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미술/한국미술의 흐름/고신라의 미술/고신라의 공예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고신라의 공예[편집]

고신라와 문화가 전반적으로 고구려나 백제에 뒤떨어졌다고 하지만 상당히 우수한 공예품을 남기고 있다. 기록에 나타난 바와 같이 황룡사에는 49만 근의 대종이 있었다고 하니 현존한 성덕대왕 신종에 비하면 약 4배의 크기임을 생각할 때 고신라의 공예 또한 상당히 발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통일 이전의 신라 공예품으로 지상에서의 유품은 전해오는 것이 하나도 없다. 현재 알려진 바는 모두 지하에 보존되어 오던 것으로 그 대부분은 고분(古墳) 출토품들이다. 고신라의 고분구조가 백제나 고구려의 고분같이 현실과 연도를 갖춘 형식이 아니고 목곽(木槨) 위에 수만 개의 돌을 쌓은 형식이므로 목곽의 부식으로 위의 돌이 떨어져 부장(副葬) 유물은 간격없이 돌 밑에 깔려 도굴이 불가능하여 원형대로 발견되므로 신라의 공예품을 대하게 된다. 고분 출토품 이외에 들 수 있는 것은 탑파에 장치(藏置)하였던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를 들 수 있다. 이제까지 알려진 고신라기의 공예품은 그 제작재료에 따라 금속공예, 옥석유리공예, 도예공예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금속공예[편집]

金屬工藝

금속공예는 그 용도에 따라 장신구, 용기, 마구 등으로 나누게 된다.

장신구[편집]

裝身具

몸을 장식하는 도구이니만큼 다종다양하다. 관(冠), 귀고리, 목걸이, 요패(腰佩), 허리띠, 팔찌와 각종 옥류(玉類)가 있다. 관은 금관총 금관(金冠塚 金冠, 1921 발견), 금령총 금관(金鈴塚 金冠, 1924 발견), 서용총 금관(瑞鳳塚 金冠, 1925 발견), 천마총 금관(天馬塚 金冠, 1973 발견), 황남대총 금관(皇南大塚, 1974 발견) 등의 금제관을 비롯하여 수개의 금동관이 있다.

① 금관총 금관은 수지형(樹枝形)과 녹각형(鹿角形)을 오려낸 금판을 세워서 구성하였다. 관에는 수백개의 원형 영락과 비취, 굽은 옥을 달았고, 양측에는 길게 밑으로 늘어진 영락수식을 드리우고 있다. 이 금관을 보면 외관에 세운 수지형과 녹각형의 입화(立花) 장식과 양측의 어느 관에서나 볼 수 있는 고신라 관모(冠帽)가 공통점으로 눈에 띈다. 금령총 금관은 간단한 형식이고, 서봉총 금관은 사방에서 금대를 반원형으로 중앙에서 교차하게 만들고 교차점에는 금판(金板)을 봉황형(鳳凰形)으로 오려서 붙인 것을 첨가하였다. 다른 금관 또는 금동관들도 모두 수지형과 녹각형의 입화장식을 붙이고 있으니 이 형식이 북방 스키타이 문화의 영향이라는 점은 내외 학자의 공통된 의견이다.

금관이 출토되는 고분에서는 따로 금제의 관 장식이라고 불리는 유물이 출토되는데 그 모양은 날개를 활짝 편 새 또는 날개만의 모양으로 만들고 세밀한 투각문양으로 전면을 채웠으며 영락을 달았다. 이것은 아마도 고대 조류(鳥類) 숭배사상에 의한 새를 상징하는 유품이 아닌가 생각되고 있다.

② 귀고리는 형식상 굵은 고리식, 가는 고리식의 두 종류로 구분하는데 귀에 거는 고리의 굵고 가는 데 따른 구별이다. 고신라 고분에서 발견된 귀고리는 금제, 은제, 금동제를 합하여 수백 쌍이 될 것이다. 그 형식은 귀에 다는 고리와 그 밑의 중간장식과 최하부인 숙식의 3부분으로 구성된다. 이 많은 귀고리 중 경주 보문리(普門里) 부부총(夫婦塚)에서 출토된 금제 굵은 고리식 귀고리는 가장 걸작이다. 굵은 고리와 그 밑에 걸친 고리에는 전면에 작은 금립(金粒)을 붙여 귀갑문(龜甲紋)과 그 안에 삼화형(三花形)을 장식하고 중간부에는 공옥(空玉)에 연결한 원형금사에 긴 심엽형(心葉形) 금배(金杯)를 달았고 밑에는 큰 심엽형 금관을 달고 있다. 고신라의 대표적인 금세공품이라고 할 수 있다.

목걸이는 귀고리와 함께 고신라시대 고분 출토 장신구 중 가장 보편적인 것이다. 가장 많이 발견되는 것은 청색 유리옥을 연결하고 끝에 비취의 곱은 옥을 다는 형식이다. 그러나 때로는 매우 호사로운 것이 있으니 경주 노서동(路西洞) 출토의 금제 목걸이는 그 대표적인 것이다. 작은 금환을 여러 개 붙여서 방울같이 만들고 다시 금사로 심엽형 금판을 단 것을 44개 연결하고 끝에 비취의 곱은 옥을 달았다. 길이 30cm의 이 목걸이는 이제까지 발견된 것 중에는 금제 공옥(空玉)과 청색 유리옥을 여러 개씩 교체로 연결한 것을 여러 줄 띠같이 넓게 만든 것도 있다.

③ 팔찌나 반지도 고분에서 다량으로 발견된다. 금제, 은제, 금동제의 여러 종류가 있으나 그 자체에 문양을 가미한 것은 많지 않다. 한 사람분으로 보통 팔찌 한두 쌍, 반지 두세 쌍씩 발견되지만 금관총에서는 여러 쌍이 발견되었다. 그 중 경주 노서동에서 발견된 금제 용무늬 팔찌는 대표적이다. 무게 216.3g의 이 팔찌는 표면에 서로 꼬리를 물고 있는 용 두 마리씩이 조각되어 뛰어난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④ 허리띠와 요패는 즉 허리띠와 허리띠에서 밑으로 늘어뜨리는 수식 패물을 말하는 것으로 흔하지는 않으나 금제, 은제의 허리띠와 요패가 발견되었다. 허리띠는 문양을 투각(透刻)한 방형과 심엽형의 금판이나 은판을 연결하고 끝은 교구(絞具)를 단 것이고, 요패는 타원형 금판 또는 은판을 연결하거나 금쇄(金鎖) 혹은 은쇄(銀鎖)를 이용하여 그 끝에 여러 가지 물건을 달고 있다. 그 끝에 다는 물건은 물고기, 향낭(香囊), 장방형 금판, 행엽형(杏葉形) 금판 등이 가장 많다. 그 대표적인 예는 금관총 출토 금제 허리띠와 요패로서 허리띠는 40개의 금판을 연결하였고 요패는 17조(條)의 수식으로 되어 있다.

⑤ 장신구로서 그다지 흔하게 발견되지는 않으나 주목되는 것 중에 신이 있다. 고분에서 발견되는 신은 대개 실용하였으리라고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은 경주 식이총에서 발견된 식이이다. 표면과 바닥을 입자와 연사형을 이용하여 주연(周緣)에는 불상 광배에서 보는 화염(火焰)과 유사한 문양을 장식하고 그 안에는 연화를 곁들여 귀갑문을 나타낸 다음 그 안에 와전(瓦塼)에서 볼 수 있는 귀면(鬼面)과 쌍금(雙禽)을, 그 좌우에는 네발짐승과 날짐승을 빈틈 없이 장식하고 있다.

⑥ 장신구에는 각종 옥을 사용하여 장식효과를 내고 또는 옥만으로 장신구 구실을 하는 것도 있다. 고신라의 옥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비취옥이고 마노(瑪瑙), 수정, 호박, 유리 등도 사용하고 있다. 형태는 곱은 옥이 가장 많고 관형(管形), 대추형, 고형(鼓形) 등이 있다. 그 중에서도 비취 곱은 옥은 신라 사람들이 즐겨 쓰던 것으로 장신구에는 반드시 비취 곱은 옥이 따르고 있다. 일부에서는 비취가 외래품이라고 하나 신라 영토내에서 비취의 원석(原石)이 없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금속용기[편집]

金屬容器

고신라기의 고분에서 종종 금속용기가 발견되어 주목을 끌었다. 그 중에서도 주목되는 것은 서봉총(瑞鳳塚) 출토의 은제합(盒)과 호우총 출토의 이형(異形) 동기(銅器), 그리고 금관총 출토의 청동호(靑銅壺)와 청동초두이다. 서봉총 출토의 은합은 합개(盒蓋) 내면과 신외저(身外底)에 각각 3·4자의 출입은 있지만 '연수 원년 태세 재신묘 3월중(延壽元年太歲 在辛卯三月中) 태왕교조합우용 3근 6량'이라는 명문(銘文)이 있어 유명하며, 호우총 출토 이형 동기는 둥근 신부(身部)의 일단에서 비스듬히 위로 솟은 주구(注口)가 있고, 그 위에서 반대편에 손잡이가 있으며 주구 뚜껑에는 팔판(八瓣) 연꽃이 양주(陽鑄)되어 있다. 금관총 출토의 초두는 몸이 구형(球形)인데 용수형(龍首形) 주구와 연꽃이 양각된 뚜껑이 있고 밑에는 끝이 마제형(馬蹄形)으로 된 삼족(三足)이 달려 있다. 몸의 일단에는 용수가 있어 그 입에 연결된 긴 손잡이가 있고 손잡이 끝은 인동초(忍冬草)를 문 용수가 있으며 손잡이 전면에는 당초문이 선각(음각)되었다. 같은 금관총에서 발견된 청동사이호(靑銅四耳壺)는 전면에 청수가 심하나 전체의 선이나 구연부(口緣部)의 반전형식은 고구려 고분에서 출토된 청동호와 유사하여 주목된다. 이 외에는 고분에서는 각종의 청동제 용기가 발견되는데 그 중에는 각종 문양을 세각(細刻)한 것이 있고 금관총·천마총·황남대총 등에서는 금·은제 용기도 발견되고 있다.

유리제품[편집]

-製品

유리제품으로는 금관총에서 3개, 서봉총에서 3개, 금령총에서 2개, 천마총에서 2개 황남대총에서 10개, 월성 안계리 고분에서 1개 등이 발견되고 있다. 투명한 유리기 표면에 금관총 것은 감색(紺色)의 파상 돌기대(波狀 突起帶)를, 금령총 것은 감색의 돌기점을 붙인 점은 서방과의 문화적 연관을 추측케 한다.

칠기류[편집]

漆器類

경주 고분에서는 왕왕 칠기류가 발견되지만 그 대부분이 파손되어 잔편으로 발견되었다. 그러나 천마총과 황남대총에서는 어느 정도 형태를 판별할 수 있는 유물이 발견되었다. 이들은 작형칠기·조형각배(鳥形角杯)·압형배(鴨形杯)·굽다리 접시·잔(盜) 등이다. 이들 표면에는 연화·화염 3각문·새 등이 칠화로 그려 있다. 한대(漢代) 분묘에서 출토되는 칠기에 비하면 수에 있어 빈약하고 상태도 좋지 않으나 한대의 칠기와는 구별되는 독특한 형태와 문양이 나타나 있다.

마구류[편집]

馬具類

마구류로는 등자, 행엽(杏葉), 운주(雲珠), 마탁(馬鐸), 마령(馬鈴) 등이 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금관총 출토의 비단벌레 장식 등자이다. 이 등자는 윤등자로서 바닥에 비단벌레 껍질을 감입(嵌入)한 다음에 문양을 투각한 금동판을 씌워서 만든 것으로 투각된 금동판 사이로 껍질의 색채가 비치게 하였다. 마구 중에는 여러 가지 형태의 행엽(杏葉)이 발견되는 데 이것은 말의 둔부를 장식하는 것으로 표면에 여러 가지 문양을 투각한 금동판을 붙여서 만든 것으로서 그중의 식이총 출토 행엽에는 용봉문(龍鳳紋)이 투각된 화사한 것도 있다. 또 마안(馬鞍)의 전륜(前輪)과 후륜을 장식하였던 금동판에도 용봉문이 투각된 호화로운 예가(파손이 심하지만) 식이총에서 발견되고 있다. 이외에도 마구로서 운주(雲珠), 마탁(馬鐸), 마령이 있어 때로는 호화로운 장식을 가한 것이 발견되고 있다.

신라의 토도제품[편집]

-土陶製品

토기(土器), 토우(土偶), 와전(瓦塼) 등을 들 수 있다. 토기는 고분의 부장품으로 가장 다양하고 또 다량으로 출토되고 있다. 그 중에는 굽다리 접시류가 가장 많고 감, 항아리 등이 다음이고 이형토기도 많이 발견되고 있다. 굽다리 접시는 여러 가지 형태의 투공(透孔)을 낸 높은 대(臺) 위에 잔을 얹은 것으로 뚜껑이 달리는 수가 많고, 표면에는 평행파상문으로 장식하고 극히 드물게 개표(蓋表)에 뱀 등 동물을 부착시킨 것도 있다. 감, 항아리에도 대체로 평행파상문을 장식하였고 그 중에는 인물 혹은 동물을 선각한 특이한 것도 있다. 토기 중에서 주목되는 것은 이형토기로서 그 대표적인 예가 금령총 출토의 기마인물형 토기와 주형 토기이다. 기마인물형 토기는 각종의 마구를 착장(着裝)한 말 위에 관모를 쓴 사람이 안장 위에 고삐를 잡고 타고 있다. 말 가슴에는 주구(注口)가 돌출하고 궁둥이에는 위에 완형이, 뒤에는 손잡이가 달리고 말 몸은 내공(內空)이다. 주형토기는 방형공(方形孔)이 뚫린 높은 대 위에 배를 올려 놓고 한쪽 끝에 사람이 앉아 노를 젖고 있다. 배 앞 뒤에는 영락을 달아 장식하고 있다. 이 2종이 토기는 전무후무한 토기로 여러 모로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외에도 수금형(水禽形), 마형(馬形), 거형(車形), 가옥형(家屋形) 토기들이 있으나 주로 가야 지역에서 발견된다. 그 중 경주에 출토된 가옥형 토기는 방형벽 한쪽을 개방하였고 우진각 지붕에 기와가 세밀하게 모각되었다. 또 수각(獸脚)을 단 도연(陶硯)이 발견되는데 연면(硯面)의 처리나 여러 개 달린 수각 중에 주목되는 것들이 있다. 다음, 토우는 그다지 많이 발견되지 않으나 인물, 동물들이 발견된다. 인물 중에는 매우 고졸(古拙)한 처리를 한 것이 대부분이고 그 중에는 매우 고졸(古拙)한 처리를 한 것이 대부분이고 그 중에는 악기를 연주하는 주악토우, 혹은 악기를 연주하면서 고개를 들고 노래하는 토우가 있는가 하면 지게를 지고 있는 토우도 있다. 동물은 소, 범 등이 있는데 그 수법은 인물상과 같이 모두 치졸하다. 이들 토우는 가장 토속적인 관념과 수법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작품으로 우열을 따지기보다 상시의 신앙이나 풍속·습관을 연구하는 자료가 될 것이다. 와전(瓦塼) 또한 공예의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한다. 기와는 막새기와에 각종 문양을 장식하여 공예적인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막새기와에는 암막새와 수막새의 2종이 있으나 장식된 문양으로 통일신라시대같이 다양하지 못하고 암막새는 고신라 것으로 확실한 출토 예가 없다. 수막새는 거의 모두 연꽃을 양각하고 있는데 그 양식은 다분히 백제나 고구려의 연꽃무늬를 따르고 있다. 중앙에 원형 자방을 두고 그 주위에 8엽의 단판(單瓣) 소문(素文)연꽃을 양각하는 형식이 통례이다.

그 밖의 공예품[편집]

-工藝品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를 들 수 있다. 이제까지의 고신라기 사리장엄구의 예로 분황사 석탑과 황룡사 9층탑의 사리구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분황사 석탑에서는 석함(石函) 속에서 곱은 옥을 비롯한 각종 옥, 투각 금동판 등이 발견되었고, 황룡사 탑의 사리구는 일찍이 도굴, 산일(散逸)되었으나 그 일부가 수습되어 불상이 조각된 금동판, 입수쌍금(立樹雙禽)이 조각된 은판을 비롯하여 사리기 등이 발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