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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노동운동
[편집]-〔서설〕 韓國-勞動運動〔序說〕
한국의 자본-노동관계는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 후 일본 자본주의가 진출하면서 이루어졌다. 1910년대 후반부터 일본의 적극적인 자본수출과 결부되어 근대적 공장이 확장되고 노동자가 급증했다.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대중적 조직의 중요성을 인식한 지도자들에 의해 1920년에는 처음으로 전국적 수준의 노동자 단체를 결성하고, 그들의 계급적 강령을 갖게 되는데 조선노동공제회가 그것이었다. 1920년 1월에 발족한 이 공제회는 지도부가 주로 자산계급이었고, 그 활동도 노동계급의 의식과 역량 부족으로 계몽단체 수준이었으며, 지도층의 주도권 싸움이 끊임없이 발생했다. 이들은 1923년의 조선노동동맹과 1926년의 조선노동총동맹 등으로 이어졌다. 특히 조선노동총동맹은 노동운동을 대표하는 노동단체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 이후 노동운동은 거의 불가능해져 노동자들이 할 수 있는 쟁의는 태업에 지나지 않았다. 이같이 위축되었던 노동운동은 8·15광복과 더불어 전환기를 맞았다. 45년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朝鮮勞動組合全國評議會)가 조직되었는데 이는 남로당의 전위행동대로서 남한의 정치 및 사회질서를 혼란시키는 데 주력했다.
광복과 더불어 노동운동은 폭발적으로 고양되어 1945년 11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이하 全評)가 결성되었다. 전평은 8시간
노동·최저임금제 확립 등을 강령으로 하여 처음에는 과격한 투쟁을 억제하는 우익적 태도를 견지하였다. 그러나 신탁통치의 찬반을 둘러싼 당시의 정치상황이 노동운동의 영역에도 반영되어, 46년 3월에는 좌익계 노동단체인 전평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미군정의 비호하에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이하 대한노총)이 결성되었다.
정부 수립과정에서 선봉대가 되었던 대한노총은 1948년 8월 정부가 수립되자 유일한 합법노조로 인정되었고 그 명칭을 대한노동총동맹(이하 대한노총)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전평 이후 유일한 노동단체가 된 대한노총으로서는 최소한이나마 노동자들의 이익을 대변하지 않을 수 없었고, 또한 당시 전기·철도·은행·광산 등 주요 사업체가 정부 귀속재산이었으므로 그 투쟁대상도 정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전의 동맹세력이었던 이승만 정권과 대한노총의 이러한 대립은 이승만이 자신의 반대파인 당시 위원장 전진한을 몰아내고 자신의 재선을 지지하는 세력에게 대한노총을 넘김으로써 일단락되었고, 대한노총은 하부단체로 어용화되었다. 그러나 상부층의 어용화는 달리 단위노동조합들은 임금인상·노동운동보장을 요구하며 지속적인 투쟁을 전개하였다. 또한 1953년 노동조합법·노동쟁의조정법, 54년 근로기준법 등이 제정, 시행되어 노동운동의 법률적 기초가 마련되었다. 59년에는 대한노총의 어용성 탈피와 민주적인 노동운동의 전개를 목적으로 전국 37개 노동조합연합체 중 23개 단체 대표 32명이 모여 전국노동조합협의회(이하 전국노협)를 설립하였다.
1960년 4월 19일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자 그 해 5월 9일 대한노총이 어용단체화된 데 대한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노총 간부가 총사퇴했다. 60년 11월 25일 대한노총은 명칭을 한국노동조합총연맹(韓國勞動組合總聯盟)으로 고쳤는데 5·16군사혁명으로 해산되었다. 그후 군사혁명정부에서도 노동조합의 위치와 중요성을 인식하고, 61년 8월 노동조합 활동을 다시 보장해 주었다. 61년 8월 4일 한국노동단체 재건 조직위원회를 조직했다. 61년 10월 30일에는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을 결성하고 처음으로 전국 단위의 산별노조체제를 갖추었다. 그후 변천하는 국내외 정세와 노동사정에 대처하기 위해 몇 차례에 걸쳐 노동관계법령을 고쳤다.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 등을 제정하여 단체교섭권 등을 규제했고, 73년 12월 노동조합법 등을 개정했다. 70년대에 들어 노동운동은 광주 대단지사건을 비롯, 청계피복노조사건 등 민주노조운동의 양상으로 나타났다.
80년대초 제5공화국 출범과 함께 강화되었던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이 83년 다소 완화되면서 전산업에 걸쳐 20여 개의 노조가 결성되었다. 85년 6월의 구로공단 노동자 연대투쟁으로 대우 어패럴노조에 대한 탄압에 대응하여 구로공단내 6개 업체가 동조농성에 들어간 사건으로 이는 노동운동이 경제적 이익을 넘어 구속자 석방·노동3권보장 등을 요구하는 정치적 성향을 나타냈다는 점과 70년대 기업별 노조운동의 틀을 넘어 노조연대의 가능성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한편 이를 계기로 정치투쟁을 중요과제로 설정한 서울노동운동연합(약칭 서노련)이 결성되었으나 올바른 목표와 방향을 제시하지 못한 채 1년만에 해체되었다. 1986년에는 노동운동의 사상과 이론을 구체적 현실에 조응시키기 위한 사상투쟁이 전개되었는데, 이는 대중적 실천에 바탕을 두지 못했기 때문에 운동의 통일성을 저해하고 분파주의의 폐단을 초래함으로써 노동운동은 다소 정체되었다. 그러나 87년 6월 항쟁과 6·29선언에 이어 7월-8월 2개월 동안 약 3000여건의 쟁의가 발생하여 그 동안 누적되었던 갖가지 노동문제가 일시에 분출되었는데, 이는 6·25가 일어난 이래 최대규모의 노동쟁의로 평가되고 있으며 이후 한국의 노동운동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4·19 혁명·노동운동
[편집]四·一九革命·勞動運動
해방후 한국노동운동이 좌우충돌로 정치적 극렬성을 띠다가 좌익노동운동이 불법화되면서 노동운동은 새로운 방향을 갖지 못하고 집권당의 기간단체로서 오히려 노동자들의 권익을 억눌러 왔다. 4·19 혁명으로 독재가 무너지고 민권이 회복되자 노동운동은 정치의 간섭없이 자율적으로 전개되었다. 그 결과,
⑴ 지도세력이 다원화되어 민주노동 운동의 체계가 생겼다.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난 직후 이승만 정권의 붕괴가 명백해지자 3·15 부정선거에 적극적으로 참가한 대한노총은 긴급간부회를 개최하고 총사직을 결의하여 '노동운동의 정치적 중립화'를 표방하였다. 그리고선 동년 11월 대회를 소집하여 명칭을 대한노동조합연맹으로 바꾸었다. 이에 대하여 1959년 자유당정권 말기에 노총의 어용화에 반대하여 비밀리에 결성된 전국노동조합연합회는 대한노련을 어용조합이라 비난하고 노동운동의 불편부당성을 주장하였다. 이로써 노동운동은 종래의 일원화된 조직체계가 다원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밑으로부터 조직되어 민주적인 노동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노동운동지도체계가 성립한 것이다.
⑵ 인텔리가 노동운동에 참여하여 노동운동의 성격 변화 가능성을 가져왔다. 1958년 이래 논의의 대상이 되어 왔던 교원노동조합이 4·19 이후 당국이 일관성 없는 정책하에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각 지방 교원들에 의해서 조직되었고 또한편 각 은행 및 대기업체의 사무직원들이 노조를 조직하게 되었다. 과거 대한노총을 비롯하여 어떠한 노동자 전국 단체도 정신노동자만의 조직을 가진 일이 없었으나 이의 출현은 대부분의 지식인이 국가기관에 매몰되어 있던 제약성을 깨뜨리고 노동운동의 지도세력 형성과 성격의 전환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⑶ 노사간의 관계에서 노동자가 우세를 보여 노동조합조직이 대대적으로 조직되고 그 투쟁방식이 정치적인 대중운동방식을 취하였다. 4·19에서 익년 4월 14일까지 252건의 쟁의에 대체로 쟁의목적을 달성하여 임금을 15%에서 50%까지 인상시켰고 노동자들은 투쟁방식에 있어서도 가두진출(데모)방식을 택하여 4월 19일에서 9월 30일까지 485건(참가인원 123, 475명)에 달하는 시위를 벌여 정치적인 투쟁방식을 취하였다. 또한 4·19 이후 1년 동안에 280개에 달하는 노동조합이 새로이 조직되었다.
⑷ 노동운동이 취업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실업자 구호대책 문제까지 제기되었다. 동년 7월 '전국 실업자구호대책 투쟁위원회'가 결성되어 사회보장 및 취업기회를 위한 요구를 광의의 노동운동에 포괄시켜 그간의 노동운동이 일부 조직노동자만에 한하였던 폐쇄성에 대하여 비판적 계기가 되었다.
4·19 혁명 이후의 노동운동은 부정적인 측면을 드러냈고 정치적·사회적 혼란으로 인한 산업의 위축과 경기후퇴 및 물가앙등은 더한층 정치적인 노동운동을 유발시켜 5·16 이후의 노동운동이 조합주의적 성격을 갖고 정치활동이 금지되게 하는 한 요인이 되었다.
위헌노동법 반대투쟁
[편집]違憲勞動法反對鬪爭
오늘의 노동3법(근로기준법, 노동조합법, 노동쟁의조정법)은 1963년 군사혁명 정부에 의해서 개정·공포된 것을 기본삼고 있다. 노총(勞總)의 환영을 받았던 1962년의 개정 근로기준법은 1963년의 개정안으로 대폭 수정되어 관계당국과 노총은 계속 대립해 왔다. 1963년 12월에는 노총이 전국적인 파업까지 결의했으나 노동3법 개정은 저지하지 못했다. 이후 경제단체 등에서까지 노동관계법의 대폭 개정을 강력히 요구하여 1964년 노사(勞使) 쌍방간의 공청회를 열었으나 오히려 노동운동을 억압하는 개정 방향으로 나가게 되어 강력한 반대에 부딪치게 되었다.
1969년 노동관계법 개정은 정부당국과 경제인 단체의 주도로 다시 개악(改惡)의 기로에 놓이게 되자 노총은 적극 저지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노총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외국인 투자기업의 노동조합 및 노동쟁의 조정에 관한 임시특례법' 등의 법이 제정, 실시되어 운동에 암운을 던져 주었다.
유신헌법 공포 후인 1973년에는 유신헌법 이념에 입각한 노동3법 개정작업이 치밀하게 이루어져 노동쟁의의 조정을 행정부가 주도하는 문제, 각종 쟁의의 노동조합 일원화, 각종 벌칙 강화 등을 골자로 한 노동3법이 실시케 되었다.
유신이후의 노동운동
[편집]維新以後-勞動運動
노동3법의 개정에 의한 많은 애로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에 접어들어서 한국의 노동운동은 격렬성을 띠어 왔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노동자들의 각성과 질적 향상 및 해외 취업자들의 급증으로 인한 노동운동의 인식과 경험의 증대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집단적인 항거와 저항이 강력하게 규제되어온 상황 아래에서도 1973년의 삼립식품, 진로주조, 1974년의 종근당과 동아·한국 등의 언론기관 노조운동 등은 한국 노동운동사에서 중요한 문제점을 제기해준 사건들로 평가된다. 특히 노동자 자신에 의하여 노조를 통하지 않는 항의사건은 노총에 대한 노동자들의 인식이 어떤가를 간접적으로 알려주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80·90년대의 노동운동
[편집]八十·九十年代-勞動運動
1979년 8월 발생한 YH무역노조의 신민당사 농성사건은 '청계피복노조사건'과 더불어 정치·사회적 이슈로 대두되었던 노동운동 탄압의 대명사였다. 1980년 민주화운동이 고조되면서 노동운동도 활성화되었으나 5·17 비상계엄 확대조치로 다시 소강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7·8월 노동자대투쟁을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 노동쟁의가 발생하면서 다시 활기를 되찾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현대중공업·현대자동차·대우조선 등 대기업의 중화학공업을 중심으로 노동운동이 과격화·장기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그 결과 신규노조가 급증하게 되었고, 기존의 한국노총에 대한 어용화시비가 일면서, 1990년 1월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가 결성되었다. 한편, 사무직 종사자·교사 등의 화이트칼라층에서도 사무금융노동조합연맹·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등이 조직되었다. 또한 11월에는 16개의 대기업 노조들이 '연대를 위한 대기업노조회의'(대기업연대회의)를 결성하여 임금협상 등에서 보조를 맞추기도 하였다. 1993년 6월에는 전노협·업종회의·현대그룹 노조협의회(현총련)·대우그룹 노조협의회(대노협) 등이 전국노조 대표자회의(전노대)를 결성하였다.
한편 1994년 이후 현대중공업·서울지하철·한국철도공사의 파업 등 대규모화된 노동운동은 한국노총의 단일체제에 변화를 가해 민주노총을 건설하고, 합법적인 단체는 아니지만 이를 중심으로 새로운 노동운동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