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미술/한국미술의 흐름/고려시대의 미술/고려의 회화·서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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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회화의 경향[편집]

高麗繪畵-傾向

고려시대의 회화는 진적(眞蹟)이 거의 남아 있는 것이 없어서 그 확실한 실태를 파악하기는 힘드나 대단히 발달했던 것으로 추측할 수는 여러 가지 문헌에 기록이 남아 있다. 송(宋)의 제도를 모방한 화원(畵院)이 초기부터 설치되어 국가적으로 화가를 양성하였고 또 화원(畵員)을 송에 파견한다든가 송의 화가를 초청하는 등 빈번한 접촉을 통하여 송의 화풍, 특히 북송의 화원풍을 모방하여 당시의 회화의 경향 즉 원체 회화로 삼았으리라 추측된다. 역대의 왕으로서 화도에 정진한 이가 많았고 초기의 이녕이나 이광필, 후기의 공민왕은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3대가로 손꼽힌다. 이러한 화원풍과는 달리 화승(畵僧)들이 따라 나와 불교 관계의 회화, 즉 불화(佛畵)에 종사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이 불화에서 파생한 초상화의 유행도 빼놓을 수 없다. 한편 사대부(士大夫)에 의한 문인화(文人化), 사군자(四君子)의 묵죽(墨竹)도 꽤 유행했던 것으로 믿어진다. 회화에 능했던 역대 왕으로는 헌종(獻宗)·인종(仁宗)·명종(明宗)·충선왕(忠宣王)·공민왕 등이었고 묵죽을 잘 그린 화가로는 김부식(金富軾)·김돈중(金敦中)·이인로(李仁老)·정홍진(丁鴻進)·윤삼산(尹三山)·석풍(釋豊)·석행(釋行)·이암(李岩)·안치민(安置民)·옥서침(玉瑞琛)·차원부 등이며 초상화로는 이기(李杷), 석지암(釋止庵) 등이 전해지고 있다.

원체회화[편집]

화원풍(畵院風)의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송나라는 전례없는 규모와 열의로 화원(畵院)을 설치하고 이를 확장하였으며 화공을 우대했고 역대의 왕들이 몸소 그림에 몸을 담았다. 따라서 그림의 경향도 자연히 궁정취미(宮廷趣味)의 방향으로 기울어지게 되어 이른바 원체회화의 확립을 보게 된다. 이러한 추세는 고려에도 미쳐 화조(花鳥)·금수(禽獸)·조어(藻魚)·도석(道釋), 전신(傳神) 등의 유행을 보이고 이러한 그림들은 원체의 한 특색이라 할 형사(形似), 부채(賦彩)를 위주로 할 뿐만 아니라 산수화도 사경산수(寫景山水), 혹은 실경(實景)이고 불화도 궁정 귀족 취미의 세밀화(細密畵)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녕[편집]

李寧 고려시대의 화가. 본관은 전주(全州). 젊어서부터 그림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인종(仁宗) 2년(1124년)에 추밀사(樞密使)를 따라 송(宋)에 들어갔는데 휘종(徽宗)이 한림시조(翰林侍詔)인 왕가훈(王可訓) 등으로 하여금 그에게서 그림을 배우게 하고 또 그에게 본국의 <예성강도(禮成江圖)>를 그려 드리라는 명을 내렸다 한다. 그가 그려 올리자 휘종이 보고 감탄하여 <근래에 고려에서 따라온 화공이 많으나 이녕이 제일이다>라고 칭찬하였다. 또 송나라 상인(商人)이 인종(仁宗)에게 그림을 하나 헌정했는데 인종이 이를 중국인의 신품(神品)으로 오인하고 이녕에게 보여준 바 그것이 바로 이녕의 그림 <천수사남문도(天壽寺南門圖)>임을 확인하고 더욱 사랑하였다는 기록이 <고려사(高麗史)>에 전해진다. 의종(毅宗) 때에는 내각(內閣)의 회화를 관장할 만큼 재능을 인정받은 국제적인 화가로 알려지고 있으나 유품으로 남겨진 작품은 없다.

이광필[편집]

李光弼

고려시대의 화가. 전주(全州) 사람이며 이녕의 아들이다. 그림으로서 명종(明宗)의 총애를 받았는데 명종(1170-1190)은 문신(文臣)을 시켜 소상팔결(瀟湘八景)의 부(賦)를 짓게 하고 그로 하여금 그림을 그리게 했다. 이광필의 아들이 어떤 벼슬 자리에 오르게 될 때 한 신하가 이를 반대하니 왕이 '너는 이광필이 나라의 보배임을 생각하지 못하느냐. 그가 아니면 삼한(三韓)의 그림이 거의 끊어졌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그 신하를 굴복시킬 만큼 이광필을 사랑하여 함께 종일 그림에만 몰두하여 나라일까지 잊게 만들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이제현[편집]

李齊賢

1287년(충렬왕 13년)-1367년(공민왕 16년) 고려시대의 문신, 학자, 시인이며 화가로서 시·서·화의 삼절(三絶)이라 불리었다. 초명은 지공(之公), 자는 중사(仲思), 호는 익재(益齋), 또는 낙옹(樂翁)이며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충렬왕 27년에 등제(登第)하고 벼슬은 시중(侍中)을 지냈다. 계림군(鷄林君)의 봉함을 받았고 81세에 죽었다. 충숙왕(忠肅王) 1년(1314년)에 원나라에 있던 충선왕의 부름을 받고 원에 가서 그곳 학자인 요수염(姚燧閻), 조맹부 등과 사귀며 함께 고전을 연구했고 조맹부의 서체를 고려에 도입하여 널리 유행시켰다. 그의 필적으로 전해지는 회화 작품으로 <현후실적도(賢后實蹟圖)>와 <수렵도(狩獵圖)>가 덕수궁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공민왕[편집]

恭愍王

1330년(충숙왕 17년)-1374년(공민왕 23년) 고려 제31대 왕. 재위 1351년-1374년. 이름은 전, 초명은 기(祺), 호는 이재(怡齋), 또는 익당(益堂)이며 충숙왕의 둘째 아들이다. 충혜왕(忠惠王) 2년에 원나라에 들어가 원의 노국공주(魯國公主)와 결혼했고 충청왕(忠定王) 3년에 환국하여 임금의 자리에 올랐다. 즉위 24년인 45세 되던 해에 환관 최만생(崔萬生), 행신 홍윤(洪倫)에 의해 피살되었다. 역대의 제왕 가운데서 뛰어난 화가로 알려지고 있으며 그의 높은 화격(畵格)은 당시의 여러 문신들의 글로서 짐작할 수 있다.

회화뿐 아니라 글씨에도 재능을 보였고 단청(丹靑) 그림도 잘 그렸으며 인물화의 표현에 있어서는 일찍이 아방궁(阿房宮) 안의 인물을 묘사함에 있어 파리 머리 만한 작은 인물까지 그릴 만큼 정밀한 필법을 보였다고 한다. 노국공주가 죽은 후에는 친히 공주의 초상을 그려 밤낮으로 마주했고 자신의 자화상과 여러 신하들의 초상화도 그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화적(畵蹟)으로는 <천산대렵도>, <음산 대렵도(陰山大獵圖)>의 잔편(殘片)이 보인다.

천산대렵도[편집]

天山大獵圖

고려시대 공민왕이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이 그림은 비단폭에 사냥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세선(細線)으로 선려하게 묘사한 설채화(設彩畵)이며 필치가 활달하고 인물, 짐승, 초목이 생동감 있게 전개되는 높은 화격을 지녔다. 지금은 화폭이 많이 낡아 그 진면목을 가늠하기 힘들 정도이다.(덕수궁 미술관 소장)

진전[편집]

眞殿 영전(影殿)·경령전(景靈殿)이라고도 불리며 조선시대의 선원전(璿源殿)에 해당한다. 역대 왕의 초상을 봉안하던 곳이며 고려시대에는 단편적으로 왕의 진영(眞影)을 봉안했던 기록이 나타난다. 이는 바로 초상화의 발달을 의미하는데 웬만한 사찰에는 의례 진전의 건립을 보았다고 전한다. 당시의 초상화는, 화가 이광필이 '화법는 시대 풍조를 위주로 하므로 반신상(半身像)을 그려야 한다'고 말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반신상을 위주로 한 발달이 추측된다.

불화[편집]

佛畵

고려는 불교가 융성했던 나라인 만큼 자연히 불상 제작과 병행하여 불화가 많이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남아 있는 화적은 별로 없다. 다만 기록에 의종(毅宗), 충렬왕(忠烈王), 공민왕 같은 제왕과 백선연(白善淵), 조인규(趙仁規) 등 여러 화공이 불화에 종사한 기록이 남아 있으며 궁중에서 화불점안(畵佛點眼)의 의식을 행했고 충렬왕, 충선왕 때에 원나라에 불화를 여럿 보낸 기록이 있다. 당시에 불화의 화제(畵題)로 많이 쓰여진 예는 나한(羅漢)·관음(觀音)·보현(普賢)·달마(達磨) 등으로 이것은 고려인들의 신앙의 성격과 연관된다. 그외에 불교도상을 무주적(巫呪的)으로 악용한 그림이나 반불 반신적(反佛反神的)인 그림도 있었던 것 같다. 화공 중에 승적(僧籍)을 가진 사람도 많았는데 오늘날 전해 내려오는 고려의 화승으로는 한생(韓生)·귀일(歸一)·성총(性聰)·설봉(雪峰)·운주(雲珠)·노영(魯英)·학선(鶴仙)·행(行)·학선·혜륵(惠勒)·해애(海涯)·지암(止庵), 풍(豊)·범유(法乳) 등이 있다.

나한도[편집]

羅漢圖

원래 황해도 해주(海州)의 신광사(神光寺)에 있던 <오백 나한도(五白羅漢圖)>중의 잔결(殘缺)로 추측되는 두 폭 그림이다. 170혜군 고존자(一百七十慧君高尊者), 234상음 수존자(二百三十四上音手尊者), 속간에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고려 태조(太祖)가 후양(后梁)으로부터 들여온 오백나한 중의 둘이라고 하나, 중국 것이 아닌 고려 그림임은 이것이 담채견본(淡彩絹本)이기 때문이다. 길이 55.2cm, 넓이 28.2cm의 화폭이며 시주(施主)의 이름과 함께 을미(乙未)·병신(丙申) 등의 간지(干支)가 적혀 있는데 12, 13세기경의 작품으로 추측된다. 그림은 승의(僧衣)는 비교적 굵고 힘 있는 선으로 그려져 있으나 인물의 안면은 세필로 사생하고 있으며 안면 묘사에는 별로 태세(太細)가 없는 의첩의 선과 함께 고조(古調)가 보이며 북송의 이성(李成)·곽희(郭熙)·이용민(李龍珉) 등의 그림에 보이는 화격을 가지고 있다.(덕수궁 미술관 소장)

노영필 금칠석가소병[편집]

魯英筆 金漆釋迦小屛

고려시대의 화승 노영(魯英)이 그린 이 그림은 높이 21cm, 폭 12cm로서 금칠(金漆)의 목판에 금니(金泥)로 그린 불화이다. 앞 뒤 테두리에는 불교 용구인 삼고령을 무늬띠처럼 돌리고 표면에는 석가좌상과 보살군(群)을, 뒷 면에는 출산석가도(出山釋迦圖)를 그리고 있다. 선의 강약이 별로 없고 의첩도 활기없는 표현으로서 작품의 가치는 <나한도>에 따르지 못한다.(국립박물관 소장)

전 고연휘필 하경산수도[편집]

傳高然暉筆 夏景山水圖

일본으로 건너간 희귀한 고려 그림의 하나인 이 산수화는 고려화가 고연휘(高然暉)가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견본착색(絹本着色)의 그림이다. 화면 윗 부분에 산악의 능선을 중첩시킨 고원산수(高遠山水)의 풍경이 전개되는데 범간(范幹), 성무(盛懋) 등의 산악 구도를 연상시키면서 미심(米芯) 특유한 미점(米点)을 쓰고 있고 전경이 되는 수목들을 발묵(潑墨)을 써서 목계류(牧谿流)의 효과를 내는 남종화 계통의 그림이다.(일본 京都 金地院 소장)

해애필 세한삼우도[편집]

海涯筆 歲寒三友圖

해애(海涯)라는 고려의 화승이 그렸다는 이 그림은 송·죽·매(松·竹·梅)의 견본 수묵화이다. 여기서 삼우(三友)란 바로 이 송·죽·매를 뜻하는데 명대(明代)의 사군자(四君子)로 발달하기 이전의 송원(宋元)의 송·죽·매의 고풍으로 선림(禪林)에 반영된 사인(士人)·선승(禪僧)의 여세를 보인 듯한 그림이다. 전경 암반(岩盤)에 쌍송을 세우고 후경에 죽매를 그렸는데 전경에 이렇게 거대한 노송을 세운 것은 북송의 유명한 화가 이성(李成)이 즐겨 쓰는 구도를 연상시킨다.

사찰벽화[편집]

寺刹壁畵

고려시대의 화승들이 그린 것으로 믿어지는 사찰벽화로서 유일한 화적은 경상북도 영주(榮州) 부석사(浮石寺) 조사당(祖師堂) 벽화이다. 1377년경의 작품으로 생각되는 이 벽화는 범천(梵天), 제석(帝釋), 사천왕(四天王) 등을 그린 불화이며 자유로운 필선과 선명한 녹색으로 화면과 동작을 강조하고 있다. 충청남도 수덕사(修德寺) 대웅전에는 비천(飛天) 등 여러 벽화가 있었는데(14세기경), 불행히 해방 후에 퇴손(頹損)되어 지금은 모사(模寫)에 의존하여 원형을 더듬을 수밖에 없다. 수덕사 벽화 <야화도(野花圖)>는 백자화반에 담긴 야화를 그린 장식화로서 섬세한 필치와 부드러우면서 맑은 채색으로 기품있는 화면을 전개시키고 있다.

거창 고분벽화 비천도[편집]

居昌古墳壁畵 飛天圖

고려시대의 고분벽화로 종래에 발견된 것은 개성(開城)에 있는 수락암동(水落岩洞) 고분(12, 13세기), 법당방(法堂坊) 고분(13세기), 공민왕릉(1374년)의 벽화들인데 이들 고분의 벽화는 금관조복을 입어 인격화(人格化)시킨 십이지신상(十二之神像)이나 사신도(四神圖) 등을 주제로 하고 간단한 필선에 약간의 채색을 입힌 정도였다. 1971년 11월 발견된 경상남도 거창군 남하면 둔마리에 있는 고려 초기의 왕릉으로 보이는 석실고분에는 20개의 비천상(飛天像)이 그려져 있는데 남쪽에서 발견된 고려의 첫 고분벽화로 주목된다. 선녀들이 피리를 불며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나는 이들 비천상은 검정과 주황색의 선명한 색조를 이루고 거의 비슷한 동작에 유연한 몸매와 부드러운 의첩(衣褶)의 처리를 보이며 개성이 잘 표현되어 있다. 신라 고분벽화의 영향이 현저하게 연대를 고려 초기로 추측하고 있을 뿐 아직 정확한 고증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고려의 서체[편집]

高麗-書體

고려시대의 서예는 신라시대와같이 구양순(歐陽詢)의 이른바 구법(歐法)이 주류를 이루어 규각(圭角)이 있으면서 정제준경(整齊遵勁)한 서체이며 이러한 특색있는 서체가 비문, 사경에 사용하면서 한편 판각에서는 변화된 서체를 이루어 대장경(大藏經)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고려체(高麗體)를 이룬다. 말기의 사경에는 당사경체(唐寫經體)의 여운을 가진 예도 있고 후에 조선시대의 서체가 되는 원(元)의 조맹부체도 있다.

탄연[편집]

坦然 1070년(문종 24년)-1159년(의종 13년)

고려시대의 중이며 서예가. 호는 묵암(默庵), 성은 손(孫)이다. 1085년(선종 2년)에 중이 되어 혜소국사(慧炤國師)의 문하에 들어갔다. 후에 승과(僧科)에 급제하여 대선사(大禪師)의 자리에까지 올라 왕의 자문(諮問)에 응했다. 왕희지(王羲之)의 서체를 따랐으며 김생(金生)에 다음가는 행초서(行草書)의 명필로 알려져 김생·최우·유신 등과 더불어 신품4현(神品四賢)으로 일컬어졌다. 그의 서적(書蹟)으로는 춘천(春川)에 있는 청평사 문수원 중수비(淸平寺 文殊院重修碑)와 예천(禮泉)에 있는 북룡사비(北龍寺碑) 및 북한산(北漢山)의 승가사 중수비(僧加寺 重修碑)가 남아 있다.

최우[편집]

崔瑀 ?-1249년(고종 36년)

고려시대의 권신(權臣)이며 서예가. 본관은 우봉(牛峰)이며 최충헌(崔忠獻)의 아들이다. 집정자(執政者)로서도 확고한 지위에 있었으며 해서(楷書)·행서(行書)·초서(草書)에 모두 능했다.

유신[편집]

柳伸 ?-1104년(숙종 9년)

고려시대의 문신이며 서예가. 초명은 인(仁). 어려서 등과하여 문신으로 활약했으며 사신으로 중국에도 다녀왔다. 행초서(行草書)를 잘 써서 김생 등과 더불어 신품사현으로 일컬어졌는데 그의 서적으로는 순천(順天)에 있는 송광사 불일보조국사 탑비(松光寺佛日普照國師塔碑)가 남아 있다.

이암[편집]

1297년(충렬왕 23년)-1364년(공민왕 13년) 고려시대의 문신이며 서화가. 초명은 군해, 자는 고운(古雲), 호는 행촌(杏村)이다. 본관은 고성(固城)이며 17세로 등과하여 충숙왕의 총애를 받으며 문신으로 활약했다. 글씨에 있어서는 동방국(東方國)의 조맹부로 불릴 만큼 조맹부체에 뛰어나서 이를 널리 유행시켰고 <대갑편(大甲篇)>을 옮겨 써서 왕에 바쳤다. 한편 그림은 묵죽(墨竹)에 능했으며 그의 서적으로는 춘천(春川)의 문수원 장경비(文殊院藏經碑)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