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종교·철학/한국의 종교/민 간 신 앙/무 신
무당
[편집]巫堂
무신(巫信)의 신앙은 자연숭배·정령숭배·상제숭배( 上帝崇拜) 등의 자연·정령·상제와 같이, 무당을 신앙 대상으로 삼는 숭배는 아니다. 무당은 거의 모든 지역에서 천시되고 있듯이 신앙 대상이 되지 않는다.
이 신앙에 매달리는 사람들은 무당을 신앙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무당을 통해서 주적 효력(呪的效力)을 얻어 자신들이 바라는 소원을 달성코자 할 뿐이다. 우환·재앙 등 일상생활에 장애되는 원인의 소재를 알고 그 원인을 물리치거나 없앨 방법을 무당에 맡기거나 무당으로부터 지시를 받고자 하며, 그 지시도 무당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신령님이 무당을 통해 내리는 지시로 믿는다.
그러므로 무당은 그 신봉자들에게 하나의 생활 안내자로서 원인 탐정자이고 사건의 치리자(治理者)이며, 신언(神言)의 대변자로 비친다. 그리고 신령과의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은 무당만이 아니라 어느 시대에서나 무당과 함께 일자(日者)·일관(日官)·술사(術士)·술자(術者)·술인(術人)·맹인(盲人)·맹하(盲下)·승하(僧下)·서복점명자(筮卜占命者)·복인(卜人)·복자(卜者) 등이 고대에 있었고 의자(醫者)도 있었다. 또 풍수가(風水家)가 있었으며 재인(才人)·창우(倡優)·광대(廣大) 등도 있었다. 무당에도 여러 행태의 무당이 있어서 서로 혼합하였던 것 같다. 고구려는 무(巫)·사무(師巫)·신무(神巫) 등이 함께 있었으며, 또한 그 명칭도 갖가지로 불리었다.
무당의 명칭·종류
[편집]巫堂-名稱·種類
성질상의 차이로 보면 다음과 같다.
① 무당(巫堂)·만신(萬神)·선신(仙神)·선가(仙家)·선관(仙官)·스승(師). ② 점장(占匠)·우인(優人)·공인(工人)·재인(才人). ③ 신파(神婆)·신모(神母)·마님(婆)·무부(巫婦)·자무(雌巫)·호세미(이들은 모두 여성이다). ④ 박사(博士:박수)·남무당(男巫堂)·화랑(花郞)·낭중(郎重)·양중(兩中)·무동(舞童)·광대(廣大)·미동남식당(美童男社堂)·무부(巫夫)·웅대(雄巫)·호세미. ⑤ 단골무당(전속 巫)·군무당(立席巫)·내림무당(接神巫)·풋무당·기데무당(藝能巫)·태주무당(영아의 죽은 영을 구사하는 영험이 있다고 생각되는 특수한 무당). ⑥ 전내무(殿內巫:官室出入巫)·후제무(後祭巫:賽神에 종사하는 무당). 신주(身主:依憑靈)의 여하에 따라 또는 소작(所作)의 습득 정도 및 역할, 특질의 차이에 따라 종별이 있다. ⑦ 무당(舞堂)·무장(舞長)·무장(巫長)·무단(無斷)·무단(巫斷) 등.
입무(入巫)의 유형에 따라 세습(世襲)무당·신탁(神託)무당이 있고, 사자상승(師資相承) 세습에 따라서는 모계(母系)·부계(父系)·신주계(身主系)·신기계(神器系) 무(巫)가 있다.
또 신탁에 따라서 무선(巫宣)·신선(神宣)·몽계(夢系)·정신이상계(精神異常系:巫病系)가 있으며, 이런 명칭에 들지 않는 오늘날의 명칭으로서는 신방(神房)·꽃방·삼승할망·신주·복술걸(福述乞)·니(尼)·방자(方子) 등이 있다.
이상의 여러 명칭들은 무당의 힘이나 무당의 신앙적 기능이 아직 뚜렷이 밝혀져 있지 않은 탓으로 다소 혼돈되어 사용되는데, 북쪽에서의 호칭은 주로 무격(巫覡) 신사(神事)나 점복의 기능과 관련된 것인 데 반해 남쪽에서의 그것은 무(巫)와는 간접적 관계가 있는 화랑승·걸니(乞尼) 등과 관계된 명칭이다.
또 옛기록 중에 기능적으로 보아 무당을 부른 명칭들이 종종 나타나는데 태자(太子)를 공창무(空唱巫)라고 명명한 것이나 무격 중에서 일정한 거처를 두지 않는 무당을 부무(浮巫)라고 부른 것 또는 상류층 출신의 여무(女巫)로 신령들을 즐기게 하는 무당을 광대라고 하는 것이나 무신불사(無神不祀)하는 무를 만신(萬神)이라고 부르는 것 등은 모두 그런 예들이다.
그런데 본유적(本有的)인 무당은 광대가 될 수 있으나 광대가 무당이 되는 일은 없다.
옛날 신라에서는 차차웅(次次雄)·자충(慈充)이라 했다. 때로는 여무(女巫)들이 자기들을 불제자(佛弟子)라고 자칭하여 병을 고친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것은 무당이란 천대에서 자기들을 높여 보려는 의도에서의 자칭인 것이다.
혼전
[편집]무당의 굿 대상인 신주(身主). 그것은 육체에서 떠나 자립생활을 할 수 있는 존재이고 물질적인 것이며 순수한 정신(精神) 따위가 아니다. 그리고 혼전은 생사병재(生死病災)에 관여하여 선과(善果)를 일으키는 것과 악과(惡果)를 가져오는 것으로 대별되고 여럿이 있다. 따라서 굿의 종류에 따라 혼전이 제각기 청배(請拜)된다.
예컨대 함흥의 안택(安宅)굿에서의 서인님이나 토세굿에서의 시왕토세 따위가 그렇다. 이 혼전을 학술적으로 '아니마'라 부르고 그 번역인 정령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의 무당에서의 혼전이 과연 '아니마'인가의 문제도 학계에서 논의되고 있다. 그러나 한편 속화된 굿에서는 혼전이 최영장군이나 서산대사가 되기도 한다.
굿당
[편집]굿이나 고사를 지내는 무속의 성소(聖所)이며 도소(禱所). 굿당에는 보통 동신(洞神)나무나 바위가 있다. 굿당의 종류 몇 가지만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신당(神堂) ―― 무당 집의 한 방이나 별실(別室)에 제단이 마련되어 있고 그 뒤에 많은 신령님이나 불보살의 화상(畵像) 또는 무경(巫鏡) 등이 있으며, 무구(巫具)로서 북·방울·부채·신칼·삼지창·무복(巫服) 등이 있다. 무당이 누구나 신당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무당집 외에서 언제나 굿을 할 수 있는 특정한 명칭을 가진 굿당이 있다. 서울의 동·서·남·북 네 곳에 있는 서낭당(城隍堂)을 비롯하여 칠성당·노인성·성제당(星祭堂)·용궁당(龍宮堂)·아지씨당 (阿只氏堂)·노고당 (老姑堂)·금성당(錦聖堂)·국사당(國師堂) 등이 그렇다. 이런 굿당의 대표적인 것이 개성(開城)에 있는 덕물산(德物山) 위의 장군당(將軍堂)이었다. 굿당을 지키는 당지기가 있다. (2) 당우(堂宇)가 없는 굿 장(場)은 제주도에 있는 토산당(兎山堂)·칠일당(七日堂)이 유명하고 각씨당(閣氏堂)·천외당(川外堂) 등이 있다. 이런 곳은 건물이 없고 굿을 하는 특정한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런 곳은 상주의 굿 장이고 당산(堂山)이나 약수터, 장승의 표목(標木)이 있는 곳이다. 또 임시로 마련되는 굿 장이 있다. 별신 굿이나 도당 굿을 행할 때 일정한 장소를 택해서 장을 만든다. 굿이 끝나면 바로 철거되며 일정하게 성소(聖所)로 인정된 곳은 아니다. 집에서 굿을 행할 때도 마당이나 대청이 굿 장이 된다. 상청(喪廳:3년이 지나지 않은 殯所) 앞에서도 굿이 올려지기도 한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무격
[편집]巫覡
여무남격(女巫男覡)은 자기 자신의 자유 의사로서가 아니라 어떤 신령님이나 혼전 또는 신전에 붙잡혀서 무격이 되거나, 꿈속에 나타나는 초인간적인 존재의 지시에 따라 무격이 되거나 하는데, 때로는 어느 사이에 자신도 모르게 무격이 되기도 한다.
무격이 된 경우가 제각기 다르다 하여도 무격은 한결같이 신령에 접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소망이나 기대 혹은 이상을 객관화하는 심리적 특성을 가진 사람이 무격이 되는 경향이 짙다고 한다.
무격의 세계에는 원인이 없는 현상이 없다. 즉, 뜻을 갖지 않는 존재나 현상은 그들의 세계에는 하나도 없고 모든 것에 뜻이 주어진다.
말하자면 질병이나 죽음이나 홍수, 자식 없는 것 등 모두가 신귀(神鬼)의 소작(所作)이 된다. 그러니까 한 사건에 하나의 신귀가 작용하였으므로 그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제주도 무속사회는 '일만팔천신도(神道)'라고 말하듯이 신령·신전들로써 가득 차 있는 사회이다. '날설돌굽(날카로운 돌조각)'마다 신전(神前)이 있는 것이다.
그많은 신전들이 무격의 청에 따르면 하늘에서 땅에 내려와 주고, 공수(神託)하고, 사람들을 재앙에서 풀어주고, 앞날의 일에 대해서 알려준다.
아무리 악한 귀신이라 할지라도 무격의 대상이 되는 신령님과 대항할 수 있는 능력자는 없으며, 어디까지나 선한 것에 굴복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기에 병마(病魔)는 무격의 굿에서 쫓겨 항아리 속에 갇히거나 개울에 빠져 죽는다.
굿
[편집]굿의 뜻에 관해서는 학자간의 의견 차이가 있는데 어떤 학자는 굿을 궂은 일이나 궂은 것들을 '풀이'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또 어떤 전문가는 굿을 퉁구스어나 돌궐어(突厥語)의 파생어로 보며, 형운기원(亨運祈願)의 행사를 신전에서 거행하는 행위로 본다.
학자의 의견이 어떻든간에 굿은 구조상으로는 내신(來神)과 유신(侑神:신에 권유하여 제물을 먹이는 것)의 두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유신에 중점을 두고 있다.
굿은 시종 노래와 춤을 위주로 하고 춤은 '도무(跳舞)'이며 노래는 일반적으로 무가(巫歌)라고 부르나 내용적으로는 신가(神歌)라고 별칭(別稱)할 만큼 특수한 음률의 노래인데 오늘날 창(唱)·송경(誦經)이 무당의 노래에 가미되어 있다.
그런데 노래는 두 박자, 즉 '덩덩 덩덩'의 연속음이고 이 음에 따라 무격은 흥분한다. 두 박자에서 세 박자, 즉 '덩 덕궁' '덩 덕궁'으로 옮아가다가 다시 다섯 박자인 '덩덩 덩 덕궁'이 연속된다. 이 음률이 반복되면서 굿은 연속된다. 그런데 어떤 굿거리에서는 무당의 음률이 아닌 타령조의 음률이 놀이의 굿거리에서 연주된다.
굿은 양재(攘災)·기복·새신(賽神)·점복 등의 신사(神事)로 구성된 무격의 의례이다. 이 신사는 굿거리에서 혼합되어 연속적으로 진행된다.
굿은 무격에 의해 진행되는데 그 진행에서 무격은 ① 제주(祭主)에 이해관계가 있는 문제를 탐지하고, ② 대상자에게 원조 또는 소원을 청하고, ③ 대상자로 하여금 자기의 요청을 듣게 한다. 이와 같이 하기 위해서 무격은 자기들이 전습한 방법을 쓰는데 신령은 그것에 따르게 되어 있다. 무격은 준비된 장소에서 서서히 낮은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며 이때 치는 북은 처음엔 가장 얕고 또 뜸뜸히 울리나 점차로 빨라진다. 이것은 무격의 대상인 신령을 초청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무격은 북과 작은 방울을 두드려 초청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무격은 북과 작은 방울을 두드려 신령들의 강림을 알린다. 무격은 친히 신령들의 이름을 부르고, 나타난 각 신령에게 반갑게 인사하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눈다. 그 이야기는 굿의 성격과 제주의 청을 신령들에게 알리는 이야기를 포함한 대담이다.
굿은 이 대담의 뒤를 이어 도약하는 춤, 괴기(怪奇)하고 광폭한 행동과 큰 소리 등으로 엮어지는 제2단계에 들어간다. 만약 무격이 병의 원인을 알고 제거하기 위하여 불려 왔다면 그는 신령에게 병의 근원을 묻고, 그 신령 중에 가장 세력이 있는 신령의 원조를 확보한다.
굿이 3차 단계에 이르면 무격은 장구와 방울 등 무악을 울리면서 환자에게 주술적 행위를 가한다. 한편 병귀(病鬼)에게 음식물을 제공하여 병귀를 스스로 가게 하거나 쫓아내는 흉내를 한다. 그후 환자로부터 나간 혼을 되찾아서 복귀시킨다. 이 행위들은 모두 흉내이다. 따라서 흉내를 냄으로써 그 목적한 바가 달성된다고 믿어지는 것이다.
굿의 목적한 바가 이루어졌으면 입석하였던 신령들을 왔던 길로 되돌려 보내는 신로(辛勞)를 무격이 제4단계인 뒷전에서 한다.
이것으로 굿은 끝난 것이 된다. 네 단계의 각 단계에서 거리(巨里)의 행사가 있게 된다. 서울의 경사 굿이나 지노귀 굿은 12 내지 14거리로 구성되어 있으나 그것도 무격에 따라 일정한 숫자의 거리는 아니다. 또 굿거리는 무격이 단독으로 실현하지 않고 교체하면서 실연된다.
12거리는 부정·가망청배·젠적·불사거리·조상·상산·별상·대감·제석·오귀·군웅·창부인데, 무당에 따라서 어떤 거리 대신에 만명 뒷전을 거리에 넣어 굿거리로 삼는다. 또 한 거리가 몇 가지 토막으로 되어 있기도 하다.
예를 들면 군웅거리가 청배·춤·신화·만수맞이로 되어 있는 것이나, 상산거리가 관성제군놀이와 최영놀이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굿은 대개 씨끔굿(일명 오구숫)·안택굿·별신굿의 세 가지로 대별된다. 전자는 익사(溺死) 또는 횡사(橫死)한 사람의 넋을 의로하고 좋은 곳으로 모시는 굿이다. 어떤 무당은 이 굿을 조상굿이라 하여 조상을 위로하는 굿이라고도 한다. 서울에서의 지노귀굿이나 강원도·경상도 지방에서 울리는 오구굿이 이 굿에 포함될 수 있다.
둘째 것도 1년 동안의 무사태평을 비는 굿이고, 후자는 부락민의 평강(平康)과 풍년을 비는 굿이다.
전물
[편집]奠物 전물은 신불(神佛)에게 드리는 물건으로서 조상(祖上)·선수(膳羞)·대감(大監)·상문(喪門)·걸립(乞立)·선왕(仙王)·영산(靈山) 등의 상(床)이 있고 각 상에 제각기 전공(奠供)이 올라간다. 예컨대 조상상에는 조상석포(祖上席布), 선수상에는 술과 소의 갈비, 대감상에 절편·탁주·소머리나 소다리가 바쳐진다. 불사상에는 불교식에 따라 흰 떡·과일·유과 등이 오르고 고기가 못 오르면 떡 위에 흰 연꽃이 꽂혀진다. 상산상의 떡 위에는 수팔련(壽八蓮)이 꽂힌다. 흰 광목 한 필이 불사석명(佛事席命)에 쓰이고 또 두 필은 최영장군과 병상거리에 쓰인다.이 상은 세 단으로 진설되는데 첫단을 '신길'이라고 한다. 신령들의 길(神路)이란 뜻이다. 혹은 '지노귀(指路鬼)'라고도 하는데 승재(僧齋)에서 보살의 길을 인도하는 것이나 극락세계의 길을 트는 것과 같은 뜻을 갖고 있다. 무당에서는 시왕(十王)의 길 또는 '진 넉위'라고도 하는데 망령위(亡靈位)라는 뜻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무당의 굿상의 둘째 단을 '새넘'이라고 한다. 이것은 산음(散陰)의 와전인데 불가(佛家)에서 사람이 죽은 초기에는 그 영이 중음신(中陰身)이 되어 공중에서 헤매며 갈 곳으로 가지 못한다 하여 77재를 올려 중음신을 소산(疏散)시켜서 유명신(幽冥身)이 되도록 한다. 이것은 왕생의 길을 얻으라는 뜻이다. 이와 같이 무격에서도 '진넉위 새넘'을 행한다. 즉 망령을 위해서 천도신사(薦度神祀)하는 것이다. 무격의 셋째단은 '선왕저'라고 한다.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현왕재(現王齋)와 같은 것이다. 제물을 바쳐서 망령을 공양하는 것과 경을 송하여 공양하는 두 법이 있다.
|
|
|
|
|
|
|
|
|
|
|
|
무구
[편집]巫具
무구는 옛 기록에 의하면 매우 깊은 뜻을 가졌음을 알 수 있는데 오늘날 평복 차림에 징(錚) 하나만을 들고 굿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의의를 잃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무구가 가진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거울
[편집]신라의 만명신사(萬明神祀)에 구리로 된 원경(圓鏡)이 걸려 있었는데 명도(明圖, 또는 明道)라 불렀다. 이 둥근 거울은 여자귀신을 쫓는 위력이 있었다.
백제의 헌원경(軒轅鏡)은 귀신(魔)을 쫓고 지혜를 밝혀 주는 데 쓰였다. 조선시대의 국무(國巫)는 방에 거울을 걸어 놓았는데 그 거울 속에 들어 있는 신이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오늘날 어떤 신방(神房)에서는 만명(萬明:神의 이름)이 둥근 거울을 손에 들고 사방에 비추면서 앉아 있는 그림을 신탁 뒤의 벽에 걸어 놓는다. 이 거울은 태아의 이목구비를 올바르게 조정하는 역할을 한다고 믿어지고 있다.
방울
[편집]방울은 굿에서 뺄 수 없는 주요 무구의 하나이다. 상고시대의 별읍(別邑)에는 큰 나무가 서있고 거기에 방울과 북(鈴鼓)을 걸어 놓고 귀신을 모셨다.
그런데 오늘날 무격의 굿에서는 그 무격이 손에 금방울을 들고 있는데 그 방울은 일곱 개가 한 군데 묶여 있고 노래(神歌)를 송하면서 때때로 방울을 흔든다. 그 방울소리는 혼전·넋전·신전들의 말이며 귀신들을 쫓거나 접근시키지 못하는 벽사의 기능을 다하기도 한다.
부채
[편집]창무(倡巫)가 부채(神扁)를 들고 춤을 추는데 그 부채에는 여러 가지 그림이 있다. 창무는 신가를 송할 때에 그 부채를 폈다 접었다 하는데 그때에
일어나는 바람이 신령들을 불러온다고 한다. 그러나 이 신앙은 모두 무격에 통일된 보편적인 것이 못된다.
북과 징
[편집]북과 징은 옛적 송경(松京)에서 12월 하순에 기복(祈福)을 송도(頌禱)하는 데 쓰이기도 했다. 오늘날 북 대신 장고가 위의 목적에 쓰이고 있다.
이상의 무구 외에 주구(呪具)·점구(占具)·제단용구(祭壇用具)와 악구(樂具)가 있다. 악구로서는 계금·해금·피리가 있고 주구로서는 삼지창·신칼(神刀)·신장간(神將竿:대잡이)이 보편적으로 쓰이는 무구이다.
제단 용구는 굿 장소를 거룩하게 하는 의미와 신령이 내릴 곳을 마련한다는 뜻이 있고, 신기(神旗)는 신령의 하강을 알리며 신령의 뜻을 가르쳐 주는 역할을 한다.
주구는 그 하나하나가 주력(呪力)과 귀신을 쫓는 힘을 가진 것이다. 제물은 모두 신령을 위한 것이고, 명포(命布)는 신령들이 출입하는 길이다. 악구는 신령을 즐겁게 하고 그의 하강을 돕는 것이다.
이 밖에도 신가 (또는 巫歌)·무경(巫經)·신언(神言)·축원(祝願)·저주 등이 있다. 신가는 조선 초기부터 내불당에서 굿할 때에 불리었다. <시용향악보(時用鄕樂譜)>에 신가가 실려 있고 무경은 여러 종류가 있는데 근자에 <52종 비밀 국민 불경 목차>가 무격 사이에서 쓰이고 있다.
무당의 능사
[편집]巫堂-能事
무당은 푸닥거리와 무꾸리를 통해 요병(療病)·제재(除災)·축귀(逐鬼)와 초복(招福)·안택(安宅)·강우(降雨) 등을 목적으로 노래·춤·신언(神言) 등을 능히 하는 사람이다. 무녀(巫女)는 타령(妥靈)하는 여인인데, 산신(山神)을 자기에게 강림시키고 신령이 자기에게 내렸다고 한다. 강림은 오늘날 '대가 내린다'든가 '신에 접했다'는 것과 통하고, 재이지사(災異之事)나 병숭(病崇)의 원인을 잘 알아 내는 능력자이며 그 원인을 사람들에게 가르쳐 줄 수 있다. 이 점에서 무당은 '공수(神言의 發言)'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원인의 해득은 과거의 일에 잘 들어맞지만 앞날의 일에는 별로 적중하지 않았다. 그러니 예언보다도 탐지(探知)에 능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탐지에서 얻은 신언을 공수하는 것은 직접적이나, 예언하는 데에는 점구(占具)가 필요하다. 점구를 사용하여 앞날을 예언하는 데에는 점에 나오는 점괘를 관찰한다는 간접적인 조건이 따르게 된다. 그리고 무당에 쓰이는 점구도 여러 가지이다. 점에 따른 판단은 어디까지나 추리에 의한 것이다.
당골
[편집]당골은 무격의 조직체이다. 제주도의 당골제를 예로 들어 그 체제를 살펴보기로 한다. 신령(神靈)과 신당(神堂)과 인간(人間)의 삼자 사이에서 중매 역할을 하는 것이 심방(巫覡)이다. 특수한 영감(靈感)을 입은 사람이 어렸을 때부터 굿의식을 닦고, 성장한 뒤에 심방이 된다. 이런 심방이 대대로 이어내려오는데, 제주도 서귀포에 박씨가 22대나 자기네 당의 후임을 이어온다. 따라서 그들의 고유한 신당(神堂:本鄕堂)과 당주(堂主)를 모시고 있으며, 그들에 권속된 신봉자를 갖고 있다.
그리고 당과 당주는 가족적 명칭으로서 할망당(堂)과 할망으로 불린다. 또 신봉자들은 그 당주의 후예로서 그 당과 직계라는 생각을 품고 매달 일정한 날짜에 정기적으로 신당(本鄕堂)을 찾고 또는 할망상(할머니床)을 바쳐 온다. 말하자면 당골은 당주의 권속이고 자손이며 심방(무격)은 당주와 자손들 사이를 중매하는 자가 된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는 심방의 인도를 받은 신봉자를 당골이라고 일컫는다. 그 신앙심의 차이에 따라 상당골·중당골·하당골로 구분되기도 하는데 이 당골이 집중되어 하나의 신앙상 가족적 전통을 형성한다. 이것은 무당과 그 신봉자간의 조직이나 비조직적인 무속신앙이 오히려 일반적이다. 무격 조직을 분류하는 방법은 그 방면의 연구자에 따라 제각기 다르다.
무조전설
[편집]巫祖傳說
최영신
[편집]崔瑩神 최영신은 무격의 신당의 주인이다. 그 신당은 송경(개성)에서 십여 리 떨어진 덕적산에 있다. 그 산꼭대기에 최영 장군의 사당이 있는데 그 속에 소상(塑像)이 있다. 그 사당의 옆에 침실을 두고 민간 처녀를 선출해서 사당을 지키는데, 그 처녀가 밤이면 최영 장군의 영이 내려와서 잠자리를 같이므로 마치 산 사람과 같다고 한다.
공심희 전설
[편집]公心姬傳說
옛적 왕녀 공심이 정신이 광란해져서 왕이 노하여 본관인 서울 남산으로 추방하였다. 그런데 왕녀는 여러 가지 이상한 거동을 하기 때문에 다시 하녀를 따르게 하고 식량을 주어서 금강산의 최고봉으로 추방하였다. 여기서 왕녀는 금강산에 갈 수밖에 없었다. 어느날 밤 꿈에 청백색의 학 두 마리가 입속으로 들어갔다. 입을 다물고 조용히 하고 있으려니까 때마침 월경중이었으나 임신하여 남자 쌍둥이를 낳았다. 형을 어라만수라 하고 아우를 어라대신이라 불렀다. 이 두 형제는 성인이 되었다. 지혜가 남보다 뛰어났다. 왕은 이들을 불러 대신으로 삼고 그 어머니와 함께 살게 했다. 형제는 각기 결혼해서 각기 딸 넷씩을 얻었다. 이 딸을 팔도에 한 사람씩 보냈다. 왕녀 공심이 병에 걸린 사람을 여러 가지 기도를 올려서 고친다고 하기에 왕은 이것을 시험하고자 입속에 밤을 물고 병에 걸렸으니 고쳐 달라고 했다.
왕녀는 이 사실을 간파하고 나중에 진짜로 병에 걸릴 것이라고 예언했다. 과연 왕의 뺨은 부었다. 왕녀는 남산의 신에 제사를 드리고 이것을 고쳤다. 이 왕녀가 곧 무녀의 조상이라는 것이다. 충청도의 무당이 아왕공주나 아왕부인을 굿에서 찾는 것은 왕녀 공심을 상대로 부르는 것이다. 경기도 오산(烏山)의 아황님(娛皇任)이나 아황공주(娥皇公主) 혹은 평안도의 무가(巫歌)에서 볼 수 있는 아왕만세(阿王萬歲)는 모두 왕녀 공심의 지칭이다.
바라공주
[편집]-公主
무녀를 말미 또는 7공주라 부르고 함흥에서는 '일곱 개 보리떡'이라고 부른다. "어떤 왕이 딸만 일곱을 낳았다. 왕은 노해서 맨 끝 딸을 돌로 된 함 속에 넣어서 연못에 버렸다. 이때 하늘에서 용이 내려와 업고 올라갔다. 그 딸이 14세때 인간세계로 다시 내려왔다. 이때 모후(母后)가 죽게 되었으므로 서천(西天) 서역국(西域國)에 가서 약수를 떠다 어머니에게 마시게 하였다. 어머니는 살았으나 공주는 죽었다. 이 공주가 무당의 조상이 되었다."
그래서 굿에서 이 바라공주의 이야기를 전설(傳說)로 송(誦)한다.
바리공주
[편집]-公主
주상전하의 세자가 나이 15세에 길례(吉禮)를 올리게 되었다. 그때 점장이는 폐길년에 길례를 올리면 딸 일곱을 낳고 대개년에 올리면 아들 셋을 낳을 것이라고 했는데 이 말을 듣지 않고 길례를 올렸다.
계속해서 딸만 낳았다. 왕은 화가 나서 일곱 번째 딸의 아기를 후원에 버렸다. 그런데 어느 날 왕(세자)과 중전이 후원을 돌다가 아기를 발견하고 다시 궤짝에 넣어서 바다 속에 던졌다. 이 아기를 석가세존이 안내하여 산간에 사는 할머니와 할아버지에게 맡겨 기르게 했다. 한편 두 마마가 한시에 병들었다. 버린 공주를 찾아야 살 수 있다는 점괘가 나왔다. 겨우 바리공주를 찾았는데 바리공주는 아무도 갈 수 없는 지옥에 가서 종살이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악려수를 떠다가 두 마마를 살렸다. 바리공주는 무장선관과 결혼하여 일곱 아들을 낳았다. 무장선관은 장승이 되고 바리공주는 무당, 일곱 아들은 칠성이 되었다.
법우화상
[편집]법우화상에 관한 무조 전설은 다음과 같다. 신라 중엽 때 함양(咸陽)에 법우화상이 있었는데 그에게 여덟 딸이 있었다. 이 딸들이 각 도에 하나씩 파견되어서 무당이 되었다.
지리산에 고암천사(古巖川寺)가 있었다. 여기에 법우화상이란 중이 있었는데 대단히 도행(道行)이 높았다. 어느날 한가하게 있을 때, 산간에 비도 내리지 않았는데 갑자기 물이 불었다. 그리하여 그 물의 본원지를 찾아 오르다가 천왕봉 꼭대기에 도달했다. 거기서 키가 크고 힘이 장사인 한 여자를 만났다. 자칭하기를 성모천왕(聖母天王)이라고 한다. 꾸지람을 듣고 인간에 내려왔는데 당신과 인연이 생겼다고 하여 두 사람은 부부가 되었다. 집을 마련하고 거기서 살았다. 여덟 딸이 생겼다. 이들에게 무술(巫術)을 가르쳐 주었다. 금방울을 흔들고 채색 부채로 춤추고, 아미타불을 창하고 법우화상을 부르는 것을 가르쳤다. 방방곡곡에 가서 무(巫)를 업으로 삼았다. 그러므로 세상의 대무(大巫)는 반드시 한번 지리산 꼭대기에 가서 성모천왕에게 기도를 올리고 신에 접한다.
제석전설
[편집]帝釋傳說
도를 닦는 중이 시주를 거두려고 하산하였다. 중은 당금아기가 주는 좁쌀을 일부러 쏟아뜨려 주워 담게 하는 수작을 부리면서 마침내 그 아이를 데리고 절로 돌아왔다. 절간에 들어간 두 남녀는 같은 방에서 자게 되었는데 중은 아랫목에서, 당금아기는 웃목에서 따로 잤다. 그런데 당금아기가 세 아들을 낳았다. 중은 목탁으로 오줌통을 만들고 장삼을 벗어 어린아이 옷을 만들어 입혀 길렀다. 이 세 아들이 제석(帝釋) 3신(三神)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