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미술/한국미술의 흐름/통일신라시대의 미술/통일신라의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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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조각의 변천[편집]

佛敎彫刻-變遷

통일신라시대에는 석조·동조 및 소조(塑造) 등 각종 불상이 만들어졌는데 이의 변천을 개관해 보면 배리삼존불(拜里三尊佛)이나 경주박물관 삼존불 따위에서 보이던 7세기 중엽의 사등신(四等身)의 속박에서 풀리는 한편, 이에서 시작된 신체굴곡의 표현이 점점 더 발전해 나가 그것이 8세기 중엽의 석굴암조각을 고비로 하여 차츰 형식화되고 경화되는 방향으로 흐른다. 특히 석굴암 이후로는 불상의 얼굴에서 인간다운 점이 후퇴하고 틀에 박힌 공식화된 불(佛)의 얼굴이 성행하게 되는 것도 큰 변화라고 하겠다. 또 재료상으로는 석불(石佛)과 동불(銅佛)이 전 시기에 걸쳐 많이 만들어졌으나 동불은 8세기 후반 이후로는 대형(大形)은 줄어들고 그 대신 9세기부터 철불(鐵佛)이 만들어지기 시작하고 있다. 석불도 8세기까지는 원각(圓刻:full round)이 많이 만들어졌지만 9세기부터는 기술의 퇴화, 열의의 부족 등으로 만들기 쉬운 마애불(磨崖佛)로 차츰 유행이 바뀌게 되었다. 이들 9세기 이후의 불상들은 얼굴이 우울해지며 굳어지고 있는 것이 눈에 띄고 고려 이후 불안(佛顔)의 기본형을 만들고 있다. 또 주조술상으로 보면 8세기까지는 소위 실납법(失蠟法:lost-wax method, cire perdue)을 써서 속이 비고 세부가 예리하지만 9세기가 되면 편면범(片面範) 또는 음범(陰範)에 그대로 용동(溶銅)을 부어 괴량감(塊量感)이 적은 편평중실상(扁平中實像)을 만들고 의습(衣褶)은 끌로 파서 표현하고 있다.

십이지신상[편집]

十二支神像

통일신라의 조각은 이 시대의 무덤이 평지에서 언덕으로 옮겨가면서 분묘에 석인(石人)·석수(石獸) 및 십이지신상을 배열하는 풍조가 일어나게 되었고 이 방면의 조각이 발달하였다. 십이지(十二支)는 방위(方位), 시간 등 우주의 공간적인 한계, 시간적인 한계를 상징하는 신적인 존재라 하겠으며 중국에서는 부장품으로서의 명기(明器), 묘지(墓誌)의 장식 등으로 수형(獸形) 또는 수두인형(獸頭人形)으로 표현하였는데 특히 도교(道敎)가 성행한 당대(唐代)에 유행하였다. 이러한 십이지를 호석(護石)으로 조각하여 분묘를 돌린 것은 순전한 신라인의 창안(創案)이라 할 수 있겠는데 가장 빠른 것이 현재로는 김유신 묘(金庾信墓:673)의 십이지석상이다. 그외에 석인·석수를 동반하고 십이지를 배치한 흥덕왕릉(興德王陵:737), 괘릉(掛陵), 그리고 불국사역(驛) 앞에 있는 구정리방형분(九政里方形墳) 등이 십이지의 조각으로 알려지고 있다.

사천왕사지 녹유전상[편집]

四天王寺址 綠釉塼像

경주시 남쪽 교외 배반리의 사천왕사지에서 출토한 이 전불(傳佛)은 탑의 벽에 감입하였던 것으로 원래는 평방 약 80cm, 두께 8cm 정도의 전으로 생각되며 지금은 파손되었지만 마귀를 누르고 앉은 사천앙의 모습이 힘차게 나타나 있다. 모든 세부(細部는 당대(唐代)의 사천왕을 모방한 것이 틀림없으나 당의 조각에서와 같은 불균형한 지체(肢體), 어색한 근육표현이 여기서는 완벽에 가깝도록 발전했으며 뛰어난 각공(刻工)의 솜씨가 엿보인다.

감은사지 사천왕동상[편집]

感恩寺址 四天王銅像

월성(月城)의 감은사지 서삼층석탑(西三層石塔)의 금동제 사리함 바깥벽에 칠(漆) 같은 접착제로서 붙인 것이며 정교한 음(陰) 틀을 사용한 주상(鑄像)이다. 높이 21.6cm의 소상(小像)이지만 안면, 근육, 갑주(甲胄)의 세부 등이 예리하고 세심하게 나타나 있는데 사천왕사지 전상과 통하며 당의 용문봉선사(龍門奉先寺) 조각에서도 볼 수 있는 양식이다. 이 조상의 얼굴이 동양인이 아니고 중앙아시아 이란계(系) 사람의 형상인 것이 주목되는데 아주 캐리커처한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이 사천왕의 얼굴들을 호인(胡人)으로 만든 것은 중앙아시아 출신의 군인들이 당의 군대에서 용맹을 떨쳤기에 이 용맹의 상징으로 왕릉의 무석(武石)에 채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여기 사리함 안에서는 아주 소형이기는 하지만 체구와 동작에 부자유스러운 점이 없이 동세(動勢)가 잘 표현된 주악천녀(奏樂天女)의 상이 반출(伴出)되고 있다.

군위 아미타삼존석불[편집]

軍威 阿彌陀三尊石佛

경상북도 군위군 악계면 남산동의 팔공산(八公山) 연봉 북쪽 기슭에 있으며 1962년 9월 22일에 발견되었다. 지상으로부터 약 6m 높이의 천연적인 암벽을 뚫어 만든 석굴(石窟)에 안치된 이 석불은 중앙의 본존좌상(本尊坐像)이 높이 2.88m, 오른쪽으로 향한 관음입상(觀音立像)이 1.8m, 왼쪽으로 향한 세지보살(勢至菩薩)이 높이 1.8m이며 모두 무거운 양감과 함께 침울한 위엄을 보이려는 느낌이 든다. 본존불은 긴장된 엄숙한 얼굴이며 납작한 코와 짧은 목이 더욱 친밀감 없는 우상(偶像)으로 만든다. 보살들의 안면 역시 코 밑을 처리 못하는 고졸한 생경감이 엿보이며 몸은 삼곡(三曲)이 보이지만 부드럽지 못하고 남자가 여장(女裝)한 듯한 딱딱한 인상이다(三曲 Tribhanga·印度의 불상에서 시작하여 唐의 天龍山石窟에서 많이 나타나는 불상형식으로 허리를 비튼 모양) 이 무거운 장엄함과 기념비적인 성격은 타산석굴(駝山石窟) 같은 수대(隨代)의 조각에서 출발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본존불의 대좌 앞에 늘어진 천의(天衣)의 주름은 북위(北魏)의 용문석굴(龍門石窟) 같은 데서 흔히 보는 특색있는 수법에서 발전해 온 형식이며 보살들의 목에도 당의 성기(盛期) 불상에서 보는 따위의 두터운 삼도(三道:세줄기 주름)와 기다랗게 늘어지는 경식(頸飾)이 감겨 있다.

경주 굴불사지 사면석불[편집]

慶州掘佛寺址 四面石佛

7세기 말경의 작품으로 추측되며 거대한 화강암의 바윗덩어리 네면에 새겨진 양가보살상(陽刻菩薩像)이다. 부드러운 육체의 굴곡과 감촉은 석굴암의 조각을 연상케 하나 얼굴의 모습이나 몸집 같은 데서 인도적(印度的)인 감각과 인상을 느끼게 하여 주목된다.

연기지구 발견 석조상[편집]

燕岐地區發見 石造像

충청남도 연기군 전동면 다방리 비암사에서 발견된 납석제비상석(蠟石製碑像石) 3개와 조치원(鳥致院) 근교의 서광암(瑞光庵)에서 발견된 삼존천불비상(三尊千佛碑像) 1개. 그리고 연기군 서면 월하리 연화사(西面 月下里 蓮花寺)의 비상 2개는 재료나 수법 등이 거의 흡사하여 하나의 동일한 지방양식을 이루고 있다. 이들 석상은 중국에서 유행한 공양석상(供養石像)으로서 원각상(圓刻像)을 만드는 대신 다수의 불상을 부각(浮刻)하고 명문을 새기며 개석(蓋石)을 씌워 사원의 경내에 안치했던 것이다. 연기의 석상들은 높이 40-50cm 정도의 광배형(光背形) 또는 장방형의 갈색 납질편암(褐色蠟質片岩:Talc-schist)으로 만들었고 반가상(半跏像)·아미상(阿彌像) 등과 기타 여러 가지 불상 및 보살상들을 부각하고 있으며 모두 마멸이 심해 자세한 조각의 특징을 고찰하기 힘드나 부드러우면서도 경화된 경향이 남아 있고 도상(圖像) 자체가 신라 조각의 주류를 벗어나서 이 지방에 남아 있던 백제 조각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음을 시사한다. 7세기 후반의 조각품들이다.

감산사 석조아미타입상 및 미륵입상[편집]

甘山寺 石造阿彌陀立像-彌勒立像

경주의 감산사에서 출토한 연대가 확실한 석불이며 8세기 전반기의 특징을 잘 나타낸다. 이 시기의 신라조각은 전세기말(前世紀末)의 자연주의적인 경향을 한층 진전시키는 한편 인물의 표현에 일종의 경화, 또는 도식화를 가미하여 불타(佛陀)의 정신적인 면을 강조하려는 노력이 가해진다. 두 석상 모두 대좌로부터 광배까지 모두 한 개의 돌로 이루어진 높이 1.8m의 입상이며 광배 뒷면에 있는 장문(長文)의 명문(開元七年歲次己未)에 의하여 제작년대(720년)와 제작동기가 밝혀지고 있다. 아미타상은 안상(眼象)을 새긴 8각의 대석(台石) 위 원형앙련석좌(圓形仰蓮石座) 위에 세워졌으며 뒤에는 단순화된 화염문(火炎文)으로 주연(周緣)을 장식한 큰 주형광배(舟形光背)가 서 있다. 불상의 얼굴은 넓고 사각형이며 종래에 볼 수 없던 특수한 통일신라시대의 불안(佛顔)을 보인다. 체구는 뚱뚱하고 두 어깨에 특히 힘이 가해지는데 전신을 두터운 통견의(通肩衣)가 덮고 있으며 그 의첩이 부드러운 것 같으면서 경화되어 신체의 굴곡을 거의 감춘다. 이 불상은 다음 시대의 공식화된 허다한 입상의 출발점이 된다는 데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미륵보살입상은 대좌, 광배 모두 아미타입상과 같으나 연판(蓮瓣)에 꽃무늬를 넣어 장식성을 가한 것이 눈에 띄며 얼굴과 상반신의 풍만한 모습이 허리를 꺾은 삼곡(三曲) 자세와 함께 어딘지 인도(印度)의 조각을 연상케 하는 특색을 지녔다.

금제아미타좌상 및 석가입상[편집]

金製阿彌陀坐像-釋迦立像경주 구황리(九黃里)의 삼층석탑에서 나온 금동사리함(金銅舍利函)에서 발견됐는데 연대가 확실하고 순금제라는 외에 조각적으로는 수작(秀作)이 못된다. 사리함의 명문에 의하여 그 제작년대는 석가입상의 경우 692년이나 그 이전 즉 7세기 후반의 것으로 생각되며 아미타좌상은 760년이나 그 이전의 어느해로 보는데 양식으로 보아 8세기 초의 것으로 추측된다. 석가입상은 눈을 크게 뜨고 웃는 모습이나 의습의 형식이 삼국불(三國佛)을 연상케 할 정도이다. 거기 비하면 아미타좌상은 얼굴도 달라지고 의습이나 기타 모두가 당불(唐佛)의 영향이 역연하다. 이렇게 복잡하고 사실적이면서 실은 도식화된 것 같은 의첩의 처리 방법이 8세기 불상들의 전형(典型)이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간송미술관장 금동여래입상[편집]

澗松美術館藏 金銅如來立像높이 38.2m의 여래상으로 천의를 걸치고 허리를 비틀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나발(螺髮의 머리부분이 크고 눈이 옆으로 긴 점등으로 보아 8세기 전반기쯤의 작품으로 추측된다(故 澗松 全塋弼씨 소장품).

금동약사여래입상[편집]

金銅藥師如來立像

국립박물관 소장으로 높이 29cm. 좌는 결실되었고 대좌에 꽂혔던 촉(觸)이 두 발밑에 하나씩 끼어 있다. 전신에 드리운 의첩 속으로 육체의 윤곽이 드러나 보이는 듯한 표현으로 풍만한 전신의 균제(均齊)된 아름다움과 사실적인 작품이 성당불(盛唐佛)의 영향을 보이면서 동시에 산라인의 뛰어난 솜씨와 연금술(鍊金術)을 짐작하게 하는 조각이다. 체구에 비해 머리가 큰 편이나 잘 조화되고 있다.

석굴암 본존상 및 군상[편집]

石窟庵 本尊像-群像

8세기 중엽의 신라조각의 절정을 이루는 외형(外形)과 내면(內面)의 미를 융합한 종교조각 석굴암은 경주 근교의 토함산(土含山) 기슭에 있으며 김대성(金大成)에 의해 축조되었는데 여기 조각들은 6세기에서부터 시작하여 2세기에 걸쳐 연마된 신라인들의 조각기술을 총 집합하고 결산한 느낌이 든다. 높이 10m의 석굴로 된 궁륭형 주실 중앙의 대좌에 아미타여래(阿彌陀 如來:本尊像)를 모시고 주위의 벽에는 십일면 관음(十一面 觀音)을 비롯하여 십대제자(十大弟子), 보살(菩薩), 사천왕(四天王), 팔부신중(八部神衆)등 39체의 불상을 부각(浮刻)했고 천장에도 10개의 작은 감실(龕室)을 두어 각기 보살과 거사(居士)를 안치했다. 서방정토(西方淨土)에 있는 아미타불은 짐짓 미소로 눈을 감고 강마촉지(降魔觸地)의 손짓을 하고 있는데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당당한 체구이며 신체 각 부분의 비율에 조금도 결점이 없다. 얼굴은 둥글고 힘이 넘쳐 흐르며 그 힘은 두 팔을 통해 손가락 끝까지 가득찬 느낌이다. 길다란 활모양(弧形)이 눈썹 가늘게 뜬 눈, 윤곽이 뚜렷한 입술 등 모두 당(唐)의 천용산석굴(天龍山石窟)이나 보경사(寶慶寺)의 석불들과 기본적으로 통하는 얼굴형이다. 그러나 당의 불상에서 보는 따위의 상상적이고 형식화된 얼굴과는 다르며 무한히 발산하는 혼(魂)과 힘을 가졌다. 이 무한대의 힘이나 볼륨, 그리고 숭고한 장엄미는 자연주의적이면서도 적당히 가해진 부분적 간략(簡略)과 근육의 생략(省略), 또는 의첩의 단순화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점은 주위의 여러 군상에서도 볼 수 있다. 어떠한 보살이건 그 육체와 천의가 부드럽고 석면(石面)이면서 피가 통하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그 철저한 사실표현에서 오는 관능적이고 속(俗)된 점을 불식하고 높은 품격과 정신적인 아름다움을 발산하게 하는 것은 이목구비의 부분적인 경화(硬化)와 함께 하반신을 덮은 어딘지 도식화된 의첩(衣褶)의 표현인 것이다. 이 자연주의와 추상주의적인 경향의 신묘한 조화는 이 작품들이 비단 조형감각만의 소산(所産)이 아니고 높은 불교적 이상(理想)의 소산임을 입증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불교적 이상의 정밀(靜謐)·신비·조화의 세계를 석굴암 이후의 조공(彫工)들은 유지하지 못했기에 시대가 내려가면서 점점 굳어지고 무서워지고 무표정해지고 차디 찬, 형식적인 불안(佛顔)으로 기울어져서 후대(後代) 조각의 타락상을 보이고 만다. 따라서 석굴암의 불상들은 그러한 하강(下降)이 시작되기 전의 고비에 서 있는 분수령(分水嶺) 같은 존재라고 하겠다.

석불두[편집]

石佛頭

국립박물관 소장. 머리만 남아 있으며 8세기 중엽이나 후반기 초에 만들어진 최대 걸작의 하나. 마멸(磨滅)이 심해 세부가 뚜렷하지 않으나 석굴암 본존상이 보이는 저 당당한 힘 대신에 무한한 자비와 법열(法悅)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신비스러운 미소를 띤 표정과 두 뺨의 모델링 등이 모두 신기(神技)에 가까운 솜씨이다.

백률사 동조여래입상[편집]

柏栗寺 銅造如來立像

높이 1.8m, 두 손을 결실한 외에는 완전한 입상이며 넓적한 얼굴, 맥이 빠져 축 늘어진 천의의 주름, 그 밑에 엿보이는 힘없는 체구 등 그러면서 아직 전적으로 경화, 형식화되지 않은 인상이 8세기 후반이나 아니면 9세기 초경의 신라동불을 잘 보여주고 있다. 8세기말부터 9세기에 걸쳐서 많이 만들어진 이러한 약사불(藥師佛)의 유행은 아마 당시 계속되었던 흉작, 질병과 관계가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이 신라불의 얼굴은 중국이나 일본불과 다른 신라적인 얼굴이며 바로 한국인의 얼굴이기도 하다(경주박물관 소장).

동조약사여래입상[편집]

銅造藥師如來立像

영주 부석사에서 발견되었으며 높이 20㎝의 동조불상이다. 인물의 세부(細部)를 뜯어보면 인간적인 자연스러움이 없고 불안(佛顔)으로서 공식화된 얼굴이며 석굴암 본존상의 얼굴을 형식화한 것임이 드러나는 9세기 전반부의 작품경향을 시사한다(국립박물관 소장).

비로자나좌상[편집]

比盧遮那坐像

통일신라시대 말기인 9세기 중엽 이후 만들어지기 시작한 철불의 예이다. ① 보림사(寶林寺) 소장, 비로자나좌상-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보림사에 있으며 높이 2.5m, 뒷면에 있는 명문(銘文)에 대중(大中) 12년(858)의 연대가 있어 중요하며 9세기 후반부 신라불상의 모습을 잘 반영한다. 체구는 전대(前代)의 전통을 이어 가냘픈 편이고 천의의 의첩 처리가 불문명하다. ② 도피안사(到彼岸寺) 소장, 비로자나좌상-강원도 철원군 관우리(鐵原郡 觀雨里) 도피안사에 있으며 보림사의 철불에서 보이는 의첩의 혼란된 처리를 평행선의 정리로서 새로운 질서를 주는데 성공하고 있다. 그러나 머리는 역시 전자(前者)와 마찬가지로 육계·두부(頭部)의 구별이 없어지고 갸름한 얼굴과 함께 머리의 모든 모양이 계란형(鷄卵形) 또는 타원형으로 되어 있다.

신라부도의 형성[편집]

新羅浮屠-形成

부도(浮屠=浮圖)는 원래 Buddha(佛) 또는 Stupa라는 말이며 뒤의 경우는 탑파(塔婆)를 뜻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고승(高僧)의 유골이나 사리(舍利)를 넣는 석등형(石燈形) 또는 석종형(石鍾形) 사리탑을 지칭한다. 신라의 부도는 그 기본형식이 이른바 팔각당식(八角堂式)이며 그 밖에 오직 한 가지 예로 석종형 부도가 남아 있다. 형식면에 있어서는 당대(唐代)의 사리탑에서 출발하고 있으나 세부에서 변형을 가해 신라식 부도를 완성한 것으로 보인다. 형식의 변천을 명확히 고증하기는 힘들며 대체로 시대가 내려갈수록 기단부(基壇部)의 크기가 커지고 장식이 번잡해지는 경향이 보인다. 팔각당식 부도의 구조는 밑으로부터 <方形地臺石-八角下臺石-八角竿石(또는 中臺石)-八角上臺石-八角塔身받침(座石)-八角塔身石-八角屋蓋石-相輪部>의 순서로 구성되는데 상대석에는 보통 복련(伏蓮)을 돌리지만 하대석이나 하대석 위에 얹는 간석(竿石)받침 주위에는 ① 사자(獅子)를 새긴 것 ② 연문(蓮文)을 새긴 것 ③ 운문(雲文) 또는 운룡문(雲龍文)을 새긴 것 등으로 나뉘며 두 가지 이상을 혼용하는 경우도 있다.

흥법사 염거화상부도[편집]

興法寺 廉巨和尙浮屠

팔각당형의 부도 중 가장 오래고 건립 연대가 확실하며 844년 신라 특유의 오리지널한 양식을 보이는 귀중한 작품이다. 높이는 1.67m로 상륜부(上輪部)가 없어진 외에 완품(完品)에 가깝다. 각 부분이 모두 팔각(八角)인데 하대석에는 사자 모양을 양각하였고 연화하대(蓮花下臺) 위에 놓인 간석면(竿石面)에는 신장(神將)의 좌상을 새겼으며 탑신에는 문비(門扉) 모양과 신장의 입상을 조각하였다. 옥개(屋蓋)는 목조건물의 양식을 충실히 모각(模刻)하고 그 밑에 비천문(飛天文)이 새겨졌다. 전체의 규모는 작으나 짜임새 있고 아담하며 조각 솜씨가 우아할 뿐 아니라 고전적인 장중함마저 느끼게 한다.(강원도 原城郡에서 발견되었고 현재 경복궁에 있음.)

석등의 3형식[편집]

石燈-三形式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은 간석(竿石)의 모양에 따라 세 가지로 구분한다. ① 고복석형식(鼓腹石形式)-비교적 초기의 석등형식이며 부도에서 본 것처럼 짧은 8각형 간석에서 발전한 것으로 구례(球禮)의 화엄사 각황전 석등이 이의 좋은 예이다. ② 사자형간석(獅子形竿石)-사자탑(獅子塔)에서 볼 수 있듯이 우주(隅柱) 대신으로 사자모양을 세운 형식이며 현재 덕수궁 안에 있는 중흥산성 쌍사석등(中興山城雙獅石燈)이나 법주사(法住寺)의 석등에서도 볼 수 있다. ③ 팔각주간석(八角柱竿石)-통일신라 최후의 석등형식이며 고려시대의 석등이 주로 이 형식을 많이 따른다. 대표적인 예로는 부석사 무량수전(浮石寺 無量壽殿) 앞 석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