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미술/한국미술의 흐름/통일신라시대의 미술/통일신라의 공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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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범종[편집]

新羅梵鐘

일반적으로 한국종(韓國鐘)이라고 불리는데 그것은 신라의 범종이 중국이나 일본의 종과 그 형식이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전체의 모양이 대포포탄(砲彈)이 머릿부분을 잘라낸 것과 같이 위가 좁아지는 원추형(圓錐形)이면서 종신(鐘身)의 아랫부분 약 3분의 2쯤 되는 곳이 가장 넓고, 그 밑은 약간 축약되어 매우 안정되고 견고하며 또 매듭지어진 외형을 지니고 있다. 종신의 상단에는 상대(上帶), 하단에는 하대(下帶)라고 불리는 무늬대(紋樣帶)가 돌려졌고 다시 상대에 붙어서 방형의 무늬대로 둘러싼 유곽(乳廓)이 네 군데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되어 그 속에 3열(列) 9개의 젖꼭지(乳)가 달린다. 종신의 불쑥 나온 배(腹)부분에는 2개의 당좌(撞座)와 두 무리(二群)의 천인상(天人像)이 서로 대칭적으로 배치되어 장식적인 효과를 낸다. 종신의 끝 천판(天板) 즉, 무(舞)라고 불리는 부분에는 네 다리로 땅을 발고 머리를 숙여 지면을 물어뜯는 듯한 용형고리를 만들어 그 구부러진 부분에 철사를 끼어 종루(鐘樓)에 매어 달도록 되었다. 또 이 용뉴 옆에는 음관(音管) 또는 용통(甬筒)이라고 불리는 속이 빈(中空) 원통형의 유통이 부착되어 종신과 맞뚫린다. 천판에 유통을 단 점이나 일용뉴를 만든 점, 종신에 천인상을 배치한 점 등은 신라종만의 독창적인 형식이라 하겠다. 중국이나 일본종은 천판에 유통이 없고 일신쌍두용(一身雙頭容) 형식이며 종신에는 결뉴문만으로 장식되어 있다.

상원사종[편집]

上院寺鐘

강원도 평창군 오대산 기슭의 상원사에 있는 동제종(銅製鐘)이며 725년에 주조되었고 높이는 1.7m이다. 천판의 명문에 의하면 휴도리(休道里)라는 귀부인(貴夫人)이 기증한 것으로 되어 있다. 무늬대(紋樣帶)는 모두 당초문과 반원형으로 구획지은 속에 천인상으로서 장식되었고 종신에는 당초문띠를 바깥에 두른 연화문 당좌(撞座)와 두 병좌주악천인상(竝座奏樂天人像)을 두 군데 배치하고 있다. 또 유통에는 상하연판띠(上下連瓣帶)와 꽃무늬를 교차시키고 있다. 전체의 모습이나 무늬의 수법, 특히 천인의 바람에 날리는 천의자락의 선 등이 봉덕사종에 비해 부드럽고 담결(淡潔)하며 여러 점에서 현존하는 신라종의 백미(白眉)라고 하겠다.

봉덕사종[편집]

奉德寺鐘

771년에 주조된 통칭 에밀레종 또는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이라고도 불리며 전체의 높이 3.78m, 구경(口經) 2.27m. 아랫부분의 두께가 23cm나 되는 큰 종이다. 긴 명문이 있는데 그에 의하면 성덕왕(聖德王)의 명복을 빌기 위해 경덕왕(景德王)과 혜공왕(惠恭王)의 2대에 걸쳐 어린애를 희생하는 전설까지 낳고 고심 끝에 만들어진 것이라 한다. 종의 세부는 상원사종과 별다름이 없으나 종신 윗부분의 젖꼭지 장식이 평평한 연화문으로 바뀌고 하단(下端)은 앙련(仰蓮)이 둘려 있고 판단(瓣端)마다 연화문을 한 개씩 배치하고 있다. 당좌(撞座)는 유곽(乳廓) 사이 아래에 1개씩 두 개가 있으나 비천이 쌍비천(雙飛天)이 아닌 점이 특이하다. 무늬대의 보상화문(寶相花紋)이 도안이라기보다는 사실적으로 물결치듯이 힘있게 묘사되고 비천의 모습도 매우 입체적으로 그려지고 있어 원숙한 신라 성기(盛期)의 미술을 보여주는 걸작품이라 하겠다(경주박물관 소장).

감은사지 석탑사리구[편집]

感恩寺址 石塔舍利具

1959년 12월 감은사지의 서삼층석탑(西三層石塔)을 보수할 때 발견한 장치함(藏置函). 높이 24cm의 금동제 각주형기(角柱形器)로서 바닥에 간단한 다리가 붙고 밑이 평평하고 사각추형(四角錐形)을 이룬 뚜껑을 가졌다. 뚜껑의 표면은 각면마다 양주(陽鑄)된 봉황문이 특수한 접착제로 붙여졌고 뚜껑 둘레에는 연화문과 삼엽화문(三葉花紋)이 장식되고 꼭대기에는 사릉화형(四菱花形) 손잡이가 달렸다. 함의 네군데 외벽에는 각 면마다 사천왕주상(四天王鑄像)이 1구씩 부착되고 그 주위 네 귀퉁이에는 꽃모양과 괴면(鬼面) 손잡이가 달렸다. 이 외함(外函) 속에 든 금동제 사리전(舍利殿)은 가장 정교한 공예품이었으나 파손되어 완형(完形)을 볼 수 없다. 다만 복원도(復原圖)에 의하여 그 구조를 짐작하게 되는데 각종 꽃무늬와 팔부신중주상(八部神衆鑄像)으로 장식한 방형기단 위에 대나무 마디모양(竹節形)의 기둥을 세우고 그 바깥쪽에 난간(欄干)과 앙련(仰連) 울타리 같은 것을 둘러 이중으로 된 천개(天蓋)를 받들게 하였으며 천개에도 각종 장식과 수식(垂飾)을 가하였다. 전당 내부에는 네 귀퉁이에 주악천녀(奏樂天女), 원각좌상(圓刻坐像)을 하나씩 앉히고 가운데에 수정(水晶)으로 된 높이 3.8cm의 사리병을 두었다.

이 감은사의 사리구는 그 세부에 있어서 중국의 6세기경 석굴 조각에 나타나는 보개(寶蓋)나 불전(佛殿)의 모습과 상통하는 점이 있어 그 형식의 유래하는 바를 짐작할 수 있으며 682년이라는 연대가 확실하고 제작기술이 뛰어난 대표적인 신라공예품의 하나라고 하겠다.

※ 舍利(Sarira)는 身骨·遺身·靈骨 등으로 번역되며 보통 석가를 화장하였을 때의 유골을 뜻한다. 이것을 각지의 탑파에 분장하여 불타의 신분이나 상징으로 하였으나 후에는 이것을 극히 미소한 각종 보석 같은 舍利가 남는다고 믿게 되었다.

천부동고분출토 일괄유물[편집]

天府洞古墳出土一括遺物

통일신라시대의 석실고분은 고신라기와는 달리 부장품도 적고 도굴이 용이하여 완분(完墳)으로 나타난 것이 거의 없다. 그런 가운데서 울릉도(鬱陵島)의 천부동고분에서 각종 장신구와 토기등이 출토되고 있는데 이는 통일신라기의 희귀한 공예품의 확실한 예로서 중요하다. 장신구로서는 금동제과대식을 비롯하여 각종 옥류와 동령(銅鈴), 그리고 철도자(鐵刀子) 같은 이기(利器)도 들어 있다. 특수한 형태의 토기도 나오고 있는데 그 종류는 첫째, 그릇 표면에 몇 줄기 가로 금(橫線)이 그어져 있을 뿐 무문(無文)이고 기신(器身)의 평면단면이 말각방형인 방형평저병(方形平底甁)과 둘째, 반신(半身)은 원형이고 반신은 평평한 방원병(方圓甁) 등이다. 이들 토기 중에는 높이가 30cm 가량 되는 것도 있다. 이러한 특수한 형태이 용기들은 본토에서는 볼 수 없는데 선재(船載)할 때에 편리하게 하기 위하여 그렇게 만들었는지도 모르나 울릉도의 특색있는 기형이라고 하겠다.

금동제과대식[편집]

천부동 제1호분(鬱陵島 天府洞 第一號墳)에서 나온 통일신라시대의 확실한 띠(帶) 장식으로 두 편(片)이 있다. 장방형의 장식을 횡위(橫位)로 하고 위 아래에 장식을 달아 연결한 것이며 세부에 있어서의 차이는 있으나 기본적으로 삼국시대의 이배형(耳杯形) 장식에서 출발한 것이다.

충효리고분출토 일괄유물[편집]

忠孝里古墳出土 一括遺物

통일신라시대의 청동기 및 토기 등을 다수 반출한 예로서는 경주 서부의 충효리 석분(石墳) 10기(基)를 들 수 있다. 충효리고분 일괄유물과 천부동 고분 유물을 통해 통일신라시대 토기의 특징을 살피면 태질(胎質)에 있어서는 고신라의 토기와 별로 다름이 없으나 기형이나 토기의 표면처리에서 많은 변화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고신라시대에 성행하던 바닥이 둥근 장경감, 다리가 긴 유개고배(有蓋高杯), 이형토기(異形土器) 등이 없어지고 평저단경협구(平底短頸狹口)의 병, 장경병(長頸甁), 다리가 짧은 무개고배(無蓋高杯), 고대(高臺)가 달린 유개합(有蓋盒) 등 비교적 발전된 형식(形式)이 나타난다. 표면처리에 있어서도 황록 색유(黃綠色釉)가 보이고 고신라시대의 음각 기하학문(陰刻幾何學紋) 대신에 타날압날(打捺押捺)된 각종 꽃무늬가 전신을 덮는 압날문토기이다. 충효리 고분에서 출토한 공예품의 목록을 열거하면 청동기로서 유개청동병이 있고 투박하게 만들어진 굽다리 접시, 인화문장경감, 뼈단지로서 쓰여졌던 유개합(有蓋盒), 각종 병류(甁類) 등을 들 수 있다.

유개청동병[편집]

有蓋靑銅甁

경주 충효리 9호분에서 출토한 신라고분에서 나온 유일한 여사(如斯) 유물이다. 신부(身部)의 높이 13.6cm, 기복(器腹)이 내려앉고 구경과 저경(底經)이 거의 맞먹은 특이한 형으로서 따로 구부(口部) 안에 들어맞도록 만들어진 보주형(寶珠形) 꼭지 달린 뚜껑이 있는데, 이것은 당대(唐代)의 도병(陶甁)을 충실하게 모방한 것이 틀림없으며 혹시 당제(唐製)가 아닌가도 의심이 간다. 병의 내부가 고대(高臺) 안에까지 내려가고 고대의 측선(側線)이 약간 아래로 벌어진 형태는 고식(古式)의 전통을 따른 것이다.

녹유인화문호[편집]

綠釉印花紋壺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광구(廣口), 광족(廣足)의 항아리의 하나. 넓게 벌어지는 당당한 견부(肩部)를 가진 호신에 짧은 수직단경(垂直短頸)과 역시 짧은 권족(圈足)이 달리고 견부에는 네 개의 수면(獸面) 손잡이가 있고 그릇과 뚜껑의 전면에 각종 꽃무늬가 압날(押捺)되어 있다.

토기의 시문[편집]

土器-施紋

통일신라시대 토기의 표면처리에 있어서 초기의 시문은 장삼각형열 및 권점(圈點), 반권점(半圈點) 등의 무늬를 압날(押捺)하다가 점차로 무늬단위를 그릇표면에 반복 압날 또는 타날(打捺)하는 방법을 쓰게 된다. 그러나 화문토기들은 대개 특수한 용기거나 뼈단지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믿어지며 일상 부엌에서 쓰는 주·식구에는 무문(無紋)이 많았다고 생각된다. 사용된 무늬는 '三角形紋, 圈點紋, 지그재그紋, 지그재그列點紋, 雲紋, 각종 團花紋, 菱形紋, 珠紋, 蟬形紋, 포도形紋' 등 다양하며 그중 삼각형문, 권점문을 제외하고는 모두 통일기에 새로 나온 무늬이며 당의 영향을 보인다. 특히 凸렌즈를 세로로 세우고 그 바깥 둘레에 점열(點列)을 두른 특수한 주문(珠紋)은 페르시아 사산미술에 나오는 특수한 무늬인데 6세기 후반경에 중국을 거쳐 들어온 것이 분명하다.

유약[편집]

釉藥 삼국시대의 신라토기에는 녹색(綠色) 계통의 자연유(自然釉)가 때때로 나타났으나 통일기에는 황갈색(黃褐色) 또는 황록색(黃綠色)의 인공유(人工釉)를 쓰기 시작하였다. 이 유약은 한대(漢代) 이래 당삼채(唐三彩)에 이르기까지 널리 사용된 소위 연유(鉛釉)로서 이는 연단(鉛丹=Pb3O4)과 석영(石英)을 3대 1의 비례로 합쳐 사용한 것이며 낮은 열도에서 녹아 녹색 또는 황갈색을 나타낸다. 신라토기로서 유약을 바른 토기가 무유토기보다 질이 연한 이유는 100도 이상의 높은 열도로 소성(燒成) 하지 않은 때문으로 믿어지며 이 기름의 원료가 수입물(輸入物)이기에 가유기(加釉器)는 희귀한 존재가 되어 널리 쓰이지 못했던 것 같다.

와전·무늬전[편집]

瓦塼·紋樣塼

통일신라시대의 와당(瓦當)과 전은 고신라시대에 비해 더욱 복잡 화려하며 조형적인 것이 특색이다. 우선 수막새기와의 형식을 보면 원형(圓形) 이외에 횡타원형, 심엽형(心葉形)에 가까운 것도 있고 무늬는 전반적으로 복잡화한 것이 특색이나 대별하면 연화문계(連花紋系)와 동물문계(動物紋系)로 나뉜다. 암막새기와(唐草瓦)에서는 당초문(唐草紋)이 압도적이며 그외 금수문(禽獸紋)과 비천문(飛天紋)이 있으며 이들 무늬의 기간(基幹)을 흐르는 곡선은 신라성기(盛期)의 특색이라고 하겠다. 한편 조각적으로 우수한 귀면와(鬼面瓦)도 다수 발견된다. 또 사찰(寺刹)의 벽면이나 바닥을 장식하기 위한 무늬전도 많이 만들어졌는데 사천왕사지(四天王寺址)에서 출토한 조각전은 벽전(壁塼)의 대표적인 예이다. 바닥에 까는 방형전(方形塼)은 표면의 중앙에 보상단화(寶相團花)를 두고 네 귀퉁이에는 우화문(隅花紋)을 배치한 다음 측면에서는 당초문을 두른 것이 많으며 장방형이나 삼각형으로 된 것도 볼 수 있다. 여기서의 도안은 너무나 섬세하고 화려하기 때문에 힘이 사라진 느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