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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이전의 수학[편집]

近代以前-數學

기원전 300년경 알렉산드리아 시대의 그리스의 수학자 에우클레이데스(Eukleid

s, 일명 유클리드, Euclid)에 의해서 그 이전의 저서와 연구를 집대성하여 만들어진 『스토이케이아(Stoicheia)』는 후에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중국명은 利瑪竇, 1552-1610)의 구역(口譯)과 서광계(徐光啓, 1562-1633)의 집필에 의해서 『기하원본(幾何原本)』(1607)이라고 한역(漢譯)된 일이 있는데, 내용은 도형(圖形)뿐만 아니라 그리스식 방법에 의해 체계화된 교과서였다. 즉 제1권은 수직·평행 및 평행 4변형에서 피타고라스(Pythagoras)의 정리까지, 제2권은 2차방정식의 면적에 의한 해법, 제3권은 원과 호, 호에 대한 각, 제4권은 내외접 정다각형(內外接正多角形), 제5권은 비례론(比例論), 제6권은 비례론의 도형에의 응용, 제7권부터 제9권까지는 정수론(整數論), 제10권은 무리수론(無理數論), 제11권부터 제13권까지는 입체기하학이다.

간단히 말하면 그리스의 정통적인 수학은 기하학과 정수론과 비례론이고, 대수(代數)는 기하학적으로 풀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공리(公理)·정의(定義)·정리(定理)에 의하여 매우 논리적으로 진행(進行)되었는데, 그와 같이 체계화한 데는 플라톤(Platon, BC 427-BC 347)에 의하는 바가 많다고 한다. 하기는 크리스트에서도 디오판토스(Diophantos, 246-330)는 기호를 사용해서 대수문제를 풀기는 했으나 그것은 예외적인 존재이다.

기호를 사용하는 대수는, 인도에서 아라비아에 들어와, 거기서 발달하여 알제브라(Algebra, 代數)란 이름과 함께 유럽에 수입되었으며, 이탈리아에서 타르탈리아(N. Tartaglia,1557)와 카르다노(H. Cardano, 1501-1576)가 3차방정식을 풀음으로써 위력을 발휘하고, 이를 계기로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16세기 말에 와서는 비에트(Francois Viete, 1540-1603)에 의해서 대수는 미지수를 구하는 방법에서 탈피하여 체계적인 이론이 되었다.

해석기하의 탄생[편집]

解析幾何-誕生 기호를 사용하는 대수가 인도, 아리비아를 경유하여 유럽에 들어와서도 인도, 아라비아식의 대수에는 그리스식의 가하학적 대수의 사고(思考)는 남아 있었다.

예를 들면 곱(一乘)은 길이, 제곱(二乘)은 넓이, 3제곱(三乘)은 부피(體積)라는 식으로 생각하였다. 이들을 어느 것이나 같은 차원의 수로써 취급하여, 그것을 기하학적으로 표현하면 직선으로 된다는 것을 나타낸 사람이 데카르트(R.Descartes, 1596??1650)인데, 그는 『정신지도의 규칙』(1628년경)에서 그것을 밝히고 있다. 이 데카르트의 새로운 생각은 기하와 대수라는 상이한 학문을 연결하는 데 성공했다. 그것은 그의 유명한 저서 『모든 과학에서 진리를 탐구하고 이성(理性)을 올바로 이끌기 위한 방법 서설(序說)』(통상 『方法序說』로 약칭, 1637)에 포함된 "이 방법의 시론(試論)으로서의 굴절광학(屈折光學)·기상학(氣象學)·기하학"에 서술되어 있다.

즉 평면상의 일정직선을 취하여 그 위에 원점 O를 정한다. '기하학적이라고 명명할 곡선'상의 점 P는 필연적으로 하나의 직선의 모든 점과 어떤 연관을 갖는다. 즉 P로부터 정직선으로 수선 PQ를 그었을 때 그 점P는 길이 PQ·QO로 정해지고, 길이를 각각 y·x라 하면, 곡선상의 모든 점에 대해 동일한 방정식으로 표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길이를 표시하는 x·y 두 개의 수치로 평면상의 점을 표시하고, 평면상의 직선이나 곡선을 식으로 표시함으로써 대수와 기하를 연관시키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그리스의 기하학적 대수(「스토이케이아」 제2권 명제11)

을 다음과 같이 푼다 .

한 변의 길이 의 정사각형 ABCD를 , 그리고 AB의 중 간점을 E라 한다. EA의 연장선상에 ED와 같이 EF를 취하면, 왼편 그림에서 다음과 같은 관계가 성립된다.

△AED에서 한편 ,

그러므로

여기서 정4각형 ABCD의 넓이는 , 네모꼴 ABHI의 넓 이는 ax, 네모꼴 AIGF의 넓이는 이므로 위와 같이 하 여 구한 AF의 길이가 2차방정식의 근이다.

이리하여 좌표 개념이 도입되어 해석기하학의 성립이 이루어진 것이다. 거기서는 도형을 식으로 표시함으로써 그것을 해석적으로 취급하는 것을 가능케 하고, 거꾸로 식을 도형으로 표현함으로써 그 직관적인 인상을 부각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미적분의 성립과 발전[편집]

微積分-成立-發展

그리스의 철학자 제논(K. Zenon, BC334-BC262)이 제출한 어려운 문제는 수학의 발달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

제논은 다음과 같이 생각하고 공간과 시간의 연속을 기초로 해서 운동을 부정했다. 즉 (1) 거북의 뒤에서 출발한 아킬레우스(Akhilleus, 그리스의 전설적인 영웅)가 거북이 있던 곳에 이르렀을 때 거북은 그 앞쪽에 있고, 다시 그 거북이 있던 곳에 이르렀을 때 역시 거북은 그 앞쪽에 있다. 그리하여 끝내 아킬레우스는 거북을 앞설 수 없다.

(2) 날고 있는 화살은 각 순간에 있어 정지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전 비행을 통해서 정지하고 있다. 따라서 운동은 겉보기에 지나지 않는다.

제논 이후 극한(極限)과 운동을 배제한 그리스 수학의 전통은 오래 지속되었다. 그러나 근세에 이르러 산업은 기술의 발전을 촉진하였으며, 그것은 운동의 속도나 곡선의 접선(接線)을 구하고, 도형의 넓이, 부피, 중심을 구하는 문제의 해법(解法)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전자는 미분법, 후자는 적분법으로 발달하였고, 이로써 양자는 역산(逆算) 관계에 있다는 것이 유도되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옛날에는 아르키메데스(Archimedes, BC 287?-BC 212)가 원·타원·포물선·구·회전타원체의 구적(求積)에 성공했으나, 이것은 예외적인 일로서 후계자도 없이 고립되어 있었다.

훨씬 후에 케플러(J. Kepler, 1571-1630), 카바리엘리(1598-1647), 토리첼리(E. Torricelli, 1608-1647), 페르마(P. de Fermat, 1601-1665), 파스칼(B. Pascal, 1623-1662)에 의해 곡선으로 둘러싸인 도형의 구적법(求積法)의 연구가 계속되었다. 그것은 대륙으로부터 해협을 건너, 영국의 월리스(J. Wallis, 1616-1703)와 뉴턴의 스승인 바로(J. Barrow, 1764-1848)에 이르러 구적법과 접선 관계가 밝혀지게 되었다.

뉴턴의 유율법[편집]

Newton-流率法 이와 같은 연구의 결과와 앞서 말한 데카르트의 좌표를 이용해서 뉴턴은 미적분법을 만들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연구를 시작한 것은 1665년이고, 그 대체적인 것이 이룩된 것은 다음해이다.

그는 역학 연구와의 관련 아래 주어진 운동에 있어서

① 어느 시점에서의 속도의 결정, ② 시간으로 함수인 속도로 운동을 추정한다는 문제를 다루는 유율법(流率法)을 생각했다. 이것은 그의 사후 1736년에 '유율(流率)과 무한수열(無限數列)'로서 공표되었다. 거기에서 변동하는 양을 '유량(流量)'이라 하는데 그것은 변수나 함수이고, 유량이 흘러가는 '속도', 즉 함

뉴턴의 유율법

유량(변동하는 양) 의 사이에

(1)

이라는 관계가 있을 때, 의 유율을 , 무한소량 (無限小量)을 로 표시하면 여기서 는 의 변화 의 비율 , 즉 현재의 에 해당된다 .

위의 관계식 (1)은 대신에 각각 를 써서 성립 된다. 그리하여 를 대입하여

(2)

여기서 (1)식을 빼고 0으로 나누면

(3)

그런데 는 무한소량이므로 를 포함한 항은 다른 항에 비해서 훨 씬 작다. 그러므로 이것을 무시하면

이 되어, 이 식에서 유율 와 의 비 를 구할 수가 있다 .

(이 때 , 이것은 현재의 에 해당된 다)

수가 변해가는 비율을 '유율'이라 하는데 이것은 도함수(導函數)에 해당된다.

라이프니츠의 미적분[편집]

Leibniz-微積分 대륙에서는 라이프니츠가 뉴턴보다 좀 늦은 1673년경에 미적분에 대한 구상을 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그것은 '곡선에 접선을 긋는 문제'와 '직선이 주어진 때 그것을 접선으로 하는 곡선을 찾는 문제'와의 관계를 조사하여, 후자는 전자의 반대인 것에 착안하고 이를 해석적으로 취급하는 일을 생각했다. 이것은 1684년에 발표되었는데, 거기서 사용된 식은 대체로 현재의 미적분 교과서에 있는 것과 비슷하다.

라이프니츠는 2년 후에 낸 논문에서 '역접선법(逆接線法)' 즉 '접선법'(微分)의 역으로서 적분을 논하고, 기호 ∫을 처음으로 허용했다.

라이프니츠의 미적분

어느 곡선상의 한점 V에서 점 A를 지나는 직선 에 수선 VX 를 그어, 그 길이를 , AX의 길이를 로 나타내고 곡선상의 점 V로 곡선에 접선을 그어서, 직선 과의 교점을 B로 한다 . 그리고 또 임의의 선분 을 취하여 그 길이를 라고 한다 .

그러면 BX:VX=라는 관계가 성립되도록 선분 를 취 한다(이것을 의 '차'(differentia)라고 이름한 다.

(와 의 비 는 접선의 기울기이며 현재의 에 해당한다)

이렇게 정의하면 다음과 같은 계산공식이 성립된다.

18세기의 미적분[편집]

18世紀-微積分

18세기에는 미적분에 의한 계산이 진보하여 자연과학 분야에 눈부신 성과를 올렸다. 그리하여 물리수학이나 천문학의 진보 또한 가져왔다. 그러면서도 계산기술과 응용방법의 성과에만 빠져들어 학문 자체의 정비에 결함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뉴턴의 만유인력의 발견에 의해 기초를 갖게 된 천체역학은 미적분을 구사함으로써 오일러(L. Euler, 1707-1783), 달랑베르(J. R. d' Alembert, 1717-1783), 그리고 라그랑주(J. L. Lagrange, 1736-1813), 라플라스(P. S. Laplace, 1749-1827) 등에 의해 발전하였다.

코시의 미적분[편집]

Cauchy-微積分 대가 라플라스가 당시 청년이었던 코시(A.L.Cauchy, 1789-1857)의 무한수열(無限數列)의 수렴(收斂)에 관한 논문 발표를 보고 안색이 변하여 집에 돌아와 두문불출하고 필생의 대저 『천체역학』(1798-1825)에 사용한 수열(數列)의 수렴을 음미했다고 전해지고 있는 것처럼, 미적분을 기술에서 이론의 합리화로 이끄는 데 이바지한 사람이 코시이다.

그는 저서 『해석교정(解析敎程)』(1821)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함수의 연속성을 논하려면 무한소(無限小)인 양의 중요한 성질을 설명하는 것이 특히 필요함을 느꼈다. 그것이야말로 미적분법의 기초이다. 그 방법으로서는 나는 수학에서 요구되는 엄밀성을 기하고, 기계적 계산으로 인출되는 대략적인 논법을 쓰지 않는다."

이것은 그보다 앞선 대학자 오일러의 『무한해석서설(無限解析序說)』(1748)과 가끔 대비된다.

거기서는 "하나의 변수의 함수란 변수와 계수 또는 정수(定數) 등으로 짜여진 해석적인 식이다"라고 말하고, 극한이나 무한소, 함수의 연속에 대해서는 서술하지 않았다. 이에 관해 코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차례차례 상이한 값을 취하는 양을 변수라 하며…이에 반하여서 일정한 고정된 값을 취하는 양을 정수라 한다. …하나의 변수가 차례차례 취하는 값이 하나의 정해진 값에 가까워져, 마침내 그 차가 임의로 주어진 양보다도 적어지면 그 정해진 값은 처음의 변수의 극한이라고 한다."

"하나의 변수의 차례차례 취한 값의 절대 값이 점점 감소하여 임의의 주어진 수보다도 적어지면 그 변수는 무한소(無限小)라고 한다. 그것은 0을 극한값(極限値)으로 가진다"(여기서 극한의 증명에 사용되는 ∈-δ법이 보인다) "몇 개의 변수 사이에 어떤 관련이 있고, 그 중의 하나의 값이 주어지면 다른 것의 값이 모두 정해질 때, 보통 그 하나의 변수를 독립변수라 하고, 다른 것을 그 함수라 명명한다"라고 함수를 정하고, "χ의 함수 가 χ의 어느 구간 내에서 무한소만큼 변할 때, 그에 대응하는 함수의 값의 변동도 무한소인 것을 말한다"라고 연속함수(連續函數)를 정의하고 있다.

또 코시는 함수 가 연속일 때, 함수 의 정적분(定積分) 를 정의하고, 미적분학의 기초 정리를 유도하고 있다.

의 정적분

의 구간 〔a, b〕에서의 정적분(定積分)

구간〔a, b〕를 n개의 소구간으로 분할하여 그 분점(分點)을

로 한다.

또 각 소구간 에 임의로 점 를 취하며

합 를 만든다.

일 때

구간의 분할 방법과 점 를 취하는 방법에 관계없이 가 일정한 극한값에 가까워지면, 는 [a, b]로 정적분 가능이라 말하고, 그 극한값을 정적분이라 하여 로 표시한다.

라이프니츠[편집]

Gottfried Wilhelm, Freiherr von Leibniz(1646-1716) 수학·자연과학·철학·신학·법학 등 백과전서적인 독일의 수학자인 동시에 공후국의 고문관 등 정치적 생활도 했다.

베를린학사원(學士院)의 창립에 힘써 원장이 되고(1700), 상트페테르부르크학사원의 창설에도 참가하였으며, 기타 유럽 각지의 학사원 건설을 권장하였다. 그의 수학연구에서 1684년 및 1688년의 것은 미적분법의 발표로서 획기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극대·극소의 구법·변곡점·접선·역접선법·부정적분법 등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미적분에 관한 기호 d나 는 그에 의한 것이다. 그 발명에 관해서 뉴턴과의 사이에 어느 편이 먼저 발명했느냐에 대해 논쟁이 있어 각각 독자적으로 발명한 것으로 결론지었지만, 미적분은 라이프니츠나 뉴턴에 의해 갑자기 발명된 것이 아니고, 이미 그 이전의 학자들에 의해 매우 가까운 곳까지 도달되어 있었다는 점에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그는 당시 유럽의 학자들과 널리 교제가 있고, 철학자로서는 단자론(單子論)으로 저명하다.

19세기의 수학[편집]

19世紀-數學

19세기는 수학의 발전사 중에서 하나의 전환점을 이루고 있다. 즉 18세기의 수학이 17세기에 창조된 미분적분학·해석기하학 등의 이른바 직접적인 연장이었던 것에 비해, 19세기는 한편으로 종래의 분과의 기초의 논리적 반성, 또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많은 분과의 창조라는 것으로 특징지어진다. 18세기가 단색(單色)의 외연적(外延的)인 확장의 시대였다고 하면, 19세기는 다채로운 발전과 철저한 기초다지기의 시대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것은 머지않아 20세기의 현대수학으로 발전해 갔다.

이러한 19세기의 수학의 특징을 낳은 원인으로서는, 한편으로는 18세기 수학의 외연적(外延的)인 발전이 막다른 곳에 이른 것과 18세기가 역학의 전성시대였던 것에 비하여 19세기는 열학이나 전자기학의 발흥에 따라 많은 문제가 수학에 대해서 제기된 것을 들 수 있다.

이를 분야별로 살펴보면 우선 해석학은 코시, 기타의 수학자에 의해 극한이라든가 연속의 개념이 정식화(定式化)되고 그것은 필연적으로 실수(無理數)의 개념의 정밀화를 요구하게 되었다. 이것을 성취시킨 사람이 데데킨트(J. W. R. Dedekind, 1831-1916), 칸토어(G. F . L. Cantor, 1845-1918), 바이어슈트라스(K. T. Weierstrass, 1815-1897)의 실수론(實數論)이다. 한편 코시는 실변수 함수의 정적분의 계산을 위해 복소변수(複素變數)의 함수의 미분·적분을 연구했으나 복소변수의 함수에서는 미분 가능과 테일러 전개 가능이란 것이 같은 값인 것을 알고, 여기에 '해석함수(테일러의 전개 가능한 함수)'라는 개념이 성립되었다.

복소변수의 해석함수론은 리만( F. B. Riemann, 1826-1866), 바이어 슈트라스 등에 의해 크게 발전했기 때문에 이를 함수론이라고만 하는 습관이 생겼다.

한편으로는 미분가능성 등을 가정하지 않는 실변수의 함수가 연구되어, 이제까지의 적분(리만 적분)보다 더 일반적인 르베그(H. L. Lebesgue, 1875-1941) 적분이 창조되었다. 이와 같은 분과(分科)를 실변수 함수론이라 한다. 이 밖에 미분방정식론·변분학(變分學) 등도 발전했다.

대수학에서는 5차방정식의 해법과 관련해서 군(群)의 개념이 아벨(N. H. Abel, 1802-1829), 갈루아(E. Galois, 1811-1832)에 의해 도입된 일에서, 대수학의 중점은 대수방정식론에서 군 등의 이론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이는 20세기의 대수적 구조로 발전해 갔다. 한편 연립 1차방정식과 관련해서 행렬(行列), 1차변환, 행렬식 등의 이론이 생겨나고, 그것은 복선대수학으로 성장해 갔다.

기하학에서는 로바체프스키(N. Lobachevskii, 1793-1856)나 볼리아(J. Bolia, 1802-1860)에 의해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만들어지고, 리만에 의해서 다시 새로운 발전을 했다. 이들은 공리(公理)라고 하는 것에 대한 새로운 견해를 가져와, 단지 기하학뿐 아니라 수학 전체에 큰 영향을 끼치고, 20세기의 공리주의(公理主義)의 기초를 이루었다.

이리하여 모든 분과가 20세기에서의 수학적 구조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푸리에[편집]

Joseph Baron Fourier(1768-1830)

프랑스의 수학자. 고체의 열전도를 수학의 무한급수로 분석하는 방법을 보였는데, 이 급수를 푸리에급수라고 한다. 푸리에급수는 나중에 푸리에변환으로 그 개념이 확장된다. 1822년에 간행한 열 분석 이론은 열의 전도뿐만 아니라 태양의 흑점, 조석과 같은 자연현상을 둘러싼 수리물리학의 연구에 큰 영향을 주었다.

르장드르[편집]

Adrien Marie Legendre(1752-1833)

프랑스의 수학자. 툴루즈 출생. 1794년 『기하학 원론』이라는 책을 발표하여 대수와 숫자를 많이 사용했다. 또한 미터법을 확립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수론·타원함수·미분방정식·삼각함수표 등에 관해서도 연구했다. 「타원함수에 관한 논문」에서 타원적분에 관해 연구한 결과를 정리했고, 「정수론」에서 정수론의 연구를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야코비[편집]

Karl Gustav Jacob Jacobi(1804-1851)

독일의 수학자. 삼각함수에 기초를 둔 타원함수를 만들었다. 아벨의 초월함수를 연구하고 타원함수론을 확립했으며, 행렬식을 연구해 해석학에 중요한 함수행렬식을 만들었다. 또한 편미분방정식을 연구해 '해밀튼-야코비의 편미분방정식'을 도입하여 양자역학을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가우스[편집]

Karl Friedrich Gauss(1777-1855) 19세기 전반기의 독일의 수학자. 당시 수학의 모든 분야에 걸쳐 제1인자였다.

이미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수학적 재능을 나타냈기 때문에 칼 월리엄 페르디난드(K.W.Ferdinand, 1735-1806)공에게 인정을 받고 괴팅겐대학을 1798년에 졸업했다. 대수방정식은 반드시 실수 또는 허수의 근을 갖는다는 대수학의 기본정리를 증명하여 1799년에 학위를 획득하고, 1805년부터 괴팅겐의 천문대장 겸 대학교수가 되어 평생 그 지위에 있었다.

그러한 지위에 있으면서 천문학·측지학·전자기학 등 응용수학 방법에도 업적을 남기고, 최소제곱법(最少二乘法)·곡면론(曲面論)·비유클리드기하학 등의 연구도 진전시켰는데, 물론 본래의 수학자로의 업적도 크다.

특히 정수론의 연구에 주력하여 "수학은 과학의 여왕이고, 정수론은 수학의 여왕이다"라고 했다.

또 변수가 라는 복소수로 된 함수에 대한 연구를 하였다. 통계학에서 잘 사용되는 정규분포(正規分布)는 오차의 분포의 연구로부터 그가 이론적으로 유도한 것이다.

코시[편집]

Augustin

Louis

Cauchy(1781-1857) 라그랑주(J. Lagrange), 라플라스(P. S. Laplace) 등으로 대표되는 18세기의 수학을 19세기적 단계에 올려놓은 프랑스의 대수학자.

프랑스혁명의 해에 파리에서 태어나 에콜 폴리테크니크(高等理工科學校)에서 공부하고 후에 모교의 교수가 되었다. 당시는 혁명과 반혁명이 교차하는 정치적인 격동기이고, 엄격한 가톨릭 신자이고 왕당파였던 코시는 정치적으로 지조를 지키고자 하여 많은 고난을 겪었다.

코시의 수학상 업적은 극히 많은데, 최대의 것은 해석학을 엄밀한 기초 위에 올려 놓은 것이다. 종래 무한소라는 애매한 개념상에 있던 미적분을 극한(極限), 연속, 급수의 합 등의 개념을 확립함으로써 합리화시킨 공적은 크다. 또 실변수의 함수에 정적분의 문제에서 복수변수의 함수의 연구에 손을 대어 복소함수론의 기초정리를 확립했다.

그리고 그 때까지 계산으로 푸는 것만이 시도(試圖)되던 미분방정식에 대해 해(解)의 존재를 증명했다. 한마디로 말하면 코시는 해석학을 계산에서 논리의 단계로 올려놓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가 프랑스에서 현대해석학의 아버지라 불리고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단지 아카데미 회원이었을 때에 아벨(N. H. Abel), 갈루아(E. Galois) 등의 논문을 바로 평가하지 못하고, 이 젊은 천재들을 불우한 가운데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그의 큰 실책이라 말할 수 있다.

힐베르트[편집]

David Hilbert(1862-1943)

독일의 수학자.쾨니히스베르크에서 출생. 현대 수학의 여러 분야를 창시하여 크게 발전시켰다. 쾨니히스베르크대학을 졸업한 뒤 동 대학의 교수를 거쳐 1895년 괴팅겐대학으로 옮겼다. 그는 가우스, 리만, 푸앵카레의 뒤를 이어 두 차례의 대전 사이의 30년간 수학계의 제1인자로서 수학자의 이상을 체험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만년에는 나치스의 박해를 받으면서 굴하는 일 없이 1943년 2월 괴팅겐에서 세상을 떴다.

그의 연구는 대단히 넓은 범위에 걸쳐 있다. 우선 『기하학 기초론』(1899)에서 유클리드 기하학의 완전한 공리계(公理系)를 이루어 공리주의적 경향의 선구자가 되었다. 또 대수적 정수론에서는 전세기까지의 결과를 하나의 체계로 마무리하여 기념비적인 저작을 했다(1897).

일본의 다카기(高木貞治, 1875-1960)의 유체론(類體論)의 연구는 힐베르트의 연구를 발전시킨 것이다. 더욱이 20세기 초에는 적분방정식의 연구에서 '힐베르트 공간론'의 기초를 쌓았다. 이것이 양자역학의 수학적 도구로 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1910년경부터는 수학기초론의 연구에 주력하여 공리주의의 방향을 밝혔다. 1900년 파리의 국제수학자회의에서 두세 가지의 수학문제를 제시했는데, 이것이 20세기의 수학발전에 기여한 영향은 크다(아직 미해결의 문제도 남겨져 있다).

리만[편집]

Georg Friedrich Bernhard Riemann(1826-1866)독일의 수학자. 공간기하학에서 이룩한 리만의 업적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같은 근대 이론물리학의 연구에 기초가 되었다 1851년에 발표한 『가변복소함수 일반론의 기초』는 19세기의 함수론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또한 유클리드의 평행선공리가 성립하지 않은 기하학 공간을 제시함으로써, 비유클리드기하학을 고안해냈다.

뫼비우스[편집]

August Ferdinand Mobius(1790-1868)

독일의 천문학자·수학자. 프로이센에서 무용 교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라이프치히·괴팅겐·할레 등지의 여러 대학에서 수학하고, 라이프치히 대학의 천문학 교수가 되었다. 기하학·역학 분야에서도 많은 연구를 하였으며, 특히 사영 기하학(射影幾何學)의 기초를 세웠다. 그는 또 면의 앞뒤 구별이 없는 '뫼비우스의 띠'에 대한 연구로도 유명하다.

케일리[편집]

Arthur Cayley(1821-1895)

영국의 수학자. 상대론에서 4차원의 개념을 뚜렷이 하고, 기하공간이 점과 선으로만 이루어진다고 한정하는 데서 벗어나게 했다. 또 행렬의 대수를 발전시켰고, 기하학에서도 많은 업적을 쌓았다.

바이어슈트라스[편집]

Karl Theodor Wilhelm Weierstrass(1815-1897)

독일의 수학자. 해석학의 수론화로 알려진 방법으로 직관에만 기대지 않고 엄밀한 해석적 표현을 하려고 했다. 또한 급수가 수렴하는지 알아내는 방법을 개발했으며, 주기함수·실변수함수·타원함수·변분법이론 등의 발전에 이바지했다.

푸앵카레[편집]

Henri Poincare(1854-1912)

프랑스의 수학자·천문학자·물리학자. 파리대학 수리천문학 교수를 거쳐 1907년 프랑스학사원 회원이 되었다. 수학에서는 정수론·함수론·미분 방정식·확률론·위상 기하학을, 천문학에서는 천체 역학, 물리학에서는 전기 역학·광학·전자론 등에 걸친 뛰어난 연구를 하였다. 특히 1889년 천문학 3체 문제에 관한 논문으로 스웨덴 국왕으로부터 오스카상을 받았다. 그는 또한 과학 사상가로서, 그 당시의 과학 실용주의를 비판하고, '과학을 위한 과학'을 주장하였다. 저서로 『과학과 방법』 『과학과 가설』 『천체 역학』 등이 있다.

데데킨트[편집]

Julius Wilhelm Richard Dedekind(1831-1916)독일의 수학자. 데데킨트절단이라는 유리수를 나누는 방법을 써서 무리수의 개념을 뚜렷하게 나타냈다. 이와 같은 절단 개념으로 실수의 상등·대소·사칙연산을 정의함으로써 해석학의 기초를 세우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칸토어[편집]

Georg Cantor(1845-1918)

독일의 수학자.덴마크 출생의 상인의 아들로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나 1856년 독일에 이주해서 취리히와 베를린대학에서 수학·물리학·철학을 공부하고, 1867년에 베를린대학에서 정수론(整數論)에 관한 논문으로 학위를 획득하고 할레 대학의 강사를 거쳐 1879-1905년 교수로서 근무했다. 삼각급수의 연구에서 집합론(集合論)의 연구로 들어가 그 창시자가 되었으나, 집합론에 관한 몇 가지의 상식에 어긋나는 결과 때문에 당시의 수학자나 철학자의 반박을 사서 "수학의 본질은 그 자유성에 있다"고 부르짖으며 저항했으나 마침내 병으로 쓰러져 정신병원에서 비극적으로 일생을 마쳤다. 그에 의하여 시작된 집합론은 그 후 장족의 발전을 해서 현대에는 수학의 기초적인 중요한 분야로 되어 있다.

갈루아[편집]

Evariste Galois(1811-1832) 프랑스의 수학자. 갈루아는 1811년 파리 교외에서 태어나 소년기부터 수학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으나 너무 시대를 앞질렀기 때문에 당시 수학계에 이해를 받지 못하고 에콜 폴리테크니크(高等理工科學校)의 입시에 낙방하고 겨우 에콜 노르말(高等師範學校)에 입학했다. 재학중에 쓴 방정식의 대수적 해법에 관한 논문은 한번은 아카데미의 코시가 분실했고 한번은 심사원 푸리에가 급서한 때문에 인정받지 못한 채였다. 울분을 풀 사이도 없이 1830년의 7월혁명이 일어나 적극적으로 그 운동에 참가하여 퇴학당하고 형무소에 들어갔다. 가출옥한 뒤에 연애사건에 말려들어 결투를 신청 받아 21세의 젊은 나이로 쓰러졌다. 이 사건은 경찰이 꾸민 함정이란 설도 있다. 결투하기 전날 밤에 밤새워 써서 남긴 논문이 오늘날 갈루아의 이론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사후 14년이 지난 1846년 류빌(J.Liouville, 1809-1882)이 갈루아의 유서를 읽고, 갈루아의 업적을 이해하여 잡지에 발표했다. 그로부터 다시 24년이 지난 1870년 조르당(C.Jordan, 1838-1922)이 갈루아의 이론을 크게 소개했다. 이리하여 사후 40년이 지나서야 갈루아의 업적은 널리 인정되게 되었다.

여기서 갈루아의 업적을 간단히 설명해 보자.

1차방정식 은

2차 방정식 도

로 풀 수 있다. 마찬가지로 3차방정식, 4차방정식도 계수에 4칙계산과 멱근의 개법(開法)을 적용함으로써 근을 구할 수 있다. 그리하여 4차 이하의 방정식은 '대수적으로 풀린다'고 한다. 그런데 5차 이상의 방정식은 이와 같은 근의 공식이 좀처럼 발견되지 않았다. 그의 존재는 가우스의 기본정리에 의해서 보증되었으나 이것이 4칙계산과 멱근으로 구할 수 있는지 어떤지는 문제였다. 마침내 아벨이 5차방정식은 일반적으로 대수적으로는 풀리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했다. 뒤이어 갈루아가 대수방정식이 대수적으로 풀리기 위한 조건을 방정식에 관련된 어떤 군(群)에 대한 조건으로서 확정하여 이 문제에 종지부를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