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미술/한국미술의 흐름/고신라의 미술/고신라의 회화와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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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신라의 서적[편집]

古新羅-書蹟

고신라기의 서적은 지금 하나도 전하지 않고 다만 몇몇 금석문을 통하여 서풍(書風)의 일단을 짐작할 뿐이다. 또한 지금에 전하는 고신라기의 금석문은 통일신라기의 그것과 달리 찬자(撰者), 서자(書者)의 기명이 없고 서가(書家)의 성명도 전함이 없다. 고신라의 문화가 비단 서예에서 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고구려나 백제보다 뒤떨어졌던 사실을 생각하면 한문화에 접하는 기회도 훨씬 적었을 것이므로 상대적으로 유품도 적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구려의 경우 광개토왕의 거비(巨碑)를 비롯한 모두루묘지(牟頭婁墓誌), 고구려고성각자(高句麗古城刻字)가 있고, 백제의 경우 사택지적비(砂宅知積碑)가 있어 모두 고신라의 금석문보다는 연대도 오래고 서체도 정제되어 있다.

고신라의 서적은 다음에 열거하는 비문에서 볼 수 있으니 모두 6세기 후반 이후의 것들이다.

진흥왕창녕비(眞興王昌寧碑) (561)

동 북한산비(北漢山碑) (561-568)

동 황초령비(黃草嶺碑) (568)

동 마운령비(磨雲嶺碑) (568)남산신성비(南山新城碑) 6기(591)

대구오작비(大邱塢作碑) (578)

어숙술간묘지(於宿述干墓誌) (595 혹은 535)

단양적성비(丹陽赤城碑)

태종무열왕릉비(太宗武烈王陵碑) (661)

그 중 진흥왕의 4개 순수비(巡狩碑)는 모두 고졸한 서법을 보여주고 있다. 일찍이 김정희가 "육조시대 금석문은 남은 것이 적으나 이 비의 서체와 비슷하리라고 생각되며 그 서체가 예서 같기도 하고, 해서 같기도 하니 이는 곧 육조시대의 서법인 것이다.(六朝石之 至今略存與 此碑書體恰相 似可見且其 書體似隸似楷 是六朝書法)"라고 한 바와 같이 통일신라 이후 우리의 서체(書體)를 지배하였던 당체(唐體)보다 앞서는 비후(肥厚)·유경(遺勁)한 서체이다. 이에 비하면 남산신성비, 대구오작비, 단양적성비 등은 한층 고졸하며 자유롭고 분방함을 느끼게 한다. 영주 순흥의 어숙술간묘의 묘지명은 진흥왕비에 가까운 서체로서 육조체에 속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상의 비문보다는 훨씬 뒤지는 예이지만 태종무열황릉의 이수 전액(篆額)은 무열왕의 제2자 김인문의 서(書)라 전하는 전서(篆書)로서 고신라의 유일한 전서(篆書)이고 서법 또한 아려(雅麗)하다. 이상의 예에서 보면 한문화(漢文化) 수용이 가장 뒤진 고신라는 중국에서의 서법 전래 또한 뒤늦어 통일 직전 당문화 수입 이전까지는 서법의 발달에 볼 만한 것이 없었던 듯하다. 더욱이 서가의 이름이 전함이 거의 없음은 적요한 감을 주는데 통일초에 걸쳐 생존한 인물이지만 김인문(金仁問)만을 볼 수 있는데 오직 8자(八字)의 전서로서 그의 진적을 볼 수 있다고 하겠다.

고신라의 회화[편집]

古新羅-繪畵

이 시기의 회화는 서적보다도 더욱 그 예를 찾아보기 힘들다. <삼국사기> 권48 열전(列傳) 8 <솔거조(率居條)>에 "솔거는 신라인인데, 출신이 뚜렷하지 않아 그 족계에 관한 기록이 없다. 나면서부터 그림을 잘 그려 일찍이 황룡사 벽에 노송을 그렸는데 줄기의 껍질이나 꿈틀거리는 가지를 보고 왕왕 새들이 날아와서 앉으려다 떨어지곤 하였다. 오래되어 퇴색되자 절 중이 새로 덧 그린 후에는 새가 오지 않았다. 또 경주 분황사 관음보살상, 진주 단속사 유마상이 모두 그의 필적이다. 세상에서 신화라 전한다"라는 단문만이 고신라의 화인과 화적을 알려 주는 기록으로 남아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솔거의 그림은 매우 사실적이었던 듯하다. 황룡사의 노송도(老松圖), 분황사의 관음보살상, 단속사(斷俗寺)의 유마상(維摩像)등은 지금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고구려시대 화적으로 다수의 고분벽화가 있고 또한 백제시대의 고분벽화가 전하나 신라시대의 벽화는 최근까지 발견되지 않다가 1971년 8월 이화여대 박물관의 조사단에 의하여 경북 영주군 순흥면(順興面)에서 처음으로 발견되어 신라시대 최초이고, 유일한 본격적인 화적이 되었다. 그뿐 아니라 '을묘년 어숙지술간'이라는 묘지명까지 있어 의외의 큰 수확이었으나 아깝게도 현실내의 벽화는 흔적만을 남길 뿐 인위적으로 훼손되었고 연도 천장의 대연화(大蓮花)와 문비(門扉)의 인물상만 좌우벽에 약간의 흔적을 남기었다. 그중 연도 천장의 연화가 가장 잘 남아 있었고 그 다음이 문비의 인물상이다. 연화는 7엽 3중 연판(蓮瓣)이 뚜렷하며 주로 홍·황·흑색을 쓰고 있다. 고구려나 백제의 연화같이 판단(瓣端)이 길고 날카롭지는 않으나 풍요한 판면이 이와 유사하다. 판내에는 홍색 종선(縱線)이 그려져 있는 점과 연화 중심 주변에 홍색 타원형이 그려져 있는 점은 고구려 고분벽화 연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점으로 피차의 연관성을 연상케 한다.

다음의 문비 인물상은 아깝게도 상반신과 최하단부가 파손되어 어떤 종류의 인물상인지를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하반신의 의문은 비교적 잘 남아 있어 몸에는 관복 같이 보이는 옷을 두껍게 겹겹이 입고 있다. 색조는 천장의 연화문과 유사하고 선은 유창하고 활발하다.

이 순흥(順興)의 고분벽화가 그 필치로 보나 묘지명의 서체나 서식으로 보나, 고신라기에 속할 것은 분명하고 그 지리적인 위치가 고구려의 영토와 접하였다는 사실과 아울러 생각할 때 고구려 벽화의 영향이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고신라의 화적으로는 더 이상 예시할 것이 없지만 경주금관총을 비롯하여 몇 기의 고분에서 발견된 벽화를 들어야 하겠다. 이미 낙랑의 채협총에서 발견된 채화칠협이 유명하지만 경주의 고분에서 발견된 칠화는 대부분 잔편들로서 전모를 알기 어려운 것들이었으나 천마총에서는 어느 정도 형태를 알 수 있을 정도의 장니와 채화판(彩畵板)이 발견되었다. 이 두 유물은 모두 자작나무 껍질로 만들고 그 위에 그림을 그렸는데 장니에는 하늘을 나는 흰 말을 그렸고 그 주위에는 당초문을 돌렸으며 고채화판에는 부채같은 구획을 만들고 그 안에 각각 새, 기마인물들을 그렸다. 색채는 백색, 군청, 주색, 황색 등을 사용하였는데 필치가 매우 활달하고 강한 선을 사용하여 고구려 회화와의 밀접한 연관을 보여주고 있다.

끝으로 가야시대(伽倻時代) 고분벽화의 일례가 있음을 부언하여 둔다. 즉 경북 고령(古靈) 고아동(古衙洞)의 고분벽화로서 잡석(雜石)으로 건조한 위에 면회(面灰)하였고 채색으로 그렸던 관계로 면회의 탈락으로 벽화는 대부분 훼손되었으나 다행히 연도 천장에 연화의 일부가 남아 있었다. 이 역시 면회의 탈락이 심하여 연화의 중심부에만 약간의 채색이 남아 있다. 수법은 부드러워서 고구려보다도 오히려 백제의 연화에 가깝고 색채 또한 주·황의 색조가 발고 명랑하다. 이상 고신라의 화적으로는 순흥의 고분벽화의 일례뿐으로 이것으로 고신라의 화풍을 논하기는 아직 시기상조인 감이 없지 않다. 앞으로서 더 많은 발견 예가 있어야 하겠다.

<泰 弘 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