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미술/한국미술의 흐름/고구려의 미술/고구려의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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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총과 토총[편집]

石塚-土塚

고구려 분묘의 2양식. 그 분포는 만주지역의 통구(通溝, 丸都=國內城) 평야를 위시하여 압록강 남안(南岸), 그리고 대동강 유역에까지 미친다. 특히 대동강 이북에 집중되어 있는데, 석총과 토총의 지역적인 비례는 통구지방이 1대 1, 대동강 유역에서는 토총의 수가 증가되고 있음을 보인다. 고구려 고유의 묘제(墓制)는 일종의 적석총(積石塚)이었다고 추측되며 석총의 초기 양식은 두 가지로 구별된다. 지상에 돌더미를 쌓아올리고 그 중간 부분에 시신(屍身)을 넣어두는 것이 그 첫째이며, 돌더미 아래 지하에 소형 석관을 넣는 방식이 둘째이다. 이것은 넓은 의미에서의 시베리아 일대에 퍼져 있던 일반적인 분묘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대왕릉이나 장군총의 경우는 방형계단식(方形階段式)으로 된, 좀 더 발달한 양식을 보인다. 토총은 석실 위에 봉토(封土)를 덮은 것을 말하며 우리나라에서는 대개 5세기 초부터 이루어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내부에 벽화가 있는 것이 주목되는데, 이는 낙랑인들의 벽화 장식법(壁畵裝飾法)에 자극을 받은 듯하다. 그 기본형은 소위 횡혈석실(橫穴石室)을 봉토로 덮은 것인데, 봉토의 외형은 원형이 많고 방형·절두방추형(截頭方錐形) 등도 있다. 현실(玄室)은 전실과 주실의 둘로 형성되고 연도를 두는 것이 보통이지만, 세 개의 현실이 ㄱ자로 연결된 것, 전실이 없이 단실로만 된 이형(異形)도 있다. 묘실(玄室)의 구조는 사방 주벽(主壁)을 돌덩이를 써서 수직으로 쌓아올리고 위쪽은 역계단식(逆階段式)으로 좁히는 이른바 말각조정이라는 특수한 가구(架構)를 쓰고 있다. 이 말각조정 외에 판석을 하나만 덮은 상자형석실(箱子形石室), 낙랑고분에서 볼 수 있는 궁륭식 천장묘실도 더러 눈에 띈다. 석총·토총을 막론하고 고구려의 고분에는 부장품이 거의 도굴당해 남아 있는 것이 없다.

말각조정[편집]

末角藻井

고구려 고분에서 볼 수 있는 건축형식의 하나. 이러한 형식은 고구려에서 뿐만이 아니고 중국의 석실묘나 소아시아 지방 흑해 연안 등의 석실묘에서도 볼 수 있는 점으로 미루어 그 발원지(發源地)가 소아시아 지방으로 중국을 거쳐 고구려에 전래되어 온 것임을 알 수 있다. 현실의 주벽 위 부분에 주벽과 평행하여 계단식 층급(層級) 받침을 보통 2-3층, 많을 때는 5층까지 안으로 내밀어 천장 면적을 좁힌 다음, 그 위에 주벽선(主壁線)과 엇갈리도록 네 귀퉁이에서 각각 삼각평석(三角平石)의 받침돌을 내민 가구가 보인다. 속칭 투팔천장(鬪八天障)이라고도 불리는 이 형식의 특색은 건축 내부의 같은 평면의 공간을 한층 넓히는 효과를 가졌다.

대왕릉·대왕비[편집]

大王陵·大王碑

대왕릉은 장군총과 함께 일반의 고구려 석총과는 달리 다듬은 돌을 계단형으로 쌓고, 그 내부에 석실을 설치한 대단히 발달한 형식의 석총이다. 현실부의 일부(上部)가 파괴되어 원형을 찾기는 힘드나 원래는 꽤 넓은 묘역(墓域)을 정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한 변의 길이가 63m나 되는 남향(南向)의 계단형 석총이며, 한 개의 판석을 덮고 그 밑에 동서길이 3m, 남북길이 3.4m, 천장높이 18m나 되는 큰 규모의 현실을 두었다. 봉석사면기부(封石四面基部)에는 커다란 자연석을 이용한 호석(護石)을 전후에 6개, 좌우에 각 5개씩을 세웠는데 이러한 호석의 전통은 시베리아의 묘제에서 유래된다. 대왕릉의 왼쪽 200m 지점에는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가 서 있다. 원명이 국강 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廣開土境平安好太王)으로 명기되어 있는 이 대왕비는 응회암(凝灰岩)의 자연석 기둥으로 된 높이 약 6.27m의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비석이다. 이 대왕비가 대왕릉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이유로 해서 대왕릉을 광개토왕의 능으로 추정하는 경향도 있으나, 대왕비가 대왕릉의 전면이 아니라 측면에 있다는 점, 대왕릉과 대왕비 사이에 고총잔해(古塚殘骸)가 널려 있는 점 등을 지적하여, 대왕비는 오히려 장군총에 부수된 것이라는 견해가 유력하다(日人 학자 關野貞의 주장). 만주지방 집안현(輯安縣) 통구(通溝) 소재.

장군총[편집]

將軍塚

대왕릉 동북쪽, 대왕비에서 3km 정도의 거리에 있는 고구려 석총. 냇돌을 넓게 깐 방형 묘역을 정하고 그 중앙부에 한 변의 길이 32m, 높이 13m의 다듬은 화강암으로 쌓은 절두 피라밋의 방형 7층 단축묘(七層段築墓)를 건설했는데, 방형기단의 네 귀가 각각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있으며 각 변마다 3개씩의 자연석 호석을 세웠다. 능의 정상부(頂上部)는 평탄하게 잘리었고, 그 위에 석회와 흙을 섞어 1m 정도의 낮은 봉토형 지붕을 만들었는데, 지붕 주위에 난간을 돌렸던 기둥자리와 흔적이 남아 있다. 현실은 제5층 돌계단 부분을 바닥으로 했고 네 벽에 석회를 바른 한 변의 길이 6m, 천장높이 5.6m의 정방형 현실이다. 두 개의 석제관대(石製棺臺)가 있고 입구에 석비(石扉)가 세워졌던 것으로 추측된다. 만주 집안현(輯安縣) 통구(通溝) 소재.

벽화고분의 변천[편집]

壁畵古墳-變遷

고구려의 토총은 벽화를 가진 것과 안 가진 것의 두 가지로 나뉜다. 벽화를 가진 이른바 벽화고분의 변천은 3기로 나누어 개관(槪觀)하는 것이 보통이다. 제1기는 대략 5세기에 해당되며 중국의 한(漢)·삼국(三國) 및 낙랑의 옛터에 있는 중국계 벽화고분의 자극을 받아 일어난 중국 묘의 모방형식이며, 전실 좌우에 측실(별실)이나 감(龕)이 달려서 그 폭이 주실보다 넓어지고(橫長) 평면이 T자형을 이루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이와 같은 유의 제1기 고분으로서는 평안남도 강서(江西)의 연화총(蓮花塚), 순천(順天)의 천왕지신총(天王地神塚)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한편 통구의 삼실총(三室塚)은 천장이 점차로 내경(內傾)하여 좁아지는 낙랑전분식(樂浪塼墳式) 단실묘이며 용강(龍岡) 매산리(梅山里)의 사신총(四神塚)도 단실묘이지만, 천장이 말각조정으로 되어 있다. 해방 후에 발견된 동수묘(冬壽墓)나 요동성총(僚東城塚)도 제1기 고분으로서 특수한 중국식 분묘의 구조를 보인다. 제2기의 벽화고분은 고구려 성기(盛期)에 해당하는 6세기 전반에 축조되었으며, 1기에서와 같이 통구와 용강지방에 비슷한 분포를 가지고 있다. 구조면에서는 전실에서 측실이 없어지고 따라서 정면 폭이 주실과 같고 명실상부한 부실로서의 전실이 된다. 통구의 쌍실총(雙室塚)·무용총·각저총·귀갑총(龜甲塚), 평양지방의 쌍영총·성총(星塚)·부부총(夫婦塚)·개마총(鎧馬塚) 등은 모두 2기 고분군에 속한다. 제3기는 6세기 후반경부터 7세기 전반에 걸치는데 전실이 없는 단실이 유행하며, 종래의 돌덩이(碑石)로 축성하고 표면에 회칠을 한 형식 외에 장군총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큼직한 화강암을 쓰거나 마연(磨硏)된 편마암(片磨岩) 판석을 써서 방형의 석실을 만들고 그 표면에 직접 벽화를 그린 형식이 섞이고 있다. 3기 고분의 예로는 통구의 사신총(四神塚), 서강(西崗) 17호분, 우현리의 삼묘(三墓), 대동군 호남리(湖南里)의 사신총, 중화군(中和郡) 진파리(眞坡里) 1호분과 동 4호분 등인데 대체로 평양부근에 집중되어 있다.

쌍영총[편집]

雙楹塚

고구려 벽화고분기 제1기의 분묘. 용강군 지운면 진지동 소재. 전실과 현실 사이의 통로에 좌우로 팔각 돌기둥이 하나씩 서 있어 쌍영총으로 명명되었다. 이러한 쌍석주(雙石柱) 석실의 형식은 중국의 윈깡석굴(雲岡石窟)을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현실과 전실, 연도 등은 모두 작은 협도(狹道)로 연결되며, 천장은 이른바 전형적인 말각조정으로 되었다. 현실 실내 모퉁이마다 목주형(木柱形)이 그려져 있고, 이 기둥 모양을 중심으로 당시의 건물형식을 회화로 재현시킨 점도 특이하다. 삼부방실(三部方室)의 벽에는 각종 장식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쌍영총의 가치는 오히려 이 벽화로 집약된다.무용총 舞踊塚 통구에 있는 제2기를 대표하는 토총분묘. 전실의 폭이 주실과 같아져서 전반적으로 제1기분에 비해 규모가 작아진 것이 특징이다. 천장은 말각조정이지만 삼각형 받침돌이 소형이기 때문에 천장면은 팔각형이 되어 다른 사각형 말각천장과는 달라지고 있다.

개마총[편집]

鎧馬塚

대동군 시족면 노산리 소재. 전실이 없는 단실묘. 현실은 거의 방형이며 남북으로 두 개의 관대(棺臺)가 놓여 있고 입구는 남벽 중앙에 있다.

일탑 중심 동서북 삼금당식[편집]

一塔中心東西北金堂式

고구려 가람 배치(伽藍配置)의 전형적인 예. 우리나라 초기의 사찰은 대개 이러한 형식을 따랐으리라 추측되는데, 평양 동쪽의 청암리 사지(淸岩里寺址)가 좋은 본보기이다. 한 개의 석탑을 중심으로 동서북 3면에 전지(殿址)가 있는 배치로서, 이러한 형식은 백제가람(軍守里寺址)에서도 볼 수 있고 일본에까지 파급(波及)된 흔적이 보인다.

건축양식 및 의장[편집]

建築樣式-意匠

분묘를 제외하고 현존하는 고구려의 건축물은 거의 없다. 다만 쌍영총의 벽화장식을 통해서 당시의 호화를 극했던 건축의 면모를 엿볼 수 있을 뿐인데, 현실 입구의 팔각쌍주(八角雙柱), 천장의 구조 및 그림으로 표현된 네 귀퉁이의 기둥, 기둥 위의 두공(枓拱)·마고·동량(棟樑) 등은 고구려 특권층의 가옥양식을 그대로 드러낸다. 건축의 부수물로서 발견되는 고구려의 와당(瓦當)은 대개 불교와 관계되는 연판(蓮瓣) 계통이 많다. 고구려 와당은 붉은 기운을 띤 것이 대부분이고 무늬는 연화문(蓮花紋)·인동문(忍冬紋)·귀면문(鬼面紋)·와문(渦紋) 등인데 선이 예리하고 음양이 명료한 것이 특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