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정치/한국의 정치/한국인의 정치의식과 정치행동/한국의 학생운동
한국의 학생운동〔서설〕
[편집]韓國-學生運動〔序說〕
한국의 학생운동은 다른 나라에 비해 역사적으로 비중이 크다. 3·1 운동이나 6·10 만세운동 등이 학생들에 의해 점화되었고 투쟁과정에 있어서도 학생들이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광주학생운동(光州學生運動)도 학생들에 의해 전국적으로 파급되었고, 그후 '브나로드운동'도 학생들이 주도적인 활동을 한 것이다. 4·19 의거, 6·3 사태, 개헌파동(改憲波動) 등에 이르기까지 학생들은 정치과정에서 오히려 정치인을 고무·격려하는 역할을 했고, 집권층에 대해서는 가장 커다란 압력단체적 기능을 행사하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후진국에 있어서는 학생운동이 차지하는 정치적·사회적 비중이 큰 편인데, 그러나 한국의 학생운동이 차지하는 비중처럼 정치적·사회적으로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그 이유를 역사적으로 고찰해 보면 다음과 같은 배경을 들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보아 조선시대의 정치는 비대중적·비행동적 성격이 체질화되었다. 따라서 민주주의사상·민권사상(民權思想)을 수용할 체질이 아니었다. 이와 같은 정치적·사회적 풍토 속에서 새로운 사조를 접하고 민족사상·민권사상을 위해 싸운 학생운동은 민중운동의 주도적 위치에 설 수밖에 없었다.
한편 민중운동은 평등사상과 행동이 앞선다. 더구나 초창기의 청년·학생운동은 계몽운동에 머물지 않고 적극적인 저항운동으로 발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일제(日帝)라는 명확한 대상을 향해서 저항하는 자세는 뚜렷한 것이었다. 그 일제가 강력하고 무자비한 외세(外勢)였기에 학생운동은 전위적이 되고 전투적이 되고 따라서 민족적 양심의 노른자위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으로 한국의 학생운동은 차츰 매스 엘리트화 학생들에 의해 4·19 이후에는 한 정권을 교체시킬 정도로 질양면(質兩面)에서 성장했다. 그러나 한국의 학생운동은 유럽의 스튜던트 파워와는 본질적으로 그 궤(軌)를 달리하고 있다. 유럽이나 기타 다른 나라의 학생운동은 기성가치와 권위에 대한 부정에서 출발하지만, 한국의 학생운동은 민족적 사명감에서 출발한 대승적(大乘的)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이 그것을 말해 준다.
3·1 운동과 학생
[편집]-運動-學生
3·1 운동이라면 흔히 33인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민족운동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운동의 봉기를 따진다면 동경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부터 규명해야 할 것이다.
유학생들의 독립운동이 본격적으로 움트기 시작한 것은 1918년 가을부터였다. 3·1 운동을 한달 앞둔 1919년 2월 8일에는 동경에 있는 조선기독교 청년회관에서 약 6백명의 학생이 모여 조선독립대회를 열고 2·8 선언과 결의문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2·8 선언이 가결된 이날 학생과 일경 사이에 일대 충돌이 야기되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일제의 탄압에 굴복하지 않고 이후 계속해서 웅변대회·시위 등으로 운동을 계속해 갔다. 이와 전후해서 유학생들은 속속 귀국 길에 올라 각 지방의 독립운동을 지도·조직했다.
3·1 운동이 그처럼 엄청난 전민족적 운동으로 발전하는 데 있어서 간과해서 안 될 점은 준비단계, 거사단계, 대중적 투쟁 단계에 있어서 학생들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는 사실이다. 즉 3·1 운동 전에 33인이 거족적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결심하게 된 가장 큰 동기는 동경유학생의 2·8 선언과 그들의 활동이었다.
이제 조선민족의 독립운동에 대해 학생들과 기성지도층의 사상과 이념이 근본적으로 달랐던 점을 지적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기성지도층의 독립선언이 도의적 선언일 수는 있어도 정치적 선언일 수는 없었던데 반해 학생들의 2·8 선언을 뚜렷한 투쟁결의를 표시하고 있다.
또한 기성지도층의 독립선언문에 스스로를 고무하기에 바빠 일제에 대한 적대감을 가질 겨를이 없다고 말한 것도 납득할 수 없는 사고이다. 일제의 식민지인 당시의 한국으로서는 자기건설(독립)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일제의 추방, 즉 파괴가 선행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3·1 독립선언문은 도덕적·종교적 의미에서는 평가될 수 있을는지 모르겠으나 한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위한 선언문으로서는 투쟁정신이 너무나 박약하다는 아쉬움이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학생들의 2·8 선언문은 그 이념이나 자세가 아주 판이하다. 학생들의 선언문은 기성지도층의 그것과는 전혀 달리 투쟁을 위한 결의와 일제에 착취·억압당하고 있는 당시 한국의 현실을 예리하게 분석하고 있다.
적을 책하지 않겠다는 것이 약자의 강자에 대한 투쟁자세일 때 그러한 자세가 도의적으로 존경할 만하고 높은 차원을 가진 정신적 승리라는 것은 궤변(詭辯)에 불과하며, 결과적으로 투쟁의 포기 아니면 중단만을 가져온다는 것은 명백하다. 이에 대해 학생들의 선언이 일제의 한국침략의 죄악상을 역사적으로 분석·고찰하고, 한국에 대한 일제의 정치적·경제적·문화적·식민정책을 분석하여 한국독립의 정당성을 사회과학적으로 밑받침하고 있는 점은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6·10 만세운동
[편집]-萬歲運動
3·1 운동 이후 한국사회는 무단정치(武斷政治)에서 문화정치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사상적으로는 사회주의 사조가 국내에 유입(流入)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사회운동단체와 사회사상 연구단체가 생겨났으니 그 대표적인 것이 조선학생 과학연구회이다. 그들의 구호는 이제 독립만세가 아니고 해방과 반제(反帝)로 바뀌었다. 또한 많은 학생들은 문화적 활동 혹은 계몽적 활동에 참가하였다.
이러한 중 1926년 4월 26일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인 순종(純宗)이 승하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국민들은 지방이나 서울에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6월 10일은 바로 인산(因山)의 날이었다. 이날 수많은 사람들이 돈화문(敦化門) 앞에 운집(雲集)하자 총독 당국의 경계는 엄중하였다. 학생들은 돈화문 앞에서부터 대여(大輿)가 지나가는 연도에 도달하여 영여(靈輿)를 봉송하였다.
국왕의 붕어(崩御)에 대한 한국민족의 애절한 마음은 자연 하나의 거대한 물결이 되어 일제에 대한 거센 독립운동의 물결로 흐르기 마련이었다. 이러한 기회를 포착한 학생들은 불굴의 투혼으로 한국의 독립을 절규하고 민중의 전위대로서 나섰다. 이리하여 시위는 전국적인 항일궐기로 파급되었고 총독 당국의 탄압에는 맹휴(盟休)로 대항하는 등 그 기세가 거세어 갔다.
원래 6·10 만세운동은 순민족주의적인 사상을 근거로 하였다기보다는 사회주의 사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당시 유행하고 있던 사회주의사상이 학생들과 청년층에 수용되었고,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의 연원도 사회주의사상에서 구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6·10 만세운동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접목(接木)되어 일어난 운동이라 하겠다.
6·10 만세운동은 당초 공산청년회의 권오설(權五卨) 등이 해외에 있는 공산단체와 연락하여 천도교측과 제휴하여 거사하려 한 운동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사전에 탐지되어 주동자는 모두 체포되고 격문(檄文)도 압수되었다. 이리하여 성인층의 만세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와 때를 전후하여 공산단체의 학생 이병립(李柄立)을 포함하여 이선호(李先鎬)·박두종(朴斗鐘)·이천진(李天鎭) 등이 국상일(國喪日)의 거사를 계획하였고, 이렇게 하여 6월 10일의 독립만세운동이 거사되었다.
6·10 만세운동은 사상사적으로 보아서 3·1의 민족독립운동에서 광주학생운동이란 민족해방운동에의 과도적·교량적 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6·10 만세운동은 3·1 운동의 주체가 성인층이었던 데 반해 순수한 학생층 주도라는 데에 뜻이 있다. 이 6·10 만세운동으로 인해 앞으로는 시민적 또는 시민정신에 의한 새로운 민족운동의 한 계기를 마련했으며, 민족진영과 공산진영의 합작으로 이룩된 신간회(新幹會)의 성립이 이로 인해 더욱 촉진되었다는 것은 또하나의 적극적 의의라고 할 수 있다.
광주학생운동
[편집]光州學生運動
광주학생운동을 흔히 사건이라고 하나 사실은 3·1 운동, 6·10 만세운동 이후 계속해 내려온 학생들의 항일운동 중 백미(白眉)에 속한다 할 수 있다. 광주학생운동이 전국민적 운동으로 발전하지 못한 것은 6·10 만세운동 이후 일제의 탄압이 점차 조직화되고 가혹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광주학생운동은 가장 순수한 학생운동이었다는 점에서, 또 자연스럽게 전국적인 학생운동으로 전개되었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새로운 구호, 즉 약소민족 해방만세, 제국주의 타도만세, 피압박민족 해방만세, 무산자계급 해방 만세 등의 구호가 나타났다는 점에서 중대한 의의가 있다.
당시의 상황을 보면 민족주의를 내건 일부인사, 특히 최린(崔麟)·이광수(李光洙) 등은 합법적·타협적 독립운동에서 자치운동(自治運動)에로의 전환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온건론자들은 대중적 유대를 가지지 못하고 비난도 많아 민족진영, 사회주의진영을 통틀은 거족적 단일전선으로 신간회(新幹會)가 조직되었다. 이러한 좌·우 합작운동이 당시의 학생·지식층에 의한 항일사회운동에 큰 자극을 받은 것은 틀림없다.
가령 광주의 경우만 해도 학생들 사이에 노예교육을 자각하고 민족문화를 연구하려는 성진회(醒進會)가 조직되었고, 이것은 다시 1926년 민족문화나 사회과학연구를 목적으로 하는 독서회로 발전하였으며, 그리고 광주학생 독서중앙본부가 결성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학생들의 서클운동이 신간회의 도움도 받으며 학생운동을 더욱 확장해 갔는 바, 그들이 내건 슬로건은 주로 한국의 해방과 노예교육의 절대반대였다.
여기에서 간과해서 안 될 사실은 광주에서 이러한 확생 서클활동이 활발했을 뿐 아니라 이를 배경으로 일제에 저항하는 맹휴(盟休) 사건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광주의 학생들은 이미 1928년 6월부터 10월까지 장장 5개월에 걸친 맹휴운동을 벌였고, 이보다 앞서 1927년 5월 광주고보(光州高普)에서는 차별교육을 항의하는 맹휴를 벌인 적이 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929년 10월 30일 통학길의 열차 안에서 한·일학생간의 충돌이 일어났다. 이때의 충돌은 어디까지나 민족적 대립감정에서 생긴 것이었다.
이상과 같은 누적된 민족적 감정이 11월 3일에 폭발되었다. 11월 3일은 음력으로 개천절(開天節)이자 일본의 명치절(明治節)이었다. 이날 학생들은 일본국가를 부르기를 거부하고 신사참배(神社參拜)도 거부, 때마침 광주고보 학생을 나무라는 기사를 게재한 광주일보사를 습격했다. 일인 학생들은 죽도(竹刀)·야구방망이를 들고 쇄도해 왔고 분노한 한국 학생들의 사기는 거세어 가기만 해서, 일제 당국은 휴교령을 내리고 보도관제를 하는 한편 일대 검거선풍을 내렸다.
이 날을 계기로 광주 일각에서 일어난 민족적 충돌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이듬해 3월까지 만 5개월간 계속되면서 전국의 학생들이 총동원되다시피 했다. 그러므로 광주학생운동은 한국의 학생운동 사상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이렇게 해서 11월 3일은 우리 민족의 학생의 날로 새겨지게 되었다.
암흑기의 학생운동
[편집]暗黑期-學生運動
광주학생운동을 정점으로 하여 일제하 한국학생운동은 전반적으로 침체하게 되었다. 그것은 군국주의(軍國主義)가 너무나 강압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학생운동이 자취를 완전히 감춘 것은 아니었다. 즉 1930년 이후 서울을 비롯한 지방 각 학교에서는 동맹휴학 등이 그칠 새 없이 일어났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일제의 조직적 탄압과 감시는 심해갔다. 이 무렵 새로운 학생운동으로 등장한 것이 '브나로드(vnarod)운동'이다.
1929년부터 학생들은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문맹타파운동을 전개했다. 학생들의 이러한 운동은 사회적으로 커다란 호응을 얻었다. 1931년 7월 학생들은 동아일보의 후원을 얻어 '브나로드'라는 슬로건 아래 농촌계몽에 나섰다. '브나로드'란 원래 러시아 말로써 '민중 속으로'라는 뜻이며, 이 운동은 학생계몽대를 중심으로 하여 학생강연대·학생기자대로 나누어 전개되었다. 학생계몽대는 남녀 고교생으로 구성하여 한글과 산술을 가르쳤고, 학생강연대는 전문대학 이상의 학생들로 구성되어 학술강연·시국강연·위생강연을 담당했으며, 학생기자대는 고교와 전문대학생으로 구성되며 여행일기·고향통신·생활수기 등을 신문에 투고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1935년을 넘어서면서부터 한국의 민족운동은 모든 면에서 암흑기에 들어갔다. 1931년의 만주사변(滿洲事變) 이후 일제는 1937년 중국대륙으로 침략의 마수를 뻗치더니, 1941년에는 한국의 청·장년을 지원병·징용(徵用)·징병(徵兵)으로 동원했다. 뿐만 아니라 일제는 황국신민서사(皇臣民誓詞)를 만들어 제창케 하고, 한글을 폐지하여 일어 상용을 강요했으며, 급기야는 창씨개명(創氏改名)까지 강행하는 등 민족말살정책을 취했다.
이에 대해 학생들은 일어(日語)배척, 학병(學兵)거부 등으로 산발적인 항쟁을 그치지 않아,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될 때까지 26년 간이란 기나긴 형극의 길을 걸으면서도 한국의 학생운동은 민족운동의 중심이 되어 왔다.
8·15 후의 학생운동
[편집]-後-學生運動
8·15 이후의 학생운동은 이미 사상적 대립의 싹을 보이고 있었다. 이때의 학생운동은 정치세력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어서 과거의 학생운동과는 다른 양상을 노정하였다. 이러한 대립의 경향은 1946년 8월부터 국립서울대학교안(案)이 발표되면서 절정에 달했다. 당시 남로당계(南勞黨系)의 좌익학생들은 국립서울대학교안을 대학의 자율성을 해치고 미국화를 가져오는 것이라고 주장, '국대안(國大案) 반대'에 나섰고, 반공민족진영의 학생들은 좌익진영 학생들의 반대운동을 반대하고 나섰다. 이리하여 전국의 거의 모든 중·고등학교와 대학교는 이 '국대안'의 찬반을 둘러싸고 소요가 그치지 않았다. 미군정(美軍政) 3년 간의 학원은 이데올로기투쟁으로 시종했다.
한국전쟁을 겪고 자유당(自由黨) 치하에 들어온 후부터는 학생운동이란 사실상 없었다. 다만 휴전반대나 그 밖에 정부에서 필요할 때 동원되는 관제(官製) 데모가 고작이었다. 이리하여 자유당 말기에는 한때 대학생 또는 젊은 세대의 무기력이 크게 문제되기까지 했다.
8·15 해방 후 학생이 주체가 되고 또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운동을 벌인 것은 3·15 부정선거를 전후해서였다. 1960년 2월 28일 대구서 고등학교 학생들이 처음으로 학원의 자유를 부르짖고 거리에서 뛰쳐 나왔다. 관제가 아닌 학생 독자의 이러한 최초의 궐기는 당시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3월 15일에는 마산에서 학생을 선두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민의 궐기가 있었다. 이후 4월 11일 김주열의 시체가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되어 학생들은 이승만 독재정권에 대해 전국에서 일제히 궐기하게 되었다.
자유당의 10년에 걸친 폭정을 미워하지 않는 시민이 없었고 야당의 투쟁도 치열했으나 4·19의 주역이 학생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4월 18일에는 고려대학생들 수천 명이 국회 앞까지 진출하여 부정선거를 규탄했고, 돌아오는 길에 깡패들의 습격을 받고 수많은 학생들이 피를 흘리고 쓰러졌다.
다음날인 4월 19일 서울의 거의 모든 대학생이 총궐기하여 경무대까지 진출했고, 이에 당황한 자유당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무차별 총격을 가해 수많은 학생들이 사상(死傷)했다. 4월 25일의 교수데모를 계기로 마침내 26일에는 전 서울시민까지 총궐기하여 자유당정권은 붕괴되고 말았다.
자유당정권을 타도하고 한국의 민주주의를 사수한 것은 학생들이다. 이들 학생들이 일으킨 혁명적 의거는 아직까지 한 번도 시민적 혁명을 겪지 못한 한국의 역사를 그만큼 발전시킨 빛나는 운동이었다.
80·90년대의 학생운동
[편집]八十·九十年代-學生運動
한국헌정사에 있어 학생운동은 반민주·반독재투쟁의 선봉이었으며 그 과정에는 수많은 젊은 넋들의 희생이 서려 있다.
'10·26'으로 제4공화국이 종말을 고하고 9차례에 걸친 긴급조치로 제4공화국 당시 영어의 몸이 되었거나 해직·제적되었던 교수·학생들이 복교·복직·복권되어 돌아오자 대학가는 '학내 민주화'에 의견을 모아 '학내언론 자유', '어용교수 퇴진', '재단비리 척결' 등을 슬로건으로 교내시위에 돌입하였다. 1980년 봄에는 '군사교육', '병영집체' 등 군부잔재 종식과 반미(反美)·통일에 관련된 구호도 나타났으나 교내외에서의 반응은 차가웠다.
1980년대 학생운동의 특징은 이론적 체계화와 조직화 그리고 전국적인 대학연대와 지도부의 등장이라 할 수 있으며 특히 노동운동에 끼친 영향은 절대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80년 5월 '서울의 봄'에서 민주화궤도의 이상을 감지한 대학가는 학내 이슈에서 급전환, '계엄철폐', '유신잔당 척결', '신군부 타도', '정부주도 개헌반대' 등 정치적 성격으로 변화했으며 당시 사회조류를 인식, 노동3권 보장, 언론계각성 등 사회 전반에 걸쳐 폭넓은 주장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학생운동은 '대학연대' 형태로 '시국공동성명' 발표나 연대시위 등의 조직력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80년대 학생운동의 분수령은 신군부에 의한 '5·17 비상계엄확대 조치'와 그들의 일방적인 조치에 저항한 '5·18 광주민주화운동'으로 '5·18'은 1980년대 학생운동의 정신적 메카가 되었다.
'5·17' 전일 대학가는 정상수업 복귀의견을 모았는데 당일 휴교령이 발동됨으로써 학생들의 선택은 여지가 없었으며, '5·18'에 이르러서는 대정권투쟁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더욱이 제5공화국이 학생운동에 대해 강경자세로 일관, 반사적으로 학생운동 일부에서는 급진세력이 대두하게 되었고 과외금지, 교수재임용제, 졸업정원제 등 일련의 교육개혁조치도 온건성향의 학생들을 대거 시위에 가담하게 하는 역효과를 나타냈다.
'5·18' 이후 학생운동은 '5공정권 타도', '민주화' 그리고 '5·18', '5공정권 성립'에 관계된 미국에 대한 부정에서 '반미'로 투쟁노선을 집결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5공은 강제징집·지도휴학제·군사교육강화 등 소위 '녹화사업'으로 대처했고, 기관원의 학내상주와 무제한적인 학원내 공권력투입을 강행하여, 학생운동은 일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침체되었던 학생운동은 1983년 학내자율화 조치로 다시 숨통을 텄고 복교한 학원사태 관련 제적생들이 1984년초 각대학·지역별로 '협의회', '위원회'를 구성, 학내민주화와 녹화사업 폐지 등 학생운동에 대한 탄압중지 및 '언론기본법 폐지', '노동운동 탄압중지', '전면해금' 등 경제·정치·사회 전반에 걸친 현안들을 부각, 폭넓은 지지를 확보함으로써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특히 당시 학내에서는 총학생회·학내 자율화추진위원회 등 학생들의 자율적인 조직체와 학도호국단 사이의 충돌이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1984년말 학생운동은 그 양상을 일변하는데 대학연합 시위와 노학·농학연대투쟁 및 가투(假鬪)선언이 그것이다. 이미 이론화·조직화를 나타내기 시작한 학생운동은 체계적인 이론학습과 투쟁의지를 갖춘 지도세력을 이끌어냈고 이들에 의해 조직화되어 1984년 11월 '민주화투쟁 전국학생연합'을 시작으로 '전국대학생 총연맹'에 이어 1985년 4월 '전국대학생 총연맹(全學聯)'을 결성, 전국적이고 규모화·체계화된 세력을 구축했다. 1980년대 중반의 학생운동권을 대부분 흡수, 주도한 전학련은 산하에 대학별로 삼민주의(三民主義)를 강령으로 하는 삼민특위를 두어 반외세·반독재·민중지원 투쟁을 전개, 학생운동은 이념적인 변화를 보이게 되었다. 5공정권은 이들을 좌경·극렬의식화로 간주하여 대대적인 검거를 실시했고, 이미 가투를 선언한 학생운동권은 공공기관·외국기관 점거·농성 등 대정권 실력행사에 돌입, 정국은 일대파란 속에 휩싸였다. 5공정권은 학원 자율화 조치 이후 철수시켰던 공권력을 학내에 재투입하였고, 1986년 건대사건 이후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계기로 격화되어 6·29 선언으로 이어졌다. 1989년 이후 학생운동은 임수경 평양축전 참가, 부산 동의대 경찰관 참사, 학원자주화 투쟁 등 급진·과격성을 보이기도 하였다. 한편 1990년 경찰의 과잉 시위진압으로 인해 학생들의 희생이 뒤따르기도 하였다. 그후 전대협(전국대학생협의회)에서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연합회)으로 다시 출범한 학생들은 1996년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 본부와 함께 8월 15일 광복절을 맞아 법청학련 통일대축전 및 범민족 대회를 개최하기 위해 판문점으로 향했다. 그러나 정부는 한총련을 '반국가 이적단체'로 규정 강경진압에 나섰다. 학생들은 연세대에서 행사를 거행하고 가두시위를 벌이는 한편 경찰과의 무력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연세대에 모여 있는 학생들을 강제 해산하는 과정에서 학교 기물이 파손되고 경찰이 숨지는 등 사회문제로 대두·국민들의 우려와 따가운 시선 속에 한총련 사태는 일단락 지어지고 학생운동은 일대 위기를 맞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