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미술/한국미술의 흐름/조선시대의 미술/조선시대의 도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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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자기의 형성과 전개[편집]

朝鮮磁器-形成-展開

조선시대의 도자기는 고려요(高麗窯)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으나 그릇의 성격은 귀족적인 것에서 서민적인 것으로 바뀐다. 이러한 원인은 무엇보다도 조선자기가 기교적인 면에서 고려자기에 미치지 못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이 새로운 왕조(王朝)가 민족의 사상이나 신앙을 변혁시켜서 생활 양상이 매우 현실적으로 흐른 데에 기인된다고도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양반들이 쓰던 그릇이건 서민들이 쓰던 그릇이건 이러한 실용성이나 견실성을 지향하는 간결한 작풍(作風)으로 면모를 바꾸고 있는데 이것은 어느 의미에서 가장 한국적이고도 조선시대적인 미(美)나 감각의 솔직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청자(高麗靑磁)를 구워내던 관요(官窯)는 모두 폐쇄했을 뿐 아니라 새로운 계급사회에서 도공(陶工)이 가지는 위치도 떨어져서 비천(卑賤)한 직인으로 멸시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이 시대에 재명도(在銘陶)가 없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도공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서민적인 소박한 천성으로 환경에 순응하여 작업을 지속하였기에 그들이 현출해낸 미(美)는 아무 가식도 없고 평범한, 사고(思考) 이전의 미, 조작(造作)이전의 미, 자연에 순응하는 조형(造形)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자기는 고려자기에서 볼 수 있는 장식적인 기교가 거의 소멸된 대신 불필요한 면(面)이나 곡선을 최소한으로 줄여 단순화시켰고 튼튼한 기벽(器壁)과 안정된 고대(高臺)를 가졌을 뿐 아니라 하나의 순백(純白)을 기본 색조로 끌어갔으며 무늬도 점차 간결화(簡潔化)를 거듭한다. 조선시대 도자기의 연대는 임진란을 경계로 크게 양분할 수 있는데 그 시대 도자기의 특색에 따라 전기(前期)는 분청자기 시대, 후기(後期)는 청화백자 시대로 불려진다.

분청사기 시대의 조선자기[편집]

粉靑磁器時代-朝鮮磁器

조선시대 성립이후부터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시기까지의 전기에는 고려청자의 퇴화형식(退化型式)인 각종 분청자기가 성행했으며 한편으로는 원나라 말기부터 일어난 중국의 청화백자(靑華白磁)의 영향 아래 조선시대 특유한 견실한 백자(白磁)가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15세기 중엽쯤인 세조(世祖) 때에는 이미 청화백자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기형(器形)으로는 벽이 비교적 엷고 부드러운 곡선이면서 주둥이 부분(口緣部)이 약간 외반(外反)하는 사발, 접시, 공모양(球體)의 상반신에 급히 좁아지는 하반신이 달린 변형된 매병(梅甁), 그리고 큰 구경(口徑)에 목이 낮고 팽창한 어깨(肩部)에서 측면의 벽이 넓고 안정된 바닥으로 내려가는 항아리, 또 비교적 몸이 퉁퉁한 편호(扁壺)와 목이 길게 뽑아지고 최대 복경(腹徑)이 아래로 내려간 병들이 있다.

청화백자 시대의 조선자기[편집]

靑華白磁時代-朝鮮磁器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후기에는 분청자기가 완전히 소멸되고 광주 퇴촌면 일대의 관요(官窯)에서 만들어내는 청화백자가 주류로 등장한다. 이 시기의 기형에는 사발, 접시, 항아리 등 다양하면서 전체적으로 볼 때 전기에서 보던 구연부(口緣部)의 외반(外反)이 중지되고 매병(梅甁)은 완전히 없어진다. 광구호(廣口壺)에서는 구형(球形)과 매병식 모양의 두 가지가 있는 데 두 번째 것의 경우 구연부가 높고 최대 복경(腹徑)이 분청자기 시대보다 하위(下位)로 내려가는 경향이 있고 하반신이 직선이 아니라 곡선을 이루는 수가 많다. 또 병(甁)에서는 병의 몸뚱이(身部)가 구체(球體)가 되거나 또는 길다란 계란 모양(卵形)이 되며 면을 깎은 다면병(多面甁)이 유행하기도 한다.

분청자기[편집]

粉靑磁器

분장청자(粉粧靑磁)의 약칭으로 사기(沙器), 혹은 일본인들이 미지마데(三島手:刷毛目)라고 부르는자기류의 총칭으로 고유섭(高裕燮)씨가 시창(始唱)한 것이다. 이 분청자기는 청자기의 표면에 상감(象嵌), 박지(剝地), 백토분장(白土粉粧), 각화(刻畵), 철화(鐵畵) 등으로 장식한 것을 전부 포함하는데 편의상 상감분청계(象嵌粉靑系:인화분청, 감화분청)와 백토분청계(白土粉靑系:백토분청, 박지분청, 철화분청)로 구분된다.

인화분청[편집]

印花粉靑

청자기의 표면을 상감으로 장식한 상감분청계 분청자기의 한 예. 고려청자의 상감법을 간화(簡化)한 방법으로 그릇의 전면을 흰색의 세점(細點) 또는 세화문(細花紋)으로 장식했다. 여기에서 무늬는 양각한 도제(陶製) 또는 목제범(木製範)으로 표면을 누르거나 때려서 음각무늬를 만들고 거기에 백토(白土)를 바른 것이다. 무늬의 구상(構想)이나 배치, 새기는 과정이 모두 생략되고 질이 나쁜 청자색을 은폐하는 이점을 가졌다. 분청자기 중에서 상류급에 속하며, 이 그릇들은 기형(器形)은 외반구연(外反口緣)의 <사발> <매병(梅甁)> <광구호(廣口壺)> <다종형(茶鍾形)> 등으로 나뉜다. 요지(窯址)로는 고령요(高靈窯)가 유명하다. 기면에 명문(銘紋)을 가진 것이 다수 있다.

감화분청[편집]

嵌花粉靑

청자기의 표면을 상감으로 장식한 분청자기의 한 예 태토(胎土)가 다 마르기 전에 무늬를 조각하고 백토를 메우는 방법이며 고려시대의 상감법 그대로이다. 무늬의 선이 고려청자처럼 섬세하고 조심스럽게 되지 않고 조대(粗大)하고 대담해진 점이 특이하다. 따라서 조선시대적인 개혁(改革)과 신선미를 느낄 수 있는 조선도자의 탄생(誕生)으로 볼 수 있는데 고려시대 화청자(畵靑磁)에서와 같은 공간공포증이 없어지고 무늬가 힘차고 자유롭게 기면의 전 공간을 점유하여 신선한 조화와 여유가 느껴진다. 기형은 <합(盒)> <매병> <병> 등이며 무늬는 화문(花紋), 어문(魚紋), 연문(蓮紋)으로 장식되었고 제작연대는 대략 15세기쯤으로 추측된다.

백토분청[편집]

白土粉靑

청자기의 표면을 백토분장(白土粉粧)으로 장식한 분청자기의 한 예. 태토 위에 부분 또는 전면적으로 백토를 바르는 방법이며 그릇을 백토의 액(液)에 거꾸로 담근 것과 솔이나 풀귀얄로 백토를 발라 그 자국이 남은 것 등 두 가지로 나뉜다. 발생 연대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대체로 인화분청이나 감화분청의 기법을 더 간화(簡化)한 것으로 보아 도자기의 발전 연대상 후기(15-16세기)의 형식으로 추측된다. 백토 분청계의 무늬가 훨씬 회화적(繪畵的)이고도 장식성이 증가한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러한 백토 분청자기 중에는 V형의 작은 완이 많고 사발과 직립(直立)된 구연(口緣)의 병이 있는데 무문(無紋)임이 특색이다. 기형이나 유색(釉色), 백토와 청자 바탕과의 비례가 모두 아름답고 멋있는 귀얄 자국을 지녔다. 오늘날 일본인에 의해 최고급 다기(茶器)로서 애용하는 이 백토 분청기가 궁(宮)의 용기가 아닌 일반인들의 음식기였다는 사실에 조선자기의 미술품으로서의 참 뜻이 있다.

박지분청[편집]

剝地粉靑

청자기의 표면을 박지(剝地)로 장식하는 백토 분청게 분청자기의 한 예. 백토 분청기의 표면을 칼로 긁어 청자바탕을 노출시킴으로써 무늬를 현출하는 방법으로 여기에 박지라는 이름이 붙는다. 박지에는 이른바 역상감법(逆象嵌法)으로 밑바닥(背地)을 넓게 파낸 것과 외형(外形)만을 선각(線刻)한 것의 두 가지 종류가 있으며 이탈리아어의 스그라피토(Sgraffito)법에 해당한다. 무늬는 각종 꽃무늬로서 특히 모란, 당초 등을 위시하여 연문(蓮紋)이나 새(鳥), 고기(魚) 무늬가 사용되었고 선화(線畵) 중에는 간결하면서 자신에 넘치는 선으로 된 것이 있어 주목된다. 기형(器形)으로는<편호(扁壺)> <광구호(廣口壺)> <사발> 등이 있는데 순천(順天)의 송광사(松廣寺) 사리탑 속에서 발견된 고봉화상(高峯和尙:1428년 죽음)의 뼈단지는 박지와 선화를 병용하여 연못 안의 유어(遊漁)를 그린 연대가 확실한 그릇으로서 중요하다. 백토분청의 요지(窯址)로는 충청남도 계룡산, 전라남도 광산, 무안, 함평 등이 알려지고 있다. 연대는 대체로 15-16세기로 추측된다.

철화분청[편집]

鐵畵粉靑

백토분청의 표면에 철사(鐵砂)로서 초화문(草花紋), 조어문(鳥魚紋) 등을 장식한 분청자기의 예. 특히 어문(魚紋) 중에는 현대적인 감각으로 도안화된 것이 많으며 이러한 어문의 발전과 성행하는 단순한 생선에 대한 기호라기보다 연못 속에서 노는 고기를 표현함으로써 당시의 억불(抑佛)정책의 한 반영으로 연문(蓮紋)을 대신한 종교적인 상징(象徵)으로 삼았으리라 추측된다. 기형으로는 소형의 술병과 접시, 사발 종류가 압도적이며 명문(銘紋)을 가진 것도 더러 있다. 연대는 대략 15-16세기로 추측되며 요지(窯址)로는 공주(公州) 계룡산요(鷄龍山窯)가 대표적이기 때문에 이 자기를 계룡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분청자기 상감모란문반합[편집]

粉靑磁器象嵌牧丹紋飯盒

조선시대 초기의 분청자기이며 높이 16cm, 직경 15.1cm의 뚜껑 있는 밥 그릇. 모란문이 백토로 상감되어 있는데 도안의 간결하고 소박한 솜씨가 청신한 감흥을 일깨운다. 크고 둥근 기신(器身)의 곡선은 무딘 듯하면서도 대담하게 그려진 모란문과 조화를 이루며 회색바탕의 조야(粗野)한 태질(胎質)은 오히려 수수한 그릇의 지체를 조성하는 요소가 된다. 대략 15세기경에 전라도 지방이 요에서 만든 그릇으로 추측된다.(澗松 미술관 소장)

분청자기 박지삼어문 편호[편집]

粉靑磁器剝地三魚文扁壺

조선시대 초기의 박지분청의 그릇. 높이가 대략 23cm의 크기를 가졌고 폭은 20cm 정도이다. 두터운 백토의 표면을 선각(線刻)으로 세 마리의 어문(魚紋)을 간결하게 배치했다. 형태의 요약과 색채의 단순함. 장식의 간략(簡略)은 순박하고 어리석은 것 같으면서도 조선시대 특유한 초탈(超脫)의 미를 보여 무심한 중에 높은 격조를 보인다. 편호(扁壺)란 산호(山壺)라고도 불리는 야외용의 주기(酒器)로서 옛날에는 망태에 넣어 휴대하였다.

계룡산 분청자기 철화어문병[편집]

鷄龍山粉靑磁器鐵畵魚文甁조선시대의 철화분청자기. 높이 29.2cm, 구경 17.9cm의 병. 계룡산요(鷄龍山窯)에서 생산되었다. 백토에 철사(鐵砂)의 필로서 화문을 그려 넣었는데 그림의 내용은 수중쌍어 유영도(水中雙魚遊泳圖)이다. 그림 자체는 전통적인 묘법(描法)으로 처리되었으나 착상이 기발하고 필력이 예리분방하여 조선시대의 이름없는 도화공(陶畵工)의 놀라운 솜씨에 감탄하게 된다.(덕수궁 미술관 소장)

백자[편집]

白磁

고려시대의 백자와는 달리 조선시대의 백자는 원나라 말기, 명나라 초기의 견후(堅厚)한 백자의 영향을 받아 유(釉)에 깊이가 있고 견실한 백자가 생겼으며 초기에는 유에 철분(鐵分)이 없이 설백(雪白)이라고 할 수 있는 순백자(純白磁)가 생산되었다. 기형(器形)에는 안이 깊은 사발, 길고 어깨(肩部)가 적당히 넓은 광구호(廣口壺), 평평한 접시 등 중기(中期) 이후의 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그릇들이 예리하고 당당한 솜씨로 만들어졌다. 백자는 조선시대에 가장 존중시된 기본 도자기로서 청화백자가 만들어진 이후에도 백자는 왕이 쓰는 용기로 청화백자는 왕세자(王世子)의 용기라는 규칙이 내려진 때가 있었다. 후기에 접어들면서 백자의 색은 점차 푸른 빛기를 띠다가 말기에 가서는 탁한 실투성(失透性)의 흰색으로 바뀐다. 후기의 기형으로는 구형(球形)의 몸에 좁은 하반부가 달리고 주둥이(口緣)가 높게 올라간 광구호(廣口壺), 두 개의 사발을 맞붙여 만든 길다란 계란 모양(長卵形)의 항아리, 각종 제기(祭器), V형의 대형 푼주 같은 것이 있다.

청화백자[편집]

靑華白磁

조선시대 후기 청화백자 시대에 주류를 이루었던 백자기. 태토 위에 코발트 안료(顔料)로 무늬를 그리고 그 위에 철분이 섞인 장석유(長石釉)를 덮어 구은 것으로 중국에서는 유이청(釉裏靑), 청화백자(靑花白磁), 일본에서는 소메스키(深付)라고 부르고 있고, 우리나라의 옛 기록에는 청화백자(靑畵白磁), 청화사기(靑花沙器), 화기(畵器), 화자기(畵磁器) 등으로 나와 있다. 청화백자가 생산된 최초의 확실한 기록은 세조(世祖) 10년(1465)으로 거슬러 오르는데 이 때에 순천(順川)에서 국산 안료인 토청(土靑)이 채취되어 그것으로 청화백자를 만들었다. 따라서 청화백자의 발생시기는 15세기 중엽으로 보게 되는데 그 생산의 중심인 광주관요(廣州官窯)의 변천을 기초로 초기, 중기, 후기의 3기로 구분할 수 있다.

초기의 청화백자[편집]

初期-靑華白磁

15세기 중엽-16세기말(1592)의 기간을 청화백자의 초기라고 말할 수 있겠는데 이 시기의 청화자기는 속칭 고청화(古靑華) 또는 일본말로 고소메(古深)로 불려진다. 이 고청화는 현재 유품이 적어 정확한 연대를 단정할 수 없으나 원나라 말기나 명나라 초기, 특히 선덕(宣德) 연간의 청화자기에 나오는 당초문을 그린 것이 계통상 가장 오랜 고청화로 보인다. 16세기로 접어들면 유(釉)가 고른 담청색(淡靑色)의 발전된 청화자기가 나오며 무늬에 있어서도 전대 명나라의 모방에서 벗어나 조선시대 특유한 이른바 추초문(秋草紋)을 그리게 되고 기형에 있어서도 어깨(肩部)가 누그러지고 아랫부분이 곡선이 된다든지 목 부분(頸部)이 수직이면서 몸뚱이(器身)의 곡선과 잘 연결되는 등의 변화가 보인다. 시문(施紋)에 있어서도 특징있는 사능화형(四稜花形)을 무늬의 테두리로 하는 이른바 창화(窓畵) 방법과 테두리 없이 아랫부분에 수평으로 외줄(短線)을 돌리고 그 위에 각종 초화문(草花紋)을 그리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이들 그림은 회청(回靑)을 적당히 바른 가는 붓으로 간결하게 그려져 있어 비장식적인 조선시대 자기의 기본이념에 합당한다. 전반적으로 이 시기의 청화백자들이 깊이 있는 안정된 유조(釉調), 담담하고 한정(限定)된 청화문, 볼륨있는 부드러운 기형이 합쳐서 후기 청화자기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미를 형성하고 있으며 고려청자와는 다른 견실한 낭만성을 보인다. 이 시기의 도요(陶窯)로는 우산리(牛山里), 도마리(道馬里), 번천리(樊川里) 등의 광주관요(廣州官窯)를 들 수 있다.

중기의 청화백자[편집]

中期-靑華白磁

17세기-18세기 중엽(1752:영조 28)까지의 시기이며 초기의 광주관요(廣州官窯)들이 경안천(慶安川)을 따라 한강(漢江)쪽으로 이동하여 남종면 금사리(南終面 金砂里)에서 작업을 계속하던 약 1세기반 동안이다. 이 시기의 기형은 광구호(廣口壺)의 경우 어깨(肩部)가 팽창되어 밑으로 처져서 몸뚱이(器身)가 구체(球體)에 가깝게 되고 따라서 최대 복경(腹徑)과 저경(底徑) 또는 구경(口徑)과의 차이가 초기보다 커지고 목(頸部)이 길어지고 있다. 병(甁)의 경우는 각면(角面)으로 된 병이 특색을 보이며 접시는 안이 평평하고 주둥이(口緣部)가 외반(外反)하지 않는 형식이 많아진다. 유색(釉色)은 광택과 독특한 깊이, 윤기를 가져 성기(盛期)의 소상팔경(瀟湘八景), 십장생(十長生) 등이 있다. 이들 무늬는 중국 도자기로부터의 영향이 현저한데 시문(施紋)은 필선이 굵고 자연스러우며 감각이나 결과가, 좋은 의미에서 한국화되어 조선시대의 견실한 양감있는 기형이나 유조(釉調)와 조화되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또 초기와는 달리 무늬를 기면 전체로 확대시키는 중국의 영향이 엿보인다.

후기의 청화백자[편집]

後期-靑華白磁

18세기 중엽-19세기 말(1883년)까지의 시기로서, 광주(廣州)의 분원(分院)에서 청화자기(靑華磁器)를 생산하던 마지막 고비로 들어가던 때이다. 이 분원의 화원(畵員)들은 궁중의 어기(御器)뿐만 아니라 민간에서 쓰일 일반 용기에까지 멋대로 청화를 그려 남발했고 중국에서 수입하던 회회청(回回靑) 외에 서양에서 새로이 양청(洋靑)이 풍부하게 들어와 청화자기 자체가 대량화(大量化)되면서 차차 쇠퇴기로 들어서게 되었다. 녹로가 함부로 되어 표면이 고르지 못하고 유약의 색조도 천박한 회색기를 띤 백색이 되며 조선자기를 대표하는 광구호(廣口壺)의 경우 목이나 몸이 너무 길어져 불안정한 형태로 된다. 무늬는 조잡한 용문(龍紋), 봉황문(鳳凰紋), 송(松), 학(鶴)과 이른바 삼산풍경(三山風景)이라 하여 공식화된 산(山), 수(水), 선도(船圖)가 성행하며 모두 형식화되는 경향이 짙다. 그리고 청자의 영향으로 보이는 화접봉도(花蝶蜂圖), 기마인물도(騎馬人物圖), 물결무늬(海波紋), 망상문(網狀紋) 또는 배경을 박지(剝地)하고 모두 청화(靑華)로 메운 식이 나오고 있다. 기표면 전부를 모란절지(牡丹折枝) 같은 것으로 메우는 특수한 도안이 무늬의 도식화(圖式化)와 함께 후기의 새로운 특징으로 등장하는데 전반적으로 청화의 색이나 질이 저하되고 무늬도 조잡해지면서 기표면 전부를 함부로 덮는 경향으로 흘러 조선왕조의 멸망보다 20년쯤이나 앞선 1884년에 폐요(廢窯)되어 조선시대 청화의 역사는 끝난다.

청화백자 유로조어문호[편집]

靑華白磁柳蘆魚紋壺

17,18세기경 분원(分院)에서 만들어진 도자기로 추측되는 높이 25cm, 구경 14cm의 청화자기. 냇물에 들어서서 낚시대를 드리운 더벅머리 소년의 초연한 모습을 주제로 물 위에 떠 있거나 날아다니는 오리, 바위에 돋아난 난초 등을 박진감 있고 원숙한 필치로 묘사하였다. 그 세련된 회화적인 구성과 고아한 회청(回靑) 빛의 발색 효과는 이 그림이 비범한 화가의 솜씨임을 시사하며 기신(器身)의 아랫부분으로부터 점차 좁아져서 주둥이(口緣)에 이르러 넓은 변죽으로 외반(外反)한 독특한 형태의 아름다움은 온화한 백색유(釉)의 색조와 함께 조선시대 문인 묵객(文人墨客)의 멋진 풍모를 연상시킨다(澗松 미술관 소장).

정식명 청화백자접[편집]

鄭軾銘靑華白磁蝶

청화백자시대 초 기에 만들어진 접시. 높이 4.4cm, 구경 14cm의 구연부(口緣部)가 가볍게 외반(外反)된 초기 특유의 형태를 가졌고 고대(高臺)의 안쪽에 청화로 쓰인 명문 정식(鄭軾)은 세조(世祖) 13년(1468)에 별세한 행중추부 지사(行中樞府知事) 정식으로 추측된다. 실투성(失透性)의 단단한 유조(釉調)로 되고 안의 중심부에 복판화륜(複瓣花輪)을, 바깥둘레에는 매화절지(梅花折枝)를 청화로 그려 돌렸는데 좌우로 전개되는 가지가 규각(圭角)있게 꺾이고 있는 것이 남송(南宋)의 원체회화(院體繪畵)나 명나라 절파(浙派)의 소나무 형식인데 그림이 치졸(稚拙)하면서 문기(紋氣)있는 격을 갖추어 정식 자신이 직접 그린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실용 식기로서의 탐탁스러운 안정감과 청정도(淸淨度)를 갖춘 청화자기이다(澗松 미술관 소장).

철화자기[편집]

鐵畵磁器

자연산화철(自然酸化鐵)인 철사(鐵砂:石間朱)로 백자기에 도안을 그린 조선시대 후기의 자기 초기 백자기의 흑토상감(黑土象嵌)이나 철화분청(鐵畵粉靑)에서 얻은 힌트임이 그 기형(器形)으로 짐작되는데 그것은 존(尊)과 같은 형태인 광구호(光口壺), 즉 단지, 항아리 등이 대부분인 점에서 알 수 있다. 청화백자는 값이 비싸고 일반에서 쓰지 못하게 한데서 이 철화백자가 대신 민간용으로 제작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무늬는 대체로 두 가지 계열로 구분되는데 정연하게 그려진 포도문(葡萄紋) 계열과 치졸(稚拙)하게 그려진 호문(虎紋)이나 용문(龍紋), 또는 추상적인 초화문(草花紋) 계열 등이다. 앞의 것은 정제(精製)의 광구호(廣口壺)에 한정되고 있어 여기의 그림은 화원(畵員)들이 그렸고 관용기(官用器)로 쓰여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일반 도공(陶工)이나 지방요에서 만들어진 희화적인 그림들은 신라 토기에 나타나는 선화(線畵)를 연상시키며 돌발적인 충동에서 그린 듯한 동화(童話)의 세계를 실감하게 한다. 대부분 중부지방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측된다.

백자철화 포도문호[편집]

白磁鐵畵葡萄紋壺

조선시대 후기인 17,18세기경에 만들어진 대표적인 철화자기. 높이 30.4cm, 구경 15cm이며 철사(鐵砂)로 포도를 그려 몸뚱이 윗 부분을 둘렀는데 유면(釉面)에 윤택이 있고 자유로운 필치의 포도그림이 형태와 조화를 이룬다. 그림은 도공(陶工)이 아닌 화원(畵員)의 솜씨로 추측된다.

진사자기[편집]

辰砂磁器

산화동(酸化洞:孔雀石)을 분말로 하여 회청(回靑) 같은 유리 안료(釉裏顔料)를 써서 만든 백자기이며 고려시대부터 만들어졌으나 현존하는 유물로 보아 대체로 임진왜란 이후에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특수한 기형(器形)을 가졌다기보다 입경연화(立莖蓮花)의 특색있는 무늬로 구분되며 어느 특수한 가족집단에 의한 특수요(窯)의 생산품으로 추측된다.

그 외에 봉황문(鳳凰紋)을 넣은 진사, 그릇 표면 전부를 진사로 칠한 것, 청화와 섞어 사용하여 청화백자에 액센트를 주는 경우도 있다.

청화백자 철사진사양각 국화병[편집]

靑華白磁 鐵砂辰砂陽刻菊花甁

조선시대 중기인 17,18세기에 제작된 청화자기. 높이 42.1cm, 동경(胴徑) 22.85cm. 간략하고 곧게 끊어낸 병의 목은 가늘고 길며 몸뚱이(器身)는 우아한 곡선을 그어 아랫 부분에서 안정된 자세를 갖춘다. 몸둥이의 앞뒤에는 거의 같은 구도의 국화, 난초 등을 양각했다. 요지(窯地)는 분명치 않으나 광주 분원으로 보인다.

요지[편집]

窯址

세종실록(世宗實錄)의 지리지(地理志)에 보면 그 당시 전국에 있었던 3백여 개소의 도자요(陶磁窯)중 도자(陶磁)와 자기(磁器)가 각각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그중 상품(上品)은 고령(高靈)과 광주(廣州)의 요뿐이었다. 그러나 현재 도자기 파편의 존재로 요지임이 확인된 것만도 약 7백여 개소나 되며 폐요(廢窯)와 신요(新窯)의 수가 적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조선시대의 분청자기(粉靑磁器)를 만들던 요지로서 인화분청(印花粉靑)으로 유명한 경상북도 고령군 성산면 사부리(高靈郡 星山面 沙鳧里)의 요가 있고 백토분청(白土粉靑)의 요지로는 충청남도 계룡산(鷄龍山), 전라남도 광산 금곡리(光山 金谷里), 무안 비금면 죽림리(務安 飛禽面 竹林里), 함평군 나산면 이문리(咸平郡 羅山面 二門里) 등이 알려져 있다. 백자(白磁)의 요지로서 초기의 것은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청계리(山淸郡 丹城面 淸溪里), 경상북도, 청송군 부남면 이현동(靑松郡 府南面 泥峴洞), 충청남도 서산군 운산면 용현리(瑞山郡 雲山面 龍賢里),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 우산리(廣州郡 退村面 牛山里) 및 초월면 번천리(草月面 樊川里), 양주군 별내면 청학리(楊洲郡 別內面 靑鶴里) 등이고 중기 이후의 요지는 경상남도 양산군 법기리(梁山郡 法基理) 및 상서면 화용리(上西面 化龍里), 하동군 적양면(河東郡 赤良面), 산청군 단성면 청계리(山淸郡 丹城面 淸溪里), 경상북도, 청송군 부동면 이목동(靑松郡 府東面 梨木洞), 전라남도 승주군 황전면 죽내리(昇州郡 黃田面 竹內里),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 운산리(廣州郡 退村面 雲山里)와 금사리(金沙里) 및 초월면 무갑리(草月面 武甲里), 강원도 고성군 구만면 화림리(固城郡 九萬面 華林里), 황해도 수안군 대평면 조박동(遂安郡 大坪面 趙朴洞) 등인데 특히 수안요(遂安窯)의 토질이 좋아 광주분원(廣州分院)에서 여기 흙을 가져다 쓴 일이 있다. 청화백자(靑華白磁)는 광주관요(廣州官窯)나 분원에서 이루어졌으며 철화자기(鐵畵磁器)는 주로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중부 일원, 광주(廣州), 용인(龍仁), 시흥(始興), 그리고 충청도 일부 황해도 봉산(鳳山), 해주(海州) 등의 요지에서 만든 것으로 추측된다.

광주관요 분원[편집]

廣州官窯 分院

조선시대의 관영(官營) 도자기 제조소로 경기도 광주군(廣州郡)에 설치했다. 분원이란 사옹원(司饔院)의 출장소를 의미하는데 후에 분주원으로 개칭되었다. 매년 때가 되면 화원(畵員)들이 사옹원 관리들의 인솔 아래 분원에 가서 당시 궁중에서 쓰이던 어기(御器)에 그림을 그렸는데 일반 용기에도 마구 그렸던 것 같다. 이 분원의 설치에 대해서는 조선시대 초기의 조준(趙浚)이 사옹원에 대해 언급했고 <용재총화>에도 광주자기가 정교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조 초기가 아닌가 추측된다. 광주의 번조소(燔造所)는 본래 퇴촌면 우산리(退村面 牛山里), 초월면 번천리(草月面 樊川里), 도마리(道馬里)에 있다가 1752년(영조 28)에 남종면(南終面)으로 이동하여 약 1세기 반 동안 작업을 계속하였다. <대전회통(大典會通)>에 의하면 분원자기의 원료에 대해서 광주 수토(水土) 1,400섬, 양구 백토(楊口白土) 510섬 등의 기록이 보이며 그 연평균생산량을 1,372죽(竹)이라 했는데 이는 13,720개의 자기를 생산했음을 의미한다. 여기에 드는 비용은 한강이나 소양강으로 운반되는 목재(木材)에 세금을 부과하여 충당했다 한다.

조선도공과 일본자기[편집]

朝鮮陶工·日本磁器

임진란(壬辰亂)을 통하여 조선자기의 아름다움에 매혹된 일본 장군들은 후퇴할 때에 많은 도공(陶工)들을 납치해 갔는데 이들의 도일(渡日)은 그때까지 도기(陶器)밖에 없었던 일본의 요계(窯界)에 자극을 주어 자기(磁器)의 제작에 박차를 가함으로써 오늘과 같은 높은 자기의 수준을 이룩하게 하였다. 즉 일장(日將) 구로다(黑田長政)가 데리고 간 도공 일본명 하야마(八山)와 가토우(加藤淸正)가 데리고 간 하야마의 장인(丈人) 일본명 아라쿠로(新九郞)는 일본 다카도리 야기(高取燒窯)의 창시자가 되었고 시마즈(島津義弘)가 데리고 간 도공들은 하리사(帖佐), 나와시로가와(苗代川), 다테노(竪野) 등의 여러 요(窯)를 개설(開設)하였다. 그러나 가장 유명한 것은 나베지마(鍋島直茂)가 데리고 간 이참평(李參平:일본명 金江三兵衛)으로 그는 1598년에 일본에 도착한 후 1616년 기다큐슈(北九州)의 아리다(有田)에서 일본에서는 최초로 백자토(白磁土)를 발견하였으며 부대(附帶)인원 120명을 데리고 아리다로 이주하여 여기서 도자요를 개설하여 유명한 이마리 야키(伊萬里燒)의 시조가 되었다. 이렇게 납치되어 간 도공들은 주로 기다큐슈 지방에 정착하여 일본의 요업계를 혁신하여 지금까지 전통을 이어 온다. 기다큐슈의 조선 계통의 기술이 오키나와(琉球)에까지 파급된 모양으로 여기서도 청화백자(靑華白磁)나 분청자기(粉靑磁器)를 현재도 제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