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미술/한국미술의 흐름/고려시대의 미술/고려의 공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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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거울[편집]

銅鏡

상당한 수량의 고려시대 청동거울이 있으나 형식면에서 창의성이 결여되어 주로 외래양식(中國·女眞·日本)을 모방하고 있다. 같은 시대의 송·원(宋·元)의 형식을 빌리고 있음은 물론 더욱 고식(古式)인 당경(唐鏡) 및 한·육조경(漢·六朝鏡)의 형식을 모조하고 있는데, 이는 송대에 유행한 복고경(復古鏡)의 현상이 반영된 것으로 믿어진다. 무늬는 초기에는 단순한 4각형이나 원형에서 출발하여 후기로 내려가면서 점차 복잡해지고 다양해진다.

① 한·육조식경(漢·六朝式鏡)-중국 거울의 모작이며 동질이 떨어지고 무늬가 세부에 있어서 예리하지 못한 것으로 분간된다. 종류는 방격경(方格鏡), 일광경(日光鏡) TLV경, 반원반격 신수경(半圓半格神獸鏡) 등이다.

② 당식경(唐式鏡)-형식은 원경(圓鏡), 팔릉(八稜), 팔화경(八花鏡) 등인데 특히 원경이 많고 무늬는 당의 특색인 서수포도문(瑞獸葡萄紋), 수하탄금(樹下彈琴), 보상화문(寶相花紋) 같은 것이 있다.

③ 송·원식경(宋·元式鏡)-형식은 방형(方形), 사릉(四稜), 육릉(六稜), 팔릉(八稜), 말각방형(抹角方形), 엽형(葉形), 종형(鍾形) 등이고 무늬는 동물(動物), 인물(人物), 산수(山水), 항해(航海), 누각(樓閣)등 다양하다.

유에도 쌍뉴, 3뉴가 있는 것이 보이며 중국 거울의 명문을 그대로 지니고 있어 만든 곳을 분간할 수 없는 것도 적지 않다. 이밖에 일본 거울을 모방한 병경(柄鏡)이나 여진 문자(女眞文字)가 양주(陽鑄)된 거울도 있다.

관장식·허리띠[편집]

冠粧飾-

고려시대의 장신구로는 관 장식·허리띠·팔찌·비녀·반지·장도(粧刀) 등이 있다. 관장식은 관끈 고리로 사용된 한쌍의 순금 또는 금동제 투작(透作) 장식이 많이 발견되며 당시의 공예기술의 수준을 보여주는 각종 무늬 용(龍)·봉(鳳)·오(烏)·아·어(魚)·접(蝶)·봉(峰), 초화(草花)가 정교하게 표현되고 있다. 허리띠는 금동제품으로서 교구(絞具)에는 음각 또는 양각의 무늬를 나타내고 과판은 인물·동물·초화 등을 양주한 방향과판이다.

청동은입사포류수금문 정병[편집]

고려시대 청동제 정병(淨甁)의 대표적인 작품. 정병이란 선잔병(仙盞甁)이라고도 불리는 불교제기의 하나로서 출발하였으나 고려시대에는 일반 용기로 쓰인 듯하다. 이 정병은 균형잡힌 기형에 독특한 선묘로 강변의 가을 풍경을 은상감(銀象嵌)하여 가로로 전개시키고 있다. 중요한 소재가 되고 있는 것은 버드나무(蒲柳), 물새(水禽), 구름(雲紋), 갈대 등이며 이러한 것들이 동화의 세계와 같은 소박한 인상과 생동감을 준다. 세련된 솜씨와 정교한 기술로 보아 고려청자의 성기인 11세기 후반-12세기 전반의 작품으로 추측된다.(국립박물관 소장)

표충사 동제은입사향로[편집]

고려시대 사찰에서 불단용으로 쓰이던 동제 향로로 현존하는 것은 6개가 되는데 이 향로는 그중의 하나이며 은을 입사하여 무늬를 이룬 점이 특이하다. 구연부(口緣部)가 넓게 수평으로 외반(外反)하는 굽다리 접시모양으로 구연부 윗면과 노신(爐身) 둘레에는 불상을 상징하는 '범(梵)'자를 쌍권(雙圈)에 싸서 넣었고 구연부에서는 이것을 운문과 교차시키고 있다. 노신의 아랫 부분에는 연판티(蓮瓣帶), 각부(脚部)에는 여의두문띠(如意頭紋帶) 밑으로 반룡(蟠龍)을 각각 은으로 입사하고 있다. 향로의 전체 높이는 27.5cm로서 구연부 바깥에 있는 명문에 의해 그 건립 연대는 대정(大定) 17년(1177년)이며 이런 종류의 향로가 향완(香琬)으로 불리어졌음을 알 수 있다.(경상남도 밀양 表忠寺 소장)

고려시대의 나전칠기[편집]

高麗時代-螺鈿漆器

칠기는 멀리는 낙랑, 가까이는 삼국시대의 신라를 거치는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는데, 송(宋)의 사신 서긍(徐兢)의 <고려도경>이나 기타 문헌으로 볼 때 고려시대에 나전칠기의 기술이 대단히 발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의 칠기는 패각(貝殼), 대모(玳瑁), 동선(銅線)을 상감하는 나전칠기로 유명하며 이 기술은 당대(唐代)에 유행한 평탈(平脫)이라는 나전금은장식법에서 출발하고 있는데, 송대(宋代)에는 나전(螺鈿), 나진(螺塡), 또는 나전창금(螺鈿創金)으로 불리었다. 고려시대의 나전칠기는 저심(苧心) 또는 목심저피(木心苧被) 칠기에 패각(소라·진주조개·전복)과 대모(=龜甲), 은(銀), 또는 동선을 감입하여 무늬를 만들고 있으며 감입이라 하지만 원래는 그것을 기표면에 놓고 칠(漆)로 덮어 부착시킨 후 다시 연마하여 무늬를 노출시키는 방법에 의한 것이다. 또 대모는 그 뒷면에 채화나 채색을 하는 이른바 복홍(伏紅) 또는 복채법(伏彩法)을 쓰고 있다. 기형은 화장용구로 보이는 모자합(母子盒), 유호(油壺), 소형 유개상자(小形有蓋箱子), 경함(經函) 등이며 무늬는 대부분 화청자(畵靑磁)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밀집된 당초문이나 국화문으로 모든 공간을 덮은 것이 주목된다. 시문(施紋)에 있어서는 화경(花莖)이나 주연(周緣) 테두리는 은 또는 동을 꼬은 착선으로 하고 화심(花心)은 복홍대모편(伏紅玳瑁片)을 써서 조선시대의 나전칠기와는 다른 수법을 보인다. 인종(仁宗) 및 의종(毅宗)시대에 송의 영향을 받아 크게 발달한 것으로 전해진다.

나전칠기 초목수금 문함[편집]

螺鈿漆器草木水禽 紋函

고려시대의 나전칠기로는 유일한 초목수금도(草木水禽圖)의 무늬를 가지고 있는 칠기이며 이 무늬가 전성기의 상감청자 무늬와 연관되는 것으로 미루어 연대를 12세기 초로 볼 수 있다. 원래 크기 29×19×11.5cm의 유개합이며 저심칠기(苧心漆器=來紵)이다. 측면에 나전과 묘금(描金)으로 된 포류(蒲柳), 단풍, 갈대를 배치하고 수면(水面)과 하늘에는 수금(水禽)을 나르게 하는 등 회화적인 구성이 특이하며 다시 그 윗면에는 모란당초문, 아랫면에는 국화당초문을 감입했다.(덕수궁 미술관 소장)

나전칠기 입국경함[편집]

螺鈿漆器立菊經函

일본으로 건너간 몇 점의 고려칠기의 하나로서 길이 38cm, 폭 19.5cm, 높이 26.5cm의 장방형 목심저피(木心苧被) 칠기이다. 뚜껑은 3중으로 된 은착선띠, 그 중의 연주문띠(連珠紋帶)로 돌린 안에 명문을 집어넣었고 신부의 네 면에도 화문띠를 돌리고 복홍대모화심(伏紅玳瑁花心)을 가진 국당초문(菊唐草紋)을 정렬시켰다. 양쪽에 손잡이 고리가 달렸으며 뚜껑의 명문 대방광불 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에 의해 경함(經函)임이 입증된다.(일본 동경 국립박물관 소장)

고려종의 특색[편집]

高麗鐘-特色

고려시대의 종은 초기에는 비교적 신라종의 전통을 따르고 있으나 시대가 내려감에 따라 차차 크기가 작아지고 제작이 조잡해지면서 12세기경에는 완전히 면목을 달리한다. 크기에 있어 구경(口經)에 대한 종의 높이의 비율이 신라의 종은 1대 1.3 내외의 차이를 보이는데 비하여 고려의 종은 초기에는 1대1.2 내지 1대 1.1로 좁혀지며 12세기 이후에는 구경과 종의 높이가 거의 비슷해지는 동시에 구경이 40cm 미만이 되는 소형으로 바뀐다. 고려의 종은 상대(上臺)의 윗 부분에 연판띠(蓮瓣帶)가 부가되다가 종내에는 더 올라가 바깥 모퉁이로 돌출되며 12세기경부터는 유통상연에 구형(球形)의 장식이 부착되고 종신에는 비천(飛天) 대신에 여래입상이나 보살입상이 장식된다.

천흥사종[편집]

天興寺鐘

고려 초기인 현종(顯宗) 1년(1010년)에 주조된 높이 1.7m, 구경 1m의 동제 범종. 신라시대의 양식과 수법을 그대로 답습하여 신부에는 극좌(極座)와 비천(飛天)을 부각했고 견대(肩帶), 구대(口帶)에는 보상화문을 새겼다. 역시 용뉴나 유통도 신라의 종을 모방하고 있는데 종신에 위패형(位牌形)을 만들고 넣은 명문으로 연대를 알 수 있다.(덕수궁내 보관)

금동불감[편집]

金銅佛龕

14세기경의 작품으로 추측되는 이 불감은 금동판을 안팎으로 겹쳐서 만든 것으로 높이는 28cm, 정면의 폭은 25cm, 깊이가 12cm가 된다. 불전(佛殿)은 양연좌(仰蓮座) 위에 얹혀 있는 형상이며 정면의 두 문을 열면 정벽에 삼존좌불(三尊座佛)과 나한군상(羅漢群像), 측벽에는 각각 문수(文殊), 보현보살(普賢菩薩)이 있고 두문 안쪽에는 인왕상(仁王像) 1구씩을 범(範)을 사용한 타출법(打出法)으로 조각했다. 이 조각들은 선이 자유로우면서 다양하고 번잡한 맛이 있다. 지붕은 녹색으로 칠했으며 본존불의 의습(衣褶) 표현이나 불상 주위의 운문(雲文) 표현은 몽고(蒙古)의 영향을 보이는데 이것으로 연대를 고증하고 있다.(덕수궁 미술관 소장)

수종사부도 발견 사리구[편집]

水鐘寺浮屠發見 舍利具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조현리(京畿道 楊平郡 龍門面 曹峴里)의 수종사 부도에서 발견된 가장 잘 알려진 고려시대의 사리장치. 높이 31.2cm, 구경 26cm의 중국 송대(宋代) 용천 요청자유개호(龍泉窯靑磁有蓋壺) 속에 들어 있는 이들 사리구의 품목은 금동제 구층탑(金銅製九層塔), 은제도금육각감(銀製鍍金六角龕), 수정제사리용기(水晶製舍利用器), 포편(布片), 향목(香木) 등이다. 그중 감(龕)은 높이 17.3cm이며 칠보문(七寶紋) 및 보상화문을 투각해 만든 6각의 통을 연좌 속에 보주(寶珠)가 달린 6각 뚜껑을 덮은 원구형(圓球形)의 수정사리용기가 들어 있다. 금동의 탑은 방형대좌 위에 얹은 높이 12.9cm의 9층탑으로 초층의 각 면에 열린 3개의 문이 모두 아랍식의 아취형으로 되어 있어 이 사리장치의 연대를 고증하는 데에 도움이 되며 이러한 형식은 법천사 지광국사현묘탑에서도 볼 수 있다.

광주 서오층석탑 발견 사리장치[편집]

光州西五層石塔發見舍利藏置

전라남도 광주의 서오층석탑 2층옥신(屋身) 윗면 사리함에서 나온 금동제의 정자형(亭子形) 사리장치로서 높이는 15cm이다. 기단에는 안상(眼象)이 크게 뚫어지고 기단 위의 갑판에는 하트형(心葉形)의 난간을 두르고 난간 밖으로 네 귀에 사천왕상을 하나씩 세웠다. 이 탑전(塔殿)의 지붕에는 네 귀에 풍경을, 추녀의 각 귀에 영락(瓔珞)을 하나씩 달았고 지붕 꼭대기에는 연꽃 봉오리 모양의 보주가 솟았다. 그리고 탑전을 뚜껑처럼 들어내면 속에 중판앙연좌(重辦仰蓮座), 그 안에는 은으로 된 유개사리호(有蓋舍利壺)가 있다.

와전[편집]

瓦塼

고려시대의 기와로는 개성 만월대(滿月臺)나 절터에서 발견되는 막새 종류와 치미와 등이 있고 그외 청자와도 약간 남아 있다. 수막새는 신라시대의 계승인 연화문이 많은데 초기에는 신라 것과 다를 바 없는 팔엽연판(八葉蓮瓣)의 무늬를, 중기 이후에는 고려 특유의 첨두연판(尖頭蓮瓣) 무늬를 나타내고 있다. 또 괴면와나 봉황문와도 간혹 보이는데 가장 고려의 특색을 잘 나타낸 것은 와당 한복판에 반구형(半球形)을 배치한 것이다. 암막새는 당초문을 사용한 것이 압도적이며 초기의 당초문은 신라식의 활력과 짜임새가 보이지만 후기로 가면서 가늘어지고 잎이 떨어져 단순한 도안으로 바뀐다. 반구형의 무늬를 도철문처럼 둘을 배치한 것도 있고 하단이 능화형(稜花形)으로 되었다가 설형(舌形)으로 되고 거기에 범자(梵字), 운문(雲紋)등을 배치하여 조선시대 막새 형식의 조형(祖型)이 되는 것도 있다. 벽면을 장식하는 무늬전(紋樣塼)은 만월대에서 발견되었는데 보상화나 연화 무늬를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