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종교·철학/한국의 종교/한국의 그리스도교/한국의 그리스도교〔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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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Christ敎〔序說〕 문화의 핵심에는 종교가 있다. 따라서 문화층(文化層)이란 종교문화층으로 이해된다. 한국에는 4개의 문화층이 있다. 가장 오래 되고 또 뿌리 깊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 한국 본래의 무교(巫敎)문화층이다. 이것은 한국문화사와 더불어 시작된 것으로서, 아직도 한국문화의 심층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제2는 불교문화층이다. 이것은 신라와 고려에 걸쳐 약 1,000년을 두고 형성된 한국문화층이다. 지구로 말하면 암석층에 해당할 것이다. 제3은 조선 500년 간에 형성된 유교문화층이다. 한국문화의 지표(地表)를 이루고 있는 제4의 문화층은 이른바 근대화 과정의 현대문화층이다. 여기서는 서구(西歐)문명이 지도적 역할을 하고 있고, 그 핵심 중 하나는 그리스도교이다. 그리스도교는 크게 세 개 그룹으로 나누어진다. 그 중 둘은 구교(舊敎)에 속하는 것이며, 하나는 신교(新敎)이다. 구교는 동서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로마를 중심으로 한 가톨릭교회는 그 위치로 보아 서방교회이고, 그리스를 중심으로 한 정교회(正敎會:Orthodox church)는 동방교회이다. 가톨릭교회는 유럽을 중심으로 이른바 서방세계 일대에 퍼져 있다. 정교회는 그리스와 러시아를 중심으로 동방문화권 일대에 전파되어 있다. 제3의 그룹은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형성된 신교(Protestant Church)들이다. 그 분포는 거의 전세계에 걸쳐 있다. 한국에 전파된 그리스도교를 보면 서방 가톨릭교와 신교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가톨릭교는 18세기부터 유럽을 배경으로 전래되었고, 신교는 19세기말경부터 미국을 배경으로 전파되었다.

한국 그리스도교의 특색은 다음 몇 가지로 나누어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1) 한국인의 진취성 ―― 그리스도교의 전래 과정에 있어서 외국 선교사들이 전해 주었다기보다 한국인들이 외국에서 도입해 왔다는 데 특색이 있다. 천주교(가톨릭교)의 경우 17세기 초엽에 이수광(李수光)이 중국 문헌을 통해 천주교를 우리나라에 소개하였으며, 18세기에는 안정복(安鼎福)과 그 문인들이 모여 학문적인 연구를 하였다. 그 중 이승훈(李承薰)은 1783년 사절단을 따라 북경에 갔다가 거기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옴으로써 한국에 그리스도교가 첫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 후 10여 년이 지난 뒤에 한국 사람들의 요청에 의해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신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1885년 미국의 신교 선교사들이 처음으로 이 땅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러나 이보다도 1년을 앞선 1884년 이미 한국사람이 황해도 송천(松川:소래)이란 곳에 교회를 세웠던 것이다. 지도자였던 서상륜(徐相崙)은 만주에서 예수를 믿고 귀국했었다. 남감리교의 경우에도 당시 미국에 유학중인 윤치호(尹致昊)의 성금과 요청에 의해 선교사를 한국에 파송하게 되었다는 사실들은 한국인의 진취성과 주체적 역할을 나타내고 있다.

(2) 수난을 통한 성장 ―― 예언자적 종교가 언제나 수난을 당해 왔다는 것은 하나의 보편적인 현상이다. 한국의 그리스도교도 여기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으며, 많은 수난을 통해 교회는 더욱 성장해 갔다. 한국 가톨릭교회는 세 번이나 큰 수난을 겪어야만 했는데 1801년의 이른바 신유교난(辛酉敎難)과 1839년의 기해교난(己亥敎難), 그리고 1866년의 병인교난(丙寅敎難)이 그것이다. 신유교난과 기해교난 때에도 각각 수백 명의 순교자를 냈거니와, 흥선대원군이 지휘한 1866년의 병인교난에서는 3년을 두고 8,000여 명의 순교자를 냈다. 그러나 이러한 박해를 통해 교회는 위축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힘찬 성정을 가져왔다. 통계에 의하면 1866년에 신도수가 2만3,000명이었다고 하니 박해가 끝날 무렵엔 1만 5,000여 명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1900년에는 4만 2,000여 명으로 늘어났고 10년 후에는 7만 3,517명으로 늘었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날에는 신도수 3백만을 헤아릴 정도로 크게 성장하였다. 신교의 경우에도 두 차례에 걸쳐 큰 수난을 당해야만 했다. 하나는 1930년대로부터 일제 말엽에 이르기까지의 일본 관헌에 의한 박해였다. 일본의 민족종교인 신도(神道)신앙을 강요함으로써 박해의 실마리를 만든 일본정부는 장기에 걸쳐 탄압을 자행하였다. 또 하나는 해방 후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받은 박해였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이나 공산독재정권은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를 뒷받침하는 신앙체제를 가진 그리스도교를 말살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한국의 교회들은 박해를 받으면 받을수록 그 힘을 발휘하면서 더욱 성장해 갔다. 그리하여 1945년 당시 30만에 불과하던 신도수가 오늘날에는 1,200만을 돌파할 정도로 늘어났다.

(3) 현대 문화운동의 기수 ―― 약 1세기에 걸친 한국 근대화운동 과정과 그리스도교의 활발한 선교활동은 단순히 우연한 일치가 아니다. 오늘날의 근대화는 세계의 조류라고도 하겠으나 한국에 있어서는 그리스도교가 현대문화 운동의 기수 역할을 담당해 왔다. 한국에서는 그리스도교가 처음부터 문서와 학문을 통해 수입되었다. 가톨릭교는 종교로 알려지기 전에 이미 서학(西學)으로 소개되어 유교 학자들 사이에서 연구되었다. 신교 역시 한국어로 번역된 성서를 앞장세우고 이 땅에 전파되어 왔다. 그리고 그 성서 번역에는 선교사와 함께 한국의 학자들이 처음부터 관여하였다. 따라서 이들 유식한 지도층을 통해 한국에 그리스도교가 전래되었다. 신교의 선교에 있어서는 처음부터 단순히 종교로서의 그리스도교를 선교할 정책을 세운 것이 아니라, 선교(宣敎)와 함께 교육사업과 의료사업(醫療事業)을 동시에 실시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그리스도교는 현대 서구문명을 동시에 도입하고 개척하는 기수 역할을 담당해 왔다.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교는 전통문화를 보존하는 매개역할을 함으로써 근대화 과정에 있어서의 주체성 문제를 원만히 해결해 왔다. 또 일제시대의 그리스도교는 한글을 보존하고 통용하여 민족의 언어와 얼을 지킴으로써 일본정부가 계획했던 민족 말살정책을 최대한 막을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민중을 교육하고 인권을 자각케 함으로써 여러 형태의 독재정권에 대항하여 인간을 지켜가도록 하였다. 참고로 1919년 3·1운동 당시의 신교에 속하는 교육기관의 수효를 보더라도 한국 근대화 과정에 있어서의 공헌도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전문학교 4(당시 관립 3), 고등보통학교 40(당시 공립으로 일본인학교 16, 한국인학교 7, 실업학교 21), 보통학교 601(당시 공립으로 일본인 아동용 268, 한국인 아동용 535), 성경학교 40 등 한마디로 말해서 일본정부가 설립한 수효보다도 교회가 설립한 교육기관의 수효가 훨씬 많았다. 근대화가 진전되고 서구문화가 대량으로 수입된 오늘날에 와서는 교육기관을 위시한 대부분의 사회기관이 우리 정부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그리스도교에 의해 설립, 운영되고 있는 기관의 수효는 막대하며, 민족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4) 고도의 성장률 ―― 한국교회의 급속한 성장률은 세계 선교역사에 있어서 하나의 놀라운 사실로 알려져 있다. 우리보다 선교역사가 길고 인구가 월등히 많은 일본의 경우를 보아도 신교의 총신도수가 100만에 불과하다. 해방 당시 한국의 신교 신도수가 30만이었던 것이 10년 후인 1955년에는 100만으로 증가했고 다시 15년이 지난 1970년에는 300만이 넘었다. 10여 년마다 2배 내지 3배로 늘어나는 놀라운 증가율을 나타낸 것이다. 가톨릭교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서 1955년에 약 24만이었던 신도수가 1970년에는 80여 만으로 증가했다. 1990년 통계에 의하면 한국 그리스도교의 현황은 아래 표와 같다.


한국

그리스도교 현황 


교     본


신      교


구      교


교  회  수


30,000


770


교 직 자 수


51,000


1,540


신  도  수


1,100만


260만

이러한 한국 교회의 고도성장을 뒷받침한 사회문화적 배경을 우리는 다음과 같이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한국의 종교적 배경이다. 멀리는 한국의 민속신앙이 그리스도교의 하느님과 신령계를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도록 하였다. 그리고 가까이는 유교가 하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라는 그리스도교 윤리를 받아들이도록 그 터전을 닦아왔다. 초기에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이들은 유교 출신 학자들이었고, 후에 그리스도교가 뿌리를 내린 곳은 민속신앙에 젖은 대중들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것이 단적으로 입증된다. 둘째로는 한국 역사가 당면한 시대적 요청이다. 이조 말엽인 19세기말 한국의 정치·경제·사회·윤리는 타락과 혼돈상태에 있었다. 불교는 무당과 함께 멸시되고, 유교는 정치와 함께 부패되어 민중이 의지할 종교조차 없는 무정부상태였다. 따라서 민중은 그들의 정신적 지주가 될 종교를 갈망하고 있을 때였다. 여기에 구원의 종교로서의 그리스도교가 새로이 전파됨으로써 쉽게 민중 속에 파고들 수가 있었다. 셋째로는 이미 지적한 대로 한국 그리스도교가 현대문명의 도관이 되었고 근대화의 선구자였다는 사실이다. 20세기의 특색인 근대화의 조류가 한국을 휩쓸 때 민중은 자연히 그리스도교를 우러러 보고 이에 몰리게 되었다.

위에서 살핀 바와 같이 한국의 그리스도교는 자체가 힘차게 성장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문화 발전에도 많은 공헌을 하여 왔다. 그러나 70년대에 접어든 오늘날 한국 교회는 여러 가지 새로운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한국의 사회·정치·경제·문화가 유례 없이 급속도로 변천해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에 순응할 뿐만 아니라 과거와 마찬가지로 민중과 민족의 지도적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교회는 그 자체에 혁신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이리하여 학문적으로는 한국에 토착화된 신학을 모색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으며, 교회운동으로는 한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교파와 교회가 협동하여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이 땅에 실천하려는 에큐메니컬운동이 있고, 또한 300만 평신도가 협동하여 그리스도의 진리를 실현하자는 평신도운동 등이 일어났다. 선교에 있어서도 산업사회를 대상으로 한 산업선교 또는 도시화의 특이성을 감안한 도시선교 등이 시도되고 있다. <柳 東 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