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미술/한국미술의 흐름/조선시대의 미술/조선시대의 공예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금공[편집]

金工 조선시대의 금공으로서는 범종(梵鐘)의 주조와 도검(刀劒)의 제작이 특기할 만한 사실로서 알려져 있다. 조선의 범종은 고려종의 형식을 계승하면서 약간의 변화를 보이는데 상대(上帶) 아래에 새로 범자띠(梵字帶)가 돌려졌고 그 때문에 유곽(乳廓)이 부득이 상대에서 유리되어 종신(鐘身) 쪽으로 내려와 있다. 현존하는 중요한 조선종으로는 홍천사종, 보신각종(普信閣鐘)(1462) 양양(襄陽)의 낙산사종(落山寺鐘)(1469), 해인사(海印寺)의 적광전종(寂光殿鐘)(1491), 공주(公州)의 갑사종(甲寺鐘)(1584) 등이다. 조선의 도검은 대체로 질이 좋지 못하여 전투구(戰鬪具)로서의 가치가 희박하지만 임진란 전에는 일본도(日本刀)의 영향을 받아 우수한 도검이 제작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무엇보다도 조선시대 금공의 특색으로 요약할 수 있는 것은 금은상감(金銀象嵌)의 방법인데 도검이나 식기(食器), 각종 용기(容器), 촛대, 마구(馬具)에 이르기까지 이 방법이 쓰여졌다. 이것은 철제품(鐵製品)의 표면을 줄로 그어서 자국을 내고 그 위에 은(銀)이나 오동(烏銅) 등을 박아서 녹여 도안화된 길상문(吉祥紋), 문자 등을 입사문으로 나타낸 특수한 의장(意匠)이다.

흥천사종[편집]

興天寺鐘

1462년에 주조된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범종. 높이 2.7m, 밑면의 벽두께(壁厚)가 30cm가 되는 큰 종으로서 조선시대 종으로서의 여러 가지 변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즉 쌍두일신(雙頭一身)의 용뉴를 가졌고 유통이 없어졌으며 종신(鐘身) 윗면에는 고려종의 돌출연문띠(突出蓮紋帶)가 퇴화(退化)한 것으로 보이는 연문띠가 상대(上帶)처럼 돌고 있고 그 밑에는 1조(條)로 된 철선(凸線)을 두르고 그 밑에 무문두(無紋頭)의 유(乳)를 넣은 4구(區)의 유곽(乳廓)을 두고 유곽사이에는 각 1구(軀)씩의 양각보살상(陽刻菩薩像)이 배치되어 있다. 유곽 아래, 종신 중앙에는 3조의 철선이 돌렸고 이 철선과 종신 아랫 부분의 하대(下帶) 위에 돌려진 청해파문띠(靑海波紋帶) 사이의 공간에는 길다란 양자 명문(陽字銘文)이 있어 제작연대가 실측되며 종신 아랫면에는 폭 38cm의 무문하대(無紋下帶)가 일단(一段)으로 두드러지게 돌고 있다. 이 종은 한국종의 전통을 남기면서 명나라 초기의 중국종의 형식을 많이 가미하고 있다(덕수궁내 소장).

이충무공의 유명도쌍구[편집]

李忠武公-有銘刀雙口

조선시대 전기의 대표적인 도검(刀劍). 검파(劍把)나 검신(劍身)의 크게 휜 모습 등이 일본의 전투용 도검인 진타치(陣太刀)를 연상시킨다.

도신(刀身)은 일주신(一鑄身)이 아니고 별도로 만든 칼날과 칼 뒷면(刀背部)을 접합한 것인데 그 접착선에 파형(波形)이 현저하다. 이러한 별주인은 일본 도검의 특색으로이 방법을 조선 도공(刀工)들이 채용한 점이 주목된다. 검에는 이무생(李茂生), 태귀연(太貴連)이라는 제작자(劒匠)의 이름과 <三尺誓天山河動色 一揮蕩血染山河>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牙山 顯忠祠 소장).

철제금상감 유명삼인검[편집]

鐵製金象嵌有銘三寅劒

조선시대의 특수검(特殊劒)으로 검신(劒身)의 날이 양쪽으로 되고 손잡이(把部)에 오화형두(五花形頭)가 달려 있다. 검신에는 삼인검(三寅劒)이라는 검명(劒銘)과 성좌(星座)가 금은상감(金銀象嵌)으로 입사되어 있는데 이것은 인년 인월 인일(寅年寅月寅日)에 만들었다는 벽사에 쓰이던 의도(儀刀)로 전체의 길이는 99cm이다. 손잡이는 보통 보는 단면(斷面) 타원형과는 달리 단면 구형(矩形)으로 되었고 손잡이와 손잡이끝(把頭)에 각각 <正斬可畏)>, <星辰> 등의 문자가 금으로 입사되었다. 길다란 사릉화형(四菱花形)의 심과 검신에도 각각 여러 가지 명문이 금으로 입사되어 있다(南宮練씨 소장).

일본 민예관장 은상감 연초구[편집]

日本民藝館藏 銀象嵌煙草具조선시대의 상류계급에서 쓰이던 연초를 담던 상자. 당시의 유기(鍮器)에서 많이 쓰이던 은상감법(銀象嵌法)으로 철지(鐵地)에 간결하고 정교하게 의장(意匠)을 꾸몄는데 뚜껑(蓋)의 중심에는 수(壽)자를 변형하여 넣은 둥근무늬와 그 주위에 파문(波紋)이, 그 밖으로는 매화가지(梅枝)를 산개(散開)시켰다. 측면에는 매화가지를 배경으로 역시 둥근 무늬와 길상문(吉祥紋)을 전개시키고 있는데 교묘한 짜임새를 보인다. 높이는 5.5cm, 둘레는 9.9cm이다(일본 東京 日本民藝館 소장).

목죽공예[편집]

木竹工藝

조선시대의 목죽공예는 도자기와 함께 조선시대적인 성격, 미관(美觀), 조선미술의 근본이념을 가장 단적으로 대담하게 나타낸다. 목죽공예에 나타는 미는 일체의 인공적인 장식성이나 인위적인 조형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조촐한 의장(意匠)과 그 용도에 따르는 건실한 실용성의 미와 간소미(簡素美)로 집약된다. 당시의 목죽공예품으로 장(欌), 궤(櫃), 사방탁자(四方卓子), 문갑(文匣), 연상(硯床), 서안(書案), 술상(酒床), 경대(鏡板), 식기(食器) 등이 가장 많은데 오동(梧桐)이나 괴목(槐木)같은 목리(木理)가 뚜렷한 목재나 대를 고르고 목리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좌우상칭(左右相稱)이 되도록 하였다. 조선시대의 목죽공예가 가지고 있는 소박성은 서민들의 생활도구에까지 스며들어 이른바 민예품(民藝品)이라는 세계에까지 조선시대의 독자적인 미가 반영되었다.

육화형 목제인갑[편집]

六花形 木製印匣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목제의 도장갑. 높이 15cm, 가로 23cm이며 그 기법이나 구조, 형태, 조각, 모두 흥미를 끄는 작품이다. 조선시대의 목공은 대부분 재료를 충분히 음미(吟味)한 후 오랜 시일에 걸쳐 건조시키고, 가공(加工)에 즈음해서는 빈틈없는 계획과 세공(細工)으로 일에 착수하는 것이 아니라 무계획적으로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이러한 즉흥적인 작업방법 때문에 재료를 다루는 방법이나 의장(意匠)의 착상이 더욱 놀랍게 전개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작품은 조선시대 목공품으로서 가지고 있는 착상의 좋은 예로서 대(竹)의 반쪽을 잘라 측면에 달고 놋쇠로 테두리 하여 고정시킨 것인데 뚜껑이나 몸뚱이(匣身)의 바닥에는 육화형(六花形)의 판을 댔다. 정(錠) 앞의 금구(金具)는 조선시대 목칠기(木漆器)에 많이 쓴 구형(龜形)이다(일본 東京日本民藝館 소장).

칠공[편집]

漆工

고려시대에 발달했던 나전칠기(螺鈿漆器).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전기에는 당초문(唐草紋)을 전면에 덮어 도안적인 효과를 노렸고 말기에는 십장생(十長生)계통의 회화적인 도안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고려칠기의 변천 과정을 역류(逆流)하는 것으로 주목되며 표현은 섬세한 취향(趣向)을 벗어나 자유분방한 데로 기울어진다. 전기의 작품들은 화판(花瓣)이나 잎(葉)이 모두 굵은 보상당초문(寶相唐草紋)으로 기표면 전부를 덮는 한가지 방식에 의존하고 있는데 이것은 고려시대 화청자의 전통을 이은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공간을 충분히 남기면서 무늬를 두드러지게 하는 점은 당시의 감화분청(嵌花粉靑) 자기와도 통한다. 후기에는 당초문이 후퇴하는 대신 송(松), 죽(竹), 매(梅), 란(蘭), 사슴(鹿), 학(鶴) 같은 십장생 무늬가 성행하며 이것들은 어디까지나 회화적인 요소를 지닌 도안으로서 동화(童話)의 세계를 느끼게 하는 조선시대인들의 묘미가 있다.

나전칠기 당초화문갑[편집]

螺鈿漆器唐草花文匣

세로 46cm, 가로 35cm, 높이 14cm의 조선시대 전기의 나전칠기, 사방 측면의 중앙부에 모란당초문(牡丹唐草文)을 커다랗게 배치하고 구리(銅)로 된 착선(紅線)을 넣었고 뚜껑 주위와 측면의 위 양쪽에 커다란 연주문(連珠紋)을, 또 다시 뚜껑에 국화문(菊花紋)을, 측면 아랫부분에는 능문(菱紋)을 배치했다. 이러한 형식은 고려시대의 나천칠기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나 단지 규모가 커지고 변형된 점에서 다를 뿐이다. 동의 착선으로 각면을 그리는 형식도 역시 고려칠기의 전승(傳乘)이라 하겠는데 이런 점으로 미루어 연대를 조선시대 초기로 올리게 된다.

화각공[편집]

華角工

화각(華角=畵角)은 조선시대의 독특한 공예로서 엷게 깎은 쇠뿔조각(牛角片)의 한 면에 채화(彩畵)를 하고 이것을 목질물(木質物) 위에 화면을 밑으로 뒤집어 붙여 장식하는 방법인데 투명한 쇠뿔을 통해 비치는 유리그림(glass畵)의 효과를 노린다. 이 기술은 원래 중국의 당나라시대부터 있던 복채(伏彩=伏紅)라고 하는 채화대모(彩畵玳瑁=彩畵龜甲)의 기술에서 출발하고 있는데 이와 비슷한 예로 고려 나전칠기에서 대모복채를 혼용하고 있음에 비추어 조선시대의 화각도 여기에서 발전한 형식으로 보인다. 구하기 힘든 대모 대신에 소뿔을 사용하며 재료면에서 신개지(新開地)를 개척하였고 이용 범위도 넓혀 나전칠기의 영역까지 침윤해 들어가는 독특한 공예의 형식을 전개한다. 엷은 쇠뿔판 위에 호분(胡粉)이나 적황록(赤黃綠)의 원색을 써서 화조(花鳥), 십장생(十長生) 등의 무늬를 그리고 거기에 흑선(黑線)으로 윤곽을 두른 다음 이것을 장(欌), 경대, 자, 실패, 베개모 등 주로 여자들의 일상용구 표면에 붙인다. 무늬는 쌍조(雙鳥), 상수문(雙獸紋) 같은 당나라 시대에 유행하던 페르시아 계통의 요소가 많고 당나라의 복채품과도 상통하는 점이 있다.

동경 국립박물관장 화각갑[편집]

東京國立博物館藏 華角匣

세로 24cm, 가로 34cm, 높이 15cm의 조선시대의 화각 공예품. 엷은 쇠뿔판(角板)의 뒷 면에 채색을 넣어 목제판에 부착시켰는데 따로 상아(象牙)를 써서 수직의 계선(界線)으로 구획을 나눈 다음 그 안에 방형의 각판을 철했다. 투명한 쇠뿔을 통해 미묘하게 변색(變色)되어 나오는 채색효과가 인상적이며 무늬는 십장생(十長生), 화조(花鳥)로서 계선을 나누는 형식 등이 일본 쇼우쇼인(正倉院)에 있는 당나라의 복채품(伏彩品)에서 볼 수 있는 고식(古式)이다(일본 도쿄 국립박물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