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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과학[편집]

中世-科學

고대·중세·르네상스기를 거쳐서 성립한 이른바 '근대과학'으로의 길은 크게 말해서 2갈래의 경로가 있었다. 하나는 고대 그리스에서 성립된 과학을 중세 후기의 서유럽에 전달하여 과학 르네상스의 소재(素材)를 제공하는 아라비아 과학, 다른 하나는 이 아라비아 경유의 고대과학을 받아들여 소화해서 르네상스로 보낼 지반을 준비한 서구의 중세과학이다. 이 경로에 인도·비잔티움·페르시아·시리아 그 밖의 잔지류가 합류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보조적인 것에 불과하며, 주류는 아라비아와 서유럽 ― 특히 서유럽이었다. 왜냐하면 근대과학이 성립하는 무대는 서유럽이고 서유럽인에 의해서였으며, 아울러 서구적 정신의 기반에 있어서라는 것은 과학르네상스의 역사가 보이는 바와 같기 때문이다. 아라비아 과학은 서유럽의 과학르네상스를 보기 이전에 역사에서부터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이런 뜻에서, 과학의 역사의 주역은 전적으로 서유럽이었다고 해야 하겠다.

중세의 시대구분[편집]

中世-時代區分

역사의 흐름은 연속적인 것이니까, 명확한 선을 그어서 시대를 구분하는 것은 불합리한 노릇이나, 편의상 여기서는 '중세(中世)'를 서로마제국의 멸망(476년)부터 동로마제국의 멸망(1453년)까지의 약 천년간으로 하고자 한다. 말하자면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으로 인하여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것은 로마화(化)한 게르만족(族)이 근대과학의 담당인이 되는 계기가 되었고, 동로마제국이 멸망한 것은 서유럽 르네상스를 촉진시키는 동인(動因)의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와 같은 시대구분에는 충분한 역사적 의미가 있다 하겠다.

중세 전기[편집]

게르만의 지배와 문화[편집]

Germans-支配-文化

지적 암흑시대와 크리스트교[편집]

知的暗黑時代-基督敎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뒤 300년간의 서유럽은 게르만 여러 부족의 야만인들이 군웅할거(群雄割據)한 시대였다는 것은 역사지도로 잘 알 수가 있다.

'세계의 도성'으로 일컬어지던 수도(首道) 로마에서도 궁전은 약탈되고, 학교는 불타버려, 교양있는 로마인도 야만인의 하인이 되고 말았다. 기근(飢饉)으로 많은 사람이 굶어죽고, 유행병으로 많은 사람이 길거리에서 쓰러졌다. 그러나 서유럽을 휩쓴 게르만족의 난폭한 위세가 가져다 준 참해는 그 이상이었음은 당시의 로마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590-604 재위)의 고뇌의 수기가 잘 말하고 있다. "사람들이 비참하게 죽어가는 것을 생각한다면, 지금 우리들을 엄습하고 있는 질병이 도리어 얼마나 편한 죽음을 하게 해 주는가 생각하고, 거기에서 위안을 얻고 있다.…살아 남은 자의 수효는 적다. 그것도 밤낮 칼의 녹이 되고…로마는 업화(業火)에 싸여 폐허로 화하였다…"

이것이 중세 초기의 서유럽의 사회상태였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가 전한 문화는 궤멸하였다. 그 문화적 페허의 지배자는 전혀 무교양이었다. 게르만의 여러 왕 중에선 문화적이었던 동고트왕 테오도리크조차 서명하는 데 자기의 이름을 쓰지 못하여 늘 도장을 지니고 다녔다 한다. 중세 초의 문화의 암흑은 이만큼이나 깊었다. 그러므로 만일 이 깊은 암흑 속에 빛나고 있었던 한가닥의 빛이 없었더라면 중세기 전체가 완전한 '암흑시대'로 되었을 것이고, 따라서 르네상스시대도 나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 빛은 크리스트교였다.

크리스트교의 문화운동[편집]

基督敎-文化運動

기원전 380년에 로마제국의 국교로 되어 있었던 크리스트교회는 중세 초기의 암흑시대에서의 오직 하나의 문화 담당자였다. 크리스트교도는 서유럽 전토(全土)를 동분서주하며 자신의 위험을 돌아보지 않고 거친 야만 속에 뛰어들어 포교에 전념하였다. 자기들의 무학·무교양에 남모르는 약함을 느끼고 있었던 게르만 여러 부족 사이에 크리스트교적 계몽은 점차로 침투해 갔다. 완강했던 프랑크족의 왕 크로비스는 수많은 부하와 함께 세례를 받아 크리스트교로 개종했으며(493년), 프랑크 교회가 성립하였다. 이어서 서고트왕국도 개종하였다. 6세기 말에는 잉글랜드·스코틀랜드·아일랜드에 이르기까지 개종은 확대되고 서유럽 전토가 크리스트교국이 되었다. 중세 초기의 암흑 속에서부터, 이윽고 중세문화가 싹틀 온상이 이리하여 마련된 것이다. 이 온상에다 절멸되어 가던 고전문화의 씨를 주워모아 뿌린 사람들 중 주요한 인물들만을 들면 다음과 같다.

보이티우스(480-524)와 카시오도루스(487경, 583경)[편집]

Boethius―Cassiodorus

이 두 사람은 로마의 명문 출신으로서 함께 동고트왕국(지금의 이탈리아·스위스·오스트리아 등을 포함하는 영역)의 테오도리크왕에게 초빙되어서 고관의 지위에 있었다. 게르만족은 로마인을 지배하면서 한편으로는 로마문화를 존경하며, 그 문물제도를 도입, 로마인 중의 뛰어난 학자에게 높은 지위를 주는 것을 아끼지 않았다. 보이티우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라틴어로 번역하여, 중세에 있어서 아리스토텔레스 연구의 실마리를 만들었다. 또 유클리드나 아르키메데스, 프톨레마이오스 등의 저술도 라틴어로 번역되어, 고대와 중세 사이에 과학적인 다리 구실을 하였다. 역사적으로 보아서 이는 위대한 업적이었다. 테오도리크는 그 업적을 높이 평가하고, 보에티우스에게 보낸 편지에 "귀하의 중개로 우리는 풍족한 그리스의 과학이나 예술을 우리말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고 감사하고 있다.

게르만인인 테오도리크가 그리스의 고전에 경의를 표하고 로마인의 말(라틴어)을 '우리말'이라고 하게 된 데에는 게르만의 라틴화(化)라는 중세문화의 특질의 하나가 이미 성립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불행히도 보이티우스는 테오도리크왕의 잘못된 생각에서 음모가로 투옥되어 참수형을 당하였다. 그가 옥중에서 서술한 『철학의 위안』은 그리스 철학과 크리스트교 정신의 융합에 의한 안심입명(安心立命)의 글로서, 후세에 널리 읽혀 큰 영향을 주었다. 보이티우스의 사후 동고트왕국은 멸망했으며, 문화의 꽃을 피울 듯이 보였던 이탈리아는 8세기에 프랑크왕 칼대제가 나타날 때까지, 다른 게르만 여러 부족의 지배하에서 피폐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보이티우스와 함께 테오도리크왕에게 중용(重用)되어 재상(帝相)의 지위에도 올랐던 카시오도루스는 40년간의 공직 생활 후 은퇴하고 사재를 들여 광대한 땅을 구해서 수도원을 건설하였다. 그리고 그 곳에다 그리스의 고전을 모아놓고 수도사(修道士)들에게 학문을 장려했고, 신학적(神學的) 저술이라든가 백과사전의 편찬에 힘썼다. 93세의 고령에도 저술에 정진했고, 6세기 최대의 저술가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그의 업적 또한 고대와 중세 사이의 귀중한 문화적 교량역할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귀중한 업적은 수도사의 임무 중에 '학문적 근로'라는 전통을 창조한 것이었다. 중세로부터 르네상스에 걸친 학문의 역사 위에서 가장 큰 역할을 다한 것은 수도원이며 수도사였던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수도원의 역할[편집]

修道院-役割

중세 초기의 암흑시대의 어두움을 비춘 오직 한 가닥의 빛이 크리스트교였다는 데서 당연한 결과로서, 중세 초기의 교육의 터는 크리스트교회였으며, 특히 수도원이었다. 후에 '중세대학'이라고 불리게끔 되는 교육기관의 대부분은 이러한 교회나 수도원의 부속학교의 발전이며, 중세 말기에 과학르네상스를 준비한 사람들은 모두가 교회인이고 특히 수도사였다.

이 같은 수도원을 서유럽에 창설한 것은 베네딕투스(Bene-dictus, 487경-543)였다. 529년, 로마 남쪽의 카시노산에 세워진 것이 바로 그것이다. 베네딕투스가 정한 계율은 그 후에 설립된 많은 수도원의 전통의 토대가 되었는데, 그 계율에 따르면, 수도사는 7시간의 노동, 7시간의 기도, 7시간의 수면을 지키는 것이었다.

카시오도루스가 수도사의 '노동' 가운데에 '학문적 노동(고전의 書寫, 번역, 연구)'을 포함시켜 그것이 그 후의 수도원의 전통으로 된 것은 학문의 역사에서 주목할 만한 일이다. 이리하여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이 수도원의 서고라든가 사자실(寫字室) 속에 수집되고 보존되게 되었다. 수도원은 중세 문화 성립의 중심이었다. 과학사의 권위자 G. 사튼이 카시노산 수도원 창설의 해인 529년을 고대와 중세의 분기점으로 생각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도 이런 뜻에서이다.

이쯤되면 중세의 암흑은 이미 밝아지기 시작하고 있음을 알 것이다. 이 서광은 프랑크왕국의 칼대제의 궁정학교에서 더욱 빛을 더하게 된다.

일찍 꽃핀 르네상스[편집]

-Renaissance

에스파냐와 영국을 제외하고 서유럽의 대부분을 지배하에 둔 프랑크왕 칼(Karl, 742-814)은 장군 및 정치가로서의 위대성에 따라 일반적으로 '대제'라고 불리고 있는데, 이 제왕은 또한 학문과 예술의 옹호자·추진자로서도 위대하였다. 그는 자기의 궁정에다 부속학교를 세우고, 또 국내의 교회와 수도원에도 부속학교의 설립을 명령하였기 때문에, 이 학교(라틴어로 '스콜라(Schola)'라고 불렸다)의 수효는 매우 많아졌다.

그는 또 뛰어난 학자를 각국으로부터 초빙하여 교육사업과 문화운동을 위탁하였다. 예컨대 이탈리아로부터는 피자의 페트루스, 파울루스 디아코누스, 에스파냐로부터는 테오도르프, 영국으로부터는 알쿠인… 이 가운데서도 알쿠인(Alcuin, 735경-804)은 대제의 열렬한 요구에 따라 그 궁전에서 일하게 되었으며(781년), 아헨에는 궁정학교를 개설하고 귀족과 그 자제의 교육에 종사하였다. 대제는 정신(廷臣)과 그 자제뿐 아니라, 자기의 황후(皇后)·황자(皇子)·황녀(皇女) 들도 궁정학교에 출석시키고 대제 자신도 여가 있는 대로 수업에 출석해서 물릴 줄 모르는 지식욕을 발휘하여 알쿠인 스승에게 열심히 질문하였다 한다.

그가 프랑크왕이 되었을 때에는, 그도 그의 국민도 학문을 몰랐으나, 그가 사망했을 때에는 수많은 학교와 도서관 및 장서와 뛰어난 학자가 남았다. 그의 궁정과 학교를 지배한 공기는 고전적 교양, 휴머니즘의 그것이다.

그의 스승 알쿠인의 이상(理想)도 고전의 부흥, 그의 말을 빌면 '새로운 아테네'였다. 그는 말하였다. "새로운 아테네! 아니,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배에 의해 높여져 있기 때문에 한층 더 훌륭한 아테네!"라고. 또 당시의 한 책 『프랑스 대기록』은 알쿠인의 교육적 업적을 칭송하여 "고마워라! 알쿠인 덕분에 학문과 지혜의 샘이 지금 파리에서는 아테네나 로마에 있었던 정도로 왕성해졌다"고 말하고 있다. 만일 고전의 부흥을 르네상스라고 부른다면 기원 8세기에 이미 르네상스는 시작되고 있었다(중세 철학사의 권위자 질송이 말했듯이). 그것은 '일찍 꽃핀 르네상스'였다.

라틴적 게르만의 크리스트교 문화[편집]

Latin的 German-基督敎文化

일찍 꽃핀 르네상스가 로마인에 의하여 계몽된 게르만족의 손으로 이루어진 사실에 유의하여야 한다. 라틴으로부터 게르만으로! 이 경향은 이로부터 더욱더 현저해졌다. 9세기경의 수도원 학교의 활동은 아일랜드에서 더욱 볼 만하여, 많은 뛰어난 학자를 배출하였고, 10세기가 되자 프랑스에서 그 활동이 한층 더 활발해졌다. 그리고 중세 말기로부터 배출되는 과학르네상스의 용사들의 대부분이 이 게르만족이라는 것은 과학자의 명부를 한번 슬쩍 보아도 알 것이다.

스콜라학[편집]

Schola學

한가지 유의하여야 할 것은, 이렇게 하여 성립한 중세 문화가 철저하게 크리스트교를 그 성립의 지반으로 삼고 있었다는 점이다. 게르만의 라틴화(化)라는 것은 게르만의 크리스트교화와 다를 바 없으며, 가르치는 자도 배우는 자도 모두 크리스트교도이며, 가르치고 배우는 것도 모두 그리스도를 위해서였다. 학교(스콜라)에서의 학문으로부터 발전한 '스콜라학'은 그리스철학과 크리스트교 교리를 조화(調和)시켜, 크리스트교 신학을 통일적으로 체계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요컨대, 중세문화는 철저한 종교문화이며, 따라서 반(反)과학적 문화였다. 사람들의 눈은 초자연계(超自然界)를 향하고, 자연계는 무시되고 기피되었다. 그와 같은 환경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 자연과학 업적이란 더없이 빈약하였음은 물론이다. 카시오도루스는 '7자유과(七自由科, 문법·수사학·변증론·산술·음악·기하학·천문학)'에 대한 1종의 백과전서를 저술했으나, 그것은 학문적인 해설서가 아니고, 이른바 '학문의 권장'에 지나지 않았다. 보에티우스에는 다섯 권의 『음악론』이 있지만, 그것도 특히 음향학(音響學)의 연구를 발전시킨 것은 아니며, 고대와 중세에서의 음악의 소개서로서 역사적 의미를 지니는 데 불과하다.

요컨대 중세 전기(前期)에서의 지적(知的) 활동의 의의는 새로운 학문적 추가가 아니라, 잃어진 학문에의 각성이었다. 이 각성이 없었더라면 중세문화는 성립하지 못했을 것이며, 따라서 나중에 보게 되는 바와 같은 르네상스도 일어나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라비아[편집]

아라비아의 과학과 기술[편집]

Arabia-科學-技術

고대 말기로부터 중세 전기에 걸쳐서 유럽이 지적 암흑시대에 있었을 무렵, 뛰어난 고대 그리스의 학문은 동로마제국(비잔틴 ― 뒤의 콘스탄티노플 ― 을 수도로 했으므로 비잔틴 제국이라고도 불린다)의 수도나, 시리아로부터 페르시아만에 이르는 나라들이 흩어져 있어서 명맥을 보전하고 있었다. 특히 시리아인은 그리스어도 알고 오리엔트의 말도 안다고 하는 특별한 학문적 무기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리스의 고전을 시리아 고전으로 번역하여 오리엔트 여러 나라에 전하여 보전한다는 귀중한 활약을 하였다. 기원 3세기경에는, 그 때까지 존경되어 오던 그리스어는 오리엔트 여러 나라에서는 시리아어로 위치가 뒤바뀔 정도로 시리아인의 학문적 활동은 활발하였다.

또 페르시아(이란)의 문화는 이미 낡았고, 중세 초엽에는 그 난숙기에 있었으나, 5세기 말에 이단자로서 추방된 크리스트교의 일파(네스토리우스파)의 학자들이 그리스 고전을 가지고 페르시아로 피난했던 일도 있어서, 페르시아는 고대문화의 보전소로 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문화적 지반 위에 건설된 것이 아라비아 문화(또는 사라센 문화, 이슬람 문화, 회교 문화 등으로 불린다)였다. 모하메트(아라비아식으로는 무하마드)가 아라비아를 통일한 631년부터 651년 사이에 시리아, 페르시아, 이집트가 아라비아제국에게 정복되었다. 697년에는 카르타고가 점령되어서 아프리카 북부 일대가 아라비아의 지배하에 들어가고, 711년에는 서고트왕국(지금의 에스파냐)을 정복, 이어서 중앙아시아, 북인도까지 진출하여 로마제국도 능가하는 방대한 대제국이 출현하였다. 이 무렵까지는 전적(專的)으로 정복의 시대여서, 문화적인 활동을 할 시간적인 여유는 없었으나, 8세기의 중엽 이후, 이른바 압바스왕조가 시작되고서부터, 회교제왕(諸王)의 지도하에서 아라비아 문화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속도로 발전하게 되었다.

동쪽은 인도 변경으로부터 서쪽은 에스파냐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지배하였기 때문에, 아라비아 문화권은 중국인, 인도인, 몽고인으로부터 시리아인, 그리스인, 아프리카인, 에스파냐인, 그 위에 각지에 흩어져 있는 유태인 등 다종 다양한 인종을 포함하였다. 회교왕은 문화를 흡수하기 위하여서 종교와 인종의 차이에 대하여 관대하였을 뿐 아니라 피정복자인 시리아나 페르시아의 학자를 존경하고 우대하였다. 그리고 인도인에게는 산술·대수·삼각법·약화학을 배우고 그리스인에게는 논리학·기하학·천문학·의학을 배웠다.

이 광대한 대제국의 구성상의 다양성은 아라비아어라고 하는 하나의 언어의 세력에 의하여 통일성을 지킬 수가 있었다. 모든 회교도의 의무의 하나는 그들의 성서인 코란을 읽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코란이라는 고전적 아라비아어의 교본에 의하여 회교권은 통일된 것이다. 아라비아어는 말하자면 당시의 세계어였다. 중세 후기의 크리스트교국에서 라틴어가 그러하였듯이 아라비아문화의 전성시에는 크리스트교도도, 유태교도도 아라비아어로 글을 쓰곤 했다.

그러한 정도로 당시(12세기경까지)의 아라비아어는 다인종 잡다한 문화권을 통일할 위신을 가지고 있었다. 알코올, 알칼리,앨지브러(대수) 등 오늘날에도 아직 쓰이고 있는 아라비아 어원(語源)의 말이 적지 않음은 그 위신이 어느 정도인가를 말해 주고 있다.

8세기 중엽부터 문화 애호열에 사로잡힌 회교왕이 맨 처음에 착수한 것은 그리스, 페르시아, 또는 인도의 고전을 아라비아어로 번역하는 일이었다. 번역사업은 새로이 문화가 일어날 때에는 어느 문화에서도 볼 수 있는 현상인데, 수도 바그다드에는 일종의 번역국(局)이 설치되어서 대규모적인 번역이 실행되었다. 원서를 구하기 위하여서는 회교왕은 학자를 인도나 비잔틴으로 파견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하여, 9세기 말엽까지는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갈레노스, 유클리드, 히포크라테스, 아르키메데스 등 그리스 고전의 중요한 것이 거의 아라비아어로 번역되고, 그 중에는 주석마저 가해졌다. 여기서 특필할 것은 회교왕의 지배하에서는 그리스 고전 중의 문학방면은 경시되고, 주로 과학에 관심이 쏠렸다는 점이다. 아라비아 문화가 과학의 역사 위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는 것은 이 때문이었음은 다음에서 서술하는 바와 같다.

이 문화의 2대 중심지(동으로는 바그다드, 서로는 코르도바(에스파냐))에는 많은 학교·연구소·도서관·천문대 등이 설치되어, 세계 각지에서부터 학자가 모여들었다. 코르도바의 도서관은 10세기 말에는 60만권의 장서를 보유하였고, 도서목록만도 44권에 달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아라비아 과학의 업적[편집]

Arabia 科學-業績

아라비아 과학의 가장 큰 역사적인 공적은 그리스 과학의 고전을 수집·번역·보전하여 그것을 중세 말기의 서유럽에 전달하고, 과학 르네상스의 토대 공작에 공헌한 데에 있다.

그러나 아리비아 과학의 개개의 업적에 눈을 돌리면, 아라비아의 과학적 활동이 단순히 외래 과학의 수용(受容)·보전이라는 소극적인 활동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지식을 독자적으로 창조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들 개개의 업적을 여기에 소개하는 것은 물론 불가능하며, 그 편린을 보이는 데 그칠 수밖에 없다.

아라비아 과학의 역사적 의의[편집]

Arabia 科學-歷史的 意義7세기 중엽에 홀연히 역사의 무대에 뛰어들어 세계를 지배한 아라비아 문화는 11세기 말에는 이미 그 지배권을 잃고, 곧 역사의 무대에서부터 완전히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그 무렵에는 이미 아라비아 문화는 서유럽에 인도되어 문화의 지배권은 로저 베이컨이나 토마스 아퀴나스 등이 활약하는 라틴세계로 옮아가고 세계어로서의 위신은 아라비아어에서 라틴어로 양도되어 있었다. 고대 그리스의 귀중한 과학을 주워 모아 보존하고, 그것을 라틴세계로 넘겨 주기 위해 아라비아는 생겨나고, 그리고 죽었다. 『아라비아 야화(夜話)』와 같은 짧은 일생이었다. 그러나 근대문화가 거기에서부터 생겨나는 귀중한 일생이었다. 중세 후기의 과학의 역사는 거기서 시작된다.

아라비아 수학[편집]

Arabia 數學

아리비아의 수학은 인도와 그리스를 토대로 하여 전개되었다. 기하학은 그리스의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론』 13권의 번역사업에서 출발하고 높은 차원의 문제의 연구로 발전하였다. 같은 그리스의 수학자 아폴로니오스의 『원추곡선론』 8권 중 3권은 아라비아역(譯)만이 오늘날 남아 있다. 이와 비슷한 예는 이 밖에도 많은데 이는 아라비아 과학의 귀중한 역사적 공적이다.

대수학과 삼각법은 인도와 그리스, 특히 전자를 토대로 하여 아라비아에서 발전하였다. 인도는 산술과 대수학에서 이상한 천분(天分)을 보였는데, 페르시아 태생의 아라비아 최대의 수학자 알 콰리즈미(850년경 사망)는 인도 수학자 브라마굽타(598년 생)의 수학서를 토대로 하여 대수학을 건설하였다. 앨지브러(대수학)라는 명칭은 알 콰리즈미의 대수학서의 긴 아라비아어의 책이름의 일부분인 『알 자브루』에서 유래한다. 이것이 『대수학』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세계 최초의 서적이다. 알 콰리즈미는 또한 아라비아 최초로 삼각표를 만든 사람이기도 하다. 삼각법은 알 콰리즈미 천문학자인 알 바타니(858경-929)와 이븐 유누스(1009년 사망) 등에 의해 그리스와 인도의 그것을 훨씬 앞질렀다.

아라비아 대수학에 중요한 공헌을 한 학자 중에서 오마르 하이얌(1040경-1131경)의 이름을 빠뜨릴 수는 없다. 아라비아 수학의 최고의 업적으로 꼽히는 3차방정식의 기하학적 해법(解法)에 대한 그의 공적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 이 페르시아의 수학자는 또한 천문학자이자 철학자이며, 특히 시인으로서 뛰어났다. 그의 시집 『루바이야트』 (페르시아어로 '4행시'를 의미하는 루바이의 복수형)는 무르익은 페르시아 문화의 휴머니즘을 노래하였고, 경건한 회교상(回敎像)과 기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여기에서 오늘날 우리들이 쓰고 있는 산용수자(算用數字) 이른바 '아라비아 숫자'에 대해서 한마디 말하지 않을수 없다. 이것은 본래는 인도 숫자이며, 그것이 8세기 후반에 인도의 천문서와 더불어 아라비아에 들어온 후에 아라비아 과학과 함께 서유럽으로 전하여졌기 때문에 서유럽인은 그것을 아라비아 숫자라고 부른 것이다. 아라비아 숫자와 함께 제로(0)기호를 사용하는10진법의 기수방식(記數方式)이 인도로부터 들어온 것은, 진정 수학 계산법의 세계적 혁명이었다.

천문학과 점성술[편집]

天文學-占星術

그리스에서는 천문학은 수학의 일부분 ― 천체의 수학 ― 이었던 것처럼 아라비아에서도 수학은 천문학과 연결되고 있었다. 알 파리즈미, 알 콰타니, 이븐 유누스를 비롯하여 뛰어난 수학자는 동시에 뛰어난 천문학자였다. 또 아라비아의 천문학이 인도와 그리스를 토대로 하여 발전한 것도 수학의 경우와 마찬가지였다.

아라비아의 수학이 유클리드의 기하학의 번역을 통하여 발전하였듯이 아라비아의 천문학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아라비아어 번역의 책이름 『알마게스트』)에 의해 큰 자극을 받았으나, 이론적으로는 프톨레마이오스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천문 관측의 정성어림과 정확성은 아라비아 천문학의 뛰어난 장점이었다.

여기서 천문학과 점성술의 관계에 대하여 한마디 언급하여야겠다. 고대·중세에서는 천문학과 점성술은 일체(一體)였다. 별점(星占)은 바빌로니아 지방에서 시작되어 그리스, 시리아, 페르시아로 전해지고, 그것이 아라비아 과학과 더불어 서유럽에서 환영받게 되었는데, 아라비아의 천문학자는 동시에 점성술사(術師)이며, 교황이나 귀족의 궁전에는 반드시 몇 명의 전용 점성술사가 있었다. 별점으로 천문학의 연구비를 벌어들이는 일은 근대 초기까지 계속되고, "딸격인 점성술이 빵을 벌어들이지 않았더라면 어머니격인 천문학은 굶어 죽었을 것이다"라고 말한 케플러의 말을 낳고 있다. 천체의 운행과 땅 위에서 사는 인간의 운명과의 사이에 관련을 구하는 사고방식은 오늘날도 계속 뿌리깊이 남아 있다.

천체의 운행이 지상의 현상이나 인간의 운명과 관계된다는 관념에서 별점이 생겨난 것은 메소포타미아 지방인 듯한데, 그것이 천문학과 더불어 그리스로 전해지고, 다시 시리아, 페르시아로 전해져 아라비아 세계에 퍼졌다. 로마시대에는 로마에도 전해졌지만, 당국에 의하여 배척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12세기경, 아라비아의 점성술 책이 서구로 전해진 뒤부터, 서유럽은 돌연 점성술의 애호자가 되고, 연금술과 함께 대학의 교과목으로서 채택되었다. 중세 후기의 서유럽의 학자들은 예외없이 점성술사이고 연금술사였다.

점성술의 이론적 근거는 인간을 둘러싼 우주 즉 '대우주'와 그 축도(縮圖)인 인간 즉 '소우주'와의 유기적 관련(소우주에 대한 대우주의 지배)에 있다. 인체의 각 기관으로 말하더라도, 각각 별개의 행성(行星)에 지배되는 것이니까, 질병을 고치기 위하여서는 그 행성의 순회(巡廻)를 알아보는 일이 선결문제로 되었다. 로저 베이컨과 같은 근대적인 학자마저 "요즈음의 의사는 별의 순회를 연구하지 않아 곤란하다"고 탄식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베이컨의 항 참조). 출혈을 수반하는 수술도 알맞는 별의 순회(巡廻)를 고르고, 질병의 경과도 발병하였을 때의 별의 순회에 따라 예측한다는 식이었다. 미신적인 이론이기는 하지만, 그 때문에 천체를 관측한 것이 과학적 천문학의 지식을 발달시켰다.

이와 동일한 이론에서 천상(天上)의 행성과 지상의 금속과의 사이에도 지배관계가 있었다. 태양은 금(金), 달은 은(銀), 금성은 구리, 수성은 수은, 화성은 철, 목성은 주석, 토성은 납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점성술은 연금술과도 관계가 있으며, 말하자면 쌍둥이로서 태어나 자랐다고 할 수 있다.

화학과 연금술[편집]

化學-鍊金術

천문과 별점이 일체(一體)였다는 것은 화학과 연금술과의 관계에도 통용된다. 화학을 과학적, 연금술을 마술적으로 구분하는 근대적인 분석은 일체(一體)로서의 양자의 역사에서는 무의미하다. 천문가가 동시에 점성사였던 것같이 화학자는 동시에 연금가였다. 아라비아 연금술의 대표자로 꼽히는 자비르 이븐 하이안(라틴명으로는 게베르, 8세기 후반에 활약)은 연금술사라기보다는 오히려 화학자이며, 같은 연금술사 알 라지(라틴명으로는 라제스, 865-925)는 뛰어난 화학자이자 의학자였다.

또 연금술을 단순히 비금속(卑金屬)을 귀금속으로 변환시키는 신비적인 요술이라고만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며, 거기에는 고대 그리스의 원소관(元素觀)이라든가 원자론으로까지 거슬러올라가는 물질 이론 ― 설혹 그것이 오늘날에는 아무리 유치한 것이라고 생각되든 ― 이 있었던 것이며, 그 이론의 실험이었던 것이다. 연금술이 성립한 것은 기원 1세기경, 당시 그리스과학의 중심으로 되어 있었던 알렉산드리아 주변에 있어서였다. 그것이 이집트, 시리아, 페르시아를 거쳐 아라비아로 들어가고, 열렬한 연구·실험의 대상이 된 것이다.

연금술을 이론적으로 완성한 것은 아라비아의 학자들이었는데, 그들에 따르면 금속의 성분은 황과 수은이며, 그 두 가지는 모두 그리스인이 말하는 4원소(흙·물·공기·불)로 되어 있다. 따라서 4원소의 혼합 비율을 인공적으로 바꿈으로써 금속의 성분을 바꿀 수가 있고, 그로써 금속의 성질을 전환시킬 수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단 이 인공 전환에는 일종의 매약(媒藥)이 필요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이 매약에는 여러 가지 명칭이 붙여졌는데 일반적으로는 '엘릭시르(哲學者의 돌)'로 불리고 있다. 이 엘릭시르를 연금가들은 필사적인 노력으로 탐구했으나 발견하는 데 성공하였다는 기록은 없고, 결국 납을 황금으로 바꾸는 야망은 꿈으로 끝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는 꿈이야기가 되지만, 이 연금술적 실험으로부터 화학 실험의 실제적 기술과 지식이 발전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한편 현대과학이 성취한 원자의 인공변환(人工變換)을 상기하면 아이디어의 역사로서는 흥미진진한 것이 있다.

아라비아의 의학[편집]

-醫學

아라비아에서는 의사는 높은 지위를 부여받고 활발히 활동했으며, 의학에 관한 저술도 많다. 그렇지만 독창적인 공헌은 적고, 그리스의 히포크라테스나 갈레노스의 의학, 디오스코리데스의 약물학 등의 번역·연구의 범위를 그다지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당시 알려져 있었던 의학 지식을 체계화한 백과전서적 저술에는 뛰어난 것이 있다.

아라비아 의학의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하면, 연금술의 항에서도 말한 바 있는 알 라지와, 중세 후기의 서유럽에서 의학의 권위로 꼽혔던 이븐 시나(라틴 이름으로는 아비켄나, 980-1037)가 우선 머리에 떠오른다. 알 라지(라틴 이름으로 라제스가 일반적)는 페르시아인으로, 뛰어난 임상의(臨床醫)이다. 과학·철학·신학·논리학·수학 등 광범위한 영역에 걸치는 수많은 논저(論著)가 있으며, 천연두와 홍역에 관한 독창적인 논문을 포함한 백과전서적인 많은 의학 교과서를 저술하였다. 아라비아권뿐 아니라 중세 세계를 통하여 최대의 의학자로 꼽힌다. 이븐 시나도 페르시아인으로서, 알 라지와 동일하게(라기 보다도 근대 이전의 ― 학문이 각종 전문분야로 분화하기 이전의 ― 학자가 모두 그러했듯이) 의학 외에도 철학·신학·천문·수학 등 다방면의 저술이 있었는데, 후세에 미친 영향 중 가장 컸던 것은 서유럽에서 『카논』으로서 알려져 있는 의학교전(醫學敎典)이다. 이것은 아라비아 과학에서의 최고 업적 중의 하나이며, 후에 라틴어로 번역되어, 서유럽 여러 대학의 모범적 의학교과서로서 17세기 말까지 사용되었다.

아라비아의 물리학[편집]

-物理學

수가 적은 물리 방면의 학자 가운데서 홀로 두각을 나타낸 사람은 이브누루 하이탐(965-1020)으로서, 라틴 이름으로 알하젠으로서 유명하다. 그의 주요 업적은 광학에 있고, 실험적인 방법에서 매우 뛰어난 진보를 보였다. 대기층을 통과하는 빛의 굴절, 구면경(球面鏡)이나 포물면경(抛物面鏡)에서의 빛의 반사, 렌즈의 확대력, 인간의 눈의 구조와 시각 등에 대한 광학의 수학적 연구는 뛰어난 업적이다. 철학·의학·수학·천문학 등에 관한 것도 포함하여 많은 저술이 있는데, 특히 광학에 관한 논문의 라틴역은 서유럽의 과학 진보에 큰 영향을 주었고, 서유럽에서의 광학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로저 베이컨(영국 13세기)의 업적도 알하젠에게 시사된 것이라고 한다.

아라비아의 기술[편집]

-技術

아라비아의 기술에 대해서는 조사·연구가 지금도 매우 불충분하여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나침반에 관한 기록은 기원 2세기의 중국에 있고, 화약도 중국에서는 유럽보다 훨씬 이전에 알려져 있었으므로, 인도나 중국과 왕성한 상업상의 교류가 있었던 아라비아로 그 지식이 흘러 들어간 것으로 생각된다. 제지기술도 중국에서부터 전해진 듯하다. 8세기 말에는 바그다드나 다마스커스에 제지공장이 세워졌다 한다. 회교왕 하룬 알 라시드(786-809)는 프랑크왕국의 칼대제에게 대관식의 선물로 지침(指針)이 있고 시각을 알리는 정교한 물시계를 증정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것은 아라비아에서 정밀한 기계적 기술이 발달하고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중세 후기[편집]

중세 후기의 과학[편집]

中世後期-科學

아라비아가 그리스과학의 고전을 모아 그 지식을 정력적으로 흡수·소화하고, 나아가서 자신의 독창(獨創)을 거기에다 추가하고 있었던 무렵 서유럽은 지적 암흑시대를 벗어나 '일찍 꽃핀 르네상스'로도 불리는 문화적 각성의 시대이며, 이윽고 흘러들어오는 아라비아문화를 흡수·소화하는 지력(知力) 배양의 시대였다. 그리고 아라비아가 그 때까지의 문화적 지배권(支配權)을 잃은 12세기에는 서유럽의 크리스트교도는 그 문화적 의욕에서는 아라비아를 훨씬 앞지르고 있었다. 이는 주목할 만한 일이다. 왜냐하면 아라비아과학이 서유럽에 전해지자, 크리스트교적 교육으로 자라난 크리스트교도가 이와 같은 아주 새로운 이질적인 학문을 열광적으로 받아들여 순식간에 소화한 것은 그 동안에 길러진 지력과 의욕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중세 후기의 과학의 역사는, 이와 같은 문화적 각성기에 있었던 서유럽 ― 라틴화된 게르만 제국(諸國) ― 또는 게르만화된 크리스트교국으로 아라비아 과학이 침입하는 과정에서 시작된다.

아라비아과학의 번역[편집]

Arabia科學-飜譯

아라비아과학이 그리스과학의 번역사업에서 비롯하였듯이, 서유럽 크리스트교국의 문화활동은 아라비아과학 ― 실질적으로는 아라비아어역의 그리스과학 ― 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러나 기묘한 문자로 씌어진 이 난해한 다른 나라말을 라틴어로 고칠 수 있는 사람은 매우 적었다. 11세기의 아프리카인 콘스탄티누스는 그 최초의 적격자였다. 그는 카시노산의 수도원에서 많은 아라비아 서적을 라틴어로 옮겨 놓았다. 그러한 번역서에는 막대한 지식과 경험이 채워져 있었다. 유럽의 진보적인 학자가 받은 자극은 통렬하였다. 12세기부터 13세기 중엽에 걸친 크리스트교도 학자의 제일 첫째의 학문 활동은 아라비아어를 배워서 아라비아어 문헌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일이었는데, 뛰어난 번역가가 뒤를 이어 나타났다. 에스파냐는 그 지리적 관계에서 회교도와 크리스트교도와의 접촉점이며, 특히 톨레도는 회교도에 둘러싸인 크리스트교국이라는 지위에 있었는데, 톨레도의 대사교(大司敎)는 자기 교회 내에 번역소를 두고, 많은 학자를 모아서 번역사업에 종사케 하였다. 가장 뛰어난 번역자로서 유명한 크레모나의 제럴드(바르게는 헤럴드, 12세기 후반에 활동)는 처음에 이 번역소의 조수였다. 그는 아라비아어역의 프톨레마이오스, 아리스토텔레스, 유클리드, 갈레노스, 히포크라테스 등의 92권의 서적을 라틴어로 번역했다고 한다(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서가 오늘날에도 『알마게스트』라고 하는 아라비아어의 책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제럴드가 1175년에 번역을 마친 라틴어역 책이름의 존속에 의거한다). 이리하여 13세기의 중엽까지는 아라비아어의 과학문헌으로 중요한 것은 모두 라틴어로 옮겨졌다. 원래 그리스원전(原典)의 아라비아역이라고 하는 것도, 그 중간에 시리아인이나 유태인에 의한 시리아역이라든가 헤브라이역이 개재한 일이 많다. 따라서 아라비아어의 라틴역은 실은 '그리스원전의 시리아역의 헤브라이역의 아라비아역의 라틴역'인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러한 라틴역으로 그리스과학에 접하여 지식의 욕망을 자극받은 서유럽의 크리스트교도가 직접 그리스 원전에 접하고 그 원전으로부터 라틴어로의 직접 번역을 갈망하기에 이른 것은 자연적인 추세였다. 이리하여 13세기의 크리스트교도는 그리스 원전으로부터의 직접 번역의 사업을 개시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당시 십자군의 원정, 특히 콘스탄티노플의 점령 등에 의하여 그리스 원전의 소재지와 접촉할 기회가 많아진 것도 다행이었다. 독일의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영국의 로저 베이컨, 이탈리아의 토마스 아퀴나스 등 당시의 선구적 학자는 예외없이 번역에 종사하였다.

학문활동의 활발화[편집]

學問活動-活潑化

아라비아어를 통하여 라틴어의 세계로 침입해온 그리스의 과학은 거의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졌고, 새로운 지성(知性)과 지식이 크리스트교적 못자리로 이식되어서 새로운 시야가 즉시 움텄다. 학문의 세계는 갑자기 활발해졌다. 그 구체적인 현상의 하나는 중세대학의 탄생이다.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중세 세계의 국제성이 배양(培養)되어 오는 것이다.

중세의 과학관[편집]

中世-科學觀

크리스트교국 전체를 ― 보다 더 엄밀히 말하면 땅 위의 세계 전체를 ― 오직 하나의 세계 '그리스도의 나라'로 본 중세 유럽의 이념에서는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과학의 지위는 매우 낮았다. 자연계는 초자연계 ― 신의나라 ― 로 들어가는 발판에 지나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라 초자연적 세계에 들어가는 데는 그것은 오히려 기피되어야 할 방해물이 되기까지 했다. 인간의 이상적인 삶의 방식은 인간의 자연적 욕망을 부정하는 금욕주의였다. 그와 같은 이념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자연에 관한 학문이 경시되는 것은 당연하였다. 그 당시의 최고의 학문은 '신학'이었다. 그 밖의 모든 학문(자연의 학문을 포함시켜서 '철학'이라고 불렀다)은 신학을 위해서 유용한 것이 되지 못할 때는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철학은 신학의 종이다'라는 유명한 말은 바로 거기에서 생겨났다.

중세시대에는 모든 조직이 권위주의로 밑받침되어 있었으며, 이 조직은 피라미드형으로 표현된다. 피라미드의 정점(頂點)이

'권위'이었고 학문의 최고 권위는 신학이었다. 그리고 중세 세계의 최고 권위는 로마교황이었고, 서적의 최고 권위는 성서였다. 따라서 아라비아 과학을 받아들인 후로는 자연학 전체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 의학에서는 갈레노스와 이븐스나(아비케나), 천문학에서는 프톨레마이오스가 각기의 분야에서 최고 권위로 인정되었다. '권위'는 절대적이었다. 그것에 반항하는 자는 절대자에 대한 반역자이고, 나아가서는 로마 카톨릭 교회에 대한 이단자이며, 따라서 이단심문(종교재판)에 걸려질 죄인이었다.

중세의 붕괴의 시작[편집]

中世-崩壞-始作

이러한 중세 세계의 아라비아과학이 고대 그리스의 과학과 곁들여 갖고 침입해 왔을 때부터, 중세의 피라미드적 구성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아라비아과학 및 그것을 계기로 하여 그리스과학이 서유럽에 침입하여 널리 퍼져 나간 과정을 여기에서 자세히 말할 여유는 없지만, 앞서 말한 바와 같은 세계관에 서 있는 서유럽이 전혀 이질적인 이교 세계의 뛰어난 과학과 철학에 처음으로 접하였을 때의 놀라움이란 쉽게 상상할 수가 있다. 동시에 그만큼 이질적인 과학이나 철학에 접하여 즉시 그 위대성을 평가할 수가 있었던 중세 서유럽의 지성(知性)의 성장도(成長度)도 높이 평가되어야 하겠다.

예를 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세 전기(前期)에 보에티우스에 의해서 그 『논리학』이 소개되고 있었다. 그러나 자연학이 아라비아를 거쳐서 서유럽에 들어온 것은 12세기 말이었고, 유럽의 학자들은 경탄한 나머지 연구를 시작하였다. 자연철학은 서유럽에 있어서는 분명히 위험사상이었다. 그리하여 교회는, 1209년에 그 연구를 금지할 것을 포고하였다. 그러나 지식욕을 억압한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미 움직일 수 없는 세력을 가지고 중세 세계를 뒤흔들게 되었는데, 그 최초의 아리스토텔레스 연구의 대표자로서는 먼저 알베르투스 마그누스를 들어야 하겠다.

중세의 대학[편집]

中世-大學

예전에는 사원이나 교회가 거의 오직 하나의 교육시설이었으나, 12, 13세기에 이르러 사원이나 교회의 부설이 아닌 학문 연구의 조직이 서유럽 각지에 발생하였다. 이탈리아에서는 이미 살레르노와 볼로냐의 대학이 12세기 이전부터 있었는데, 12, 3세기에는 그 본을 딴 여러 대학이 이탈리아 각지에 창설되었다. 프랑스의 파리대학, 영국의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대학은 13세기의 것이었고 14세기에 이르자 유럽의 대학은 갑자기 그 수효를 불려 베오그라드, 크라코프, 빈, 하이델베르크, 쾰른 등의 여러 대학이 생겼다.

대학을 의미하는 영어의 university는 라틴어의 '조합(組合)'을 뜻하는 universitas에서 왔다. 예를 들면 볼로냐대학은 '학생조합', 그리고 파리·옥스퍼드·케임브리지 등은 '교사조합'으로부터 조직된 것이다.

참고삼아 부언한다면, 파리대학에 불만을 품은 몇 명의 교수가 학생을 데리고 영국의 옥스퍼드로 이주한 집단이 그 기원이고, 이탈리아의 파도바대학도 볼로냐대학 교수들이 이사해 옴으로써 시작된 것이다. 이 밖에도 여러 가지 점에서 중세대학의 역사를 말하면 긴 이야기가 된다.

중세세계의 국제성[편집]

中世世界-國際性

파리에서 옥스퍼드로 이주한 이야기에도 관련되는 것이지만 중세대학에서는 교사도 학생도 유럽 각국으로부터 모여 있었다. 거기에는 국경이 없었다. 크리스트교국 전체가 하나의 세계이고, 라틴어는 그 세계어이며, 로마 카톨릭교회는 세계교회, 교황은 세계의 원수(元首)였다(카톨릭이라는 말은 '세계적'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국제적인 집단의 대학에서도 라틴어만으로 학문과 학교생활이 가능하였던 것이다. 이 전통은 오래도록 남았고, 17세기 말의 뉴턴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도 라틴어로 씌어진 이유이다.

마그누스[편집]

Albertus Magnus(1207-1280)

독일 태생. 본명은 볼시테트의 알버트. 그의 학문이 위대하였기 때문에 라틴식으로 '대알베르투스'라고 한다. 그는 스콜라 철학의 대(大)문제인 '신앙'과 '이성'의 관계에 대해서 양자를 분명히 분리시켜, 신앙의 세계에 관해서는 플라톤주의를, 이성(理性)세계에 관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취하였다. 이 두 세계의 분리는 과학을 종교로부터 독립시키기 위한 기본적 조건이며, 그 뜻으로도 그는 근대 과학의 선구자라 하겠다. 그는 또한 천문·물리·화학·동식물·의학에도 통하였고, 화학 방면에서는 실험적인 업적도 거두고 있다(이 실험적인 업적은 열렬한 연금술 이론이 이어졌던 것과 관계가 있겠다).

그가 "자연은 아무리 쓸어버려도 곧 되돌아온다"고 한 말은 초자연에 자연을 종속시켜 자연을 경시 또는 부정하는 중세적 이념의 타파를 뜻한다는 점에서 중대하고도 크다. 그는 실천에 있어서도 날카롭고 정밀한 눈으로 자연을 관찰하고 박물학(博物學)을 연구하였다. '자연 관찰'은 근대과학의 출발의 첫걸음이라는 것은 물론이다.

또 "내가 여기에 기술하는 바는, 하나는 나 자신의 경험에 따른 것이며…"라는 또 다른 그의 말은, 성서나 권위의 말을 맹신함이 없이 자신의 경험에 확증을 구한다는 근대적인 경험주의(따라서 권위 부정의 정신)를 보이고 있다. 알베르투스에 있어서 이미 중세적 지도 이념이 흔들리기 시작하고, 과학르네상스가 태동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태동은 로저 베이컨에 있어서 한층 현저해졌다.

베이컨(로저)[편집]

Roger Bacon(1214-1294)

영국의 학자. 그는 주요 저서 『대저작(大著作)』으로 중세적 지도 이념에 정면으로 도전하였다. 그 제1부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이것은 훌륭한 사람이 승인하고 있는 바다. 이는 많은 사람의 의견이다. 그러므로 승인하여야 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오늘날의 사람들의 사고 방식이다" "여하튼 권위는 신앙을 강요할 수는 있지만 이해를 넓힐 수는 없다" ― 이것은 통렬한 권위 부정이다.

무엇보다도 주목하여야 할 그의 주장은 제6부의 실험과 학론이다. 오늘날에는 평범한 상식인 '실험' '실증(實證)'이라는 관념은 고대에도(그리스 과학에서조차) 중세에도 없었던 근대과학의 독특한 것이라는 것을 상기한다면 베이컨이 "만일 우리가 완전하고 십분 확실한 지식을 얻고자 원한다면 우리는 실험과학의 방법에 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실험과학(scientia experimentali)'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하였다는 것은 과학의 역사에서 하나의 혁명이었다고 하여도 좋겠다. 사실에 의한 검증(檢證)이라는 것은, 이것 역시 권위 맹종(盲從)에 대한 반역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제4부에서 "수학은 자연과학의 문이며 열쇠이다.…자연은 궁극에 있어서 수학적이다"라고 해서 수학의 중요성을 주장한 것도 '수학적·물리적 과학'으로서 요약되는 근대과학에의 문을 연 것을 의미하는 중대한 주장이다.

제5부는 광학에 관한 논문으로서, 지각(知覺)의 심리학적 해설, 눈의 구조와 생리, 반사와 굴절의 법칙, 거울이나 렌즈의 이론 등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지만, 그 지식은 아라비아 과학(알하젠)에서 출발하여 아라비아 과학을 앞지르고 있다. 로저 베이컨이 '새벽의 사자(使者, 근대의 여명(黎明)을 알리는 자)'라고 불리는 것은 당연하다.

중세의 과학자와 종교[편집]

中世-科學者-宗敎

알베르투스나 베이컨에서 이미 근대가 시작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3세기를 과학르네상스의 개시기로 보는 역사가도 있다. 모든 점에서 13세기는 근대를 지향하고 있다. 중세 최대의 신학자로 일컬어지는 토머스 아퀴나스(1225-1274)는 알베르투스의 제자인데, 그가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채택함으로써 수립한 신학은 자연주의적이며 과학적이기조차 했다. 13세기가 되자, 신학조차 자연을 경시(輕視)한다든지 부정하는 일은 없었다. "자연은 신을 비치는 거울이다" "신의 위대함의 증명은 신의 피조물(자연)의 구조 가운데서 찾아볼 수가 있다"라고 한 토머스에게 자연 연구는 충분한 지위를 부여받았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자연 연구가 자연과학으로서 독립하기까지에는 아직도 수세기의 과도기간이 필요하였다.

알베르투스나 베이컨의 근대성만을 주목하는 사람은, 그들을 신에 대한 반역자로 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알베르투스는 도미니코 수도단의 수도사(修道士)이며, 수도관구장(修道管區長)이고, 사교이기도 한 요컨대 경건한 크리스트교이며 성직자였다. 베이컨도 프란체스코파의 수도사이며, 그리스도의 나라를 습격하는 악마(반크리스트)의 군세를 격퇴하는 방법을 열심히 생각하던 미신가였고, 알베르투스도 토머스도 그러하였듯이 베이컨도 열렬한 연금술사이고 점성술의 신자였다. 반(反)중세적인 신사상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만년의 14년간은 수도원에 감금되었을 정도의 진보적인 베이컨이, 한편으로는 "성서와 모순되는 지식은 잘못이다"라고 하였고 "요즘의 의사는 별의 운행을 연구하지 않아 곤란하다"고 진지하게 탄식했었음은 기묘한 일이다. 베이컨의 실험과학의 주장을 계승하여 면밀한 실험과 관찰을 하고, 『저울에 의한 실험에 관하여』나 『실험 정역학(實驗靜力學)』을 저술한 독일의 니콜라우스 쿠사누스(1401-1464)는 반(反)종교적인 과학자가 아니라 경건한 신학자이며, 로마교황청의 최고관인 추기경이었다.

이 쿠사누스로서 중세과학의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되지만,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중세와 근대의 기묘한(이렇게 근대인에게는 생각된다) 딜레마는 아직도 수세기 계속되었다. 뉴턴조차 예외는 아니었다.

중세의 기술[편집]

中世-技術

인간의 근육적 노동력이 풍부하여 그것을 절약할 필요가 없으면, 그것을 절약하기 위한 기술이 생긴다든지 진보할 턱이 없다.

풍부한 노예노동력에 의존하고 있던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세계가 그러하였다. 로마제국이 멸망하고 전쟁노예의 공급이 정지된 뒤의 중세의 서유럽에서는 그 초기부터 노동력이 딸리기 시작, 후기에는 상업과 무역이 왕성해짐에 따라, 근육노동 이외의 노동력을 구하는 일이 급선무가 되었다. 그 요구에 따른 것이, 먼저 수력과 풍력이었다.

수차(水車)의 이용 역사는 고대로 거슬러올라간다. 그러나 중세에서는 수차의 응용 범위가 갑자기 확대되어, 제분·제재·제포(製布)·제염 등 다방면의 산업 노동력 원천이 되었고, 수차의 구조도 이에 따라 개선되어 갔다.

12세기 후반에는 나사(羅紗)의 직포(職布)에, 14세기까지는 금속의 단조(鍛造)해머에, 15세기에는 광산이나 염전의 양수펌프에 이용되었다. 이 이용으로 노동력이 증대하였을 뿐만 아니라 제품 자체의 질이 향상하였다.

풍차는 12세기 무렵부터 사용되었으며, 14세기에는 풍향에 따라 날개의 방향이 변하는 풍차가 발명되었다. "1대의 수차 또는 풍차는 노예 100인분의 노동력을 제공하였다"고, 어떤 학자는 계산하고 있다. 용광로가 처음 나타난 것은 14세기라고 하는데, 이로써 얻어지는 주철이 그 후의 공업에 큰 공헌을 하였다. 이 용광로의 온도를 높이는 데도 수력에 의한 송풍이 큰 역할을 하였다.

물의 이용에 관련하여 들 수 있는 것은 해상운수의 혁명적인 발전이다. 12세기의 항해용 나침반의 발명과 13세기에 고안된 키(舵)의 개량이 중대한 요인이었다. 이에 따라 그 후의 2세기간에 그 이전의 4,000년간의 진보에 필적하는 진보가 이루어져, 15세기 말에는 콜럼버스의 배가 대서양을 횡단하였다.

그 밖에 직기(織機), 방적기, 경운기, 마구(안장·편자) 등의 개량과 발명, 무엇보다도 혁명적인 문화적 발명 ― 인쇄술 ― 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인쇄술의 기원은 6세기의 중국으로 거슬러올라가는데, 서유럽에서의 목판인쇄는 13세기 말, 금속활자 사용은 14세기 말에 시작되고, 구텐베르크에 의하여 확립된 것이 15세기 중엽이었다. 기계장치의 시계는 13세기에 나타나고, 15세기에는 웬만큼 큰 거리에는 시계탑이 세워졌고, 시계 제작이 의미하는 정밀공작 기술의 진보의 의의(意義)는 매우 크다.

이리하여 근대 기술의 원형(原型)의 거의 대부분이 대체로 13세기경까지는 모두 갖추어졌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