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미술/한국미술의 흐름/백제의 미술/백제의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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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미소[편집]

百濟-微笑

백제의 조각은 대체로 불상에 국한되는데 고구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중국의 육조시대 불상양식을 따른다. 그러나 고구려가 북조(北朝)의 영향을 받고 있는데 대해 지리적·정치적인 관계로 백제는 남조(南朝)의 영향을 받고 있어 매우 자연주의적이며 온아한 정서와 인간적인 친밀감을 주는 것을 특색으로 한다. 이러한 백제불의 특색을 단적으로 반영하는 것이 이 '백제의 미소'이다. 직립한 체구나 의대(衣帶)·의문(衣文) 등은 대단히 근엄한 인상을 주는 것과 대조적으로 유독 얼굴만은 특유한 미소를 띠고 있어 고구려나 신라의 불상과 구별된다.

군수리 폐사지 출토 금동보살입상[편집]

軍守里廢寺址出土 金銅菩薩立像

충청남도 부여 군수리의 폐사지에 있는 목탑지 중심 초석 밑에서 발견된 높이 11.5cm의 소불. 삼존불의 광배(光背)에 붙었던 협시(協侍)임이 분명한데 삼원상(三圓狀)의 보관을 썼고 보발은 양 어깨 위에 고비 모양으로 드리워졌으며 천의(天衣)는 앞쪽에서 X자형으로 교차되어 좌우로 날개처럼 뻗었다. 대좌는 반원형의 간소한 복연대좌(覆連臺坐)이고 눈은 행인목(杏仁目)으로서 입가에 간신히 풍기는 고졸(古拙)의 미소, 이른바 백제의 미소와 함께 금빛과 청수색(靑銹色)이 조화되는 삼국시대 보살입상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인다.(국립박물관 소장)

군수리 출토 납석제 여래좌상[편집]

軍守里出土 蠟石製如來坐像

높이 13.5cm의 소불이지만 긴장미 없는 얼굴과 자세에 백제불의 특색이 잘 나타나 있다.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앉은 자세에 고식(古式) 전통이 남아 있으나 대좌의 전면을 덮는 상현좌(裳懸坐)의 의습(衣褶)은 북위(北魏)의 용문석굴(龍門石窟) 양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으며 그 연대는 6세기 말경으로 추측된다.(국립박물관 소장)

부여 규암면 출토 금동보살입상[편집]

扶餘窺岩面出土 金銅菩薩立像

1907년에 부여 규암면에서 출토된 불상이며 7세기 전반 이후의 백제불의 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다. 이 시기의 백제불들은 종래의 남조식 유형을 견지하고는 있으나 초당불(初唐佛)의 영향을 받아 허리를 비틀고 활발해지는 경향을 보인다. 이 불상은 둥글고 넓고 미소를 띤 양불(梁佛) 그대로의 얼굴에 삼화관(三花冠)을 썼고 둔부(臀部)를 왼쪽으로 내밀어 체중을 왼쪽 발에 전담시키고 있는 자세도 새롭거니와 그 기법도 커다란 비약을 보인다.(부여박물관 소장)

삼양동 출토 관음보살입상[편집]

三陽洞出土 觀音菩薩立像1966년 서울 삼양동에서 출토한 높이 20cm의 금동불. 온화하고 풍만한 얼굴과 예리하면서도 부드러운 각법(刻法)이 백제불의 범주에 들어갈 것임을 말해 준다. 아래로 늘어진 상하 이조(上下二條)의 천의와 넓게 드리워진 경식(頸飾)등, 시대는 대략 600년대임을 시사한다.(국립박물관 소장)

금동미륵반가상[편집]

金銅彌勒半跏像

높이 94cm의 이 불상은 한국 불상 중 최대 걸작의 하나일 뿐만 아니라 종래의 정면관(正面觀) 위주의 조각 양식을 탈피하여 완전한 입체조각의 요소를 구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출처 불명이기 때문에 어느 나라의 조각품인지는 규명되고 있지 않으나 전체의 인상이 백제의 전통과 어느 정도 합치되므로 백제의 불상으로 봄이 타당할 듯하다. 얼굴의 형이나 몸집, 예리하면서 활기 있게 약동하는 의습의 모습 등이 특히 이 점을 뒷받침해 주고 있으며 풍만한 신체라든가 목에 나타난 삼도(三道)를 고려하여 연대는 대략 600년대 초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불상이 가지는 수구장신(瘦軀長身), 갸름한 얼굴과 단정하고 근엄한 자세에서 오는 형언할 수 없는 신비스러운 아름다움은 간결하고 고졸한 의문(衣文)의 특징과 함께 그 시대 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으며 보관의 양식과 양어깨에 드리워진 보발, 그리고 의습(衣褶)등이 매우 도식적인 표현을 보인 반면에 단아한 얼굴과 두 손가락의 부드러운 감각은 신비스러운 생명감을 느끼게 한다.

반가사유형식의 기원 및 전개[편집]

半跏思惟形式-起源-展開연화대(蓮華臺) 위에 걸터앉아 오른쪽 다리를 왼쪽다리 위에 포개얹고 살며시 숙인 얼굴을 오른손으로 가볍게 괸 채 명상에 잠긴 모습은 당시 성행하던 반가사유상의 일반적인 양식이다.

이 양식의 기원은 삼국시대에 인도의 산치 문(Sanchi門), 또는 간다라 조각의 일부에 표현된 불타 본존(佛陀本尊)이 아닌 방립인물(傍立人物)들의 휴식하는 자세나 자유로운 자세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진다. 그 후 이것이 보살불상의 한 조각 양식으로 발전되기까지의 단계는 중국의 윈깡석굴사(雲崗石窟寺)에 남겨진 북위(北魏) 조각 협시불(協侍佛)에서 과도기적인 형식을 찾아볼 수 있으며, 6세기경에 다시 독립된 반가사유상으로 완성된 후 우리나라 삼국시대에 전래되어 대략 7세기경부터 주로 신라에서 그 형식이 정리되고 세련된 아름다움으로 발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양식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아스카시대(飛鳥時代) 불상조각의 터전을 만들어 주었음은 물론이다.

백제관음[편집]

百濟觀音

일본 나라(奈良)의 호류사에 있는 아스카시대에 만들어진 목조관음입상(木造觀音立像). 높이 2.8m의 채색한 관음상으로서 백제관음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유는 백제의 귀화인(歸化人)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추측되기 때문이며, 백제의 조각이 일본 조각에 공헌한 하나의 예라고 할 수 있다.

마애석불[편집]

磨崖石佛

바위에 직접 불상을 새기는 방법은 7세기 전반부터 백제에서 시작되었는데 이는 외래문물에 대한 민감성을 말한다. 현존하는 백제의 마애불로서는 1958년에 발견된 충청남도 서산 용현리(瑞山 龍賢里)의 마애석불과 태안(泰安)의 마애석불이 잘 알려지고 있다. 용현리의 마애석불은 계류(溪流) 가까운 산등성이 화강암 벽에 새겨진 석가삼존(釋迦三尊)이며, 본존과 관음보살은 입상이지만 미륵보살은 반가상으로 되어 있다. 본존은 높이 2.8m로서 눈을 크게 뜨고 쾌활하게 웃는 모습이 인상적인데, 남조의 양식이 여실하지만 의습이 많이 형식화되고 어딘지 경화(硬化)된 관음보살 의습이며 그 연대는 백제말기로 추정된다. 태안의 마애석불은 바다에 면한 산 위의 큰 암벽에 새겨졌는데 용현리의 마애석불보다 한층 입체적으로 표현되고 체구도 당당한 모습이다. 좌우에 두 여래입상을 두고 중앙에 보살입상을 배치한 기이한 삼존불로서 수(隋)·초당(初唐) 불상과 통하는 점이 있고 역시 연대는 7세기 전반으로 믿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