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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그리스도교의 전래와 포교〔개설〕[편집]

韓國Christ敎-傳來-布敎〔槪說〕

15세기 말엽 이래 시작된 동서간의 큰 탐험여행과 신대륙의 발견은 가톨릭교회의 세계적인 포교 의욕을 자극하고 그것을 시도케 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아시아도 주요 무대의 하나가 되었다. 그리하여 일본과 중국에도 카톨릭교가 전래되어 16세기 말엽에는 이미 상당한 발전을 보였으나, 유독 한국에만은 아직도 그리스도교가 설교된 일이 없고 선교(宣敎)를 위해서 선교사가 들어온 적도 없었다.

일본과 중국은 한국에 인접해 있는 관계로 자연히 한국 포교에 계속 관심을 갖고 여러 번 전도를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실패의 근본 원인은 무엇보다도 소위 '은둔국' 한국이 외부세계와의 어떠한 상통도 허락하지 않았다는 철저한 쇄국정책에 있었다.

그러한 외부세계와의 완전한 격리책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외부의 영향이 스며들어올 수 있는 하나의 구멍이 있으니 그것은 다름아닌 동지사행(冬至使行)이었다. 해마다 정기적으로 파견되던 동지사행은 외부와의 거의 유일한 접촉선이었으며 이 길을 통해서 외부세계의 학문이나 문화가 침투할 수 있었다. 이 무렵 베이징(北京)에는 서양에서 가톨릭 선교사들이 들어와 새로운 학문을 전하면서 선교를 하였는데, 그들은 특히 과학지식을 통해 중국 궁정의 신임과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들의 명성과 학문은 또한 베이징(北京)에 체류하는 한국 사신들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었다. 한편 선교사들은 새 지식을 갈망하는 한국 사신들을 만나 주었고, 그들과 학문에 관한 대화를 나누고 그들에게 과학서적을 기증할 뿐더러 이 기회를 이용하여 그들에게 가톨릭 교리를 설명하거나 이에 관한 서적도 같이 끼워주는 세심함을 잊지 않았다. 그래서 많은 과학 서적과 함께 가톨릭 서적도 한국에 흘러 들어오게 되었고,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천주실의(天主實義)>와 <칠극(七克)>이었다.

먼저 새 종교에 관심을 표명한 것은 실학자들이었다. 그들은 호기심과 지식을 넓히려는 학문적 관심에서 가톨릭교에 관한 책을 읽기 시작하였다.

이어 그것을 소개하고 논평까지 하였다. 그러는 동안 이벽(李蘗)과 같은 몇몇 남인(南人) 학자들에게서 신앙의 싹이 트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은 아직 순수하게 종교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으니, 가톨릭교를 일종의 학리(學理)나 실천철학으로 간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들은 가톨릭 교리를 그 전체에서 파악하지 못한 채 모색중에 있었다.

때마침 이승훈(李承薰)이 동지사행의 부친을 따라 베이징에 가게 되었다. 거기서 이승훈은 이벽의 권고에 따라 서양 선교사를 찾아 세례를 받고 1784년초에 귀국했다. 귀국하자 이승훈은 곧 이벽을 찾아가 가톨릭 교리를 설명하고 중국에서 가져 온 책들을 그에게 전달하였다.

비로소 가톨릭교의 진리를 터득한 이벽은 이승훈과 함께 포교에 나섰다. 주로 이승훈이 세례를 주는 한편 이벽은 포교에 종사했다.

가톨릭의 신속한 발전을 위해서는 우선 유명한 학자들을 입교시켜야겠다고 생각한 이벽은 양근(楊根)과 광주(廣州) 지방 양반학자들에게 포교하였고 그 결과 많은 학자들이 입교하였다. 이어 중인계급에도 포교하였으며 오래지 않아 신도수가 무려 1,000여 명에 이르렀다.

지역적으로는 서울과 그 인근지방으로부터 시작하여 충청도에서 이존창(李存昌)에 의하여, 전라도에서는 유항검(柳恒儉)에 의하여 먼 지방에까지 전파되어 나갔다.

이승훈·이벽·권일신(權日身) 등이 주도(主導)하는 평신도 신도단은 기성 교우(敎友)의 신앙을 견고히 하고 미신자(未信者)에게 널리 전파하려면 불가불 교직자가 필요함을 절감하게 되어, 그들은 자기들 중에서 신부(神父)를 선출하여 세례 이외의 다른 성사(聖事)도 집행케 하였다. 그러한 착안은 기대 이상으로 포교면에서 비약을 초래하였으나, 반면 그것이 가톨릭 교리에 어긋난 처사임을 뒤늦게야 깨달은 그들은 성사 집행을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고, 곧 베이징으로부터 정식 신부를 맞아오는 운동을 서두르게 하였다.

드디어 1795년에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가 한국에 잠입하는 데 성공하니 한국 교회에 비약으로 새로운 터전이 마련되었다. 박해와 감시 속에서 어찌할 수 없는 극히 국한된 활동에도 불구하고, 신부가 있음으로 해서 한국 교회는 적어도 자신을 지탱하고 여러 교회를 통합할 수 있는 중심점을 갖게 되었다. 주(周)신부는 성사 집행·교리 강의·신심서 편찬·지방 순회, 특히 교리 연구와 교리 전파를 목적으로 하는 명도회(明道會)의 조직 등을 통하여 지금까지 도시 중심이던 것을 무식한 상민과 부녀자의 서민층에까지 깊이 뿌리박게 함으로써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이제 신도의 수도 신부의 입국 전에 4,000명에 불과하던 것이 5년 후에는 1만 명으로 급증하였다.

1801년 주신부의 순교로 한국 교회는 다시금 성직자 없는 교회가 되었다. 한국 교회는 역사상 유례가 드물게 선교사의 도움 없이 스스로 창설한 것이 특징이라고 하겠는데, 그에 못지 않은 특징은 그 교회가 오랫동안 성직자 없이 오로지 평신도의 힘으로 유지되고 발전되어 왔다는 사실일 것이다. 어쨌든 박해로 인해 거의 전멸 직전에서 재기하여 베이징과의 연락을 되찾은 한국 교회는, 베이징으로부터 선교사를 다시 영입하여 시급한 일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당시 베이징 교회는 선교사 1명의 파견이라는 단순하고 일시적인 문제마저 해결할 수 없을 만큼 무능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럴수록 거듭되는 한국 신도들의 탄원의 소리는 마침내 로마교황청으로 하여금 결정적으로 이 일을 중재하게 만들었다.

교황청은 한국 교회를 베이징 교구(敎區)로부터 분리시켜, 전교회(傳敎會)에 그 포교를 일임하는 것이 한국교회의 항구적인 발전의 최상 책임임을 착안하고, 파리 외방전교회에 한국 교회의 사목(司牧)을 전담해 줄 것을 의뢰하였다.

동회의 수락으로 1831년 한국에 교구(敎區)가 설정되고 교구장이 임명되었다. 이리하여 한국 교회는 로마 본부와 연결됨으로써 앞으로 어떠한 난관에도 대비할 수 있는 확고부동한 기반 위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박해 때마다 재출발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한국 교회가 공개적이고 보다 조직적인 포교로 지속적인 번영을 꾀하려면 한국이 구미 각국과 통상조약을 맺고 문호를 완전히 개방하는 1880년대를 기다려야만 했다.

<崔 奭 祐>

프로테스탄트[편집]

Protestant 프로테스탄트의 한국 전래는 1832년 네덜란드 선교회 소속 카를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구츨라프(K. F. A. Gutzlaff)의 서해안 선교에서 비롯된다. 그는 한영조약을 비준·교환했던 해리 파커스(Sir H. Parkers) 경의 삼촌이었다. 웨일스계의 영국이 로버트 저메인 토머스(R. J. Thomas)가 액운의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에 탑승하고 대동강에서 순교한 것은 1866년(丙寅年)의 일이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의 선교가 계속적인 선교를 이루지는 못하였다. 스코틀랜드인으로 만주 뉴좡(牛莊)에서 활약하던 존 로스(John Ross)나 존 매킨타이어(John Mcintyre)도 고려문(高麗門) 부근에서 한국 청년들을 개종시킨 일이 있었으나 역시 계속적인 것은 못되었다. 그러나 이 스코틀랜드 선교사와 함께 지내다가 세례를 받게 된 서상륜(徐相崙)을 통해서 한국 교회의 첫발이 내디뎌졌다. 그는 1878년 로스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고 1882년에는 <예수셩교 누가복음 젼셔>와 <예수셩교 요안니복음 젼셔>를 번역·간행하였으며, 마침내 1887년에 <예수교셩교 젼셔>(신약성서)를 완전 번역·간행했다. 그는 계속 압록강을 왕래하면서 전도에 힘썼으며, 황해도 소래(松川)에 정착하여 전도하고 1884년 한국 최초의 예배당을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서울에 최초로 세워진 교회인 새문안 예배당(1887년)도 서상륜과 언더우드(H. G. Underwood)에 의해서 설립되었던 것이다. 한편 전직 통리외무아문의 협판이었던 이수정(李樹廷)이 박영효의 수신사 사절단과 함께 일본에 갔다가 개심하여 1883년 세례를 받았고, 미국성서공회 총무이던 루미스(H. Loomis)와 협의하여 성서 번역에 착수, 1884년 <한한신약성서(漢韓新約聖書)>에 토를 달아 출간했고, 다음해에는 <신약마가젼 복음셔 언해>를 간행하였다. 이와 같이 한국에 대한 선교는 선교사에 의해서 진행된 것이 아니라 한국인 자신에 의해서 실현되었다. 언더우드가 인천에 닿은 것이 1885년인데, 그는 벌써 일본을 들러 오면서 이수정 역(譯)의 성서를 가지고 한국에 입국하였던 것이다. 언더우드나 아펜젤러(H.G.Appenzeller)가 한 일은 선교이기도 했으나, 아울러 이미 신앙하기 시작한 교도들에 대한 목회(牧會)이기도 하였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구형(構形)되기 시작한 선교지에 서양 선교사가 입국한 것이다. 1884년에 미국 공사관의 공의(公醫)로서 장로교의 알렌(H.N.Allen:安連)이 들어왔다. 그러나 그는 외교관으로서 훨씬 많은 공헌을 남긴 인물이었다. 다음해 미국 감리교의 아펜젠러와 장로교의 언더우드가 인천에 상륙하였다. 아펜젤러는 그 해에 배재학당을 창설하여 교육 선교에서뿐만 아니라 근대교육에 있어서도 괄목할 만한 공헌을 남겼다. 언더우드는 새문안교회의 창설(1887)을 비롯하여 구세학당과 경신학당의 설립 및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광혜원(廣惠院)에서의 업적을 통해 교육·의료·전도 사업에 공을 남겼다. 도산 안창호(安昌浩)나 김규식(金奎植)도 이 구세학당에서 수학한 인물들이었다. 의료사업을 통한 포교의 결실은 컸다. 1895년은 서울에서 무서운 콜레라가 만연되어 희생자가 수없이 쓰러지던 때였다. 언더우드와 교인들은 가슴에 십자가 표지를 달고 불철주야 헌신한 결과 생명의 구원은 물론 조정의 인정도 받아 감사장과 하사금까지 받은 일도 있었다. 1891년에는 미국 남장로교에서 세 사람을 파송하여 선교를 시작했다. 윤치호(尹致昊)는 1887년 중국에서 그리스도교인이 됐고, 1896년에는 리드(李德) 목사를 한국에 파송하는 데 결정적인 소임을 하였다. 영국의 성공회가 선교를 시작한 것은 1891년 일이요, 오스트레일리아 장로교가 1889년에, 미국 침례교가 역시 1889년에 각각 선교를 시작하였다. 침례교의 말콤 펜위크(M. Fenwick) 선교사는 한국 선교에서 최초로 토착화 문제를 제기하고, 한국인에 의한 한국 선교의 신학을 세웠던 사람이다. 캐나다의 한국 선교는 1898년부터 비롯되지만 선교사 중의 하나인 게일(J.S. Gale:奇一)은 한국 문화와 전통의 해외 소개에 현저한 공헌을 남겼다. 저서 중에는 <한국민족사(History of the Korean People)> 등이 있다. 제칠일 안식일은 임기반(林基盤)에 의해서 1904년에 도입·선교되었는데 그는 안창호나 필대은(畢大殷)과 같은 민족주의자들과 친밀한 사이였다. 사회악에 대한 신앙적 책임을 통해 군인 정신으로 대결한다는 구세군의 개전(開戰)은 1908년의 일이다. 1910년의 에든버러 국제선교협의회(IMC)는 한국에서의 선교의 성공이 '근대사의 기적'이라고 평하였다. 이 기적의 원인으로서 우선 그리스도교 선교가 서양문명의 도관 구실을 하였다. 개화의 자극과 자원이 거기서 직접·간접으로 주어졌다. 다음, 선교는 한국의 자각이라는 근대적 의식을 배양하였다. 성서의 한국어 번역을 통한 한글의 우수성의 발견이 그것이다. 구한말(舊韓末)의 시련과 일제(日帝)의 합병을 전후해서 반일(反日) 애국의 지주(支柱)로 민족을 뭉치게 한 것도 선교였다. 고종이 을사보호조약(1905) 직전 미국 대통령에게 밀서를 보낼 때도 선교사 헐버트(H.B. Hulbert)를 통해서 했었다. 이러한 교회의 박멸을 꾀한 것이 1911년 105인(人)사건이다. 다음, 그리스도교는 한국에서 토착화하고 곧 해외선교에 착수했다. 1908년에 감리교의 이화춘(李和春)이 북간도에 파송된 이래, 1913년까지 북만주·연해주·일본·중국에 장로교, 침례교회에서 10명의 선교사가 해외선교에 나갔다. 이교국으로서 외국에 선교사를 파송한 나라는 한국이 최초이다. 이러한 선교가 국내에서 선교의 자유를 획득하기까지는 여러번 금교(禁敎)라는 박해를 거쳤다. 1888년 고종의 금교령, 1893년의 야소교배척격문(耶蘇敎排斥檄文) 살포, 1895년 평양에서의 대박해, 1896년의 '유학경위(儒學經緯)의 야소교배척(耶蘇敎排斥)' 논란 등이 그 일례이다. 조정에서 선교의 자유를 윤허한 것은 선교사 스왈론(蘇安論)에게 '인전교사(因傳敎事)'로 호조(護照)를 발행한 1898년의 일이었다. <閔 庚 培>

가톨릭[편집]

소현세자와 가톨릭교[편집]

昭顯世子-Catholic敎

1636년 청(淸)의 침입에 의한 전란이 있게 되었으니, 이른바 병자호란이다. 청의 강한 군사력에 눌려 결국 인조(仁祖)는 삼전도(三田渡)에서 부끄러운 항복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로 인하여 소현세자와 왕자들 및 대신 김상현·최명길 등이 볼모로 가게 되었다. 세자 소현은 1644년까지 전후 8년 동안 괴롭고 쓸쓸한 귀양살이를 하게 된 셈이다. 세자는 북경에서 중국 가톨릭의 북경주교인 독일사람 예수회 신부 아담 샬(Adam Schall,von Bell)과 만나게 되어 서로 두터이 사귀게 되었다. 이는 그곳에서 발전하고 있는 신기오묘한 서양학문에 큰 흥미를 느낀 데서 나온 일이다. 아담 샬 신부는 뜻하지도 않았던 일이라 매우 반가워하면서 자기가 지은 천문(天文)·역산(曆算)에 관한 책과 관측기계, 그리고 가톨릭 교리서와 성화(聖畵) 등을 주었다. 귀국시에 소현세자는 환관이며 교우인 이방조(李邦詔) 외에 5명과 궁녀를 데리고 1645년 2월 18일 서울로

돌아왔다. 그러나 뜻밖에 세자가 돌아온 지 70일 만인 그해 4월 17일에 학질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 모든 계획은 헛일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서학연구[편집]

西學硏究

오랫동안 형식적인 예의(禮儀)에 관한 의론(議論)에만 사로잡혀 실속없는 이치(理致)와 헛된 의논만을 되풀이하고 있던 당시의 사조에 불만을 품은 몇몇 선각자(先覺者)들이, 실제적이요 과학적인 서양학문과 천주학에 관해 새로운 흥미를 느끼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 중 큰 공을 끼친 학자는 이수광(호:지봉<芝峰> 1563∼1627)으로 임진왜란 전후 세 차례 명나라 북경에 사신으로 드나들면서 서양과학과 가톨릭에 관한 서적을 얻어가지고 돌아와서 이것을 연구하고 책을 지어 남기었다. 그가 지은 <지봉유설>은 서양의 새 지식을 알려주는 책으로서, <천주실의> 등과 함께 새로움을 탐구하려는 젊은 학도들에게 널리 읽혀지고 마침내는 이 사상(思想)에 공명(共鳴)하는 사람들까지 나오게 되었다. 그 밖에 유인몽도 <어우야담>이란 책을 지어 가톨릭에 관해 언급했으며,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許筠)은 가톨릭을 신봉하기까지 하였다. 허균이 중국에서 게(偈) 12장(章)을 얻어갖고 왔음이 전해지며, 게 12장은 가톨릭 12장의 기도문인 12단(端)을 가리키는 것이다. 즉 이것을 얻었다고 함은 곧 그 기도문을 날마다 외워서 가톨릭을 섬겼다고 하는 것이다. 이수광·허균 등의 뒤를 이어 가톨릭의 교리연구와 신문화건설운동에 큰 공을 남긴 학자는 경기도 광주에서 숨어 살던 이익(李瀷, 호:순암<順菴> 1712∼1791)이었다.

이들은 모두 1591년에 갈려나온 우성전(禹性傳)·유성룡(柳成龍)을 우두머리로 한 남인파(南人派)의 학자들이다. 이로 말미암아 새로 전해온 서양학문은 뜻있는 선각자들 사이에 퍼지고 이해되어 마침내 그 제자 중에서 열렬한 가톨릭 신자들이 나타나게끔 하였다.

천주학 실천운동[편집]

天主學實踐運動

위대한 학자 이익이 뿌린 씨가 차차 움트고 싹트기 시작하여 이제는 천주학의 뛰어난 진리를 하나의 실천철학으로 즐겨 받아들여 마침내 종교로 믿게 된 것이다. 1780년 전후에 이르러 천주학 실천운동에 큰 활동을 한 중심인물은 이벽(李蘗)·권철신(權徹身)·권일신(權日身)·정약전 (丁若銓)·정약종 (丁若鍾)·정약용 (丁若鏞)·이승훈 (李承薰) 등이었다. 1777년에 유명한 학자 권철신이 정약전·정약용·이벽 등 여러 학자와 더불어 산골 깊숙한 절에서 철리(哲理)의 깊은 뜻을 서로 토론케 되었다. 연구회는 10일 이상 계속되어 <천주실의>·<성리진전(性理眞詮)>·<칠극(七克)> 등 유명한 가톨릭 교리서를 연구하면서, 모두 가톨릭이 훌륭하고 높고 이치에 맞는 것임에 감격하고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곧 그 가르침을 따라서 아침 저녁으로 기도를 드리고, 매월 7일·14일·21일·28일에는 쉬고 오로지 깊이 생각하며 가만히 묵상에 잠겨 재계(齋戒)를 엄격히 지키려고 애썼다. 진리를 찾아내는 데 남보다 더 많은 열성을 가지고 있던 이벽은 종교의 오의(奧義)를 캐내려고 갖은 애를 다 썼던 것이다.

이승훈[편집]

李承薰(1756∼1801)

이승훈은 본관(本貫)을 강원도 평창에 둔 사람으로써, 1756년(영조 32)에 훌륭한 양반집 아들로 태어나 1780년(25세) 진사(進士) 시험에 합격하여 평택지방의 현금을 지낸 바 있었다. 그의 아내는 정약용의 누이이며, 이벽과는 사돈(査頓)간이 된다. 이러한 친분을 이용하여 이벽의 주동으로 동지들의 성금을 모아 이승훈으로 하여금 북경에 다녀오게 하였다. 이승훈은 1783년 음력 10월 14일에 삼절년공겸사은정사(三節年貢兼謝恩正使) 창성위(昌城尉) 황인점(黃仁點)과 서장관(書狀官)인 아버지 이동욱(李東郁)을 따라서 서울을 떠나 북경에 이르렀다. 40여일 동안 그곳에 머무르며 주교좌(主敎座)이던 남천주당(南天主堂)에서 필담(筆談)으로 교리를 배운 후 1784년 양력 2월에 예수회의 드 그라몽(Louis de Grammont)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조선교회의 주춧돌이 되라는 뜻에서 베드로(Peter, 바위)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그는 한국 최초의 세례교인으로서 선교에 의해서가 아니라 구도(求道)에 의해서 입신 수세한 것이다. 서울에 돌아와 이벽·권일신과 더불어 열심히 포교활동을 하여 5년 후에는 4,000명을 헤아릴 정도로 교우들이 증가하였고, 1785년 봄 서울 명례동(明禮洞:명동)에 있던 김범우(金範禹)의 집을 교회로 삼아서 주일 첨례를 지내게 되었으니, 이것이 조선 가톨릭 교회 최초의 예배당이다.

가성직 시절[편집]

假聖職時節

가성직 시절이라 함은 법적(法的)인 정식절차에 의해 성직임명을 받지 않고 교우들의 결의에 의해 임의로 성직자를 두고 성무(聖務)를 행하던 시절을 말한다. 1785년 음력 4월에 있었던 박해 후에 교회를 재건하면서, 종전 같은 공화주의(共和主義)로써는 신앙을 지킬 수 없다고 판단되어 가성직 제도를 두기로 결의했다. 그래서 권일신·방지거를 주교로 정하고 이승훈(베드로) 외에 몇을 신부로 정하여 각각 성무(聖務)를 맡아보게 하였으며, 강론(講論) 및 세례집례, 미사성제 등을 2년 동안 거듭하여 많은 이교도를 개종시키고 교회발전을 이룩하였다. 1789년 교리서 연구 결과 주교·신부의 자격 등에 큰 의심을 품게 되어 북경 주교 구베아에게 문의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구베아는 성직 행위를 경솔히 여겼음을 꾸짖고 자기의 지도를 따를 것을 권고하게 되니 조선교회는 모든 성무를 중지하였던 것이다.

주문모의 입국[편집]

周文謨(1752∼1801)-入國

북경주교는 조선교회의 요청에 의하여 1791년 레메디오스(J.Remedios) 신부를 파견하려 했으나 실패로 돌아가자 조선의 특수한 상황을 감안하여 조선인과 비슷한 중국인 신부 주문모를 조선에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주문모는 유아 시절에 부모를 여의고, 고아(孤兒)로 자랐으며, 소년 시절부터 신앙을 가지고 있다가 마침내 그곳 신학교를 수업하고 제1회 졸업생으로서 신품(神品)을 받았던 것이다. 주신부는 입국시에 조선옷으로 갈아입고 성(性)을 이(李)씨로 고쳐 역부(驛夫) 모습으로 의주 관문을 통과하였으며, 1795년 정월 초순에 무사히 입경(入京)하였다.

강완숙(姜完淑)의 지혜 있는 신변보호로, 주신부는 6년 동안 숨어서 전교활동을 계속하였다. 그후 자신(自信)을 얻어 지방 전교를 시작하였으며, 그 결과 교우의 수는 날로 증가, 조선 입국 당시 4,000명에 불과하던 교인들이 5년 후에는 1만 명에 달하였다.

프로테스탄트[편집]

개신교 전래 이전의 역사적 상황[편집]

改新敎傳來以前-歷史的狀況

근대 한국의 종교적 생활에 있어서 심한 허탈감을 경험케 되었으니 이유인즉, 한국 역사 속에서 크게 전성했던 선(仙)이나 불교 및 유교의 정신적 자원이 고갈되고, 그 형식과 명분만으로 무게 없는 반복만 되풀이하였기 때문이다.

이미 유교의 종교적 국면이 완전히 제거된 근대 한국에서는 새 종교에 대한 열망이 현상적으로 널리 퍼져 있었던 시대이다. 이러한 외형적인 종교의 부재(不在)와 함께 국내외의 혼란이 여기 곁들여 있었다.

쇄국정책으로 인해 억압·빈곤·불안 속에 처한 이 나라에 여러 열강들이 국교 수교를 종용하기에 이르자 문을 열지 않을 수 없게끔 되었다. 결국 운양호(雲楊號)를 타고 온 일본과 1876년 2월 26일에 강화조약을 체결한 이후, 계속해서 미국·영국·독일·러시아와 같은 구미국과 수호조약을 맺어 실질상으로 은둔국(Hermit Kingdom)의 고립은 세계무대 앞에서 깨어져 나가고 있었으며, 외국의 상업력·군사력·정치력의 난무에 초점 없는 눈길로 반응할 뿐이었다. 황망한 새 정세의 전개에 기댈 곳 없는 서러움을 안은 듯한 모습이 개신교 선교 이전의 우리나라 실정이었다.

토머스 목사의 순교[편집]

Thomas牧師-殉敎

1840년 9월 7일 영국 웨일스의 라야더(Rhayader, Rednoshire)에서 회중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토머스(R.J.Thomas, 1840∼1866)는 에든버러에 있는 뉴머 칼리지에서 수학한 후 1859년 런던 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하고, 1863년 6월 4일 스코틀랜드의 애버가베니(Abergaveny)에 있는 하노버 교회(Harnover Chapel)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런던 선교회(London Missionary Society) 소속으로 중국에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1865년 가을 체푸에서 대원군의 박해를 피해 리델(Ridel)신부와 함께 작은 어선을 타고 피난온 두 명의 한국인 가톨릭 신자를 만난 후 한국 방문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865년 9월 4일 한국을 두 달 동안 방문하게 되었는데 성서 보급, 한국어 학습 등 약간의 성과를 얻은 후 돌아갔다. 처음 전도여행에 효과를 본 토머스 목사는 두 번째로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는 미국상선인 제너럴셔면호(General Shermann)에 편승하고 황해도를 향해 떠나서 1866년 8월 초순경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 가까이에 이르게 되었다.

복음주의적 경건이 그에게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가 탄 선박은 무장한 선박이며, 따라서 위험을 자초하는 일이었다. 그는 1866년 병인교란이 충천하던 때에, 평양의 대동강에서 칼을 들고 달려드는 한국 병사에게 성서를 내주면서 아깝게 세상을 떠난 우리나라 최초의 신교(Protestant) 순교자가 된 것이다.

이수정·서상륜[편집]

李樹庭(1842∼1886)·徐相崙(1849∼1926)

이수정은 임오군란 이후 파견되었던 수신사(修信使) 박영효의 사절단 비공식 수원(隨員)으로 일본에 건너가 체류하면서 당시 그리스도교계의 거물인 쓰다센(津田仙)을 만나 친교를 돈독히 하면서 학자적 관심을 지나 감동과 신앙으로 그리스도교에 기울어지게 되었다. 마침내 1883년 4월 29일 세례를 받게 되면서부터 그의 신앙적 열의는 대단한 것이었다.

일본 주재 장로교 선교사(日本駐在長老敎宣敎師) 조지 녹스(Gererge.W. Knox) 및 감리교 선교사 매클레이(R.S.Maclay) 목사와 교제하며 성서 연구에 진력하여 결국 1844년 <한한신약성서(漢韓新約聖書)>에 토를 달아 요코하마 의대생 및 외국 성서공회를 통해서 1,000부를 출판하였으니, 언더우드가 한국에 들어올 때 품에 끼고 들어온 성서였다.

한편, 1875년 존로스(J.Ross, 1842∼1915)는 복음의 진리에 귀를 기울였던 두 한국인과 함께 만주 목단에서 성서번역 사업에 심혈을 기울였는데 이 중의 한 사람이 바로 서상륜(徐相崙)이었다. 그는 번역과 함께 목판 인쇄까지 맡아서 했다. 이리하여 1882년 가을에 심양 '문광서원'간(刊)으로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서>와 <예수셩교 요한내내 복음젼서>를 세상에 내놓았으며, 1884년에 <예수교셩교젼셔 마디복음>과 <말코복음>을 발간하고 1887년에는 마침내 <예수교셩교전서>라 하여 신약성서 전부를 번역 간행하기에 이른 것이다.

소래교회[편집]

松川敎會

서상륜은 성서를 가지고 다니면서 원근(遠近)을 가리지 않고 성의껏 반포하였을 뿐 아니라 마침내 그의 고향인 황해도 장연의 소래(松川-九美浦)에 가서 가족들과 함께 정착하여 복음을 전했다.

만주에서 온 이성하(李盛夏)와 함께 쉬지 않고 복음을 전하여, 바로 그 해에 한국인의 손으로는 최초로 교회당을 설립케 되었던 것이다.

소래교회는 개신교의 잊을 수 없는 요람지라고 부를 만큼 소래는 우리 교회 역사의 발상지요, 따라서 세계적인 주목을 끌었던 곳이다. 이 교회는 그 지방 사람들의 재정적 뒷받침만으로써 설립 운영되었으며, 불과 몇 해 안 되어 그 마을의 58세대 중에서 50세대의 성인을 포섭할 정도로 발전했던 것이다.

알렌[편집]

H.N. Allen(1858∼1932)

실제로 한국에 들어와 체재하면서 일한 최초의 선교사는 알렌(한국명 安連)이라는 미국인 의사였다.

상하이에서 1884년 9월 2일 한양에 들어와 그는 자기가 선교사라는 직책과 사실을 당분간 외부에 밝힐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알렌에게는 얼마 되지 않아서 일련의 사건이 일어나, 장차 복음선교의 튼튼한 기반을 확보할 수가 있었으니 그것이 곧 1884년 12월 4일에 발생한 갑신정변, 즉 우정국사건이다. 이때 개화(開化) 세력의 칼에 맞았던 사대세력(事大勢力) 보수계의 중추인 민영익(閔泳翊)이 알렌 의사의 탁월한 의술에 의해서 위기를 모면하게 되자, 고종과 민비(閔妃)를 비롯한 궁전의 총애를 받게 되어 마침내 왕실부(王室附) 시의관(侍醫官)으로 임명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민영익의 자상(刺傷)으로 알렌의 활동에 기초가 놓여져서 광혜원(廣惠院:濟衆院이라고도 함)이 1885년 2월 25일에 설립 허가까지 받은 것이다.

아펜젤러와 언더우드[편집]

H. G. Appenzeller (1858∼1902)- H. G. Underwood(1859∼1916)

1885년 4월 5일은 한국에 프로테스탄트 선교사가 첫발을 디딘 날이요, 복음의 씨가 미국인에 의해서 뿌려지기 시작한 날이다. 이날 인천에 상륙한 이들은 장로교의 언더우드, 감리교의 아펜젤러 부부 등 세 사람이었다.

아펜젤러는 1858년 2월 6일 펜실베이니아주 손데르톤(Sonderton) 에서 출생. 1882년 미국에서 독일 개혁파 교회(German ReformedChurch in America)의 학교인 프랭클린 마샬 대학을 졸업한 후 뉴저지주 메리슨에 있는 드류 신학교(Drew Theological Seminary)를 졸업했다. 그는 신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한국에 선교사로 오기를 선교부에 청원함으로써 한국을 위한 최초의 목사 선교사로 임명을 받았다.

언더우드는 1859년 7월 19일 영국의 런던에서 태어났으나 13세에 미국에 이주하여 귀화한 영국계 미국인이다. 그는 뉴욕대학과 네덜란드 개혁교회 신학교에서 각각 문학과 신학을 연구하고, 1884년 7월 28일에 북미 장로회의 외지선교사(外地宣敎師)로 임명되어, 그 해 12월 16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배를 타고 일본을 향해 떠났다. 아펜젤러는 1885년 2월 3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아라빅호(S.S.Arabic)를 타고 한국으로 향했다. 일본에 도착한 지 약 1개월 후에 그는 부인과 언더우드와 함께 '체루환'이라는 작은 배를 타고 일본을 떠나서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에 제물포 항에 도착하였다. 그리하여 어학이나 문학 및 교육을 통해 한국 선교사상 청사에 빛날 언더우드의 선교는 26세에 시작되었다. 아펜젤러는 1902년 목포로 향하던 작은 배를 타고 가다가 난파되어 아깝게 세상을 떠날 때까지, 배재학당의 설립과 순회목사 및 성서번역에서 그 누구도 비교될 수 없을 정도의 공헌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교회의 창립[편집]

敎會-創立

언더우드 목사가 내한한 이후 노도사(魯道士)란 사람이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세계를 비밀로 받았고 차츰 한국인 교인이 늘기 시작하여 이미 서울 안에는 약 70명의 신자가 있기는 하였으나 예배당 하나 없이 지냈다. 조직된 교회의 설립을 애쓰던 중 드디어 언더우드 목사가 복음을 들고 우리나라에 온 지 약 2년 후인 1887년 9월 27일에 14명의 신도가 언더우드 목사의 집 사랑채에 모여 서울에 최초의 교회를 세웠는데 이것이 '새문안교회'의 창립이다.

1894년에는 교인이 50명이 넘기 시작하면서 현재 새문안교회가 있는 자리에 새로 예배당을 건축하여 옮기게 되었다. 1887년 11월 9일에는 감리교회로서는 처음으로 한국인을 위한 공동예배가 아펜젤러 목사가 마련해 놓은 집에서 거행되었는데 이 집을 '벧엘기도실'이라 불렀다.

결국 이것이 발전하여 한국 최초의 감리교회인 '정동교회'가 1887년 10월 9일에 설립되었다. 이 두 교회는 각기 장로교회와 감리교회의 대표적인 교회로서 오늘날까지 그리스도교 운동에 큰 감화를 끼치고 있다.

네비어스 방법과 선교지역 분할[편집]

Nevius方法-宣敎地域分割미국의 감리교·장로교를 비롯해서 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영국 등의 교회는 새로운 선교지 한국에 여러 계층의 선교사들을 파견했다. 그들은 뚜렷한 선교방법의 설정을 서두르고, 피차 경쟁하는 잘못을 피하는 방법을 강구하며, 더 나아가 한국 교회수난에 대응할 선교사들의 입장을 밝히는 정책 설정을 서두르게 되었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1890년 중국 체푸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존 네비어스(J.L.Nevius) 목사 부처를 초빙하여 선교방법의 원칙을 제공받았으니, 요컨대 강력한 자립성과 광범위한 순회선교, 성서에 대한 절대적인 강조가 그 기초였다.

그러나 이 원칙의 한국교회 적용 가능성을 연구한 것은 1889년에 조직된 '미국 북장로회 미션 및 빅토리아(오스트레일리아) 미션연합 공의회'이다. 이 공의회가 남긴 중요한 업적은, 첫째 선교지역의 분할정책(Comity Arrangement)이다. 이것은 여러 선교기관이 노력을 중복하거나 필요없는 경쟁을 하지 않도록 '연합적으로 분할'하는 프로그램이다. 이리하여 1892년 6월 11일에 북 장로교와 북 감리교가 신앙과 교리의 경계선을 헤치고 합의를 거쳐서 한국의 전지역을 지리적으로 분할 책정하게 되었다. 둘째는 저 유명한 네비어스 방법을 소지(素地)로 하면서도 핵심적인 몇 가지 원칙을 첨가 확대해서 한국에서의 선교정책을 마침내 정식으로 채택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상류가 아닌 근로계급과 하류층에 선교 목표를 두고 있으며, 여성에 대한 관심도가 커서 이들을 교육시켜 한국적으로 틀을 잡게 한 후 자립하고 공헌하는 개인으로 발전시킨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이제까지 없었던 근대적 의미의 시민, 곧 의식과 책임의 주체로서 나라와 겨레에 관여하는 창조적 인간성을 꾸미게 되었다는 말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