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종교·철학/한국의 종교/민 간 신 앙/성 소
제장
[편집]祭場 제장은 현실세계를 조작하는 신명이 소재하는 세계이거나 강림하는 곳이며, 땅과 접촉하는 영역이다. 이런 땅은 제사를 올리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지상(地上)의 성역(聖域)이고 별세계(別世界)이며 신천지(新天地)가 된다. 또한 소원을 이룩하고 그 소원달성에 대해서 기원하고 감사를 표명할 수 있는 행의(行儀)의 곳이다. 그런 곳을 찾아보면 고구려는 구원(丘原)을 제장으로 삼고 사냥한 사슴이나 멧돼지를 제물로 삼아 산천(山川)에 제사를 지냈고, 시월에 「대혈(大穴)」로부터 수신(燧神)을 마을에 모시고 와서 제를 올린 후에 신을 다시 「대혈」로 귀환시켰다. 이런 제장은 아무런 장식이나 건축물 없이 자연 그대로의 신성한 곳이다.신라에서의 제장과 제사명은 아래의 도표와 같다. 이외에도 성문(城門)에 재를 지낸 네 성문제와 뜰에 바치는 부정제(部庭祭)가있었다. 조선조에서는 산·강·단(壇)·우물(井)·당(堂)과 각처(各處)가 제장이 되고 있다.오늘날 민간신앙에서의 제장이 서낭당 산신당과 같이 일정한 곳이거나, 당이 없어도 총림(叢林)이 되는 수도 있는데 한편 그런 것 저런 것이 없이 때에 따라 인위적으로 제장(祭場)이 만들어지는 경우도 있다. 무당이 새끼줄을 치거나, 굿 장소에 흙을 뿌리거나, 소금을 뿌리거나, 소지(燒紙)로 불사르거나 하여 감터(監所)가 만들어진다. 가례(家禮)를 올리는 장소도 도시에서는 위와 같이 마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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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편집]壇 별다른 곳이라 하여 선택되어져서 제의(祭儀)의 장소로 쓰이는 곳에 단(壇)을 쌓아 제장(祭場)으로 삼고, 그 단에 신명이 내리는 것으로 믿게 되었다. 고구려에서는 그 단이 돌로 쌓였고 천신(天神)이나 산천의 영(山川之靈)을 공경하였다. 백제에서는 그 단을 남단(南壇)이라고 불렀고, 신라에서는 사직단(社稷壇)으로 불리었다. 이러한 사직단은 고려조에서는 둘로 분리되어 사(社)단을 동쪽에, 직(稷)단을 서쪽에 세웠던 것이다. 이조에서는 이를 통합하여 동과 서에 각각 하나씩 세웠다. 오늘날 서울 사직공원에 사직단의 유지(遺址)가 있다. 고려조에서는 풍사단(風師壇)이 성의 동북쪽 영창문(令昌門) 바깥에 세워졌었고, 조선에서는 남쪽에 풍운뇌우단(風雲雷雨壇)이 세워지고 교단(郊壇)의 신체인 사토신위(司土神位)가 많이 늘어났다.
오늘날에는 시골 마을의 입구 또는 산간에 있는 절에 들어가는 길목에 돌로 쌓아 놓은 석퇴(石堆)가 있는데 이것이 옛날의 단(壇)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계룡산 용지(龍池) 개울을 낀 양쪽이나 풍기(豊基) 희방사(喜方寺)에 들어가는 길목에 석퇴가 일렬로 또는 여기저기 서 있다.
원구
[편집]이는 조선시대에 생긴 것으로 여기에 천지신명을 합사(合祀)하고 동지와 원단(元旦)에 신곡제가 올려졌다. 그 제도를 보면 다음과 같다.
제1층의 북쪽에 황천상제(皇天上帝)의 위, 제2층의 동서에 대명야명(大明夜明)의 위, 제3층의 동에 북두칠성 5성(星)·28수(宿)·주천성신(周天星辰)·운사(雲師)·우사(雨師)·풍백(風伯)·뇌사(雷師)·5악(嶽)·4독(四瀆)·명산(名山)·대천(大川)·성황(城隍)·사토(司土)의 여러 위를 모셨다. 이 원구의 제도는 오늘날 신흥 종교 집단의 여러 신명들의 배향체제(配享體制)에 답습된 듯하다. 보천교의 신단은 세 층으로 되어 있으며 불교 사찰 안 산신을 모시고 또 산신각 내에 좌우로 도교적 여러 신위를 모시거나 민간에서 신봉되는 신령들을 좌정시키는 것은 층계적이 아니라 평면적으로 여러 신위를 한 단에 합사하는 방식이다. 한 종단에 속한 성인들을 삼단에 모시는 경우도 있다.
종묘
[편집]宗廟
종묘는 제사자(祭祀者)가 승화하여 제를 받는 자가 되는데 그런 사람을 모신 곳이다. 그런데 종묘는 옛 삼국시대에 있어서 친묘(親廟)·시조묘(始祖廟) 또는 왕묘(王廟) 등으로 불리었는데 국조묘적(國祖廟的) 성격을 띠고 있다.
영전
[편집]影殿
임금의 진영(眞影)을 모신 전각(殿閣)을 말하며 영당(影堂)이라고도 한다. 고려조 때에 화상(畵像)을 전(殿)에 봉안하는 풍습이 생겨났는데 그 그림을 신체(神體)로 받들어 신앙적 의의를 부여하였다. 고려의 경령전과 이조의 영희전이 그렇고 현금(現今)의 신흥종교 집단 중 일부에서는 화상이 신체로 봉안되고 있다.
십승지
[편집]十勝地
신명(神明)이 거처(居處) 또는 강림하는 곳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져서 단·묘·사(祠 또는 社)·전·궁(宮)·각(閣) 등으로 불린다. 이런 곳들은 단순한 공간(空間)이 아니라 신비성을 띤 별천지가 된다. 이러한 인위적인 처소가 아니고 자연상태의 한 지역이 신성한 곳으로 여겨지는 데가 있는데 십승지(十勝地)가 그런 거룩한 곳으로 신앙되고 있다. 그곳은 풍기(豊基)의 금계촌(金鷄村), 안동(安東)의 춘양면(春陽面), 보은의 속리산, 운봉(雲峰)의 두류산(頭流山), 예천(醴泉)의 금당동(金堂洞), 공주의 유구(維鳩)와 마곡(麻谷), 영월의 정동상류(正東上流), 무주(茂朱)의 무풍동(茂豊洞), 부안의 변산(邊山), 성주(星州)의 만수동(萬壽洞)이다. 이러한 곳들은 굶주림이나 싸움 등의 염려가 없고 세상의 여러 재앙 질병이 침범하지 못하는 피난처이며 자손이 창성하는 곳으로 생각되는 지역이다.
명당지
[편집]明堂地
국가의 기업(基業)을 시간적으로 무궁하게 연장하여 주는 땅으로 신앙되었다. 고구려 때는 당시 수도였던 평양성과 국내성(國內城)과 한성(漢城:황해도 載寧地方)이 명당지였고 삼경(三京)이라 하였다. 고려때는 중경(中京:개성)·서경(西京:평양)·남경(南京:서울)을 두고, 그 밖에 중경·서경·동경(東京:경주) 또는 서경·남경·동경이 각각 명당지로서의 삼경으로 일컬어졌다. 명당지는 일정한 시기 동안 그 지기(地氣)가 왕성하여 감응력(感應力)이 강하나 그 시기가 지나면 힘이 쇠약하여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면하기 위하여 새로운 명당지에 옮기면 그 기력(氣力)을 다시 받아 지속하게 된다고 여겼다. 지기쇠망의 예를 보면 정감록(鄭鑑錄)에 "산천종기(山川鍾氣)가 계룡산에 들어갔는데 거기는 정씨(鄭氏)가 8백년 살 땅이고. 가야산은 조씨(趙氏)가 천년 살 땅이며, 전주는 범씨(范氏)가 6백년 동안 있을 땅이다"라고 되어 있다.
명당지는 풍수설에 의해 정해지는데 오늘날 민간신앙에서는 금계촌·청학동·만수동이 그러한 곳으로 되어 있으며, 자손을 창성(昌盛)하게 하고 외침이 없는 평화스러운 생활을 허용하는 생기(生氣)에 찬 곳이다. 그 생기가 언제나 자손들에게 감응(感應)하는 곳이 바로 명당지이고 십승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