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컴퓨터·환경·첨단·지구과학/과학의 발달/과학의 발달/르네상스의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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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의 과학·기술[편집]

Renaissance-科學·技術

암흑시대라고 평가되던 중세도 기본적인 기술 면에서는 몇가지의 진보를 가져왔는데, 이런 기술이 널리 활용되어 감에 따라 농업과 수공업이 발달하고 잉여생산물이 생기게 되고, 운수 수단의 개선과 더불어 상업의 진보를 촉진하였다. 중세도 끝나려 할 무렵에는 팔기 위한 상품의 생산 증대, 시장의 번영, 그리고 도시의 발달이 현저해졌다. 이들 여러 도시는 경제적으로, 이윽고 정치적으로도 독립하여 중세의 사회체제 ― 위계적(位階的)인 봉건제도 ― 를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몰락단계에 있던 봉건 기사(騎士)계급의 대신이 되고자 하는 신흥 자치 도시민은 새로운 정치형태인 절대군주제(絶對君主制)를 만들어 내었고, 이의 확립과 민족국가의 대두는 결국 중세 사회의 전(全)구조의 종말을 가져왔다.

르네상스의 개화와 종교개혁의 운동은 이 사회체제의 변혁 과정을 추진시키는 같은 움직임의 두 개의 면이었다. 일찍이 상업도시로서 성장하고 정치적으로도 독립을 쟁취한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에서 인문주의운동이 전개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인간성의 회복, 고전에의 복귀는 중세에 대한 대결이고, 봉건제에 대한 복종을 거부하려고 하는 상인들의 윤리의 반영이었다. 그런 까닭에 혁명적이었으며, 또 여기에서 이 운동이 의식적으로 추진되는 기반이 되기도 하였다. "경제는 자본주의적으로, 문학·예술은 고전적으로" 옮겨져 가는 것은 중세라는 과거에 대한 의식적인 절연이었다.

이는 당연히 세계관의 번혁도 가져온다. 중세적인 세계관은 신학과 자연철학의 긴밀한 결합 위에 성립하고 있었다. 사회의 체제 변혁의 물결이 중세사회의 커다란 권력의 일환이었던 교회를 자극하여 종교개혁의 바람이 일기 시작하였는데, 독일에서 민족적인 기초를 가지고 있는 종교의 독립이 주창된 단계로부터 농민전쟁(1525-1526), 뮌스터의 폭동(1533)을 거쳐 마침내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로 확대되어 가는 형태에서는, 보다 과격한 캘빈주의로 되어서 가톨릭 교회의 지배 전체의 거부로까지 진전했다. 크리스트교 신학의 세계관이 이리하여 타격을 입는 한편에서, 우선 자연철학에 대결하는 것으로서 새로운 과학이 탄생하였다. 이는 르네상스의 예술과 기술의 추구 속에서 수단과 자극을 준비하게 되고, 종교상의 논쟁에 의하여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 ― 진리를 갈구하는 근대정신을 준비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과학이 선수친 낡은 세계관에 대한 도전이야말로, 정치나 종교의 변혁이 가져온 것 이상으로 격렬하고 엄격한 것이었다.

기술의 진보[편집]

技術-進步

봉건제도를 타파하는 데 있어 힘이 되었던 것 중의 하나는 포술과 화약이었지만, 이를 대신할 새로운 지배는 부(富)에 보증되지 않으면 안되었고, 그런 면에서도 금속의 수요(需要)는 증대하였다. 채광·야금(冶金)과 정련, 금속가공 등의 기술은 급격히 발달하고, 화약의 제조, 알코올의 증류와 더불어 화학의 기초를 만드는 데 쓰였다. 그러나 르네상스기에 있어 최대의 진보를 보인 이들 분야보다도 가일층의 위세로 등장한 것은 항해술이었다. '항해의 시대'의 개막이 상업의 형태를 바꾸고, 도시와 국가의 번영을 좌우하였고(독일, 이탈리아의 쇠퇴와 포르투갈, 에스파냐, 그리고 영국과 네덜란드의 흉륭), 또한 신세계인 아메리카대륙의 발견도 유도하였다. 이는 천문학·지리학(항해술), 또는 역학(조선술, 기계술)과 같은 기성과학의 실용화이며 영광이었다.

점성술로부터 항해술로의 천문학적 대전환에 대표되는 과학과 기술의 밀접화는, 한편에서는 과학의 사회적 수요를 낳았고 또 새로운 기구(器具)나 지도의 제작자 같은 지식적인 새로운 형(型)의 직업인 층(層)도 낳았다. 다른 한편으로는 생산기술의 진보에 따라 종래의 직인(職人)의 일에도 분화와 협업화가 나타나, 축적되는 기술적인 지식은 증대하고, 그 조직화·체계화가 요구되었다.

이리하여 직인층 가운데서부터 학문에 접근하는 사람들( 기술자)이 파생되고 새로운 과학의 형성에 참여하게 되었다.

다 빈치[편집]

Leonardo da Vinci(1452-1519)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과학자·화가. 빈치라는 곳에서 태어나 1466년경 피렌체에서 화가 베로키오의 제자가 됐고 1472년에는 어엿한 화가로서 조합에 등록되었다. 후에 밀라노 공작의 스포르차가(家)의 로도비코(이루 모로)에 초빙되었다.

14세기 이후의 이탈리아에서는 피렌체, 베네치아, 제노바, 밀라노, 피사 등이 주위의 봉건사회에서 자유도시국가로 독립하여 상공업이 번영하였으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이들 자유도시민을 반영한 대표적 인물로서 매우 많은 분야에서 뛰어난 일을 한 천재적 거인이다.

그는 사물을 오랜 종교의 사고방식으로가 아니고 실험·관찰에 의하여 사실을 존중하는 과학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그리스 과학과 시민 속의 기술을 결합시켜 시민에 소용되는 예술이나 기술적 발명의 창조적 활동을 하였다.

지렛대의 원리를 연구하고, 피렌체의 중심공업인 모직물의 방적기 개량을 기도하여 자유도시를 위협하는 외적을 막는 병기로서 투석기나 구포(臼砲), 전차, 잠수기(潛水器) 등을 고안한 외에 수압기, 양수기, 화폐 주조기, 자동 톱, 송풍기, 그네추를 이용한 펌프 등을 설계, 이 밖에 도시나 운하의 설계도 하였다. 또 수류, 기류에 관하여 동(動)역학적 연구를 하고, 특히 비행기의 연구에 주력하였다. 그의 인력비행기는 날아가는 데는 성공하지 못하였지만, 새의 비상에 관한 뛰어난 관찰·실험의 노트가 남아 있다.

다 빈치는 또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와 나란히 르네상스 3대 예술가의 하나로 꼽히나, 그의 창작방법은 자연과학의 경우와 같이 사생(寫生)과 실험을 존중한 것으로서, 인체 해부를 하고 투시화법(透視畵法)의 완성을 목표로 하여 종래의 것과는 다른 리얼리스틱한 회화, 조각을 창작하였다.

밀라노공이 프랑스왕 루이 12세에 패하자(1499) 피렌체로 돌아왔는데 1506년 루이 12세의 초빙으로 밀라노의 궁정화가가 되었고, 1513년에는 로마의 교황 레오 10세 밑에, 이어서 1516년에는 프랑스로 가서 그 곳에서 사망하였다.

직인과 학자[편집]

職人-學者

낡고 전통적인 생각과 싸워, 자연계를 날카롭게 관찰하여 자연계가 가르치고 있는 것만을 믿고 자연의 법칙을 찾아내지 않을 수가 없다고 하는 르네상스의 정신은, 이 16세기라고 하는 시대를 밑바닥으로부터 움직이고 있는 생산기술과 결부되고 있다. 기술의 담당자인 직인이 새로운 학문을 파생시키고, 학자는 직인과 결탁했다. 직인은 끊임없이 자연과 문답하고, 전통적인 생각과 인연이 없으므로, 여기에서 학문을 새로이 발전시키는 근원이 되었다.

광산업·야금(冶金)기술은 르네상스의 기초적 산업이었다. 비링구치오는 광물에서 금속을 빼내는 야금 기술자로서 이름을 빛내고, 대포(청동포)를 만들 뿐 아니라 『화공술(火工術)』이라는 책을 저술하였다.

르네상스는 이윽고 이탈리아를 떠나서 독일과 에스파냐, 프랑스, 영국으로 옮겨 갔다. 특히 독일의 르네상스를 뒷받침한 것은, 남독일이나 보헤미아 지방의 광산업이었다. 가령 에르츠 산맥의 은산(銀山) 요아힘슈탈의 은은 탈레르 은화로서 유명했다. 독일의 아그리콜라는 광산업이야말로 시대의 원동력이라고 생각하고, 일생 동안을 지방의 광산촌에서 살면서 대저서 『금속에 관하여』를 저술하였다. 한편, 영국의 길버트는 근대적인 실험법에 의하여 지구가 커다란 자석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확인하였다. 이는 당시 엘리자베스여왕 시대에 있었던 영국의 7개의 바다의 제패(制覇)라고 하는 시대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

비링구치오[편집]

Vannuccio Biringuccio(1490-1539)

이탈리아의 야금기술자. 피렌체의 남쪽 시에나에서 태어났다. 그는 대포제조의 명인이었다. 그의 저서 『화공술(火工術:피로테크니아)』(1540년 간행)은 훗날의 야금술이나 광산업에 큰 영향을 주었다.

33세로 시에나 궁정의 무기 관리인이 되었고, 가볍고 견고한 명중률이 좋은 대포제조에 열중하였다. 대포를 만듦에 있어 그는 그 때까지 직인의 경험과 감(感)에 의존하고 있던 것을 지양하고, "청동의 제조, 대포의 주조(鑄造), 화약의 양이 숫자로 나타내어지는 일정한 규칙에 따르도록 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대포의 제조를 위한 5개의 규칙을 만들었다.

(1) 견실한 주형(鑄型)을 만든다. (2) 주형은 잘 구워서 만들 것. 그렇지 않으면 수분이 증발하여, 흘러든 청동에 기포(氣胞)가 생긴다. (3) 주형은 땅속에 수직으로 묻는다. 고르게 청동이 들어가도록. (4) 청동은 주석과 구리를 1대 10의 비율로 하되 고르게 잘 조합(調合)한다. (5) 녹은 청동은 넘칠 만큼 충분한 양을 부어 넣는다.

1529년 피렌체 교외에서 시험 발사된 그의 대포는 이음매 없는 포신(砲身) 7m로 200m 앞의 목표에 명중하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만년에는 로마교황청의 주조장(鑄造場) 감독으로 있었다.

아그리콜라[편집]

Georgius Agricola(1494-1555)

독일의 광물학자, 의사. 남독일의 그라우코에서 태어났다. 1517년 라이프치히대학을 졸업한 후, 한때 츠비카우의 라틴어 학교에서 언어학의 교사로 있었다. 그는 인문 학자로서도 유명하지만, 후에 의학을 배운 뒤, 은광산촌으로 유명한 요아힘슈탈의 시의(市醫)가 되었다. 후에 그는 다른 광산촌 켐니츠로 옮겨가, 몇 번이나 시장에도 뽑힌 바 있다.

당시 광산업을 천한 업으로 보는 풍조가 있었으나, 그는 오히려 광산업의 중요성을 인정, 적극적으로 관찰을 계속하였다. 그리하여 드디어 유명한 『데 레 메탈리카(금속에 관하여)』를 저술하였다(1556년 간행).

그는 풍부한 삽화까지 넣은 이 책으로 독일 광산에 대한 탐광·채광·광석의 운반·갱내 환기·배수의 펌프 장치·야금 기술·광부의 조직·급료·건강 관리에 이르기까지를 조사·기술(記術)하고, 광산에 과학기술을 도입할 것을 권유하고, 광산업을 하나의 학문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가 '광물학의 아버지'로 숭앙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만년에는 종교문제가 계기가 되어 62세에 사망하였다.

길버트[편집]

William Gilbert(1540-1603)

영국의 물리학자, 의사. 런던 동북쪽의 콜체스터에서 태어났다. 18세로 케임브리지 세인트존스 컬리지에 들어가 수학을 배우고, 이탈리아에 4년간 유학하며 의학과 르네상스의 입김에 접하였다. 그 후에 그는 개업의사가 되었는데, 틈틈이 화학·물리에 대한 연구도 함으로써 그는 마침내 배를 정확하게 항진시키기 위한 나침반의 연구로부터의 자석의 연구에로 나아가, 1600년에는 『자석에 대하여』를 출판하였다.

당시 자석의 바늘이 왜 북을 가리키는지 확실히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러 학설이 학자들 간에서 발표되고 있었다. 그러나 길버트는 그와 같은 생각을 부정하고, 지구 전체가 큰 자석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확인했다.

그는 그 때 자철광(磁鐵鑛)을 둥글게 깎아 '소지구(小地球)'를 만들고, 거기에다 자침을 놓아, 바늘끝이 항상 북극점을 가리키는 사실에서 지구자석설(地球磁石說)을 추론하였다. 그의 이러한 방법에는 실증(實證)과 추론(推論)을 병행하는 근대적 실험법의 싹이 보였다.

그는 또 『자석에 대하여』에서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을 곧 인정하고, 브루노가 코페르니쿠스 지지자인 연고로 화형을 당한 시대인데도 불구하고 영국 최초의 실증론자가 되었다. 만년에는 여왕의 시의가 되었다.

동역학의 형성[편집]

動力學-形成

근대 자연과학은 동역학의 형성에 발단이 있다고 보겠다. 만일 이렇게 생각해서 좋다면, 이 상태를 낳게 한 역사적 근거가 있어야 하겠다. 이에 하나는 대포의 제작 등의 기술면에 관계되는 상황이고, 다른 하나는 자연의 그리스적 전통을 들 수 있겠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에 있어서 기본적인 문제는 운동론이었다. 근대 자연학으로서의 자연과학의 탄생이 고전 그리스의 학문적 전통의 비판을 통하여 그것을 타파하였을 때에 성립되었다고 하면, 근대의 자연과학이 우선 물체운동론·갈릴레이 동역학(動力學)의 정식화(定式化)에서 비롯되었음이 이해될 것이다. 다만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의 비판은 근대에 와서, 또는 갈릴레이에게서 비로소 돌연히 나타났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오랜 중세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의 자연학적 논구(論究)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에서 비롯되는 근대적인 동역학은 이러한 중세에서의 비판적인 논구라는 온상에서 길러져서 싹이 텄다고 보아야 하겠다. 따라서 이러한 중세의 상황을 제외하고서 동역학의 형성을 논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데 고대 때와는 달리, 근대에 있어서는 정역학(靜力學)이 말하자면 특수한 경우로서 동역학에 연속하기 때문에, 우선 정역학의 발전에 대하여 말하기로 한다.

스테빈의 사슬[편집]

Stevin-

고대의 정역학에는 아르키메데스적인 '기하학적 방법'과 소요학파(逍遙學派, 페리파토스파라고도 하며 아리스토텔레스를 조상으로 한다)에 의한 속도의 원리(假想變位의 원리에까지 근대화된다)가 있으며, 이것들이 그 후의 정역학의 발전을 제약하였다. 중세의 정역학은 아르키메데스의 저술이 거의 보급되지 못하였고, 소요학파의 사상의 계승이라고 하는 성격을 지녔다. 이는 잘 알려진 추론(錘論)의 저자(著者)라는 집합명사로 불리는 학자(특히 요르다누스 네모라류스(13세기)가 저명하다)의 작품 속에서 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정역학의 사상은 르네상스기에 이르러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 우발루디(1545-1607) 등에 의하여 재흥 발전하였다. 이들의 주제는 '지렛대의 원리'의 해명에 있었으나, 16세기에 이르러 힘의 합성에 관한 잘 알려진 '평행 4변형법'을 처음으로 해명할 수 있게 된 사람이 나타났다. 이것이야말로 네덜란드의 시몬 스테빈(1548-1620)이었다.

그는 직각 삼각 기둥(三角三角柱)을 취하여, 그 밑면을 수평으로, 그 측면에서 빗면(斜面)이 되도록 하고 크기 및 무게를 똑같이 유지하는 구(球)를 연주(連珠)로 하여 등거리(等距離)로 꿰뚫은 줄의 폐쇄된 '사슬'을 이 삼각기둥에 걸었다고 상상하고, 영구운동의 불가능성에 근거해 빗면(斜面)에서의 물체의 균형조건을 도출(導出)하고, 또 이 이론에 따라서 세 개의 힘 사이의 균형을 논하여 '힘의 평행사변형법'을 수립하였다(1586).

이 법은 후에 뉴턴 등에 의하여 동역학으로까지 확장되었다.

차의 법칙[편집]

差-法則

아리스토텔레스 역학에 의하면, 움직이고 있는 물체는 모두 무언가에 의하여서 움직여지고 있다. 이 운동의 원천은, 자연 운동에서는 움직이고 있는 물체 그 자체에 내재(內在)하고, 강제 운동에서는 그것 이외의 무엇인가에 있다. 여하튼 당해(當該) 원천과 운동물체와의 직접적 접촉이 운동의 지속을 성립시키는 요인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가정하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속도비례법칙을 전개했다. 이 법칙은 간단히 수식화할 때 다음과 같이 된다.

자연운동에 대하여서는 V-M/D

강제운동에 대하여서는 V-F/M(V는 속도, M은 운동물체의 무거움 또는 가벼움, D는 운동물체가 통과하는 물질적 매질(媒質)의 밀도, F는 움직이게 하는 힘, -은 비례). 이 법칙에 의하면 D=0로 속도는 무한대로 되고, 운동이 불가능으로 되어서 진공의 존재가 부정된다. 즉 매질의 존재는 단순히 운동에 대한 저항으로서 작용할 뿐만 아니라, 운동의 성립이라고 하는 본질적인 역할을 다하게 된다.

고대에도 진공의 실재(實在)를 주장했던 사람 속에 원자론자라든가 알렉산드리아의 기계학자가 있었는데, 중세에 이르러서는 아리스토텔레스 역학의 비판을 거쳐서 적극적으로 독자적 운동론을 제창한 사람으로서 신(新)플라톤파의 크리스트교도인 필로포누스(6세기)가 있었다. 그는 진공 내의 운동이 가능하다고 하여 비례법칙을 배제하고 차(差)의 법칙 V-M-D를 제창하였다. 여기에서 매질(媒質)은 단순히 운동의 지체를 일으키는 우성적(偶性的)인 것(본성적이 아님)이었음에 지나지 않았다.

이 운동론이 서유럽 스콜라 학자들에게 대해 미친 직접적인 영향은 가능성에서 매우 부족하지만, 12세기에 이르러서 에스파냐의 마호메트 교도 학자 아벤파케(11세기 말경-1138)를 부활시킨 바 있다. 아벤파케설은 아베로에스(이븐 루슈드, 1126-1196)의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 주석서(註釋書)에서의 반박적 인용을 통하여 서유럽 스콜라학자들에게 전해졌으며, 찬반의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구동력의 동역학[편집]

驅動力-動力學

강제운동, 그 전형(典型)으로서의 투사체(投射體)운동은 아리스토텔레스 역학에 많은 어려움을 제시하였다. 비례법칙에 의하면, F=0로 속도는 소멸하지 않을 수 없는 데도 불구하고, 사실은 투사기(投射器)에서부터 분리된 뒤에도 아직 물체 운동은 계속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운동 지속 원인인 F의 소재를 매질에서 찾았다. 발동자(發動者)가 매질에게, 그에 근접하는 부분으로부터 순차로 먼쪽에까지 동력을 집어 넣고, 이 매질의 동력이야말로 강제운동의 요인이라고 말하였다.

이 매질동력론에 반대하여, 형태를 볼 수 없는 동력은 물체 그 자체에 집어 넣어진다(색유리를 통과한 태양 광선이 물체 위에 그 유리의 빛깔을 주듯이)고 말한 사람이 필로포누스였다. 이 학설은 아라비아계 학자들에게 받아들여져서, 아비케나를 중심으로 한 그 후계자의 소론(所論)에서 필로포누스의 영향을 보게 된다.

그런데 이와 같은 구동력론(驅動力論)은 서유럽에 수입되어서 이탈리아의 프랑키스쿠스 데 마르키아(14세기 초)의 '뒤에 남겨진 힘(自己消減性)'이 되고, 파리의 장 뷰리당(1300년 이전-1358년 이후)에 있어서의 '임페투스'(驅動力)가 된다. 전자가 상당히 소극적인 데 반(反)하여 후자는 적극적이며, 구동력은 자연적으로는 소멸되지 않는 영속적 항상성(恒常性)을 지녀, 그 효과상에서 속도와 물질의 양에 비례하는 것으로서 측정된다고 한다. 무게가 낙체(落體) 내에 구동력을 추가 축적한다고 하여 자연 낙하의 가속성을 설명한다.

이러한 구동력의 역학은 르네상스기에 있어서 많은 지지자를 얻었다. 코페르니쿠스, 다 빈치, 타르탈리아(1500-1557), 베네데티(1530-1590) 등. 타르탈리아는 포환(砲丸)의 탄도론(彈道論)에서 이를 원용(援用)하였고, 베네데티에서는 '차(差)의 법칙', '구동력 역학'에 추가하여 운동의 상호 독립성이란 소론(所論)이 있고, 갈릴레오 갈릴레이에게 직접적 영향을 준 바가 있었다고 전한다.

연금술의 극복[편집]

鍊金術-克服

13세기 이래의 연금술의 사상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물질변환론(變換論)과 크리스트교가 결부된 스콜라 사상이었다.

그런데 16세기 네덜란드의 화가 브뤼겔(1525-1569)이 그린

'연금술사의 작업장'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거기에는 수도사인 연금술사 외에, 그 명령하에 검정 투성이가 되어서 가난하게 살아가고 있는 연금술 직인이 있었다. 이 직인이야말로 실은 용광로라든가 풀무라든가 화력조절관계라든가 물질에 관한 지식을 풍부하게 지니고 있는 야금 직인(冶金職人)이며, 작업장에 널려 있는 화학 기구(器具)를 만들어왔던 경험자였다. 즉 1000년 이상에 걸치는 금만들기의 쓸데 없는 노력 속에서, 직인들은 쉬지 않고 지식이라든가 여러 가지 화학기구 또는 경험을 쌓아 올리고 있었다.

연금술의 극복은 우선 이와 같은 무수한 경험을 모으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파라셀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설(氣·水·火·土)에 반대하며, 3원질(수은·황·소금)을 물질의 구성 원소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연금술의 목적을 의약의 조제로 돌리고, '금만들기'의 부질없는 노력을 중지함으로써, 화학이 걸어나아갈 길을 바꾸어 놓았다. 이 파를 의료화학파(이아트로케미스트)라고 한다.

예를 들면, 독일의 의사 리바비우스(1540?-1616)는 최초의 화학 교과서 『알케미아』(1597)를 출판하였는데, 그는 연금술(알케미)을 오늘날의 '화학(케미)'과 동일한 것으로 생각하고, 당시의 연금술, 약물(藥物), 금속 기타 분야에 흩어져 있었던 문헌을 하나로 통합하였다. 그는 연금술을 두 개의 부분, 즉 화학물질의 제조법과 화학물질의 결합으로 나누었다. 이리하여 연금술은 근대화학에로 그 방향을 바꾸게 되었다.

17세기 전반(前半), 연금술은 의약뿐만이 아니라, 산업 진흥을 위해서도 쓰였다. 독일의 화학공업가 글라우버(1604-1670)는 연금술의 원리를 야금을 비롯하여 초석(礎石)·산(酸)·염기·소금의 제조에도 응용하였다. 또 동시대의 의사 반 헬모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설을 물리치고, 실험의 결과 변환될 수 있는 원소는 물뿐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는 이아트로케미스트파(醫療化學派)인데도 불구하고 파라셀수스의 3원질(三原質)마저 강조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 자세는 원소 변환이라는 연금술적인 낡은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면서도, 또한 근대화학에 한걸음 다가선 것이라 하겠다.

이와 같이 하여 각양 각색의 경험 위에 서서, 서서히 변화를 보여온 아리스토텔레스의 물질변화론도, 이제는 이에 갈음할 새로운 이론과 사상이 필요하였다. 그것이 17세기 후반에 제출된 보일의 원자론(입자론)이다. 이에 의하여 연금술이 극복되고, 근대화학의 새벽이 시작되었다.

파라셀수스[편집]

Paracelsus(1493-1541)

본명은 테오프라스투스 봄바 스투스 폰 호엔하임. 파라셀수스는 속칭. 스위스의 의학자이며 화학자. 아이지델룬에서 의사를 아버지로 태어났다. 이탈리아의 페랄라대학을 졸업 후, 에스파냐의 군(軍)외과의 의사가 되었으며, 유럽 각국을 편력하여 민간 치료법과 의약물(醫藥物)을 모았고, 또 실제로 치료도 하여 이름을 날렸다. 1527년, 그는 바젤 시의(市醫)로 초빙됨과 동시에 동 대학 교수가 되었으나, 개강에 즈음해선 고전적 의학인 갈레노스나 아비케나의 책을 불사르고, 진리는 서적 속에 있지 않고 대자연 속에 있다고 설파함으로써, 의학의 개혁자가 되려 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는 당시의 의학자가, 진료라고 하면 검뇨(檢尿)와 맥짚은 것밖에는 하지 못하는 것을 공격하고, 또 의약이 독사의 기름이나 오물(汚物) 등조차 혼합시킨 복합약(複合藥)이었던 데에 유의하여, 오히려 광물약·약초 등으로부터 연금술(화학)로 빼낸 의약을 사용할 것을 권유하는 등 의학과 연금술을 결부시켜서 후일의 의료화학파(이아트로케미스트)의 개조(開祖)가 되었다. 또,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설에 반대하고 3원질설(三原質說)을 제창하였다.

그는 매우 격렬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그의 연설도 역시 공격적이었기 때문에, 1528년 마침내 바젤시 당국으로부터 추방되었다. 만년에는 여러 나라를 순방하며 의학서의 집필에 몰두하였으며, 『파라그라늄편』(1530), 『대외과학(大外科學)』(1536) 등 많은 저작을 남겼다.

헬몬트[편집]

Johann Baptista van Helmont(1579-1644)벨기에의 의학자·화학자. 브뤼셀에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나, 예술과 신학 등을 배운 뒤 의학을 전공, 1609년 의사가 되었다. 그 후, 집에 틀어박혀서 화학실험에 몰두하였다. 그는 자기 자신을 '불의 철학자' 즉 전문적인 화학자라고 일컬었으며 파라셀수스에 의하여 개시된 연금술을 한층 근대화학에로 추진시켰다. 특히 자연현상이나 화학현상에 정량적(定量的)인 방법을 도입한 점에서는 근대화학에 한 걸음 접근하고 있었다. 그리고 물질 불멸을 믿고, 산(황산)에 용해되는 금속(수은등)이 파괴된 듯이 보여도, 적당한 수단으로 다시금 원래의 무게와 같은 금속으로 되돌릴 수가 있다는 것을 실험으로 보여주었다.

그는 또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설에 반대하여, 그 중 공기와 물만이 원소에 해당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유명한 버드나무의 실험에서, 버드나무를 심은 흙의 무게의 변화가 없음을 보이고, 결국 버드나무가 물로부터 생장함을 증명하고, 4원소 대신에 물원소설(水元素說)을 주장하였다. 그는 '가스'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화학자이기도 하였다(그가 안 가스에는 이산화탄소 외에 이산화질소·아황산가스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의 저작에는 또한 신비적이고도 연금술적인 점이 있었으나, 생각이나 실험에는 근대화학에의 싹이 파라셀수스보다도 한층 분명히 나타나고 있었다. 많은 적대자를 가져 그의 학설은 좀처럼 받아들여지지 아니하였다. 65세 때 브뤼셀에서 사망하였다.

글라우버[편집]

Johan Rudolph Glauber(1604 -1670)

독일의 화학자이며 화학공업가. 바이에른의 칼슈타트에서 이발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21세 때 고아가 되었는데, 발진티푸스에 걸린 것이 계기가 되어 화학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1646년 암스테르담으로 이주, 훌륭한 실험실을 만들어 놓고 황산·질산·염산·왕수(王水) 등의 제조를 시도하였으며, 주요 저서 『새로운 철학적 난로』를 저술하였다. 특히 식염과 황산으로부터 염산을 만드는 방법은 오랫동안 비밀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한편, 그 때 생기는 황산소다는 오늘날에도 '글라우버염'이라고 불리고 있다. 그는 또 많은 화학기구, 노(爐)의 개량, 유리제 깔대기, 기계적 교반기(攪拌器) 등 장치의 대규모화를 도모하였다. 다시금 그는 산류를 정해진 농도와 순도(純度)를 일정하게 하여 대량판매를 하였다. 그런 의미로 화학공업가였다.

1654년, 많은 의약을 만들었으며, 그것을 책으로 저술하였다. 그는 연금술을 믿었고, 파라셀수스의 영향을 받았다. 1656년의 『독일의 번영』에서는 연금술을 써서 광산에서 나온 원료로 산업을 진흥시킬 필요성을 호소하였다. 만년에 약품 중독에 걸려 66세로 사망하였다.

르네상스 시대의 의학[편집]

-時代-醫學

인류가 자연과 인간에 관하여 눈을 뜬 시대, 즉 르네상스(문예부흥)는 13세기에 시작하여 문학과 예술의 영역에서 위대한 진보를 보였는데, 의학 면에서 이것이 강하게 나타난 시기는 16세기에 이르러서이다. 이 르네상스의 발흥을 가져온 사회적 변혁에 우선 주목해야 하겠다. 그것은 첫째, 중세 봉건제도의 붕괴와 근대 시민계급의 성립, 둘째는 오래 전부터 그리스 문화의 중추로 되어 있던 콘스탄티노플의 수도가 1453년 터키인에게 점령되어 많은 학자들이 귀중한 고전을 가지고 이탈리아로 피하였다. 또 이보다 앞서 1438년 교황은 그리스·로마 양교회의 합병 때문에 그리스의 학자를 이탈리아로 초빙하였다. 이 두 개의 사건으로 이탈리아에서의 옛 학문의 부흥의 기운은 매우 왕성해졌고 자유정신이 크게 싹트게 됐다. 셋째는, 인쇄술의 발명과 화약의 진보이다. 넷째는 종교개혁운동을 들 수 있고, 또 태양중심설, 세계일주 항로의 개척, 그리고 아메리카신대륙 발견 등으로 자연과학 영역에서 일찍이 자유정신운동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태로 중세에는 없었던 자유 연구의 정신이 일어나, 자기 힘을 자각하고 비판적 사상이 발생하였으므로 의학 면의 진보에 이것이 크게 영향을 미쳤다. 이리하여 16세기의 벽두에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 및 파라셀수스에 의하여 대혁신의 계기가 마련되었고 실증적 과학의 기초가 구축되었다.

베살리우스는 24세 때 학생용의 『6매 연속의 해부도』를 내었고, 1543년에 주요 저서 『인체의 구조에 관한 7권의 서』가 나왔다. 베살리우스가 29세 때였다. 이 책의 출현으로 이 때까지 금과옥조로 삼았던 갈레노스의 학설이 근본적으로 뒤집혔다. 이리하여 해부학은 확립되었지만, 이무렵 진정 학구에 눈뜨고 있던 해부학자는 베살리우스만은 아니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그에 앞서 750매의 정확한 해부도를 그렸다.

그러나 '인간 최고의 만능의 천재'로 불리는 그의 해부도는 사후 250년에야 비로소 공개되었다. 따라서 당시의 의학의 진보에는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였다. 팔로피오(G. Fallopio 1523-1562)는 파도바 대학의 해부학 및 식물학 교수로 수란관(輸卵管)을 발견하였고, 유스타키오(B. Eustachio, 1524-1574)는 로마에서 해부학을 교수하고 이관(耳管) 및 와우각축(蝸牛殼軸)을 발견하였으며 모두 그 기관에 이름이 남아 있을 정도이다.

임상의학에서는 베살리우스와 동시대에 파라셀수스가 출현하였다. 그의 의학 사상은 독창적으로 화학의 눈으로 생명 현상을 보고서 신진대사를 논하였다. 치료에는 원인 요법을 목표로 하여 특효약을 탐구하였으며, 수은·안티몬·연철·구리·황 등의 제제(製劑)를 써서 화학요법의 시조라고 하였다. 또한 거상(巨像)은 앙브로아즈파레이다. 그는 총상처치(銃傷處置)를 개혁하였고 혈관결찰(血管結紮)을 발명, 또 헤르니아의 수술, 기관절개, 토순(兎脣)의 수술 등에 성공하여 외과 치료법에 일대 개혁을 전개하였다. 이리하여 외과는 일약 내과와 비등한 지위에 올랐다.

17세기가 되자 세상은 온통 수리(數理)의 시대가 되었다. 하아비의 혈액순환의 원리의 발견은 그 근저에는 계수적 개념의 도입이 큰 힘이 되어 있음을 놓칠 수는 없다. 림프관을 최초로 발견한 것은 북이탈리아의 아셀리(G. Aselli, 1581-1626)로서, 즉시 리오관(1580-1657)에 의하여 동물 실험으로 확인되었다. 림프관의 줄기가 정맥과 합치하는 것은 페쿼(1622-1674)에 의하여 알려졌다.

베살리우스[편집]

Andreas Vesalius(1514-1564)

네덜란드의 해부학자. 베살리우스는 브뤼셀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카를 5세의 궁정 약제사였다. 그는 부친을 이어 의학에 투신하려고 결심, 곧 파리로 가서 해부학을 비롯하여 외과 그 밖의 의학을 연구하였는데, 이미 학생 시대에 그의 해부학상의 지식과 부검기술(部檢技術)을 따를 자가 없었다. 대학 졸업 후 23세로 파도바대학의 해부학 겸 외과학의 교수가 되었고, 이로부터 7년간이 그의 생애 중 가장 활약이 활발한 시기이다. 교수 취임 후 5개월 『6매의 해부도표』를 저술하였고 이어 동년에 스승인 빈델루의 해부서를 개정하였다. 이 해로부터 그는 전적으로 해부학의 독창적 의견을 정리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이 원고는 1541년 8월에 완성되었다. 그것은 『인체의 구조에 관한 7권의 서』(파브리카)와 『인체해부학 강요』(에피토메)의 두 책이다. 이것으로 갈레노스의 권위는 아주 떨어지고 말았고, 근대 해부학의 틀이 확립되었다.

파레[편집]

Ambroise Par

(1510-1590)

프랑스의 외과의. 라발에서 태어난 그는 이발소의 견습공으로 있다가 마침내 오텔 듀에(Hotel Dieu) 병원에서 3년간 열심히 외과를 수업하였다. 곧 군의로 종군하였는데 1537년 북이탈리아에서 전상자를 치료할 때 종전의 잘못된 열유소작법(熱油燒灼法)을 중지하고 계란의 노른자위·장미유·테레빈유를 혼합한 것을 상처에 바르기 시작하였다. 이는 그가 전장에서 우연히 발견한 방법이며, 이에 힌트를 얻은 독창적인 많은 요법을 고안하였다.

첫째, 종상처치를 개혁하였고 『총상요법서』를 저술하였다. 이어 혈관결찰법을 발명하였고, 이로써 4지절단술(四肢切斷術)이 용이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외과 의학은 학문적으로 체계가 서게 되었고 치료 면에서도 대개혁이 이루어졌으므로 그를 근대외과학의 확립자라고 한다. 또 파레는 박애심이 많았고 겸허하여 병의 치료를 자연의 힘에 돌렸다. "나는 상처난 데를 잘 감아줄 뿐, 신이 고쳐준다"고 한 말은 그의 천고의 명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