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통상·산업/세계의 산업경제/세계경제와 국제협력/세계경제의 발전
이 문서는 {{머리말}} 정보가 없습니다. 도움을 주시려면 토론 문서에 의견을 남기거나, 문서를 편집하여 "{{머리말 필요}}"를 다음과 같이 바꾸고 최소한 제목과 저자 변수를 작성하세요.{{머리말 | 제목 = | 부제 = | 저자 = | 이전 = | 다음 = | 설명 = }} |
자본주의체제의 변모
[편집]자유자본주의 체제
[편집]自由資本主義體制
1789년의 프랑스혁명 발발로부터 1871년의 독일 통일까지의 기간을 서양근대사상 자유주의 시대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 시대는 자본주의가 체제적으로 확립되기 위한 기초를 닦은 자본주의 발전의 최고조기에 해당한다. 자본주의의 싹은 봉건적 사회관계의 붕괴 속에서 발생하여 전통적인 농민경제에 대한 상품경제의 침투과정에서 배양되어 왔으나 그것이 충분히 발현되어 자유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성립된 것은 바로 이 시대였다. 자유자본주의 체제의 성립과 더불어 이른바 시민사회가 완성되어 사회가 국가로부터 해방되어 자기를 확립하고 종래의 절대주의국가 대신에 자유주의국가가 탄생하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경제정책의 분야에 있어서도 자유주의가 가장 순수하게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자유주의 내지는 산업자본주의라고 할 때 기초의 매뉴팩처 시대가 포함되기도 하나 매뉴팩처는 그 기술적 기반을 수공업적인 숙련에 두었기 까닭에 자본주의의 자주적인 경제발전에 있어서는 처음부터 일정한 한계가 있었다. 자본주의 경제가 매뉴팩처 제도의 한계를 돌파하여 자유자본주의 경제가 확립되기 위해서는 산업혁명에 따른 기계적 대공업의 실현이 필요했다.
매뉴팩처의 수공업적 생산이 기계적 공장제도 아래서의 생산으로 변혁되자 산업자본가가 다수의 임금 노동자를 고용하여 기계를 기간(基幹)으로 하는 대규모 경영을 이룩하여 생산물을 상품으로 판매하여 이윤을 획득하는 시스템이 확립된다. 물론 그것은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매뉴팩처 시대의 발전을 통하여 국내와 해외의 시장확대를 배경으로 하여 자본축적이 진행되고 농촌으로부터의 충분한 노동력 공급이 있었으며, 농업과 공업이 분리되어 상품경제가 생산과정에까지 침투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 아래 공장제도의 대량생산조직을 재빨리 완성한 것은 영국이었다. 영국에서는 양모공업(羊毛工業)을 중심으로 17∼18세기에는 매뉴팩처가 발달하여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에 걸쳐 면공업(綿工業)을 중심으로 산업혁명을 완성하고 있다. 면공업은 양모공업 대신에 영국의 주요 산업이 되는 동시에 영국은 기계화된 면공업에 의해 유럽의 다른 나라를 제압하면서 '세계의 공장'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19세기의 영국 면공업은 자유자본주의 시대를 상징하는 대표적 산업이었을 것이다.
영국 산업혁명의 구성요인은 생산기술의 가속도적인 진보와 공장제도의 대량생산조직의 도입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 변혁의 성과는 무엇이었을까. 당연한 일이지만 면공업을 중심으로 그 밖에 몇 개의 산업이 종전에는 미처 예기치 못했던 속도로 성장한 것이다. 더구나 공업생산 증대의 추세가 19세기 초두, 산업혁명이 일단 완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유자본주의 체제 이전의 어느 경제보다도 높은 장기적 성장을 지속한 것이다. 물론 자유경쟁을 전제로 한 무정부적인 생산의 결과로 생산과잉이 나타나 주기적으로 공황(恐慌)이 닥쳐왔었다. 따라서 해마다 생산이 줄곧 증가된 것은 아니며 경기순환(景氣循環)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높은 성장률로 확대되었는데 예를 들면 1820년에서 1840년 사이에 걸쳐 면사 생산은 8.7배, 면포생산은 8.5배로 늘어났고 이것들의 수출도 같은 기간내에 약 10배의 증가실적을 나타냈다. 이와 병행하여 면공업 원자재인 면화 소비량도 늘어나 면화 수입은 1781∼1802년 사이에만도 11.5배로 증가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우연히도 산업혁명이 자그마한 섬나라인 영국에서 발생하여 자유자본주의 시대를 통해 영국이 '세계의 공장'으로서 세계경제 중심의 지위를 차지한 까닭에 세계무역의 양적 확대는 눈부신 바 있었다. 영국의 실질국민소득은 19세기 중 약 10배의 증가폭을 보인 데 비해 수입량 증대는 20배를 상회했다. 따라서 국민소득에 대한 수입비율로 본 영국의 무역의존도는 19세기 초두의 12%에서 19세기 말의 30%로 상승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영국은 활기에 넘치는 자유스런 국제무역을 통해 다른 여러 나라에 대해 경제성장을 전파하고 그 파급효과에 따라 주변 각국의 자유자본주의화를 촉진하는 역할을 담당해 왔다. 한편 영국의 면화 및 기타 1차산품 원자재에 대한 수입수요 증대는 신대륙의 신흥농업국에서의 자본주의적 경제발전을 자극하고 그 '경제적 도약(take off)'을 위한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18세기 후반 이래의 영국 산업혁명의 완성은 자본주의를 체계적으로 확립하여 국민경제 및 세계경제의 자본주의화를 완성하기에 이른다. 초기의 자본주의경제 아래서 아직 충분히 성숙되지 못했던 상품시장경제가 자유자본주의체제 아래서 확립되었다. 그리고 시장가격의 자유변동을 통해 상품의 수요공급이 자동적으로 조정되기에 이른다. 그러한 뜻에서 시장경제법칙이 완전히 자기를 실현하여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경제사회는 자율성을 획득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경제사회가 자율성을 획득하게끔 성장하자 경제에 대한 국가의 보호정책은 필요치 않게 되고 경제과정에 대한 갖가지 중상주의적(重商主義的) 보호정책은 오히려 국민경제의 건전한 발전을 저해하는 결과를 야기하게 되었다. 따라서 절대주의국가에 이어 등장한 자유주의국가 아래서는 중상주의의 보호정책에 대하여 자유 방임적인 경제정책이 취해진다. 그리고 국가는 경제에서 손을 떼고 단지 산업자본의 자유스러운 발전을 보장하는 질서유지를 도모하는 '야경국가(夜警國家)'의 지위로 물러나 앉게 된다. 즉 자유자본주의체제는, 개인활동에 간섭하지 않고 개인의 행동을 자유로이 방임하고 적은 비용으로 운영되는 정부(cheap government)를 희망하며 경제활동에 대해 소극적인 국가를 이상으로 하였다. 이에 따라 자유주의국가의 경제정책은 절대주의 국가와 같은 '적극적' 정책의 전개가 아니라 중상주의적인 종래의 보호정책을 폐지함에 그치는 '소극적'인 것이 되었다. 한 예를 들면 영국에 있어서는 도제법(徒弟法), 항해조례(航海條例), 무역회사의 특허제(特許制), 곡물법(穀物法) 등의 정책조치는 점차 개폐되어 갔다. 대외적으로도 자유주의 경제정책은 이른바 '자유무역운동'으로서 확대되어 가고 자유무역이 국제적으로도 보급되기에 이르렀다.
자본주의 경제란 한마디로 자유재산 제도와 자유경쟁을 바탕으로 한 '사기업체(私企業體)'이다.
시장의 가격 메커니즘이 한 나라(혹은 세계)의 생산활동 패턴과 생산자원의 배분 및 이용수준을 정하고 소득분배의 원칙을 규정하는 경제체제이다. 따라서 시장의 경쟁원리가 지니는 의의는 매우 큰 것이다. 자유경쟁이 있으므로 비로소 한 나라(혹은 세계) 경제의 유효한 자원배분이 달성되고 부단히 기술진보가 이루어진다. 자유자본주의체제는 자유경쟁시장을 성립시켜 경제적 '효율'의 점에서 뛰어난 성과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공평한' 소득분배를 보장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실제로 자유자본주의체제는 공평한 소득분배의 달성을 실패했고 자유경쟁 그 자체가 스스로의 대립물(對立物)인 '독점'을 빚어내는 결과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주기적으로 공황이 엄습하여 실업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사태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사회보장제도, 독점금지의 법적조치, 고용정책 등 정부의 경제활동 분야도 증대하여 왔다. 즉 자유주의 국가는 이른바 '복지국가'로 변모하고 자유자본주의는 '독점자본주의'로 변화하여 '사적(私的)인 자유기업체제'는 '수정자본주의의 혼합경제체제'로 변질하게 되는 것이다.
수정자본주의 체제
[편집]修正資本主義體制
자유자본주의체제가 성립한 무렵에는 그야말로 다수의 비교적 소규모의 기업이 자유경쟁에 따라 생산을 영위해 왔다. 다수의 기업이 상호경쟁하여 보다 많은 이윤을 올리려고 행동한 결과, 전통적인 생산방법은 혁신되어 근대적 대량생산 방법이 도입되는 한편 풍부하고 질이 좋은 상품이 싼값으로 공급되기에 이르렀다. 애덤 스미스(1723∼1790, 영국 고전경제학의 창시자)가 말했듯이 자기의 최대 이익을 위한 이기심(利己心)에서 비롯되는 기업행동이 '보이지 않는 손'의 인도(引導)로 사회 전체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야말로 '예정조화(豫定調和)의 경제'가 자유자본주의체제 아래서 실현될 듯이 보였다.
그와 같이 자유자본주의 경제는 사람들의 경제생활 향상을 위해 큰 역할을 맡아 왔다. 그러나 자유자본주의 경제는 그 발전과정에 있어서 중대한 폐해를 야기시킬 어떤 결함을 내포하고 있었다. 확실히 자유경쟁에서의 기업행동은 근대화된 대량생산조직을 이룩했고 이를 보급함에 있어 기여한 바 있으나 약소기업이 자연도태되어 대기업만이 남게 되는 사태를 빚었다. 대기업 상호간에도 물론 경쟁은 있을 수 있다. 더구나 소수 대기업간의 경쟁, 즉 독점적 경쟁이 문자 그대로 빚어지면 그것은 매우 치열한 경쟁의 결과 양자가 모두 쓰러지고 말 우려가 있다. 따라서 대기업은 서로 경쟁을 피하고 상호 이윤을 확보하기 위해 카르텔, 콘체른 및 트러스트 등 독점체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다시 말해 대기업 상호간에 협정을 맺고 경쟁을 제한하든가, 경쟁을 배제하여 가격유지를 꾀하든가 하여 최대이윤을 확보하도록 행동할 것이다. 바야흐로 자유자본주의 경제는 소수의 대기업만이 존속할 수 있는 과점경제(寡占經濟)로 변모하여 독점자본주의를 대신하여 등장하게 되었다.
또한 자유자본주의 경제는 그 발전과정에서 노사간(勞使間)의 소득분배에 불평등을 초래하게 되었다. 자본가는 이윤증대를 위해 되도록 생산 코스트의 인하를 꾀한다. 이를 위해 노동을 강화하거나 노동시간의 연장을 꾀하고 임금인하를 기도한다. 한편 생산코스트의 축소를 위해 기계의 사용도를 늘리고 생산을 합리화하여 고용노동자의 수를 감소시킨다. 그 결과 실업자가 발생하여 '산업예비군'이 대량으로 나오게 되었다. 따라서 노동자의 종속상태가 강화되었고 노동자 소득이 상대적으로 감소되는 경향이 있었다.
독점자본주의 경제에 있어서는 노사간의 소득분배상 불공평이 더욱 촉진되었고 노사간의 대립이 첨예화되었다. 이에 따라 국가는 노동자에 대해 광범한 사회정책을 실시하고 노동자를 보호하는 정책을 추구하게 되었다. 그것은 노사간의 대립을 완화할 뿐만 아니라 일국의 노동력의 보전 배양을 위해서도 필요했다. 국가는 노동시간 및 임금계약에 대한 간섭을 강화하고, 노동보호의 사회입법은 임금이나 노동시간에 관한 사항만이 아니라 주휴제(週休制)·공휴일·부녀 소년노동 및 공장감독·공장위생·공장재해 등 각 분야에 걸쳐 이루어졌다. 또한 더 나아가서 국가는 자본과 소득에 대한 과세수준을 끌어올려 자금을 획득하여 실업보험 및 기타 사회보험의 창설과 복지 후생시설의 건설에 착수하여 '복지국가'의 면모를 띠게 되었다.
사회정책의 중심이 된 것은 당초에 실업보험이었는데, 그 제도적 정비의 필요를 배가한 것은 독점자본주의하에서의 불황의 장기화였다. 본래 무정부적인 자본주의경제의 태내(胎內)에는 공황이 일정한 주기를 갖고 발생한다는 결함이 잉태되어 있다. 공황이 닥쳐와서 다수의 기업이 도산하고 숱한 노동자가 거리로 쫓겨 나온다. 그후 잠시 불황이 계속된 다음 이윽고 불황은 회복단계에 들어서고, 이어서 호황(好況)에 달해 실업자가 기업에 흡수되는 과정이 되풀이되었다. 그런데 독점자본주의 단계가 되면 그 실업자가 산업예비군으로서 경기변동에 따라 증감(增減)됨에 그치지 않고 경기상승의 시기에서조차 기업 밖에 방치되는 실업상비군(失業常備軍)이 나타나기에 이르렀다. 말하자면 구조적실업의 발생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국가는 어쩔 수 없이 실업대책에 나서야 했다. 그리하여 실업대책을 위한 공공사업을 일으키는 한편 광범한 실업보험제도를 정비한 것이다. 그러한 정세를 결정적인 것으로 만든 것은 1929∼1932년의 세계공황의 발생이었고 그후 미국 정부가 단행한 뉴딜정책이었다.
사실상, 독점이 일반화함에 따라 경제의 자동적 조절작용은 기능을 잃고 자유자본주의 시대에서처럼 불경기 가운데서 자동적으로 호경기의 징후는 나타나지 않는다. 자유경쟁하의 시장에 있어서는 상품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고, 초과공급이 생기면 그 상품가격은 하락되어 수요가 유발된다. 그러나 독점자본주의 경제의 불완전경쟁시장에 있어서는 비록 상품에 대한 수요가 감소되어도 그 상품 가격은 하락되지 않으며 따라서 수요도 환기(喚起)되지는 않는다. 그러한 상품가격 및 임금률의 하향경직성(下向硬直性)으로 말미암아 불경기가 만성화 되고 불황과 실업이 장기간에 걸쳐 존속하기에 이른다. 또한 독점자본주의 시대의 과점 기업은 각기 대규모적인 고정설비(固定設備)를 사용하여 생산하고 있는 까닭에 경기후퇴에 직면해도 생산의 급격한 축소는 어렵다.
어떻든 경제가 그 자체의 힘으로 불황과 실업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국가가 개입하여 무엇인가 불황 회복책을 꾀해야만 할 것이다. 1929년 10월 2일의 뉴욕 주식시장의 대폭락에서 비롯된 세계공황은 미국의 1932년도 실업률을 45%, 철강생산을 1901년 수준으로 후퇴시킬 정도의 규모였다. 공황은 진원지인 미국뿐 아니라 유럽에도 파급되어 마침내는 세계공황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이 세계공황은 말하자면 자본주의 미증유(未曾有)의 위기였다. 때마침 자동적인 경기회복을 확신한 나머지 자유방임적인 불황대책을 추구하다가 실패한 사람이 공화당의 후버 대통령이었다. 그래서 1932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후버는 자유방임주의에 반대하고 미국 경제가 이미 자동적 조절기능을 상실한 사실을 인식한 민주당의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루스벨트는 대통령에 취임하자 산업의 조직화를 촉진시켜 경제부흥을 꾀하는 한편, 노동자에 대
현대자본주의의 전망
[편집]現代資本主義-展望
자본주의의 '자유기업' 경제체제는 19∼20세기 초엽의 기간을 통해, 두드러진 경제적 진보나 생산성 향상 혹은 경제적 능률의 달성에 따라 현저히 물질적 복지의 증대를 가져왔다.
그러나 1930년대에는 세계적 불황이 악성 장기화되어 일찍이 겪어 보지 못한 자본주의 위기로까지 심각한 양상을 나타냈다.
제2차세계대전 직후에도 역시 자본주의 경제의 앞날은 그다지 밝은 것으로는 전망되지 않았다. 호황(好況)이 이루어져도 그것은 순간적인 호경기(好景氣)에 그치고 불황은 더욱 장기화·만성화될 것으로 우려되었다. 그리고 자본주의체제하에서의 생산능력의 증대 및 자원의 완전고용 내지는 완전이용의 달성을 놓고, 자본주의경제는 저조(低調) 내지 정체 상태에 빠질 것으로 생각됐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제2차세계대전 후의 자본주의경제의 추이는 바야흐로 '장기적 활황(活況)'으로 치닫는 추세에 있다. 전후 20여년 사이에 자본주의체제는 선진 공업 각국에 있어서는 말할 것도 없고, 발전도상국에서도 그 지구력을 입증했을 뿐 아니라 그 다이내믹한 발전력을 과시했다. 서독·이탈리아·일본 등에서는 일찍이 없던 급속한 경제성장을 실현했고 생산의 증가와 소비수준의 눈부신 상승이 있었다. 더욱 선진 자본주의 각국에 관한 한, 전후의 경기변동과 실업은 참아 넘길 수 있는 정도의 최소한도에 머물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이른바 '현대자본주의' 즉 선진 각국에서 지속되고 있는 자본주의경제와 그 이전의 고전적인 자본주의경제 사이에는 같은 자본주의체제라고는 하나 중요한 점에서 그 양태(樣態)를 달리하고 있다. 오늘날 자본주의 국가의 경제는 사기업(私企業)만으로 성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상당한 부분이 공적 경영(公的經營) 내지 통제하에 놓여 있는 사적경제 부문과 공적경제 부문의 '혼합경제'이다. 그리고 사적 민간기업은 상당규모의 공영부문(公營部門)의 존재를 묵낙(默諾)할 뿐 아니라, 국민경제의 안정성을 높이고 성장을 촉진하는 경제적 불공정의 감소를 위한 정부의 적극적인 간섭이나 경제계획을 용인하게끔 되어 있다. 또한 사기업은 강력한 조직노동자, 즉 노조(勞組)와의 단체교섭을 정규적이며 동시에 영속적인 것으로 승인하기에 이르렀다.
자본주의체제란 본래 생산수단 및 기타 생산적 자산이 주로 사유(私有)되어 사적 소유자가 이윤을 올릴 목적으로 생산활동에 종사하며 그 생산이 주로 판매를 위해 이루어지는 경제체제를 뜻한다. 그리고 현대의 공업화된 선진 자본주의 경제의 활동면을 지배하는 것은 빅 비즈니스(big business)이다. 그 지배적인 기업 형태는 주식회사이며 소유와 경영(내지 관리)은 분리되어 있다. 그것의 명목상 소유권은 수천 명, 때로는 수십만 명의 분산된 주주(株主)에게 있고 경영은 그 회사의 발행주(發行株) 중의 근소한 부분을 소유함에 지나지 않는 소수의 경영진이 장악하고 있다. 따라서 소유는 경영상의 책임이 따르지 않고, 책임을 지는 사람들은 회사의 성공에 의해 얻는 이익이 그리 대단치 않은 반면에 그 실패에 대해서도 금전상의 큰 위험 부담도 없을 것이다. 더구나 경영층은 사실상 자기 영속적(自己永續的)이어서 주주조차도 그를 내어 쫓지는 못하는 독립성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주식회사가 자산 확장을 감가상각적립금(減價償却積立金)이나 유보이윤(留保利潤) 등의 내부자금으로 충당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어 더욱 조장되고 있다.
이러한 사정 아래서 경영자들은 대저 어떠한 유인(誘引)·동기(動機)에 의해 효율적인 경영을 하고 비용을 절감하며 유리한 예상 위에서 기존의 자본 자산의 유지·보전을 꾀하는 것일까. 더구나 오늘날 우리는 빅 비즈니스의 활동이 결코 쇠퇴하지 않고 기업의욕도 왕성하며 효율적인 경영을 수행해 다이내믹한 경제성장의 실적을 쌓아 올리고 있음을 알고 있다. 빅 비즈니스의 기업행동은 만족할 만한 일정 이윤율을 목표로 할지도 모른다. 또는 당해 산업의 전통적인 마켓 셰어(market share) 유지에 노력하든가, 매상고의 신장을 극대화하려고 행동할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비즈니스의 효과적인 수행에 대한 사회적 책임감과 자부심이 발전하는 산업사회의 문화적 풍토 가운데서 '전문적 경영자' 기질 그 자체로 전화(轉化)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윤을 올리는 것을 이윤의 '취득'과 구별할 경우 전문적 경영자들은 '성공지표'로서 삼아 행동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의 주식회사의 사적경영은 국유화된 회사의 경영과 그다지 큰 차이가 없어져 간다. 사실상 국유화 그 자체는 사회주의자의 운동목표로부터도 크게 후퇴하여 매력을 잃고 있다.
물론 아직도 국유화의 논거(論據)가 없지는 않다. 그러나 지난날 경제적 불안정이나 노동쟁의, 또는 부(富)나 소득의 불공정한 분배 등 폐해를 없애기 위한 생산수단의 사적소유 폐지 내지 감소 따위는 이데올로기와는 별로 관계가 없을 것 같다. 그것은 오히려 개개 산업의 상황과 관련되는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제2차세계대전 후의 영국의 석탄산업이나 철도의 국유화가 그러했듯이 산업이 피폐하여 수익이 오르지 않고 사적소유 아래서는 경영개선의 전망이 서지 않을 경우, 혹은 몇 나라에서 볼 수 있듯이 전력이나 철강, 군수산업 및 항공 수송 등의 국유화는 경제의 중추분야를 지배하고 통제해 버릴 우려가 있는 사업이라고 할 수 있겠다.
국유화 그 자체는 경제안정에 있어서 그다지 기여도가 높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국유부문이 있으면, 없는 것보다도 경기안정정책의 수행은 쉬우나 국유화 비율의 여하와는 관계없이, 수단으로써 금융재정정책이 동원됨에는 변함이 없다. 소득 재분배에 있어서도 조세조치나 사회보장정책이 보다 많은 성과를 달성할 것으로 생각된다. 뿐만 아니라 국유화는 권력의 국가 집중이며 국가권력의 팽창은 새로이 집권제의 해악을 낳을 가능성도 있다.
따라서 오늘날에는 만약에 자본주의와 사기업을 공익(公益)에 일치되도록 움직일 수만 있다면 차라리 그 편이 국유화 조치보다도 바람직하다고 생각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사회주의 여러 정당 사이에도 매우 유력하게 대두되어 있다. 그러한 뜻에서
사회주의경제의 특징
[편집]사회주의 경제의 특징
[편집]社會主義經濟-特徵
사회주의에는 여러 가지 사상적인 흐름이 있으나 오늘날 사회주의국으로 불리는 나라의 대다수는 마르크스주의를 경제의 기초로 삼고 있다. 마르크스주의 경제론에서 자본주의의 기본적 모순은, 생산은 사회적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생산수단의 사유화로 말미암아 잉여소득의 대부분이 사적이윤으로 자본가계급에 영유되어 빈부의 격차가 확대되어 가는 데 있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실시해야 한다는 주장이 사회주의이다. 따라서 사회주의는 (1) 경제기구(經濟機構)의 면에서 (a) 생산수단의 대부분이 공적 내지 사회적으로 소유되고 (b) 경제활동이 자유경쟁 시장에 의해서가 아니라 중앙당국의 계획경제 지령에 의한 통제 및 할당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c) 경제주체면에서 보면 경제활동은 사적기업에 의한 것이 아니고 노동자계급으로서 그 리더인 공산당이 독재하게 된다(이른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이리하여 사회주의경제의 생산력이 향상하면 이윽고 '능력에 따라 일하고 능력에 따라 보수를 받는다'는 사회주의에서 '능력껏 일하고 필요에 따라 받는다'는 공산주의로 이행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사회주의경제는 저축률·투자율·생산고를 계획당국이 자유로이 결정하게 되어 후진국의 급속한 공업화에 있어서 유효한 방법이 된다고 공산 진영은 선전한다.
따라서 사회주의경제는 자본주의경제 다음에 오는 것이 아니고 자본 축적을 통한 공업화 추진방식의 하나이며 자본주의 역시 공업화 방식임에는 다를 것이 없다. 전자는 계획과 통제를 통해서 공업화를 꾀하며 후자는 자유방임주의에 의해 이룩하는 것이 근본적 차이점이기는 하나 공업화가 성숙함에 따라 경제상의 차이는 감소하게 된다.
사회주의 경제의 유형
[편집]社會主義經濟-類型
사회주의 경제의 특징은 제나름의 국가적 조건과 특수성에 따라 수정이 가해지는 것이 통례이며 그것을 유형적으로 살피면 다음과 같다.
그 하나는 중앙집권적 사회주의로서 지방 분권화가 이루어질 때까지(1957년까지)의 구소련이 이 형태에 속한다. 관리 방법은 우선 중앙에 국가계획위원회(Gosplan)를 두고 전체의 계획을 마련하며 그것을 토대로 각 산업부분을 관리하는 최고의 행정기관으로부터 하부의 기업단위에 이르기까지 경제상의 과제를 지시·실행케 하는 시스템을 이루고 있다. 기업은 그 지시에 따라 기업의 장(長)의 책임하에 운영된다. 중앙 각성(各省)이 각 산업 종별마다 설치되어 이것이 전국에 산재하는 주요 기업을 중앙집권적으로 지배 관리한다. 성에는 전 연방의 직접 관리를 담당하는 전연방성(全聯邦省)과 지방공화국에 소속하는 기업까지도 관리하는 연방공화국성이 있으며 성 아래에는 대개의 경우 총관리국(總管理局)이 설치되어 있다. 이것은 특정지역 또는 특정기업의 관리를 담당한다. 총관리국 아래에는 트러스트 또는 콤바인으로 불리는 것이 있어서 각각 특정 수의 기업관리를 배정받고 있다. 소련의 경제계획의 특징은 노동력·자원의 배분계획이 중앙집권적으로 정해지고 그것이 하부기업의 과제로서 분할 배정된다는 점이다. 이른바 시장경제에서는 계획은 각 기업별로 세워지고 계획의 미스는 손실을 통해 가격변동으로 나타나는데 중앙집권적경제에서는 가격은 있어도 생산상의 조절기로서의 역할은 수행하지 못하는 까닭에 중앙당국은 균형을 염두에 두고 계획을 세워야 된다. 이러한 점이 소련에서는 현지 설정을 무시한 계획을 낳게 하고 더구나 종단관리(縱斷管理) 방식이 횡적연관(橫的聯關)을 저해하여 이른바 분파주의를 초래하는 까닭에 분권화 방향으로 개편되기에 이르렀다(1957). 그러나 만일 능률향상을 목적으로 분권화하는 경우 지역분할만으로는 오히려 지역주의를 초래하게 된다. 이런 결함에 비추어 1965년의 코시긴 개혁에서는 또다시 종단관리 방식으로 복귀하고 그 대신 기업경영의 자주성을 제고시키기 위해 지령은 (1) 생산물 판매고 (2) 제품의 주요 품목 (3) 임금기준 (4) 자본이윤율의 네 가지로 한정시켰다. 이것은 집권제의 결함을 시정하려는 시도이나 가격기구(價格機構)를 어느 한계까지 인정하느냐의 문제는 복잡하다. 이것은 동구 공산권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둘째로 분권적 사회주의체제를 들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는 유고슬라비아의 경제체제에 나타나 있다. 계획에 의하여 경제활동을 세부에까지 규제하려 드는 나머지 생산자의 창의는 말살되어 품종이나 품질의 유기적인 배치가 파괴되고 관료주의가 발생하며 끝내는 형태의 면에서든 내용에 있어서든 국가에 의한 노동자의 착취라는 묵과할 수 없는 사태가 야기된다고 중앙집권적 사회주의를 비판한다. 한편 사회주의 본래의 뜻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단지 노동자를 위한 체제라는 것만으로는 미흡하므로 '근로자의, 근로자에 의한, 근로자를 위한' 정치·경제체제가 도입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이론에 근거하여 사회주의라는 원칙(생산수단의 공적 소유)은 유지하되 그 기능을 발휘시키기 위해 경제계획이 아닌 수급(需給)에 지배되는 시장의 메커니즘에 맡기고, 기업경영을 노동자 자치에 맡긴다. 기업의 최고 결정기관은 노동자평의회이나, 경영의 집행기관으로는 경영위원회가 있어 이 두 기구와 더불어 노동자평의회와 지역 자치제의 인민위원회에 의해 지명되는 기업장(企業長)이 있다. 기업장은 경영을 통괄하고 계획수행을 지휘하는데 기업의 대표인 동시에 국가의 대표이며 자치제에 대해 책임을 지고 다른 두 기구의 결정을 법규에 위반되는 것이라고 중지시킬 수 있는 방대한 권한을 장악하고 있다. 계획은 연방·공화국·군(郡)·자치제·경제연합체·기업이 제각기 세우지만 연방계획은 하부기구의 계획을 종합한 것이며 생산목표는 기본적 원료인 주요 물자에 국한된다.
투자도 경제계획에 의한 부분 이외에는 대부분 이자에 의한 경쟁방식을 취하고 있다.
한편 가격은 불가결한 상품이나 기타 특수상품에 대해 연방정부가 예외적으로 통제하고 있으나 대부분은 기업의 자유이다(다만 연방물가국이나 지방자치체의 간접통제 조치-보조금 조작·신고제(申告制)·가격인상에 따르는 이윤의 동결 등으로 규제되고 있음).
이론적으로는 랑게(Osker Richard Lange, 1904∼1965. 경쟁적 사회주의 이론을 제창한 폴란드의 경제학자) 등의 자유제 사회주의 모델에 유사한 것이다. 이 모델에서는 소비재와 직업 선택에서의 자유시장을 인정하고 생산수단을 국유로 하고 계획가격을 결정하면 수급과 가격의 시행착오로부터 균형가격이 얻어진다고 한다.
제3의 유형은 이른바 인민민주독재 사회주의로서 중국이 그 전형이다. 농촌의 토지혁명에서 도시의 탈취로 진행되는 반(半)봉건적인 농업국에서는 이른바 인민민주 독재가 된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노농동맹(勞農同盟)을 기초로 하며, 민족부르주아지와 그 당파가 어느 일정한 시기에 노동자계급 및 중국 공산당과 동맹하여 국가권력에 참가한다는 것이다. 경제적으로는 이러한 과도기에 있어서는 농민이 노동자계급의 동맹자이므로 농민과 수공업자의 개인경제에 대해 평화적인 개조를 할 필요가 있는 동시에 민족부르주아지도 동맹자인 만큼 자본주의적인 상공업에 대해서도 평화적 개조의 방법이 취해진다고 그들은 주장하고 있다.
또한 공업에서는 국가자본주의의 형태를 취하고 사회주의로 이행한다는 것이나, 중공의 현실과 생리는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평화적인 것이 못되며 오히려 이른바 중소이념분쟁(中蘇理念紛爭)에서 보여주었듯이 지극히 교조적(敎條的)이며 과격하고 급진적인 이른바 사회주의혁명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른바 인민공사운동의 실패 등 국내경제의 파탄은 문화혁명으로 상징되는 권력투쟁을 더욱 악성화, 장기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혼합경제
[편집]混合經濟
사회주의경제도 이렇듯 과거의 고전적인 형태와 달라지고 있으나 자본주의경제 역시 변화하고 있다. 수정자본주의·민주사회주의 등 그 접근법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으나 이것을 통틀어 혼합경제로 부른다. 그 특징은 공적경제부문과 사적경제부문이 병존(倂存)하고 있어 2중경제라고도 한다. 특히 공적부문의 자본 형성 비중이 뚜렷이 높아지고 있으며 서구 각국은 이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 경우 자유경쟁시장이 그 바탕이 되지 못하는 것이 통례이나 경쟁시장의 일부도 정부의 통제 및 계획에 의해 규제되고, 지도 내지는 유도된다. 대체로 기초적 생산물자나 기초적 용역으로 간주되는 부문(동력·수송·주요 원자재 등)은 공적기관의 소유 또는 규제 아래 놓이며 일반 소비재나 개인 서비스는 자유경쟁의 지배하에 놓이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이와 같이 자본주의적 요소와 사회주의적 요소를 절충하여 양자의 단점을 보완하고 장점은 살려나가자는 점에 혼합주의적 경제체제의 특징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체제는 그 발전단계가 고도화됨에 따라 혼합경제적인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