정 3부중 행정부의 수반의 지위에서 단지 국가원수로서 중립적인 조정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신대통령제 정부형태에서의 대통령은 3부에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국정을 좌우할 수 있는 국가권력까지 보유하는 소위 영도자로서의 지위를 점하고 있다. 각설하면 제4공화국 정치체제의 특질은 대통령의 국회지배와 국가권력의 이원화에 있다. 신설된 통일주체국민회의와 대통령·헌법위원회가 주권행사기관으로서의 지위를 점하였고, 국회·정부·법원은 일반적 통치기관으로 격하되었다. 국민의 주권적 수임기관으로서 설치된 통일주체국민회의가 국회의 상위의 지위에서 대통령과 대통령이 일괄추천하는 국회의원 정수의 3분의 1을 선출하였고 국회가 발의한 헌법개정안을 최종적으로 의결·확정하는 권한과 통일정책에 관한 심의·확정권을 보유하였는데, 동회의에서 선출된 대통령이 그 의장직을 점함으로써 사실상 대통령의 의사에 반하는 의사결정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대통령은 국회의원 정수의 3분의 1에 대한 추천권을 보유하여 실질적으로 국회를 장악하였으며 국회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음에도 국회해산권을 보유하였고 대법원장의 임명권을 보유함으로써 법원에 대한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헌법위원회 위원의 임명에 있어서도 외견상 3분의 1에 대해서만 직접적인 임명권을 행사할 수 있었으나 사실상 법원과 국회의 장악이 가능한 상태이므로 전원에 대한 영향력 행사를 부인할 수 없다. 더욱이 국회와 법원의 견제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대통령의 긴급조치권과 국민투표 부의권은 그 권력기반을 더욱 공고히 하는 것이었다. 국회는 상기한 바와 같이 3분의 1이 대통령이 추천하여 통대에서 선출된 간선제의원이고 나머지 3분의 2가 직선제의원이어서 최소한 특별의결정족수를 지배당하였다. 따라서 국회의 권한은 유명무실한 것이었고 더욱이 대통령의 지위강화에 대한 반대급부로 많은 제약이 가해졌다. 회기가 단축되고 국정감사권은 박탈되었으며 대통령의 국회해산권 앞에 무기력한 존재로 전락하였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의 피살로 조종을 친 8년간의 제4공화국, 유신공화국은 한국 헌정사의 암흑기·후퇴기였으며 장기독재를 위한 긴급조치권의 남발로 시작되고 종료되었다. 동시에 권력에 눈이 먼 정치군부에게는 교과서적 지침이 되어 제5공화국 주체들에게 집권명분을 제공한 셈이 되었다.

제5공화국의 정치체제[편집]

第五共和國-政治體制

절충형 대통령제[편집]

折衷型大統領制

권력에의 집착과 장기독재로 치달았던 5·16 쿠데타 주체들의 제4공화국은 결국 국민적 저항에 부딪쳤고 미증유의 인권탄압과 권력집중 현상이 야기되는 가운데 내부적 권력투쟁이 심화되던 중 1979년 10·26 사건으로 비극적 종말을 고하였다. 국민의 민주화의 열망은 지대한 것이었으나 현실적으로 한국의 정치 현실은 지극히 불안정한 상태였다. 신대통령제에 대한 반발에서 제2공화국 당시의 내각책임제 논의가 부상하였으나 정치현실상 추진하기가 불가능한 상황이었고 민주화와 경제적 안정, 왜곡된 정치·사회개혁과 평화적 정권교체라는 국민의 열망이 가열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기존의 정치·정당세력들은 파쟁과 이합집산만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러한 외면적인 혼란이 점차 가시화되는 상황 속에서 '12·12 사태'가 발생, 소위 신군부세력이 대두되기 시작했고, '5·17 전국비상계엄 확대조치발동'과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기점으로 정치 전면에 부상했다. 결국 국민의 민주회복의 열망은 5·16에 뿌리를 둔 정치군부 일단에 의해 또다시 무시된 것이다. 4공 붕괴 직후인 1979년 11월 26일 국회는 헌법개정을 논의하기 위해 헌법개정심의 특별위원회를 구성, 작업에 들어갔는데 당시 최규하 행정부측에서 특별기구를 설치하여 헌법개정 작업을 주도하려는 움직임을 나타내 전원일치로 결의를 새롭게 했다(최규하 스스로 과도관리 정부임을 선언해 놓고 헌법개정에 관여하려 한 것은 이미 그 당시부터 5공 신군부세력의 꼭두각시임을 입증한 사례였다). 국회 개헌특위에서는 정당·정파간의 이견은 있었지만 국민 각계각층의 의견을 수렴한 결과 대통령 중심제 골격을 유지하되 직선제·단임제(임기축소), 군의 정치개입과 장기집권 방지를 위한 명문규정의 설치, 평화적 정권교체를 위한 제도적 장치마련 등으로 집약되었다.

그러나 국회의 개헌특위와 행정부측의 헌법개정심의위원회의 2원적 개헌작업이 서서히 대립상을 보이기 시작한 가운데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와 정치활동금지·대학휴교령을 골자로 하는 계엄포고령 제10호가 발동되었다. 물론 이것은 신군부세력의 집권시나리오의 1장이었는데 이로써 국회의 개헌작업은 정지되고 행정부측의 개헌심위가 개헌작업을 주도하게 되었다. 1980년 5월 18일 전라남도 광주시 소재 전남대학교에서 휴교령에 반발한 일단의 학생시위가 발생했는데, 계엄군의 과잉진압으로 사태가 확대되기 시작했고 결국 민주개혁과 신군부타도를 요구하는 전시민적 시위로 발전하였다. 한국 헌정사의 영원한 민주향이자 부담으로 남겨진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미증유의 유혈참사와 더불어 인권탄압과 풀뿌리 저항의 산역사요 현장이었다. 그 과정에서 신군부세력의 구체적 형상화가 이루어져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로서 모습을 드러냈다. 국보위는 발족직후부터 '사회악 일소를 포함한 국가기강 확립' 등 4대 기본목표를 내세워 정치·경제·사회 전반에 걸친 소위 대개혁·정화작업에 착수했는데, 그 권력의 법적 근거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신군부세력의 집권을 위한 정지작업이었다. 당시의 최규하 행정부는 저들의 시녀에 불과한 노회한 기회주의자 집단에 불과했으며 결국 1980년 8월 16일 평화적 정권교체를 운운하며 사퇴하였고 동월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국보위 상임위 위원장 전두환씨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제5공화국의 정치체제를 논함에 있어서 이러한 일련의 정치적 과정을 서술하는 것은 정통성의 시비를 가리고자 함이며 동시에 무지하고 몽매한 주권자들의 각성을 촉구하기 위해서이다. 5·16 이후 지속되고 있는 파쇼군부집단의 독재는 바로 주권자인 국민의 무지와 맹목적인 복종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며 한국정치의 후진성과 파행성의 기초적 근거도 국민 자신이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주도의 개헌작업은 최규하 행정부 당시에는 정체되어 있었다가 전두환 집권 이후 본격화되어 1980년 9월 22일 확정된 정부발의 헌법개정안이 공고되었고 10월 22일 국민투표에 회부, 확정되었다. 10월 27일 공포와 동시에 즉시 발효된 제5공화국 헌법 부칙규정에 따라 국회와 기존 정당들은 자동해산되었고 국가보위입법회의가 신헌법에 의한 국회구성시까지 국회의 권한을 대행하였다. 그러나 국가보위입법회의는 사실상 초헌법적 기관으로 소급입법까지 가능한 제5공 정권주체들의 권력기반 강화를 위한 입법 중추로서 비민주적·위헌적인 권력기관이었다. 이미 '5·17 조치'로 정치·정당활동이 일체 금지된 상황에서 헌법개정작업이 진행되었다는 것만으로도 5공의 성격을 간파할 수 있는데 제4공화국 헌법의 연장선상에서 물리적 힘으로 정권을 탈취하고 자의적인 헌법개정을 통해 정치적 기반까지 구축한 5공 주체세력들의 행위는 반국가·반민주·반민족적 쿠데타인 것이다. 이것은 제5공화국의 정치체제를 살펴보면 더욱 자명해진다.

제5공화국 헌법에서는 대통령제 정부형태의 골격은 그대로 유지되는 대신에 의원내각제적 요소가 재가미된 절충형 정부형태로 환원하였다. 유신헌법에서 국가권력의 이원화를 야기시켰던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폐지하였고 대통령의 국회·법원 지배를 배제하여 3권분립화로 복귀하였다. 한국적 정치풍토의 소산인 의원내각제적 요소, 즉 국무총리제와 국무회의제는 4공 당시와 외형상으로는 차이 없었으나 4공에 비해 상대적으로 국회의 위상이 강화됨으로써 본래의 성격으로 환원되었고 국회는 비례대표제가 도입되기는 했으나 그 기초적 구성을 민의에 의존케 됨으로써 국정조사권의 부활과 함께 행정부에 대한 견제력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대통령은 단임제이지만 임기연장과 더불어 미국식의 대통령 선거인단에 의한 간선제였으며, 제한되기는 했으나 국회해산권과 비상조치권이 부여되어 실제로 5공 전반을 통하여 집권 여당과 행정권을 통괄하는 강력한 권위주의적 대통령제를 나타냈다. 이 점에서 5공의 정부형태는 프랑스 5공 헌법에서의 이원정부제와 유사하였다. 결국 5공 헌법의 이러한 문제점들은 정치현실 과정에서 4공과 다름없는 비민주적 독재상황으로 나타났고 정통성 시비까지 맞물려 거센 국민적 저항이 대두되었다. 이는 근본적으로 5공 자체도 정권탈취에 눈먼 소수세력이 국민의 지지가 없이 5·16이나 10월유신 같은 비합법적·비민주적 절차·과정에 의해 성립시킨 때문이었다. 결국 제5공화국은 제4공화국에 버금가는 민주세력 탄압과 파행, 정치·경제·사회적 불안과 왜곡·모순의 심화, 국민적 갈등과 좌절감 등 실망스런 정치사만을 남긴 채 분노한 주권자들 앞에 백기를 내걸게 되었다. 더욱이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대표되는 5공 주체들이 저질러 놓은 범죄행위들은 한국 사회전반에 심각한 골을 파놓았고 그 대부분은 오랫동안 치유하기 힘든 부담이 되고 있다.

제6공화국의 정치체제[편집]

第六共和國-政治體制

순화된 대통령제[편집]

純化-大統領制

1981년 2월 대통령선거인단의 간선으로 전두환 제11대 대통령이 제12대 대통령에 당선, 동년 3월 취임하였고 동년 3월의 총선거로 구성된 제11대 국회가 동년 4월 개원함으로써 제5공화국이 출범하였다. 그러나 5공은 출범 직후부터 정통성 시비에 부딪쳤고 권위주의적 통치구조에 대한 비판과 개헌요구가 서서히 확산되었다. 그러나 공권력을 내세운 5공정권의 강경한 자세와 '정치풍토 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 등 일련의 특별법에 의한 정치활동 규제조치로 정치권내에서는 별다른 움직임이 나타나지 못했고 따라서 초기에는 재야·학생운동권에 의해 주도되었다. 1985년 2월의 제12대 총선거에서는 정치활동 규제조치에서 해금된 인사들이 활동을 재개한 결과로 야권내에서 일대변화가 일기 시작했으며 동시에 개헌문제가 부상하기 시작했다. 5공정권에 대한 야당측의 정치적 공세가 가열되는 가운데 여당인 민주정의당(民正黨)은 호헌론으로 맞섰고 양측간의 대립은 정국에 일대파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1986년에 접어들자 재야·야권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안 연대투쟁에 돌입했고 실세였던 김대중·김영삼씨가 장외에 등장함으로써 그 결집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정치권뿐만 아니라 재야·학생노동계 등 범국민적인 민주화 요구에 직면하게 된 5공정권은 호헌론에서 기헌론으로 180°전환하여 의원내각제 개헌안을 내세웠는데 이는 사실상 무마용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 재야·야권은 장외투쟁으로 나섰고 5공정권은 공권력을 앞세운 물리적 탄압으로 일관, 소위 공안정국이 촉발되었고 그 와중에서 1987년 1월의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으로 대표되는 대대적인 인권탄압 사태가 발생했다. 재야·야권의 장외공세가 가열되자 5공정권은 다소 신축성 있는 태도를 나타내기 시작했는데 대부분 재야·야권의 주장과는 거리가 있었다. 물리적 충돌이 격화되어 가던 과정에서 1986년 5월 '5·3 인천사태'가 발생, 극도의 혼란이 야기되었고 이를 둘러싸고 일대 공방이 일었으나 반대급부로 여야간 개헌기구 설치의 합의가 이루어졌다. 1986년 7월 국회에서 헌법개정특별위원회가 설치되어 여측의 의원내각제 개헌안과 야측의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이 제도권내에서 논의되기 시작했으나 양측간 방법·절차상의 의견차이로 공전되기 시작했고, 야측의 중심인 신한민주당(新民黨)은 기존의 지도부(李民雨 總裁)와 실세인 양 김씨 그리고 주류·비주류간의 내부적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다.

헌특이 공전되고 있는 가운데 양 김씨 측에서 여야 실세대화에 의한 권력구조문제(내각책임제와 대통령제) 선합의 옵션을 여측에 제의하였고 뒤이어 선택적 국민투표를 제의하였으나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당론화한 여측은 제10회 아시안 게임의 성공적 수행과 당정개편 분위기에 편승, 수세에서 일대 공세로 전환하면서 대야강경자세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따라서 개헌논의는 무산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고 국회에서는 국시(國是)파동이, 대학가에서는 용공대자보 사태와 건국대학교 사태가 일어나 정국은 위기감이 팽배해지면서 경색되었다. 뒤이은 5공 정부의 북한의 금강산댐 건설계획 발표가 여측 공세의 상황논리를 뒷받침하였고(이는 의도된 바가 짙었다) 정기국회는 변칙과 파행으로 얼룩졌다. 이 과정에서 신민당의 내부적 갈등은 표출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기존 지도부의 대여타협 움직임과 5공정권에 의해 정치활동을 제약당하고 있던 양 김씨의 당권장악 움직임이 맞물린 일종의 헤게모니 쟁탈전이었다. 한국 야당사의 속성인 계파간 갈등이기도 한 신민당의 내부적 분쟁사태는 1986년 12월 당시 총재였던 이민우씨의 '민주화 7개항 요구'에서 구체화되었고(여측은 수용의 뜻을 밝힌 데 반해 양 김씨는 강력히 제동을 걸었다) 소위 주류(양 김씨측)·비주류간 대립으로 격화되면서 해당행위 의원에 대한 당기위 제소, 지구당 유혈폭력사태, 법적 제소사태로 치닫게 되었고 마침내 양 김씨가 계파의원들을 이끌고 분당을 선언, 신당을 창당했다. 양측간에는 책임소재와 선명성 논쟁이 첨예히 전개되었고 이러한 야권의 세력변화를 주시하고 있던 여측은 양 김씨에 대한 강도 높은 비난과 경고를 발하였다.

사실상 5공 당시 양 김씨의 정치적 영향력은 대단한 것이어서 5공정권의 구 정치인 정치활동 규제조치도 사실상 그를 견제·약화시키기 의한 정치적 술수였던 만큼 양 김씨가 연대한 신당창당(統一民主黨)에 대한 여측의 위기의식은 상당할 수밖에 없었다. 여측의 이러한 입장은 개헌에 대한 상대적 거부감으로 증폭되었고 결국 1987년 4월 '개헌을 유보하고 현행헌법(第五共和國憲法)으로 1988년 정권이양을 실현한다'는 '4·13 호헌선언'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전기한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으로 5공정권은 범국민적 분노에 직면하게 되었고 재야·학생·야권의 민주화요구와 대통령 직선제 관철투쟁은 반대로 계층을 망라한 국민의 지지와 참여에 힘입어 본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이 시점에 이르러 개헌은 제2차적인 과제로서 정통성은 물론이고 도덕성까지 상실하였으며 폭력과 독재로 일관해 온 반민주·반민족적 군사정권 및 5공정권의 타도와 민주주의 회복이 범국민적인 최우선의 열망이었다. 1987년의 봄 한국의 정치·사회는 권좌에 집착한 파쇼세력의 물리력과 그에 대한 국민의 거부와 저항이 첨예하게 대립·충돌하는 초긴장 상태로 치닫고 있었는데 '4·13 호헌선언'은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과거 독재정권들이 보여준 말기적 증상처럼 5공정권도 무슨 환상이나 착각에 빠진 듯 현실상황을 외면하고 독자적인 정치일정을 추진해 나갔는데 그것은 스스로의 파멸을 재촉한 것으로 국민의 분노는 1987년 6월 역사적인 '6월 민주항쟁'으로 집결되었다.

현대국가는 국민주권의 원리하에서 형성되며 모든 국가권력·정치권력은 주권자인 국민에 의해서 창출되고 그 지지와 신뢰의 기초위에 유지·존속된다. 이 점에서 한국 민주헌정사의 파행성과 후진성은 국민의 책임이 크다고 할 수 있는데 '6월 민주항쟁'의 역사적 의미는 무엇보다도 '침묵하는 다수'였던 민초의 의사가 행동으로 표출된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반독재·민주회복 투쟁의 선봉이 학생과 재야였음은 실록이 증명하는 자명한 사실이었음에 비추어 볼 때 당리당략과 정권획득에만 몰두하고 있는 노회한 정치인들이나 단지 현실에만 안주하여 맹목과 불신 무관심에 치우쳐 있는 대중들의 각성과 적극적인 정치적 권리행사가 절실히 요청된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독재정권이나 정치적 성향이 짙은 일부의 군부세력들이 노리는 바가 바로 그것이며 실제로 그러한 행위들은 그들에게 협력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5공정권이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해왔던 공권력도 '6월 민주항쟁'의 거센 파고 앞에서는 한계를 드러냈고 마침내 5공정권은 국민 앞에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1987년 6월 29일 당시 민정당 대표위원이자 대통령 후보지명자였던 노태우 의원이 대통령 직선제 개헌, 김대중씨 사면·복권, 시국관련 구속자석방, 제반 민주화조치의 실현 등 시국수습 8개항을 내용을 하는 '국민대화합과 위대한 국가로의 전진을 위한 특별선언', 즉 '6·29 선언'을 발표하고 이를 총재인 전두환 대통령에게 건의하면서 만약 자신의 구상이 거부될 경우 현직을 포함한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겠다고 밝혔다. 일부 이설이 있으나 집권 민정당으로서는 불리하다고 인정되어 온 정치현안에 대한 야권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민주화와 개헌문제로 파탄직전에 이르렀던 시국에 일대전기와 활로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모처럼의 긍정적이고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러나 정치권 내부에서의 여야간의 개헌논쟁, 정확히 권력구조 논쟁은 의원내각제와 대통령제(직선제)라는 정치제도에 대한 원리적 우열이나 상황적 가부에 관한 것이기 이전에 감정적 차원으로의 비약이 심했고 국민이 보기에는 자당의 정권획득에 유리한 형태만 고집한 듯한 인상을 주어 개운치 않은 여운을 남겼다. 당시 언론이 '7년 가뭄만의 소나기'로 표현했던 6·29 선언은 그 내부적 사정은 차치하고서라도 수많은 희생과 각고를 거친 민주화투쟁의 승리이자 국민주권 원리의 확인이며 국민과 정치권이 파국직전에서 회생하고 공존할 수 있는 돌파구로서 평가되었다. 국민은 물론 재야·야권 모두가 환영해마지 않았으며 이틀 뒤 전두환 대통령은 '시국수습에 관한 특별담화문'을 발표, 노태우 대표위원의 구상을 전폭 수용할 것을 밝혔고 동년 7월 9일 5공 정부는 김대중씨를 포함한 공안 및 시국관련 구속자 및 공민권 정지자에 대한 대폭적인 사면·복권조치를 취했다(일부 제외). 여야는 '7·1 선언'에 따라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 작업에 착수, 각각 실무작업기구를 구성·가동시켰는데, 초기에는 야측의 '선민주화조치 후 대여협상'이라는 기본입장 선언으로 지체되었고(이는 당시의 정치·사회적 상황에 따른 것이었다) 또한 여나 야나 공히 체제개편이라는 내부적 정비·조정이 필요했기 때문에 다소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민정당으로서는 총재인 전두환 대통령 체제에서 차기대권 지명자인 노태우 대표위원 체제로의 개편이 필요했는데 야권의 경우는 정당세력 판도의 변화는 물론 실세인 김대중씨의 정계복귀로 대단히 복잡미묘한 상황이 되었다. 즉, 10·26 이후 1980년 '서울의 봄'에서 기존 정치세력 판도는 김영삼·김대중씨를 중심으로 한 야권· 재야세력과 김종필씨를 주축으로 한 구공화당 계열이 부상하였었다. 물론 신진세력의 대두도 필연적이었으나 당시의 상황으로 볼 때 일단은 세 사람이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는데 5공 주체세력에 의해 김종필·김영삼씨는 구시대의 정치혼란에 현저한 책임이 있는 구시대 정치인으로 규정되어 '정치풍토 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에 의해 정치활동이 금지되었고 김대중씨는 소위 '내란음모사건'의 주모자로 상고심에서 사형이 확정(무기로 감형), 세 사람 모두 정치적 거세를 당하였다.

그러나 5공정권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3인의 정치적 영향력은 그리 손상받지 않았으며 특히 야권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였다. 5공 당시의 신한민주당·한국국민당·민중민주당·민주한국당 등 야권은 김영삼·김대중씨의 계보가 주축인 신민당이 주도하고 있었으며 나머지 3당도 양 김씨의 영향력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문제는 양 김씨가 정치활동을 제약당하고 있는 상황이라 양인은 배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을 뿐이었고 제도권내에서는 새로운 지도부가 구축·유지되고 있었는데, 1986년 2월 해금된 김영삼씨가 정식으로 복귀했고 6·29 이후 김대중씨가 사면·복권되는 과정에서 기존의 지도부와 실세인 양 김씨 간에 당권장악과 헤게모니 쟁탈전이 야기되었다. 이것이 신민당 분당과 민주당 창당사태의 근본원인인데 6·29 선언으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이 관철되자 이번에는 차기대권을 놓고 양 김씨가 경쟁이 야기되었다. 민주당의 경우 양 김씨의 계보조직으로 2분되어 있었는데 김대중씨가 사면·복권되어 정계에 복귀함으로써 양자간 역할분담 조정과 재야인사 영입문제 등의 논의가 불가피했다. 2인 모두 과거 박정희 정권의 독재와 파행에 맞서서 투쟁한 야권의 선봉장이었고 5공에서도 야권과 재야의 지주였으나 그만큼 대권에의 욕망도 클 수밖에 없었다. 한 때는 김대중씨측에서 조건부 불출마가 선언되었는데 사면·복권된 직후 일련의 사태·과정이 자신이 제시한 조건과 다름을 이유로 대권경쟁에 나설 뜻을 밝혔고 같은 배를 타고 있는 김영삼 총재와의 관계에 대해 국민의 뜻에 부합되도록 결정할 것이라고 표명, 사실상 양자간의 경쟁이 시작된 셈이었다. 아무튼 여야 모두 내부적 갈등과 모순을 안고 각각 개헌안 시안을 채택·발표하면서 협상에 돌입하였다. 그러나 양측의 입장은 기본적으로 차이가 있었는데 물론 그 이면에는 자당이나 자파에 유리한 입지확보라는 이해관계가 작용하고 있었다. 민주당은 '5·18 광주민주화 항쟁'의 역사성과 정치적 의의를 계승하면서 본래의 대통령제 정부형태와 국회의 우위, 법원의 완전한 독립을 주장한 반면 민정당은 '5·18'을 평가절하하고 희석시키는 대신에 5공의 정통성을 명문화하여 그 계승을 기도하였으며 대체로 관행적인 행정부 우위형태를 유지하려 하였다. 그 결과 양당의 개헌안은 무려 90여 항목에서 차이를 나타냈는데 그 중 최대쟁점은 전문(全文), 선거권 연령, 대통령의 임기·입후보자격, 부통령제, 국정감사권의 범위·절차, 사법부 인사독립을 위한 법관추천회의의 설치 등이었다. 그런데 대통령 입후보자격과 부통령제 도입문제는 양 김씨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 극히 예민한 사안이었다. 양당은 각 4명씩의 대표자로 구성된 '8인의 정치회담'에서 개헌안 및 부수법안을 일괄협상하되 선개헌안 타결 후 부수법안 협상의 순서로 진행할 것과 국회에서 모든 원내교섭단체가 참여하는 헌특위를 재가동시킬 것에 합의하였다. 개헌협상이 본궤도에 진입하려는 이 시점에서 민정당은 개헌협상에 국민당과 신민당의 참여를 제의했는데 민주당이 거부함으로써 이에 반발한 양당 의원들이 실력으로 8인 정치회담을 저지, 일대 파란이 일었다. 결국 민정당이 양당과 각각 2인의 대표자로 구성되는 '4인 정치회담'을 병행키로 함으로써 수습되었고 진통 끝에 본궤도에 진입한 개헌협상은 숱한 우여골적과 난항을 거치면서 부분적인 합의안을 도출해 나갔다. 국회의 헌특위가 본격적인 개헌안 심의채비를 갖추었고 초기 이견을 보이던 양 김씨가 전격적인 합의에 이르렀으며 민정당측에서도 타협적이고 낙관적인 자세를 보여 부칙 및 부수법안을 제외한 전문(全文)과 본문 130조의 타결에 성공했다. 이것은 한국 헌정사상 최초의 합의개헌안 도출로서 헌특위는 개헌안 기초 소위원회를 구성했으며 남은 과제는 신헌법의 발효시기 등 부칙조항과 대통령선거법 등 부수법안 그리고 총선시기 등 주요 정치일정에 대한 고도의 정치적 절충을 필요로 하는 것들이었다. 영수회담에 이어 중진급 실무협상이 계속되는 가운데 야측은 있을지도 모를 상황변화와 집권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 여측은 5공의 위상유지를 위해 특히 정치일정과 신헌법 발효시기를 둘러싸고 팽팽히 맞섰다. 마침내 1987년 10월 숱한 난고 끝에 타결된 대통령 직선제 합의 개헌안이 국회에 상정·통과되었고 10월 27일 국민투표로 확정되었다(1988년 2월 25일 발효).

제9차 개정헌법상의 정치체제[편집]

第九次改正憲法上-政治體制 엄밀히 제6공화국의 헌법제정으로서 5·16 이후 암흑기였던 한국 민주헌정사가 5·18에서 6월 항쟁까지 수많은 희생을 치른 끝에 희생한 것이었다. 전문(全文)과 본문 10장 130조 부칙 6조로 구성된 신헌법은 1987년 10월 29일 공포되었으나 발효는 1988년 2월 25일 제13대 대통령 취임과 동시에 이루어졌다. 제2공화국 헌법(제3차 개정헌법)상의 의원내각제를 제외하면 대통령제 정부형태를 축으로 의원내각제적 요소가 가미된 절충형이 일반적이었는데 5·16 이후 제5공화국까지는 대통령의 권한강화와 행정부 우위가 두드러졌다. 결국 그것이 독재와 장기집권의 폐해가 되었는데 지나치리만큼 한국인의 정치의식은 대통령제에 편향되어 대통령직선제는 고집할망정 의원내각제에 대해서는 논의조차 않고 있다. 아무튼 제6공화국 헌법에서도 정부형태는 대통령제로 낙착되었다. 대신에 과거의 군사독재와 장기집권에 대한 거부로써 각종의 제도적 방지책이 강화되었고 이것은 국회의 우위와 법원의 독립성 보장으로 나타났다. 의원내각제적 요소가 가미 순화된 대통령제로 규정지을 수 있는 제6공화국의 정부형태·정치체제는 모처럼의 국민적 합의선상에서 도출된 것이나 현실의 상황은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대통령은 국민의 보통·평등·직접·비밀선거에 의해서 선출되며 임기 5년의 단임제이다. 과거 독재정권들이 임기 연장·중임을 위해 헌법을 개정한 사례에 비추어 그 방지책으로 그 제안 당시의 대통령에 대해서는 효력이 없도록 하였다. 또한 독재정권들의 '전가의 보도'였던 대통령의 비상조치권과 국회해산권을 폐지하고 '긴급재정·경제 처분 및 명령권'과 '긴급명령권'만을 인정한 대신에 국회에의 즉시보고와 승인의무를 강제함으로써 제도적인 보완책을 강화하고 있다.

제6공화국 헌법 제정과정에서 강조되었던 것은 독재와 장기집권·군사통치의 종식과 민주주의 회복, 과거와 같은 부정적인 헌정사의 탈피와 평화적 정권교체, 그리고 의회기능의 복구와 제도적인 장치의 마련 등이었다. 사실상 이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으며 한국의 헌정사를 되돌아보면 너무도 당연지사인 것이다. 과거의 경험에서 알 수 있듯이 독재·반민주정권은 권력의 집중과 행정부 우위 그리고 의회기능의 약화·제한이라는 특징을 지니는데, 상징적인 의의에 그치는 것이지만 제헌헌법에서 제6차 개정헌법까지 헌법 내부의 배열순서는 국회·정부·법원의 순이었으나 제7·8차 개정헌법에서 정부·국회의 순서로 바뀌었다. 상징적인 의의에 그치는 것이라지만 당시의 정치상황을 돌아볼 때 그것이 시사하는 바는 그 이상이었다. 아무튼 제6공화국 헌법에서는 그러한 반대급부로 권력분립과 권력간 견제·조정기능의 강화, 기본권의 신장 등이 기초원리로서 요구·도입되었고 그것은 상기한 대로 대통령(정부)의 권력약화·제한과 상대적인 국회의 기능강화 및 대행정부 우위로서 표출되었다. 일반적 국정감사권의 부활로 대표되는 국회 기능의 강화는 제5공화국 헌법에서 도입된 특정사안에 대한 국정조사권과 함께 의회주의의 복구를 의미하며 정기회의 회기연장(90일에서 100일로)과 임시회 소집정족수 완화(재적의원 3분의 1에서 4분의 1로), 연간 개회일수 제한 철폐 등도 행정부에 대한 비판·감시기능의 강화이자 여당의 국회지배 관행에 대한 야당의 발언권 확대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대통령의 국회해산권이 삭제되는 대신에 국회의 국무총리·국무위원 해임의결권은 해임건의권으로 약화되었다. 이외 동의 승인권 등 정부의 국사행위 일반에 대한 국회의 감시·견제기능이 강화되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후진성의 일반적 특질인 군부의 정치개입은 한국 헌정사에서도 뿌리 깊고 오랜 동안의 암영을 드리우고 있는데 사실상 제5공화국도 그 연장이었고 제6공화국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다. 개헌협상 과정에서 야권은 강력히 '군의 정치개입금지'를 명문화할 것을 요구했는데 협상과정에서 제1장 총강에 '군의 정치적 중립성은 준수된다'는 규정삽입으로 낙착되었다. 그러나 이는 선언적인 의의에 그치는 것이며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성 확보·보장과 더불어 항시 한국적 정치현실의 변수이다.

제6공화국 헌법에서 나타난 또 하나의 특질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선거관리·국민투표관리·정당사무에 관한 규칙제정권과 내부규율에 관한 규칙제정권이 부여된 것과 선거권 연령의 법률유보이다. 현대의 국민주권주의 국가에 있어서 국민은 국가의사의 형성과정에 참여하고 국가기관을 구성하며 국가권력의 행사를 통제·견제하기 위한 정치적 권리(das politisch Recht), 즉 참정권을 보유하며 주권은 주체로서 그 일부적 권리인 선거권을 갖는다. 그런데 선거권이란 제1차적 국가기관인 '국가기관으로서의 국민', 즉 선거인단에 참가할 권리를 말하며 그것은 법률에 의해 일정한 제한을 받는다. 그 중 가장 일반적인 제한이 연령제한인데 개헌협상에서 야측은 국민의 교육수준과 정치의식의 향상 등 내외의 추세를 이유로 연령인하(18세)를 주장했고 그에 대해 여측은 민법상의 성인연령(20세)를 들어 현행고수의 입장을 밝혔다. 1987년 12월 기준으로 18세 이상 20미만의 인구분포는 약 178만 명으로 추계되었는데 이 연령층은 야당성향으로 평가되고 있어 실리와 명분이라는 양면성 때문에 주요 쟁점화되었고 결국은 야측의 주장이 수용된 셈이었다.

전체적으로 제6공화국 헌법상의 정부형태에서는 과거의 반성에서 대통령에 대한 권력의 집중을 방지하고 의회민주주의에 입각한 국회기능의 복구와 강화가 두드러지는데, 일반적으로 의원내각제 요소가 가미 순화된 대통령제라고 규정된다. 정치체제라 할 때는 정치제도·정치기구 뿐만 아니라 정치행위 내지는 통치가 행해지는 일정하고 연속적인 양태, 또는 정치과정이 전개되는 확정되고 일관성 있는 제관계를 말하므로 따라서 권력구조나 경제제도 등과 밀접한 상관관계를 갖는다. 그것은 국민의 일반의사에 지배되며 헌법은 그 명문화이다. 중요한 것은 작금까지의 불우한 헌정사의 기록은 잘못된 제도 때문이 아니라 잘못된 운용과 주권자의 무지·맹목·무관심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즉, 제도의 창설·개폐나 정치권력의 형성은 국민의 의사를 묻는 요식행위를 거쳐왔는 바, 비합법적·비민주적 방법으로 정치권력을 획득한 경우에는 정통성의 시비 때문에 특히 그러하였고 당리당략에 몰두해 있는 정치인들 또한 주권자 스스로가 선택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