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종교·철학/세계의 종교/불 교/불교의 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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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승불교[편집]

小乘佛敎

석존(釋尊)이 멸한 뒤 100년경, 불교 교단은 계율에 대한 의견 차이에서 보수적인 상좌부(上座部)와 진보적인 대중부(大衆部)의 둘로 분열되고(근본분열), 그후 약 200년 동안에 걸쳐 분열을 거듭하여 18부로 나뉘어(枝末分裂) 근본2부(根本二部)를 포함해서 20부가 되었다 한다. 이것이 부파(部派)불교라는 것인데, 그후 기원 전후에 새로운 대승불교가 일어나게 되자 지금까지의 부파불교를 소승불교(小乘佛敎)라고 폄칭(貶稱)하게 되었다.

이 부파시대의 불교는 각 부파마다 석존의 가르침을 정리·분류하고, 각기 독자적인 '경(經)'과 '율(律)'을 전함과 동시에 이들을 해석·연구하여 조직 체계화하는 학문이 발달하였다. 이것을 아비달마(阿毘達磨:對法)라 하여 논(論)이라 불렀다. 소승불교는 이처럼 교의의 확립이라는 점에서 큰 공적을 남겼는데, 교의의 번잡화(煩雜化)는 불교의 종교로서의 생명을 잃게 하고 신앙을 고갈시켰으며, 새로운 불교개혁운동(대승불교)을 초래하는 결과가 되었다.

대승불교[편집]

大乘佛敎

부파불교 중에서도 가장 유력했던 것은 보수파 상좌부계(上座部系)에서 나온 설일체유부(說一體有部)였다. 유부(有部)는 매우 조직화된 교의체계를 확립하고, 학문불교로서 국왕의 보호 아래 안정된 입장에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학문으로서의 불교는 아무리 진보 발전하여도 종교로서의 불교의 역할은 점점 망각되어 갔다. 그래서 이같은 불교의 고정화(固定化)·전문화(專門化)에 대해서 널리 민중의 신앙 속에 살아 있는 불교의 부흥을 외치며 일어난 것이 대승불교운동(大乘佛敎敎動)이다.

대승불교는 석존의 유골을 안치한 사리탑(舍利塔), 즉 스투파를 수호하고 있던 사람들 중에서 일어났다고 하며, 번거로운 교리보다는 불덕을 찬양하고, 불타를 향한 깊은 신앙에 살려고 하는 취지 아래 생겨난 것이다. 이리하여 대승불교의 기수(旗手)들은 스스로의 손으로 새로운 대승경전을 편찬하고, 불교를 일부 출가수행자의 작은 탈것(小乘)에서 해방하여 널리 일반민중의 구원을 역설하는 재가중심(在家中心)의 큰 탈것(大乘)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출가불교[편집]

出家佛敎

재속(在俗) 생활을 떠나 오로지 불교수행에 힘쓰는 것을 출가라고 하는데, 출가는 인도에서 불교 이전부터 행하여졌으며 깨달음을 얻기 위해 정적(靜寂)한 산림한처(山林閑處)에서 수행하는 풍조가 있었다.

석존은 29세때에 출가하여 진실의 도를 찾아 수행으로 들어갔는데, 불교도 석존을 본떠 출가하여 불교를 수행하는 일이 일반적으로 행해지고, 불교 교단은 이와 같은 출가자에 의해 조직되었다. 그러나 교단의 확대에 따라 아무나 다 출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연령상의 제한이나 출가자로서 지켜야 할 여러 계율이 정하여졌다. 부파불교에서는 출가자를 사미(沙彌)·사미니(沙彌尼)·식차마나(式叉摩那)·비구(比丘)·비구니(比丘尼)의 5중(五衆)으로 했는데, 대승불교에서는 출가자를 출가·출가니의 2중(二衆)으로 총칭한다.

출가불교라고 할 경우에는, 예를 들어 부파불교처럼 출가 수행자만이 전문적으로 불교의 학문적 연구나 실천수행에 힘쓰고, 일반 재속신자(在俗信者)는 이에 구애되지 않는다. 즉 전문가의 불교인 것이다.

재가불교[편집]

在家佛敎

재가는 출가에 대하여 속세의 집에 살며 스스로 생계를 세우고 있는 속인(俗人)을 지칭하는 것인데, 이 재속인으로서도 불법승(佛法僧)의 3보(三寶)에 귀의(歸依)할 맹서를 세워(三歸依), 불살생·불투도(不偸盜)·불사음·불망어(不妄語)·불음주(不飮酒)의 5계(五戒)를 받으면 남성은 우바새(優婆塞), 여성은 우바이(優婆夷)로서 불교의 승가(僧伽)를 구하는 칠중(七衆) 속에 들 수 있다.

이러한 재가인(在家人)들이 믿고 실천하여 온 불교가 재가불교이며, 옛날 대승불교운동의 추진력이 된 것은 불탑(佛塔)을 수호한 재가신자였다는 추정도 있고, 대승경전에는 <유마경(維馬經)>이나 <승만경>과 같은 재가의 거사(居士)나 부인이 주인공이 된 경전이 출현하고, 불교는 한낱 추가수행자의 독점물이 아니라 재가의 세속생활을 통해서도 불교의 이상을 달성할 수 있다는 생각이 퍼지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불교 민중화의 한 형태로서, 중국에서는 명(明)·청(淸)대에 재가 불교운동이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행증불교[편집]

行證佛敎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다하여 수행하며, 석존이 체득한 깨달음의 경지를 자기 자신에게 실현하기를 지향하는 불교를 행증불교라 한다. 학문불교가 불교를 객관적 연구대상으로 하여 자기의 밖에 놓는 데 대하여, 불교가 지향하는 깨달음을 주체적으로 자기 인격 위에 실현하고자 하는 실천불교의 입장에 서는 것이다.

이 수행도(修行道)에 관해서 불교에서는 원시불교 이래 여러가지 실천도가 역설되었고, 다른 종교에서는 볼 수 없을 만큼 많은 수행규정이 정해져 있다. 즉, 석존은 출가 수행자가 실천해야 할 길로서 계정혜(戒定慧)의 3학(三學)이나 8정도(八正道)를 역설하고, 대승불교에서는 보살의 실천도로서의 6바라밀(六婆羅蜜)이 역설되었다. 한편 인도에서는 대승의 유가행(瑜伽行)이나 밀교(密敎)의 수법(修法)이 설법되었으나, 불교가 중국으로 전해지자 중국인의 실천적 성격과 연결되어 좌선이나 지관(止觀), 관법(觀法)이나 염불(念佛) 등을 근본행(根本行)으로 하는 불교가 성하여졌다.

학파불교[편집]

學派佛敎

불교의 교리를 학문적으로 연구하고 주석 해석하여 조직 체계화하고, 다른 학파에 대해서 자기 학파의 우월성·정통성(正統性)을 주장하려고 하는 입장에 서 있는 불교를 '학파불교'라고 한다. 원시불교 시대에는 석존(釋尊)은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철학적 문제를 논하는 것을 희론(戱論)이라 하여 배척하였고, 인생에 있어서의 고(苦)로부터의 해탈(解脫)을 지향하는 실천도 속에야말로 불교의 본의가 있다고 보고, 단순히 이론을 위한 이론은 전혀 문제삼지 않았다. 석존이 멸한 후 불설(佛說)에 대한 해석의 차이에서 부파(部派)로 분열하게 되자, 아비달마라고 불리는 주석연구(註釋硏究)가 발달하여 불교의 학문적 연구가 양성(釀成)되었다. 또한 초기의 대승불교에서는 실천면이 강조되었으나 차차 교리의 학문적 연구로 이행하여 중관파(中觀派)·유가행파(瑜伽行派)라고 하는 2대학파의 성립, 더 나아가 대립으로 발전되었다.

중국에서는 각기 전역(傳譯)된 경론(經論)을 연구하는 학과적인 종파로서, 비담(毘曇)·성실(成實)·열반(涅槃)·지론(地論)·섭론(攝論)·삼론(三論)·화엄(華嚴)·법상(法相) 등이 일어났다.

귀족불교[편집]

貴族佛敎

불교는 당시 인도에서 행하여지고 있었던 계급제도에 반대 입장을 취한 평등주의에 입각한 것이며, 일부 특권계급의 독점물이 되는 것은 석존의 본의(本意)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불교가 교단(敎團)으로서 사회에 존재하는 이상, 교단을 유지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재정면의 지원을 필요로 하였다. 이미 석존 재세 당시에 있어서도 기원정사(祇園精舍)나 죽림정사(竹林精舍)라는 승원(僧院)이 유력한 사람들에 의해 기증(寄贈)된 사실이 있고, 그와 같은 유력자나 권력자와의 관련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특히 중국에서는 불교의 전래(傳來) 이래 끊임없이 그때그때의 조정(朝廷)이나 귀족들과 밀접한 관계가 유지되었고, 이같은 외호자(外護者)의 힘에 의해서 많은 사원이 건립되고 승려들이 양성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대(唐代)에는 내도장(內道場)이 설치되어 조정 귀족을 위해 강설이 행해지고, 혹은 천자(天子)나 귀족의 연명식재(延命息災)를 기원하는 기도회가 성하였으며, 광대한 장원이 사원(寺院)에 기증되어 승려 자체가 귀족화하는 폐단도 있었다.

민중불교[편집]

民衆佛敎

인도에는 불교 이전부터 카스트라는 계급 제도가 뿌리박고 있었으며, 브라만 계급이 그 최고의 계급이었으나, 기원전 500년경부터 문화의 중심이 동(東)으로 이동함과 함께 신흥왕족·무사계급이 실력을 갖게 되었다. 석존은 이와 같은 시대에 출현한 것으로 불교는 사성평등(四姓平等)을 역설하며 어디까지나 법(法)의 실천에 중심을 두었다. 즉 인간의 존비(尊卑)는 그 사람의 태생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행위에 있음을 역설하고, 만일 누군가 계급을 묻는다면 석자(釋子:석존의 자손)라고 대답할 것을 가르쳤다. 또한 최근,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의 일부가 계급부정(階級否定)의 불교에 개종했다는 말도 있듯이 불교는 본래 민중을 위한 종교였다.

논종[편집]

論宗 부파불교 이후, 교법(敎法)의 해석으로서의 아비달마의 발달에 의해서 많은 불교 논서(佛敎論書)가 저술되었으나, 그것이 중국으로 전해져서 번역됨과 동시에 이를 중심으로 연구가 이루어져 그 같은 논서를 바탕으로 한 일종(一宗)이 확립되는 경우도 있었다.

즉, 논서의 강구(講究)를 중심으로 한 학파적인 종파라는 것으로, 이것이 바로 논종(論宗)이라는 것이다. 논종으로서는 유부(有部) 법승(法勝)의 <아비담심론(阿毘曇心論)>, 법구(法救)의 <잡아비담심론(雜阿毘曇心論)> 등의 구역(舊譯)을 연구하는 비담종(毘曇宗), 하리발마(訶梨跋摩)의 <성실론(成實論)>을 강구하는 성실종(成實宗), <화엄경(華嚴經)>의 고형(古型)을 이루는 것으로 알려진 <십지경(十地經)>에 대한 세친(世親)의 주석 <십지경론(十地經論)>을 강구하는 지론종(地論宗), 유가유식파(瑜伽唯識派)의 입장에서 대승불교의 교리를 조직화한 무착(無着)의 <섭대승론(攝大乘論)>을 강구하는 섭론종(攝論宗), 공(空)의 교리를 체계화한 용수(龍樹)의 <중론(中論)>·<십이문론(十二門論)>과 제자인 제바의 <백론(百論)>의 3론을 강구하는 삼론종(三論宗), 세친(世親)의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에 관해서 호법(護法)을 중심으로 한 10대논사(十大論師)가 주석을 달았다는 <성유식론(成唯識論)>을 강구하는 법상종(法相宗) 등이 포함되어 있다.

경종[편집]

經宗 불타가 역설한 교법으로 알려진 경(經) 내지는 후세의 대승불교도들이 불타가 말한 교법이라 하여 제작한 여러 대승경전은 차례차례 중국으로 전해져 한역(漢譯)되었는데 중국의 불교학자들 사이에서는 번역된 여러 경전을 가치비판적으로 조직·체계화하고 석존이 세상에 나타난 본회(本懷)를 어느 특정한 경전에서 구하여, 그 경전을 바탕으로 일종(一宗)을 확립하는(敎相判釋) 일이 행하여졌다. 이처럼 어느 특정한 경전을 소의(所依)의 경전으로 하여 확립된 종파를 경종(經宗)이라 한다.

중국에서는 지자대사(智者大師) 지의의 5시8교(五時八敎)의 교판(敎判)에 바탕을 둔 <법화경>을 소의(所依)의경전으로 하는 천태종(天台宗)과, 현수대사(贅首大師) 법장(法藏)의 5교10종(五敎十宗)의 교판에 의거한 <화엄경>을 소의(所依)의 경전으로 하는 화엄종이 대표적인 것이다.

나아가 담란(曇鸞)·도작(道綽)·선도(善導) 등에 의해 대성된 정토교(淨土敎)는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대무량수경(大無量壽經)>·<아미타경>의 정토3부경(淨土三部經)을 근거로 하였고, 또한 인도에서 일어나 중국으로 전하여진 밀교(密敎)도 <대일경(大日經)>·<금강정경(金剛頂經)>에 바탕을 둔 것이기 때문에 경종(經宗) 속에 넣을 수 있다.

성도문[편집]

聖道門

정토교(淨土敎)의 도작(道綽, 562∼645)이 그의 저서 <안락집(安樂集)>에서 석존일대(釋尊一代)의 가르침을 나누어 성도문과 정토문의 2문(二門)으로 판별하고, 자기가 믿는 정토문의 입장을 발양(發揚)시켰는데, 거기에 기술되어 있는 성도문이란 이 땅에서 자기의 능력을 바탕으로 수행을 하고 깨달음을 얻으려는 것으로, 이미 담란이 <정토론주(淨土論註)>에서 '자력(自力)에 의한 수행은 육로(陸路)의 보행의 괴로움과 같이 난행도(難行道)이다'라고 말한 자력(自力)·난행도의 입장을 말한 것이다.

정토문[편집]

淨土門 정토문(淨土門)을 확립한 도작(道綽)이 아미타불의 서원(誓願)을 믿고, 그 힘에 의지하여(타력) 죽은 후에 극락정토(極樂淨土)에 왕생하여 깨달음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 정토문이라고 성도문(聖道門)에 대한 스스로의 입장을 설명한 것이다. 그는 말법(末法)인 현세에는 성도는 깨닫기가 힘들고(難) 정토(淨土)에는 들어가기 쉽다(易)고 하여 정토문(淨土門)을 선양했는데, 이 난이(難易)의 설은 용수(龍樹)의 <십주비바사론(十注毘婆沙論)>의 이행품(易行品)을 도입한 담란의 <정토론주(淨土論註)>에, "타락에 의한 왕생은 수로(水路)에 배를 타면 즐겁듯이 이행도(易行道)이다"라고 말한 데 바탕을 두었다.

교종[편집]

敎宗

교종이란 불타의 교설 및 그것을 문자로 나타낸 경전을 바탕으로 하는 종지(宗旨)를 뜻하며, 불어종(佛語宗)이라고도 하고, 부처의 일심(一心)을 전하는 불심종(佛心宗)으로서의 선종(禪宗)의 입장에서 불교를 판별(判別)하여 교선2종(敎禪二宗)으로 나눈 데에서 비롯된다.

교종은 구체적으로 <법화경>에 의거한 천태종(天台宗)이나 <화엄경>을 소의(所依)로 하는 화엄종을 가리키는데, 이들이 중국에 있어서의 대표적 교종이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선종(禪宗) 이외의 전 불교는 이 교종 속에 포함된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선종[편집]

禪宗

선종의 목표로는 '이심전심(以心轉心)·견성성불(見性成佛)·불립문자(不立文字)·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선종의 특징을 가장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며, 이로써 선종이 선종 이외의 불교로서의 교종과는 가장 현저하게 다른 독자성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즉, 그것은 부처의 마음을 마음으로 전하고 본성을 구명함으로써 깨달음을 얻으며, 경전의 문자에 구애됨이 없이 3승 12부경(三乘十二部經) 이외에 별도로 부처의 마음을 전한다는 불심종(佛心宗)의 입장에 선 것이 선종이다.

현교[편집]

顯敎

비밀의 가르침, 즉 밀교(密敎)에 대해서 언어문자상으로 분명히 설시(說示)된 가르침의 뜻으로, 밀교 이외의 불교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다.

본래 밀교 쪽에서 가치비판적으로 일컬은 말로서, 밀교 즉 진언종(眞言宗)에서는 부처 생전의 모든 가르침을 판별하여 현밀2교(顯密二敎)라 하였고, 현교는 밀교만 못하여 밀교는 심심미묘(甚深微妙)하고 뛰어난 가르침이라 하였다.

밀교에서 말하는 현교란 중생의 능력에 따라 대소승(大小乘)의 삼장(三藏) 12부경에 설명된 4체(四諦)·6도(六度)의 법문이며 응신화신(應身化身)으로서의 석존을 교주로 삼고 있다.

밀교[편집]

密敎

비밀의 가르침이란 뜻으로 문자언어로 표현된 현교(顯敎)를 초월한 최고심원(最高深遠)한 가르침을 말한다. 일본에서는 진언종의 공해(空海)가 불교를 현밀2교(顯密二敎)로 판별하고 밀교의 우위를 주장했으나, 밀교는 법신불(法身佛)로서의 대비로사나불(大毘盧舍那佛), 즉 대일여래(大日如來)가 부처 자신 및 그 권속(眷屬)을 위하여 비오(秘奧)한 신구의(身口意)의 3밀(三密)을 풀이한 것으로, <대일경(大日經)>에서 말하는 태장계(胎藏界), <금강정경(金剛頂經)>에서 말하는 법문(法門)이나 다라니(陀羅尼)·인계(印契)·염송(念誦)·관정(灌頂) 등의 의궤(儀軌)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인도불교의 부파와 학파[편집]

소승20부[편집]

小乘二十部

북방불교의 자료들에 의하면 불멸(佛滅) 후 100년 아쇼카왕 치세 때, 마하데바(Mahadeva:大天)라고 하는 진보파 비구가 교의에 관한 5개조의 신설(新說)을 제창하고 그 승인을 교단에 구했을 때에, 또한 남방불교의 자료인 실론의 <도사(島史)>나 <대왕통사(大王統史)>에서는 와지족의 비구가, 계율에 대한 십사(十事)의 신설(十事非法)을 주창했기 때문에(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후자가 승인되고 있다) 불교교단이 신설에 찬성하는 진보파의 대중부(大衆部)와 이에 반대하는 보수파의 상좌부(上座部)로 양분되었다. 이것이 근본분열(根本分裂)이며, 이를 계기로 부파불교의 시대로 들어간다. 근본2부(根本二部) 중, 우선 대중부(大衆部)에서 200년 만에 일설부(一說部)·설출세부(說出世部)·계윤부(鷄胤部)의 3부가 갈라져 나왔고, 이어 다문부(多聞部)·설가부(說假部)가 갈라졌다. 제200년 말에는 제다산부(制多山部)·서산주부(西山住部)·북산주부(北山住部)가 나뉘어져 대중부는 불멸 후 200년 말에는 본말(本末) 합쳐서 9부(九部)가 되었다.

한편, 상좌부(上座部) 측은 근본분열 후 쫓기어 히말라야 지방으로 옮겨갔는데 불멸 후 300년 초에 2개로 분열하여 설일체유부(說一體有部)와 설산부(雪山部)가 되고, 더 나아가 설일체유부에서 독자부(犢子部)가 나뉘고, 독자부에서 법상부(法上部)·현주부(贅胄部)·정량부(正量部)·밀림산부(密林山部)의 4부가 갈라졌다. 설일체유부에서 화지부(化地部)가 분리되고 화지부(化地部)에서 법장부(法藏部)가 나뉘었다.

제300년 말에는 설일체유부에서 음광부(飮光部)가 나뉘고, 제400년 초에는 같은 설일체유부에서 경량부(經量部)가 나와, 상좌부는 불멸 후 200년에서 400년 초에 걸쳐 본말(本末) 11부가 되었다.

이리하여 대중부계의 9부와 상좌부계의 11부를 합하여 모두 20부의 부파가 불멸 후 200년에서 400년에 걸친 200년간에 성립된 셈으로, 이것을 소승 20부라 부른다.

상좌부불교[편집]

上座部佛敎

불멸 후 100년의 근본분열로 교단은 두 부파로 나뉘었는데 그 중 보수파인 상좌의 사람들에 의한 일파가 상좌부이다. 이 상좌부는 불멸 후 300년 초에 본상좌부(本上座部)와 설일체유부(說一體有部)로 나뉘고 본상좌부는 히말라야 지방으로 옮겨 설산부(雪山部)라고 불리었으며, 캐시미르 지방을 본거(本據)로 하여 세력을 확장하였다.

그리고 그 후의 분파에 의한 8부의 성립은 모두 설일체유부의 것으로 된 것이며, 따라서 유부는 상좌부계(上座部系) 중에서도 여러 부파 중 최대의 것이 되었고, 후에 일어난 대승불교의 비판·논란(論難)은 거의 모두 이 유부에게 돌려지는 상태였다. 그래서 상좌부불교라고 하면 당연히 설일체유부가 중심을 차지하게 되었다.

원래 본상좌부(本上座部:雪山部)와 유부는 입장의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본상좌부에서는 경과 율을 중시한 데 대하여 유부에서는 논(論)을 중시하였다.

논은 교법에 대한 연구로서의 아비달마이며, 유부가 전거(典據)로 삼은 것은 기원전 2세기 카티야야니푸트라(Katyayanputra:迦多衍尼子)가 저술한 <발지론(發智論)>이었다. 그후 6종의 논이 만들어져 합하여 '6족발지(六足發智)'라고 하는데 이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행하여졌으며, 기원 2세기 쿠샨 왕조의 카니시카왕의 보호 아래 연구 성과에 대한 집대성(集大成)이 이루어져서,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 200권의 대저(大著)로 발전하여 유부의 교의가 완성되었다. 비바사(毘婆沙)란 분석 또는 주석이라는 뜻으로, <발지론>을 축어적(逐語的)으로 해석하면서 다른 여러 부파의 교설을 백과전서(百科全書)처럼 인용하고 이를 유부의 입장에서 비판한 것이다.

그러나 이 <대비바사론>이 너무 방대하기 때문에 이의 강요서(綱要書)가 만들어지고, 특히 4세기에 세친(世親)이 저술한 <구사론(俱舍論)>이 가장 뛰어난 것으로 중시되었다. 또한 세친은 유부(有部)에서 최후로 분파하여 경전만을 의지(依支)하는 경량부(經量部)에 속하며, 유부의 교리는 비판적으로 해설되었다.

이처럼 유부로 대표되는 상좌부불교는 교리적인 연구면에서 크게 진전하여 학문불교적인 색채가 농후했으며, 불교의 가장 정통적(正統的)인 사상을 이어받는 부파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대중부불교[편집]

大衆部佛敎

상좌부가 보수파 장로(長老)들에 의해 형성된 데 대하여, 대중부(大衆部)는 진보파의 혁신적인 사람들에 의해 출발되었다. 결국 불교 교단이 분열되는 계기를 만든 것이 이 진보파에 의한 신설의 제안이며, 부파분열에 있어서 주역을 맡은 사람들이 대중부를 조직한 셈이다. 더욱이 혁신파 비구들의 분파행동에 공명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으며, 그 이름도 많은 사람들의 모임을 뜻하는 마하상기카(Mahasamghika:大衆部)라고 불리었다.

이 대중부불교는 상좌부가 수행(修行)에 의해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은 것은 모두 불타와 같다는 견해를 취한 데 대하여, 불타는 초월적 인격으로 숭경(崇敬)하고 부처의 육신에는 보통사람과는 다른 32상(相) 80종호(好)라는 상호(相好)가 갖추어져 있으며, 인간이 아무리 수행을 해서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어도 현세에서는 도저히 부처와 동일하게 될 수 없다는 불타에 대한 한없는 존숭(尊崇)의 염(念)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상좌부, 특히 유부가 아공법유(我空法有)의 입장에서 개인아(個人我)는 없으나 법(法:事物)의 본성은 과거·현재·미래의 3세(三世)에 걸쳐 항상 실재한다고 하는 '3세실유(三世實有)·법체항유(法體恒有)'를 근본적인 입장으로 삼은 데 대하여, 대중부는 사물이 현재의 한 순간만은 진실한 존재이지만, 과거·미래의 2시(二時)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현재유체(現在有體)·과미무체(過未無體)'를 근본적인 입장으로 하고 있다.

더욱이 미혹(迷惑)의 인생(즉 生死)도, 미혹 없는 인생(즉 涅槃)도 한 현상(現像:假名)에 불과하다고 하나, 중생(衆生)의 심성은 본래 청정(淸淨)한 것이지만 객진번뇌 때문에 뒤덮여 부정(不淨)한 일상심(日常心)이 되어 버린다는 등 매우 진보적인 자유사상을 포함하고 있으며, 후일 대승불교가 탄생할 기반을 형성하고 있었다.

대승불교[편집]

大乘佛敎

인도의 대승불교나 초기 대승경전의 하나하나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성립되었는가 하는 것은 종래 여러 학자들에 의해 상세한 연구가 행하여졌으나 아직 정설은 없다. 그러나 불타의 입멸 후 400∼500년이 경과한 뒤에는 어느 경전이든 불타가 직접 말한 형태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저자는 불타에 대해서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던 신자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부파불교 중에서 진보적이었던 대중부에 속하는 사람들 중에는 이처럼 불타에게 깊은 존경심을 품고 있던 사람들이 있어 대승불교운동의 추진 역할을 한 것이라는 설도있으나, 한편 이와 같은 출가(出家) 비구 이외에 재가신자의 집단인 보살단(菩薩團)이 아쇼카왕의 치세(BC 268∼BC 232) 무렵부터 인도 각지의 불타의 유골 위에 세워진 스투파(stupa:佛塔)를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어서, 그 보살단이 대승불교 교단으로 발전했다는 설도 있다.

이 보살단은 불탑을 예배하고 불타에 대한 깊은 신앙심을 유대로 하며, 출가비구(出家比丘)인 승가(僧伽)에 대해서 보디사트바 가나(Bodhisattva­gana)라고 자칭하고 있었다 한다. 이 가나란 상인조합(商人組合)을 뜻하는 것이다.

이처럼 진보적인 출가자나 재가신자들의 노력이 오랜 세월에 광범한 지역에 걸쳐 쌓여져, 그것이 서서히 결실하여 간 것이 대승불교일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그들은 자기 신앙을 경전의 형식으로 정리하여 간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이 여러 대승경전(大乘經典)이며, 우선 <반야경(般若經)>이 기원 전후에 성립하였고, 이어 <법화경(法華經)>·<유마경(維摩經)>·<화엄경(華嚴經)>·<무량수경(無量壽經)>이 차례로 성립되어 갔다. 이들 경전은 모두 대승의 이름에 어긋남이 없으며, 스케일이 큰 인생관·세계관을 종횡무진으로 설파한 것이다.

중관불교[편집]

中觀佛敎

2세기에서 3세기에 걸쳐 활약한 불교사상가 용수(龍樹)는 <중론송(中論頌)> 기타의 논서를 저술하여 반야공관(般若空觀)의 입장에 서서 유무2변(有無二邊)을 벗어난 진공중도(眞空中道)를 선양하고, 그의 문인(門人)인 제바(提婆)는 <백론(百論)>을 저술하여 외도(外道)나 소승의 교의를 논파하고 그의 제자 라후라발타라(羅候羅跋陀羅)는 <중론송>의 8불(八不)을 주석(註釋)하였다.

일반적으로 이 계통을 중관파라고 하는데, 이 시대에는 다른 학파와 대립되는 학파가 아니고, 그것이 하나의 학파로서 명확하게 된 것은 5∼6세기에 출현한 부다팔리타(Buddhapalita:佛護) 시대부터이며, 그의 계통은 프라상기카파(Prasangika派:必過性空派)라고 불리며 이를 비판한 바바비베카(Bhavaviveka:淸辨) 계통은 스바탄트리카(Svatantrika:自在論證派)라고 불렀다. 여기서 중관파는 두 파로 갈리어 서로 주류(主流)를 다투었다. 불호(佛護) 계통에는 7세기에 찬드라키르티(Candrak

rti:月稱)가 나와 <중론주(中論註)> 등을 저술하였고, 후에 티베트 불교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또한 그 계통에 샨티데바(Santideva:寂天)가 나와 교세가 매우 성하였다.

유가불교[편집]

瑜伽佛敎

이 파는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그 밖의 논서(論書)를 저술한 미륵(彌勒)을 파조(派祖)로 하는 인도 대승불교의 학파로서 호흡을 조정하고 마음을 가다듬어 정리(正理)와 상응(相應)하려고 하는 유가행(瑜伽行)의 실천을 행하고, 그 체험을 바탕으로 중관파에서 주장된 반야의 공사상(空思想)에서 아직 불충분한 점을 새로운 심식(心識)의 사고방식을 도입함으로써 보충하고, 일체의 존재는 심식의 변전이며 심식만이 실재라고 보는 유식설(唯識說)을 세워 대승의 교리적인 발전을 성취하였다.

이 교설을 이어 받은 것은 무착(無着)이며, <섭대승론(攝大乘論)> <대승아비달마집론(大乘阿毘達磨集論)> 등을 저술하여 유가파의 입장을 확립하였다. 그의 실제(實弟)인 세친(世親)은 처음에는 소승의 경량부(經量部)에 속하여 <구사론(俱舍論)>을 지었으나, 후에는 대승으로 옮겨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유식이십론(唯識二十論)>, 그 밖의 여러 저서를 내고 유가유식(唯伽唯識)의 입장을 선양했다. 이 학계는 후일 디그나가(Dignaga:陳那)의 유상유식파(有相唯識派)와 구나마티(Gunamati:德慧)의 무상유식파(無相唯識派)의 두 파로 나뉘며 특히 진나는 인도 논리학의 대성자로 유명하다.

밀교[편집]

密敎

원시불교에서는 금지되어 있었던 세속적인 주술(呪術)이나 비의(秘儀)가 차차 불교 속에 침투되었는데, 특히 재가신자(在家信者)를 중심으로 해서 일어난 대승불교에는 그 경향이 강하여 대승경전 속에 다라니라고 부르는 주문(呪文)이 있으며 후일 이것이 하나의 독립된 경전이 되었다. 한편, 부처의 법신(法身)의 가르침도 그 범신적(汎神的) 경향으로 신비주의와 연결되기 쉽고, 그 신비주의적 해석 중에는 불교의 궁극적(窮極的)인 입장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리하여 대승불교의 새로운 전개로서 금강승(金剛乘)이라고 부르는 밀교의 교의가 성립되고, 7세기경 그 교의를 설(說)한 <대일경(大日經)>이나 <금강정경(金剛頂經)>이 출현하였다.

밀교는 부처의 입장에서의 비밀행(秘密行:三密)이기 때문에 자기수행이라는 면이 적고, 현실긍정적이라는 면에서 일반인에게 침투하기 쉬워 급속하게 확대되었으나, 현세의 행복추구가 동시에 쾌락추구라고 하는 타락의 위험을 품고 있고, 후에는 남녀의 결합을 신성시하는 좌도밀교(左道密敎)를 낳아 인도의 불교멸망의 한 원인이 되기도 한다.

중국불교의 종파[편집]

비담종[편집]

毘曇宗

비담은 아비담(阿毘曇)의 약칭이며 아비담은 아비다르마(Abhidharma:阿毘達磨), 즉 논(論)을 말하는 것이므로, 비담종은 소승(小乘)의 논으로서 전하여진 유부 '6족발지(六足發智)' 등 여러 논의 연구강술(硏究講述)을 중심으로 한 학파적인 종파이다.

소승논부(小乘論部)의 한역(漢譯)은 383년에 <비바사론>과 <팔건도론>, 즉 간다라계(系)의 <발지론(發智論)>, 391년에는 유부 법승(法勝)의 작품으로 소승불교를 간결하게 정리한 <아비담심론(阿毘曇心論)>, 425년에는 유부의 교의를 대성한 가다연니자(迦多衍尼子)의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 그리고 426년 이후 3회에 걸쳐 <아비담심론>의 주석서로서 법구(法救)의 손으로 이루어진 <잡아비담심론(雜阿毘曇心論)> 등이 차례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와 같은 한역에 의한 소승 논서(小乘論書)의 연구가 부진(符秦)의 승가(僧伽)인 제바(提婆)·도안(道安), 동진(東晋)의 혜원(慧遠) 등에 의해서 장안(長安)·건강(建康) 등으로 넓혀지고, 유송(劉宋)의 혜통(慧通), 양(梁)의 도승(道乘)·혜집(慧集), 진(陳)의 혜필(慧弼), 북위(北魏)의 혜숭(慧嵩), 수(隋)의 지념(志念), 당(唐)의 도기(道基) 등에 의해서 계승되어 화북을 중심으로 전통이 유지되었는데, 당의 현장(玄裝)이 <구사론(俱舍論)>·<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을 신역(新譯)함에 이르러 구사종(俱舍宗)에서 이를 맡게 되었다.

성실종[편집]

成實宗

4세기경의 하리발마(訶梨跋摩)가 소승비담(小乘毘曇)의 교의에 만족하지 못하고, 부파분열의 일파인 경량부(經量部) 입장에서 역설한 체계적 강요서(綱要書)인 <성실론>의 연구강술을 중심으로 성립시킨 학파이다.

<성실론>은 구마라습(鳩摩羅什)에 의해 411∼412년에 역출되었고 이후 약 200년 동안 불교 교리의 기초학으로서 그 고구강술주석(考究講述註釋)이 매우 성하여 중국 불교의 교리적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이 논에는 대승(大乘) 일반에게 설교되는 "인법2공(人法二空)>이나 <제법(諸法)은 세속체(世俗諦:本質面)에서는 공(空)이다"라는 2체설(二諦說)을 주장하는 등 특히 대승적인 교리해설이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양의 법운(法雲)·승민(僧旻)·지장(智藏) 등이 대승서(大乘書)로 간주했으나, 수대(隋代)에 이르러 천태의 지의나 삼론(三論)의 길장(吉藏) 등이 이를 소승서(小乘書)로 단정하였고, 또한 진(陳)의 진체(眞諦)가 <구사석론(俱舍釋論)>을 역출(譯出)한 이래 교리를 해설하는 점에서 그 편이 뛰어났기 때문에 당대(唐代)부터는 <성실론>의 강구(講究)는 급속히 시들어만 갔고 이에 따라 성실종의 명맥도 쇠운을 걷게 되었다.

열반종[편집]

涅槃宗

대승(大乘)의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을 강구하는 학파이다. <대반열반경> 40권은 북량(北凉)의 담무참(曇無讖, 385∼433)이 414년에 시작하여 전후 8년을 소비하여 421년에 완역했는데, 그 이전에 후진(後秦)의 도생(道生, ?∼434)은 법현(法顯)이 417∼418년에 번역한 <대반니원경(大般泥洹經)> 6권을 정독하여, 극악무도(極惡無道)한 일천뎨(一闡提)도 성불이 가능하다는 천뎨성불설(闡提成佛說)을 제창하여, 이 종(宗)의 선구를 이루었다. 또한 남지(南地)의 혜엄(慧嚴)·혜관(慧觀)·사령운(謝靈雲) 등은 후일 건강(建康)에서 40권본을 6권본에 의거, 수정하여 <대반열반경> 36권을 만들었다. 이들 도생(道生)·혜관(慧觀) 등 라습(羅什) 문하의 일재(逸材)들이 <열반경>을 부처 설법의 귀결(歸結)이라고 결론을 내린 이후 수대(隋代)까지 남북 각지에서 통용되었으며, 특히 '법신상주(法身常住)'나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 교설은 그 후의 중국 불교사상의 발전에 큰 영향을 줌과 동시에 혜관(慧觀)에 의한 열반종 오시교(涅槃宗五時敎)의 교판(敎判)은 후세 교판의 초석(礎石)으로 중요시되었다. 수대(隋代)에 이르러 천태(天台)의 지의(智)가 법화열반동일제호미(法華涅槃同一醍好味)의 설을 세우게 되자 천태종(天台宗)에 병탄(倂呑)되고 말았다.

지론종[편집]

地論宗 화엄부(華嚴部)의 <십지경(十地經)>에 세친(世親)이

주석을 단 <십지경론(十地經)>을 연구 강술하는 학파를 지론종이라고 한다.

북위(北魏) 선무제(宣武帝) 때, 인도의 승려 륵나마뎨(勒那摩提)와 보리유지(菩提流支)가 각기 이 <십지경론>의 범본(梵本)을 가져다가 번역하였고, 이것을 그의 제자인 광통율사(光統律師) 혜광(慧光)이 화회(和會)해서 1권으로 하였다고 한다. 이 혜광은 상주업도의 대각사(大覺寺)에 살며 지론연구(地論硏究)의 단서를 열고 상주남도파(相州南道派)의 시조가 됐다. 한편 보리유지(菩提流支)의 제자인 도총(道寵)은 업도 북부에 이를 전파하고 상주북도파(相州北道派)의 시조가 되었다.

혜광은 부처 일대의 가르침을 판별하여 돈(頓)·점(漸)·원(圓)의 3교(三敎)로 하고, <화엄경>을 비롯한 비돈비점(非頓非漸)의 원교(圓敎)에 배속시킴과 동시에 인연·가명(假名)·광명·상(常)이라는 4종(四宗)의 교판을 세워 비담(毘曇)을 인연종(因緣宗), 성실(成實)을 가명종(伽名宗), 삼론사론(三論四論)을 광명종, 열반화엄(涅槃華嚴)을 상종(常宗)에 배(配)하고, 상종을 최고의 가르침으로 삼았다. 특히 이 종의 특징은 제8아뢰야식(第八阿賴耶識)을 섭론종(攝論宗)이 번뇌망상(煩惱妄想)에 더럽혀진 망식(妄識)이라고 보는 데 대하여, 항상 깨끗한 진상정식(眞常淨識)으로 보려는 점으로서, 양(梁)·진(陳)·수(隋)대를 통하여 왕성하였으나, 당대(唐代)에 이르러 화엄종의 성립과 함께 이에 합류(合流)되었다.

섭론종[편집]

攝論宗 무착(無着)의 <섭대승론(攝代乘論)>을 연구·강술하는 학파인데 실제로는 이에 덧붙여 세친(世親)의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에 의한 것이다. 더욱이 상기한 양론은 적어도 3회 이상이나 한역되었는데 섭론종(攝論宗)으로서의 진체(眞諦)의 번역에 바탕은 둔 것이다.

즉 <섭대승론>은 불타선다(佛陀扇多)가 한 번 번역한 일이 있으나, 역(譯)의 난해와 석(釋)이 서로 맞지 아니한 까닭에 유행하지 못하다가 진체(眞諦)가 이를 번역하게 되자 갑자기 일파를 이루게 되었다.

진체(眞諦, 499∼569)는 원명을 파라마르타(Paramartha)라고 하며, 서북 인도의 브라만 출신이었는데 548년 다수의 범어불전(梵語佛典)을 가지고 바다를 건너서 건강(建康:南京)에 상륙하여 양(梁)나라 말기 전란(戰亂)의 와중에서 각지로 전전하면서 563년 <섭대승론> 3권, <섭대승론석> 15권을 번역하고, <의소(義疏)> 8권을 만들어 인도 유식파(唯識派)의 무착(無着)·세친(世親)의 학설을 체계화하여 수입·소개하였다. 특히 이 종(宗)은 아뢰야식(阿賴耶識)의 순정(純淨)한 곳을 아마라식(阿摩羅識)이라 칭하고, 제9식(第九識)을 세운 곳에 특징이 있다. 수(隋)에서 초당(初唐)에 걸쳐 화북(華北)에서 유통했으나, 현장(玄奬)의 법상종(法相宗)이 일어나 그의 유식설(唯識說)이 비판되었기 때문에 급속히 쇠퇴했다.

삼론종[편집]

三論宗 용수(龍樹)의 <중론(中論)>·<십이문론(十二門論)>, 그리고 제자인 제바(提婆)의 <백론(百論)>등 3론(三論)에 의거한 논종(論宗)인데, 반야공(般若空)의 사상을 교리의 근간(根幹)으로 삼고 있어 중관종(中觀宗)·공종(空宗)·무상종(無相宗)·무득정관종(無得正觀宗) 등으로 불린다. 이 3론은 도안(道安)의 권유로 쿠차국에서 초빙된 구마라습(鳩摩羅什)에 의해 다른 여러 경률론(經律論)과 함께 한역되었고, 그것이 문하의 수재(秀才)들에 의해 연구되어 삼론학파(三論學派)가 형성되었다.

이 삼론학파에 몸을 담아 3론에 각기 주석을 붙이는 한편, <삼론현의(三論玄義)>를 지어 삼론종을 대성한 사람은 파르티아(Parthia)인의 피를 받은 가상대사(嘉祥大師) 길장(吉藏)이었다. 길장은 법랑(法朗)의 제자가 되어 가상사(嘉祥寺)에 거(居)하면서 용수(龍樹)의 공관불교(空觀佛敎)를 중국식으로 발전시켰다. 삼론종은 단순히 3론 사상을 종합 서술한 것이 아니라, 3론을 바탕으로 하면서 '무득(無得)의 정관(正觀)'이라는 아무 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입장에 선 새로운 불교 통일론을 주장한 것이다.

천태종[편집]

天台宗

<법화경(法華經)>을 근본성전(根本聖典)으로 하고, 천태지자대사(天台智者大師) 지의에 의해 개창(開創)된 중국불교의 대표적인 일종(一宗)이다. 천태종의 계보(系譜)는 일찍이 인도의 용수(龍樹)에 의해 발단되었고, 북제(北齊)의 혜문(慧文)에서 혜사(慧思)를 거쳐 수(隋)의 지의에 이르러 <법화경>을 최고위로 하는 5시8교(五時八敎)의 교판(敎判)에 의해 일종(一宗)의 기반을 확립하였다. 그는 삼체원융(三諦圓融)의 심원한 교리체계를 세움과 동시에 사종삼매(四種三昧), 일심삼관(一心三觀)의 지관(止觀)의 실천에 의해 성불할 수 있다고 역설하고 이론과 실천을 교관2문(敎觀二門)으로 정리하여 천태교학(天台敎學)을 대성하였다. 그의 교학은 문인(門人)인 관정(灌頂)에 의해 필록(筆錄)되었는데, <법화현의(法華玄義)>·<법화문구(法華文句)>·<마하지관(摩訶止觀)> 등 이른바 천태3대부(天台三大部), 기타 저서로 되어 있다.

지의 이후로는 지위(智威)·혜위(慧威)·현랑(玄朗)·담연(湛然)에게 계승되어, 담연은 3대부(三大部)에 주석을 달고 한때 종세(宗勢)를 부흥시켰으나 회창(會昌)의 파불(破佛), 당말오대(唐末五代)의 전란을 거쳐 많은 전적(典籍)을 잃었으며, 후에 조송천태(趙宋天台)의 부흥은 있었으나 차차 쇠퇴하였다.

화엄종[편집]

華嚴宗

<화엄경>을 소의(所依)의 경전으로 삼고 당대(唐代)의 현수대사(贅首大師) 법장(法藏, 643∼712)에 의해 개창된 종파이며, 천태종(天台宗)과 함께 불교 교리발전의 2대쌍벽(二大雙璧)으로 알려져 있다. <화엄경>은 이미 인도에서 세친(世親)이 <화엄경> 중 <십지경(十地經)>을 주석하여 <십지경론(十地經論)>을 지었고, 이것을 바탕으로 중국 북위(北魏)에 지론종(地論宗)이 일어난 것처럼 연구가 왕성했다. 중국에 있어서도 동진(東晋)의 불타발타라(佛駝跋陀羅)에 의해 <육십화엄(六十華嚴)>이 번역되었다.

정토교[편집]

淨土敎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대무량수경(大無量壽經)>·<아미타경(阿彌陀經)>의 정토3부경(淨土三部經)에 바탕을 두고 인도의 용수(龍樹)·세친(世親)에 사상적 기반을 갖는 정토교는 옛날 진나라 시대에 여산(廬山)의 혜원(慧遠)에 의한 백련사(白蓮社)에 교단적 조직을 갖고 다수의 신봉자를 획득했으나 구칭염불에 의한 극락왕생을 설법하는 참된 중국 정토교로서의 조직화는 담란(曇鸞, 476∼542)에 의해 비로소 실현되었다. 그는 보리유지(菩提流支)가 번역한 <정토론>을 주석하여 <정토론주(淨土論註)>를 저술, 정토교 교리의 기초를 확립했다. 이 계통을 이어받은 것이 <안락집(安樂集)>을 쓴 도작(道綽, 562∼645)으로서 불교를 성도(聖道)·정토의 둘로 나누어 말법5탁(末法五濁)의 세상에는 오로지 아미타불에 귀의하여 정토왕생을 기원하는 정토교가 유일한 길이라 했으며 또한 선도(善導, 613∼681?)에 이르러 정토교가 대성됨과 동시에 염불(念佛)이 바로 서민 사이에 퍼졌다.

또 한 가지 자민삼장 혜일(慈悶三藏慧日, 680∼748)을 시조로 하여 선정일치(禪淨一致)를 주장하는 자민류(慈愍流)가 있어 이 세 유파가 행해졌으나 당대(唐代)까지는 선도류(善導流)가 주류를 이루고 송대 이후 선정쌍수(禪淨雙修)가 되었다.

선종[편집]

禪宗

옛날 후한시대에 인도의 좌선(坐禪) 방법 등을 설법한 선경(禪經)이 전역(傳譯)되었으나 선종으로서 발전하는 선을 전한 것은 470년경 남인도에서 중국으로 온 보리달마(菩提達磨)이며, 그후 북주파불(北周破佛)을 만난 혜가(慧可)·승찬(僧璨)을 거쳐 기주 황매(黃梅)에서 많은 문하생을 거느리고 선법을 설법한 도신(道信)·홍인(弘忍)의 동산법문(東山法門)에서 탁월한 많은 선자(禪者)가 배출되었으며, 이리하여 선종으로서의 기초가 확립되었다. 그 대표가 6조(六祖)인 혜능(慧能)과 신수(神秀)이다. 신수는 북지(北地) 양경(兩京)을 중심으로 북종선(北宗禪)을 보급, 혜능은 강남(江南)에 남종선(南宗禪)을 선양했는데 북종선이 빨리 쇠퇴했음에 비해 남종선은 신회(神會)·회양(懷讓)·행사(行思)를 비롯한 수많은 선승(禪僧)을 배출, 교세를 확대시켰다. 회양의 계통에 백장회해(百丈懷海)가 나와 <백장청규(百丈淸規)>를 저술했으며 선종의 규범을 정하고 이 계통에서 임제의현(臨濟義玄)을 시조로 하는 임제종(臨濟宗), 위산영우·앙산혜적(仰山慧寂)에 의한 위앙종이 성립했다. 한편, 행사의 계통에서는 동산양개(洞山良价)·조산본적(曹山本寂)의 조동종(曹洞宗), 운문문언(雲門文偃)의 운문종(雲門宗), 법안문익(法眼文益)의 법안종(法眼宗)이 성립하여 이를 5가(五家)라 하고 후에 임제종에서 갈라진 황룡혜남(黃龍慧南)의 황룡파와 양기방회(楊岐方會)의 양기파, 이 두 파를 더하여 5가7종(五家七宗)이라고 불렀다. 송대(宋代) 이후는 임제종이 중심이 되어 이윽고 선정쌍수(禪淨雙修)의 길로 들어섰다.

율종[편집]

律宗

율종은 계율을 종(宗)으로 하는 종파이며 북제(北齊)의 혜광(慧光)이 시작한 <사분율(四分律)> 연구 학파가 발전하여 한 종이 된 것이다.

그후 율장 안에 분파가 생겨 법려(法礪, 569∼635)의 상부종(相部宗), 도선(道宣, 596∼667)의 남산종(南山宗), 회소(懷素,625∼698)의 동탑종(東塔宗) 등 셋으로 나뉘었으나 그 가운데에서 도선의 남산율종이 다른 두 파를 압도, 번영을 누렸다. 도선은 단지 율종의 조직자일 뿐만 아니라 경록(經錄)으로서는 <대당내전록(大唐內典錄)>, 사서(史書)로는 <속고승전(續高僧傳)>, 도교(道敎)에 대해서는 <광홍명집(廣弘明集)>·<고금불도논형(古今佛道論衡)> 등을 저술하여 다양한 재능을 발휘하였다. 율(律)에 관해서는 <사분율(四分律)>이 소승률이며 대승불교도가 이를 어떻게 실천하는가에 뜻을 두고, 유식의 교리를 원용(援用), 삼취정계(三聚淨戒)를 기본으로 하여 소승계를 중시하면서 대소승을 융화하는 율종의 교리를 조직, <사분율행사초>·<갈마소>·<계본소(戒本疏)> 등을 저술했다. 후에 천태종(天台宗)의 교의를 채용, 율종을 재흥시킨 원조(元照)는 남산 율종의 중홍으로 불렸으며, 이 파만이 송대(宋代)까지 계속된 이래 많은 연구 강설이 있었다.

수말(隋末)에는 두순(杜順)이 나와 <법계관문(法界觀門)>을 지어 화엄교학의 기초가 세워졌다. 지엄(智儼)을 거쳐 법장(法藏)에 이르러 중중무진(重重無盡)의 법계연기(法界緣起)를 설파하는 화엄교학이 대성되었다. 그는 실차난타(實叉難陀)의 신역(新譯) <팔십화엄(八十華嚴)>의 번역에 참획(參劃)하고, 이에 의해 <화엄경 탐현기(華嚴經探玄記)>·<화엄오교장(華嚴五敎章)>을 짓고, 화엄경을 원교(圓敎)로서 최고위에 놓는 5교10종(五敎十宗)의 교판(敎判)에 의해 화엄종을 확립하였다.

법장(法藏) 뒤에는 징관(澄觀)·종밀(宗密) 등에게 계승되었으나 그들의 사상은 법장의 사상과는 상당히 달라, 선(禪)과의 관계가 두터워져서 교선일치(敎禪一致)를 지향하였고, 오래지 않아 실천적인 선(禪)과 정토교로 바뀌었다.

법상종[편집]

法相宗

법상종이란 제법(諸法)의 성상(性相)을 분별하는 종(宗)이란 뜻으로 오위백법(五位百法)을 세워 아뢰야식(阿賴耶識)을 근본으로 하기 때문에 유식종(唯識宗)이라고도 한다. 인도에서는 미륵(彌勒)·무착(無着)·세친의 유가유식파(瑜伽唯識派)에 기원하며 당나라 태종 시대에 인도로 경전을 구하러 간 현장(玄裝, 600∼664)이 호법(護法)의 제자 계현(戒贅)으로부터 호법 계통의 유식설을 전해받고 많은 경론(經論)을 전역(傳譯)함과 동시에 유식의 교리를 선양했다. 진체삼장(眞諦三藏)에 의해서 전해진 유식설을 '구역(舊譯)'이라고 함에 대해 이 현장이 전한 것을 '신역(新譯)'이라 한다.

현장은 호법의 설을 중시하여 <성유식론(成唯識論)>을 번역, 그의 제자 자은대사 규기(慈恩大師 窺基, 632∼682)가 <성유식론 술기(成唯識論述記)>·<대승법원의림장(大乘法苑義林章)> 등을 저술하여 법상종을 조직화했다.

규기와 동학(同學)으로는 원측(圓測)이 있으며 또한 문하생인 혜소(惠沼), 법손(法孫)인 지주(智周)는 규기와 함께 중국 법상의 삼조(三祖)라고 불린다. 극히 이론적이며 종교성이 빈약하기 때문에 종파로서는 얼마 후에 쇠퇴하나 법상종에 의해 개척된 유식법상의 교학(敎學)은 <구사론(俱舍論)>과 함께 훗날 불교 연구의 기초학으로서 중시되었다.

밀교[편집]

密敎

수당시대(隋唐時代)의 종파 불교에서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이 밀교(密敎)의 전래이다. 다라니(陀羅尼)는 예로부터 조금씩 중국으로 전해졌으나 나란다사(寺)의 학승(學僧)이었던 선무외(善無畏)가 716년(玄宗의 開元4)에 입조(入朝)하여 밀교를 전하면서 <대일경(大日經)>과 그 밖의 것을 번역했다.

제자인 일행(一行, 683∼727)은 삼론(三論)과 천태(天台)를 배워 이 입장에서 <대일경>을 주석하여 <대일경소(大日經疏)>를 저술했다. 또한 720년(開元8)에는 역시 나란다사(寺)의 학승인 금강지(金剛智)가 와서 <금강정염송경(金剛頂念誦經)>을 번역했으며 또한 그의 제자 불공(不空)은 스승의 사망 후 인도에 돌아가 밀교 경전(密敎經典)>을 비롯한 80부의 밀교 경전을 번역했다.

만다라(曼茶羅)의 염송(念誦), 다라니의 독송(讀誦), 가지기도(加持祈禱) 등 독자적인 수법(修法)을 행하는 밀교는 전래 당시부터 당나라 조정과 밀접한 관계를 가져 국가종교적 색채가 짙었으며 후에는 민간에도 유행했다.

당나라 말기에 무종(武宗)의 폐불(廢佛)로 큰 타격을 받아 민간신앙에 동화했으나 밀교가 지니는 의례나 기도는 다른 종파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삼계교[편집]

三階敎

수(隋)나라의 신행(信行, 540∼594)이 당시 활발했던 말법사상(末法思想)에 입각하여 말법상응(末法相應)의 가르침으로서 설법한 것이며 보법종(普法宗)이라고도 한다.

신행은 불교를 3단계로 나누었으며 신행 당시는 이미 제3계의 말법에 들어가 어리석고 악한 범부(凡夫)는 제1계의 1승(一乘), 제2계의 3승 등의 별법(別法)에 의탁하려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부처에 차별을 인정하지 않고 법에 차별을 인정하지 않으며 승에 차별을 인정하지 않고, 일체불(一切佛)·일체법(一切法)·일체승(一切僧)에 귀의, 일체악(一切惡)을 끊고 일체선(一切善)을 닦아야 할 제3계의 보법(普法)의 가르침이 아니고서는 구원되지 않는다 하여 제3계의 불교, 즉 삼계교(三階敎)를 창도했다. 그는 구족계(具足戒)의 준수를 폐하고 길에서 만나는 남녀를 예배하고 노역(勞役)에 종사, 걸식을 하면서 하루에 한 번만 식사하고 모든 중생을 위해 신명재(身命財)를 희사할 서원(誓願)을 세워 포교에 힘썼다. 당시의 사회가 불안하기도 해서 한때는 상당히 보급되었으나 말법(末法)에는 올바른 가르침이 없다고 하는 주장이나 말법에는 올바른 정치도 불가능하다는 주장이 정법(正法)이나 올바른 정치의 부정(否定)과 결부되기 때문에 신행이 사망하자 이단(異端)이라 하여 금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