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종교·철학/한국의 종교/한국의 유교/한국유교의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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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유교의 사상〔개설〕[편집]

韓國儒敎-思想〔槪說〕 동방에 있어서 주요한 사상의 흐름은 유교와 불교 그리고 도교라 하겠는데, 한국은 이러한 세 가지 사상적 요소를 모두 흡수·구비하여 발전시켜 왔다. 그 가운데서도 중국과는 지역적으로 인접한 까닭에 고대로부터 유교사상이 한국에 들어와 민족정신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특히 한국민족은 평화를 애호하고 불의에 저항하는 정신이 강하였던만큼, 인의(仁義)를 중심사상으로 하는 유교이념은 한국인의 기질과 정신에 잘 맞는 것이라 하겠다. 삼국시대 이전의 한국사상에 대하여는 문헌 부족으로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유학사상은 한문자(漢文字)의 전래와 더불어 들어왔다고 생각된다. 한국유교에 대한 기사는 고구려의 소수림왕 2년(372)에 태학(太學)을 세워 자제를 교육한 점에서 최초로 볼 수 있다. 또한 고구려는 지방 곳곳에 경당을 두어 청년들에게 유교 경전(經典)과 궁술(弓術)을 연마시켰다. 이것은 유교의 경전과 6禮(六藝)로써 국민교육을 실시하였음을 의미한다. 백제도 거의 같은 시기인 근초고왕(近肖古王) 때 박사 왕인(王仁)이 일본으로 논어(論語)와 천자문(千字文)을 전수하였다는 사실로 보아 유교 경전을 연구하는 기관이 설치되고, 유학사상이 널리 보급되었음을 추찰(推察)할 수 있다. 신라의 국학(國學) 설립은 신문왕 2년(682)으로서 교과내용이 오경(五經)으로 되어 있으며, 논어·효경(孝經)을 필수로 하였던 것이다. 또한 설총(薛聰)은 이두(吏讀)로써 구경(九經)을 훈해(訓解)하였다. 이미 진흥왕 때 화랑제도를 창설함에 있어서 "효제충신은 나라 다스림의 대요(敎之以 孝悌忠信 亦理國之大要也)"라 하여 유교 이념을 근본으로 했던 것이며, 화랑들이 연마한 것은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에서 볼 수 있듯이 유교경전이었던 것이다. 또한 진흥왕 순수비 속에 나오는 "몸을 닦아 백성을 편안케 한다(修己以安百姓)" 란 논어의 구절이나, '충신정성(忠臣精誠)'·'위국진절(爲國盡節)' 등의 용어가 나오는 것은 치국의 이념으로서 유교사상이 기초가 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유교 사상은 이미 삼국시대에 오경사상(五經思想)을 중심으로 하여 정치이념이 되었으며, 국민을 교육하는 원리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원래 유교에서는 효(孝)의 관념을 중시하거니와 삼국시대에 있어서 국가의 체제가 정비되어 감에 따라 그 기반을 확고히 할 뿐 아니라, 국력을 신장하고 국가를 수호한다는 필요성에 의하여 효(孝於家)와 더불어 충(忠於國)의 의미가 더욱 강조되었다. 충과 효는 삼국시대로부터 내려온 한국유교의 보편적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신라 말기의 어지러운 난국을 타개하고 통일국가를 형성한 고려 태조 왕건(王建)은, 국가의 창업이 불력(佛力)과 삼한산천(三韓山川)의 도움으로 된 것이라 하여 불교를 장려하고 토속적인 신앙과 도교적인 풍수설을 숭신하였다. 그러나 실제적인 통치이념에서는 태조십훈요(太祖十訓要)의 끝부분에 보이는 바와 같이 유교사상에서 구하였던 것이다. 경사(經史)를 널리 보고, 후대의 왕들에게 인정(仁政)을 베풀 것을 유조(遺詔)로 남겼다. 서경(西京)에 학교를 세운 것도 유교를 이념으로 인재를 교육한 것이라 하겠다. 6대 성종 때에 이르러서는 국자감(國子監)을 세우고 경학박사를 두었으며, 최승로(崔承老)의 진언(時勢二十八條)에 따라 국정을 쇄신하였다. 4대 광종 때부터는 과거(科擧)를 시행함으로써 문풍(文風)이 일어났으나, 사장시부(詞章詩賦)에 관한 제술(製述)을 명경(明經)보다 치중함으로써 경학의 연구는 미약한 상태였다. 그후 11대 문종때에는 최충(崔沖)의 구재(九齋)를 비롯한 사학(私學)이 성행하여 이른바 십이도(十二徒)가 일어나고, 경사(經史)를 중심으로 연구하는 학풍이 생겼다. 그러나 최충 이후 200여 년간 유교는 부진한 상태였고, 대부분이 시부(詩賦)를 위주로 한 문장학에만 치중하였다. 당시에는 유가(儒家)라 해도 순수하게 유학만 연구한 것이 아니라, 중국에 있어서 당(唐)시대의 경향과 같이 유·불도가 혼합된 상태였다. 그리하여 여말(麗末)에 이르러, 건국 이래 겪어온 혼란과 문화적인 침체를 타개할 수 있는 새로운 개혁이 요청되었고, 이에 부응하여 일어난 것이 곧 유교의 혁신 운동이다. 25대 충렬왕 때에 송대 성리학(宋代性理學)이 수입되었다. 성리학이란 중국에 있어서 한·당(漢唐)의 도불시대(道佛時代)를 거쳐 그것에 대항하여 새롭게 조직·편성된 유학의 이론체계였다. 새롭고 합리적이며, 강한 자주정신을 가진 성리학은 새로운 기풍을 일으키게 되었다. 안향(安珦)의 문묘개수(文廟改修)와 주자서(朱子書) 도입, 그리고 후진의 교육이 발흥하여 성균관을 중심으로 백이정·우탁(禹倬)과 같은 유학자를 내었고, 이제헌(李齊賢)·이색(李穡)에 이어 정몽주(鄭夢周)·정도전(鄭道傳)과 같은 사류(士類)를 배출하였다. 성리학은 인간의 본성과 존재의 원리를 탐구하는 심오한 학문으로서, 종래의 불교사상이나 도가사상(道家思想)에서 추구하였던 형이상학적 요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이었다. 또한 주자학(朱子學)은 외적으로 사회적 제도와 규범의 원리가 되는 것으로서 일종의 비판철학이며, 역사철학의 구실을 하였다. 공민왕 이후로는 신진 사류들에 의하여 원(元)의 정치적 억압에서 벗어나 자주성을 확보하려는 의도에서 배원친명(排元親明思想)사상이 주창되고, 불교의 세속화·이원화(利源化)에 대한 강력한 배척운동이 일어났다. 토지제도의 문란으로 인한 경제적 파탄은 사전(私田)의 철폐라는 혁명적 조처를 단행케 하였다. 사회적으로는 친족혼을 폐지하고, 상례와 제례에 있어서 주자가례에 의한 유교의식을 따르도록 하는 등 일련의 개혁운동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통치이념을 유교에 두는 신왕조의 성립을 보게 되었다. 정도전은 극단적 배불론을 펴서 불교로부터 유교로 사상적 전환을 가져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조선에서의 유학사상은 먼저 세종 시대의 학술사상으로 만개하였다. 세종은 궁중에 최고 학술기관인 집현전을 두고 유교를 중심으로 한 동양의 전통문화를 창의적으로 개발하여 위대한 문화를 창조하였다. 훈민정음은 유학에서 말하는 태극·음양·오행·삼재(三才)·하도(河圖)의 역리(易理)를 기본으로 하여 제작된 것이며, 대소간의(大小簡儀)·천구의(天球儀)·혼천의(渾天儀)·자격루(自擊漏)·측우기와 같은 천문·역상(曆象)에 관한 발명은 서경(書經)과 역경(易經)의 원리에 근거하여 새롭게 발명된 과학적인 업적이었다. 박연(朴煙)을 중심으로 한 악률(樂律)의 정리도 기본원리는 역리에 의한 것이었다. 또한 세종은 국민교육의 지침으로서 삼강행실(三綱行實)을 만들어 널리 보급하는 등 유학사상을 응용함으로써 고도한 학술문화를 이룩하였으며, 나라의 기반을 튼튼히 하였다. 세조의 왕위찬탈에 있어 유학사상은 절의정신(節義精神)으로 나타났으며, 이러한 정신은 역대로 존숭되어 왔다. 그후 훈구파(勳舊派)와 신진사류간에 대립을 보아오다가 급기야 무오사화와 갑자사화가 발생하였다. 여기서 절의정신이 재현되었는데, 이것은 현실주의인 훈구 관료와 정의를 주창하고 불의를 배격하는 사림(士林)간의 충돌이었다. 조광조(趙光祖)는 한국 도학사상의 태두(泰斗)로서 지치주의(至治主義)를 내세워 일세를 경륜(經綸)하였다. 도학은 여말의 동방 이학(理學)의 조(祖)라고 일컫는 정몽주로부터 길재(吉再)·김숙자(金叔滋)·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로 학통(學統)이 이어지는 것으로, 조광조에 이르러 다시 크게 일어나게 된 것이라 하겠다. 도학이란 성리지학(性理之學)과 의리지학(義理之學)을 내용으로 하는 내성외왕(內聖外王)의 실천적 학문이었다. 순정(淳正)한 유학을 표방한 도학자 조광조는 도교적 기관인 소격서(昭格署)를 파하고 현량과(賢良科)를 두어 청류(淸流)를 조정에 포열(布列)하였으며, 향약(鄕約)을 실시케 하는 등 신풍을 일으켜 지치(至治)를 지향하였다. 그러나 그의 과감한 혁신은 훈구보수세력의 반격으로 다시 기묘사화가 일어나고, 이어 을사사화가 일어남으로써 일시에 사류가 죽어갔다. 그러나 이것은 후세에 있어서 진리를 옹호하며, 불의에 대하여는 죽음을 다하여 항거하는 의사상의 근원이 되었으며, 국가의 강상(綱常)을 중히 알고 국맥(國脈)을 보존하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명종·선조대에 이르러서 성리학의 전성기에 도달한다. 거듭되는 사화로 인하여 사림은 내적으로 성장하게 되었으며, 고도한 학문적 성취를 이루었다. 여기서 서경덕(徐敬德:花潭)·이황(李滉:退溪) 그리고 이이(李珥:栗谷) 등 대유(大儒)의 출현을 보게 된다. 이들은 모두 도덕이 높은 학자들로서 한국유학사상 획기적 업적을 남겼을 뿐 아니라, 사회적·역사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서경덕은 기론자(氣論者)의 입장이었다. 이(理)와 기(氣)는 호발(互發)하는 것이라 하여 2원적으로 파악하고, '이'는 순선(純善)한 것이요 '기'는 타성을 갖는 것으로서 인욕(人欲)으로 떨어지기 쉬운 것으로 보았으며, 양자의 혼동을 경계하였다. 당시 부조리한 사회에 있어서 선과 악, 정의와 불의를 엄격하게 갈라야 할 것이요, 그리하여 불의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는 이황에 있어서 2원론적인 이론경향은 당연하게 보인다. 이황의 학문적 방법은 전진적인 것이었으며, 종합과 분석의 방법을 아울러 사용하였다. 이황은 인간의 성장과 성숙을 학의 목표로, 경(敬)은 치학(治學)의 요체(要諦)로서 각성된 자아의 핵심으로 보았다. 이이는 서경덕과 이황을 거쳐, 성리학의 본령에 있어 양자를 내포시켜 이기지묘(理氣之妙)로서의 성리설을 주장하였다. 이이는 서경덕의 기불멸설과 선천(先天)·후천(後天), 즉 '기'의 체용(體用)을 요해하고, 이기 불가리성(不可離性)을 말한다. 그러나 구극적 존재는 '기'가 아니라 '이'라 하여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을 제창하였다. 그리고 이우위설(理優位說)을 견지하는 점에서는 이황과 같다. 그러나 '이'는 발하는 것이 아니며, '이(理:太極)'는 '기(氣:陰陽動靜)'의 근저(根低)이지 그 자체로서 동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말한다. '기'의 체용과 '이'의 체용을 아울러 나타낸 것이 이이의 이통기국설이라 할 수 있다. 율곡은 사회적·정치적 문제에 있어서도 유능한 경세가였거니와 본원적인 원리와 구체적인 현실을 하나로 연결된 것으로서 파악하였음이 율곡사상의 특징이라 하겠다. 도학사상과 성리사상은 사회적으로 인도(人道)를 고취하고 정치적으로 왕도(王道)를 실현시키려는 줄기찬 노력으로 점철되었다. 군왕도 경연(經筵)에 나가 유도를 수학하였다. 유학사상은 내우외환이 있을 때마다 의리정신과 충렬정신으로 나타났다. 임진왜란시에는 조헌(趙憲) 등의 의병활동으로, 병자호란시에는 김상헌(金尙憲)·삼학사(三學士)와 같은 자주의식으로, 그리고 효종·송시열(宋時烈)의 북벌사상(北伐思想)으로, 구한말에 있어서는 유인석(柳麟錫)·최익현(崔益鉉)을 비롯한 전국의 의병운동으로 나타난 것이다. 성리학의 퇴·율의 전성기를 거쳐 김장생(金長生)·김집(金集) 부자를 비롯하여 예학(禮學)의 발달을 보았고, 나아가 예송(禮訟)과 같은 심각한 문제로 발전하였거니와, 이간(李柬)·한원진(韓元震)을 필두로 한 인물성동부동(人物性同不同)을 둘러싼 호락론(湖洛論)이 전개되었다. 그리하여 성리학은 200여 년에 걸친 이론적 탐구의 대상이 되었다. 중국 명(明)나라에서 성행하던 양명학(陽明學)은 한국 성리학의 전성기인 선조년간에 들어온 것으로 보여진다. 간이직절(簡易直截)한 이론과 지행합일(知行合一)을 표방하는 양명학은 선학(禪學)의 요소가 있다고 하여, 퇴계의 전습록논변(傳習錄論辯) 등 주자학을 정통으로 하는 유학자들에 의하여 배격되었으므로 공공연한 연구활동은 불가능하였다. 인조조에 있어서 최명길(崔鳴吉)·장유(張維) 등이 양명학을 연수하였고, 후에 정제두(鄭齊斗)의 본격적인 연구와 함께 양명학은 심화하였으며, 그의 탁월한 논설은 한국 양명학의 정수를 이루었다. 선조조에서부터 조선 후반에 걸쳐 전개된 실학사상도 역시 유학의 한 형태였다. 성리학은 이기성정론(理氣性情論)과 같이 사변적(思辨的) 이론철학으로 기울었을 뿐 아니라, 인간의 내면적 심성과 윤리문제를 주제로 하였던만큼 사회·경제적인 현실문제에 대한 보강을 필요로 하였으며, 특히 임진·병자 양난을 겪은 후에 당쟁으로 인한 정치적 혼란과 민생의 피폐는 이용후생(利用厚生)과 경세치용(經世致用)을 내용으로 하는 실학 이념을 보다 절실하게 하였다. 이 사상은 청(淸)의 고증학과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풍,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전입(傳入)과 서구과학의 영향을 받아 더욱 발달하게 되었다. 이미 이이(李珥)와 이수광에 의하여 무실(務實)과 실효(實效)가 강조된 바 있고, 유형원(柳馨遠)은 전통적인 성리학을 전승하면서 동시에 토지제도·교육제도 등의 제도적인 개혁을 주장했으며, 국정 전반에 관한 새로운 제도를 제시하였다. 이익(李瀷)은 역시 전제(田制)의 합리적인 개혁을 논하여 균전론(均田論)을 주장하였다. 생업의 기본단위로서 영업전(永業田)의 제도화를 주장하고, 산업윤리로서 생재론(生財論)을 폈다. 그의 실학사상은 서양의 자연과학 및 천주교사상의 영향을 받아 천문·지리·역사·제도·풍속·군사·문학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그리고 조선의 학술사상은 영·정조(英·正祖) 때 다시 흥기, 문운(文運)이 일어났다. 북학파(北學派) 박제가(朴齊家)·박지원(朴趾源)·홍대용(洪大容)·이덕무(李德懋) 등은 과학기술 분야의 개발과 상업의 진흥을 강력히 주장, 진보적인 산업관(産業觀)을 제창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국사와 지리에 대한 인식이 새로이 고취되어 안정복(安鼎福)의 동사강목(東史綱目), 한치윤(韓致奫)의 해동역사(海東繹史)와 같은 역사서, 그리고 이중환(李重換)의 택리지, 김정호(金正浩)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와 같은 지리서의 저술은 민족사상 고취의 일면이라 하겠다. 조선 말기에 접어들어 종(縱)으로는 유형원(柳馨遠)과 이익(李瀷)의 학통(學統)을 계승·발전시키면서, 횡(橫)으로는 북학(北學)과 서학(西學) 사상을 받아들여 실학사상을 각 분야에 걸쳐 종합적으로 전개한 사상가는 정약용(丁若鏞)이다. 그는 한대(漢代) 이후의 학풍을 성리·훈고·문장·과거 그리고 술수에 치우친 것이라 하여 배격하고, 새로이 근본 유학사상인 육경(六經)과 사서(四書)를 중심으로 사상을 수립하였다. 뿐만 아니라 내용적으로는 천주교와 양명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이 저술에 반영되고 있다. 오경·사서에 대한 경설(經說), 국가의 제도와 법규의 준칙으로서 논정(論定)한 경세유표(經世遺表), 지방장관에게 치민(治民)의 요령과 감계(鑑戒)가 될 목민심서(牧民心書)와 형법에 관한 주의와 규범의 서(書)인 흠흠신서(欽欽新書)가 대표적 저작이며, 그 밖에 지리·의학서를 남겼다. 그리고 김정희(金正喜)는 청(淸)의 옹방강(翁方綱)이나 완원(阮元)과 같은 대유(大儒)들과 직접적인 교유(校遊)를 하였거니와 경학의 의미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한 고증학과 실천궁행과 아울러 사사물물상에 있어서 그 옳음(是)을 구하는 실사구시(實事求是) 사상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고정지학(考訂之學)으로서의 한학(漢學)과 의리지학(義理之學)으로서의 송학(宋學)을 아울러 취하여 독특한 실학사상을 형성하였다. 이상에서 보아온 바와 같이 유교사상은 한국 역사를 통하여 각 시대에 따라 특색있게 발달하면서 지도이념 및 학술사상의 근간(根幹)이 되어왔다. 근대에 와서 한국 민족은 개화 이래로 서양문물의 충격에 의하여 격심한 변동을 초래하였고, 일본을 전위로 한 열강(列强)의 침탈(侵奪)에 의하여 미증유의 수난(受難)에 처하게 되었거니와, 전통사상의 지주가 되어온 유교사상 또한 거센 저항을 받아 퇴미(頹靡)한 상태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유교의 인도주의 사상은 오늘날 불신(不信)과 대립(對立)의 시대를 초극함에 있어서 원동력이 되어야 할 것이며, 유교의 학술사상을 새로이 개발함으로써 민족문화의 건설에 이바지하여야 할 것으로 전망된다. <趙 容 郁>

인의 사상[편집]

仁-思想

인(仁)은 유교사상의 최고 원리이다. 공자는 "인이라는 것은 사람이다(仁者人也)(禮記中庸表記)"라고 말하였다. 이때 '사람'은 개체실물(個體實物)을 지칭하고 인은 이 개체자가 본구(本具)한 덕성, 즉 인도(人道)를 말한다. 이 인도(人道)는 금수(禽獸)와 구별되는 인간의 본성으로 인간이 마땅히 걸어야 할 큰 길이다. 그래서 주자(朱子)는 인(仁)이란 "사람이 사람되는 까닭의 원리(人之所以爲人之理)(孟子盡心下 朱子註)"라고 말하였다. 유교에서는 인(仁)의 구체적인 내용으로 사랑을 들고 있다. 그래서 공자는 그의 제자 번지(樊遲)가 인에 관하여 물었을 때 "사람을 사랑하는 것(愛人)"이라 답변하였다. 인은 원리이고 사랑은 실천요목으로 이해된다. 윤리는 보편성을 띠어야 하므로 모든 인간에게 고루 적용되는 준칙이 요구된다.

이 준칙으로 공자는 서(恕)의 관념을 제기한다. 서(恕)는 자기를 미루어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것으로 적극·소극의 두 면이 있다. "자기가 원하지 않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베풀어서는 안된다(己所不欲勿施於人)"는 것은 소극적인 준칙이고 "자기가 자립코자 하듯이 다른 이를 일으켜 주고 자기가 이루고자 하듯이 다른 이가 이루게 도우라(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는 것은 적극적인 준칙이다. 이러한 서(恕)의 사상은 맹목적이 아니라 자기완성이 선행되어야 가능하다. 이 자기완성이 곧 충(忠)이다. 충이란 "자기의 성실성(誠實性)을 완전히 다하는 것(盡己之謂忠)" (論語里仁篇 朱子註)으로 윤리행위의 전제가 된다. <대학(大學)>에서 충의 관념은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으로 서(恕)의 관념은 "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로 구체화되었다. 그래서 자기인격 완성은 다른 이의 인격 완성과 뗄 수 없는 관계로 맺어지고 개별성의 원리가 보편성의 원리로 승화된다.

효제사상[편집]

孝悌思想

효제관념은 유교의 근본이 되는 덕목(德目)으로서 공자에 의하여 그 내용이 심화(深化)된 이래 동양사회에 막대한 영향을 주어왔다. 공자는 "효제라는 것은 행인(行人)의 근본이다(孝悌也者, 其爲仁之本與)"라고 하였으며 <효경(孝經)>은 "무릇 효가 덕의 근본이다. 모든 가르침이 여기에서 시작된다(夫孝德之本也, 敎之所由生)"라고 말하였다. 효도의 시작은 부모를 섬기는 데에서 출발하며 조상숭배, 천지(天地)숭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부모를 섬기는 까닭은 자신의 신체를 부모로부터 받았기 때문이며 이것은 부모의 부모인 먼 조상까지 이어져 마침내 만물을 낳은 천지를 섬기는 이유가 된다. 효도가 경천(敬天)사상과 결합하는 연유는 여기에 있다. 먼저 효도의 실천 장소는 혈연공동체인 가정이 중심이 된다. 핏줄이 맺어져 있는 곳에서 자식이 부모를, 아우가 형을 섬김으로써 인(仁)의 내용인 사랑(愛)을 경험할 수 있다. 이 경험을 확충하여 사랑으로 충만한 사회를 이룩하려는 것이 유교의 충서(忠恕)사상이다. 효제는 임금이나 사대부·백성의 가정 어디에서나 해당하는 덕목이다. 따라서 임금이 효제를 가지고 천하를 다스리며 백성이 따르고 백성이 효제를 가지고 임금을 섬기면 충성이 된다. 그래서 이 효제관념은 단순한 가정윤리의 의의(意義)를 넘어 사회규범으로서의 의의를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부터 <논어>·<효경>을 필수교양으로 가장 중요시하였으며 <삼국유사>를 보더라도 불교설화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중에서도 효행에 관련된 일화가 점철되어 있음을 볼 때 그것이 얼마나 민간의 일상생활 속에 깊이 침투되어 있었는가를 알 수 있다. 고려말엽 권부(權傅)가 지은 <효행록(孝行錄)>은 효행설화의 최초의 집대성이다. 이러한 효의 사상은 조선사회에 들어와 지배층에까지 깊이 파고들어 상부층의 정치적 대립, 당쟁의 불씨로 파급되는 경우가 있었다. 그 첫째가 연산군의 갑자사화(甲子士禍)이다. 임금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냄으로써 폐위, 사사(賜死)된 생모를 연산군이 다시 복위시켜 종묘에 배사(配祀)하고자 하다가 신하들과의 마찰로 무참한 사화로 확대되었던 사실은 개인적인 효성과 대의명분의 대립이 하나의 원인이었던 것이다. 둘째로는 효종의 국상을 당하여 모후(母后) 조대비(趙大妃)의 복제를 문제삼아 서인측은 기년복을 주장하고, 남인측은 3년복의 주장으로 대립하다가, 효종비의 상에 다시 이 문제가 재연(再演)되어 남인측이 정권을 잡는 계기가 되었다. 효제관념은 이러한 폐해를 낳기도 하였지만 효자 효녀를 배출하고 가정의 화목을 촉진하였으며 사회의 질서를 유지시키는 데 크게 공헌한 것도 사실이다.

예의사상[편집]

禮-思想 예(禮)에는, 설물해자(說文解字)에 의하면 "예는 실천함이다. 신(神)을 섬기어 복이 이르게 하는 바이다"는 자의(字義)가 있다. 원래 고대 중국인은 하늘을 만물의 창조자이며 우주의 주재자로서 의지를 소유한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하늘의 뜻에 따르면 길(吉)하고 이를 어기면 흉(凶)하다고 믿었다. 예로써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천명(天命)을 받아 이를 지키고 따르고 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인간의 지혜가 발달함에 따라 하늘을 따르기만 하여 복(福)을 받겠다는 생각은 감퇴되고 사회적인 필요성에 의하여 예법(禮法)을 제정하였다. 순자(筍子)는 "예의 기원은 무엇이냐?

사람은 생래(生來)로 요구하는 바가 있으며 욕구를 채우지 못하는 경우에도 욕구를 버리지 못한다. 그리고 도량분계(度量分界) 없이 무한히 욕구를 쫓으면 서로 쟁탈하지 않을 수 없다. 쟁탈하면 혼란해지고 혼란하면 궁(窮)하게 된다.

선왕은 그렇듯 혼란해지는 것을 꺼리어 예의를 제정하여 질서분계(秩序分界)를 세우고 또한 인간의 욕망을 적절히 살리면서 아울러 인간이 욕구하는 바를 적절히 충족시켜 주려 한다"고 말하였다. 이는 예(禮)를 사회질서 유지의 필요성에 의하여 제정한다는 것을 설명하여 준다. 이러한 예(禮)는 사회의 변천에 따라 적합하게 개선되어 왔는데 오늘날의 용어로 바꾸면 정치 제도, 사회의 전례(典禮), 윤리적인 예절의 함의(涵義)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상고시대부터 8교(八敎)로써 예법(禮法)을 삼아 백성을 다스려 왔다고 하지만 확실히 고증할 수 없고, 유교 전례에 따라 예제(禮制)가 확립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시대 이래로 원구·방택(方澤)을 설치하여 천지제를 지내고 사직(社稷)·종묘(宗廟)에서 시조에 대한 제례(祭禮)를 행하여 왔다.

그리고 일반서민 사회에서 널리 행하여진 예(禮)로는 관(冠)·혼(婚)·상(喪)·제(祭) 등으로서 시대의 변천에 따라 다소 개변은 있었으나 대체로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준거(準據)하였다.

사칠론[편집]

四七論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을 말한다. 사단(四端)은 맹자의, 측은지심(惻隱之心)은 인지단(仁之端), 수오지심(羞惡之心)은 의지단(義之端), 사양지심(辭讓之心)은 예지단(禮之端), 시비지심(是非之心)은 지지단(智之端)이라고 한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단(端)을 모아서 사단이라고 하며, 칠정(七情)이란 예기(禮記)에 나오는 사람이 갖고 있는 일곱 가지 감정, 즉 희·노·애·구·애·오·욕 (喜怒哀懼愛惡欲)을 말한다. 이 사단과 칠정의 관계를 철학적으로 설명하는 데 있어서 그 주장을 사칠론이라고 하며, 또한 이것은 사람의 견해에 따라 의견을 달리하며 조선시대의 성리학에 있어서 오랫동안 논쟁 대상이 되었다.

이기론[편집]

理氣論

조선시대 성리학(性理學)에 있어서 자연의 존재법칙을 연구하는 우주론(宇宙論)의 하나이다. '이(理)'·'기(氣)'는 본래 유교의 경전에 단편적으로 보이지만 중국의 송대(宋代)에 이르러 유교는 불교·도교의 영향을 받아 이론적으로 이기론을 더욱 심화하였다.

주희(朱喜,1130∼1200)에 의하여 집대성된 성리학은 고려말부터 우리나라에 유입되기 시작하여 조선시대에는 정통사상으로서 군림하였고, 이기론은 사칠론과 얽히어 조선시대 유교계에 있어서 논쟁의 초점이 되었다.

주희는 "음양오행(陰陽五行)이 착종(錯綜)하여 조리(條理)를 잃지 않는 것이 곧 이(理)이다. 만물의 일원(一原)을 말하면 이(理)는 동(同)하고 기(氣)는 다르다"고 하였다. 기(氣)는 우주 구성의 소재(素材)로서 음양(陰陽)의 기운, 즉 힘으로서 자연과학상의 에너지이며, 이(理)는 기(氣)의 운동이나 작용의 조리(條理)로서 철학적으로는 원리(Principle)·형식(Form)·로고스(Logos)·이데아(Idea)·규범(Norm)·당위(Sollen) 등의 뜻을 가지고 있으며, 자연과학적으로는 법칙(Law)의 뜻이다.

사칠이기논쟁[편집]

四七理氣論爭

조선시대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그의 문인(門人)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과의 사이에 일어나기 시작한 사단칠정(四端七情) 및 이기(理氣)에 관한 논쟁으로서 조선의 유교계에 오랫동안 계속되었던 논쟁.

이황은 "사단(四端)은 이(理)에 발(發)하므로 순선(純善)이요, 칠정(七情)은 기(氣)를 겸(兼)하였으므로 선악(善惡)이 있다"고 하였으며, "사단은 이(理)의 발(發)이요, 칠정은 기(氣)의 발이다" "사단에도 기(氣)가 없는 것이 아니지만 이(理)가 주(主)가 되므로 사단은 이(理)의 발이라 말하고, 칠정에도 이(理)가 없는 것이 아니지만 기(氣)의 발이라 한다"고 하여 이기2원론(理氣二元論)을 취하고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기대승은 "칠정 외에 사단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닌데 지금 만약 사단은 이(理)에서 발(發)하여 불선(不善)함이 없고 칠정은 기(氣)에서 발하여 선악이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이(理)와 기(氣)가 확실히 둘이 되는 것이며 칠정은 성(性)에서 나오지 아니하고 사단은 기(氣)에 승(乘)하지 아니하는 것이 되니 이것은 어의(語意)가 의심이 없을 수 없는 것입니다."

"칠정 밖에 따로 어떤 정(情)이 이(理)에서만 나오고 기(氣)에서 나오지 아니하는 정(情)이 있을 수 없습니다. 또 외계(外界)의 물질(物質)에 감촉되어 동(動)하는 것은 사단(四端) 역시 그러합니다"라고 하여 사단과 칠정의 이기분속(理氣分屬)을 반대하고 이기공발설(理氣共發說)을 취하여 주기적(主氣的) 경향을 띠게 되었다.

두 사람이 세상을 떠난 몇 해 뒤에 다시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기대승의 전설(前說)을 가지고 이황의 설을 반박하여 우계(牛溪) 성혼(成渾)과의 사이에 논쟁이 거듭되었다.

성혼은 "심(心)의 허령지각(虛靈知覺)은 하나인데, 혹 형기(形氣)의 사(私)에서 나온 것은 인심(人心)이요, 혹 성명(性命)의 정(正)에서 원(原)한 것은 도심(道心)이다. 인심은 기(氣)를 위주로 하고 도심은 이(理)를 위주로 한 것이 퇴옹(退翁:李滉)이 사단은 이발이요, 칠정은 기발이다라고 한 것과 무슨 다른 점이 있겠는가. 이(理)와 기(氣)의 호발(互發)이 천하의 정리(定理)가 되고 퇴옹의 본 바가 역시 정당한가 자세히 연구하여 일깨워 주기를 바라네"라고 하여 이황의 이기호발설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이이에게 질문서를 보내니 이이는 "만일 형(兄:成渾)의 말대로 이기호발(理氣互發)이라 한다면, 이것은 이기(理氣) 2물(物)이 각기 마음 가운데 뿌리가 있어서 발하기 전에 이미 인심(人心) 도심(道心)이 묘맥(苗脈)이 있어서 이(理)가 발(發)하면 도심(道心)이 되고 기(氣)가 발하면 인심(人心)이 되는 것이니,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에 2본(本)이 있는 것이 된다. 무릇 발하는 것은 기(氣)요, 발(發)하는 소이연(所以然)은 이(理)이다. 기가 아니면 능히 발하지 못하고, 이가 아니면 발할 소이연이 없는 것이니, 선후(先後)나 이합(離合)도 없는 것이요 이기호발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하였다.

이이는 이기(理氣一途說)로써 이발(理發)을 부정하고 기발이승(氣發理乘)만을 관철하였으며, 사단과 칠정의 근원으로서 이황의 이른바 이발·기발이란 두 묘맥(苗脈)을 부정하고 기발(氣發)의 한 묘맥만을 인정하였다.

이황의 이발, 이이의 기발이란 상반되는 견해는 다음 주리파(主理派)와 주기파(主氣派)의 양대 진영으로 갈리어, 유교계에서 오랫동안 논쟁을 계속하였다.

이황을 지지하는 주리파는 영남지방에서, 이이를 지지하는 주기파는 경기·호남 등지에서 성행하였으므로 각기 영남학파·기호학파라고도 일컬어졌다.

양파는 모두 자파(自派)의 학문적 근거를 성리학의 대성자 주희에게 구하려 한 나머지, 주기파의 송시열(宋時烈)과 한원진(韓元震)의 공저 <주자언론동이고(朱子言論同異考)>는 주희의 어록을 세밀히 조사함으로써 주기론의 근거를 고증한 것이며 이에 대하여 주리파의 이진상(李震相) 저(著)인 <이학종요(理學宗要)>에서는 주희의 어록이 이발(理發)을 주장한 것임에 틀림없다고 변증하였던 것이다.

인물성동이논쟁[편집]

人物性同異論爭

사람의 본성(本性)과 금수(禽獸)의 본성, 즉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를 문제로 하는 논쟁. 18세기 초엽 조선 유교계에서 일어난 논쟁으로, 일명 호락분파(胡洛分派)라고도 한다. 수암(遂庵) 권상하(權尙夏, 1641∼1721)의 제자인 남당(南塘) 한원진 사이에 인물성동이의 문제를 가지고 서로 주장을 달리하여 발달한 논쟁은 점차 전 유교계의 쟁점으로 확대되었다.

이간은 말하기를 금수도 인류(人類)와 마찬가지로 오상(五常:仁義禮知信)의 성(性)을 다 가졌다 하여 인물성(人物性)이 서로 같다고 주장함에 대하여, 한원진은 말하기를 대저 성(性)이라는 것은 다 기질(氣質)에 의하여 이름지은 것이니 성(性)은 곧 이(理)가 기(氣) 중에 타재(墮在)한 이후의 이름이다. 그러므로 "금수가 어찌 사람과 더불어 그 전부를 동일히 할 수 있느냐" 하는 등 인물성이 같지 않다고 주장하여 이간의 설에 반대하였다.

이간은 다시 말하기를 인(人)과 물(物)이 다 같이 오행(五行)의 이(理)를 균수(均受)하였는데, 지금 그 기품(氣稟)을 논할 때에 편전분수(偏全分數)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가(可)하나 오상을 일(一)은 유(有)하고 일은 무(無)하다고 말하면 불가(不可)하다. 그러므로 금수가 다 같이 건순오상(健順五常)의 덕(德)을 품수(稟受)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즉 이간은 <중용(中庸)>의 천명지위성장(天命之謂性章)에서 주자가 말한 '인물지생(人物之生) 인각득기소부지리(因各得其所賦之理) 이위건순오상지덕(以爲健順五常之德) 소위성야(所謂性也)'라 한 장구를 논거로 하여 '성즉리(性卽理)'라 주장하고, 일체 만물이 천명(天命)을 균수하는 이상 그 본성은 인의예지의 덕을 다 같이 갖추었을 것이며, 다만 인물성(人物性)의 차이는 기질에 의할 뿐이라고 말하였다.

이에 대하여 한원진은 성(性)을 단순히 이(理)로만 보지 아니하고 일정한 기(氣)에 배합된 생물 각 종류의 서로 다른 특질로 보았다. 즉, 성은 어디까지나 태극과 같은 이(理)가 기(氣) 속에 섞인 뒤의 것이라고 보았다. 또한 인간을 이루는 기(氣)와 금수를 이루는 기에 차이가 있으며, 인간을 이루는 청명한 기에 속한 성(性)과 금수를 이루는 혼탁한 기에 속한 성이 같을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따라서 인의예지와 같은 성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성으로서 금수의 성과는 다른 오직 인간만의 '본연의 성'이라 단언하였다.

이와 같이 한원진은 기(氣)의 입장에 치중하여 인물성의 상이를 주장하고 이간은 이(理)의 입장에 치중하여 인물성의 상동(相同)을 주장하였다.

이때에 윤봉구(尹鳳九)·최징후(崔徵厚) 등은 한원진의 주장을 지지하고 이재(李縡)·박필주(朴弼周) 등은 이간의 주장에 찬동하였다.

이간의 설을 지지하는 이재·박필주 등의 집이 낙하(落下)에 있었으므로 그들의 이론을 낙론(洛論)이라 부르게 되었고, 한원진·윤봉구·최징후 등의 집이 호서(湖西)에 있었으므로 그들의 이론은 호론(湖論)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렇게 분립된 양론은 사칠이기설을 다투어 논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심성(心性)의 변(辨)을 말하는 자는 반드시 양론 중 한 쪽에 가담하였다. 그리하여 양파는 서로 파당을 지어 오래도록 논변을 계속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