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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종교·철학/한국의 종교/동학-천도교/동학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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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의 역사〔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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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學-歷史〔槪說〕

동학은 1860년 4월 5일 경주(慶州)에서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에 의해 창도되었다.

동학이 창도되던 당시의 상황은 이조(李朝)말기의 부패한 풍조가 나라 전체에 퍼져 있던 때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난(兩亂)을 겪은 후에도 우리나라는 서민들의 권익이 보장되지 못하고 국민은 한층 힘없는 백성으로 전락되고 있었다. 그 위에 상공업(商工業)을 천시하는 풍조가 사회 전반에 미만(彌滿)하여 무능력한 선비들만을 양산(量産)해 내고 비생산적 관료 지망자를 증가시켰다.

뿐만 아니라 반(班)·상(常)의 구별이 철저하던 당시의 사회제도는 일반 대중들에게 활기를 띠게 할 수 없는 봉건적 체제만이 경화되어 갔다.

이때 동학을 창도한 최제우는 당시의 사회구조에 대하여 "임금과 신하가 제각기 직분을 다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부모와 자식의 윤리마저 지켜지지 않는다(君不君臣不臣 父不父子不子)(몽중노소문답가)"고 개탄하고, "이 세상은 요(堯)·순(舜)의 정치, 공(孔)·맹(孟)의 도덕으로도 어찌할 수 없다(용담가)"고 하여 국가의 기강과 사회 도덕이 모두 타락하였음을 지적하였다. 국내의 사정이 이런 형편이었으므로 우리나라의 그때 형편으로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외세(外勢)에 대해서도 거의 대응할 태세를 갖출 수 없었다. 동학은 바로 이와 같은 정세하에서 생겨난 종교였다.

최제우의 동학 창도는 그 동기가 제일 먼저 구국제민(救國濟民)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동학 교문(敎門)이 내세운 주의·목적은 첫째 보국안민(輔國安民), 둘째 포덕천하(布德天下)라 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것을 제일의로 표방하고 있다. 동학 창도는 이처럼 절실한 목적 의식을 지니고 나선 것이지만 그 목적이 짧은 시일에 쉽게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동학을 창도한 후 최제우는 이를 포교하고 민중 속에 펴기 위한 방법으로서 먼저 수도(修道) 절차를 마련하고 경전을 짓는 한편 민중들을 가르치기 위한 방도를 신중히 모색했다.

그리하여 '여몽여각득도(如夢如覺得道)'라 하여 동학 창도의 의의를 묘사하고 "무극대도(無極大道)를 받아내어"라 하여 동학도(東學徒)의 거룩함을 나타내면서 마침내 1861년 6월부터 첫 포교활동을 시작하여 삽시간에 수많은 신도를 포섭하기에 이르렀다. 동학의 <도수사>와 <교훈가>는 갑자기 나타난 듯한 동학이 이처럼 민중 속에 침투해 들어가던 당시의 상황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동학 세력의 팽창에 위협을 느낀 조정의 박해가 시작되자 최제우는 전라북도 남원으로 피신하여 그곳에서 고향에 있는 신도들에게 서한 형식으로 <권학가>·<도수사>·<몽중노소문답가> 등을 지어 보내면서 은밀히 수도하는 법을 가르치고 신앙심을 고취했다.

1862년 3월 최제우가 경주로 돌아오게 됨을 계기로 하여 동학의 포교활동은 다시 계속되어 경주를 중심으로 차츰 교세를 확장해 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동년 9월 최제우가 경주관아에 의해 체포·투옥되었다가 방면되면서부터 포교활동이 순탄치 않게 되자 교통(敎統)을 이을 후계자 설정과 교의(敎義)를 정립하기 위한 경전 편술, 그리고 신학의 기본조직인 접주제(接主制) 실시 등이 서둘러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1863년 8월 14일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이 제2세 교조(敎祖)의 교통을 이어받게 되었고, 그런 지 얼마 되지 않은 동년 12월 9일 최제우는 마침내 조정에서 파견된 선전관 정운구(鄭雲龜)에 의해 체포되어 이듬해인 1864년 3월 10일 대구에서 참형을 받고 순도(殉道)하였다.

최제우의 순도로 말미암아 동학이 소멸 직전의 위기에 놓이게 되자 제2세 교조로 교통을 전수받은 최시형은 거의 흩어져 버린 교도들을 수습하는 한편 단신으로 은신·잠행하면서 포교에 힘써 비밀리에 동학을 종교단체로 발전시켜 갔다. 이리하여 하느님을 내 몸에 모신다는 시천주(侍天主) 신앙에 의거하여 사람을 하느님 같이 섬기라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의 새로운 사상을 표방하는 동학은 억압된 민중 속에 다시금 급속히 펴져 갔다.

1890년대에 이르자 동학의 교세는 영남·호남은 물론 경기·강원에까지 뻗쳐 일약 수십만의 교도를 헤아리게 되었다. 이와 같은 급속한 교세의 팽창은 수차에 걸쳐 집단 시위운동 등을 통해 집권층의 허약성을 노정시키는 한편 동학 자체의 힘을 스스로 깨닫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최제우가 순도한 7주기를 맞는 1871년 3월 10일 문경(聞慶)에서 일어난 이필제(李弼濟)의 신원운동(伸寃運動)과 1892년 10월에 있었던 삼례(參禮)에서의 신원운동, 그리고 1893년 2월 서울 광화문 앞에서의 복합(伏閤)상소운동과 동년 3월 2만여명의 동학교도가 모여 한 달 이상 시위를 벌인 현도(顯道)운동 등은 모두 동학 자체의 성장도를 스스로 과시한 계기였다고 할 수 있다. 동시에 이 신원·현도 운동은 조선 말기의 민족적 민중자각운동이기도 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1894년의 갑오(甲午) 동학혁명은 교조 신원운동이 밑바탕이 되고 정신적 기초를 이룬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전라도 고부(古阜)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탐학이 직접 도화선이 되어 연 300만의 동학교도가 동원되었다고 하는 이 갑오혁명은 한때 파죽지제로 삼남(三南) 일대를 휩쓸고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여 사상 최초의 민정을 실시하는 등 개혁의 기운을 높이기도 하였으나 청(淸)·일(日) 양국군의 개입으로 수많은 희생을 남긴 채 종막을 고하고 말았다.

한반도에서의 청·일 양국간의 노골적인 대립과 마침내 청일전쟁의 직접적인 불씨를 던져준 역사적 계기가 되기도 했던 동학혁명의 실패로 민족의 자율적 근대화운동은 좌절되고 동학의 민정기구인 집강소를 일본군이 횡취하여 외세(일본)의 강제에 의한 갑오경장을 펴나가게 한 셈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동학은 전봉준(全琫準)을 비롯한 수뇌부를 거의 잃고 손병희(孫秉熙)의 헌신적인 보호를 받은 최시형만이 간신히 도피하는 데 성공하여 명맥을 유지하다가 1897년 12월 24일 최시형은 손병희에게 제3세 교조의 교통(敎統)을 계승시킨 후 이듬해(1898) 관군에게 체포되어 최제우와 같은 죄목인 좌도난정률(左道亂正律)에 의해 6월 2일 광화문 밖 형장에서 순도(殉道)하였다. 한편 동학의 법통을 이어받은 손병희는 동학의 재건과 자주적인 개혁운동의 실을 거두기 위해서는 선진 각국의 문물을 직접 보고 배울 필요성을 절감, 1900년 3월 일본과 중국을 시찰하면서 본국의 신도(信徒)들에게 문명세계의 소식을 전하여 개화사상을 고취하고 수십 명의 학생을 일본에 데려다 교육시켜 신문화(新文化)운동의 터전을 닦으려 하였다.

1904년 노일전쟁이 일어나게 되자, 그 중대성을 예견한 손병희는 진보회(進步會)를 중심으로 전국의 교도들에게 갑오혁명에 필적할 일대 민중 운동을 일으킬 것을 지시하고 그해 8월 전국 20만 동학교도들이 일제히 단발흑의(斷髮黑衣)로 민회를 개회하면서 개혁운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진보회가 곧 동학군이라는 것을 알게 된 조정의 극심한 탄압으로 이 운동은 무위로 끝났을 뿐만 아니라 이용구·손병준 등 수뇌급 인물들이 일진회(一進會)로 전향하여 친일파로 전락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상황하에 손병희는 급거 귀국하여 이용구 등을 비롯한 60여 명의 친일(親日) 수뇌급을 제명하는 뼈아픈 자체개혁을 단행했고, 동학을 천도교(天道敎)로 대고천하(大告天下)하여 현도(顯道)의 실을 거두려 하는 한편, 의식(儀式)의 현대화를 추진하여 4계명과 5관(五款)을 제정, 교도의 기본 자격을 규정하고 교리(敎理)의 현대화를 꾀하여 종교의 면모를 갖추어 갔다. 이것은 후일, 일제(日帝)의 무단정치하에서 모든 단체가 해산당하는 탄압을 겪었으나 종교단체만은 예외로 인정되어 천도교로 현도된 동학이 불교·그리스도교와 제휴하여 3·1운동을 일으킬 수 있게 한 원인이 된 것이기도 하였다.

동학이 3·1운동의 역사적인 민족운동에 일익을 담당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출 수 있었던 것이 최제우로부터 수십만 동학교도의 희생을 밑거름으로 한 것이었다면, 손병희에 의해 응결되고 극적으로 구현된 이와 같은 동학의 전통은 또한 오늘날의 천도교 정신을 형성하는 밑바탕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李 光 淳>

최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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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濟愚(1824∼1864)

천도교의 제1세 교조로 창도자. 처음 이름은 제선(濟宣), 자(字)는 성묵(性默:처음은 道彦), 호는 수운(水雲 또는 水雲齋). 어리석은 창생을 건지겠다는 결심으로 후에 제우(濟愚)로 개명했다 한다.

1824년 10월 28일 경상북도 월성군 현곡면 가정리(稼亭里)에서 경상도 일원에 이름이 높았었던 근암공(近菴公) 최옥의 만득자로 태어났다. 수운은 신라 말엽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25대손이며 임·병 양난(兩亂)의 공신 최진립(崔震立)의 6대손으로 되어 있다.

조선 왕조의 퇴폐를 통감한 근암공의 만득자로 태어난 수운은 총명하게 세상을 보고 학문을 쌓았다. 16세에 아버지를 잃고 그 10년 전에 어머니를 잃어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된 그는 광제창생(廣濟蒼生)할 방책을 얻기 위해 수행하기 시작하였는데, 20여 년 동안 전국의 명산 대천을 찾아다니면서 인심·풍속을 두루 살펴보았고 이름있는 도학자와의 대담에서 인생과 우주의 진체를 찾으려 했다.

여기에서 최제우는 많은 것을 배우기도 했지만 한없이 마음 아픈 정경도 보았다. 사지에 빠져 있는 사람, 갈 바를 모르는 사람, 임금과 신하와 어버이와 자식과, 남편과 아내가 불신 속에 허덕이는 사회, 지도이념이 붕괴된 세상, 온갖 정신과 육신의 질병이 가득찬 세상, 지벌과 문장을 가지고 다투는 사람, 효험 없다고 하늘을 불신하고 원망하는 사람, 잘 먹고 잘 입는 것만 좋아하는 사람, 외세인 일본이나 서양에 편승하여 자신의 영욕만을 꾀하는 사람들과 어지러운 세상의 미래지사(未來之事)를 알 수 없게 된 세상을 보았다.

그리하여 불출산외(不出山外)하고 어지러운 세상과 그 사람들과는 같이 가지 않겠다는 맹세로 최후에 득도를 위하여 1859년 10월에 가정리 구미산(龜尾山)에 있는 용담정(龍潭亭)에 돌아와 열심히 독공을 하였다. 드디어 1860년 4월 5일 천사문답으로부터 시작된 동학이 창도되었다.

이때 나이 37세였다. 20년의 고행 끝에 얻어진 동학에 대해서 최제우는 "내가 동방에서 태어나 동방에서 도를 받았으니 도는 천도이지만 학인 즉 동학이라 한다.

땅이 동서로 나누어져 있거늘 어떻게 동을 서라 하며 서를 동이라 하겠는가. 그러므로 내가 동에서 받아 동에서 펴게 되었으니 어떻게 서학(西學:또는 西敎·가톨릭)이라 하겠는가"라고 말했다.

이와 같이 동학이 된 까닭을 뚜렷이 밝힘으로써 외세에 대한 저항 의식을 키웠고 국가와 민족을 아끼는 정신을 배양했다. 그러나 혼란한 당시의 조정으로부터 오해를 받아 서도(西道)로써 혹세무민(惑世巫民)한다는 죄명으로 좌도 난정률(左道亂正律)에 의해 포교 4년 만인 1864년 3월 10일 41세에 대구 장대(壯臺)에서 참형을 당했다.

그는 득도한 37세부터 참형을 당한 41세까지의 4년간에 7000여 자에 달하는 한문체의 <용담유사(龍潭遺詞)>를 저술하여 제자들에게 가르쳤고, 자신의 순교를 천명으로 받아들이기 위하여 1863년 8월 14일에 이미 제2세 교조인 최시형(崔時亨)에게 교통(敎統)을 전수시켰다.

최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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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時亨(1827∼1898)

천도교의 제2세 교조. 처음 이름은 경상(慶翔), 자(字)는 경오(敬悟), 호는 해월(海月)인데 용시용활(用時用活)을 강조하면서 시형(時亨)으로 개명했다. 1827년 3월 21일 경북 동촌(東村) 황오리(皇吾里)에서 최종수(崔宗秀)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5세와 12세에 각각 어머니와 아버지를 잃고 고아가 되었다.

20세에 경주 광복 마복동에 집강(執綱)으로 천거되어 6년 동안 지내다가 33세에 뜻한 바 있어 검악(劒岳) 아래 검곡에서 수도하고 35세때 교조 최제우로부터 도를 받았다. 그의 독공은 놀라운 바 있어 선생의 수제로 아낌을 받다가 37세때 대도의 교통(敎統)을 이어받았다.

교조 순교 후 관으로부터의 심한 감시와 박해 속에서도 꾸준히 포교에 힘써 방대한 동학의 세력형성에 진력했다. 교단을 물려받은 지 20년 만에 <동경대전>을 출간하였고, 이어 <용담유사>를 출간하여 포교의 바탕과 신앙자의 지침을 마련했다. 그동안 한편으로는 1871년에 이필제의 신원운동이 시기상조임을 타일렀고, 1878년에는 접제(接制)를 설하였으며, 1885년엔 6임제(六任制)와 내수도법(內修道法)을 설하였고, 1892년 전라도 삼례역(參禮驛)에서의 교조의 신원을 위한 무저항 시위, 1893년 광화문 복소(光化門伏疎)에 이은 보은 장터의 집회, 1894년에 일어난 동학혁명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수난 많은 일생을 오직 동학의 현도(顯道)에 바쳐 오다가 1898년 6월 2일에 경성감옥에서 좌도난정률에 의하여 교형(絞刑)을 당하였다. 그는 어려움 속에서도 법설로 <양천주설(養天主說)>·<대인접물(待人接物)>·<용시용활(用時用活)>·<향아설위(向我設位)>·<이천식천(以天食天)>·<내수도문(內修道文)> 등 수편의 글을 남겼다.

손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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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秉熙(1861∼1922)

천도교의 제3세 교조이며 3·1 운동 당시의 민족대표. 어릴 때 이름은 응구(應九). 아호(雅號)는 소소(笑笑), 도호(道號)가 의암(義菴)이다. 한때 동학혁명의 실패로 인하여 일본에 망명중에는 이상헌(李祥憲)으로 통했다. 1861년 4월 8일 충북 청원군 북이면(北二面) 금암리(琴岩里) 대주동(大周洞)에서 아전으로 있던 손의조(孫懿祖)의 서자로 태어났다. 그는 호방한 기질로 인하여 많은 일화를 남기고 1882년 22세 때 동학에 입도했다.

입도한 후 방탕하던 생활을 일체 금하고 독실한 수도로 최시형의 눈에 들어 1894년 동학혁명때에는 통령(統領)으로 참전, 활약하였고 1897년 12월 24일 37세때 스승으로부터 교통을 이어 받아 제3세 교조가 되었다. 1901년에는 관의 감시가 심하자 일본에 망명하여 권동진(權東鎭)·오세창(吾世昌)·박영효(朴泳孝) 등과 교유, 시국을 의논했다.

1902년에는 한국의 내정이 날로 어지러워 감에 이인숙(李仁淑)을 시켜 비정개혁(秘政改革)의 글을 정부에 보냈고, 1904년 보국안민을 위하여 진보회(進步會)를 조직케 하였으나 이용구·송병준·등이 그의 뜻에 반하여 일진회(一進會)로 변신, 친일노선을 걷자 교단의 최고급 지도자 62명을 제명시켰다. 1905년 12월 1일 새로운 동학 운동을 위하여 교명(敎名)을 천도교(天道敎)로 고치고 새 제도와 기관을 창설하였다.

1906년 천도교 대헌(大憲)을 선포하여 종단의 기틀을 잡고 곧이어 천도교 수행의 기본인 5관(五款)을 정했으며 72대교구제(大敎區制)를 실시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교육과 문화 사업에 전력하여 보성전문·동덕중학 등 20여 개 학교를 직접·간접으로 지원 육성하여 엘리트 양성에 힘썼으며, 1906년부터 시작된 수십 종의 교서 간행과 1910년에 간행된 기관지 <천도교회월보(天道敎會月報)>는 출판문화의 유산이 됐다. 1912년 우이동에 봉황각(鳳凰閣)을 건립하고 7차에 걸쳐 500명의 지방 지도자를 훈련시키고 3·1운동 준비에 들어갔다. 오랜 준비와 계획 끝에 1919년 3월 1일 무저항 비폭력의 독립선언을 하였고 1920년 10월 30일 형집행정지 결정에 의해 병보석으로 상춘원(賞春園)에 나와 있다가 1922년 5월 19일 향년 62세로 조천(朝天)했다. 그는 그간 <각세진경(覺世眞經)>·<수수명실록(授受明實錄)>·<도결(道訣)>·<삼전론(三戰論)>·<무하설(無何說)>·<명리전(明理傳)>·<천도태원경(遷都太元經)>·<대종정의(大宗正義)>·<무체법경(無體法經)>·<후경(後經)>·<천도교지(天道敎志)>·<현기문답(玄機問答)>·<교우자성(敎友自省)>·<현야(玄野)>·<체리종적(體理宗的)>·<삼수요지(三壽要旨)>·<사과요의(四科要義)>·<천도교문> 등 수십편의 법설을 남겼다.

박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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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寅浩(1855∼1940)

천도교 제4세 대도주(大道主). 충남 덕산(德山)에서 출생. 1883년 29세 때 동학에 입도. 1908년 1월 8일 의암 손병희로부터 대도주의 교통(敎統)을 받았다. 갑진개혁운동, 3·1 운동에도 교주를 도와 일했고 교회의 각종 기관 창설에 큰 공을 이루었다. 3세 교조의 순도 이후 교화·교육 사업에 진력하다가 1940년 4월 3일에 86세로 조천하였다.

신미사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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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未事變

1863년에 교조로부터 직접 도를 받은 문경 태생의 이필제(李弼濟)가 스승의 억울한 참형을 씻고자 6년여를 맹세하다가 1871년 3월 10일 최제우가 순도한 7주기가 되는 날 해월신사(최시형)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대장이 되어 문경부를 공격하여 부사 이하 많은 관리를 참형했다. 이어 상주읍을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부근 일월산(日月山)에 숨었다가 8월에 2차봉기를 하였다. 그러나 다시 실패하여 이필제는 잡혀 참형당하였다.

이 신미사변은 동학 최초의 봉기이며 신원운동이었고 '이필제의 난' 또한 이필제의 '교조 신원운동'이라고도 한다.

개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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開接

개접은 교조 때부터 규례가 있었으나 제2세 교조 최시형이 설치규정을 정하고 1878년 7월 25일정선(旌善) 유시헌(劉時憲)의 집에 최초의 접소(接所)를 설치하고 개접하였다. 개접은 일정한 기간 내에 각 지역의 교인들이 모여 진리를 연구하는 것으로 그 기간이 끝나면 접소를 폐하곤 하였다.

경전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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經典刊行

강원도 인제군 갑둔리(甲遁里), 김현수(金顯洙) 집에 경전간행소를 설치하고, 1880년 5월에 <동경대전(東經大全)>의 목판본 간행이 이루어졌다.

이 경전간행은 동학의 최초 경전 출간으로서 널리 배포되었다. 이에 1881년 6월엔 충북 단양군 남면(南面) 천동(泉洞) 여규덕(呂圭德)의 집에 간행소를 설치, 한글로 된 <용담유사(龍潭遺詞)>를 간행하고, 1883년 2월 제2차 <동경대전> 간행으로 충남 목천군(木川郡) 내리(內里) 김은경(金殷卿) 집에 간행소를 두어 1,000부를 만들어 각 포(包)에 보냈다. 그해 5월에는 창도지인 경주에서 경주본(慶州本) <동경대전> 간행이 있었는데, 이 3차 간행본인 목판본만이 전하고 있다.

삼례역 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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參禮驛集會

1892년 10월 서인주(徐仁周)·서병학(徐丙鶴)이 자의로 교조신원(敎祖伸寃)을 2세 교조 최시형에게 간청하고 입의문(立義文)을 지어 모든 도인에게 알리고 충청도 관찰사 조병식(趙秉式)에게 항의서를 제출하였는데, 그 내용은 조병식이 비밀리에 내린 동학 금지령에 항의함과 함께 교조의 신월을 위해서는 만 번을 죽어도 이루겠다는 것이었다. 또한 동학의 사교시(邪敎視)에 대한 밝은 이론으로 동학의 기본 교의를 천명하고 금령(禁領)의 부당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 뜻을 펴기 위하여 동년 11월 1일 전주 북방에 있는 삼례역에 수천 명의 교인이 모여 평화적인 민중 시위운동이 10여 일간 계속되었다. 이 삼례역 집회는 신앙의 자유화와 집단 민중시위의 효시라 할 수 있다.

광화문 복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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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化門伏疏

삼례역 집회에서 교조신원이 이루어지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자유신앙이 인정되지 않자 다시 왕에게 상소할 것을 결의하여, 상소 소두(疏頭)에는 박광호(朴光浩), 소문 작성에 손천민(孫天民), 서사(書寫)에 남홍원(南弘源)으로 하여 손병희(孫秉熙)·김연국(金演局)·손천민(孫天民) 등의 지휘하에 1893년 2월 11일 서울 광화문 앞에 엎드려 3일 동안 밤 낮으로 울며 상소했다.

상소 내용은 삼례역 상소보다는 좀더 이치를 밝혀 동학의 자유신앙과 포교, 그리고 교조의 억울하게 죽은 누명을 벗기려는 데 집약되고 있었다. 3일째 되는 날 칙령으로 각기 돌아가 일에 충실하면 소원을 들어 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귀가하였다.

보은 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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報恩集會

삼례로부터 광화문 복소까지 계속된 상소에도 하등의 직교가 없으므로 해월신사(최시형)는 보은에 모여 다시 상소를 올릴 것을 지시하여 1893년 3월 11일 수만의 동학교인이 보은에 모였다.

동학이 창도된 지 30여 년만에 수만의 교도들이 집회하게 되었음을 보고 놀란 조정에서는 토벌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어윤중(魚允中)의 노력으로 탐관오리를 엄중히 다스릴 것과 돌아가 각자 업에 종사하면 소원을 들어 주겠다는 약속으로 자진 해산되었다. 이로써 동학은 3차에 걸친 집회와 상소에서 소득 없이 되돌아갔지만,

서민대중의 민중신위의 위력을 직감했고 정부와 집권층의 허약을 간파했으며, 혁명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었다. 이 세 차례의 모임은 결국 갑오동학혁명의 바탕이 되었다.

갑오동학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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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午東學革命

전라북도 고부(古阜) 군수인 조병갑(趙秉甲)의 탐학에 반발하여 일어난 동학혁명(1894)은 흔히 여기에 국한되기 쉬우나 사실상은 교조신원(敎祖神寃)과 자유신앙의 연장으로 삼례역에서 출발된 비폭력시위 운동에 기원을 둔 것으로서 비폭력에서 무장화된 혁명운동으로 발전된 것이다. 3차에 걸친 시위나 상소를 묵살해 버린 정부의 무책임성에 대한 반발과 정부가 무기력해진 것을 기화로 부정부패의 중심체가 된 양반계급의 타파, 그리고 외국세력에 대한 배척을 기본으로 한 동학혁명은 궁극적으로 이것들을 시정하여 국가의 평안과 국민의 안녕을 기하려는 데 있었다.

창의문(倡義文) 12개조를 살펴보면 서민대중의 기본권과 침해당한 인권 회복, 그리고 정부 관료의 비정을 간추리고 있다. 1년여에 걸친 기간 전라 남북도와 충청도 일대에서 벌어진 동학혁명운동은 많은 교훈을 남긴 채 실패로 돌아갔다. 이 혁명운동으로 인하여 조선(朝鮮)의 봉건주의는 종막을 내리었고 동학 근대사에 새로운 장이 열리게 되었다. 비록 많은 희생자를 내고 실패하기는 하였지만 이 민족은 백성을 부당하게 압박하는 어떠한 지배자도 단합된 민중의 힘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기회가 되었으며 또 이 운동은 이 나라에 있어서 최초의 민중개혁운동이었다.

갑진개혁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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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辰改革運動

이 운동은 제3세 교조 손병희의 지시에 따라 수만의 도인의 희생을 감수하면서 단발흑의(斷髮黑衣)로 혁신시위를 벌여 민족의 자각과 생활의 개화·혁신의 획기적인 기원을 이루었다.

1904년 8월 30일은 한국을 둘러싼 국제정세 속에서 풍전등화 같은 나라의 운명을 바로잡을 것을 표방하고 나선 진보회(進步會)란 단체의 창립일이었다.

전국 360여 개 지부가 일시에 개회되었으며, 20여만 명이 머리를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개혁에 참가했다. 이 운동에 참가한 인원은 100만 명이 넘었으며, 그 기본 정신은 머리를 깎아 봉건정신을 없애고 물들인 옷을 입어 비생산적인 데서 생산적인 데로 이끌어 세계 신문화에 적극 참여하여 민권신장을 위해 조직이 필요하다는 데 있었다. 이것은 바로 외세로부터 이 나라를 구하며 백성을 편안케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3·1독립운동과 천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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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一獨立運動-天道敎

이 운동은 한국이 일본에 의해 병탄된 후 일본의 식민정책이 잔혹화하여 도저히 참고 살아갈 수 없게 되자 천도교와 그리스도교·불교 등 종교단체 지도자가 중심이 되어 일으킨 독립운동이었다. 천도교는 이 운동의 준비를 위하여 우이동에 봉황각(鳳凰閣)을 짓고 7차에 걸쳐 수백 명의 지도자를 양성하여 운동에 대비했으며, 운동 자금을 모으기 위하여 교당 건립을 계획하여 일경(日警)을 속였다. 이와 같이 주도면밀한 계획하에 손병희의 영도로 대중화(大衆化)·일원화(一元化)·비폭력화(非暴力化)의 3대원칙하에 1919년 3월 1일을 기해 전국적으로 봉기했다. 이 운동은 잔악한 일제에 의해 실패했지만 이로부터 계속된 민족항쟁의 불씨가 되었다. 그리고 이 운동은 민족의 단합된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세계에 우리 민족이 평화를 애호하는 위대한 민족임을 알려주었다.

천도교 청우당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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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道敎靑友黨運動

3·1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실의에 찬 교도들을 한데 묶어 천도교의 궁극적 목표인 보국안민(保國安民)에 의한 지상천국을 건설키 위하여 1919년 9월 2일에 '천도교 청년교리 강연부(天道敎靑年敎理講演部)'를 창립하고 젊은 엘리트 양성에 노력하게 되었다. 다음해인 1920년 9월 2일에는 '천도교청년회'로 발전적 개편을 했고, 1921년 5월 1일에는 재래의 윤리적 압박에서 해방하여 어린이들의 정서를 함양시키고 비사회적 압습에서 새 세상의 사람이 되도록 훈육하기 위하여 '천도교소년회'를 창립하고 어린이날을 제정했다. 1923년 9월 2일에는 이상의 운동이 광대하게 확장됨에 따라 천도교청년회는 발전적으로 해체되어 '천도교청년당'으로 개편되었다.

사인여천(事人如天)의 정신에 알맞은 새 윤리의 수립과 새 제도의 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천도교청년당은 유소년부·청년부·학생부·여성부·농민부·상민부(商民部)·노동부 등 계층별·연령별·성별 등으로 나뉜 7개 부문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운동은 ① 민족의식 고취, ② 민중의 조직·훈련, ③ 민족의 신문화 형성, ④ 당원의 훈련 및 교육, ⑤ 미신 타파 및 계몽운동, ⑥ 국민체육운동, ⑦ 국내외 정세 연구, ⑧ 근검 절약의 경제운동, ⑨ 인간지상주의에 의한 새 사회 건설, ⑩ 포교 운동 등 다양한 내용을 갖고 전개되어 북만주 전지역과 하와이·쿠바·일본에까지 파급되었다.

이것은 1924년 다시 '천도교청우당(天道敎靑友黨)'으로 개편되어 민족 자주의 이상적 민주국가 건설과 사인여천의 정신에 맞는 새 윤리의 수립, 그리고 동귀일체(同歸一體)의 신생활 이념에 의한 경제제도의 실현과 국민개노제(皆勞制)의 실시에 의한 일상보국(日常保國)을 목적으로 7개 부문 운동의 적극적인 뒷받침이 되었다. 부문별로 <어린이>·<학생>·<신여성>·<농민>·<부인>·<신경제>·<농민세상>·<혜성>·<별건곤>·<제일선>·<개벽> 등 월간지들을 간행하여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특히 1938년에 일제(日帝)로부터 강제 해체당했던 '천도교청우당'은 해방과 동시에 북한에서 부활되어 100만당원으로써 북한 공산당과 강력히 싸워 크게 타격을 준 반공단체가 되기도 했다. 350만 교도의 바탕 위에 이룩된 청우당은 한국전쟁을 기점으로 하여 완전히 공산당과 대적하게 되었으며, 포로 석방시에는 포로수용소내에 반공청년회를 조직하여 자유대한에 귀의토록 계몽하였고, 태극기와 나란히 천도교를 상징하는 궁을기(弓乙旗)를 들고 자유를 찾았다. 이 운동은 일제 치하로부터 공산치하까지 광범위하게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운동이었으나 지금 북한에서의 실정은 알 길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