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미술/한국미술의 흐름/고려시대의 미술/고려의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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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건축의 변천[편집]

高麗建築-變遷

고려시대 건축의 변천 과정은 대개 3기로 나눌 수 있다. 제1기의 건축은 당(唐)의 영향을 받아 독특한 양식을 이룩한 바탕 위에 신라 미술을 계승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고려 태조(太祖)가 송도(松都=開城)에 도읍을 정하고 세웠다는 만월대의 궁성터가 남아 있으며, 그는 또 국교가 된 불교의 확립에 따라 송도에 법왕사(法王寺)·왕륜사(王輪寺) 등 10대 사찰을 세웠고 역대의 왕들도 각지에 많은 절을 세웠다고 전하나 대부분 없어져 당시의 면모를 실측하기 힘들다. 제2기의 건축은 고려 독자적인 건축양식을 실현한 난숙기라 할 수 있겠는데 이 기간에 건축의 외래적(外來的)인 요소로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석탑의 평면을 팔각으로 조영한 점이다. 제3기의 건축은 당시에 중국을 지배하던 원(元)의 양식을 전수(傳受)하여 원양식의 궁전건축이 이루어지고 탑에 있어서도 라마탑의 형식이 적용된 것이다.

만월대의 왕궁터[편집]

滿月臺-王宮址

고려의 태조가 세운 개성의 첫 왕궁터. 평지가 아닌 남쪽으로 면한 높은 언덕에 세워진 점이 특이하며 당시에 성행하던 풍수설에 따른 것으로 알려진다. 송악산(松嶽山)을 등지고 좌우 언덕 아래 주수(主水)와 객수(客水)를 끼고 멀리 진봉산(進鳳山)을 안산(案山)으로 해서 남향한 구성이다. <선화봉사 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의 기록에 의하면 왕궁은 남으로부터 삼문(三門=昇平門·神鳳門·閭闔門)이 남북일렬로 서고 그 뒤 고대(高臺)에 회경전(會慶殿)을 정전(正殿)으로 하는 무랑(無廊)에 싸인 여러 궁 건물이 모여 있었다. 왕궁의 정남문인 승평문은 중루(重樓)이며, 회경전은 높이 50척이나 되는 기단 위에 건설되었고, 동서 양쪽에 있는 계단은 전부 단칠(丹漆)을 하였으며, 난간 기둥에는 동화(銅花) 장식을 씌웠고 무랑에 둘러싸인 중정(中庭)에 깐 전석은 땅이 굳지 않기 때문에 걸으면 소리가 났다고 한다. 궁성의 정서문인 선의문(宣義門)은 앞 뒤 두개의 중층(重層) 건물로 되어 그 중간이 옹성(甕城)으로 되어 있었고, 세문비(三門扉) 중 평시에 열고 있는 것은 좌우 두 문 뿐이고 중앙의 문은 국왕과 사신(使臣)이 출입할 때에만 열었다고 한다.

목조건축의 두 양식[편집]

木造建築-二樣式

고려시대의 목조건축을 양식적으로 통관하면 대개 두 가지로 대별할 수 있는데 그 특징은 아래와 같다.

주심포(柱心包)집-중국의 재래식 고식(古式) 건축양식이며 중국에서는 육조시대(六朝時代)나 당대(唐代)에, 우리나라에서는 고구려의 고분벽화 등에서 볼 수 있고, 일본에서는 7-8세기 이래의 건물들이 남아 있는데 남송대(南宋代)에 와서 세부적인 변화를 일으켜 신(新)주심포 양식으로 변했으며 그것이 화남(華南) 지방과의 교통을 통해 고려나 일본에 새로 소개된 것이다.

다포(多包)집-중국에서 재래의 주심포 양식이 화려하게 발전한 것이지만 이미 9세기 중엽에도 존재하고 있으며 그것이 송(宋)의 남천(南遷) 후 주로 몽고(蒙古) 사람들의 장식취미에서 더욱 성행하게 되었고 고려 말기에 신주심포 양식의 뒤를 이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으로 생각된다. 이 두 양식은 우선 기둥 위 공포의 배치 방법이나 그 출목수(出目數)에서 차이가 나며, 첨차·소루(小累)의 형태와 전개방식, 천장의 형태도 차이점을 두고 있다.

부석사 무량수전[편집]

浮石寺 無量壽殿

경상북도 영주 부석면에 있는 고려시대의 건축물로 양식상 현존하는 우리나라의 목조건축 중 제일 오래 된 것이다. 정면(衍) 5간(間), 측면(楔) 3간의 중옥식(重屋式) 팔작(八作) 집으로 정면 5간은 전부 창비(窓扉)며 뒷면 중앙에 통비(通扉)가 있다. 공포는 출목수 2개이며 소루·주두에는 굽받침이 있고 첨차의 하단이 S형으로 꺾인 것을 비롯하여 고식인 주심포 양식을 보인다. 내부구조에서는 양(樑) 위에 포대공(包臺工)을 짜고 또 하나의 양을 얹은 이중으로 된 양이며 종량(宗樑) 위에는 V자(字) 모양의 구재(構材)를 놓고 그것으로 마루도리를 받들게 하고 있다. 1916년의 해체 수리시에 나온 명문에 의하면 1358년에 왜구(倭寇)에 의해 불태워진 것을 우왕(禑王) 2년(1376년)에 재건한 것이라 하나 세부에 있어서 14세기의 건물보다 훨씬 고식이며 적어도 13세기의 것이 아니면 그러한 고식 양식을 재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부석사 조사당[편집]

浮石寺 祖師堂

정면 3간, 측면 1간의 작은 건물이지만 고려시대 건축의 특색을 잘 나타낸다. 지붕은 맛배지붕이고 무량수전과 같은 주심포 집이지만 소루·주두의 측면이 직선으로 되고 굽받침이 없어지며 첨차의 하단이 다각(多角)으로 잘리는 등 다포집 계통의 요소를 보인다. 지붕과 옥체(屋體)의 균형이 잡히고 정면 중앙에 문선(文扇)이 있고 양쪽 협간(狹間)에는 당대 특유의 영자창을 하나씩 달았으며 오른쪽에는 전설로 유명한 선비화(禪飛花)가 있다. 건립 연대는 1916년 개수시에 발견한 묵명(墨銘)에 의해 북원(北元) 선광(宣光) 7년, 즉 우왕(禑王) 3년(1377년)임을 알 수 있다. 무량수전이나 조사당 모두 송(宋)을 통해 들어온 천축계(天竺系) 양식이거나 그것을 절충한 건물이다.

봉정사 극락전[편집]

鳳停寺 極樂殿

경상북도 안동 소재. 정면 3간, 측면 2간의 맛배집이며 2개의 출목공포로 되었고 소루나 주두에는 굽받침이 없으나 하단이 외반(外反)하였으며 첨차의 하단은 S형이면서 더 간결한 것이 특색이다. 내부구조에 있어서는 무량수전과 마찬가지로 복화반(覆花盤)을 사이에 둔 이중의 양(樑)과 그 위에 대공(臺工)으로 마룻도리를 받들게 하고 있는데 마룻도리 대공의 형태가 파두형(波頭形)으로 장식된 고식인 것이 특색이다. 건립 시기는 주심포식인 점에서 고려 중기로 보는 견해와 고려 말기로 추측하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수덕사 대웅전[편집]

修德寺 大雄殿

충청북도 예산 소재. 정면 3간, 측면 4간의 맛배집이며 공포는 2출목으로 되고 대체적으로 부석사 무량수전과 같은 형식이나 세부에 있어서 약간 새로운 형식을 보인다. 즉 초방(草枋) 위에 주심(柱心)도리를 지탱하는 우미량(樑)이 무량수전의 직선적인 것과는 달리 심한 곡선으로 변했고, 또 내반(內反)된 소슬, 장식적인 대공, 쇠혀처럼 뻗은 두공(頭工)의 끝 등 전반적으로 무량수전에 비해 고려 후기의 성격을 보인다. 1940년의 수리시에 나온 묵서명(墨書銘)에 의하여 그 연대가 1308년임이 확인되었다.

관음사 원통전[편집]

觀音寺 圓通殿

전라남도 곡성군 오성면에 있었으나 지금은 소실(燒失)되고 없다. 공민왕(恭愍王) 23년(1374년)에 건립되었는데 주심포집이면서 소루나 주두는 다포계의 측면 직선이고 또 연등 천장이면서 불단(佛壇) 위의 한 간만은 판자를 덮은 특수한 형식을 보인다.

심원사 보광전[편집]

心源寺 普光殿

황해도 황주군 구락면 소재. 정면과 측면 모두 3간인 팔작(八作) 다포집인데 평방(平枋)·창방(昌枋) 위에 주두를 놓고 그 위에 안팎 각 3출목의 공포를 짜서 올리고 있다. 다포집 양식의 건물 중 가장 오래된 예이며 쇠서도 짧고 간결하며 힘에 차 있다.

석왕사 응진전[편집]

釋王寺 應眞殿

황해도 황주군 주남면 소재. 우왕 12년(1386년)에 이성계(李成桂)에 의해 건립된 것으로 정면 5간, 측면 2간의 맛배집 다포집으로 내외 2출목의 공포를 가지고 있다. 다포집이라고는 하나 기둥 사이의 공간포(空間包)가 한 개씩이며 단순하고 기둥에는 엔터시스가 있다. 수법으로 보아 고려와 조선시대를 연결하는 과도적인 형식이라 할 수 있는 중요한 건물이다.

강릉 객사문[편집]

江陵 客舍門

강원도 강릉에 있는 이 문은 원래 객사(客舍)의 문으로 현재 문만 남아 있다. 정면 3간, 측면 2간의 주심포 맛배집인데 대문의 안팎 기둥은 엔터시스가 현저한 원기둥이지만 문판(門板)이 달린 중앙의 기둥들은 방형이며 원주에는 창방과 주두를 얹고 두공(頭工)을 짜서 올렸다. 두공 위에 얹은 대량(大樑)은 주심을 지나 외목(外目)도리까지 뻗었고 그 양단(樑端)은 쇠서로 만들고 있다. 한편 주심도리와 중(中)도리를 받고 있는 우미량은 대량 위에서 화반(華盤)을 발판으로 했고 그 위의 이중으로 된 양과 또 그 위의 제형판대공(梯形板臺工) 및 마루도리를 받고 있다. 첨차의 하단은 S형이고 소루도 측면이 내곡(內曲)하고 있는 주심포 형식이다. 정확한 건립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대체로 고려 말기의 건축으로 추측된다.

고려탑의 특색[편집]

高麗塔-特色

석탑이 전부인 고려탑은 초기에는 신라 탑파 양식의 연장에 불과했으나 차차 그 제약을 벗어나 고려탑의 특색을 살리고 있으며, 송탑(宋塔)의 영향을 받아 6각(角) 또는 8각으로 된 다층탑이 출현한다. 층급(層級) 받침부나 옥개(屋蓋)의 두께가 앏아지는 대신 처마는 길어지고 위로 완곡(緩曲)하며, 기단부가 일석(一石)으로 되어 대좌화(臺座化)하는 것이 주목된다. 종래 석탑의 중심지가 영남(嶺南) 지구이던 것이 중부 이북으로 이동하여 전형적인 고려탑이 북부지역에 모여 있는 것도 한 특색이라 하겠다. 전체적으로 보아 고준(高峻)해지고 불상의 조각이 새겨지는 등 장식적인 의장(意匠)이 강조된다.

서산보원사지 오층석탑 瑞山普願寺址 五層石塔[편집]

충청남도 서산 소재. 고려 초기의 탑파 양식을 보이며 높이 9m나 되는 큰 탑이다. 하성 기단의 각 면에 사자 모양을 상성기단의 각 면에는 팔부신중(八部神衆)을 새겨 신라 말기 석탑의 수법을 보이는 한편 얇고 길게 뻗은 처마가 백제의 전통을 따르고 있어 특이하다.

개심사지 오층석탑 開心寺址 五層石塔[편집]

경상북도 예천에 있고 현종(顯宗) 1년(1010년)에 건립한 고려 중기를 대표하는 탑파로서 신라식을 계승하고 있다. 하성 기단은 지대석과 중석이 하나씩인 네 개의 돌로 되고 각면에는 안상(眼象) 속에 십이지상(十二支像)을 조각했고 상성기단에는 각면에 탱주 한 개를 두고 팔부신장(八部神將)을 조각했다. 갑석(甲石) 위에는 연화문을 새긴 별석(別石)을 얹어 탑신석의 받침으로 하였고, 각 층의 층급 받침은 4단(段), 처마가 길게 뻗어 고려의 특색을 잘 보여준다.

경천사지 십층석탑 敬天寺址 十層石塔[편집]

고려 말기의 양식을 보이는 탑파로서 원래는 경기도 개풍군 광정면에 있었으나 현재는 서울 경북궁에 보관되어 있다. 높이 13m의 대리석 제품으로 기단부는 평면 亞자형(亞字形)의 3단으로 되었고, 그 위에 3층이 亞자형 탑신과 7층의 방형 탑신이 얹힌 특이한 형태로서 기단, 탑신의 각면에는 불상·보살상을 부각(浮刻)하고 지붕·공포 등 목조건물의 세부를 세밀하게 조각했다. 제1탑신의 이맛돌에 새겨진 명문에 의하여 충목왕(忠穆王) 4년(1348년)의 건립임을 알 수 있는데 특이한 형태나 조각의 수법이라든지 말기에 와서 돌연히 생신한 기력 등으로 보아, 기록에 있듯이 원(元)으로부터 온 공장(工匠)이 직접 작업에 가담했음을 시사한다.

월정사 팔각구층탑[편집]

月精寺 八角九層塔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오대산(五臺山) 기슭의 월정사에 있으며 고려 중기 다층석탑의 대표적인 예이다. 전체 높이 15.15m 하성기단의 갑석에는 연화문이 새겨지고 옥개석(屋蓋石)에는 층급 받침 대신 백제식 석탑에서 볼 수 있는 각(角)과 원(圓)의 2단받침을 쓴 것이 특이하다. 탑의 남쪽 면 앞에는 북향(北向)해 앉은 보살석상이 있는데 이러한 유례는 강릉의 신복사지 삼층석탑(神福寺址三層石塔)에서도 볼 수 있다.

월남사지 모전석탑[편집]

月南寺址 模塼石塔

전라남도 강진군 성선면 소재. 모전탑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탑파이다. 단층의 낮은 기단 위에 세워진 3층탑으로서 기단의 면석(面石)과 우주(隅柱)는 별석이고 갑석은 4개의 돌을 맞춰 구성했고 탑신도 여러 개의 판석으로 짜여졌다. 옥개석은 받침 3단 낙수면(落水面) 3단으로 구성되었는데 층급 받침은 말각(抹角) 2, 각(角) 1의 혼합이고 모두 여러 장의 돌로 짜여 있다. 탑은 세장(細長)하여 안정감이 없으나 이 지방 재래의 백제 계통에 전탑 양식을 가미한 특이한 작품이다.

부도의 두 양식[편집]

浮屠-樣式

고려시대의 부도는 신라식의 팔각당형(八角堂形)과 특수형(特殊形)의 두 가지로 대별된다. 팔각당식의 부도는 신라 말기의 부도처럼 비율로 보아 대석부(臺石部)가 큰 것이 주류를 이루며 특수형으로는 석종형(石鍾形)·석등형(石燈形)·골호형(骨壺形)·석탑형(石塔形)·사각당형(四角堂形)의 여러 가지로 구분된다.

팔각당식 부도[편집]

八角堂式 浮屠

신라 후기의 양식을 전수한 고려 초의 부도로서 경기도 양평에서 발견하여 현재 이화여자대학교가 소장한 부도(930년) 1기와 연곡사의 동·북 두 부도가 있으며, 복고(復古) 형식으로 주목되는 거둔사 원공국사 승묘탑(圓空國師勝妙塔), 그리고 우수한 운룡문(雲龍文)의 부조로서 알려진 고달사지(高達寺址) 부도 등이 팔각당식의 대표적인 부도로 남겨져 있다.

정토사 홍법국사실상탑[편집]

淨土寺 弘法國師實相塔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골호형의 부도로서 강원도 중원군 동량면에서 발견되어 현재 서울 경복궁에 소장된 1017년에 건립된 작품. 8각형의 하대석에 역시 8각형의 부연(俯蓮) 중대석 받침과 운룡문을 새긴 간석(竿石)을 가졌고 그 위에 앙련좌석(仰蓮座石)과 앙화(仰花)를 가진 옥개 등으로 된 팔각당식이지만 탑신부는 편구형(扁球形)을 끈으로 결박한 모양을 대치했다. 이 구형은 사리기(舍利器)이거나 골호를 모방한 것임이 분명하며 사리탑으로서의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법천사 지광국사현묘탑[편집]

法泉寺 智光國師玄妙塔

사각당형 부도로서 강원도 원성군 부론면에서 발견되어 현재 경복궁에 소장되고 있으며 건립 연대는 1085년이다. 세부가 매우 화려하고 섬세한 수법으로 이루어져 당대의 청자기와 함께 고려 미술의 전성기를 시위하는 부도로서 중요하다. 기단부는 상하 2층으로 되었고, 하성기단은 그 자체가 2층기단을 압축한 것 같은 형식이며 지대석 네 귀퉁이에는 사자, 혹은 용의 발톱을 변형한 것 같은 모양을 배치하고 각 단(段)의 면석부(面石部)에는 여러 가지 초화(草花)를 새겼고 탑신 같은 높은 중대석에는 보탑(寶塔)·불상 등을 부각하고 있다. 중대석의 갑석에는 장막이 드리워졌고 탑신 4면에는 열쇠가 잠길 문비형(門扉形)과 페르시아 계통의 첨정 궁륭창이 새겨졌으며 그 위에 화려한 옥개석과 상륜부(相輪部)가 얹혀 있다. 하대석 갑석의 네귀퉁이에는 별석으로 원각(圓刻)된 사자두(獅子頭)가 하나씩 있었으나 지금은 파손되거나 없어졌다. 이 탑은 6.26동란 중에 포탄에 맞아 크게 파손된 것을 복원 수리한 것이다.

불국사 사리탑[편집]

佛國寺 舍利塔

석등형의 탑. 방형의 지대석 위에 8각형 하대석, 그 위에 팔판간석(八瓣竿石) 받침을 얹고 긴운문간석(雲文竿石)을 세워서 앙련(仰蓮) 상대석을 놓아 기단부를 구성했고 그 위에 원통형의 탑신석, 팔각 옥개석을 얹었다. 간석을 길게 하고 탑신석 4면에 감(龕)을 만든 것 등은 틀림없이 석등을 머리에 두고 만든 것이며 처음부터 석등형의 부도를 시도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연판(蓮瓣)의 모습이나 조각의 솜씨가 신라시대의 그것을 연상시키나 하대석 주위의 삼화문안상(三花紋眼象)은 그 시대가 이미 고려로 들어간 것임을 입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