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미술/한국미술의 흐름/통일신라시대의 미술/통일신라의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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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사지의 가람구조[편집]

感恩寺址-伽藍構造

경상북도 월성 용당리에 있는 감은사지는 682년에 문무왕(文武王)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세워진 절인데 문무왕은 유언에 의해 화장되어 동해대암(東海大岩)에 장치(藏置)되었으며 그 혼이 용이 되어 출입할 수 있도록 금당(金堂) 밑에 바닷물이 들어오게 만들어졌다는 전설이 유명하다. 이 사지가 1959년 국립박물관 조사팀이 발굴한 결과에 의하면 그 구조는 중앙에 금당이, 그 앞쪽 16m의 거리 좌우에 3층석탑이 1기(基)씩 서고, 다시 그 앞쪽 16m 위치에 중문(中門)이 있다. 그리고 금당 뒤쪽 약 32m 지점에 강당(講堂) 자리가 있고, 중문 양쪽 좌우에서 시작하여 강당까지 연결하는 회랑(回廊)이 있는데 회랑 중간에서 금당으로 꺾여 들어가는 중회랑이 있다. 평면으로 실측해 보면 금당은 중앙 위치에 있고 쌍탑(雙塔)은 다시 남반부(南半班)의 중심선에 있는 배치가 된다. 금당은 주연(周緣)을 가공한 석재를 정연하게 2단(段)으로 축성한 기단(基壇) 위에 있으며 기단의 크기는 동서 약 24m, 남북 약 18m이고 동서남북에 각각 1개씩의 돌계단이 있다. 금당의 크기는 동서 약 15m, 남북 약 9m인데 바닥의 구조는 남북으로 일선(一線)이 되는 4개씩의 초석열(礎石列)을 배열한 다음 그 위에 마루판(板)을 깔 듯이 긴 석재를 동서방향으로 빈틈없이 깔았고 중앙열은 초석 사이의 거리가 길기 때문에 중간에 드문드문 보조초석(補助礎石)을 놓고 있다. 이 특이한 구조는 여기서밖에 볼 수 없는 것으로 용이 된 문무왕이 금당 밑으로 출입했다는 전설과 관련시켜 해석해야 할 것 같다. 금당 청판(廳板) 밑에 공간을 두고 거기에 바닷물이 들어와도 괜찮다는 데서 비롯된 것 같다. 이 감은사지는 건립연대가 확실한 통일기(統一期)의 쌍탑가람식의 가람배치이며 또 금당의 특수한 구조로서 유명하게 되었다.

단탑가람식·쌍탑가람 식[편집]

單塔伽藍式·雙塔伽藍式 가람의 배치형식. 쌍탑가람식(二-堂雙塔式)은 당대(唐代) 이후 교리(敎理)의 변천에 따라 생겼는데 삼국시대에 유행한 평지가람제(平地伽藍制)와 통일신라시대 이후에 나타난 산지가람제(山地伽藍制)가 한 원인이 되어 탑파형식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평지가람제는 단탑형식이 산지가람제에는 쌍탑형식이 원칙적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단탑가람식에는 대체로 5층 이상의 탑파가 경영되고 쌍탑가람식에는 흔히 3층탑이 경영되었다. 삼국시대에는 이 원칙이 잘 준수되어 목조탑에서 석조탑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도 5층 이상의 석탑이 그 구성적인 의미를 잃지 않았다. 쌍탑가람제가 유행한 통일신라시대에 접어들면서 탑은 구축성을 잃고 소형(小型)이 되며 조각적이거나 공예적인 의미가 더 강하게 작용한다. 신라탑파로서의 특색이 비로소 나타난다고 말할 수 있다.

불국사[편집]

佛國寺

신라 법흥왕(法興王) 22년(535)에 창건한 것으로 전하고 있으나 경덕왕(景德王) 때, 즉 8세기 중엽 김대성(金大城)에 의해 중창(重創)되었다. 신라 당시의 석축물들을 그대로 남기고 있어 유명하며 본래는 수십 전각(殿閣)이 있던 거찰(巨刹)이었으나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지상건물 일체가 불타버렸다. 현황(現況)을 보면 사역(寺域)은 높은 석단(石壇)에 의해 상하 양단으로 나뉘고 그 양단은 동쪽이 청운교(靑雲橋)·백운교(白雲橋), 서쪽은 칠보교(七寶橋)·연화교(連華橋)로서 두 개의 쌍교(雙橋)로 연결되는데, 원래는 다리 아래 아치 밑에 연못이 있었다고 하며 대웅전(大雄殿)이 있는 상단(上段)은 홍교(虹橋)를 타고 올라가는 천계(天界)로 꾸며지고 있었다. 상단사역(上壇寺域)은 동쪽 지역, 서쪽 지역으로 크게 구분되는데, 동역(東域)은 북으로부터 강당(講堂:無說殿址), 대웅전, 쌍탑, 중문(中門=紫霞門), 중문 좌우에는 종루(鐘樓:현재는 泛影樓뿐), 그리고 중문과 대웅전, 강당을 연결하는 회랑이 있는 부분이다. 한편 서역(西域)은 서방정토(西方淨土)를 표시하는 뜻에서 극락전(極樂殿)을 중심 건물로 하고 그 앞에 석등, 그 좌우에 승방(僧房)이 있고 중문으로 안양문(安養門)이 있다. 이 동서의 건물군(群)이 서 있는 상단(上壇)의 석축은 상하단(上下段)으로 되었으며 하단에는 자연석을 쌓고 상단에는 다듬은 돌로 쌓아 안정감을 내게 하였고 다시 범영루(汎影樓)의 경우 건물의 남반부를 밖으로 내밀어 두공목주를 모방한 쌍석주(雙石柱)로 받들게 하여 석단(石壇)에 높이를 주는 동시에 건물의 위용(威容)을 더 효과있게 보이고 있다. 대웅전 앞의 쌍탑(多寶塔·釋迦塔)은 8세기 중엽의 대표적인 석탑이며 앞에 쓴 석축과 함께 신라인들의 돌 다루는 솜씨를 최대한으로 과시한다. 이와 같이 통일신라시대의 사찰(寺刹)은 공식적인 가람배치를 기본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부분부분의 구조, 또는 각개 독립건물의 구조에 있어서 참신하고도 기지(機智)있고 또 유서가 있는 건축설계를 하고 있다. 무의미한 광대(廣大)보다 깊이 있고 멋있는 불도량(佛道場)을 만들려는 의도가 역력히 보이며 그것이 석공(石工)의 묘기와 합력하여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사찰을 만들어내고 있다.

석굴암[편집]

石窟庵

암산(岩山)에 굴을 파고 도량(道場)을 만드는 방법(方法)은 인도(印度)에서 시작했으며 차이트야( Chaitya:塔院) 또는 뷔하아라(Vihara:僧院)라고 불리는 석굴이 서기전부터 있었다. 이 인도의 석굴은 중국으로 들어와 4세기경부터 시작하여 당대(唐代)에 이르기까지 주로 화북(華北) 각지에서 여러 군데 개굴(開掘)되었는데 삼국시대 이래로 중국에 건너간 우리나라의 스님(僧)들이 직접 그러한 석굴사를 보고 그 속에서 수도(修道)하였음이 분명하다. 경주(慶州)의 석굴암은 8세기 중엽에 김대성(金大城)에 의해 건설되었는데 위와 같은 배경 아래서 신라인이 고안해 낸 한국적인 석굴이라 하겠다. 전방후원(前方后圓)의 평면형은 인도나 중국 석굴의 어느 것과도 통하고 있지만 화강암으로 궁륭천장의 석실을 축성한다는 것은 당시의 석실분(石室墳) 축성법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토함산(吐含山)의 동쪽 봉우리 아래 암벽 밑 샘터 부근을 터로 하였으며 암벽의 석재를 채석하여 봉토분(封土墳) 모양의 인공석굴을 축성하였다. 이 석굴을 주배전(主拜殿)으로 하는 사찰건물이 그 전면에 있었고 이 전체를 석불사(石佛寺)라 명명하였는데 석굴은 전방후원의 기본형식을 따른다. 원형주실(圓形主室)과 방형전실(方形前室) 그리고 그 둘을 연결하는 간도(間道=扉道)로 구성되었고 전체의 방향은 동동남(東東南), 즉 동해(東海) 쪽을 향하고 주실의 크기는 직경 약 7m에 천장높이 약 8m이며 간도의 폭은 3.4m, 길이 2.8m, 전실은 폭 약 6.5m, 길이 약 4.5m가 된다. 주실은 석재로 쌓은 궁륭천장이고 그 위에 봉토를 덮고 있으며 전실에는 원래 간단한 개와(蓋瓦)지붕이 있었다고 추측되는데 그것이 도중에 없어져 버렸다. 전실에는 좌우 양벽에 팔부신상(八部神像)을 각 4구(軀)씩 높이 약 2.65m, 폭 1.2m의 화강암석판에 양각하여 세웠고, 그 석판 아래에는 높이 약 0.8m의 안상석(眼象石)을 두 개의 조각을 받들도록 받쳤다. 전실의 북쪽벽 좌우에는 각 1구씩의 인왕상(仁王像)이 세워졌고 간도 좌우벽에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이, 그리고 주실 입구에는 좌우 팔각석주(八角石柱)가 하나씩 서 있다. 주실은 중앙에 결가부좌(結跏趺坐), 항마촉진인(降魔觸地印), 높이 3.26m의 석가여래좌상이 높이 1.58m의 대좌(台座) 위에 앉혔고 주위 벽에는 전실과 같은 안상대석 위에 15개의 조각판석을 세우고 그 위에 다시 좌우 5개씩 총 10개의 감실(龕室)을 벽면에 만들어 그 속에 원각(圓刻)된 여러 보살좌상을 하나씩 앉혔다. 본존불 뒤, 십일면관음(十一面觀音) 앞에 대리석제의 작은 탑이 있었다고 하나 1908년 이래 분실되었다. 본존주의의 불상들은 입구좌우 제1석(石)이 각각 천부(天部), 제2석이 보살상이고 나머지는 본존후면 중앙에 십일면관음을 두고 그 좌우에 각 5구씩 합해서 10대 제자(弟子)의 상을 배치한 것이다. 경상북도 월성 범곡리 소재.

김대성[편집]

金大成

701년(효소왕 10년)-774년(혜공왕 10년) 신라 경덕왕 때의 국상(國相), 건축가 조각가, 김문량(金文亮)의 아들. 벼슬이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에 이르렀다. 751년(경덕왕 10년)에 부모의 장수와 국가의 안녕을 위하여 불국사·석불사(石佛寺)·장수사(長壽寺) 등을 창건하여 천재적인 기술과 솜씨를 발휘하였으며, 석굴암의 서라계를 완성하여 불국사의 사탑, 전당과 아울러 세계적인 걸작품이라 일컬어진다.

의성탑리 오층석탑[편집]

義城塔里 五層石塔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탑리 소재. 신라 석탑의 초기형식을 보이는 석탑이며 초층옥신(初層屋身)은 목조건물을, 옥개석(屋蓋石) 들은 전탑(塼塔)을 모방한 특이한 양식을 가지고 있다. 총 높이 9.65m로서 단층기단(短層基壇) 위에 섰는데 기단은 모두 별석(別石)으로 된 지대석(地帶石), 우주(隅柱), 탱주, 중석(中石) 등으로 조성, 각 기둥과 초층옥신의 구조는 상촉하관(上促下寬)의 엔터시스를 가지고 있어 백제의 미륵사지석탑에서와 같이 목조건물을 모방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초층옥신을 벗어난 각층마다 단층(段層) 옥개(屋蓋) 받침이 4단(段)-5단-6단의 순으로 올라가면서 전개되는데 옥개석 네 귀에는 약간의 반전(反轉), 즉 전각(轉角)이 보여 후대 신라탑의 옥개전각의 조형(祖型)이 된다. 옥신의 높이에 있어서도 2층 이상의 옥신석은 그 높이가 초층 것의 약 7분의 1로 급감(急減)되어 될 수 있는 한 다층(多層)으로 만들어 탑의 높이를 올림과 동시에 위용(威容)을 갖추려는 중국 전탑의 기본의도를 잘 반영하고 있다. 목탑과 전탑형식을 혼합하면서 전체적으로 전탑적인 외관(外觀)을 갖췄고 단층이기는 하나 기단의 형식, 옥신, 옥개석의 형식 및 기단갑석상면(基壇甲石上面)의 괴임 등이 이른바 신라 석탑형식의 방향을 제시하여 모든 신라 석탑의 출발점이 되는 시원형식(始源形式)을 가지고 있는 점이 중요하다.

감은사지 쌍석탑[편집]

感恩寺址 雙石塔

월성의 감은사지에 있으며 의성탑리 오층석탑에 이어 초기전형양식(初期典型樣式)을 가진 신라식 석탑으로서 건립 연대(682년)가 뚜렷한 점이 주목된다. 동서 양탑이 모두 3층이고 그 정상부까지의 총 높이는 약 9.5m로서 그 위에 약 3.4m의 철찰주(鐵刹柱)가 더 올라가 있다. 이 탑은 중성기단(重成基壇)이라는 발전된 기단형식을 보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기단부가 넓고 높아졌고 탑신부에 있어서도 층수(層數)가 줄고 각 층이 일정한 체감율(遞減率)을 가지고 올라간다. 옥개석(屋蓋石)은 네 귀에서의 반전(反轉)이 뚜렸해지고 처마끝이 수직이 아니라 사각(斜角)을 이루도록 잘라졌는데 탑신과 기단이 모두 당당하면서 서로 조화가 되고 전체적으로 매우 균형잡힌 안정감을 준다. 이 신라식 탑을 백제식 탑이나 전탑과 비교해 보면 그 차이는 뚜렷하다. 같은 월성군 암곡리(暗谷里)의 고선사지 삼층석탑(高仙寺址 三層石塔)과는 건립연대나 제작수법이 거의 같은 것으로서 알려지고 있다.

불국사 석가탑[편집]

佛國寺 釋迦塔

불국사 쌍탑의 하나인 서탑(西塔)이며 무영탑(無影塔)이라고도 불린다. 높이 7.4m, 기단의 폭 4.3m로 2층이나 되는 웅대한 기단과 탑신의 아름다움이 조화되는 완성된 신라식 석탑의 좋은 예이다. 2층 기단 위는 순백의 화강암으로 건립했고 상륜(相輪)의 일부가 망실되었을 뿐 완전한 형태의 3층탑이다. 단순소박하고 장중우직하며 남성적인 점에 있어서 같은 쌍탑인 다보탑과 대조되는데 이와 같은 이형(異形)의 탑을 상대시킨 쌍탑가람식 배치의 예는 따로 볼 수 없다.

불국사 다보탑[편집]

佛國寺 多寶塔

불국사의 동탑(東塔)이며 535년(법흥왕 22년)에 창건되었다. 정통석탑(正統石塔)의 형식을 벗어난 신라의 독창적인 석탑양식을 보이는 데 신라성기(盛期) 석조예술의 정수(精髓)라 할 수 있다. 방형의 이성기단(二成基壇)으로부터 시작하여 점차 올라가면서 팔각형주부구조(八角形主部構造)를 이루는 특이한 탑파형식을 가졌다. 상륜부에 보주(寶珠)가 없을 뿐 거의 완전한 형태로 남았으며 총 높이 10.4m, 기단 폭 4.39m이다. 석조탑이면서도 경쾌한 맛이 흡사 목조탑과 같고 층층이 변화를 주어 번잡한 듯하면서도 전체의 통일을 이룬다. 어떻게 봅면 석조건물이나 목조건축에서 볼 수 없는 불가사의한 묘취(妙趣)를 느끼게 하는 장려하고 온아한 탑이다.

화엄사 사자석탑[편집]

華嚴寺 獅子石塔

전라남도 구례(求禮)의 화엄사에 있는 3층석탑이며 사리탑(舍利塔)이라고도 불린다. 하단(下壇)의 각면에 3구씩으로 도합 12구의 천인상(天人像)을 양각으로 표현했고 상성기단(上成基壇)의 사우(四隅)에는 좌형(坐形)의 자웅사자를 기둥처럼 세우고 그 중앙에 승형입상(僧形立像)을 두어 위의 무게를 받게 하였다. 탑신은 기단에 비해 비율이 작은 느낌이 드나 층급(層級:받침)은 5단이고 초층에는 각 면마다 문비(門扉)의 문양이 새겨 있으며 그 양 옆에서 인왕상(仁王像)이 배치되어 섬세한 효과를 낸다. 착상이 기발하고 특이한 형식을 갖춘 점에서 불국사의 동쪽 다보탑과 쌍벽을 이룬다. 높이 54.5m.

안동지구 전탑군[편집]

安東地區 塼塔群

신라 석탑은 중국의 전탑으로부터 기본적인 영향을 받았으며 안동지구에는 신라 중기 이후, 즉 8-9세기경의 것으로 생각되는 전탑이 4기(基) 남아 있다. 이 전탑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安東 傳法興寺址 七層塼塔 (安東 新世洞 높이 14.6m)

安東 傳法林寺址 五層塼塔 (安東 東部洞 높이 8.35m)

造塔洞 五層塼塔 (安東 一直面 높이 8.65m)

錦溪洞 多層塼塔 (安東 豊南面 현재의 높이 4.66m)

이들 전탑들은 대부분 후세의 조악(粗惡)한 보수로 인하여 그 원형을 되찾기 힘들 정도이다. 특히 안동 전법흥사지 7층전탑의 경우,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전탑이 되는데 거기 새겨진 조각도 배열의 불규칙함과 기법이 통일되지 않는 점으로 미루어 여러 곳의 것을 모은 듯하다. 안동 전법림사 5층전탑은 비교적 탑의 기본구조가 뚜렷한 편인데 위의 7층전탑에 비해 외견상 훨씬 안정감을 보인다. 조탑동 5층전탑은 화강암으로 초층옥신을 구축한 것이 전탑으로는 이례적이라 할 것이다.

왕릉의 제도[편집]

王陵-制度

통일신라시대의 왕릉은 그 봉토 외부의 형식에 따라 대체로 5형식으로 구분한다. 제1식은 아무 석물(石物)도 없는 봉토분을 말함이며 원래는 석비(石碑) 같은 것이 서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孝昭(702)·僖康(838)·神武(839)·孝恭(912)·神德(917)·景明(924)·景哀(927) 등 諸王墓>. 제2식은 봉토기부(封土基部)에 자연석을 군데군데 돌린 것이며 고구려 석총(石塚)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넓은 의미에서 시베리아의 봉토호석(封土護石)과 상통하는 것으로 생각된다<武烈王(660)·憲安王(861)>. 제3식은 봉토기부 주변을 자연석 대신에 석축(石築)으로 쌓은 것인데 제2식의 발전으로 보인다(神門王(692)·閔哀王(839)·憲康王(886)·定康王(887)>. 제4식은 제3식의 석축을 판석(板石)으로 바꾸고 그 표면에 십이지상(十二支像)을 부각(浮刻)한 것인데, 이러한 십이지상이 무덤의 수호신으로 등장한 것은 중국에서 시작되었으나 호석으로서 봉토의 외부를 돌린 것은 오직 신라뿐이었다<景德王(764)·憲德王(826)·興德王(836) 그리고 一般墳墓로 金庾信墓 九政里方形墳>. 제5식은 십이지상을 돌리고 다시 묘 앞에 석인(石人)·석수(石獸)를 배치한 것으로 신라 왕릉으로서는 가장 완비된 형식이며 당(唐)의 왕릉을 모방한 형식이다<聖德王陵(737)·興德王陵(836)·掛陵(元聖王 785-7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