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미술/한국미술의 흐름/백제의 미술/백제의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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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가람[편집]

百濟 伽藍

삼국의 건축은 각각 그 나름의 특징 있는 양식이나 기법을 가졌는데 특히 불교 건축과 건축술이 발달했던 나라는 백제로 알려지고 있다. 외국에 적극적으로 건축 시술을 제공한 나라도 백제였다. 신라의 황룡사(皇龍寺) 9층탑은 백제 사람인 아비지(阿比知)에 의해 축조되었고, 원시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던 일본 건축도 백제의 도움을 받아 개화되었다. 뿐만 아니라 고구려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친 흔적이 엿보인다. 백제는 특히 목조건축에 뛰어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지금 남아 있는 건축물은 하나도 없고, 단지 석조물 약간이 있어 그 발달한 건축 기법과 양식의 잔형(殘形)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오히려 백제인들이 조영(造營)한 일본에 있는 건축물을 통하여 백제 가람의 모습을 상기할 수 있는데 시덴노사(四天王寺)나 호류사(法隆寺)의 예가 바로 그것이다. 특히 호류사의 5층 목탑은 백제 건축미의 일단을 대변하는 것이다.

백제 가람의 구조를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유구(遺構)로 백제 유지에 남아 있는 사지(寺址)로서는 부여 일대의 군수리 사지, 가탑리(佳塔里)·동남리의 사지 및 정림사지, 은산면 금공리(恩産面 琴公里)의 금강사지(金剛寺址), 적성면 현북리(積城面 懸北里)의 사지와 익산군의 미륵사지뿐이다.

백제 칠당가람식[편집]

百濟七堂伽藍式

일본의 초창기 가람(Sangharama)의 배치형식을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말로서 일본 세쓰(攝津)의 시덴노사나 야마토(大和)의 호류사가 이 형식에 따라 지어진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이들 사찰들은 백제의 조사공(造寺工), 와박사(瓦博士) 등의 도움으로 조영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형식이 당시에 발달했던 백제의 건축양식이었음은 쉽게 추측할 수 있다. 호류사의 가람 배치를 보면 중문(中門)과 방형 회랑(方形回廊)의 일곽(一廓) 안에 금당(金堂)과 탑을 배치하는, 일반적인 우리나라의 칠당가람 배치법과 같으나 금당과 탑이 동서의 축(軸) 위에 나란히 놓인 점이 특이하다. 백제 사지 중에 당과 탑이 나란히 놓인 예는 아직 조사된 바는 없으나 이러한 유형이 백제에서 있었을 것은 확실하다. 후대에 만들어진 사찰이나 백제의 고토(古土)이던 남원(南原)지방의 문복사지(文福寺址)가 이러한 배치법을 보이고 있어 이를 실증한다.

군수리사지[편집]

軍守里寺址

1935-36년의 두 차례에 걸쳐 발굴·조사된 사지로서 절 이름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충청남도 부여 남쪽의 평지에 강을 면하고 있는 평지 사지로서 부여시대 초기인 6세기 중엽쯤에 창건된 가람으로 추측된다. 그 구조는 남쪽으로부터 중문·탑·금당·강당이 세워진 흔적이 보이며, 금당 좌우로는 건물지 각 한 개씩(역시 금당으로 추측됨), 그리고 강당의 좌우에는 종루(鐘樓)·경장(經藏)이라고 생각되는 건물지가 한 개씩 보인다. 각 건물지의 윤곽은 병치된 평와열(平瓦列)로 구획되고 있으며, 탑지는 초석의 배치로 보아 정면 9간(間)의 건물이었다고 믿어지며, 그 탑지 중심부의 지하에서 금동보살상·납석제여래좌상 등 불상을 비롯하여 다수의 공예품이 발굴되었다. 금당 3동(棟)이 동서 방향으로 병립해 있는 점이 주목된다.

부여 동남리사지[편집]

扶餘東南里寺址

충청남도 부여의 남쪽 성산(城山) 기슭에 있는 무명 사지로 1938년에 조사된 것이다. 군수리사지와 다른 가람 배치를 보이는 이 사지는 금당·강당이 남북선상에 서 있고, 다시 강당과 남문인 중문을 연결하는 회랑이 있다. 각 건물의 거리나 금당의 남북 벽의 길이는 21m를 기본 단위로 한다. 탑지가 없는 대신 금당 앞 좌우에 돌을 쌓아 이룬 석조(石槽)가 두 개 서 있는 것이 이색적이다.

백제 탑파의 형성 및 전개[편집]

百濟塔婆-形成-展開

탑은 불교건축의 특유한 양식으로 원래 인도의 고유한 건축인 스투파(Stupa)의 음역(音譯)이다. 석가의 입적(入寂) 때 그 유해를 다비한 후 그 잔골(殘骨)을 당시에 관계가 있던 8개국에 분배하여 그것을 보존하기 위해 세운 것이 시초였다. 따라서 부처의 사리(舍利)를 안치해 두던 곳으로 가람배치의 규약상 탑이 선 곳에 반드시 사찰이 있게 마련이다. 탑파가 한국에 전래된 것은 고구려 때일 것으로 추측되나 그를 고증할 만한 유물이 하나도 없어 실측 할 수 없고, 다만, 백제의 가장 오래 된 몇 개의 유물과 그 계맥(系脈)이라 할 수 있는 일본의 탑들을 통해서 어느 정도 계보를 찾아 올라갈 수밖에 없다. <북사(北史)>에 전해져 내려오는 백제의 탑파는 처음에 목조(木造)가 주류를 이루었으리라 생각된다. 오늘날 남아 있는 일본 목탑의 전통을 통해서나마 발달했던 백제 목탑의 면모를 조응(照應)할 수 있다. 모든 사실(史實)을 종합해 보건대 백제에는 고층목탑(高層木塔)이 발달했을 것이고 이 고층목탑의 발달은 곧 건축술의 발달을 의미한다. 탑파중심의 가람배치가 성했던 시기에 그와 병행하여 가구(架構)에 치중하는 목탑이 성했으나, 점차 탑파가 금당의 보조물로서 떨어지고 따라서 장식적인 건물로 치우치는 경향이 짙어지면서 점차 석탑으로 이전되었던 것 같다. 목조형식을 석재(石材)로 번안한 예로 미륵사지 석탑은 목조건물의 석재에 의한 충실한 모방을 잘 반영한다. 백제의 석탑으로서 잔존(殘存)하는 희귀한 탑파인 이 양탑의 구조를 비교하건대 미륵사지 석탑은 순전히 가구적(架構的)인 축조로서 田 또는 口자형의 배치를 보이는 데 비하여 정림사지 석탑은 □형으로 엇물린 배치를 보인다. 또하나의 백제 탑파인 왕궁평탑에 이르러서는 응집적(凝集的)이고 조각적인 경향으로 흘러 미륵사지 석탑-정림사지 석탑-왕궁평탑으로 연결되는 백제 탑파의 변모가 역연하다.

미륵사지 석탑[편집]

彌勒寺址石塔

익산 금마면 기양리 용화산(龍華山) 기슭에 있으며 이 미륵사지는 동양 제일의 가람지라 불려진다. 현존하는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 되었고 규모도 크며 목조탑파의 양식을 가장 충실히 재현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화강암의 석재를 사용하였는데 현재는 동벽과 북벽의 일각만이 남아 있고 다른 부분은 모두 붕괴되었다.

층수(數)도 6층 밖에는 없으나 현재의 높이는 14.2m로 원래는 7층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신라식 석탑에서 보는 바와 같은 상하기단(上下基壇)이 없이 지복석(地覆石)으로 구획된 방형 기단에 사방 3간의 다층탑을 쌓아 올렸는데 초층(初層)에 있어서는 엔터시스(Entasis)를 가진 각석주(角石柱)로서 간막이를 했고, 좌우의 두 벽에는 중앙에 각각 탱주를 세워 벽면에 다시 구분하였으며 중앙의 간벽에는 내부로 통하는 장방형 입구가 열려 있다. 그리고 석주 위에는 평방(平枋)과 액방(額枋)이 있고 그 위에는 작은 벽이 길게 있은 다음 3단의 층급(層級) 받침 벽으로써 지탱되는 옥개석(屋蓋石)이 있다. 2층 이상은 이 초층보다 높이와 벽의 길이가 몹시 줄고 있으나 평방 위의 작은 벽이 없어졌을 따름 그 밖의 구조는 똑같다. 이러한 구조를 통관하면 이 석탑이 일반적인 석탑의 개념과는 다른 형태를 가졌으며, 석재를 썼다 해도 양식면으로는 순전한 목조의 탑파 형식을 모방한 것임이 명백하며, 백제시대 목탑의 모습을 비교적 자세하게 보여주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탑은 백제 석탑의 이른바 시원형식(始源形式)이라고 할 수 있고, 여러 가지 점에서 한국 석탑 전체의 출발점으로 여겨진다. 탑의 연대에 관해서는 확실한 것을 알 수 없으나 부여의 정림사지석탑보다는 앞선, 7세기 초두에 건설된 것으로 추측된다.

왕궁평탑[편집]

王宮坪塔

익산시 왕궁면 왕궁평에 있는 백제의 5층석탑. 미륵사지석탑과 마찬가지로 목조 탑파의 형식을 모방한 탑이나 건축적인 가구보다는 조각적이며 응집적(凝集的)인 가구를 보임을 특징으로 삼는다. 그 토대(土臺)는 주위의 지반에서 독립되어 완전히 탑파의 중력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높은 기단을 형성하며, 옥신(屋身)은 복잡한 목조 탑파의 형식을 떠나 단순화된 응결(凝結)을 보이고 각 기둥의 형식은 엔터시스를 떠나 있다.

정림사지 석탑[편집]

定林寺址石塔

속칭 평제탑이라고도 불리는 이 탑은 충청남도 부여의 남쪽 정림사지에 있는 5층탑으로서 탑 연대의 하한(下限)을 말해 주는 대당평제기(大唐平濟記)가 초층 탑신에 새겨 있어 유명하다. 전체의 높이 8.33m이며 제일 아랫부분에 지대석(地臺石)과 그 주위를 에워싼 지반석(地盤石)이 있는데 지대석 위에는 신라식의 기단(基壇)을 축소한 것 같은 것이 있다. 초층 기단 위에는 엔터시스를 가진 네 귀퉁이의 기둥(四隅柱)과 면석(面石)으로 조립되는 초층 축부(軸部=屋身)가 그 위에 2단의 층급 받침돌로 받쳐진 옥개석이 얹혀 있다. 2층 이상의 옥개석이나 옥신의 폭은 점점 좁아지고 높이도 급감(急減)되어 미륵사지석탑보다 더 세장(細長)한 형태를 보인다. 이 탑은 엔터시스를 가진 초층 옥신석의 우주(隅柱)라든가 계단형 받침이면서 모죽임(抹角)을 하여 사면(斜面)을 이룬 것, 또는 각 부분이 분리되어 여러 개의 석재로써 이루어진 점, 그리고 지붕처럼 반전(反轉)하는 옥개석등 모두 미륵사지 석탑에서 본 바와 같이 목조 건물을 모방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미륵사지 석탑에 비해 더욱 단순화, 또는 정비된 형식과 수법을 보이고 있음이 분명하며, 석재의 수가 감소되고 받침부가 정돈되고 미화된 점, 기단부가 정비된 점 등이 이를 실증한다. 말하자면 미륵사지 석탑에서 출발한 백제 석탑의 형식을 정비하고 정형화(定型化)시켰다고 볼 수 있으며 백제 석탑의 전형적인 형식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묘제[편집]

墓制

백제의 묘제는 그 기본형에 있어서 고구려 것과 같은 석실토분(石室土墳)이며 신라 지역의 묘제와는 다른, 이 양국간의 중간에서 묘제상의 영향을 중계한다. 또 영산강(榮山江) 하류 일대에서 옹관장(甕棺葬)이 성행한 것도 한 특색이라 할 수 있다. 대체로 백제의 묘제는 수도의 삼천(三遷)에 따라 상대(上代=漢城時代)·중대(中代=熊津時代)·하대(下代=泗批時代)의 3기로 구분한다. 상대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고분들은 주로 한강(漢江) 연안 일대에 집중하고 있으며, 서울의 광장동(廣壯洞) 또는 여주(驪州) 부근, 그리고 가평(加平) 부근에도 산재하고 있다. 이 시기의 고분으로는 평지에 큼직큼직한 돌덩이를 봉토형(封土形)으로 쌓아 올리고 내부에 간단한 석실이나 또는 석실 없이 퇴석(堆石)한 저석묘가 있다. 또 토분으로서 목관이 들어갈 만한 광을 파고 그 위에 봉토를 덮은 간단한 형식의 토광묘(土壙墓)와 현실(玄室)의 네 벽을 가로로 길게(橫長) 한 벽돌 모양의 할석(割石)을 옆으로 쌓아 올린 방형, 또는 장방형의 석실 및 세 벽을 내경(內傾)한 연도를 가진 석실묘(石室墓)·석곽묘(石槨墓) 등의 두 가지가 보인다. 석실분 가운데에는 현실의 네 벽과 천장에 회(灰) 칠을 하여 고구려의 고분과 상통하는 것들도 있다. 중대에 속하는 분묘는 충청남도 공주(公州)와 부여 부근에 밀집해 있는데 그 중에는 목관 하나가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소형 석곽분에서부터 한 변의 길이 3m를 넘는 대형 석실분 또는 전축분(塼築墳)에 이르기까지 다종다양한 형식을 보인다. 석실분의 형식은 고구려의 분묘와 대단히 흡사하며 송산리 1호분은 이 시대 석실분의 대표적인 예이다. 전축분으로서는 송산리 6호분과 1971년에 발굴된 무녕왕릉이 대표되는데 이들 전축분의 묘제는 종래의 것과는 전혀 다른 묘제로서 육조시대 남조(南朝)의 표제를 받아들인 것임이 확실하다. 하대에 속하는 고분으로는 부여 능산리의 왕릉으로 알려진 봉토분과 부여 이남지역인 익산 팔봉면(益山郡八峰面)의 봉토분, 전라남도 나주시·영암군의 옹관묘의 군집(群集)이 알려져 있다.

송산리 1호분[편집]

宋山里一號墳

백제의 중대인 웅진시대(熊津時代:475-538년)에 만들어진 대표적인 석실분. 남쪽으로 면한 구릉의 사면(斜面)을 파고, 직사각형 묘실을 활석으로 쌓고 벽면에 회칠을 했는데 천장은 안으로 좁혀든(內傾) 네 벽 위에 얹은 한 개의 돌로 이루어졌고, 배수구(排水構)가 연문에서 시작하여 연도의 중앙을 지나 밖으로 뽑아지고 있다. 벽면에 휘장을 쳤을 것으로 여겨지는 못이 박혀 있는데 이러한 예는 함안(咸安)의 가야시대(伽倻時代) 고분에서도 볼 수 있어 서로 교류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또 전체적인 가구나 형식이 고구려의 분묘와 흡사하여 이러한 유의 고분형식이 고구려에서 시작하여 남전(南傳)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 송산리 소재 고분군의 하나이다.

송산리 6호분[편집]

宋山里六號墳

백제 고분 중대에 속하는 벽화전축분(壁畵塼築墳). 벽돌을 사용했다는 점과 현실의 구조가 중국 화남(華南) 지방의 남조시대 전축분의 양식을 그대로 답습한 특이한 묘제라는 점이 주목된다. 석실분과 마찬가지로 남면한 구릉의 경사지대에 있으며 평면은 장방형이고 남쪽 벽의 중앙에 연문이 뚫렸으며 연도 바닥에는 배수구가 있다. 벽과 천장은 모두 크기 32×14×15cm 정도의 무늬벽돌(文樣塼)을 5-6열(列)씩 가로로 퇴적하고 그 위에 한 열을 세로로 쌓고 다시 같은 방법으로 반복하여 퇴적하는 축법(築法)을 써서 쌓았는데 천장궁륭의 축성을 위해 미리 밑이 넓고 위가 좁은 벽돌을 만들어 쓰고 있다. 남북의 짧은 양벽은 수직으로 되었으나 동서의 긴 벽은 천장 부근에서 기차 터널처럼 안으로 좁혀져 아치형 천장을 이룬다. 네 벽의 일부는 토벽으로 하여 그 위에 사신(四神)의 벽화를 장식했고 따로 광배형(光背形)의 감(龕)을 두고 있다. 1938년 일본인 가루베(輕部慈恩)에 의해서 발굴되었다.

무녕왕릉[편집]

武寧王陵

송산리 고분군의 하나로서 6호분과 함께 백제 고분 중대의 전축분에 속하는 송산리 7호분. 1971년 7월 8일 문화재관리국의 발굴반에 의해 발굴되었으며, 우리 손으로 발굴된 가장 완형(完形)의 전축분이다. 445년에 조영된 백제 25대왕 무녕왕릉임을 입증하는 명문이 든 왕과 왕비의 지석(誌石) 두 개를 비롯하여, 40여종 1천여 점의 각종 부장품을 소장한 이 왕릉은 6호분 곁에 있으며 여러 점에서 6호분과 비교된다. 두 분묘 모두 중국 남조의 분묘를 답습하고 있는데 규모나 양식은 같다. 무녕왕릉은 풍화된 암반(岩盤)을 굴착해서 만든 거대한 터널의 모양을 이룬 현실을 두고 동서 직경 18m, 남북 길이 21m, 높이 7.5m의 봉토를 둘렀다. 봉토 주위에는 호석이 세워졌음이 밝혀졌고 연도 앞 바닥에는 전을 쌓아 만든 배수구가 능 밖까지 10m의 길이로 연결되어 있다. 6호분은 연도가 2단으로 되어 있는데 비하여 무녕왕릉은 1단으로 되어 있다. 또 6호분에는 벽화가 있으나 무녕왕릉에는 불꽃 모양으로 된 5개의 감실(龕室)만이 있을 뿐 벽화는 없다. 6호분의 벽돌 무늬는 전문(錢紋)이나, 무녕왕릉의 벽돌무늬는 연화문(蓮花紋)으로 되어 있다. 무녕왕릉의 현실 벽면에는 못이 박혀 있고 썩다 남은 판자 조각이 달려 있어 송산리 1호 고분과도 비교된다.

부여지구 고분군[편집]

扶餘地區古墳群

부여의 동쪽 약 4km되는 능산리(陵山里)의 구릉에 왕릉으로 보이는 봉토분 6기(基)가 있어 부여지구의 고분을 대표하는데, 이는 백제 고분 하대인 사비시대(泗批時代:538-660년)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내부의 부장품이 모두 도거(盜去)되어 연대의 상한을 결정짓기 곤란하나 형식상으로는 대체로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제1식은 돌덩이를 쌓은 평면 장방형이고 연도가 남벽의 한쪽에 치우쳐 있는 ㄱ자형 석실분으로서, 공주에서 흔히 보는 형식이며 사비시대 초기의 묘제였다고 생각된다. 제2식은 장방형 현실을 잘 다듬은 대리석의 큰 석판(石板)으로 축성할 것이며, 앞에 연도가 달리고 연문에는 석문이 닫혀 있으며 현실 내부에는 한 개 또는 두 개의 관대(棺臺)가 있다. 또 현실의 횡단면은 첫째 긴 벽이 수직으로 된 4각형, 둘째 긴 벽의 윗부분이 꺾여서 내경(內傾)하는 5각형, 셋째 긴 벽의 윗부분에서 안으로 둥글게 돌아가는 궁륭형의 세 가지 종류로 나뉘는데, 셋째번의 경우는 공주지구 전축분의 형식을 그대로 지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제2식의 대표적인 예는 유명한 벽화분(壁畵墳)이며, 전축분을 돌로써 모방한 이 형식은 더 주류였을 것으로 믿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