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미술/한국미술의 흐름/고려시대의 미술/고려시대의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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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불상의 특색[편집]

高麗佛像-特色

고려의 불교는 신라와는 달리 도교적(道敎的)인 요소가 섞여서 참위지리(讖緯地理)의 풍수설(風水說)이 가미되어 크게 인심을 지배하였다. 예배 대상으로서의 불상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경시하는 선종(禪宗) 불교의 유행과 사경(寫經)이 성행하여 승려들은 좌선(座禪)과 염불에 몰두하고 대장경(大藏經)을 간행한다든지 대법회(大法會)를 여는 일이 잦았다. 이 때문에 불상의 수요(需要)가 줄어들게 되고 불교 정신이 저조하여 그에 따라 조형(造形)정신의 해이를 초래하게 된다. 즉 원숙한 인체의 사실과 고조된 불교 이상이 조화되어 숭고한 신격미(神格美)를 이루었던 신라 조각의 경우와는 달리 그 높은 정신을 저버린 채 사실 기법만을 추종하고 종래에는 그 사실 능력마저 단순한 되풀이 속에서 타락하여 불상은 인형적(人形的)인 속된 것으로 되어 버린다. 전반적으로 조각 기술이 떨어지는 동시에 특히 대형(大形) 조각에서 퇴화(退化)의 모습이 현저하다. 재료상으로 보면 초기에는 신라 말의 경향을 계승하여 철불(鐵佛)이 많이 만들어지고 대형의 석불·마애불(磨崖佛)들이 제작되었으며, 따로 전기(全期)를 통해서 소불(塑佛)·목불·소형의 동불들도 만들어졌다. 재료가 귀한 탓인지 동불의 제작이 신라에 비해 현저히 줄어들고 극히 소수이기는 하나 협저칠불(夾紵漆佛)이 만들어진 것도 하나의 특색이라 할 수 있다.

고려 불상의 변천[편집]

高麗佛像-變遷

고려 불상의 양식적인 변천은 대개 3기로 나눌 수 있다. 제1기의 불상은 신라의 전통을 이으면서 동시에 새로운 자연주의가 중부지역에서 일어나고, 신라의 고토(故土)인 영남지방에서는 신라 이래로 잠재해 온 추상적인 경향이 신라 말의 기술퇴화와 합쳐 새로 경화(硬化)된 모습으로 나타난다든지 하여 이같이 상반된 유파(流派)의 병행, 또는 공존으로 특징지워진다. 종류는 신라와 마찬가지로 여래형(如來形), 보살형(菩薩形)이 가장 많고 재료는 금동·석조·소조 등이 포함된다. 특히 석조에 있어서 거상(巨像)의 조착(造鑿)을 볼 수 있는 점, 신라 말기의 연장으로 보이는 철불(鐵佛)의 주조, 조각형태에서 입상보다 좌상이 많이 만들어진 점 등이 주목된다. 제2기는 송(宋) 조각의 영향이 보이는 시기로 당시의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이나 <고려사(高麗史)>의 기록에도 송의 불상양식이 고려의 조각에 깊이 관여했음이 나타나고 있다. 제3기는 몽고(蒙古=元)가 침입한 13세기 초엽을 기점으로 전개되는데 자연주의가 후퇴하고 원(元)의 영향 아래 소형 불상들이 새로운 활력을 가지고 유행하는 것이 눈에 띈다.

철조 석가여래좌상[편집]

鐵造釋迦如來坐像

높이 2.8m의 고려시대로서는 예외적으로 큰 불상이며 원래 경기도 광주군 하사창리의 폐사지(廢寺址)에 있던 것을 덕수궁 미술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얼굴 모습이나 손(手) 모양, 자세, 편단우견(偏袒右肩)의 천의의 모습과 주름 등 모두 석굴암의 본존상을 충실히 모방하고 있어 건립 연대를 통일신라시대로 보아 왔으나 지나치게 긴 눈, 예리한 눈썹, 입술의 윤곽 등 추상적인 경향이 뚜렷한 점, 또 최근에 원소재지에서 고려시대의 안상(眼象)을 새긴 석불좌(石佛座)가 발견된 점 등으로 고려 초기의 불상으로 심증을 굳히게 되었다. 신라 불상을 충실하게 재현하려는 노력이 엿보이는 고려 초기의 복고적인 특색을 보이는 작품이라 하겠다.

소조 아미타여래좌상[편집]

塑彫阿彌陀如來坐像

부석사(浮石寺)에 있는 높이 2.7m의 고려시대 유일한 소상(塑像). 건립 연대나 자세는 광주의 철조 석가여래좌상과 같다. 소조인 만큼 모델링이 부드럽고 온화한 인상과 위엄을 동시에 갖춘 조상이다. 불상은 토심(土心)에 칠금(漆金)을 입혔고 광배(光背)는 목판 위에 흙을 입힌 것으로 풍만한 얼굴과 두 어깨, 그리고 의첩(衣褶) 등에 소조의 특색이 잘 나타나고 있다. 이 천의의 주름은 보림사(寶林寺)의 철불(昆盧遮那坐像) 같은 신라 말기 형식에서 출발하고 있으나 더 정연하게 되어 있으며 굵은 입술과 광배만 아니면 신라 말기까지 연대를 올릴 수 있는 작품이다.

국립박물관 소장 철조여래좌상[편집]

國立博物館所藏 鐵造如來坐像

고려 초기의 추상적인 경향을 보이는 불상. 체구·의습 등은 사실적인 수법을 보이고 있어 자연주의적인 요소를 가미했으나 안면(顔面) 묘사에서 변형된 형태를 보인다.

충주 대원사 철조여래좌상[편집]

忠州大圓寺 鐵造如來坐像가장 추상화된 양식을 띤 철불이며 사찰고기(寺刹古記)에 의하면 인종(仁宗) 23년(1145년)에 만든 것으로 되어 있다. 높이 1m의 중형 불상이며 눈이 길고 깊고 넓게 곡선을 그으며 퍼졌고 이례적으로 입은 일본 불상에서 보이는 八형 이어서 주목된다. 체구도 경직(硬直)된 모습인데 좌우대칭으로 도식화된 의문(衣紋)이 둘러 있어 전체적으로 본 불상의 인상이 성화(聖化)된 모습이라기보다 악인 악마를 습복한 것 같은 신비스럽고도 절대적인 존재로 느껴진다. 이는 고려 초에 유행한 밀교(密敎)의 정신과도 통하며 고려 불교의 성격을 반영한 것이기도 한다.

관촉사 미륵보살입상[편집]

灌燭寺 彌勒菩薩立像

충청남도 은진에 있는 높이 18m나 되는 한국 최대의 석조불상. 부여의 대조사(大鳥寺) 석조 미륵보살입상이나 안동 이천동(泥川洞)의 석불과 같은 경향의 추상적인 조각이다. 거대한 암석을 이용한 거상(巨像)이라는 외에 기법 자체는 졸렬하고 석재를 다루는 능력을 상실한 데서 오는 무계획하고 체념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요부(腰部) 아래와 위가 두 개의 암석으로 나뉘며 머리 부분을 기형적으로 크게 다루었기 때문에 보는 사람에게 외포(畏怖)의 느낌을 주는 주술적인 효과는 있을지언정 예술상의 가치는 감소되고 있다.

마애불[편집]

磨崖佛

고려의 마애불은 일반적으로 추상화된 모델링을 보이며 표정은 냉랭하고 기형적으로 거대화한 신체 세부를 통해 정신적인 위압감을 주는 것을 특색으로 한다. 대표적인 마애불로 북한산 구기리 승가사(僧迦寺)에 있는 석가여래좌상(釋迦如來坐像)을 들 수 있겠는데, 방형의 평평한 얼굴에 길게 옆으로 그어진 눈과 굳게 다문 입 등 강한 의지가 보이나 높은 불교 정신에 힘입어 만들었다기보다는 외구(外寇)의 침입에 대하여 국가의 위급을 구하려는 국민적인 소박한 신앙의 총화(總和)로 봄이 타당할 듯하다. 한편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 교리에 있는 약사곡 마애약사여래좌상(藥師谷磨崖藥師如來坐像)은 오른쪽에 <太平二年丁卯>(1022년, 顯宗 13년)의 명기(銘記)가 있는 희유(稀有)한 마애불로서 전체의 인상에서 풍만한 신라 양식을 답습하고 있음이 드러나며, 앙복련판(仰伏蓮瓣)의 이색대좌에 부좌(趺座)하고 있는 불상이다.

대리석제 다라보살좌상[편집]

大理石製 多羅菩薩坐像

강릉의 신복사지(神福寺址) 3층석탑 앞에 있던 것을 국립박물관에 이전하여 보관하고 있는 고려 중기의 석불. 높은 보관(寶冠)을 썼고 미소짓는 얼굴에 풍만한 체구를 지녔다. 양쪽 어깨에 드리운 수발(垂髮), 가슴에 단 영락(瓔珞)·비천(臂釧)·완천(脘釧) 등 장식성이 풍부한 표현은 송(宋) 조각의 영향이 엿보인다. 높이는 92.4m. 같은 계통의 석불로서 오대산 월정사(月精寺)의 약왕보살좌상(藥王菩薩坐像)이 있다.

국립박물관 소장 금동여래좌상[편집]

國立博物館所藏 金銅如來坐像

고려 후기 조각의 특색인 경화된 경향이 보이는 불상. 넓적하고 평평한 얼굴에 위로 치켜올린 눈과 八형의 두꺼운 입술, 낮은 코 등 전반적으로 원(元)의 특색이 보이며, 체구는 건강하지만 두꺼운 옷에 덮여 인간미가 전혀 없이 미신적인 우상으로 느끼게 되는, 이른바 불상화(佛像化)된 조선식 불상에 가깝다. 같은 경향의 작품으로는 전라북도 고창군 선운사(禪雲寺)의 금동보살좌상(金銅菩薩坐像)이 있다.

금동관세음보살좌상[편집]

金銅觀世音菩薩坐像

강원도 춘양군 장연리와 장양면 등에서 출토된 2구의 불상으로 현재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고려 말기에 만들어진 이들 불상들은 미묘한 영락(瓔珞)을 전신에 덮고 있으며 이중의 연판(蓮瓣)을 두른 대좌의 형식, 급격히 위로 올라간 눈의 표현 등 사실적이며 장식적인 점이 몽고 취향으로 기울어지고 있다. 당시에 원(元)의 공장(工匠)들이 고려로 와서 불상의 주조에 직접 참여하고 있음은 기록으로 나타나는 바이지만 특히 원의 왕실이 금강산을 숭배하는 염(念)이 두터워 금강산을 동방의 영지(靈地)로 믿고 불상이나 경전을 납치(納置)했다 하는데 이들 불상들이 출토된 지점이 금강산 부근이라는 점은 납득할 만한 사실이다.

소조나한두[편집]

塑造羅漢頭

전라남도 해남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지며 현재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높이는 12cm. 길게 뻗은 코 끝과 특이한 사실적인 입술, 두 뺨의 근육, 그리고 안구(眼球)를 넣은 듯한 안와(眼窩) 등 종래의 고려 불상에서 볼 수 없는 이국풍조를 나타내고 있는데 중앙아시아 계통의 영향이 아닌가 추측된다.

목제가면[편집]

木製假面

고려시대의 민속무극(民俗舞劇)으로 오늘날까지 전승되어 오는, 이른바 하회 별신굿(河回 別神-)에 쓰였던 목제가면이 우수품으로 다수 전래되고 있는데 경상북도 안동군 풍천면 하회리가 바로 그 전승 지역이다. 이 가면들은 조선시대의 가면들과는 달리 풍부한 표정과 움직임을 가진 것이 특색으로 변형과 과장, 굴곡과 비균형을 통해 광선 밑에서의 효과를 노린다. 세부적으로 보면 거대한 코나 깊숙이 팬 눈두덩 길다란 얼굴 등이 지금까지의 고려 조각과는 다른 하나의 돌연변이의 현상을 느끼게 되는데, 이는 소조나한두에서도 보였듯이 중앙아시아 계통 조각 양식의 흐름이 중국을 거쳐 유입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제작 연대를 정확히 실측할 수는 없으나 고려청자가 성하고 고려인들의 미의식이 극도로 발달했던 11-12세기 경으로 추측할 수 있다.

탑식부조[편집]

塔飾浮彫

고려시대 탑파에 장식한 부조로서 중요한 것은 경천사지 십층석탑(敬天寺址十層石塔)의 부조이다. 기단과 탑신의 각부에는 십이지상(十二之相)의 불상·보살·천부(天部)·나한(羅漢)·비구형(比丘形)의 각종 군상(群像)이 장려하게 조각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상륜부(相輪部)·옥개(屋蓋)·기둥 두공 등 목조건물의 세부를 변화있게 조각으로 전개시키고 있다. 여기 부조는 원(元)의 표현 형식이 혼입(混入)되어 있음을 보이는데 원공장(元工匠)이 직접 가담하여 만든 전형적인 기준작(基準作)으로서 중요하다.

석의[편집]

石儀

공민왕릉과 왕비릉에 있는 석의 두 쌍은 국내에서 제1위라고 할 만큼 웅려하기는 하나 원공장(元工匠)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 말기 자연주의적인 조각의 마지막 작품이라 할 수 있겠는데 굴곡 있고 볼륨이 풍부한 신체와 자연스러운 의첩의 표현 등 조선시대 전기의 경화되어 가는 석의와 다르면서 그 조형(祖型)이 되는 점에서 조각사적으로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