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미술/한국미술의 흐름/조선시대의 미술/조선시대의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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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건축의 경향[편집]

朝鮮時代建築-傾向

조선시대의 건축은 궁궐(宮闕)을 비롯하여 성곽(城郭), 누문(樓門), 전각(殿閣), 문묘(文廟), 서원(書院), 객사(客舍), 불사(佛寺) 등으로 나눌 수 있으며 이 방면의 많은 건축물이 조영되었으나 대부분 임진(壬辰), 병자(丙子) 양란 때에 소실되고 현존하는 것은 대체로 말기에 재축(再築)한 것들이다. 조선시대의 목조건축은 고려의 건축에 비해 장식이 번잡해지고 구조가 육중해지는 경향을 보인다. 초기에는 강진(康津)의 무위사 극락전을 비롯한 비교적 조촐한 남송(南宋) 계통의 양식의 건물이 세워졌으나 점차 원조(元朝) 양식이 주류를 이루어 현존하는 궁전건축이나 사원건축은 모두 이에 해당한다. 건축구조에 있어 공포의 배치에 따라 다포(多包)집과 주심포(柱心包)집으로 나뉘는 것은 고려말기와 같으나, 후기에 와서는 공포가 더 간략해지고 변화해서 익공(翼工)이라는 특수한 구조를 이루며 따라서 후기의 건축은 다포집과 익공집으로 양분된다. 한편 세부에서 주심포집과 다포집이 서로 혼합하여 특색있는 조선시대의 건축을 형성하는데 시대가 내려갈수록 공포가 섬세해지고 내출목(內出目) 부분이 운궁(雲宮)이라는 화려한 장식체로 된다든지 공포에 조수형(鳥獸形), 초화형(草花形) 장식이 첨가되는 이른바 초공, 화공 등이 사용되어 전반적으로 섬약하고 번잡해졌고 초기의 건물에서 보이던 정연하고 간결한 선과 면, 공간의 구성이 깨어지고 지붕이 무겁거나 가벼워져서 건물 자체의 균형이나 안정감이 크게 줄어든다. 그리고 신분과 계급에 따라 가옥의 크기나 용재(用材), 장식이 수시로 구분되고 제한된다.

성곽건축의 조영[편집]

城郭建築-造營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는 수도를 지금의 서울인 한양(漢陽)으로 옮기면서 기왕에 있던 개경(開京=開城)의 성곽을 정비하였고(태조 3년:1394), 태조 5년(1396)에는 한양 성곽을 쌓았다. 세종(世宗)은 그 성곽을 토축(土築)에서 석축(石築)으로 견고하게 만들었고 성의 요로에는 누문(樓門)이 설치되었다. 즉 남쪽과 동쪽의 입구를 요지로 인정하여 남에는 숭례문, 동에는 흥인문을 두고 다른 곳에는 여러 개의 단층문(單層門)을 세웠다. 정조(正祖) 18년(1794)에는 수원(水原)에 이궁(離宮)을 두고 새로운 무기인 화포(火砲)에 대비할 수 있는 성곽을 쌓았는데 망루(望樓)나 수문(水門)같은 성으로서 필요한 시설을 갖추어 주목된다. 그 외에 평양(平壤)의 내성이 있고 산성(山城)으로 남한산성(南漢山城), 북한산성(北漢山城) 등이 남아 있다.

숭례문[편집]

崇禮門 현재의 남대문(南大門). 정면 5간(間), 측면 2간의 2층으로 된 우진각, 다포집이며 태조 7년(1398)에 준공하여 세종 30년(1448)에 처음으로 개수(改修)했고 성종(成宗) 10년(1479)에 다시 중수를 한 것이 문헌 및 1963년 보수할 때 발견된 묵서 상량문(墨書上樑文)을 통해 밝혀졌다. 현재의 건물은 개수를 거듭하는 동안 다소 부분적으로 변형된 예도 있겠으나 비교적 성종 당시의 양식을 충실하게 보존하고 있는 것으로 확신할 수 있다. 공포는 안팎 각기 2개씩의 출목(出目)으로 되고 기둥 사이에는 제일 윗 부분에 삼분두(三分頭)된 산미첨차를 놓아 외목(外目) 도리를 받게 하고 주심에는 대들보가직접 제공(諸工) 위에 놓이고 그 보가 외목도리를 받들게 되어 있다. 한편 산미첨차의 안쪽 끝은 삼분두하거나 초각(草刻)을 했고 행공(行工) 첨차는 두 끝을 수직으로 자르고 바닥은 둥글게 깎아(翹頭) 다포집 이래의 특색을 반영한다. 쇠서는 홍화문이나 돈화문보다 훨씬 강직하여 이들보다 시대가 앞섬을 시사한다.

흥인문[편집]

興仁門

본명은 흥인지문(興仁之門)이며 현재의 동대문. 태조 5년(1396)에 창건하고 단종(端宗) 1년(1453)에 개수되고 고종(高宗) 6년(1869)에 중건되었다. 정면 5간, 측면 2간의 중층 우진각 다포집이며 공포는 안팎 2출목이고 외출목은 일수설(一垂舌), 이앙설(二仰舌)로 되고 내출목은 운궁(雲宮)으로 되었으며 살미첨차 전면에 초화각(草花刻)이 있다. 이 문은 정면, 즉 동쪽의 앞면에 오른 쪽에서 좌행(左行)하다가 끝만을 터 놓은 반원형의 축성, 즉 옹성(甕城)이 있어 유명하며 옹성 윗 면에는 앞 뒤로 여장을 쌓고 각각 총안(銃眼)을 내어 방비용으로 하고 있다.

수원 팔달문[편집]

水原 八達門

수원의 성은 정조(正祖) 18년(1794)에 이궁(離宮)으로 축성되었다. 중국을 거쳐 들어오는 서양문화의 영향을 반영하는 점이 중요한데 이는 전축(塼築)의 보루 같은 구조면에서나 건축기계면에서 실측할 수 있다. 이 수원성(水原城=華城)의 정문인 팔달문은 선축기단 위에 선 정면 3간, 측면 2간의 우진각, 다포집, 중층 누문으로 흥인문에서와 같은 옹성을 앞쪽에 두고 역시 위에는 총안을 뚫었다.

궁전건축의 조영[편집]

宮殿建築-造營

조선시대 초기에 조영된 궁전건축은 모두 소실되고 없다. 태조 3년(1394)에 시공을 본 경복궁(景福宮)은 이씨 왕조(李氏王朝)의 정궁이며 임진란 때에 건물 모두가 불타고 없어진 것을 고종 2-4년(1865-1867) 사이에 재건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경복궁은 북악산(北岳山) 아래의 평지에 자리잡은 남북으로 긴 왕궁이며 궁역(宮域)은 정전인 근정전을 중심으로 동과 서로 나뉜다. 동역은 주거지구이며 서역은 정무(政務), 공식지구(公式地區)로 되었는데 이러한 평면배치는 개성(開城) 만월대(滿月台)의 왕궁지의 형식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종류의 건축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창경궁(昌慶宮)의 홍화문, 명정문, 명정전 등이다. 창경궁은 세종 1년(1419)에 세운 수강궁(壽康宮)을 성종(成宗) 14년(1484)부터 시작하여 다음해에 확장, 증축한 것이며 임진란 때에 소실되고 광해군(光海君) 때에 다시 재건, 이괄(李适)의 난 당시(1624)에 또 소실된 것을 인조(仁祖) 11년(1633)에 삼건(三建)했고 그 후에도 여러 차례의 부분적인 화재를 겪어서 개수를 한 것이다. 경복궁이나 창덕궁과는 달리 정전인 명정전이 동향(東向)한 것이 특이하다. 앞에 쓴 두 궁전과 마찬가지로 북악산 기슭에 자리잡은 창덕궁(昌德宮)은 원래 태종(太宗) 5년(1405)에 이궁(離宮)으로서 우선 인정문과 인정전을 세웠고 12년(1412)에 다시 돈화문을 세웠다. 역시 임진란 때에 소실된 것을 광해군 1년(1609)에 재건한 기록이 있다. 이 궁전에 있는 비원(秘苑)이 오늘날과 같은 규모와 모습에 이르기까지는 세조, 연산군, 인조 등의 힘이 컸다. 선(宣祖)가 임진란 중에 환도하여 행궁(行宮)으로 썼던 덕수궁(德壽宮)은 광해군(光海君) 3년(1611)에 정식으로 경운궁(慶運宮)의 이름이 붙여지고 고종(高宗) 11년(1907)에는 다시 덕수궁으로 개칭되었다. 정전인 중화전(中和殿)은 1906년에 재건된 것이며 그 외의 건물들은 모두 1904년 화재와 동시에 곧 재건된 것들이다.

경복궁 근정전[편집]

景福宮 勤政殿

경복궁의 정전(正殿) 고종 4년(1867)에 준공. 정면 5간(길이 30m), 측면 5간(길이 21m)의 중층팔작(重層八作) 다포(多包)집이며 현존하는 최대의 목조건물이다. 상층에서는 가운데 칸을 제외하고는 각 간의 폭이 아래층의 그것보다 좁아져서 전체 건물에 안정감을 준다. 궁전은 넓은 중층의 석단 위에 세워졌고 석단의 4면에는 역시 돌로 된 난간이 둘려지고 동서남북에 각각 쌍봉운문(雙鳳雲文)을 조각한 돌계단이 있어 화강암판을 깐 뜰과 연결된다. 안에는 10개의 높은 기둥을 정면에 4개, 측면에 3개를 세워 천장을 받드는 동시에 궁전 안을 중앙부의 내진(內陣)과 주위를 도는 외진부(外陣部)로 갈라 놓는 역할을 겸하게 하였으며 중앙칸 북쪽 후면에 방형의 보좌(寶座)를 두고 그 단상에 어좌와 다시 그 뒤에 오산 일월을 그린 병장을 세우고 그 위에 화려한 보개(寶蓋)를 달았다. 공포는 밖에 3개의 출목(出目), 안에 4개의 출목으로 되었는데 내출목에서는 수설(水舌)이나 앙설(仰舌)이 운문처럼 새겨진 운궁(雲宮)으로 되었고 그것이 살미 표면의 초화각문(草花刻文)이나 단청(丹靑)과 함께 천장의 화려한 단청이나 금색의 쌍용(雙龍)과 조화되어 화려한 장식적인 효과를 낸다. 웅대한 규모와 내외의 장식이 우미하여 조선시대 말기 건축의 훌륭함을 보여준다.

경회루[편집]

慶會樓

경복궁내 서쪽 방형의 연못 복판에 세워진 규모가 큰 누각이다. 태종(太宗) 때에 중국 사신을 영접하여 연회를 베풀기 위해 건립되었으나 임진란으로 소실되고 고종 때에 경복궁의 재건과 더불어 건립했다. 이 누각의 특색은 누를 받드는 48개 석주의 장려한 아름다움이라 하겠는데 바깥은 방형기둥, 안쪽은 모두 원형기둥으로 이루어지고 마루바닥 아랫 부분에는 마루의 귀틀들을 숨기기 위해 단청을 한 우물 천장으로 형성되었다. 누 위의 마루는 안으로부터 3분하여 단(段)을 낮추었고 내부가 개폐되도록 사분합창(四分閤窓)이 안 쪽에 달렸다. 규모가 웅장한 점에 있어 근정전 다음 가는 대표적인 건축물이라 할 것이다.

집옥재[편집]

集玉齋

경복궁의 제일 북쪽 신무문(神武門) 안 동쪽에 있는 고종의 서재(書齋). 높은 기단 위에 세워진 정면 5간, 측면 3간의 단층 맛배집이며 다포(多包)집이다. 앞면의 퇴간은 향교(鄕校)나 대성전(大成殿) 등에서 볼 수 있는 기둥만으로 이루어진 개방된 형식이며 이 점은 고형(鼓形)인 초석(礎石) 세부에 여러 이형(異形) 장식물, 특히 박공마루 밑 지붕에 접근시켜 쌓은 전벽(塼壁) 등과 함께 중국 건물의 양식을 따른 이식(異式) 건물임을 알 수 있다.

창덕궁 인정전[편집]

昌德宮 仁政殿

창덕궁의 정전. 태종 5년(1405)에 건립되었다가 임진란 때 소실되고 그후 다시 재건되었으나 순조(純祖) 3년에 또 한 차례의 화재를 당한 것을 동 4년에 세 번째의 건립을 보았다.

중층석단 위에 선 정면 5간, 측면 4간의 중층팔작(重層八作) 다포집이다. 내부에는 근정전에서와 마찬가지로 높은 기둥을 사용하여 바깥은 2층, 안은 통층(通層)으로 했고 정면 내벽에 계자(鷄子) 난간을 둔 목조로 된 단 위에 평상옥좌(平牀玉座)를 놓고 운합형(雲閤形)의 보개를 달았다. 공포는 위층 아래층 모두가 안 4출목, 밖 3출목이고 내출목은 운궁(雲宮)으로 되고 외출목의 쇠서는 초문이 새겨진 초공인데 기둥머리에는 창방(昌枋) 주두에 이르는 초각(草刻)을 한 안초공(按草工)이 있어 숭례문과 같은 고식(古式) 전통을 보이지만 더 후대의 초공(草工) 솜씨이다.

돈화문[편집]

敦化門

창덕궁의 정문. 태종 12년(1412)에 건립되었다. 정면 5간. 측면 2간의 우진각, 다포집으로 원래는 장대석(長台石)의 기단과 층계가 있었다. 공포는 위 아래층이 모두 안 3출목, 밖 2출목이며 공포 제일 위쪽 도리받침에는 운각(雲刻)이 있어 운궁에의 시작을 보여 준다. 초기의 숭례문에 비해 세부가 섬세화되어 그만큼 연대를 내릴 수도 있겠으나 임진란 때에 소실되어 재건되었는지의 여부는 가리기 힘들다. 조선시대 중기의 건물로서 창덕궁 안의 여러 건물 가운데서 제일 오래된 건물임에는 틀림없다.

창경궁 명정전[편집]

昌慶宮 明政殿

창경궁의 정전으로 성종(成宗) 14년(1484)에 건립되어 임진란 때에 소실된 것을 광해군 때에 다시 재건하여 현재에 이른다. 경북궁이나 창덕궁의 정전과는 달리 동향(東向)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며 이는 이 궁전의 위치가 원래의 수강궁(壽康宮)이던 점으로 보아 수강궁이 정계를 떠난 상왕(上王)의 은거처이기 때문에 왕궁남면(王宮南面)이라는 기본 원칙을 피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중층기단 위에 세워진 정면 5간, 측면 3간의 단층 팔작, 다포집이며 앞면에는 쌍봉문(雙鳳文)을 조각한 판석을 가운데 두고 3분한 돌층계가 있다. 궁전의 평면은 16개의 평기둥과 전반부의 4개의 높은 기둥으로 형성됨으로서 앞쪽 면에만 퇴간(退間)을 두게 되어 있다. 공포는 안에 4개, 바깥 쪽에 3개로 된 출목으로 이루어지고 제일 윗쪽에 있는 첨차는 끝에 초각(草刻)이 생겨 후대의 운궁(雲宮)이나 익공(翼工)의 조형(祖型)으로 되고 있다. 이러한 공포는 전체적으로 굳세어 보이고 초기 건축의 모습을 보이는데 1963년 수리중에 합각머리 안쪽에 묵명(墨銘)이 나와 광해군 8년(1616)에 재건된 것임을 확증하게 되었다.

홍화문·명정문[편집]

弘化門·明政門

홍화문은 창경궁의 정문이며 명정문은 홍화문 안에 있는 명정전의 정문으로 모두 동향한 대문이다. 두 문 모두 정면 3간, 측면 2간의 다포집이지만 홍화문은 중층 우진각이고 명정문은 단층 팔작집인 점이 다르다. 또 공포는 모두 안에 2개, 바깥에 3개의 출목인 점이 같으나 명정문의 경우 외공포에서 점차를 1개 생략한 점이 특이하다. 홍화문은 조선시대 초기의 양식을 보이지만 명정전에서 발견된 묵명으로 보아 광해군 8년(1616)에 명정전과 함께 재건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외관상으로 몹시 안정되고 침착한 인상을 주는 조선시대 중기의 대문들이다.

종묘·사직단[편집]

宗廟·社稷壇

조선시대에는 종묘로서 유교(儒敎)를 채택하여 이에 따르는 종교 건물로 종묘나 사직단을 조영하고 있다. 한양의 종묘는 궁성(경복궁)에서 본 오른쪽 구릉 위에 위치를 두었고 왼쪽에는 사직단을 두었다. 공자(孔子)를 제사하기 위한 묘(廟)로서 문묘(文廟)를 세웠는데 그 정전인 대성전(大成殿)이 지금 남아 있다. 지방의 각 도읍에는 향교(鄕校)를 두고 또 따로 서원(書院)도 세웠다. 경주(慶州)에 있는 옥산서원(玉山書院)은 선조 5년(1572)에 만들어진 가장 오래된 서원의 예이며 일반 주택으로서는 강릉 오죽헌이 있다.

서울문묘 대성전[편집]

-文廟 大成殿

대성전은 문묘의 정전으로 공자의 위패(位牌)를 모신 곳. 이 시기에 많이 만들어진 대성전 중에서 건물의 규모나 구조면에서 대표적인 건축물이 서울 명륜동(明倫洞)에 있는 문묘 대성전이다. 이 건물은 태조(太祖) 7년(1398)에 창건되었다가 2년 후에 소실되고 다시 중건했다가 임진란 때에 또 소실되어 선조(宣祖) 34년(1601년)에 재차 건립된 것이다.

이 대성전은 명륜당(明倫堂)을 앞에 두고 1단 높은 석단 위에 세워진 정면 5간, 측면 4간의 단층 팔작(八作)집이며 전면 1간은 대성전 건축의 관례에 따라 참배용(參拜用)의 옥외 퇴간(屋外退間)으로 되어 있다. 공포는 안팎 모두 2출목(出目)이며 기둥과 기둥 사이의 넓은 간격과 짧은 쇠서와 함께 조용하고 여유있는 안정감을 준다. 전체적으로 보아 공포의 크기가 줄어들고 가늘어져서 지붕의 중량감에 비해 약한 인상을 주며 초기에서 중기로 이행을 잘 반영하는 형식이다. 한편 건물 좌우에 동서로 배치된 두 재(齋)의 공포에는 이미 익공(翼工)이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도산서원 전교당[편집]

陶山書院 典敎堂

경상북도 안동 소재. 조선시대의 대학자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향사(享祠)하기 위해 1575년(선조 8년)에 세운 서원이며 원래는 퇴계의 사저(私邸)였다. 동 조사당은 역시 유림(儒林)들이 퇴계의 높은 덕망을 추모하기 위해 이름 붙인 높은 석단 위의 건물로서 조선시대 양반집의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직선적인 공간 분할과 평면구성, 불필요한 부속재료의 제거로 냉철한 유교의 교리를 반영한 듯한 조선시대 학자의 거처로서의 면목을 잘 보여준다.

강릉 오죽헌[편집]

江陵 烏竹軒

강원도 강릉(江陵)에 있는 율곡(栗谷)의 생가(生家). 조선시대 중기의 양반집 모습을 보존한 희귀한 예로서 주심포(柱心包) 계통의 청순하고 소박한 팔작집이다. 평면구조는 왼쪽으로 향한 2간이 대청이고 오른쪽 1간이 온돌방으로 되었으며 기둥머리에는 창방(昌枋)만이 돌려지고 그 위에 기둥머리를 놓고 초공(初工) 하나로 장설(長舌)과 주심(柱心) 도리를 받도록 했고 기둥 사이에는 화반(華盤)이 한 개 있을 뿐이다. 추녀도 너무 들리지 않고 완만하다.

밀양 영남루[편집]

密陽 嶺南樓

경상남도 밀양(密陽)에 있는 누각으로 구객사(舊客舍)의 부속건물이다. 정면 5간, 측면 4간의 팔작집으로 공포는 주심에만 있고 기둥 사이에는 초화반(草花盤)이 하나씩 배치되었다. 기둥머리의 안초공(按草工)이나 그 위의 초공, 양봉(樑奉) 등은 복잡한 형태이면서 힘과 중심이 없고 대들보의 크기가 너무 과중해 올려다 보면 불안감을 주는 조선시대 후기 건물의 특색을 잘 반영한다. 이러한 건물의 장점은 단지 소점(所占)하는 공간의 크기와 그 위치로부터의 광대한 전망에 있다고 하겠으며 건축 그 자체로서의 실력은 상실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불사 건축[편집]

佛寺建築

조선시대의 불사(佛寺)는 역대의 억불(抑佛)정책 때문에 후대로 내려올수록 황폐해지는 경향을 보인다. 다만 깊은 산 속에 있는 사찰들만이 고립하여 명맥을 유지할 정도였으며 남부지방의 가람은 거의 임진란의 병화(兵禍)를 입어 신라, 고려 이래의 유구마저 많이 회진(灰燼)되었다. 그 후에 피폐한 국력 때문에 불사의 별다른 재흥(再興)을 보지 못했으며, 재흥이 되었다 해도 당초의 성관(盛觀)을 재현하지는 못했다. 그러한 중에 국가의 핍박과 사회의 냉대를 감수하며 광대한 산림(山林)과 토지를 확보하여 자력으로 가람을 유지하고 수백이나 되는 승려를 가진 큰 사찰도 있어서 이들에 의해 불교예술이 간신히 보존되어 조선시대 미술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가람이 후기에 조영되었으며 가람배치에 있어서는 형승(形勝)의 땅을 택하여 대웅전을 중심에 두고 그 앞쪽 동서에 승방을 두고 다시 그 전면에 누각을 세우는 것을 원칙으로 했으며, 거찰에는 극락전(極樂殿)등 다수의 부속건물이 따른다. 한편 탑파(塔婆)는 초기의 몇 기를 제외하고는 거의 건립이 중지 상태에 빠져 있어서 불사에 있어서의 석탑의 중요성은 망각된 형편이었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석탑은 전대(前代)의 전통을 거의 상실하고 말았으며 규모가 작아지고 둔화(鈍化)되어 석조물로서의 기념비적 특성을 잃고 말았다.

무위사 극락전[편집]

無爲寺 極樂殿

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에 있는 조선시대 초기의 대표적인 주심포(柱心包)집. 1956년 중수시에 벽화의 묵서명(墨書銘)으로 <十二年丙申三月初吉畵成>이라는 명문이 나와 건축도 벽화가 만들어진 성종(成宗) 7년(1476)의 것으로 추측된다. 정면과 측면이 모두 3간이고 공포는 안팎 2출목(出目)이고 두공(頭工) 위의 첨차가 좌우로 길게 뻗어 장설(長舌)로 되었고 점차 아래 쪽은 주심포 특유의 곡선으로 되어 짧고 강한 앙설(仰舌)이 있다. 세부에 이르기까지 견실한 수법을 보여주는 건물이다.

도갑사 해탈문[편집]

道岬寺 解脫門

전라남도 영암군 서면 도갑리(靈岩郡 西面 道岬里) 소재. 1957년 중수시에 발견한 묵서명에 의해 성종 4년(1473)에 건립된 문임이 확인되었다. 정면 3간, 측면 2간이며 중앙이 통로이고 좌우에 금강역사(金剛力士)를 둔 일반적인 형식의 사문(寺門)이며 조선시대 초기의 주심포 계통의 건물이다. 공포 2출목으로 보이면서 2출목째의 길이가 짧아 완전한 2출목이 아닌 것이 특이하다.

봉정사 대웅전[편집]

鳳停寺 大雄殿

경상북도 안동 소재. 정면과 측면이 모두 3간인 단층집으로 팔작(八作) 지붕을 가진 전형적인 다포(多包)집이다. 주심포 이외의 기둥 사이에 각각 2개씩의 공간포(空間包)를 배치했고 기둥 사이가 길고 모두 안팎 2출목이기 때문에 다포집이면서 공포 부분이 번잡하지 않고 쇠서도 단경(短勁)하여 조선시대 후기의 건물과는 판이한 인상을 준다. 내부에는 청판(廳板)을 깔고 중앙에 불단(佛壇)을 두었다.

장곡사 상대웅전[편집]

長谷寺 上大雄殿

충청남도 청양군 대치면(靑陽郡 大峙面) 소재. 정면, 측면이 각 3간인 맛배, 다포집인데 고려적인 재료와 조선시대 특유한 구조를 혼합한 점으로 희귀하다. 즉 2단의 기둥받침을 가진 초석(礎石)이나 엔타시스를 가진 기둥은 모두 고려식인데 기둥 위에는 조선시대 다포집 계통인 평방(平枋), 창방(昌枋)을 짜돌렸고 기둥머리에도 고식(古式)의 굽받침이 있다. 공포는 주심 이외에 기둥 사이에 하나씩 배치했고 두공(頭工) 위에 연꽃을 조각한 살미첨차를 얹고 있다. 안에는 당초문을 새긴 고려시대의 전(塼)을 깔았다.

전등사 대웅전[편집]

傳燈寺 大雄殿

경기도 강화군 길상면(江華郡 吉祥面) 소재. 조선시대 중기 대웅전 건축의 전형적인 예. 정면과 측면 각 3간의 팔작, 다포집이다. 공포는 안에 4, 바깥에 2의 출목을 가졌지만 두 개씩의 공간포(空間包)가 있고 또 중기의 건물에서 흔히 보이듯이 첨차 끝에 초각(草刻)이 있어 쇠서가 길어지고 또 수설(垂舌) 위 처마끝에는 원숭이 모양(猿形)을 하나씩 올려 놓아 보기에 매우 복잡하고 간결미가 없다. 1615년(광해군 7)에 기공하여 1622년에 준공을 보았다.

법주사 팔상전[편집]

法住寺 捌相殿

충청북도 보은(報恩) 속리산 소재.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유일한 고식(古式) 목조 5층탑으로 중요하다. 고식이기는 하나 삼국시대의 양식에서 많이 변화된 모습을 보인다. 1624년(인조2년)에 벽암대사(碧巖大師)가 재건한 것으로 전하며 탑파관념이 없던 시대의 사상을 잘 반영하는 탑파건물이다. 포작(包作)은 주심포이며 2층이 사방 5간, 3층과 4층이 각 3간, 5층이 3간이며 균형잡힌 체감률(遞減率)을 보이며 상륜부(相輪部)로 올라간다.

금산사 미륵전[편집]

金山寺 彌勒殿

전라북도 김제 소재. 3층의 불전으로 현존하는 유일한 조선시대 중기의 건축, 1층과 2층은 각각 정면 5간, 측면 4간이고 3층은 정면 3간, 측면 2간으로 되었다. 기둥사이에는 모두 공간포를 하나씩 두었고 공포는 안팎 모두 2개의 출목으로 되고 내출목은 간단한 초기의 운공(雲工)으로 되어 있다. 이 건물에서는 고층건물의 안전도를 높이기 위해 각 추녀는 높은 기둥에 연결되고 뒷몸을 파서 박은 후, 비녀장을 질러 빠져나지 못하게 했고 가운데 도리의 동요를 막기 위해 동자기둥(童子柱)을 세워주는 등 세심한 배려가 엿보인다.

화엄사 각황전[편집]

華嚴寺 覺皇殿

전라남도 구례군 마산면(求禮郡 馬山面) 소재. 1593년(선조 26)에 불탄 것을 1643년(인조 21)에 벽암선사(碧巖禪師)가 재건한 조선시대 중기 및 후기를 대표할 수 있는 사찰 건물이며 규모에 있어서도 근정전(勤政殿) 다음 가는 최대의 사찰이다. 정면 7간, 측면 5간의 신라시대의 큰 석단 위에 동향(東向)으로 세운 중층불전(重層佛殿)으로 건립 연대는 18세기초(1703년)로 되어 있다.

쌍봉사 대웅전[편집]

雙峰寺 大雄殿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소재. 상륜(相輪)이나 찰주(擦柱)가 없어 탑파라고 보기는 힘드나 전체적인 형태가 3층목탑의 형식을 가지고 있어 법주사 팔상전과 함께 목탑의 예로써 귀중하다. 3층이 모두 각 면이 1간으로 되었고 탑신이 세장(細長) 하다. 지붕은 1층, 2층이 우진각이고 3층이 팔작인데 길게 뻗은 무거운 처마에 맞추기 위해 포(包)는 각 면에 2개를 첨가한 다포(多包)로 되어 있다. 근년 중수시에 나온 상량문(上樑文)에 의해 경종(景宗) 4년(1724)에 세 번째 중건(重建)한 것임이 드러났다.

만복사탑[편집]

萬福寺塔

전라북도 남원 소재. 고려말이나 조선시대 초기의 과도기적인 양식을 보이는 탑파이다. 높이 약 5.5m의 4층 석탑으로 옥신석(屋身石) 밑에 받침돌을 깐 것은 고려시대의 강릉 신복사지탑(神福寺址塔)이나 서울의 홍제동탑(弘濟洞塔) 등을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옥개석(屋蓋石)의 충급받침은 얕게 2단으로 되고 기단부로 간단한 지대석(地帶石)으로 변했다. 옥신석이 상촉하관(上促下寬)이고 둔하면서도 백제탑의 여운(餘韻)을 남기는 옥개석의 긴 처마가 지역적인 특성을 나타낸다.

원각사지 십층석탑[편집]

圓覺寺址 十層石塔

서울 파고다공원 소재. 세조(世祖) 12년(1467)에 건립된 석탑이다. 아형(亞形)의 3층기단 위에 세워진 역시 아형으로 된 3층, 방형 7층의 대리석제 탑으로서 목조건물의 세부를 충실히 나타낸 점이나 전면(全面)에 불상군(佛像群)을 조각한 것은 14세기의 경천사지십층석탑(敬天寺址十層石塔)을 모방한 것이 분명한 조선시대 초기의 방려탑(倣麗塔)이다. 1947년 복원시에 8층 옥개 윗면, 9층 탑신 윗면, 10층 옥개 아랫면에서 '성화(成化)3년 2월 2일'을 포함한 명문이 나왔다.

여주 신륵사 석탑[편집]

驪州 神勒寺石塔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驪州郡 北內面) 소재. 건립 연대는 15세기 후반쯤으로 추측되는 8층 대리석제 탑이다. 2층기단 위에 세워졌고 기단부의 면석(面石)에는 용문(龍文)을, 위와 아래의 갑석(甲石)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는데 갑석이나 조각의 기법은 원각사지 십층석탑과 통한다. 탑신은 낮고 평평하며 옥개석은 두터운 판석으로 되었다.

원각사지 비석[편집]

圓覺寺址 碑石

서울 파고다 공원 소재. 세조(世祖) 2년(1471)에 건립된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비석이다. 비신(碑身)은 대리석이고 귀부(龜趺)는 화강암으로 되었다. 조선시대의 비석은 전반적으로 고려시대 비석의 양식을 따르지 않고 한국의 비석의 시원(始源)이 되는 당(唐)이나 송(宋) 이래의 중국의 비석을 따르고 있는데 이 비석 역시 비신, 귀부 모두 당의 비석 형식을 답습하고 있으며 세부나 조각에서는 어디까지나 조선시대의 특색을 보인다. 귀부는 머리나 귀갑(龜甲)이 모두 경화(硬化)된 것이기는 하지만 그런대로 석조물로서의 괴량(塊量)이 있으며 끝이 뒤집혀진 하엽(荷葉)과 함께 조선시대의 생기가 돈다. 이수의 형태도 좋으며 고려의 비석에 비해 훨씬 탁월한 솜씨를 보인다.

수표교·삿꼬지다리[편집]

水標橋·箭串橋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석교(石橋)로서 모두 서울에 있다. 수표교는 태종(太宗) 12년(1412)에 건설되었으며 10개의 교각 위에 얹혀 둘 난간을 두른 다리이다. 별다른 기교나 장식을 가미하지 않은 소박한 조선시대의 특성을 보이는데 1959년 청계천(淸溪川) 복개공사 때에 장충단 공원으로 옮겨 가설했다. 삿꼬지다리는 서울 광장동(廣壯洞)의 청계천 하류(下流)에 있는 긴 다리로서 세종(世宗) 2년(1420)에 시공을 보고 성종(成宗) 때에 완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서울 외곽의 광주(廣州), 이천(利川)으로 통하는 간선도로의 제1교였으며 20여 개의 교각을 가진 긴 다리이면서 난간이 없어 더욱 아담한 느낌을 준다. 오랫동안 방치되어 석교의 대부분이 홍수에 쓸려 유실되어 복원됐다.

홍교[편집]

虹橋

무지개처럼 펼쳐진 아치형의 다리.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홍교는 전라남도 보성군(寶城郡)의 벌교 석교(筏橋石橋)와 승주(昇州)의 선암사 석교(仙巖寺石橋)를 들 수 있다. 앞의 것은 18세기에 가설된 3개의 아치를 가진 다리이며 뒤의 것은 각각 1개의 아치를 가진 쌍교(雙橋)로서 앞의 것에 비해 비교적 보존이 잘된 우수한 홍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