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컴퓨터·환경·첨단·지구과학/과학의 발달/과학의 발달/고대의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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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의 과학·기술[편집]

古代-科學·技術

인류의 여명 人類-黎明

인류와 그 문화의 기원의 진상은 오래도록 신화(神話)의 장막에 싸여 왔지만, 현대의 모든 과학, 특히 인류학이나 선사고고학(先史考古學)의 노력으로 오늘날 대략 밝혀졌다. 여기에 따르면 인류는 지금으로부터 약 60만년 전경에 지구 위에 나타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우선 최초로 나타난 것은 북경인으로 알려지는 원인(原人, 피테칸트로푸스)으로서, 지금은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의 각지에서 유골이 발견되고 있다. 다음에는 네안데르탈인으로 대표되는 구인(舊人)이 나타나, 그로부터 겨우 현대의 인류에 극히 가까운 신인(新人, 크로마뇽인 등)의 시대가 되었다.

이러한 초기의 인류가 다른 동물들과 다른 결정적인 점은, 직립하여 생활하게 되었다는 점이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 결과로, 뇌의 무게에 대한 부담이 없어졌고, 앞다리가 양손으로 발달하여 연모를 쓸 수 있게까지 되었다. 그와 동시에 발성기관이 발달하여 언어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언어와 도구[편집]

言語-道具

이 두 가지는 인류문화의 두 개의 측면을 대표하는 것이다. 인류 초기의 모습을 어느 정도 지니고 있다는 현존하는 원시민족을 말하더라도 모두 복잡한 언어체계를 가지고 있으므로, 언어는 어떻게 발생하였으며, 어떻게 발달하였는지는 꼭 명확하지는 않다. 그렇지만 인류가 언어로 심벌의 조작(造作)을 할 수 있게 된 것이, 그 후의 지적인 발전에 대하여 큰 영향을 주었으리라는 것은 쉽게 추정할 수 있다. 다만, 초기의 인류가 사용하였으리라고 생각되는 언어에 대한 자료는 너무도 적다. 그 반면에 광의의 도구-의(衣)·식(食)·주(住)에 따르는 여러 가지 물건에서 예술품에 이르기까지-는 썩어 없어졌다든지 파괴되지 아니한 이상, 오늘날까지 꽤 많은 것이 남아 있다. 그리하여 그러한 것들을 정리하고 해석함으로써, 그것들이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또 어떻게 쓰여졌는지를 어느 정도까지는 밝힐 수 있게 된 것이다. 유물로서 전해지고 있는 주요한 도구로서는 돌이나 골각으로 만든 여러가지 용도에 쓰이는 도구·무기·그릇이 있고, 때로는 특별한 자연조건하에서 목재나 짐승가죽 등으로 만들어진 것도 발견된다. 또 북경원인의 유지(遺地)에서 볼 수 있는 숯불의 흔적이나 알타미라 동굴벽화에 사용된 바 있는 안료(顔料)도 초기의 기술사(史)에 대한 보족적인 자료가 된다.

선사시대의 전망[편집]

先史時代-展望

태고의 인류가 사용한 도구류의 재료 중 가장 내구성이 있고, 또 견고하기나 날카로움에서 가장 유용하였던 것은 각종의 돌이었다. 그리하여 돌로 만든 도구, 즉 석기는 기술적 면으로 본 인류역사 중의 꽤 긴 시대를 대표하게 된다. 석기시대는 보통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로 나뉜다. 전자는 인류역사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후자는 지금부터 약 1만년 내지 5천년 전경부터의 수천년간(또는 곳에 따라서는 수백년간)을 차지하는 데 불과하다. 그 후 인류는 금속 사용방법을 발견하였고, 금석병용시대를 거쳐, 청동기 시대에서 철기시대로 이행하였다. 오늘날의 세계는, 기술사적으로는 철기시대의 연장상에 있다고 보고 있다. 금석병용 시대 무렵에 문자 사용이 비롯되었고, 역사의 기록이 남기 시작하였으므로 선사시대는 끝나고 유사시대에 들어왔다.

오리엔트 문명의 역할[편집]

Orient 文明-役割

신석기 시대는 대략 고대문명의 탄생시대에 대응한다. 구대륙의 고대문명에는 중국문명, 인더스문명, 메소포타미아문명 및 이집트문명이 주요한 것으로 꼽혀, 신대륙에서는 시대가 다소 틀리지만 마야문명·잉카문명 등이 알려져 있다. 이들 가운데서 메소포타미아문명 및 이집트문명은 많든 적든 후대의 유럽문명에 계승되어 현대문명에 미친 영향이 적지 않으므로 그 역할은 중요하다. 이 양자가 발생하고 꽃이 핀 지역, 즉 티그리스·유프라테스의 두 강 및 나일강의 유역지대는 두 문명의 쇠퇴 후 이들 양자의 유물이나 유적의 대부분을 사막이나 이토(泥土)의 퇴적 속에 매몰하여 보존하였으므로, 매우 많은 자료가 오늘날에 전해지고 있다. 각기 설형문자(楔形文字)와 상형문자(象形文字)를 만들어 내어 다수의 기록을 남겼으므로, 기술뿐만 아니라 종교나 과학의 발전도 다소 상세히 엿볼 수가 있다. 이 두 문명에다 주변의 여러 문명을 덧붙여서 일반적으로 오리엔트문명이라고 한다.

그리스·로마의 세계[편집]

Greece·Roma-世界

한때는 고대라고 하면, 주로 그리스·로마의 고전고대시대(古典古代時代)를 가리켰으나, 오늘날에서는 그 이전의 오리엔트 문명에 관한 지식이 풍부해져서, 그리스·로마에서 꽃핀 과학적 지식의 많은 요소가, 실은 그 이전 시대로부터 전해졌음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과학적 지식은 그리스 사람에게서 정비(整備)되고 체계화되어, 오늘날의 모든 과학의 직접적인 기초가 되기에 이르렀다. 또 로마 사람은 실용적인 기술을 대폭 발전시키기도 하였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양자는 오늘날의 서구문명의 출발점을 이루었다고 하겠다.

석기시대의 발자취[편집]

石器時代-

구석기시대의 문화

舊石器時代-文化

선사시대의 수십만년의 대부분은 구석기시대가 차지하고 있다. 이 기간에도 근소하나마 변천이 엿보인다. 이를 전·중·후의 3기로 나누어 보는 경우가 많으나, 전체적으로 보면 그 변화는 매우 적은 편이어서, 그 후의 인류문화의 급격한 발달과 비교하면, 이 수십만년간의 발걸음은 거의 변화가 없었다 하여도 좋을 정도이다. 그러나 지질학상의 제4기에 몇 번인가 발생한 빙하시대 등의 자연조건이 인류에 대하여 완만하면서도 적응력을 주어왔다고 하겠다.

구석기시대 전기(前期)의 유물로는, 극히 간단한 가공을 한 돌 조각인 악부(握斧)나 박편석기(剝片石器)가 주요한 것들이었다. 이는 부싯돌 등 떨어지기 쉬운 돌의 양면 또는 선단(先端)을 떨어뜨려 날카롭게 한 것으로, 짐승이나 어류 등의 처리에 썼을 것이다. 중기에 이르러서는 보다 공들여 세공(細工)한 박편(剝片)석기 및 첨두(尖頭)석기가 나타났다. 유물 중의 어떤 것은 빙하기의 동굴에서 발견되고 있다. 후기에 이르러서는 석기는 보다 정교하게 만들어져서, 칼붙이라고 할 수 있게 되었고 형태도 변화에 찼다. 그 밖에 뼈로 된 세공품이 나타났다. 뼈는 바늘·낚싯바늘·작살이나 창으로 가공되어 널리 이용되었다. 한편, 이시대에 이르자, 동굴회화나 조각 등의 예술적 작품이 나타났지만 그들 대부분은 뛰어난 예술적 감각을 지닌 것들이다. 알타미라, 라스코 등의 동굴벽화, 비렌도르프(지금의 오스트리아 국내)나 레스피그(지금의 프랑스 국내)에서 출토된 일련의 여성상(像)등이 그것이며, 트르와플레르의 동굴벽화 중의 주술사가 보이듯이 이것들은 많든 적든 이 시기의 인류의 종교적 의식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된다.

신석기시대의 발전[편집]

新石器時代-發展

지금부터 약 1만년-5000년 전경에 인류문화는 비약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그 원인의 하나는, 이 때까지 채집경제(採集經濟)에만 의존하고 있던 인류의 집단이 큰 강의 주변 같은 비옥한 지대에 정착하여 농경·목축을 하게 된 데에 있다고 생각된다. 이 시대에 이르러서는 석기는 다만 박리(剝離) 또는 바수는 제법(製法)으로부터 공들여 연마한 마제석기로 진보하였고, 또 어떤 종류의 종교적 의례(儀禮)와 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거석(巨石)건조물 그리고 다음에는 석조신전(石造神殿)·주거(住居)가 나타났다. 기술상의 발달은 현저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금속의 이용법이 발견되었고, 금석 병용시대에서 청동기 시대, 그리고 철기시대에로 이행하였다. 이것은 대체로 대문명(大文明)의 형성기와 일치하지만, 다음 항에서는 오리엔트의 경우를 개관한다.

오리엔트의 과학과 기술[편집]

Orient-科學-技術

메소포타미아의 과학과 기술[편집]

Mesopotamia-科學-技術오리엔트 최초의 농경민으로 정착한 것은 이란고원에서 메소포타미아의 주변으로 내려온 사람들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것을 다시 도시문명으로까지 발달시킨 것은 수메르인이었다. 전승(傳承) 및 고고학적 연구에 따르면 그들은 티그리스·유프라테스 두 강의 하구지대에 울루크를 비롯한 몇 개의 도시를 건설, 신전(성당)을 중심으로한 도시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들의 제1의 공헌은 문자를 안출하여 사용하는 데 이른 일이다. 문자에 관한 초기의 유물로서는, 울루크의 에안나 신전 빈터에서 발굴된 약 2000개의 기호가 있는데, 이들은 아직 그림문자의 잔영(殘影)을 남기고 있다. 그 후에는 점토판에다 일종의 칼로 조각을 하기에 이르렀고, 도형이 간략화되어 설형문자가 출현하였다. 이 문자체계는 수메르인 뒤에 메소포타미아를 지배한 앗시리아·바빌로니아인에게 계승되고, 이로써 다량의 기록이 후세에 남겨졌다. 수메르인은 많은 건조물을 구축하였지만, 그 중에서도 지구라트로서 알려지고 있는 거대한 신전은 『구약성서』의 바벨탑으로서 후대에 전해졌다.

앗시리아·바빌로니아인은 수메르인 문화의 대부분을 이어받아 발전시켰다. 수메르인의 종교체계에서는 천체(天體)에 대한 신앙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이것도 거의 그대로 계승되었고, 이와 관련해서 점성술이 성행하였다. 이런 일은 천문학 및 역학(曆學)의 발달을 촉진시켰으리라고 생각된다. 태양·태음(太陰)·행성(行星)의 위치 관측은 수시로 있었고, 그 기록 및 길조(吉兆) 판단의 많은 예가 설형문자의 문서로서 남아 있다. 그리고 거기서 얻은 지식은 역법(曆法)을 확립하기 위하여 활용되었다. 농경과의 관계에서 태음(太陰)의 영허(盈虛)의 주기가 달(月)의 단위가 되었고, 바빌론에서는 1년이 12개의 태음월(太陰月, 360일)로 규정되었으나 이것에서는 6년마다에 1개월의 부족이 생기므로 윤달(閏月)을 도입하여 조절하였다. 점성술사는 신월(新月)이 나오는 때, 즉 매달의 시작을 관측하였다고 한다. 1년이 12로 분할되고, 1일도 12로 나뉘어졌으며 또한 그 한 단위가 60으로 나뉘어졌다. 이리하여 시간 계산의 60진법이 생겼는데, 이는 오늘날에도 전해져 있다. 바빌로니아인이 발달시킨 수학의 체계 중에도 60진법이 쓰인 바 있는데, 이는 수메르 기원(起源)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대수(代數)·기하(幾何)의 두 분야에서 수학적 지식은 상당히 발전하였다. 그러나 의학 분야에서는 주술적(呪術的) 요소의 혼입(混入)이 엿보인다.

고대 이집트의 과학과 기술[편집]

古代 Egypt-科學-技術

나일강변에서 번영한 고대 이집트 문화의 어떤 것은 메소포타미아의 흐름을 취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예를 들면, 이집트의 상형문자는 인간이나 동식물이나 자연의 모습 등을 그대로 남기고 있어서, 설형문자와는 전혀 별개인 것같이 보이지만, 그 구조는 매우 닮고 있어서, 완전한 독창적인 산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태고 때의 문화교류의 증거가 있으므로, 힌트를 얻어서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집트는 외래의 여러 요소를 그대로 모방한 것이 아니라, 잘 소화하여 독자적인 하나의 큰 문명을 만들어 놓았다. 굉장한 노동력과 대단한 기술적 수준으로 건설된 피라미드나 스핑크스 등의 구축물의 대부분은, 통일왕조가 출현하던 기원 전 2800년경부터 그리 시간이 경과되지 않은 때 만들어진 것이며, 한번 얻어진 수준은 그 후 약 3천년에 걸쳐 그다지 변함도 없이 계속되었다는 것도 놀랄 일이다.

나일강은 '이집트의 보배'라고 한다. 나일강은 고대 이집트인의 생활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일강은 한해에 한차례 물이 불어 하곡(河谷) 일대에 홍수를 가져오기 때문에 1년의 주기는 예부터 알려져 있었던 듯하다. 역법(曆法)에 대하여 말하면, 기원전 2800년경부터 이미 달력이 사용되고 있었음이 알려져 있지만, 이는 메소포타미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태양력이 아니고 항성년이었던 것에 유의하여야 하겠다. 규준으로 뽑힌 것은, 나일강의 증수시에 해돋이와 함께 동녘 지평선에 나타나는 소티스성(시리우스)이었다. 그러나 이집트인은 365일을 1년으로 하였으므로 항성년(恒星年, 365.25强)과는 매년 조금씩 처지게 되어 1460년마다 일치하였다. 이것을 소티스주기(週期)라고 하는데, 그 일치는 옛적에는 기원전 4241년과 기원전 2781년에 발생하였으니까 그 중의 어느 때인가에 역법이 채용되었으리라고 생각된다.

이집트인은 성수를 10의 집단으로 나누는 정도의 일은 하고 있었지만, 관측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수학에 대하여 말하면, 계산법을 다룬 몇 개의 파피루스류가 남아 있다. 린드 파피루스는 가장 유명한 것인데, 여기에는 각종 문제와 해법(解法)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는 10진법이 쓰여졌는데

1위, 10위, 100위 등으로 각각 딴 기호가 쓰이고 있다. 전체적으로 가법(加法)원리의 우선(優先)이 인정되어, 현재 승법(乘法)에 의하여 하고 있는 계산도 가법으로 하고 있다. 예를 들면 '25×18'은 위의 표와 같이 하고 있다. 즉 25를 2개로 한 것이 50, 16을 더한 것은 400, 따라서 50과 400을 더해 450이라는 계산법을 보이고 있다. 그 밖에 분수 계산은 대체로 진보되어 있다. 또 원주율은 256/81(약 3.16)이라는 정밀도가 높은 수치(數値)를 알고 있었다.

의학 분야에서는 다소 고도로 발달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사후의 세계에 대한 신앙이 있었으므로, 육체를 보존하기 위한 미라 제작의 기술이 발달하였다. 따라서 체내 여러 기관에 관한 지식이 풍부했었다. 의학에 관한 많은 파피루스도 전해지고 있다. 외과수술을 다룬 에드윈 스미스 파피루스, 47종 정도의 질병을 다룬 에버스 파피루스 등이 그 주요한 것이다.

고대 지중해 세계[편집]

古代地中海世界

오리엔트 및 그 주변에는 상기한 2대 문명권(圈) 외에도 꽤 많은 민족이 있었으며, 각각 많건 적건 독자적인 문화를 갖고 있었다.

가령, 소아시아에는 옛날부터 여러 민족이 있었지만 후에 정착한 인도유럽어족(語族)인 히티(히타이트)인은 강대한 제국(帝國)을 형성하여 이집트의 왕조에 대항하였다. 그 강대해진 원인의 하나로는 소아시아에서 나는 철을 풍부하게 사용하였음을 들 수 있다. 또 지중해 동해안 지대를 근거지로 하여 지중해 연안 각지에 식민지 활동을 한 페니키아인은 이집트 문자 체계의 영향하에 기원전 1700년경에 동지중해안의 비블로스 근방에서 알파벳 문자를 만들어냈다. 이것이 그리스인에게 전해지고 모음 표기법이 추가되어서 오늘날의 각종 알파벳 문자 체계의 기초가 되었음은 잘 알려져 있다.

그리스의 과학[편집]

Greece-科學

기원전 7세기경, 그리스의 식민지 이오니아 지방에 최초의 '자연과학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첫째, 밀레토스의 탈레스, 그에 계속되는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 헤라클레이토스 등이다. 그들은 자연을 신의 속박으로부터 해방하고, 만물을 '아르케(原質, 물질의 의미에서의 근원)'로부터 체계적으로 논하려고 시도하였다. 자기의 체험, 경험적 지식 또는 생활 기술 등으로부터 원질을 설정하고, 이에 의해서 만물의 생성소멸(消滅)과 우주의 창생(創生)과 자연의 불변성과 변화성을 통일적으로 파악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탈레스는 물, 아낙시만드로스는 무한한 것(토 아페이론), 아낙시메네스는 공기 아이레, 그리고 헤라클레이토스는 불을 택하였다.

페르시아의 침입으로 이오니아의 식민도시가 쇠퇴하였지만, 그 자연학은 남이탈리아의 피타고라스 학파에 계승되었다. 피타고라스를 시조로 하는 이 종교적 교단(敎團)은 물·공기와 같은 구체적인 것이 아닌 '수(數)'를 가지고 만물의 근원으로 삼았으며, 그 조화성(調和性)을 강조하였다. 수와 수의 조화의 중시는 자연의 도처에 있는 수학적인 관계의 파악으로 이끌었고, 그것을 찾기 위한 실험적 성격을 이 학파에게 주었다. 이로써 피타고라스학파는 결실 많은 업적을 올렸다.

한편, 관찰·실험이라고 하는 감성(感性)에 의한 진리의 발견법을 부정하고, 순수하게 이성에 의해서만 진리를 포착할 수 있다고 하는 엘레아학파가 나타났다. 일체의 변화의 실재성(實在性)을 부정한 이 학파는 파르메니데스에 의하여 창시되고, 제논의 교묘한 패러독스에 의해서 변화·운동·연속 등의 개념의 재검토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엘레아학파의 출현으로 위기에 빠진 이오니아의 학문이 지니는 유물적·반(反) 종교적·과학적인 태도는 아낙사고라스의 스페르마타(씨앗)와 누스(nous)를 거쳐,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으로서 꽃피었다. 그의 원자론은 분할 불가능·불가입적(不可入的)인 입자(粒子, 原子)와 허공(虛空, 眞空)을 설정함으로써 그리스 과학의 하나의 정점을 보여줬다. 그러나 사고(思考)의 산물이었던 원자론은 실험이나 실험기구(器具), 계산 같은 것은 없고, 더욱이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의한 인심의 황폐 등으로 아테네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도리어 영혼의 철학을 말하는 반(反)

원자론적인 소크라테스(Socrates,

BC 470/69-BC 399), 플라톤(Platon, BC 427-347) 등의 철학이 주류를 차지하게 되었다.

플라톤이 이데아의 세계만을 진실의 세계라고 규정한 데 대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의 변화, 운동을 형상(形相)과의 관계에서 포착, 솔직한 태도로 자연에 접하였다. 자연은 그에 의하여 확실하게 과학적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적 연구의 업적은 그야말로 그리스 과학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그가 미친 영향은 매우 큰 것이었으며, 물리학에서는 17세기, 생물·화학은 실로 18세기에까지 미치었다.

이오니아 정신의 가장 빛난 것으로서 의학을 빼놓을 수 없다. 신의 힘에 의존하려는 미신 의학, 이론이 선행(先行)하는 철학적 의학에 반대하고 어디까지나 실증적인 의학을 주장한 사람이 히포크라테스였다. 히포크라테스 앞에서는 저 유명한 데모크리토스조차도 빛을 잃었다.

최초의 과학자들[편집]

最初-科學者-

코발트색의 바다 에게해에 임하고 있는 이오니아 지방의 그리스 식민도시 밀레토스에 역사상 최초로 자연학자 탈레스가 나타났다.

탈레스는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혹은 그리스 지방으로 젊었을 때부터 배로 여행한 무역상인이었다. 그는 불변성·불멸성과 거기에 대응하는 변화·운동·생성소멸이라고 하는 상반(相反)된 2면을 지니는 자연을 아르케(arkhe, 原質)로부터 통일적으로 파악하고자 시도하여, 그것을 물이라고 생각하였다. 에게해의 항해, 나일강의 범람 등의 실생활에서의 체험, 혹은 물의 3태변화(三態變化)에 대한 지식 등이 물로 하여금 만물의 근원이라고 생각케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실험·관측의 장치나 수학적 지식이 불충분한 시대였기 때문에 아르케는 철학적·사유적(思惟的)으로 결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에 따르면 이 대지(大地)는 원반꼴을 하고 있고, 그것이 아르케인 물 위에 떠있고 하늘도 또한 물로 되었으며, 태양·달은 작열된 수증기로서 동쪽에서부터 서쪽으로 이동한다. 바빌로니아에는 물을 우주 창조의 근원으로 하는 신화가 있어, 탈레스가 그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신화의 우주 창조주 마르두크와 같은 초자연적인 힘을 배제하고, 자연 그 자체 속에서 원인을 찾아내려고 한 것이 탈레스였다. 탈레스가 자연학(자연과학)의 조상이라고 불리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탈레스에 의하여 내디뎌진 제1보는, 그의 제자 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ros, BC 610경-BC 547경)에 의하여 더욱 심화되었다. 그는 아르케를 다만 1종의 물에 한정하지 않고, 자연의 다양성·변화성의 통일로서 '무한한 것'이라고 하는 불특정한 것으로 하였다. 이것으 스스로의 힘으로 '한(寒)'과 '난(暖)'으로 나누고, 다시 불(火)·공기·물(水)·흙(土)의 4형태을 취하여, 흙을 중심으로 해서 수·기·화가 둘러싸는 우주가 생기는 것이었다. 중심의 높이와 직경의 비가 1대 3인 원주꼴의 대지가 있고, 하늘을 도는 천체는 원주꼴의 기공(氣孔)을 통해서 보는 하늘에 불과하다.

탈레스는 대지(大地)는 물에 떠받쳐져 있다고 말하지만 그 물은 도대체 무엇에 떠받쳐져 있을까. 아낙시만드로스는, 대지는 모든 것에서부터 등거리에 있으니까 낙하하지 않는다고 대답하였다. 생물의 발생도 역시 신비적인 것은 아니고, 무생물로부터 동물이 자연 속에서부터 생겼다고 하였다.

아낙시만드로스의 제자 아낙시메네스(Anaximenes, BC 585-BC 528경)는 다시 이것을 확대시켰다. 그는 공기가 희박해지면 불이 되고 짙어지면 바람이 되고 구름이 되며 더 짙어지면 물이 되고 흙과 돌로 된다고 하였다. 그것은 벌린 입에서부터 나오는 입김은 뜨겁고, 오므린 입에서 나오는 입김은 차가운 것으로부터 설명할 수 있다고 하였다. 탈레스들은 아르케로부터 다양한 것이 어떻게 해서 만들어지는가를 말하지 않았던 것과는 달리 희박화·농후화라고 하는 과정을 내세움으로써 양적 변화로부터 질적 변화로 가는 것에 대한 설명을 하였다.

같은 무렵, 페르시아군의 침입에 의해 초토화한 그리스인의 식민 도시 에페소스에, 아르케로서 '불'을 선정한 헤라클레이토스(Heracleitos, BC 540경-BC 480경)가 있었다. 그는 자연 및 기술과 생활에서의 불의 힘을 발견하고, 자연은 불에서부터 생겨나고 불로 돌아가는 그 과정을 설명함에 있어서 불과 만물과의 '대당교환(對當交換)'이라든가 '대립물의 긴장'과 같은 개념을 적용하고 설명하였다.

탈레스[편집]

Thales(BC 640경-BC 546경)

그리스의 철학자. 이오니아 지방의 상업도시인 밀레토스 태생으로 상업, 정치활동을 한 후에 자연의 탐구에 종사하였다. 기원전 585년 5월 28일의 일식(日蝕)을 예언하기도 하였다. 피라미드의 높이를 측정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자연을 아르케(原質)에서부터 체계적으로 논하려고 한 최초의 사람이다.

남이탈리아의 과학자들[편집]

南Italia-科學者-

이오니아 자연학자의 아르케의 추구(追求)는 남이탈리아의 피타고라스학파·엘레아학파 등에 의해서 추상적 사고로,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세계로 유도되었다.

페르시아 침입의 전란을 피하여 사모스의 피타고라스는 남이탈리아의 크로톤으로 가서 피타고라스 교단을 설립하였다. 여기에서는 영혼의 불멸을 믿고 그 영혼정화(淨化)를 위해 수학을 사용하였다. 종교가 지니는 탈속(脫俗)과 수학이 지니는 추상성과가 결부된 것이다. 그들은 수와 그 조화(調和)를 만물의 근원이라고 보았다. 하늘에 떠 있는 별의 수와 그 별들이 그리는 도형(圖形)의 조화, 현(絃)의 길이와 음계와의 상관관계 등에서 그 근거를 발견하였겠지만, 여기에 자연의 수량적 연구의 확실한 제1보가 디뎌졌던 것이다.

피타고라스학파가 다루는 수량은 유리량(有理量, 整數라든가 分數)이었는데 유명한 피타고라스의 정리의 발견과 그에 따르는 연구 도상에서 무리량(無理量)의 벽에 부딪쳤다. 그러나 유리수로 쌓아올린 자기의 철학과의 모순에 빠져, 기하학적 대수(代數)라고 하는 그리스 수학의 한 특질을 이루는 분야의 길을 열었다.

피타고라스학파는 음계의 연구에서 보게 되듯이, 실험·관찰·생활체험을 중시하였고, 알크 마이온의 눈·귀 등의 해부, 필롤라오스의 지동설(地動說)의 제창(提唱) 등 업적을 낳았다. 반면 이와 같은 과학적인 태도가 수와 그 조화(調和)라고 하는 생각을 통과하게 함으로써 종교가 지니는 신비성과 기묘한 결합을 하게 되고, 이것이 피타고라스학파의 특징을 이루게 되었다.

실험·관찰의 중시(重視), 즉 감각에 의한 자연 탐구를 하는 것과는 반대로 이것을 정면으로부터 부정하고, 다만 이성(理性) 즉 감각으로부터 분리시킨 '순수한 이성'에 의하여서만, 진리 발견이 가능하다고 하는 것이 파르메니데스, 제논 등의 엘레아학파이다.

파르메니데스에 의하면, 자연에서의 운동 변화는 실재(實在)하지 않는다. 어떤 것은 불생불멸(不生不滅), 전혀 같은 모양이며 불가분(不可分), 부동(不動)이며 무종(無終)인 '하나의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는 허공(虛空), 진공도 있을 수 없다. 허공은 텅빈 것이며, 있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피타고라스학파에 마주 놓은 이 생각은 파르메니데스의 제자 제논(BC 460경의 사람)에 의해서 유명한 역설로서 제출되었다. "갑이 A에서부터 B로 움직이고자 하면 그 가운뎃점 C를 통과하여야 한다. C에 이르기 위해서는 AC의 가운뎃점 D를……와 같이, 갑은 한없이 많은 점을 통과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갑은 B에 갈 수 없고, 따라서 운동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또 "아킬레우스가 거북을 뒤쫓는다고 한다. 아킬레우스가 맨처음 거북이 출발한 점에 왔을 때, 거북은 조금 전진하고 있다. 또 아킬레우스가 이 점까지 전진하면 거북도 역시 약간 전진하고 있다. 그리하여 아킬레우스는 거북에게 따라붙을 수가 없다" "날고 있는 화살은 정지(靜止)하고 있다. 화살이 일정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 때에는 정지하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날고 있는 화살은 각 시각에 일정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화살은 멎어 있다"와 같은 역설을 말하여 운동·변화는 존재하지 않음을 이해하기 쉬운 형태로 제출, 피타고라스학파가 선분(線分)은 크기를 지닌 점의 집합이라고 하는 생각들에 반론하였다.

이 엘레아학파에 대하여 "너의 모든 감각을 가지고 될 수 있는 한 명백히 관찰하라"라고 한 엠페도클레스가 있다. 실험에 의해서 허공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었던 공기, 파르메니데스에 의하면 '없는 것'인 공기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그는 불(火)·공기·물(水)·흙(土)의 4종을 만물의 원소라고 생각하였다. 탈레스에서 비롯된 아르케는, 여기서 많은 종류를 지니기에 이르렀다. 이 4원소는 서로 대립함과 동시에 여러 모양의 비례로 혼합·분리함으로서 모든 것이 생성하고 소멸한다고 생각하였다. 그 혼합과 분리와의 원동력·에너지적인 것은, 4원소에 선천적으로 갖추어져 있는 '사랑'과 '미움'의 작용에 의하여 우주 창생과 생물의 발생과 자연의 변화와 다양성 같은 것을 설명하였다. 피타고라스파의 실험·관찰이라고 하는 감성에 의한 인식과 그에 마주 놓는 엘레아학파의 이성(理性)에 의한 인식을 발전 결합시킨 엠페도클레스의 원자론이라든가 의학에 큰 영향을 준 자연철학이 생겼다.

피타고라스[편집]

Pythagoras (BC 582경-BC 497경)

그리스의 수학자·철학자. 이오니아의 사모스섬에서 태어나 널리 여행을 하며 면학에 정진하였으며, 기원전 530년경 크로톤으로 옮겨가 하나의 종교단체를 만들었다. 이 교단은 영혼불멸을 믿고, 영혼의 정화에 힘쓰되 피타고라스의 사망 후에도 오래 계속되었다. 피타고라스는 반대세력에 의해서 크로톤에서 쫓겨나, 메타폰치온에서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 교단에서는 일체의 재단이 공유(共有)임과 동일하게, 수학적 발견도 교단의 것으로서, 외부에는 비밀로 되어 있었다.

피타고라스 학파의 수학의 연구는, 수론(數論) 외에 기하학에서는 3각형의 내각의 합이 2직각인 것의 증명, 피타고라스의 정리의 발견으로 유명하며, 이는 무리량이라든가 기하학적 대수에로 발전하였다. 또 10이 완전한 수인 것과 같이 구(球)는 완전한 입체라고 생각, 대지나 전체는 구라고 하였다.

원자론의 탄생[편집]

原子論-誕生

그리스의 중심세력으로서 페르시아에 대립한 아테네는 기원전 490년에는 마라톤에서, 480년에는 살라미스의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어 영광의 시대로 들어섰다. 이 아테네의 지도자 페리클레스는 친구인 아낙시메네스의 문중사람 아낙사고라스(Anaxagoras, BC 500경-BC 428경)를 아테네로 초청하였다.

아낙사고라스는 최후에는 태양은 불타는 돌이라고 논한 데에서 무신론자의 혐의로 아테네로부터 추방된 사실이 보여주듯이, 초자연적인 것을 믿지 않는 순수한 이오니아 자연학자였다. 아테네에서는 이미 철학과 기술과의 상호 관련은 단절되려 하고 있었다. 기술적인 아날로지에 의한 이오니아의 자연학은 쇠퇴의 길을 걷고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아낙사고라스는 이오니아의 자연학의 정통한 계승자로서 군림한 거봉이었다.

아낙사고라스는 자연계를 만드는 근원을 눈에 보이지 않는 무수한 입자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이를 스페르마타(씨앗)라고 하였다. 스페르마타의 실재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속이 빈 가죽부대 속에 발을 넣고, 입을 졸라매고 부대를 누르면, 발은 통증을 느낀다. 무엇인가가(공기) 들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흰 그림물감 속에 검은 그림물감을 몇방울 넣어도 여전히 검은 물감에는 변함이 없다. 공기든 흰 그림물감이든 우리들의 감각으로는 느낄 수 없는 것이나 실재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와 같이 스페르마타도 또한 감성의 한계 밖에 있는 것으로서 그것은 이성에 의해서만 파악된다고 한다.

스페르마타는 생성도 소멸도 하지 않는 불변 입자이며, 더욱이 "어떤 것도 하나로서 생기지도 않고, 소멸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있는 것들로부터 혼합되어지기도 하고 분리되어지기도 하는 것이니까. 생성이라고 말하는 대신에 혼합을, 소멸이라고 말하는 대신에 분리라는 말을 쓰는 편이 옳겠다"라고 말한다. 그들 입자는 자연이 지니고 있는 질의 수만큼 존재하며, "일체의 것은 일체의 것 중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과일을 먹고, 고기·피·뼈 등을 얻는다. 그것은 과일 속에 그런 것이 미리 다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온(溫)과 냉(冷)도 또한 동시에, 더욱이 연속해서 존재하는 것이며, 온의 스페르마타가 냉의 그것보다 수적으로 우세할 때, 감각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온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스페르마타 그 자신은 운동도 변화도 하지 않는다. 스페르마타를 혼합·분리시키는 것으로 누스(知性, 精神)를 생각한다. "무한하고 자주적인 것이어서 어느 것과도 혼합되지 않고, 다만 홀로 자립적이다." 누스는 '희박, 순수한 것'이었다. 스페르마타와 누스에 의하여, 이 만물·우주도 생물도 창조된다고 생각한다.

이 아낙사고라스의 스페르마타와 누스를 더욱 진화시킨 것이 아부델라의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이다. 데모크리토스는 스승 레우키포스의 착상을 계승하여, 만물의 근원은 눈에 보이지 않는 무수한 분할 불가능한 입자(원자)라고 하였다.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는 아낙사고라스의 스페르마타와 같은 "일체 속에 일체의 부분이 있다"고 하는 질적으로 서로 다른 입자가 아니고, 꼴(形), 순서, 위치, 크기가 서로 다른 입자였다. 원자의 결합·분리에 의해서 생성과 소멸이, 순서에 따라 질적 변화가 설명되었다. 그리고 그는 원자의 변화, 운동하는 장소로서의 허공(케논, 진공)을 생각하여 파르메니데스의 "없는 것은 없다"에 반하여 "무(無)는 유(有)와 동일하게 존재한다"고 말하고, 없는 것도 있다고 하는 입장을 취하고, "진실로 존재하는 것은 원자와 공허이다"라고 한다. 원자 그 자체가 허공을 도입함으로써 운동성을 갖게 된다. 이 원자와 허공의 생각에 의해 우주, 생물, 생명,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창조되고, 신과 같은 초자연적인 것, 혹은 엠페도클레스의 사랑과 미움, 아낙사고라스의 누스와 같은 것도 배제된다.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는 스스로의 힘으로 운동하고 만물은 필연적으로 창조 소멸되나, 그것은 원자의 결합 분리다. 실재(實在)로 간주되는 것도 원자의 일시적인 결합에 불과하며, 인간의 감각, 즉 촉각, 시각, 후각 등은 관습적인 것으로서, 진실로 존재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원자와 허공뿐인 것이며, 원자와 허공은 감성이 아니라 이성에 의하여서만 파악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또 그는 원자론을 인간의 영혼의 문제에까지 적용하고, 영혼을 나타내는 화적(火的) 원자를 생각하고, 영혼의 활동을 사고(思考), 노여움, 욕망으로 분류하여, 각각 뇌, 심장, 간장에서의 화적 원자의 운동이라고 말하였다.

이리하여 데모크리토스에 이르러서 이오니아 사상은 최고(最高)의 차원으로까지 높여졌다. 그러나 이 원자론은 어디까지나 사고의 산물·가설이지 실험·관찰이나 계산에 기초를 둔 것은 아니었다. 그리스의 전란으로 인하여 아테네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과학을 싫어하는 소크라테스, 반(反) 원자론자이며 그의 저서를 불태우려고 했다고 전해지는 플라톤의 출현 등으로 에피쿠로스, 스트라톤, 루크레티우스 등 외는 거의 다루는 일이 없었다.

데모크리토스[편집]

Demokritos (BC 460경-BC 370경)고대 원자론의 확립자. 트라키아 지방의 압데라 태생으로서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지방, 아테네 등에 연구 여행을 하였다. 귀국 후 활발한 저작활동을 하여,저작은 60종 이상에 이르렀다고 하지만 현재는 얼마 안 되는 단편(斷片)밖에 남아 있지 않다. 자연철학, 수학, 의학, 생물학, 정치학, 음악 등 다방면에 걸친 박식가로서, 그 때문에 '지혜(소피아)'라고 불리었다. 히포크라테스와 친교가 있었다고 한다. 기성(氣性) 때문인지 영혼의 쾌활을 목적으로 한 철학을 말했기 때문인지 '웃는 철학자'라고도 불렸다.

아테네의 자연과학자[편집]

Athene-自然科學者

기원전 5세기 중엽 무렵 아크로폴리스에 우뚝 선 파르테논처럼 아테네는 그리스 세계의 중심이 되었다. 각지에서부터 학자가 모여들어 그리스 문명의 최성기를 맞이하기에 이르렀다. 그 시대는 또 그리스의 페르시아에 대한 승리,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또한 역사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동란·전환기이기도 하였다.

이오니아적인 교양을 몸에 지닌 소피스트(지혜 있는 사람)라고 불리는 직업적 교사가 있었다. 그들의 대부분은 궤변을 늘어놓는 변설(辯舌)의 무리였지만, 일반 교양으로서 천문학·수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 피타고라스의 계통을 따르는 소피스트를 괴롭히는 유명한 3문제가 있었다.

(1) 임의각(任意角)의 3등분, (2) 원과 같은 면적의 정방형을 만드는 일, (3) 입방체의 2배의 체적을 지니는 입방체를 만드는 일이다. 이것들이 자와 컴퍼스만으로는 해답 불능인 것이 증명된 것은 훨씬 뒤인 19세기였지만, 이로부터 기하학의, 그리고 기하학적 대수학의, 그리고 또 마침내는 유클리드로 결실하는 수확이 준비되었다.

각의 3등분에 관하여서는 박식다예(多藝)한 엘리스의 히피아스(Hippias, BC 5세기 후반), 원의 정방형화(正方形化)에 관하여서는 최초의 '수학자'이자 직업적 교육자인 키오스의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

BC

430년경), 거기에다

아테네의 안티폰(Anti-phon, BC 430년경), 헤라클레이아의 브륙손, 입방체의 배적(倍積)에서는 키오스의 히포크라테스, 그리고 정치가이고 군인이기도 하며 또 뛰어난 기술자로서 저명한 아르쿠타스(Arcutas, BC 400년경) 등이 활약하였다.

한편, 이 시대에 이르러서는 지적집적(知的集積)의 증대가 학문의 분화를 가져오고, 또 자연을 근저로 하는 이오니아계(系)의 자연학에 맞서서 인간 그 자체의 연구에 관심을 표시하는 철학이 생겨났다. 소크라테스의 영혼의 철학, 플라톤의 초감각적인 이데아의 세계를 말하는 철학이 그것이다.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심화(深化)시킨 플라톤은 이데아 혹은 형상(에이도스)에만 완전한 실재(實在)를 부여했고, 감각에 의하여 얻어지는 세계는 이 이데아 혹은 에이도스의 영상(影像) 또는 모방에 불과하다고 했다. 영혼의 감성적 부분에 의해 포착되는 현실적 세계보다는 이성적 부분에 의하여서만 포착할 수 있는 이데아의 세계가 참된 세계였다.

이 두 개의 세계의, 말하자면 교량적 역할을 담당하는 수학(기하학)은 가장 중요한 학문으로 간주되었다. 아카데메이아의 문에 걸려 있었다고 하는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이 문을 들어서지 말라"고 한 것이야말로 플라톤 이데아의 철학적 상징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려진 기하학적 도형이 불완전하더라도, 머리 속에서는 이성에 의해서 완전한 도형 이데아도(圖)의 형태를 생각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하학만큼 영혼을 순화(純化)시키는 것은 없다고, 그는 그의 저서의 여기 저기에서 기하학에 언급하였다.

그러나 플라톤의 철학은 실용이나 기술과의 상관적인 결합은 거부하고 있다. 그는 그가 꿈꾸고 있었던 『이상국』에서는 산수·기하·천문·음악·변증법 등 5과목은 꼭 배워야 한다고 말하였는데, 어느 것이나 이성 그 자체, 영혼 그 자체를 이데아의 세계에로 인도하기 위해서였다. 가령 고대에 있어서 천문학은 농업, 역법(曆法), 항해 혹은 제사의 행사 등에 빠뜨릴 수 없는 가장 필요도가 높은 학문이었다. 플라톤은, 하늘의 운동은 우리가 볼 수 있는 것 중에서는 가장 완전에 가까운 것이지만, 등속원운동을 하는 하늘의 이데아와 비교하면, 문제도 안 된다고 했다. 따라서 그는 당시 그리스 각지에 있었던 관측대 및 그 천체 관측자를 눈으로 본 것을 하늘의 참 모습이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다고 얕보았었다.

플라톤의 감성에 관한 것에 대해서의 부정적인 태도 또는 낮은 평가는, 실증적 과학의 발달을 가로막는 역할을 다하였다고도 볼 수 있다. 5개의 정다면체(正 4, 6, 8, 12, 20面體)의 발견을 출발점으로 하는 기하학, 수학의 응용부분을 생각하였을 때의 천문학에 대한 공헌은 적지 않으나, 저서 『티마이오스』에서는 우주 창조주 데미우르고스를 도입한 우주 생성의 이야기를 말하고 이데아의 세계, 즉 있을 수 있는 세계에 의해 억지로 설명하려고 했던 것 같은 것은 틀림없는 후퇴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반면, 실험·관측·경험 등이 본질적으로 지니는 불확실성(특히 당시에는)을 공격하고, 원칙·개념·정의(定義)·증명 등의 추상적 사고라는 무기를 과학편에 부여한 것도 이 철학이었다.

이데아의 철학을 비판하고 이데아의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생각한 개개의 사물이야말로 실체(實體)라고 하여, 자연학의 일대 체계(一大體系)를 쌓아올린 것이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질료(質料, 휠레)와 형상(形相, 에이도스)간의 상호작용이라는 생각으로 자연을 해명하려고 하였다. 질료는 아직 형태를 갖추지 못한 원소재(原素材)로서 이것이 형상에 의해서 형태가 주어짐으로써 비로소 구체적인 사물이 되어서 존재하게 된다. 이리하여 그는 관찰이나 경험을 플라톤과는 거꾸로 중요시하게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는 모든 분야에 이르고 있지만, 자연과학적인 연구에서는 특히 생물학이 뛰어났다. 그는 500종 이상의 동물을 관찰·기록하고 분류하였다. 『동물지(動物誌)』 9권, 『동물 부분론』 4권, 『동물 발생론』 5권 등을 저술하고, 형상과 질료의 철학으로 그 이론붙임을 하였다. 암컷은 재료 즉 질료를, 수컷은 계획 즉 형상을 제공하고, 생물의 성장에 따라서 형상이 완성하고 더욱이 그것은 "자연은 불필요한 일은 하지 않는다"라 하는 관점에 입각한 해부학적 구조, 발생학적인 기관 발달의 연구를 했다.

그의 날카로운 관찰은, 고래나 평활(平滑) 상어의 태생(胎生)발견 등을 낳고, 꿀벌의 생태나 닭의 부화 등의 정밀한 기록을 남겼다. 이와 같은 성과에 입각하여 생물의 분류를 하였고, 또 생물의 종(種)은 식물에서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완전도를 늘린다고 하고 생물의 11개의 계급을 만들었다. 이것이 '자연의 계단'이라는 생각이며, 완전도는 발생학적인 기준에 의거한 것이었다.

생물학에 이어서 그는 물리학·천문학 등의 분야로 고찰을 진행시켰는데, 경험·관찰 혹은 생산 기술과의 관련은 생물학과 비교하면 훨씬 적었다. 따라서 그 성과도 역시 생물학에 비해서 뒤떨어져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가 파급시킨 영향은 매우 크며, 근대과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적 학문의 부정(否定)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도 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는 물질은 연속적이며, 허공(진공)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반(反)데모크리토스적 입장을 취하고, 모든 땅 위의 물질은 흙·물·공기·불의 4원소로 되었으며, 이것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참된 원소인 제1질료가 열냉·건·습의 4개 기본적인 형상 2개씩을 얻어서 생성된 것이다.

제1질료가 열·습을 얻어서 기(氣)로, 건·열로 불, 건·냉으로 흙, 습·냉으로 물이 된다. 이 4원소는 그에 의하면 단일체이며, 4성질은 분리시킬 수 있으므로 상호의 변환은 가능해진다. 이 이론이 연금술(鍊金術)을 장기에 걸쳐서 밑받침하였던 것이다. 천계(天界)를 만드는 원소는 아이테르로서, 땅 위와는 다르듯이 지상과 천체의 운동도 서로 다르다. 항성과 행성은 지구를 중심으로 하여 계속해서 등속원운동을 하고 있다. 원은 완전한 도형이며, 원운동은 완전하기 때문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지상의 물체가 갖는 운동은 본질적으로 상승이거나 낙하, 즉 직선운동이라고 보고, 천체와 지구의 운동을 마주 놓았다. 지상의 물리학을 천계에 적용시킬 순 없는 것이지만 이 생각은 결국 17세기 뉴튼에 의해 뒤집힐 때까지는 정통적(正統的) 학리로서 인정되고 있었다. 또 그의 역학에서는 자유 낙하의 속도는 무게에 비례하고 공기의 저항에 반비례하는, 즉 무거운 것일수록 빨리 낙하한다는 견해를 취하지만, 이것이 갈릴레이에 의해서 부정된 사실은 유명하다.

아리스토텔레스[편집]

Aristoteles (BC 384-BC 322)

그리스의 철학자. 칼키디케의 스타게이로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마케도니아왕의 시의(侍醫). 17세 때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에 입학, 20년간이나 그 곳에 머물러 있으며 아카데메이아의 심장이라고 불리었다. 플라톤의 사후 소아시아의 앗소스지방으로 갔고 그 후 레스보스섬으로 옮겨가 그 곳에서 생물학의 연구를 하였다. 이 곳에서 이룬 그의 성과가 그의 생물학의 저작을 낳았다고 하겠다. 이윽고 마케도니아 왕실에 초빙되어, 알렉산드로스(나중의 대왕)의 교육 담당자가 되었다. 마케도니아의 비호하에 많은 자료를 모으고 뤼케이온이라는 학원을 열었다. 가로숫길을 걸으면서 강의를 했으므로 이 학파는 페리파토스파(소요학파)라 불렸다. 학업의 중점은 아카데메이아의 철학이라든가 순수수학이 아니라, 생물학을 비롯한 과학의 연구라든가 가르침이었다. 알렉산드로스의 사망 후, 아테네의 반(反) 마케도니아파로부터 무신론의 혐의로 고소되었으므로 칼키스로 도피하였다가 그 곳에서 사망하였다.

의학의 탄생[편집]

醫學-誕生

의(醫)는 인류와 더불어 있으며, 어느 나라에도 의신(醫神)이 있다. 그리스에서 가장 오랜 의신은 아폴론인데, 그의 아들 반신반인(半身半人)인 아스클레피오스는 의사로서 존경받고 신으로 숭앙되었다. 아스클레피오스를 신으로 모셔 받드는 신전이 에피다울루스, 페르가몬, 코스 등에 있으며, 모두 아름다운 보양지로서는 가장 적합한 곳이었다. 이 신전의 제관(祭官)들은 객지에서 모여드는 다수의 병자들에게 안수기도를 해주기도 하고 신의 계시라고 하며 사혈(瀉血)이나 약을 지어 주기도 하였다.

종교와 결부되고 있는 신전의학(神殿醫學)을 합리적인 경험을 중요시하는 의학에로 탈피시킨 것이 예부터 의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히포크라테스를 비롯한 의사들이었다.

히포크라테스가 활약한 기원전 5세기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또는 데모크리토스들과 시대를 같이 하고 있다. 의학은 피타고라스학파, 그 흐름을 쫓는 엠페도클레스의 철학적인 의학, 올림픽 체육 지도자의 의학, 또 쇠퇴하고 있다고는 하되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니는 신전의학이 있었다. 아버지에게서부터 코스파의 의술을 배우고 각지를 유력(遊歷)함으로써 많은 경험을 몸에 쌓았다.

『히포크라테스 전집』은 기원전 3세기에 알렉산드리아의 학자가 펴낸 것인데, 이로써 히포크라테스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 의학 즉 히포크라테스 학파의 모습을 충분히 엿볼 수가 있다.

히포크라테스(학파)의 의학은 종교적(宗敎的)·미신적(迷信的)인 의학을 배척(排斥)하였다. 당시 신성병(神聖病)이라고 불리고 있었던 간질병에 대하여, 그것은 결코 신성하지는 않고, 신체에 드나드는 여러 가지의 것, 또는 한랭(寒冷), 태양, 바람의 변화 등 자연적인 원인이 있으며 보통의 질병과 동일하게 자연적 현상이라고 설명하였다. 병자는 신의 벌을 받은 인간이 아니라고 한 것이다.

또 병의 원인을 피타고라스 학파나 엠페도클레스처럼 철학적으로 찾는 것에 대해서도 반대하고, 경험적 의학이야말로 옛날부터 내려오고 있는 '오래된 의술'이며, 정통적 의학이라 하였다. 의학을 이론적인 것이라고 하기보다는 기술시(技術視)했던 것이다. 그렇기는 했으되 그들도 나름으로의 이론을 이룩해 내고 있었다. 질병의 원인은 혈액, 점액(粘液), 황담즙(黃膽汁), 흑담즙 등 4종류의 체액의 조화(調和)가 자연적 원인에 의해서 흐트러질 때 생기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질병에는 여러 가지 모양의 종류가 있으며, 질병의 경과도 역시 각양각색이다. 따라서 카르테를 만들어, 병세를 상세히 관찰하는 것이었다. 사람의 신체에는 건강한 상태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자연의 힘(피지스)이 있으며, 의사의 역할은 자연의 힘을 방해하고 있는 장애물을 양생(養生)에 의해서 제거하는 일이다. 앓을 때에는 질병과 자연의 힘이 싸우는 분리일(分利日)이 있는데, 이 때 후자가 이기면 질병 물질은 오줌, 똥, 땀, 고름 등의 형태로 체외로 배출되고 체액의 조화가 원래의 상태대로 돌아감으로써 건강이 회복되게 된다.

그들은 또 질병을 일으키는 환경, 풍토, 기후, 생활 등에 주의하여 의학을 본업으로 하는 자는 우선 공기와 물과 장소의 연구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다. 이것은 자연 치유력을 충분히 발휘케 하는 수단이며, 또 치료법은 알맞는 식사, 신선한 공기, 충분한 휴식과 수면, 게다가 사혈(瀉血), 약은 하제(下劑)와 토약(吐藥), 술 등 간단한 것이었다. 의학적 지식이 불충분한 때였던 관계로 자연 치유야말로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히포크라테스의 의학은 반종교적, 반미신적, 반사변적이며, 낡아빠진 테크네인 의술을 실증적, 합리적, 이지적인 차원으로 끌어올린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피타고라스학파의 알루크마이온과 같은 해부학을 숭상하지는 않았다. 질병과 장기(臟器)와의 관계에는 아직 생각이 미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또 '히포크라테스의 맹세'로, 의사된 사람이 지켜야 할 도덕을 말하였다. 스승과 그 가족에 대한 경제적·교육적 원조라든가 치료에 전력을 다하여 의술을 악용치 않고, 남녀·노예·자유인과를 구별하지 않을 것, 혹은 환자의 비밀을 지킬 것 등을 맹세케 한 것이다. 지금까지도 전해 내려오는 명언으로 삼고 있다.

히포크라테스[편집]

Hippokrates (BC 460경-BC 376경)

의학의 아버지로 존경되는 가장 위대한 임상의의 한사람.

아스클레피오스의 후예라고 일컫는 아스클레피아다이의 1족의 출신이라고 한다. 아버지인 헤라클리데스도 의사이다. 그리스 각지를 돌아 의술 연마에 힘썼다. 아테네에서는 페스트의 유행을 막는 데 공이 있었다 한다. 방랑의 의사로서 일생을 지냈는데 아테네와 코스시는 비교적 오래 살던 곳이다. 제자가 많았고, 히포크라테스 학파가 생겼다. 기원전 376년에 라릿사에서 사망하였다고 하는데 104세 또는 109세까지 살았다고도 한다. 기원 전 3세기에 필사(筆寫)·편집된 『히포크라테스 전집』 약 70권이 잔존하는데, 기원전 5세기부터 기원전 3세기까지의 의학을 알 수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양학자(洋學者)들은 의조(醫祚)로서 숭배되고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과학과 기술[편집]

Alexandria-科學-技術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사후, 이집트는 대왕의 장군 중의 한사람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가 다스리는 곳이 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산업과 학문을 장려시키고, 수도 알렉산드리아는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이 되어서, 그 항구의 파로스섬에 서 있는 3층 대리석의 대등대같이 빛을 발했다. 그리고 왕실의 보호하에 2세기에 걸쳐서 자연과학의 황금시대가 이룩되었다.

과학연구의 중심이 된 것은 무세이온인데, 무세이온은 이 말이 낳은 '박물관'과는 매우 취향(趣向)을 달리하며, 말하자면 대학과 연구소를 합친 것 같은 하나의 큰 과학연구 센터였다. 왕국 가까이에 있는 대리석으로 지은 연구소에서는 당대 일류의 과학자가 유유히 연구에 종사하였고, 부속 도서관의 장서는 무려 70만권에 이르렀다고 한다. 동물원, 약초원, 천문관측소, 화학실험실, 해부실 등이 있고, 연구원은 문학, 수학, 천문학, 의학의 4분야로 구분되었으며, 때로는 1만 4,000명의 연구소원을 헤아렸다고 한다.

기학(氣學)의 연구로 유명한 스트라톤(Straton, BC 270경 사망), 『기하학 제원리』의 유클리드(Euclid, BC 300경), 지구의 둘레를 잰 지리학자 에라토스테네스(Eratosthenes, BC 275경-BC 194경) 등이 이 연구소에 관계를 하였다. 또 지구 중심의 천동설을 말한 고대 최대의 천문학자 히파르코스, 또 태양 중심의 지동설을 말한 아리스타르코스(Aristarchos, BC 217-BC 145)가 있으며, 의학 방면에서는 헤로필로스(Herophilos, BC 300경)와 에라시스트라토스(Erasistratus, BC 304경-BC 250)가 히포크라테스의 오류(잘못)를 정정하였다. 고대의 가장 위대한 수학자·물리학자인 시라쿠사의 아르키메데스도 알렉산드리아에 유학하였다.

알렉산드리아의 과학은 기원전 145년 프톨레마이오스에 웨르게테스 2세가 학자를 추방하게 된 다음부터 그 중심적 지위를 잃게 되었다. 그러나 그 여광(餘光)으로 기학(氣學)의 헤론, 수학의 디오판토스(Diophantos, AD 180경?), 천문학의 프톨레마이오스 등이 나왔다.

공기의 학문[편집]

空氣-學問

알렉산드리아 시대에는 공기에 대한 학문, 즉 기학이 매우 번성하였다. 기학이 이오니아의 예부터 중요시되어 온 것은 원소에 공기(氣)를 거론하게 된 한가지 사실만으로도 추측할 수가 있다. 기술자들은 공기의 탄력성이라든가 사이폰의 원리를 사용한 장치를 만들고, 자연학자는 공기의 성질이라든가 구조를 논하고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에까지 미쳤다.

원자론에서 실험을 중시함으로써, 그것을 결합시킨 것이 스트라톤이었다. 그는 아테네의 뤼케이온에 초빙되어, 제2대 학두(學頭)인 테오프라스토스의 뒤를 이었는데, 피시코스(자연학자)라고 불리었던 것처럼 대세(大勢)를 차지하고 있었던 윤리학에 흥미를 갖지 못하고 다시금 알렉산드리아로 되돌아온 학자이다.

빈 그릇을 거꾸로 하여 물에 넣으면 물은 그릇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이 실험에서 스트라톤은 공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물질적인 것이며, 보통 '텅 빈 것'이란 것은 결코 허공(진공)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엠페도클레스와 아낙사고라스의 실험도 계통적으로 행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커다란 허공, 즉 커다란 진공의 존재를 부정하였다.

그러나 그는 작은 진공은 존재한다고 다음과 같이 실험적으로 보여주었다. 속을 후벼낸 금속 구(球)에 관(管)을 갖다대고 숨을 불어 넣으면, 숨은 꽤 많이 들어간다. 이는 공기의 여러 입자가 그들 상호간에 있는 허공 속으로 밀어 넣어져 들어가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즉 공기는 조그만 무수한 입자(원자)와 허공(진공)으로부터 되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스트라톤은 커다란 진공을 부정하고, 물체 속에는 미소한 진공이 있으며, 이것이 자연의 본성이라고 생각하였다. 인공적으로 커다란 진공이 만들어지면 그것은 자연적 상태로 다시 되돌아가려고 한다.

아가리가 작은 그릇의 공기를 입으로 빨아내면, 그 그릇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은 커다란 진공이 미소한 진공으로 되돌아가려고 하는 자연적 본성인 것이라고 진공의 흡인성(吸引性)을 설명하였다.

이 스트라톤의 기학은 헤론에 의하여 활용되어, 여러 가지의 장치가 고안되었다. 『기체 장치』 2권에는 78종의 요술과 같은 방법과 장치 등이 기술되어 있다.

예를 들면 사이폰의 원리를 사용하여, 손잡이가 있는 구멍을 엄지손가락으로 막기도 하고 떼기도 함으로써, 마음대로 물이나 포도주를 꺼내기도 하고 멈추기도 하는 용기가 있다. 또 같은 원리에 의하여, 어떤 높이까지 물이 차면 스스로 사이폰을 통하여 물이 흘러나오면 물에 의하여 우는 새(아래 그림 참조), 일정 시간이 되면 소리를 내고 물을 마시는 새의 장치와 같은 장난감도 있다.

공기의 열팽창력을 이용한 기체 장치로서 제단에서 불을 피우면, 공기의 압력으로 인형의 손에서부터 신주(神酒)가 흘러 나오는 장치, 제단에서 불을 피우면 자동적으로 문이 열리고, 불을 끄면 문이 다시 닫히는 신전(神殿) 등을 고안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장치는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나 재료, 공작 기술 때문에 실제로 만드는 것은 좀 어려웠다.

『기체 장치』의 대부분은 항아리, 물병 같은 성당관계의 조종 장치 등이며, 산업 기술적인 것은 거의 포함되어 있지 않다. 유명한 증기로 회전하는 구(球) (아래 그림 참조)는 일종의 원시적인 반동터빈으로서, 흔치 않은 예외의 하나이다. 산업, 기술의 미발달, 노예제(制) 사회 등이 헤론으로 하여금 단순한 장난감·조종장치의 단계에 머무르게 하고 있었다. 그것은 같은 시대의 비잔틴의 피론, 알렉산드리아의 크테시비오스의 기술적인 발명에 대하여서도 이와 같이 말할 수가 있다.

헤론(알렉산드리아의)[편집]

Heron(BC 150-AD 250경) 기술자(측량기사)로서 활약한 연대에 대하여는 기원전 2세기에서 150년까지와, 기원후 2세기의 중엽일 것이라고 하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기원전 150-기원후 250년 사이의 사람일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기하학 및 자연학의 저서가 다수 있으며, 어떻게 실용화할 것이냐 하는 데에 중점이 놓여져 있다.

저서로는 『측량술』, 『조준의(照準義)에 대하여』, 『기체 장치』, 『자동장치 제작법』, 『측지술(測地術)』, 『입체기하학』, 『기계술(機械術)』, 『반사광학』 등이 있다. 헤론의 공식으로 알려진 3각형의 3변을 알고 면적을 구하는 공식은 『측량술』에 있는데, 이것은 아르키메데스의 발견으로 취급되고 있다.

기하학과 그 응용[편집]

幾何學-應用 기학(氣學)의 연구의 응용이 장난감이나 조종장치 같은 것으로서, 착상 내지는 의욕이라는 단계에 머무른 것과는 달리, 그 근원을 측량·건축 등의 여러 기술에서 찾게 되어 있는 기하학은 이 알렉산드리아에서 체계화되고 그 응용도 역시 기학에 비하여 훨씬 풍부한 성과를 올릴 수 있었다.

유클리드는 유명한 『기하학 제원리』 13권을 저술했다. 이 13권, 특히 최초의 6권은 기하학의 입문서로서 또 교과서로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기하학 제원리』에 포함되는 465에 이르는 명제(命題)는 당시까지에 피타고라스파, 플라톤파의 업적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유클리드 이전에 발견되거나 또는 증명되었다. 이들 선인(先人)들의 흩어진 자료를 모으고 편집하는 일은 키오스의 히포크라테스가 한 바 있다. 유클리드는 이를 확장시키고, 공리(公理), 공준(公準), 정의(定義)와 같은 기본적인 예비사항으로부터의 연역적(演繹的)인 정리체계를 정연히 만들어 내어, 기하학을 하나의 큰 증명적 학문으로 이룩한 것이다.

학문체계의 완성으로서의 『기하학 제원리』는 지금까지의 일체의 것을 배제하고, 기하학적 저작의 왕좌를 획득하였다. 유클리드보다 조금 뒤늦게 주목할 만한 천문학자가 나타났다. 사모스의 아리스타르코스이다. 그는 고대의 코페르니쿠스라고 불리고 있는 것처럼 당시로서는 퍽 대담한 지동설을 주창하였다. 피타고라스파의 필롤라오스의 중심불(火)을 생각한 지동설을 전진시켜, 태양의 둘레를 지구·수성 그 밖의 별들이 원궤도로 회전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지동설의 근거는 지구에서부터 태양과 달에 대한 상대적인 거리, 그들 상호의 상대적인 크기를 기하학적 지식을 이용해서 개산한 데에 있다. 달의 빛이 태양광의 반사임을 알고, 달이 반달이 되었을 때, 지구 위의 지점 E와 태양의 중심 S 및 달의 중심 M을 연결하는 3각형을 생각한다. SM과 EM의 2변이 만드는 각은 직각을 만들 것이므로 EM과 ES가 만드는 각을 재면 변의 비(比)는 결정된다. 아리스타르코스는 이 각 SEM을 89도(실제는 89°53′)로 재어 ES와 EM의 비를 내고, 지구에서 태양까지의 거리는 지구에서부터 달까지의 거리의 18배와 20배 사이(실제는 400배에 가깝다)라고 계산하였다. 또 이 상대적인 거리에서부터 태양과 달의 겉보기의 크기를 구하여 태양의 직경은 달의 약 19배, 지구의 약 7배라고 계산하였다.

태양과 달의 절대적인 크기와 그것들까지의 거리를 알기 위해서는 지구의 크기를 알지 않으면 안 되는데 이것을 밝힌 사람은 무세이온의 관장(館長)이었던 에라토스테네스이며, 그 수치는 그의 저서 『지리학』 3권에서도 응용되었다.

그는 하지날에, 시에네에서는 태양이 바로 머리 위에 있으나 5,000스타디온(1스타디온=148.8m) 정북에 있는 알렉산드리아에서는 해시계의 그늘이 만드는 각도가 7°12′임을 알았다. 지구를 원이라고 생각하여 둘레는

5,000× 〓 25,000 (스타디아)

라고 산출하였다. 반경 약 6,290km, 직경 12,580km가 되어 오늘날의 수치와 불과 80km밖에 틀리지 않는다. 물론 시에네와 알렉산드리아는 동일 경도상이 아니고, 지구도 또한 원은 아니지만, 에라토스테네스가 계산한 그것은 참으로 놀랄 만한 업적이라고 하겠다.

또 에라토스테네스는 지리학적 지식의 집성을 행하였고, 경위도선이 처음으로 기입되는 세계지도를 작성하였다. 알렉산드리아의 위도상에는 카르타고, 로도스섬의 위도상에는 헤라클레스의 기둥 잇소스가, 또 알렉산드리아의 경위선상에는 비잔틴, 시에네, 멜로이 등이 있었다. 이와 같이 표준 위도선이 중요지점을 지난다고 생각하고, 인간 거주 가능한 세계는 북반구로서, 더욱이 그 3분의 1에 불과하다고 하는 등의 잘못은 있다 치더라도, 근대의 지중해 지도와 흡사하고 퍽 정확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또 "동일 위도선에 따라 에스파냐에서부터 인도까지 항해하는 것도, 끝없이 넓은 대양이 없었더라면 가능할 것이다"라고 지구의 1주(一周)를 말한 최초의 사람이기도 하다.

기하학의 응용, 기술과의 결합에서 가장 위대한 업적을 올린 사람은 고대 최초의 과학자 시라쿠사의 아르키메데스이다.

아르키메데스에 대하여는 유명한 이야기가 2개 있다. 하나는 시라쿠사의 왕궁에서 헤론왕에게 "나에게 받침점(支點)과 충분한 길이의 막대를 주면, 지구를 움직여 보이겠다"고 말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순금의 왕관과 모조품의 왕관을 헤론왕의 명령에 따라 가려냈다는 이야기이다. 전자는 지렛대, 후자는 '아르키메데스의 원리'에 관한 것이란 것은 두말 할 나위도 없지만, 이 양자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지렛대에 대해서는 옛날부터 경험적으로 알려져 있었다. 받침점에서 같은 거리에 있는 같은 무게의 것은 평형하고, 무게나 받침점으로부터의 거리를 변화시키면 무거운 쪽·긴 쪽으로 기운다고 하는 것 같은 경험적 사실로부터 그는 이것을 공준(公準)으로 하고, 유클리드와 동일하게 명제를 세우고 '반비례의 법칙'을 기하학적으로 증명하였다. 경험·사실 등으로부터 법칙을 발견하고, 이를 체계화하고 과학으로서 제공하였다. 이와 동시에 지구 대신에 진수 불가능이었던 큰 배를 지렛대와 도르래를 써서 물에 띄울 수 있다는 이론의 응용을 실제로 시도하였다. 과학의 기술에의 적용을 적극적으로 행하였다.

아르키메데스의 부력과 비중에 대한 발견은 그의 연구가 여하히 기술이나 실용과 결부되고 있는가에 관한 하나의 증명이라 하겠다. 그는 시라쿠사의 헤론왕의 관으로서 전해지고 있는 이야기에 의하면, 세공사(細工師)가 만든 왕관이 그것과 같은 무게의 순금보다 많은 물을 배제했다는 사실에서, 왕관에 은을 혼합시켰음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같은 무게의 금, 은, 금은의 혼합물이 배제하는 물의 양, 게다가 또 아마도 물 속에 저울을 넣어서 그것들의 무게를 계량함으로써, 오늘날 비중이라 부르고 있는 개념을 실험적으로 포착했다. 당시 광산 등에서는 2종류의 같은 무게의 금속은 수중에 저울을 넣으면 평형을 잃는다는 것은 알려져 있었고, 금속에 불순물이 섞여 있는지의 여부를 감별하는 일은 행해지고 있었다. 이 사실은 결국 아르키메데스로 하여금 부체(浮體)의 법칙으로서의 이론을 낳게 하고, 증명케 하고, 또한 과학면·실제 면에서 큰 역할을 다하게 만들었다.

지렛대를 사용한 역학적 방법으로 우선 결론을 찾아내고 그것을 다시금 기하학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아르키메데스의 방법이었다. 각종 도형의 무게 중심도, 우선 지렛대에 의해서 무게 중심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포물선에 둘려져 있는 활꼴의 면적은 그것과 같은 밑변과 높이를 갖는 3각형의 면적의 3분의 4이다"의 명제도 "나는 처음에 역학적인 방법으로 발견하였으며, 그로부터 기하학적 방법으로 증명했습니다"라고 그는 말하였다. 지렛대 등에 의한 역학적 방법은 결론(또는 간파)이지 완전한 증명이라고 볼 수는 없으며,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하학적 증명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아르키메데스는 순수한 기하학자가 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원주(圓柱)의 체적은 이에 내접(內接)하는 구(球)의 체적의 1.5배이다"라는 정리를 순수한 지하학자가 되려고 한 그는 최대의 일이라고 자인했으며, 그 도형을 묘비에까지 새겨 넣을 것을 유언으로 하였다. 그의 기하학은 '위대한 기하학자'라 불린 페르가몬의 아폴로니오스(BC 220년경 활약)들에게 계승되어서, 원추곡선론으로까지 발전하였다.

왕가의 보호 육성에 의존하고 있었던 알렉산드리아의 학문은 인문과학에는 아무런 볼 만한 업적은 올리지 못했지만, 자연과학에 관하여서는 이론과 실제의 일치, 과학의 응용이라는 면에서 볼 만한 것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특히 기하학 분야에서 현저하였다.

아르키메데스[편집]

Archimedes(BC 287경-BC 212)

고대 최대의 과학자. 시칠리아섬 시라쿠사의 사람으로, 아버지는 천문학자 피디아스이다. 알렉산드리아에 유학하여 수학자 코논에게서 기하학을 배웠으며, 지리학자 에라토스테네스 등과도 알게 되었다. 모두 취(取)하기 법에 의해 포물선의 활꼴 면적, 나선의 면적, 구(球)의 표면적이라든가 용적, 2회전체(二回轉體)의 임의의 절편(切片)부분의 용적, 또 근사치 등 곡선 도형과 곡면과의 구적(求積)에 업적을 올렸다. 또 각종 기하학적 도형의 무게 중심을 발견하였다. 이것들을 구하는 방법은 균질(均質)의 재료에서부터 구하고자 하는 도형을 잘라내어 무게를 측정한다는 식으로 역학(力學)의 도움을 차용하였다. 그는 또 아르키메데스의 원리로 대표되는 것처럼 유체정역학(流體靜力學)의 전체계(全體系)를 확립하였다.

나선 양수기(揚水器), 겹도르래의 발명과 같이 그는 뛰어난 기술적 재능을 지니고 있었는데, 제2 포에니 전쟁 때 군사 기술면에서 활약하다가 낙성시의 잘못으로 살해되었다.

유클리드와 『기하학 제원리』[편집]

Euclid-『幾何學諸原理』유클리드의 생애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프로클로스는 "유클리드는 기하학 제원리를 편집하였다. 그리고 그 때 유도크소스의 많은 정리를 모아 테아이테토스에 의한 그 밖의 많은 정리를 완성하였고, 다시 그의 선배들이 다소 철저하지 못하게 증명하고 있었던 여러 명제에다 논파(論破)할 수 없을 만한 논증(論證)을 부여한 사람"이라고 말하였다. 플라톤의 제자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프톨레마이오스 1세 때에 생존하였으며 알렉산드리아에서 학교를 창립하였다고 한다.

아르키메데스 이후의 사람들은, 그의 이름 대신에 '기하학 제원리의 저자'라고 부르고 있다. 성서를 제외하고는 가장 많이 보급되어 생명이 긴 책이라고 하며, 아르키메데스는 이 책의 권(卷)과 번호로 명제를 인용하고 있다. 13권으로 되어 있고, 고대 기하학의 자료를 모아 체계화한 불후의 명저이다.

에라토스테네스[편집]

Eratosthenes(BC 275경-BC 194경)지리학자, 수학자. 퀴레네 탄생으로, 아테네에서 배웠다. 프톨레마이오스 3세에게 초빙되어 무세이온의 관장이 되었다.

지구의 둘레를 측정하여 유명한데, 이는 최초의 수학적 지리서라고 하는 『지리학』 3권에 실려 있다. 아르키메데스는 그의 저서 『방법(方法)』을 그에게 헌정하고 "열렬한 학도, 철학에 뛰어난 사람, 수학적 연구의 찬미자"라고 부르고 있다. 소수(素數)를 발견하는 '에라토스테네스의 체'로도 유명하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중심설[편집]

Ptolemaeos-地球中心說알렉산드리아시대는 수학(기하학)의 진보와 천문지식의 집적인 천문학 이론의 커다란 발전을 가져온 시대였다.

그리스의 천문학자의 많은 사람들은, 지구는 항성이 밀착되어 있는 거대한 천구의 중심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거기에는, 지구와 천체는 서로 다른 물질로 구성되고, 운동법칙도 서로 다르다는 사상이 가로놓여 있어, 신성하고 완전한 천체는 한결 같은 원운동을 하고, 하등(下等)적인 지구는 중심(中心)에서 정지(靜止)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유독소스(BC 408경-BC 355경)의 지구를 중심으로 하는 동심구적(同心球的)인 체계에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전술한 아리스타르코스가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하여 제출한 지동설도 그리스를 지배하는 철학적 천문학에 무시되었다.

동심구설을 천체 운행의 불규칙성과 합치시키기 위한 노력이 거듭되었다. 페르가몬의 아폴로니우스(Apolonius, BC 3세기 후반)는 주전원(周轉圓)(하나의 원둘레 위의 1점을 중심으로 하는 또 하나의 원)과 이심원(離心圓)의 생각을 제출하였다.

주전원과 이심원을 채용한 것은 고대 최대의 천문학자라고 불리는 니케아의 히파르코스이다. 그는 태양은 고정시킨 이심원이고, 달은 변화하는 이심원(기하학적으로는 주전원과 같음)이라고 보았고, 그것들의 운행 상황을 그대로 설명하였다. 이 운행 이론은 종래보다는 훨씬 관측과 일치하였으며, 일식은 미흡했으나 월식은 1-2시간의 오차 범위 내에서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행성의 운동에 대해서는 실패하였다.

히파르코스는 로도스에다 관측소를 세워, 그 곳에서 실제적인 관측과 더불어, 자기 이전의 그리스인들의 기록, 다시 멀리 기원전 7세기까지도 미친 바빌로니아의 기록을 모아 이 관측치(値)의 연대적인 대조비교를 행하였다. 그 결과 회귀년(태양이춘분점으로 되돌아가는 데 소요되는 시간)이 항성년(태양이 항성 중에 있어서 동일 위치로 되돌아가는 데 소요되는 시간)보다 근소하게나마 빠르다는 것을 발견하고, 1년에 약 36초(현재로는 약 50초)의 차가 있다고 말하였다. 이 세차운동(歲差運動)은 정밀한 천문학의 진보에는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히파르코스는 이 연구의 결과, 별의 위치 목록을 작성할 것을 착안하고 약 850개의 별자리를 표로 만들었다. 이에 따라 그 사람 이후의 학자는 별 위치의 상대적인 변화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또 그는 3각법을 생각해 내서 천문학에 커다란 공헌을 하게 되었다. 히파르코스의 일은 문인들에 의해서 계승되고, 다시 알렉산드리아의 프톨레마이오스에 의하여 발전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광학·수학 면에서 업적을 올렸는데, 특히 『알마게스트』 13권의 저자로서 잘 알려져 있다. 이 책을 그리스인은 '위대한 수학적 체계'라고 부르고 있었는데, 아라비아어로 번역되어서 '알 미지스테이(위대한 책)'로 다시 그것이 라틴어로 번역되어서 '알마게스트'라는 책이름으로 유럽에 재수입(再輸入)되는 역사를 지니고 있다. 처음의 이름이 보여 주듯이 천체의 운행을 수학적 기반 위에 서서 체계화한 것이다. 그 내용은 어디까지가 프톨레마이오스 자신의 것이며, 선인(先人) 특히 히파르코스의 업적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정연한 체계가 『기하학 제원리』와 동일하게 그 이전의 것과 교대가 된 획기적인 저서였다.

그는 지구에서부터 달, 수성, 금성, 태양, 화성, 목성, 토성의 순서로 줄짓고, 행성의 궤도원(軌道圓) 중심으로부터 벗어난 곳에 지구는 가만히 멎고 있다고 보고 다시 행성은 이 이심원 위의 주전원(周轉圓)이 대심(對心)이라는 점 주위에 같은 모양의 각속도(角速度)로 움직인다고 생각하였다.

대심이란 원의 중심에 관하여 지구의 반대쪽에 있어서 중심으로부터 동일한 거리에 있는 점이다. 이 구조는 당시의 관측치를 거의 만족시키는 것이었다. 그런 까닭에 정밀한 관측치를 구할 수 있게 될 때까지, 즉 코페르니쿠스를 거쳐서 티코 브라헤의 관측치를 근본으로, 케플러가 지동설을 확립시킬 때까지 천문학계를 지배하였다.

프톨레마이오스[편집]

Ptolemaeos Klaudios(2세기경에 활약) 천문학자·지리학자. 그의 생애는 분명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천문학상의 지식을 체계화하여 『알마게스트』를 저술하였으며, 그의 견해는 주로 히파르코스에 의거하였다. 그가 주장하는 천동설은 17세기까지 천문학을 지배하였다. 지리학 책 『지리학 입문』을 저술하였고, 경위도(經緯度)의 결정을 시도하는 등 당시의 지리학의 종합을 이룩했다. 수학, 광학, 음악에 관한 업적도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의학[편집]

Alexandria-醫學

이 시대의 생물학적·의학적 연구 역시 물리학·천문학·기하학에 뒤지지 않는 발전을 보였다.

알렉산드리아에서 가장 오래 전에 활약한 의학자 칼케돈의 헤로필로스(Herophilos, BC 300경)는 인체 해부를 행한 최초의 사람으로 지목된다. 그는 인체의 해부를 동물의 해부와 비교해서 기술하였다. 그는 뇌를 지성(知性)의 자리라고 하고 신경계의 중추라고 여겼다. 또 동맥과 정맥을 구별한 것도 그의 최초의 시도이며, 동맥은 고동하고 정맥은 고동하지 않는 것을 관찰하였다.

키오스의 에라시스트라토스도 역시 인체 해부를 행한 의학자이다. 그는 데모크리토스의 신봉자이며, 스트라톤의 가르침을 받은 원자론자이다. 그는 관찰이나 실험을 중요시하였다. 동맥·정맥은 온몸에 빈틈없이 퍼져 있다고 생각하고,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데까지 그 경로를 추적했다. 또 뇌를 중요시하고 대뇌와 소뇌를 구별하여 동물과 사람의 뇌를 비교했으며, 인간의 뇌의 회전(주름)이 많은 것은 지성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는 스승인 스트라톤 기학(氣學)의 영향을 받아 의학에 있어서의 공기의 역할을 중요시했다. 그는 정맥은 혈액을, 동맥은 공기를 나르는 것으로 보았다. 공기는 호흡에 의하여 폐로 흡입되고 또한 심장으로 가며 그 곳에서 특수한 프네우마(生命精氣)로 바뀌고 몸 전체에 보내진다고 보았으며, 생명정기 즉 프네우마의 일부가 뇌에서 제2의 프네우마(동물전기)로 되어, 신경에 의하여서 전신에 보내진다고 생각했다. 그는 시체의 동맥이 텅 비어 있다는 사실에서 동맥은 공기(생명정기)로 채워져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하였다. 혈액은 격심하게 하강하고, 그 때 끌어당기는 힘으로 공기는 체내로 흡입(吸入)되어, 혈액의 상승으로 공기는 내어 보내진다고,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기학을 응용하였다. 심장에는 혈액의 역류(逆流)를 방지하는 판(瓣)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들 알렉산드리아의 의학은 기원전 3세기에 쇠퇴의 기미를 보이고, 그 중심은 소아시아 지방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다시 로마의 발흥과 함께 의학의 중심도 로마로 옮겨갔다.

의학의 집대성을 이룩한 것은 페르가몬의 갈레노스이다. 그는 히포크라테스와 나란히 서양 고대의학의 거봉으로 간주되고 있다. 청년시절에 알렉산드리아 등지로 가서 배우고, 해부학의 지식을 터득했다. 당시 인체의 해부는 금지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원숭이를 비롯한 인간 이외의 동물에 대해 해부학적·생리학적 연구를 하였고, 또 고대 의학을 집성하여 생리학의 체계를 수립하였다. 그는 에라시스트라토스의 동맥은 공기로 채워져 있다고 하는 생각을 실험에 의하여 부정하고, 동맥에는 혈액과 프네우마가 들어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도 또한 정기론자였다.

갈레노스는 혈관 내의 혈액운동에 대하여, 하비의 혈액순환설이 나올 때까지 천 수백년간에 걸쳐서 믿어진 학설을 제출하였다. 혈액은 간장에서 만들어지며 조수의 간만(干滿)처럼 정맥 속을 왕복한다. 그 혈액이 대정맥을 거쳐 심장의 우측으로 들어가고, 그 곳에서 폐로 가서 불순물은 몸 밖으로 배출된다. 깨끗해진 혈액은 폐동맥을 지나 심장의 우측으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우심실(右心室)의 혈액의 일부는 심실간의 격벽(隔壁)의 미소한 도관(導管)으로부터 방울방울 떨어져 좌심실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혈액은 외계(外界)의 프네우마와 만나 생명정기를 얻어 어두운 정맥혈은 선명한 동맥혈로 화해서 동맥을 통과하고 체내로 운반된다. 정맥도 동맥도 심장으로부터 혈액을 운반해 내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와 같은 중대한 착오를 범하기는 했으되, 알렉산드리아 의학의 특질인 해부학을 중시하고, 거기에 기초를 두고서 실험생리학을 건설한 갈레노스는 알렉산드리아 의학의 마지막을 장식하기에 알맞는 인물로서 그의 이론은 근대에 이르기까지 의학계를 지배하였다.

갈레노스[편집]

Galenos(129경-199)

그리스의 의학자. 소아시아의 페르가몬 태생으로, 아버지는 건축가였다. 페르가몬, 스미르나 등에서 의학을 배우고 다시 5년간 알렉산드리아에서 공부하였다. 로마황제의 초빙으로 왕자의 시의가 되었다. 고대 의학을 연구하였으며, 또 스스로 수많은 실험을 하여 의학을 체계화하였다. 그의 학설은 17세기까지는 절대적인 권위로 되어 있다.

로마의 과학과 기술[편집]

Roma-科學-技術

기원전 2세기 초, 제2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로마가 지중해 세계의 패자(覇者)로서의 지위를 확립하려 하고 있었던 시기에 그리스문명의 로마에 대한 영향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5세기까지 계속되는 로마시대에 있어서 로마인은 그리스인이 쌓아올린 과학의 전진에 대하여 거의 공헌하는 바가 없었다. 의학자 갈레노스,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 등의 위대한 과학자들도 연대상으로는 로마시대에 들어갈지라도 사실은 알렉산드리아 과학의 소산인 것이다. 로마는 그리스 과학의 자연을 탐구하는 방법·정신·태도 등을 빼버리고, 그 성과만을 이어받았다. 수학·역학도 그 응용을 도입하였다. 로마가 능력을 발휘한 것은 실제적인 기술 분야이다. 즉 도로·수도(水道)의 건설, 콜로세움 등의 건조물, 혹은 율리우스력(曆), 그 위에 오나게르 등의 군사기술 등이었다. 그러나 그것들에서는 알렉산드리아의 과학이 보여준 기술과의 훌륭한 결합·통일은 볼 수 없었다.

로마의 과학의 특징은 기술적 과학 또는 참고서의 과학이라고 하겠다. 비트루비우스의 『건축의 서』, 대플리니우스의 『박물지』 등은 과학적, 기술적 업적을 요령있게 정리하고, 또는 주석을 가한 것으로서, 그것들을 어떻게 활용할 것이냐를 목적으로 한 것이라고 하겠다. 특별히 새로운 것은 첨가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가장 필요했을 것인 지리학은 수학 제외로 이를 도입하고, 거꾸로 T자형 지도에로 퇴화했으며 가장 실리적(實利的)인 의학에서마저 해부는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약품은 약제사에게, 수술은 이발사에게 위임하고서 의사는 그것을 다만 감독만 하게 된 것이다.

과학은 윤리학을 중시하는 스토아 학파, 에피쿠로스파의 융성, 게다가 크리스트교와 연결하여, 그리스인이 보인 진지한 자연 탐구의 정신은 로마에게서는 까맣게 잊혀지고 말았다.

로마시대의 토목·건축[편집]

Roma 時代-土木·建築

"다량의 물을 나르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당당한 이 같은 건조물과, 불필요한 피라미드라든가, 유명하기는 하지만 소용없는 그리스인의 여러 작품을 비교해 보라"라고 로마의 급수(給水)위원인 프론티누스(AD47-104까지 재임)가 말하였듯이, 수도(首道)의 물을 공급하는 8개의 대수로교(大水路橋)는 로마의 자랑이었다.

가장 오래된 수로교는 기원전 312년경, 눈이 먼 감찰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BC 4세기 후반의 사람)에 의하여 착수되었다. 이것을 시발점으로 하여 계속해서 수도가 건설되고, 이윽고 그 전 길이는 350km에 이르렀으며, 하루에 10만㎥를 넘는 물이 로마로 공급되기에 이르렀다.

프론티누스에 의하면 물의 17%는 황제용으로, 39%는 개인용으로, 나머지 44%는 19개의 병영, 95개의 관청, 39개의 공공 건물과 극장, 591개의 천수(泉水)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수질을 검사하고 정화하는 등의 위생방면에도 십분 유의하고 있었다. 수조(水槽)의 내면이나 도관(導管)에는 납이 사용되었으나 납독의 해가 갈레노스, 비트루비우스 등에 의하여 공격된 것도 물의 정화라는 점에서였다.

로마의 급수에는 시 당국이 책임을 지되, 한 관리소를 두고 거기에는 측량사, 검사원, 석공, 연관공(鉛管工) 등 700명이나 되는 종업원을 배치하고 있었다.

수로에는 지하의 도관이 애용되었다. 그것은 외적에 의하여 물이 단수되었을 경우라는 군사적인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장려한 아치는 공비(工費)의 점에서 될 수 있는 한 피하였다. 그러나 경사가 급한 산골짜기를 건너야 할 경우에는 사이폰을 사용하는 등 공사에 관해서는 막대한 비용과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이와 같은 물에 대한 열의는 일부 아직 남아 있는 수로교의 폐허, 또는 지금도 로마에서 기능을 발휘하고 있는 하수도로부터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수도와 함께 로마인이 성공한 토목 기술은, 문자대로 "세계의 길은 로마에 이어진다"고 일컬어지는 도로의 건설이었다. 여기서의 선구자도 역시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다. 기원전 312년, 그는 360km의 대군사도로-아피아 가도(街道)를 만들었다. 이후 로마에 통하는 모든 도로의 정비가 제국(帝國)의 확대와 더불어 추진되어, 곧이어 29만km에 이르는 포장도로가 거미줄처럼 쳐졌으며, 그 중 8만 6,000km는 폭 24m의 주요 간선이었다. 도로에 따라 도정표(道程標)가 세워져, 로마에서부터의 거리, 주요 도시에 이르는 거리 등을 표시하였다. 또, 120리-160리마다에 도로를 관리하는 군사경찰의 병사(兵舍)도 겸한 여행에 필요한 설비를 갖춘 숙사가 배치되어 있었고, 또 숙사와의 사이에는 2-3개 소의 중계소가 설치되었다. 2대의 4륜차가 충분히 엇갈릴 수 있는 큰길을 급사(急使)는 시속 10-16km로 수일간에 걸쳐 질주할 수가 있었다.

도로는 가능한 한 직선으로 만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교량·터널 등에는 그들의 기술이 발휘되었다. 도나우강의 교량은 길이 1,070m의 목조가교(架橋)로서, 그것은 높이 45m나 되는 20개의 거대한 석각(石脚)으로 받쳐져 있었고, 리스본 근처의 알칸타라의 교량은 6개의 장려한 아치가 있는 길이 180m의 돌다리이며, 그들의 토목 기술의 수준의 일단을 보이는 것이다.

도로 조직의 확립 정비는 사상 최대의 제국(帝國)의 통어(統御)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오나겔, 카로바리스타와 같은 비구(飛具)를 갖춘 강력한 로마의 군단은 항상 이 도로를 이용하여 신속히 행동할 수 있었다. 또 상공업에, 광업에, 로마의 번영에 기여하는 바도 실로 컸다. '팍스 로마나(로마의 무력 강제에 의한 평화)'를 유지하는 중요한 일익을 담당한 것이, 이 근대적인 요소를 가진 로마의 도로망이다.

팍스 로마나는 바다에도 미쳤다. 군용선은 갈레선, 즉 돛에 의지하지 않고 다수의 노예나 죄수가 노를 젓는 배였다. 기원후 1세기의 전반(前半)에는 그들의 조선술은 매우 높은 수준에 달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지중해에는 이미 로마해군에 필적할 만한 어떠한 나라도 존재하지 않았다. 적재량 500-1000t의 범주상선(帆走商船)이 식민지로부터 로마로 여러 가지 물자, 특히 곡물을 날라다 줌으로써 로마를 뒷받침하였다.

유능한 정치가·법률가인 로마인은 그리스의 과학과 기술의 성과를 군사적·공공적 사업에 십분 이용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지니는 군사적 재능, 법률적 명성에 비견할 만한 과학·기술 면에서의 영예(榮譽)는 그들에게 부여되지 못했다. 그들의 공업적 업적은 극히 근소하다. 자갈 노면을 모르타르로 굳히는 데서 얻은 콘크리트의 발명, 그것의 건축과 토목 기술에의 응용이 로마인의 최대의 발견이라 하겠다. "벽돌의 로마에서 태어나, 대리석의 로마에서 죽었다"고 일컬어지는 황제 옥타비아누스는 콘크리트의 건물을 건축하고, 대리석으로 완성시켰다. 그리고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의 자리는 이 이후의 것이다.

기술적 과학의 시대[편집]

技術的科學-時代

수도·도로·군사 기술 등에서 보듯이, 로마인은 고대의 가장 뛰어난 기술자였다. 그러나 그 기술은 오리엔트, 그리스 세계의 것을 조직적으로 국가적 규모로 부린 것이지 로마인 자신에 의한 발명·발견은 적었다. 그들은 너무나도 현실적이며 실용을 지나치게 중시하였다. 이 경향은 과학에도 나타났다.

그리스인이 보인 과학에서의 이론과 실험과의 통일·발전을 로마인은 계승하지 못하였다. "그리스의 수학자들은 순수 기하학의 분야에 뛰어났지만, 우리들은 계산과 측량에만 한정하고 있다"라고 키케로(Cicero, BC 106-BC 43)가 평하였듯이, 추상적인 수학은 그들에게는 가장 서툴렀다. 그리스 철학·과학을 중세로 소개한 사람인 보에티우스(Boethius, 480-524)의 수학책에서 볼 수 있는 지식은 '고대인 최후의 것'이라기에는 너무 빈약하다.

과학은 자연법칙의 발견이라고 하기보다는 먼저 실제적이며 유효성을 지닐 수 있는가 하는 관점에서부터 평가되었다. 그리스의 원자론은 루크레티우스(BC 94-BC 55)의 장편시(長篇詩) '사물의 본성에 대해서'에서는 자연탐구의 무기가 아니고서 안심입명(安心立命)의 형이상학으로 화해버리고 말았다.

측량술·역학 등은 토목·건축 등에는 필수의 것이다. 제국시대에는 측량사 양성을 하는 학교가 세워졌다. 주된 로마인의 측량 기구는 그들의 발명품인 그로마이다. 그것은 직교(直交)하는 막대기의 양쪽 끝에 추를 달아 늘어뜨려 수직방향과 직각방향을 정하는 기구였다. 그러나 측량기구의 교모성에 비하여 그 정밀도가 낮은 것이 산견(散見)된다. 그들은 그리스 기하학의 성과, 가령 아르키메데스에 의해서 구해진 π의 값보다는 경험적인 원주율, 예를 들어 비트루비우스는 25/8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지렛대, 도르래 등을 십분 이용하되 대저울도 연구하였고 정교한 도르래 방식의 기중기도 고안하였다.

그러나 과학적 방법, 기초적 이론의 결여가 로마과학의 특징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과학적 저술은 백과사전적·텍스트적인 것이었다.

기술자 비트루비우스(Vitruvius, BC 1세기)는 『건축의 서(書)』 10권을 저술하였다. 단순히 건축뿐만 아니라, 토목·기계·시계·병기 등 로마제정(帝政)의 확립시의 모든 기술 지식을 집대성한 서적이다. 그는 현실적인 기술과 추상적인 이론과의 결합이 있음으로써 비로소 결실 많은 성과를 얻는다고 말하고, 로마가 원하는 기술의 거의 모든 영역에 걸친 실용적인 텍스트를 만들었다.

로마 최대의 과학적 저술은 대플리니우스(23경-79)의 『박물지(博物誌)』 37권이다. 로마인 146명과 그리스인 326명의 저자들에 의한 약 2,000종의 저서에서 인용한 방대한 것이다. 다시 그는 베수비오 화산의 분화를 관찰하던 중에 질식사하였다고 전해지듯이, 스스로 행동하고, 그 경험이나 관찰도 기록하였다.

『박물지』는 방대할 뿐만 아니라, 로마인의 자연에 대한 태도를 잘 나타내고 있다. 그는 자연은 인간에게 소용이 되기 위하여 존재한다는 사상으로 기술(記術)을 추진시켜, 이 책이 얼마나 유용하며 실용적인가를 강조하고 있다. 거기에서는 체계적인 구성도, 출전(出典)에 대한 비판도 볼 수가 없다.

한편, 실용적인 지리학·의학도, 결국 지리학은 에라토스테네스의 양적인 면을 계승한 폼포니우스 멜라(1세기경 사람), 의학은 『의학에 대해서』를 편찬한 켈주스(1세기의 사람) 이후는 점차 쇠퇴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중국[편집]

중국의 과학·기술[편집]

中國-科學·技術

고대의 중국인은 바빌로니아인이나 이집트인들과 같이 이론 기하학을 발전시키지 못하였다. 또 우주의 공간적 구조에 관한 그들의 이론은 수량적인 천문관측에 기초를 두지 못하였다. 즉 고대의 중국인은 과학적인 방법을 전개하지 못하였으며, 그들의 철학과 기술은 그 때까지 고립된 채로 있었다.

중국문명의 가장 오랜 것으로서 연대가 확실한 것은 BC 1,500년경 황하(黃河)유역의 안양(安陽)에서 통치한 상왕조(商王朝)의 문명이다. 안양의 은허(殷墟) 발굴에 의하면, 이 시대의 중국인은 청동기(靑銅器)를 만들었다. 그리고 화로와 말이 끄는 전차(戰車)를 갖고 있었으며, 서방(西方)에서 재배한 대맥(大麥) 대신에 쌀을 만들고, 아마(亞麻) 대신에 견직(絹織)을 만들었다. 그들은 현대의 표의문자(表意文字)를 초기에는 그림문자의 모양으로 썼으며, 바빌로니아의 영향의 증거로 보이는 60진법(六十進法)을 사용했다.

쇠(鐵)가 중국에 나타난 것은 BC 6세기경인데, 그것이 최초의 기록에 나타난 것은 BC 513년이다. 진(秦)의 시황제(始皇帝)는 수도 시설을 넓히고 도로망을 만들었으며, 만리장성을 구축하였다.

한(漢)의 여러 황제는 BC 124년에는 대학(大學)을 창건하였고, 나라의 통치를 위해 학자의 관료제도를 설립했다. 이 학자들은 대쪽(竹片)에 문장을 썼으나, 다음에는 견직(絹織)에, 나중에는 종이에 썼다. 종이는 AD 108년에 채윤(菜倫)이 발명하였다고 하는데, AD 150년경의 표본이 지금도 남아 있다.

한(漢)대의 기술상 두드러진 것은 종이의 발명뿐이 아니라 BC 100년경에는 자석(磁石)의 방향지시 작용을 발견하였고, 철을 최초로 주조한 기록이 있다. AD 31년의 한 저서에는 수평 수차(水車)가 활차(滑車)와 벨트에 의해서 풍구(송풍기)를 움직였다. 이것이 농기구 주조에 쓰이는 쇠(鐵)를 녹이기 위해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후 AD 290년에 수직(垂直) 수차가 나타나고 이와 더불어 해머의 작용으로 움직이는 수력(水力) 방아가 나타났다. 이와 같이 일찍 발달한 중국의 과학이 발전되지 않은 이유는 이론적 연구와 경험적 연구가 서로 분리되어 있는 데 있다.

중국의 천문학[편집]

中國-天文學

중국의 천문학은 역서(曆書)의 제작으로 시작된다. 은대(殷代)에 이미 조잡한 태음태양력(太陰太陽曆)을 만들었다. 주대(周代)의 중엽에 윤달(閏月)을 넣는 규칙이 정확하여지고, 정연한 태음태양력이 만들어졌다. 또 BC 4세기경부터 행성(行星)을 관측했으며, 일·월식(日·月蝕)의 주기성 등이 주목되었다. BC 104년 한(漢) 무제(武帝)의 태초 원년(太初元年)에, '태초력(太初曆)'이 제정되었다. 이 태초력은 한말(漢末)에 유운(劉韻)에 의해 수정되어 '삼통력(三統曆)'으로 되었으며, 이것이 후세 역법의 표본이 되었다.

우주론(宇宙論)은 선진(先秦) 시대와 후한 시대에 활발하였다. 『주비산경』에는 개천설(蓋天說)이 자세히 기술되었다. 이 개천설에 대해서 후한의 장형(張衡)이 『혼천의(渾天儀)』에서 혼천설을 논했다.

천문학적으로 보아 주목할 만한 역법은 후한대 유홍(劉洪)의 『건상력(乾象曆)』이다. 이 역법에서 처음으로 달의 운동이 등속(等速)이 아니고, 현재 중심차(中心差)라고 불리는 불규칙성이 인정되었다. 이 발견으로 삭(朔)의 시각의 계산이 정확하게 되고, 드디어 일·월식의 예보 계산을 하게 되었다. 진대(晋代)에는 천문학자 우희(虞喜)가 세차(歲差)를 발견했다. 수대(隋代)의 역법 『황극력(皇極曆)』은 유탁의 것인데, 이것은 달뿐이 아니라 태양 운동의 불규칙성도 고려하여 실제의 합(合)에 의거해서 삭의 시각을 계산하는 정삭법(定朔法)이 채용되고 있다. 또 세차가 채택되어 윤달을 두는 법도 개량되었다. 이 역법은 실제로는 사용되지 않았으나, 당대(唐代)에 이르러 이양풍(李凉風)의 『의봉력(儀鳳曆)』으로 유탁의 이상이 실현되었다. 그 후의 역법으로는 원대(元代)의 곽수경(郭守敬)에 의한 『수시력(授時曆)』이 있다. 이것은 명대(明代)에 『대통력(大統曆)』이라고 개칭하여 사용되었다.

개천설[편집]

蓋天說

중국 고대의 우주관의 하나로, 하늘은 개립(蓋笠)꼴이며, 지상 8만리 상에서 덮여 있고, 북극의 부분이 삿갓의 중심이 되어 있다고 한다. 이 설은 고대 천문서 『주산비경』에 처음으로 보인다. 천(天)에 있는 태양 기타의 천체는 북극(北極)을 중심으로 하는 원 위에서 움직인다고 하며, 낮과 밤이 생기는 원인은 태양에 이르는 거리의 원근으로 설명되고 있다. 원시적인 우주관으로 인도에서 일어난 불교의 수미산설(須彌山說)과 많은 유사점이 있다. 그러나 이 두 설의 관련에 대해선 확실치 않다.

당대(唐代)에는 인도의 천문학이 들어왔고, 또 원·명(元·明) 시대에는 아라비아 천문학이 들어왔으나 큰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그러나 명말(明末)에 기독교 선교사들에 의해서 서양의 천문서가 번역됨으로써 종래와는 달리 큰 영향을 주었다. 이 역서는 『서양 신법역서(西洋新法曆書)』라고

하였는데,

탕약망(Adam Schall) 등의 노력에 의한다. 청조(淸朝) 초에 이 서양신법에 의해서 계산된 역법이 『시헌서(時憲書)』의 이름으로 배포되었다.

천문기기로는 옛것으로는 비 또는 표(表)가 쓰였다. 한대에는 혼천의가 천문관측에 사용되어 관측이 상세하여졌다. 혼천의는 망원경이 발명되기 전에는 가장 정교한 관측기기였으며, 명대 혼천의는 지금도 보관되어 있다.

혼천설[편집]

渾天說

천지를 계란 모양에 비유하여 하늘은 밖에 있으며, 난황(卵黃:地)을 싸고 일주운동(日周運動)을 한다. 난각(卵殼)의 표면에는 끝이 없고 그 모양이 혼혼연(渾渾然)하다 하여 혼천이라 하였다. 이 설의 기원은 확실하지 않으나, 후한(後漢)의 장형은 혼천의를 써서 혼천설을 상세히 기술하였다. 혼천의 그 자체는 전한(前漢) 때에 처음으로 나타나는 천문 관측기기로서, 혼천설은 이 기기의 출현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듯하다. 개천설보다 발전된 일종의 지동설이다. 뒤에 개천(蓋天)과 혼천(渾天)의 시비가 논의되었다.

선야설[편집]

宣夜說

고대 중국의 우주관의 하나. 개천과 혼천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져 있으나 선야설은 분명하지가 않다. 후한의 채읍(菜邑)에 의하면, 선야설은 뒤가 이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진서(晋書)』 '천문지'의 선야설은 다음과 같다. 일월중성(日月衆星)은 자연히 허공 중에 떠 있고, 기(氣)에 의해서 움직이기도 하고 멎기도 한다. 따라서 그 운동은 극히 불확실하다. AD 440년경 우희(虞喜)는 선야설에 의해서 『안천론(安天論)』을 만들었다고 하나, 이 설도 확실히 알려지지 않았다.

삼통력[편집]

三統曆

BC 104년에서 84년까지 중국에서 쓰인 역법. 이 역법은 처음에 등평(鄧平)이 만들고, 뒤에 BC 1세기경 유운(劉韻)에 의해서 보수된 것이다. 유운의 삼통력은 적년(積年)의 법, 즉 일월 5성이 기준 위치에 왔을 때를 역(曆)의 근본적 기점(起點)으로 하는 법을 창시했다. 또 일식의 주기(周期)를 135개월로 하여 일식의 예보를 했고, 5성의 운동을 처음으로 역법에 취했으며, 더욱이 정확한 회합주기(수성 115.9일, 금성 584.13일 등)를 썼으며, 또 중기(中氣) 없는 달을 윤달로 하는 치윤(置閏)의 대원칙을 창시한 것 등이 역법 사상에 높이 평가되고 있다.

삼통력의

태양년(太陽年)은

365×385/1539일 (365.25016일)이고, 태음월(太陰月)은 29×43/81일 (29.530864일)이다.

혼천의[편집]

渾天儀

중국에서 천체의 위치를 측정하기 위해서 쓰인 기기. 육합의(六合儀)·삼진의(三辰儀)·사유의(四游儀)의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육합의는 최외부에 있는데, 3개의 고리(環)가 서로 맺고 있으며, 전부가 대의 지주(支柱)에 고정되어 있다. 삼진의는 이 안쪽에 있으며, 서로 맺는 4개의 고리가 남북 양극을 축(軸)으로 회전하게 되어 있다. 사유의는 가장 안쪽에 있고 남북 양극을 축으로 해서 회전하는 쌍환과 그 쌍환 중에서 남북으로 돌릴 수 있는 망통(望筒)이 있다. 이 망통은 임의의 방향으로 향하므로, 목적하는 천체로 돌려서 그 경위도(經緯度)를 알 수 있다. 아래쪽의 대에 새긴 홈통에는 물을 넣어 이 기기를 수평으로 유지한다. 가장 밖에 고정된 육합의는 지평권·홈적도권 및 각각 직교하는 자오권(子午圈)으로 되어 있어, 육합의와 사유의만으로도 적도(赤道)에 관한 천체의 위치를 측정할 수 있다. 삼진의에는 자오권 2개와 적도권 및 황도권(黃道圈)이 달려 있어, 황도에 관한 위치의 측정을 할 수 있다. 이상 모든 고리(環)에는 각각 눈금이 새겨져 있다. 천체의 위치를 알고자 하면 우선 28수(二八宿)의 표준성의 눈금을 육합의의 적도권 위에서 읽고, 다음에 목표의 천체를 망통에 넣어 각각에 대응하는 적도권 위의 눈금을 읽으면 양자의 차에서 표준성을 기준으로 한 적경차(赤經差), 즉 입수도(入宿度)를 알게 된다. 이 때에 사유의의 쌍환에 새긴 눈금에 의해서 북극 거리 즉 거극도(去極度)를 알게 된다. 미리 표준성의 위치를 알아두면 그 천체의 위치가 확정된다.

중국의 수학[편집]

中國-數學

중국의 수학은 모두가 구체적인 수계산이며 상시 실용성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따라서 그리스와 같은 논리적이며 체계적인 수학은 조직되지 못했다. 은대(殷代)와 주대(周代)의 수학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일찍이 산목(算木)이 사용되어 이것으로 간단한 4칙계산(四則計算)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고대의 수학은 역법(曆法) 계산의 필요와 동시에 일상생활의 필요에서 생겨났다. 전국시대에는 수학으로써 봉직한다는 기사가 있고, 또 6예(六藝)의 하나로서 관리의 자제가 반드시 배워야 하는 과목이었다. 한대(漢代) 이후에 많은 수학서가 저술되었으나, 당대(唐代)에 저술된 왕효통(王孝通)의 『집고산경(緝古算經)』을 포함해서 『산경십서(算經十書)』가 저명하다. 이 중에 『주비산경』에는 3·4·5가 직각삼각형의 세변이 된다는 피타고라스의 정리의 특수수가 있으나 오히려 천문서(天文書)라 할 수 있다. 10서 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구장산술(九章算術)』인데, 이 책은 한초(漢初)에 거의 완성되었으며, 그뒤 얼마간 수정되었다. 극히 짜임새 있는 수학책으로, 훌륭한 내용이다. 다원 1차방정식의 풀이, 여러 가지 도형의 면적 또는 체적 계산이 씌어 있다. 특히 이 책에는 3세기에 유휘(劉徽)가 상세한 주석을 붙였다. 유휘는 면적 또는 체적 계산에서 교묘한 증명을 하였으니, 일찍이 극한(極限)의 사상을 갖고 있었다.

『산경십서』 중의 『손자산경(孫子算經)』 『오조산경(五曹算經)』 『하후양산경(夏候陽算經)』 『장구건산경(張邱建算經)』 『오경산술(五經算術)』 등의 수학서는 내용이 낮은데, 그 중에는 부정(不定)방정식도 다루고 있다. 『철술(綴術)』은 남북조(南北朝) 시대의 수학자 조충지(祖沖之)가 저술한 것으로, 아마도 원(圓)의 수학을 논한 듯하나 없어져서 현존하지 않는다. 『집고산경(緝古算經)』에서는 3차방정식이 풀이되어 있다.

송말(宋末)에서 원초(元初)에 이르는 동안은 중국 수학의 비약시대이며, 진구소(秦九韶)·이야(李冶)·주세걸(朱世傑)·양휘(楊輝)의 4대가(大家)가 나타났다. 진구소의 『수서구장(數書九章)』에는 특히 부정(不定)방정식이 상세히 다루어져 있고, 또 영(零)의 기호가 쓰여져 있다. 이야·주세걸의 저서에는 특수한 방법으로 미지수(X)를 나타내어 계산하는 천원술(天元術)이 처음으로 다루어져 있는데, 이것은 일종의 대수학이다. 명말(明末)에 기독교 선교사가 많이 들어와 서양의 수학을 전했다.

구장산술[편집]

九章算術

중국 최고의 수학서. 저자는 불명. 위(魏)의 유휘가 263년에 주석을 써서 정본(定本)이 되었는데, 그의 서문에 의하면 전한(前漢)의 학자가 진대(秦代)의 유문을 모아서 편집한 것이라 한다. 방전(方田)이 20문, 속미(粟米)가 46문, 쇠분(衰分)이 20문, 소광(少廣)이 24문, 상공(商工)이 28문, 균수(均輸)가 28문, 영부족(盈不足)이 20문, 방정(方程)이 18문, 구고(勾股)가 24문, 도합 9장으로 되어 있다. 취재의 다양성과 고차의 수학적 내용을 지닌 점으로 보아 당(唐) 이전의 가장 훌륭한 수학서이다. 당대에 이순풍(李淳風)의 주석이 더하여져서, 관리의 교과서로서 채택된 산경십서 중의 하나이다. 그 뒤에 이 책의 체계를 본딴 수학서가 나타났다. 그 내용은 기하학적 도형의 면적·체적의 계산, 1차연립방정식·2차방정식의 풀이가 들어 있다. 또 계산기로서 산목(算木)이 쓰였으며, 계산에는 정수(正數)와 더불어 부수(負數)도 다루어졌다. 그리고 단위분수·가정법 등 서방수학과의 관계를 연상케 하는 내용을 지니고 있다. 같은 시대의 그리스 수학과 견주어, 산수와 대수의 분야에서는 결코 뒤지지 않는다.

유휘[편집]

劉徽(300년경)

역사상 활약한 가장 위대한 수학자. 상세한 이력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한대(漢代)에 나온 『구장산술(九章算術)』에 주(註)를 쓴(263년) 외에 『해도산경(海島算經)』을 썼다. 『구장산술주』는 보통의 주서가 아니고 수학자로서의 그의 진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원주율(圓周率)의 산출에서 무한등비급수의 극한(極限)과 흡사한 방법을 적용하여 극히 정확한 값을 구했다. 또 여러 가지 모양의 체적을 구함에 있어 훌륭한 기하학적인 직관에 의했고, 또 극한의 생각을 써서 성공했다.

중국의 의학[편집]

中國-醫學

중국의 의학을 대표하는 책은 『황제내경(黃帝內經)』과 『상한론(傷寒論)』이 편찬되어 있다. 앞의 것은 저자(著者)도 성립 연대도 확실하지 않으나 전한(前漢) 시대에 된 듯하다. 이 책은 기초 의학, 즉 생리(生理)와 병리를 논한 서적으로는 중국의학을 대표한다. 소문(素問)과 영추(靈樞)로 나뉘는데 후자는 침구(鍼灸)를 상세히 기록하였다.

『상한론』은 서기 200년경, 후한의 장기(張機, 字는 仲業)에 의해서 편찬되었다. 병(病)에 대한 치료법을 쓴 것으로 임상가(臨床家)의 보전이 되었다. 병은 주로 외부의 사기(邪氣)가 체내에 들어감으로써 일어나는 것으로 그 진행 상태에 따라서 6종으로 나누어진다. 맥박과 신체의 표면에 나타나는 증상을 보고 그것을 치료하는 약물과 그 조합(調合)을 상세히 기재하고 있다. 이 경우에 개개의 인체의 체질을 감안해서 달리한다. 『상한론』에서는 인체나 증상을 모두 음양(陰陽)으로 나누어 2원론(二元論)의 입장에서 설명하고 있다. 이에 대해 『황제내경』에서는 5행설을 취하여, 복잡한 이론을 만들었다. 후세의 의학에 미친 영향은 『상한론』이 훨씬 크다.

수·당 시대의 의서로서는 수대의 소원방(巢元方)의 『제병원후론(諸病源候論)』과 당대의 손사막(孫思邈)의 『천금방』이 있다. 『제병원후론』은 1,000여 종류의 병의 병세를 상세히 구체적으로 기술하였으나, 반면에 병의 원인·진단·예후 및 치료에 대해서는 신비적이며 미신적인 내용이 약간 있다. 『천금방』은 질병의 진단 및 치료의 요점과 질병에 대한 약의 효용도 상세히 써 있다.

중국의 기술[편집]

中國-技術

선사시대를 제외하고 역사시대에 들어와 은왕조에서는 갑자기 정교한 청동기(靑銅器)가 나타났다. 어떻게 이러한 청동기가 만들어졌는가에 대해서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청동으로 만든 무기·공구(工具) 등도 있다. 농업생산 면에서는 청동기의 농구(農具)는 거의 사용되지 않고 주로 목제와 석제(石製)였다. 청동기의 출현과 더불어 이 때에는 문자(文字)가 처음으로 출현했다. 즉 갑골문자(甲骨文字)이다.

춘추시대의 말기부터 전국시대에 걸쳐 나타난 사상가 중에 과학·기술사의 입장에서 보면 도가(道家)의 일파가 있다. 신선술(神仙術)이 생기고, 불로장수를 위한 약물(藥物)의 연구가 중국적인 연금술(鍊金術)을 낳게 했다. 현재 남아 있는 『묵자(墨子)』라는 책에는 수학상의 정의(定義)와 광학상의 지식 ― 핀홀 카메라의 원리, 볼록거울과 오목거울에서의 물체와 상(像)의 관계 ― 이 씌어 있다.

전국시대의 유적이 근년에 많이 발굴되었는데 이 시대의 생산용구로서 철기(鐵器)가 출현되고 있다. 중국의 철기의 출현에 대해선 아직 확실하지 않으나, 전국시대에 철기의 주조(鑄造)가 활발하였던 것은 확실하다.

서방문명에서 주철(鑄鐵)이 나타난 때는 14세기의 유럽인데, 중국의 경우는 이미 BC 4세기이다. 철의 용융온도는 1,400℃이므로 초기의 제철은 원광(原鑛)을 환원(還元)하고, 그것을 단조(鍛造)하여 성형(成形)하였을 것이다. 주철(鑄鐵)의 기술은 중국이 유럽보다 1,700년이나 앞서 있다. 진(秦)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것은 우수한 철제 무기를 사용한 까닭이라 하는데, 진나라의 영역에 철광의 산지가 많은 것으로 보아 생각할 수 있는 일이다.

장형[편집]

張衡(78-139)

자는 평자(平子). 훈한 시대의 학자로 특히 천문·음양(陰陽)·역산에 통달하고, 『영헌(靈憲)』 1권을 저술한 외에도 혼천의(渾天儀)와 132년에 후풍지동의(候風地動儀:일종의 지진계)를 발명하였다. 이 지진계는 당시의 기록에 의해서 복원(復原)되었으며, 지진계로서는 세계 최초의 것이다.

채윤[편집]

蔡倫(1세기 중반-2세기 초)

후한의 환관(宦官)으로, 명제(明帝) 말년에 비로소 관리가 되어 후에 상방령(尙方令)이 되었다. 그 후 용정후(龍亭侯)에 봉해졌고 다시 장낙의 태복(太僕)이 되었으나, 지난날 제(帝)의 조모(祖母)를 모함한 죄를 두려워하여 음독 자살했다. 그는 기술상의 지식에 뛰어났으며, 특히 종이를 발명했다. 그 이전에는 백견(白絹)에 글자를 썼으나, 그가 비로소 수피(樹皮)·마포(麻布)·어망(魚網) 등을 써서 종이를 만들고, 105년 화제(和帝)에게 헌상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채후지(蔡侯紙)라고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