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종교·철학/세계의 종교/힌 두 교/힌두교〔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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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ndu敎〔序說〕 힌두교를 나타내는 힌두이즘(Hinduism)이란 말은 서양에서 종교를 포함한 인도문화의 특질을 총칭한 표현이다. 그러므로 넓은 뜻으로는 인도에서 행해지는 각 종교의 전부가 포함된다. 그러나 이른바 힌두교라고 말할 경우에는 외래 종교인 이슬람교나 페르시아교(=波市교)·그리스도교 등을 제외하며, 또한 인도 고유의 종교 중에서도 불교·자이나교 등은 제외될 뿐만 아니라 불교·자이나교의 진출로 한때 후퇴하였던 바라문교가 8세기경에 새로운 종교적 형태로 대두한 것을 고전적인 바라문교와 구별하여 가장 좁은 뜻의 '힌두교'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라 하겠다. 따라서 힌두교의 기원을 더듬어 올라가면 멀리 베다의 종교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랜 전사(前史)를 지니고 있다. 힌두교를 이해하려면 이 전사적(前史的)인 과정부터 고찰해야만 한다. 베다의 종교란, 기원전 1500년으로부터 1200년경에 걸쳐 인도의 북서부에 침입한 아리아인들이 공희(供犧)를 중심으로 전개된 제사(祭祀) 중심의 종교이다. 그들은 뛰어난 수공업을 가지고 있었으며 농구(農具)나 무기를 제작하여 선주민족(先住民族)을 정복하는 한편, 태양·풍우·뇌전(雷電) 등의 경이적인 자연현상을 두려워하고 또한 불이나 소마주(酒) 등의 위력을 찬양, 신격화하고 찬가(讚歌)로 그 위덕(威德)을 찬양하여 사제자(司祭者)를 중심으로 여러 형태의 제사의례(祭祀儀禮)를 행했다. 그 찬가는 오늘날 전해지는 베다 성전(Veda聖典)에서 볼 수 있다. 거기에는 매우 교묘한 신화의 세계가 펼쳐져 있으며 많은 신들이 천상(天上)과 공계(空界)와 지상의 3계(三界)에 소속하여 제각기 직분을 갖고서 인간세계와 어떤 관계를 갖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미 아리아인이 침입하기 전의 인도 원주민 문화, 예컨대 인더스 문명으로 불리는 인도 북서부의 모헨조 다로나 하라파의 유적(遺跡) 등에 후세의 힌두교와 관련있다고 여겨지는 종교적 여러 요소(여신숭배나 생식기 신앙 및 동물숭배 등)를 약간 찾아볼 수 있지만, 그것들과 힌두교와의 직접적인 관계는 명백하지 않다. 이윽고 동진(東進)을 개시한 아리아인은 기원전 1000년 경에 갠지스강 유역의 비옥한 평야에 정주하여 씨족제 농경사회(氏族制農耕社會)를 영위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이 과정에서 제사(祭祀)의 전문직 계급을 정점으로 하는 카스트 제도가 확립되었다. 인도인은 모두가 카스트(폐쇄적인 신분제도)에 소속이 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들이 태어난다는 것은 곧 카스트 체제 안에서 태어나게 됨을 말한다. 어느 카스트에서 태어나느냐 하는 것은 전혀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다만 전세(前世)의 행위에 의해서만 결정지어지는 것이다. 현재는 과거의 행위의 결과이며 미래도 역시 현세의 행위의 결과로서 정해진다. 이처럼 과거·현재·미래를 일관하는 행위, 즉 업(業:카르만)이 생각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인간의 영혼도 업(業)의 윤회(輪廻)에 의해서 끊임없이 다시 태어남으로써 영원 불멸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 생생유전(生生流轉) 속에서 사람이 참으로 영원한 안락을 얻으려면 윤회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도인에게 있어서의 인생 최대의 관심사는 윤회로부터의 해탈(解脫)이라고 하는 것에 있었다. 이것은 인도에서 발달한 여러 종교, 즉 불교나 자이나교에서도 모두 공통되고 있는 점이나 특히 사제자(司祭者) 중심의 의례주의(儀禮主義)에 의한 해탈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바라문교이다. 바라문교에서는 '브라만(Brahman:梵)'이라는 우주의 근본원리가 절대자로서 숭배되고 그것을 인식한다는 것, 즉 범(梵)과 그것을 인식하는 나(我:아트만)가 융합일체화되는 것이야말로 해탈의 경지라 하여 그것을 위한 여러 가지 수행방법(修行方法)과 학설이 발달하였다. 바라문교는 그후 혁신적인 기도(企圖)로서 등장한 불교나 자이나교의 압박을 받았으나 끈질기게 인도 농촌사회의 전통과 결부되어서 8세기에 이르러 바라문교에 샨카라나크마리라 등의 거장이 배출되고 또한 라지프트기(期)의 불교 쇠퇴 등을 계기로 부흥을 보게 되었다. 여기까지가 좁은 뜻에 있어서의 힌두교의 전사(前史)라고 하겠다.

힌두교의 특색[편집]

Hindu敎-特色 부흥한 바라문교는 불교나 자이나교, 또한 후에는 이슬람교나 그리스도교 등과도 교섭을 가지며, 한편 인도 민중의 현실주의적인 속신앙(俗信仰)까지 합쳐서 폭넓은 내용과 다양한 성격을 띠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힌두교는 오랜 전사(前史)를 통하여 서서히 형성된 자연 종교로서 특정된 교조(敎祖)가 없다. 불교나 자이나교처럼 창시자가 없으며 또한 여러 종류의 민간신앙이나 타종교와 융합되어 민족의 생활기반에 깊이 뿌리를 박은 점은 중국의 도교(道敎)와 흡사하다고 하겠다. 신관(神觀)에는 자연신적인 기능을 반영하는 제신(諸神)으로부터 우주의 창조자, 최고 원리로 보는 절대자와 혹은 그러한 것의 화신(化身)이나 배우신(配偶神) 등 여러 형태의 제신의 계보가 있다. 그러한 여러 신들 중에서 어떤 신을 주신(主神)으로 삼느냐에 따라, 또는 그것에 대한 제사(祭祀)나 귀의(歸依) 방법, 해탈 방식 등의 차이에 따라서 여러 파로 나뉘게 되었다. 이와 같이 힌두교는 단일종교가 아니라 다양성이 매우 풍부한 종교이다. 고도로 세련된 철학적 사색의 체계가 있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성적 요소가 강한 의식과 주술적(呪術的)인 수법(修法)이 행해지고 다신교적 종교가 지니는 관용성이 풍부한 반면, 일신교(一神敎)의 영향을 받은 배타적 경향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다양한 내용이 서로 모순되는 일 없이 같은 힌두교의 모체 속에 포괄되어 있는 것은 그것들이 모두 인도 사회의 특색인 카스트 체제에 입각하여 윤회의 구속으로부터 해탈하려고 하는 점에서는 궁극적으로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해탈이란 우선 카스트 제도를 용인하고 고행(苦行)이나 제사(祭祀), 그 밖의 여러 가지 특수한 종교적 실천에 의하여 그것을 초월하려는 것이었다. 초극해야 할 카스트는 힌두교에 있어서는 오히려 엄중하게 긍정되어 있었다. 불교나 자이나교는 이러한 카스트 제도의 용인에 반발하는 혁신적인 의도를 지니고 있었으나 힌두교는 이와 반대로 카스트 제도에 밀착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카스트 제도에 따르는 여러가지 전근대적 인습으로부터 탈피한다는 것이 오랫동안 곤란했었다. 힌두교는 이러한 점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인도의 민족종교로 머물러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근대화에의 새로운 움직임[편집]

近代化- 그러나, 15세기에 이르게 되자 이슬람교 등의 영향을 받아 힌두교 내부에 새로운 싹이 트기 시작했다. 유일신(唯一神) '알라'에 의한 평등한 구제를 주장하는 이슬람교는 카스트 제도로 고통을 받는 인도 하층민 사이에 침투해 들어갔는데, 인도에 들어간 이슬람은 신·인 융합(神·人融合)의 신비적 체험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었기 때문에 비교적 힌두교의 지반에 침투해 들어가기가 쉬웠다. 이와 같은 이슬람교와 힌두교의 접촉을 계기로 하여 힌두교 개혁의 기운이 대두하였다. 카비르파(派)를 비롯한 많은 개혁적 종파(宗派)가 배출되었는데 이들에게 공통된 성격으로는 유일신(唯一神) 숭배, 우상 부정, 카스트를 초월한 해탈, 스승 숭배 등을 들 수 있다. 오늘날에 와서는 독립된 별개의 종교로 간주되는 시크교(敎)도 이와 같은 일련의 혁신적 기운 속에서 태어났던 것이다. 17세기 초의 동인도회사 설립 이후, 영국은 인도의 식민지화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종교정책에 있어서는 다양화한 힌두교의 불통일성(不統一性)을 인도 지배에 이용하고자 오히려 관대하게 대하였다. 그 때문에 힌두교 자체가 특히 심한 타격을 받은 일은 적었지만, 영국 정부도 그리스도교적 휴머니즘의 입장에서 미망인의 순사(殉死)나 인신희생, 유아결혼 등 힌두교 사회에서의 폐풍은 금지하였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러 서구적 교양을 지닌 힌두교 지도자 가운데서 힌두교 내부의 전근대성 개혁이나 힌두교 성립의 지반인 인도사회 자체의 근대화를 지향하는 사람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라람 모한 라이에 의해 창시된 '브라마 사마지파'의 활약이 한 예라고 하겠는데, 영국의 통치하에서는 충분한 성공을 거두기가 어려웠다. 이리하여 식민지 정책하에서의 민족종교·힌두교의 근대화 운동은, 당연히 반식민지운동·독립운동과 결부되어 내셔널리즘의 경향이 짙어졌다. 1906년에 인도 국민회의는 인도의 독립을 구호로 내걸고 이어 간디의 지도 아래 영국에 대한 불복종·비협력운동을 전개했으며 독립을 확득한 현재도 정치면에서 힌두교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지도자가 적지 않다.

뿌리깊은 원시적·주술적 요소[편집]

-原始的·呪術的要素 1947년 파키스탄의 분리는 그때까지 분쟁을 거듭해 왔던 국내의 이슬람교도에 대하여 힌두교의 인도가 취한 정치적인 총결산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분리 이후에는 인도 인구의 압도적 다수가 힌두 교도로 되었다. 힌두교는 인도인 민족종교이며 신도의 분포도 거의 인도 한 나라에 한정되어 있으나 인구 10억을 헤아리는 인도의 민족종교이므로 규모로서는 작은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오히려 세계종교인 이슬람교에 필적할 만한 신도수를 갖는다고 하겠다. 더구나 힌두교는 극히 복잡한 종교이며 거기에는 오랜 역사적 발전의 여러 단계가 반영되어 있어서 오늘날에 와서도 그것을 한마디로 말할 수는 없다. 심원한 철학적 사색의 체계를 구비하고 고도의 지성이 뒷받침된 일면과 함께 여전히 현재에 있어서도 원시적인 주술(呪術)이나 특수한 비의(秘儀)·점술(占術)·금기(禁忌) 등이 혼합되어 있다. 오히려 힌두교는 고도로 발달한 것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원시적인 주술적 요소를 배제하지 않고 높은 수준 속에 포괄·섭취하여 조화(調和)를 발견하려는 경향이 있다. 힌두 교도가 신성시하는 소의 떼가 뉴델리 시가지 한가운데를 사람이나 자동차의 홍수에도 아랑곳없이 유유히 횡단하는 광경은 하나의 상징이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