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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정치/한국의 정치/한국인의 정치의식과 정치행동/한국의 대중운동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한국의 대중운동〔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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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大衆運動〔序說〕

한국의 대중운동은 근대시민사회에서 있어야 할 정상적 대중운동은 아니었다. 대중이 스스로의 이익을 위하여서 자주적으로 결합하고 그들이 주체가 되어 전개된 대중운동은 드물었다. 외부로부터의 권위주의적인 하강식(下降式) 대중운동은 흔히 있었으나 대중의 이익과 결부되고 대중이 주도권을 가질 수 있는 조직적이고 계속적인 운동에까지는 이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전통사회로부터 근대사회로 이행하는 한국 근대화의 특수성에 연유한다. 조선조(朝鮮朝)의 전통사회는 말할 것도 없고 일본의 반봉건적 식민지통치 아래에서도 대중의 조직적인 이익주장이나 투쟁은 허용되지 않았고, 전근대적 대중의 의식구조(意識構造)에서 대중운동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해방과 정부수립으로 서구의 민주제도가 도입되었으나 전통사회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자체 내부의 힘을 갖지 못하였기에 대중운동은 혼란만을 가져왔다. 오늘날 제2차 산업의 미개발로 인구가 집중된 농촌에서는 전통적인 사회구조가 그대로 온존(溫存)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에서는 권위주의적 행태와 개인성만이 발달하고, 이에 부수적으로 사회적인 불안으로 말미암아 비판을 꺼리는 무관심의 성벽이 자라고, 교섭과 토의 및 설득의 방식을 대신하여 폭행 또는 다른 형식의 압력에 의존하는 경향이 짙어졌다. 따라서 자작과 자활(自活)의 의식은 물론 동질성과 계속성 및 협동성이 결여된 사회에서 대중운동은 기대할 수 없다.

또한 소수의 임금노동자를 포함한 도시에서는 비교적 합리주의 정신으로 전통사회가 무너져 가고 있으나 전통사회와 근대사회의 갈등 속에 혼란만이 초래되었고 특히 반공(反共)과 경제지상의 역대 정책으로 대중운동은 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 대중운동의 발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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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大衆運動-發端期

한국에서 대중운동의 발단을 흔히 3·1 운동 이후 민족운동과 결부된 노동운동, 협동조합운동 및 그밖에 여러 가지 문화운동 등에서 찾는다. 물론 그 이전에도 전혀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한말에 와서 관(官)의 가렴주구(苛斂誅求)에 견디지 못한 농민봉기, 외국자본가의 채광권의 침략을 반대하는 광산노동자의 집단적 행동, 그리고 외국거류민과 마찰이 심했던 부두노동자의 동맹파업 등 상당한 수의 집단행동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 집단행동은 거의 한정된 범위에서 단기간에 일어난 우발적이고 비조직적인 활동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대중운동이라고 보기에는 어렵다.

3·1 운동을 계기로 민족운동이 대중운동으로 전환하고 일본의 식민지통치에 신음하던 노동자와 농민들의 불만은 드디어 그 돌파구를 찾게 되었다. 먼저 노동운동으로는 1920년에 결성된 조선노동공제회와 이를 재정비한 1922년의 조선노동연맹회를 비롯한 전국 각지의 노동자단체가 있었으며, 전국적인 노동자조직으로서 1927년의 조선노동총동맹(朝鮮勞動總同盟) 등이 있었다.

다음으로 농민운동으로는 천도교(天道敎)가 중심이 된 1925년의 조선농민사가 조직되어 1931년에는 정비된 농민공생조합이 중앙과 지방에 있었고, 재일(在日) 유학생이 중심이 된 1926년의 조선협동조합과 기독교중심이 소비조합 등이 있었다.

그밖에 문화운동으로는 실력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1922년의 조선민립대학 기성회와 이를 발전시킨 1923년 조선교육회가 있었고, 민족자본의 육성을 위한 1923년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奬勵會)와 토산애용부인회(土産愛用婦人會) 등이 조직되었다. 그리고 인권운동이란 가치를 들었던 1923년의 형평사연맹(衡平社聯盟)과 1924년의 조선공산당, 1927년의 신간회(新幹會) 등은 당시 대중운동의 요람이 되었다.

그러나 일제 하의 대중운동은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몇몇 지식인을 중심으로 한 선각자들의 하강식 운동이었다. 일반대중들은 전통사회의 고질과 무지로 대중운동에 적극 참여하거나 이를 스스로 감당할 수 없었다. 더욱이 이들 운동은 사상과 결부되어 1930년 이후 일제의 탄압이 심하여지자 거의 지하로 숨어 들어갔다.

한국 대중운동의 혼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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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大衆運動-混亂期

한국의 대중운동은 1945년 해방을 계기로 폭발적으로 표면에 나타났다. 국토의 분단과 사상의 대립은 재빨리 대중운동에 눈을 돌렸고, 이에 따라 대중운동은 사상전(思想戰)의 수라장이 되었으며, 그 단체는 사상전의 전위대로서 그 기능을 발휘하였다.

이러한 대중운동의 시발은 1945년 11월 1일의 조선광산노동조합의 결성을 비롯하여 16개의 산업별 노동조합이 조직되고 같은 해 11월 5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朝鮮勞動組合全國評議會:약칭 全評)가 결성되었다. 이 단체는 미군정(美軍政)이 실시되어 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의 조선인민공화국을 인정하지 않게 되자, 노동자·농민을 기초로 한 조직적 세력확보를 목적으로 한 좌익계의 기간단체(基幹團體)로 조직되었다.

그리고 이에 대항하기 위한 대한독립촉성 노동총연맹(약칭 대한노총)이 1946년 3월 10일 우익계에 의해서 조직되었다. 이들 두 단체는 각기 좌·우익의 전위대로서 치열한 충돌을 거듭하여 전국도처에서 유혈의 참극을 빚었다. 이 충돌은 1946년 9월 전평(全評)의 철도파업과, 1947년 3월의 24시간 총파업에서 가장 극에 이르렀으나, 미군정과 과도정부 당국의 협조로 대한노총이 이것을 붕괴시키고 1947년 3월 미군정이 남로당을 불법화하게 되자 전평은 지하로 잠입하였다. 이 시기에 대한노총의 세력은 680개 단위노조와 12만 746명의 맹원(盟員)을 가졌으며, 1946년 12월 국제자유노련(ICFTU)의 창립총회에 참가하여 회원국으로 가입하였다.

대한노총이 주도권을 잡게 되고 정부수립으로 사회가 안정됨으로써 정상적인 노동운동이 기대되었으나, 6·25 동란의 발발로 노동운동은 다시 혼란에 빠졌다. 점령지역의 모든 공장이 전면적으로 가동하고 있었으나 날로 상승하는 인플레로 노동자의 생활은 파탄에 직면해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래의 정치운동과 결부된 노총의 상부직권(上部職權) 다툼은 노동자의 권익을 전혀 돌보지 않는 것이었다. 심지어 열악한 노동조건에 견디지 못한 노총의 하부조직에서 노동쟁의(勞動爭議)에 들어갔을 경우, 상부층의 주도권 쟁탈전으로 노조간부가 경영주측에 가담하는 조방사건(朝紡事件)과 대한방직쟁의는 한국노동운동사상 씻지 못할 오점을 남겼다. 다만 1953년을 전후하여 근로기준법, 노동조합법, 노동쟁의조정법, 노동위원회법 등 노동 4법이 제정된 것은 획기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1960년의 4·19 혁명으로 자유당이 몰락하기까지 노총은 자유당의 기간단체로서 일관하여 노동자의 권익은 차선의 것으로 이를 돌볼 수도 없었고 돌보지도 않았다.

다른 한편 농민운동으로는 1958년 농업협동조합법이 제정되어 농업협동조합이 농촌에 조직되었다. 그러나 농협 역시 농촌의 전통적 사회구조와 농민의 무지로 관제관영(官製官營)의 어용단체의 기능을 벗어날 수 없었다.

한국 대중운동의 정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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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大衆運動-整備期

4·19 이후 한때 대한노총은 한국노동조합이 구상한 바 노동조합주의에 입각하여 정치적 중립과 경제활동에 치중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5·16 군사정변으로 이것이 중단되고 종래의 기업별 노조로부터 산업별 노조로 개편되었다. 이에 따라서 모든 실권이 중앙에 집중되는 듯 하였으나 기업별 노조지부에 단체교섭권과 단체협약체결권이 이양됨으로써 기업별 노조와 큰 차이가 없게 되었다. 더욱이 기업별 노조의 노사관계에 산별노조 본부의 협조는 미약한 상태에 있었으므로 산별노조의 기능은 한정되어 있었다. 농업협동조합 역시 정부의 임원임명과 정부의 감독강화란 제도적인 문제, 농촌의 전통사회구조의 온존으로 그 기능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고 있다. 요컨대 오늘날 대중운동은 국제적인 위기의식과 자본축적이라는 지상과제 앞에 현정부의 시책에 부합한 범위에서만 허용되고 있다. 따라서 대중운동은 국가존립과 경제성장의 바탕 위에서만 전개될 수 있다. 특히 1971년 이후 행정부의 주도 아래에 새마을운동이 도시와 농촌에서 근대화를 기치로 내걸고 전국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 운동 역시 농촌의 전통적 사회개조가 어떠한 방향에서 근대화할 것인가에 초점이 있으며 여기에 그 성패가 달려 있다.

<李 炳 泰>

형평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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衡平運動

1920년대 초반에 백정(白丁)들이 근대적인 의미의 인권을 회복하려고 벌인 운동. 1923년 4월 25일 진주(晋州)에서 형평운동자(衡平運動者) 80여명이 회집(會集)하여 애정으로써 상호부조하여 생활의 안정을 도모하고 공동의 번영을 기한다는 취지 아래에 이 운동을 벌였다.

형평운동의 목표는 인권해방이었으나 이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과 방법에 있어서 차이가 있었다. 즉 형평운동을 계급운동의 일익(一翼)으로서 보아 그 목적을 수행하려고 한 사회주의적 입장과 모든 백정이 총단결하여 인권해방운동에만 매진한다는 입장의 두 가지 사상적 조류가 있었다. 따라서 이 두 개의 조류는 사상적으로도 세력적으로도 대립하게 되었다.

1924년 2월 11·12일에 부산에서는 진주 형평사본부의 임시대회가 열렸고, 동월 22일에 대전에서는 별개의 단체가 혁신회(革新會)를 개최하여 4월 26일 혁신동맹을 조직, 본부를 경성(京城)의 도염동(都染洞)으로 이전했다. 혁신동맹은 그 후 형평사연맹총본부로 개칭되어 형평사본부와 그 명칭이 비슷하게 된 채 대립된 상태를 보였다.

이 양단체는 대립의 부당함을 서로 통감하고 8월 15일에 양파의 합동대회를 개최, 그 명칭을 '조선형평사 중앙총본부'로 하고 본부를 경성에 두었다. 이 합동으로 세력이 커진 뒤 청년사원은 조선형평청년총연맹과 형평사정위단(衡平社正衛團)·형평학우동맹(衡平學友同盟)을 조직케 한 후 각 사회단체와 긴밀한 연락을 취할 것을 결정하였다.

1928년 4월의 제6회 대회 때는 일본의 수평운동(水平運動)과 제휴할 것과 자유연합적인 조직체를 민주주의적 중앙집권체제로 할 것 등을 결정하고, 사내에 청년부를 설치하고 강령을 발표하였다.

강령에서는 ① 경제적 조건을 필요로 하는 인권해방을 근본적 사명으로 한다는 것, ② 형평운동의 원만과 단결을 촉성하는 것, ③ 일반사회단체와 공동 제휴하여 합리적인 사회건설을 기한다는 것, ④ 그들 계층의 당면한 실제적 이익을 위해 투쟁한다는 것, ⑤ 그들 계층의 훈련과 교양을 기한다는 것 등이 언급되었다.

반탁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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反託運動

미·영·소 3국의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채택된 신탁통치 5개년안(案)을 반대하던 거족적인 대중운동.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국의 신탁통치를 위하여 미·소 공동위원회를 구성한다는 보도가 들리자 전국민은 이에 분격했다.

이리하여 동월 30일 전국대회가 개최되어 100여 개의 애국사회단체와 정당의 이름으로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31일에는 탁치(託治)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를 구성하여 반탁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46년 1월 4일 좌익계열은 종전까지의 태도를 표변하여 신탁통치를 찬성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민족진영단체들은 총단결하여 좌익진영의 운동을 분쇄하는 한편 거족적인 반탁운동을 전개, 철시(撤市)·시위·집회·언론 등을 통하여 미·소공동위원회에 항의하고 항국적인 건국운동을 계속하기 위하여 독립촉성국민회(獨立促成國民會)를 조직하였다.

미·소 공동위원회는 5월 8일 반탁운동과 정당·사회단체의 초청문제로 결렬되고, 이를 계기로 민족진영은 독립쟁취 국민대회를 열어 정부수립을 위한 준비를 촉구하기 위하여 민족통일본부를 창설하였다.

1947년 1월 하순 미군정 당국에서 미·소 공동위원회가 다시 열린다는 성명을 발표하자 전국민은 다시 긴장, 입법의원(立法議院)에서는 44대 1로 다시 신탁통치반대를 결의하였다. 1월 24일에는 경교장(京橋莊)에서 김구를 중심으로 정당·사회단체의 대표가 모여 반탁독립투쟁위원회의 결성을 결의하는 한편 6월 1일에는 이승만·김구가 반탁성명을 발표하고 이를 미·소공동위원회에 통고하였다. 이리하여 6월 23일 단오절을 계기로하여 전국적인 규모로 전개된 반탁운동은 미군정령(美軍政令)을 위반하면서 8월말 미·소 공동위원회가 완전히 결렬될 때까지 극렬하게 계속되었다.

4·19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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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一九革命

1960년 4월 19일 학생들이 주동이 되어 자유당정부를 무너뜨린 혁명적 대중운동이다. 1948년 정부수립 후 점차 독재와 부패의 경향을 보이던 이승만 정부는 1960년의 정·부통령선거에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반드시 승리할 목적으로 무자비하게 야당을 탄압하는 동시에, 전국의 공무원들로 선거운동의 전위부대를 만들었다. 특히 대도시를 제외한 전국의 유권자들은 3인조·9인조로 조직되어 상호 감시하여 공개투표를 시행하고, 이것을 다시 경찰 및 폭력배를 중심으로 조직하여 둔 반공청년단원들이 감시하도록 완벽한 조직망을 짰다. 뿐만 아니라 4할의 사전투표까지 감행하기로 하고 선거부정을 자행해 나갔다.

2월 28일 대구에서 일어난 반항적인 학생들의 데모를 인화점으로 하여 민심은 뒤숭숭하여 갔는데, 투표일인 3월 15일에는 예정대로 부정선거가 공공연히 자행되었다. 이날 마산에서 시민들과 학생들이 궐기하여 선거무효를 주장하는 시위운동을 전개하자 경찰은 무차별 사격을 감행하고 다수의 시민과 학생을 체포·구금하였다. 4월 11일 행방불명되었던 학생 김주열의 시체가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바다에 떠오르자, 마산을 중심으로 전국의 학생들은 분격하여 항의데모가 계속하여 일어났다.

서울에서는 18일에 고대생들을 필두로 19일에는 동조하는 시민들과 함께 전학생이 궐기하여 무차별 사격을 무릅쓰고서 시위를 벌였고, 지방 각처에서도 계속 대중 시위가 일어나 정국은 걷잡을 수 없이 소연(騷然)하게 되었다. 당황한 자유당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대량 학살·대량검거를 하여 데모는 일단 잠잠해지는 듯 했으나, 25일 서울의 교수단데모를 계기로 26일에는 다시 대대적인 데모가 일어났다. 이에 자유당정부는 3월 15일의 선거를 무효로 하는 등의 수습을 기도했으나 실패하자 이승만이 사임하여 독재 정권은 무너지고 말았다.

4·19 혁명은 학생을 선두로 하여 맨주먹밖에 가지지 못한 민중이 강압적인 부패정권을 타도하는 데 성공한 한국 역사상 최초의 혁명적 학생운동이자 대중운동이라고 할 수가 있다.

6·3 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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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三事態

1964년 공화당정부의 한·일 회담 재개를 '굴욕적'이라고 반대하여 학생들이 주동이 되어 전개한 데모 사태.

제3공화국의 공화당정부가 군정시부터 추진해오던 한·일 회담을 더욱 강력히 추진하는데 대해서 야당은 군정시의 4대 의혹사건을 비롯하여 일본자금의 사전수수설 등을 들추어 내어 한·일 회담을 굴욕적이라고 하여 적극적으로 저지하려 하였다. 1964년 3월 9일 야당이 중심이 되어 대일 굴욕외교 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가 결성되고, 3월 10일에는 한·일 회담이 재개되었다. 야당의 투쟁은 3월 11일 김종필(金鍾泌) 공화당 의장의 동경 및 동남아지역 순회외교를 계기로 더욱 활발해져 갔다.

3월 24일부터는 전국 각지의 각 대학교 학생들이 한·일회담의 타결을 반대하는 데모를 더욱 확대하였다. 여·야당은 서울을 비롯한 각 지방 순회강연을 실시하면서 자당의 PR과 투쟁목표의 확립에 주력하는 가운데 각 대학교학생들의 데모는 과격해져 갔고, 종교단체를 비롯한 국민들이 학생들의 데모를 지지하였으며, 혁명주체 중 재야인사들도 적극적으로 동조, 6월 3일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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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一八光州民主化運動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전라남도 광주시(現 光州廣域市)에서 일어났던 일련의 사건·과정은 세계헌정사상 미증유의, 그리고 결코 재연되어서는 안 될 유혈참사요, 비극이며 한국국민 모두가 영원히 기억해야 할 민주헌정사의 아픔인 동시에 희망이다. 5·16에 이은 소장 정치군부 세력, 즉 신군부의 정권탈취 기도에 적수공권으로 저항했던 광주시민들의 투쟁사는 오랫동안 왜곡되고 은폐되어 왔으며 동시에 저항했다는 이유 때문에 신군부는 집권 이후에도 계속하여 예의주시하는 눈길을 보냈으며 광주시민들은 많은 분야에서 불이익을 당해왔다. 제5공화국의 성립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 5·18은 그 진실규명이 억제당한 채 재야·학생운동권을 중심으로 그 진실과의 의의가 면면히 이어져 '6월민주화항쟁'으로 제5공정권이 타도되고 제6공화국이 성립한 후인 1988년 제13대 국회에서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별위원회'가 구성, 청문회 개최 등 진상조사에 착수함으로서 잊혀졌던 비극의 베일이 벗겨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집권세력의 은폐기도와 제도·법률적 허점, 그리고 각 정당의 당리당략적 자세로 개괄적인 윤곽만을 밝혀냈을 뿐 아직도 많은 부분이 가려져 있어 피해자들의 명예회복과 그진상규명과 의의의 정립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가해자·피해자의 구분논리를 떠나서 5·18은 정치권력의 암투에 희생되는 민중의 비극을 극명히 보여주고 있다. 왜냐하면 피아에 관계없이 그 현장에 있어야 했던 모든 사람은 사실상 피해자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1980년 5월 17일 학원소요와 노사분규 등 사회혼란을 이유로 정부는 10·26으로 발동하였던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동시에 '모든 정치활동 중지와 대학휴교령'을 골자로 하는 계엄포고 제10호를 발표했다. 이미 밝혀진 바 당시 최규하 행정부는 신군부의 시녀였으며, 5·17조치는 12·12로 세력을 집결한 신군부세력의 정권탈취를 위한 제1단계 조치였다.

5월 18일 상오 전남대학교에서 일단의 재학생과 계엄군과의 충돌이 일어났는데 계엄군의 과잉진압으로 사태가 확대, 비상계엄해제와 '5·17조치' 폐지를 요구하는 대규모의 학생시위로 발전했고 진압의 한계를 느낀 경찰이 군에 지원을 요청함으로써 비극은 시작되었다.

경찰을 대체·투입된 계엄군이 시위대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물리적 충돌이 심화되었고 이 과정에서 계엄군의 진압방식에 시민들이 분노, 시위대에 가담함으로서 쌍방 모두 상대적인 과잉성을 띠게 되었다. 결국 시위는 광주시민이 가세하여 시전역에 걸친 대규모로 확대되었고 구호도 '신군부타도', '민주화'로 바뀌었다. 당시 언론은 정부측의 보도자료에만 의존하여 시위를 '난동'으로 시위대를 '폭도'로 표현, 시민감정을 자극했고 따라서 사실을 모르는 광주 외의 지역에서는 언론발표를 그대로 믿는 비극이 연출되었다.

광주를 희생양으로 선택한 신군부는 현지 계엄군에 강경 진압을 지시, 광주는 참사의 아비규환에 빠져 흡사 전쟁터를 방불케 하였는데, 사상자가 속출하는 가운데 악성 유언비어가 유포되면서 상황이 급전직하했다. 이 과정에서 계엄군에 발포명령이 하달되었고 그에 대응해 시위대가 방위산업체·경찰서·예비군무기고를 습격, 무기·차량을 탈취하여 무장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1980년 5월 광주는 그야말로 피바다였다. 시민군의 조직으로 광주는 시민군과 계엄군과의 무장대립양상을 나타냈고 신군부는 현지 군지휘부를 교체하고 야전군을 증파하여 무력진압 의사를 명백히 했다. 신군부는 5월 27일 새벽 무장헬기까지 동원, 정규작전을 방불케 하는 규모로 계엄군을 시내로 진입시켜 유혈사태 끝에 광주를 장악했다.

그러나 1988년 '광주사태'를 그나마 '민주화를 위한 노력'으로 평가하기 전까지 정부는 광주민주화운동이 알려지지 못하도록 철저히 단속하였기 때문에 정확한 사망자·부상자의 수도 파악되지 않았다. 그후 끊임없는 민주화 세력의 노력으로 1988년 11월 광주청문회를 열었고, 1993년 '민주의거'로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드디어 1995년 11월 5·18 특별법을 제정, 전두환 전 대통령이 기소되었다.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지 15년이 지나서야 진정한 의무부여를 받게 된 것이다. 1997년 5·18일은 법정기념일로 지정되었다.

6월 민주화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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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月民主化抗爭

1987년 6월의 정국은 한국헌정사에 있어서 특별한 의의를 갖는다. 5공정권을 타도하고 제6공화국을 성립시킨 이 국민적 민주화 의지는 학생·재야의 선도에 의한 것이나 그 원동력은 '침묵하는 다수'로만 물러서 왔던 일반민중이었으며 따라서 6월 민주화 항쟁의 주체는 국민이기 때문이다.

제5공화국 정권은 제4공화국의 붕괴로부터 '12·12', '5·17', '5·18' 등 그 성립과정과 통치과정에 이르기까지 국민적 지지기반 없이 숱한 의혹과 비리·인권탄압을 자행해 왔다. 따라서 출범 초기부터 정통성 시비에 몰린 5공정권은 더하여 카리스마적 권부에만 집착, 과거 5·16 정권을 능가하는 파행만을 일삼음으로써 국민의 저항의식을 유발시켰고 결국 스스로 묘혈을 판 셈이었다.

6월 민주화 항쟁은 독재와 불의에 대한 국민의 분노가 결집된 응집이며 그 의의는 후일의 사가(史家)들에 의해 해석되고 부여될 것이지만 단순히 어떤 사안이나 사건에 촉발되어 발생한 것이 아니라 면면히 이어온 민주주의에 대한 '일반의사'의 표출인 것이다.

즉 과거 제5공화국을 체험한 국민은 '서울의 봄'에서 그 기대와는 달리 5공정권이 단지 지배세력 사이에서의 교체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깨닫자 과거의 수동적·방관적 자세에서 주인으로서의 적극성으로 전환하게 된 것이다.

6월 민주화 항쟁의 직접적인 기폭제는 당시 서울대학교에 재학중인 박종철군이 불법연행된 후 경찰의 가혹한 고문으로 사망한 사건이었다. 더욱이 5공 정권이 이를 은폐·축소하려 하자 그간 '대통령직선제', '민주화' 등 재야·야권의 정치투쟁에 다소 방관적이었던 일반 민중의 분노가 폭발함으로써, 게다가 사태를 인식하지 못한 5공정권은 '4·13' 고수를 선언하여 6월의 대장정은 막이 올랐다.

'6·10'을 시작으로 전국은 5공 타도와 민주화를 외치는 민중시위에 휩싸였는데 6월 9일 당시 연세대학교 재학생 이한열군이 교내시위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사망, 6월의 불꽃은 이제 꺼질 수 없게 되었다. 노도와 같은 국민의 분노가 집결된 '6월 26 평화대행진' 앞에서 독재정권의 공권력은 한계를 노출했고 마침내 '6·29 선언'으로 스스로 백기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