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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미술/한국미술의 흐름/통일신라시대의 미술/통일신라의 서예·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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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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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體

고(古) 신라시대의 서(書)는 고구려 백제에 비해서 지방색이 강하고 미발달된 속서체(俗書體)이나,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서면서 중국의 서체를 그대로 받아들여 자획(字劃)이 바르고 규각(圭角)이 있는 안진경·구양순체(顔眞卿·歐陽詢體)가 유행하여 고려시대까지 계속된다. 하동(河東)의 쌍계사 진감선사탑비(雙溪寺 眞鑑禪師塔碑)는 최치원(崔致遠)의 글씨로서 이 체(體)의 좋은 예가 되며, 석순몽(釋諄蒙)이 쓴 제천(提川)의 월광사 원랑선사 대보광선탑비(月光寺圓朗禪師大寶光禪塔碑), 김원이 쓴 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비(寶林寺普照禪師彰聖塔碑)도 전형적인 구양순체이다.

또 당대(唐代)에 유행한 사경체(寫經體)라고 할 수 있는 왕우군(王右軍) 계통의 행서체(行書體)도 유행했는데 화엄사(華嚴寺)의 석경(石經)은 그 좋은 예이며 김생의 글씨도 이 계통의 서체이다. 한편 고신라 이래의 속서체는 종명문(鐘銘文) 같은 곳에 계속하여 사용했는데 선림사 종명(禪林寺鐘銘), 감산사 석불명(甘山寺石佛銘)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김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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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生 (711-791)

통일신라시대의 명필(名筆)이다. 어려서부터 서도에 정진하여 일생을 바쳐 필법을 닦아 예서, 행·초서를 따를 사람이 없었다. 고려의 사신 홍관(洪灌)이 송나라에 갈 때 김생의 글씨를 가져다 보이자 송나라에서는 왕우군(王右軍)에 비할 만한 천하의 명필이라고 격찬했다. 그후부터 중국 사신은 김생의 필적을 보배로 알고 구득하여 갔다 하며 해동서성(海東書聖)으로 불리었다. 진적(眞蹟)으로는 백률사 석당기(柏栗寺石幢記, 경주박물관 소장), 백월서운탑비(白月栖雲塔碑, 경북 영천군 소재), 창림비(昌林碑, 경주 소재)와 1969년에 발견된 금자사경(金字寫經) 등이 남아 있다.

김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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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仁問 (629-694)

신라의 문무왕 때의 장군. 무열왕의 둘째아들이며 문무왕의 친동생으로서 예서(隸書)에 뛰어났던 명필이기도 하다. 백제를 멸망시키는 데에 큰 공헌을 했으며 자는 인수(仁壽), 1931년 12월 경주 서악서원(西嶽書院)의 누문(樓門) 부근 땅속에서 발견된 몹시 풍화되고 손상이 간 비석의 명문이 김인문의 진적(眞蹟)으로 추측되고 있다.

요극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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姚克一 (생몰연대 미상)

신라의 명필. 고려 사람이라고도 하나 연대가 불확실하다. <삼국사기> 김생전(金生傳)에 그에 관한 기록이 있다. 벼슬이 시중 겸 시서학사(侍書學士)에 이르렀다 하며 서체는 구양순(歐陽詢)에게 따랐으며 김생에게는 미치지 못해도 뛰어난 품격(品格)이었다고 한다. 서거정(徐居正)의 <필원잡기(筆怨雜記)>에는 우리 동방의 필법은 김생이 제일이고 요극일과 중 탄연(坦然)·영업(靈業)이 그 다음이며 모두 왕우군(王右軍)의 법, 또는 구양공의 법을 본받았다 했고, <지봉유설(芝峰類說)>에는 동방서가(東方書家)의 이름 중에 고려의 사람 요극일이라고 밝혀 있다. <삼국사기>에 삼랑사비(三郞寺碑)는 그가 쓴 것이라 했으며 대안사(大安寺)의 적인선사(寂忍禪師) 비문에 '中舍人臣克一奉敎書'라는 기록이 있다.

원화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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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和帖

신라 성덕왕 때의 명필인 김생의 글씨를 모은 책이다.

김충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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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忠義

신라 선덕왕(宣德王) 때의 화가.

정화·홍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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靖和·弘繼

두 사람 모두 신라 경명왕 때의 중으로서 당대 불화(佛畵)의 쌍벽을 이루었다. 920년경에 함께 흥륜사(興輪寺)의 남문과 행랑을 중건하고 보현보살(普賢菩薩)의 상을 그렸는데 이 그림은 신라의 명화로서 오래 전해졌다고 한다.